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뚝배기 안에서 아직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 찌개에 수저를 넣어 하나 가득 떠 올리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말을 