글 수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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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가족이라곤 해 줬잖아.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자신을 다독이며 다시 또 며칠이 흐른 어느 밤.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방에서 노트북을 펼친 채 원고 쓰기에 열중하고 있던 시연은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입구 방의 불이 켜져 있는 걸 발견했다. 어느새 동하가 돌아와 있었던 모양이었다.

과일을 씻어 쟁반에 받쳐들고 ‘가족’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동하가 몸을 틀어 돌아봤다.

“배 먹을래?”

“아, 예.”

동하는 영어 참고서를 보고 있었다. 언뜻 들여다보니 시연도 한때 열심히 봤던 전설의 문법책『성문 종합 영어』다. 세상에, 나온 지 벌써 몇십 년인데 아직도 이걸 본담. 그러고 보니 옆에 놓여져 있는 책은『기본 수학의 정석』. 아아, 그리워.

“그러고 보니 말인데…….”

시연은 갑자기 생각난 걸 말했다.

“과외나 학원 같은 거 안 다녀도 되니?”

“다니고 있잖아요.”

“어, 그랬어?”

“방학이라서 아침에 단과 학원 다니고 있었잖아요. 모르셨어요?”

그래, 그렇구나. 언제나 혼자서 한다, 이거구나. 혼자서도 다 알아서 하고 있었어. 그래도……, 뭔가 해 줄 수 있는 게 더 없을까?

“그거 가지고 돼?”

“충분해요.”

동하는 자르듯 시원하게 대답했다. 더 이상 물어볼 여지를 주지 않는 대답. 본전도 못 찾은 시연은 머쓱해서 화제를 돌렸다.

“국영수 중에 뭐가 젤 좋아?”

“다 그저 그렇지만 굳이 고르라면……, 수학이요. 국어가 제일 까다롭고. 고등학교 다닐 때 국어 잘했었죠?”

“응, 그냥 봐 줄 만한 정도. 그래두 수학보단 훨 나았지. 졸업하고 사회 나와서 수학 써먹을 일이 없으니 정말 다행이야.”

“영어는요?”

“학교 다닐 땐 그럭저럭 했는데 지금은 여엉……. 사실 영어 콤플렉스가 좀 있어. 회화는 젬병이거든. 대학교 때 애들이 방학 동안이나, 아니면 학기 중에 휴학계까지 내면서 어학 연수 갈 때마다 얼마나 부러웠던지.”

“미국 가고 싶었어요?”

“응, 어학당에 다니긴 했는데 영 시원찮았거든. 게다가 한 번도 못 가 봤으니 미국에 대한 환상도 좀 있었고. 하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렇지만 어떻게 가. 가고 싶다고 다 갈 수 있음 좋게? 그냥 꿈만 꾸는 거지, 뭐.”

시연이 방금 깎은 배에 포크를 꽂아 그에게 건넸다. 배 조각을 베어 물면서 동하는 두 글자의 단어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동안 밀쳐 두고 있던 생각을.

미. 국.

미국……. 그곳은 그녀와는 다른 의미에서 자신에게도 환상의 공간이었다. 당장이라도 가 보고 싶은 곳. 너무나도 보고 싶은 누군가가 거기 있다는 사실 때문일까?

“나 갈게. 이거 두고 갈 테니까 마저 먹어. 너무 무리하진 말구, 알았지?”

“예, 주무세요.”

그녀가 막 방을 나갔을 때였다.

“……어?”

갑자기 마루 불이 꺼졌다. 방금 닫고 나온 방문이 덜컹, 하고 다시 열린다. 컴컴해서 하나도 보이지는 않지만 동하가 나온 모양이다.

“거기도 꺼졌어요?”

“응, 거기도?”

“예, 정전인가 본데요. 저 앞쪽에 보이는 아파트들도 다 캄캄하잖아요.”

동하가 베란다 창 너머로 어슴푸레하게 비치는 맞은편 건물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차피 밤이니까 상관없잖아요. 잘 거 아니었어요?”

“응, 어. 근데…….”

시연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어둠 속이라 자신이 상대를 볼 수 없는 것처럼 상대도 자신을 볼 수 없을 테지만.

“이렇게 캄캄하니까 잠이 외려 깨 버렸어. 청개구리 잠인가 봐.”

“…….”

어둠 속에서 동하가 웃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전혀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텔레비전이나 보다 잘까?”

“정전이잖아요, 텔레비전을 어떻게 봐요?”

“아, 그렇지!”

그러다가 갑자기 시연이 헉, 하고 입을 가렸다.

“어떡해! 악, 어떡해!”

“왜요, 왜 그래요?”

“아까 원고 저장을 안 시켰어!”

“자동 저장 설정 안 해 놨어요?”

“그게, 그게, 이상하게 안 되더라고! 내 노트북, 엄청 구닥다리란 말이야아……. 어떡해, 머리를 쥐어짜며 썼는데. 아아아……, 어떡해!”

동하는 이번에야말로 크게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언제나 조용조용 말하는 편인 시연이 이렇게 괴로움에 절규하는 건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타인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인 건 아니지만 솔직히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은 절대로 할 수 없다. 혹시라도 잘못 말을 꺼냈다가는 바로 얻어맞을 분위기인걸.

“자, 자……. 진정해요.”

심지어 마룻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버린 그녀를 어둠 속을 더듬어 겨우겨우 일으켜서는 소파 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가 서랍을 뒤적인다. 찾아낸 건 라이터와 장식 하나 없는 흰 양초. 가끔 방문이 뻑뻑해질 때 칠하던 것이었다.

“……?”

소파에 앉아 절망하고 있던 시연은 조금이지만 갑자기 밝아진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 헉, 하고 놀라서 숨을 삼킨 그녀는 앞에 서 있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뭐……, 뭐 하는 거야?”

“어, 안 무서워요?”

불붙인 양초를 턱 밑에 들이댄 동하가 물어 왔다. 불빛이 얼굴에 괴기스런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동요 없는 그녀를 보더니 ‘전에 보니까 공포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길래…….’ 실망한 듯 중얼대며 손을 내린다. 시연이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포는 무슨……, 불날까 봐 무섭다. 근데 뭐야, 그거?”

“손전등이 집에 없잖아요. 아쉬운 대로.”

양초를 든 동하가 시연 옆으로 다가온다. 탁자 위에 양초를 세워 둔 받침을 조심스럽게 올려 두고는 자신도 그녀 옆에 몸을 내렸다.

“사실은 말이야…….”

앉자마자 들려온 말에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봤다. 흔들리는 양초의 불빛이 아련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는 여자의 얼굴. 조용히 타 들어가는 초를 응시하는 눈언저리가 아주 살짝 가늘어져 있었다.

“나 혼자였으면……, 좀 무서웠을 거야.”

“…….”

동하는 시연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어 양초 쪽으로 옮겼다. 이런 그녀가 좋았다. 뭔가 해 주고 싶어서 노심초사하는 그녀보다, 순간이지만 이런 식으로나마 기댈 것처럼 행동하는 그녀가 좋았다. 눈치를 보는 그녀보다, 자신을 보며 장난치듯 맑게 웃는 그녀가 좋았다. 그게 훨씬 어울리는 거……, 알아요?

“이젠 무서울 일 없어요.”

시연은 동하를 봤다. 아까까지 자신이 보고 있던 양초, 아니, 양초의 불빛을 응시하는 동하의 눈동자가 투명하다.

“무서울 일 없게 할 테니까…….”

몸이 움찔, 하고 떨렸다. 마루가 추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둠이 동요하고 있는 자신을 가려 주길 바랐다. 가슴이 고동친다. 언젠가, 몇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숨이 멎을 것 같은 당혹함이 밀려온다. 막을 수 없는 파도처럼 밀려와 자신을 덮어 내린다.

밤.
침묵.
정적.
연약하게 타오르는 작은 불빛.

그리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공간을 채워 가는 어떤 것.

이건 뭘까? 스스로도 외면하고 있던 감정. 조금은 알 수 있을 것도 같은 기분이 순간 들었지만,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감정이야. 이시연! 너 이렇게까지 경박한 애였니? 이렇게까지 한심한 애였어? 열 살이나 어린 남편의 아들에게, 너 설마 기대고 싶은 거야? 의지하고 싶어하는 거야? 자신이 돌보겠다고 결심한 상대에게? 지금 숨을 토해 내면 바로 들킬 것만 같아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바로 그때.

펑……!

고개를 들었다.

“뭐지?”

“폭죽 터뜨리는 소리 같은데요.”

동하가 몸을 일으키며 대꾸한다. 베란다 창 쪽으로 가는 동하를 따라 움직이는데 다시 한 번 펑! 소리가 나며 저쪽, 까만 하늘에서 불꽃이 퍼지는 게 보였다.

노랑, 파랑, 초록, 빨강, 보라.

펑……!

어디선가 이 추운 밤중에 불꽃을 쏘아 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누가 하는 건지, 무슨 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예쁘다.”

시연은 창에 붙어선 채 무심코 중얼거렸다.

‘예쁘다.’

그렇게 느끼는 자신에게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이제껏 한번도 저런 걸 특별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까만 하늘 저편에 퍼져 가는 불꽃은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어째서일까?
내 안의 무언가가 조금씩 변해 가고 있는 것일까?

“자지 않길 잘했어.”

그렇게 말하면서 옆에 서 있는 동하에게 고개를 돌리던 시연의 몸이 굳어졌다.

시선.

펑……!

동하의 시선은 불꽃을 향해 있지 않았다. 동하는 시연을 보고 있었다. 뚫어지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간신히 다독였던 심장이 다시금 고동치기 시작했다. ‘왜?’ 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물었다 해도 상대가 답할 수 있는 말은 없었을 테지만. 그럴 정신이 있었다면 진작에 시선을 피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상대로부터 눈을 돌릴 수가 없다.

어째서……. 어째서?

느릿하게 손이 올라간다.

동하의 머릿속에 이미 생각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놀라 자신을 보고 있는 얼굴. 어둠에 반쯤 가려 있지만 당혹함에 어쩔 줄 모르는 얼굴. 맑은 눈, 보드라워 보이는 뺨. 그 뺨에 손을 대 보고 싶었다.

만지고 나면, 그 다음은? 그 다음을 감당할 수 있어? 없었던 일로 돌릴 수 있어? 그럴 수 없다는 거, 괴로울 정도로 알고 있는데.

모르겠어.

다 잊었다.

막을 수가 없다.

만지고 싶다……. 만지고 싶다……. 만지고 싶어……!

동하의 손이 시연의 얼굴로 막 뻗어 나가려던 순간.

펑……!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지막 불꽃이 터졌고, 그 소리가 사그라지는 것과 함께 어둠은 환한 빛의 공간으로 변했다. 그리고…….
마법에 걸린 것처럼 정지해 있던 시공간도 현실로 되돌아왔다.

동하의 손이 힘없이 내려가는 것과 동시, 시연의 몸도 그 자리를 벗어나 양초를 올려 둔 탁자 앞으로 돌아섰다. 갑자기 들어온 형광등 불빛을 받은 시야가 괴로움을 호소해 와, 시린 눈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두 눈을 두어 번 깜박인다. 그녀가 훅, 하고 불을 불어 끄는 게 보였다. 몸을 돌리지 않고 말하는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어딘가 다른 곳에 정신을 보낸 것처럼 미약한 음성.

“이젠 자야지.”

그렇지만 말하면서 돌아봤을 때는 이미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의 시연이었다. 그 잠시 동안의 일이 마치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지금의 그녀는 평소 이상으로 침착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

동하가 대답했다. 그녀만큼이나 자신의 얼굴도 담담할 것이다. 아니, 담담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순간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는걸. 방금 전의 순간, 그 순간의 감정은 꿈이었던 거야. 환각이었던 거야. 자고 나면 바로 잊혀질, 그런…….

몸을 돌렸다.

“잘 자.”

“안녕히 주무세요.”

불이 꺼지고, 불과 몇십 초에 지나지 않을 짧은 마법의 시간은 끝이 났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고 재생 가능한 마법이란 사실을 두 사람은 모르고 있었다.

(중략)







서후(tj)님과 더불어 정크의 이미지를 불륜작가로 굳히게 만든 일작(;)입니다.

당시 써 보려던 것에는 서후님이 쓰신 것과 같은 소재도 있었어요. 하지만 금지애를 쓰는 동안 지친 나머지, 이제는 불륜의 소지가 조금이라도 있는 글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마 금지애의 동하와 연석은 다른 글에서도 또 한번 등장하게 될 겁니다. 금지애를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동하는 자동차 디자이너의 길을 가게 되고 연석은 법대에 진학하게 됩니다.

두사람이 성인이 되고 나서의 모습을 다른 소설의 조연이라는 형태로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은 이 '다른 소설' 쪽에 훨씬 저는 애착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만. 실은 지금 쓰고 있답니다;



금지애는 2000년에서 2002년에 걸쳐 천리안 천일야화에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6)

댓글 '1'

최우석

2009.02.10 16:33:52

학교 도서관에서 인생미학을 이라는 책을 읽고..
정이원 작가분에 책이 마음에 들어서 설원의여인과 금지애 책을사서 읽고 있는데 .. 점점 작가분에 대해서 알고싶어서 .. 찾다가 인생미학이라는책을 다시 빌려보다가 드디어 찾아냈군요...! 이사이트를!! 앞으로도 꾸준히 정이원 작가분에 책을 사서 읽을꺼에요!! 너무 좋아서요!!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써주세요!   [04][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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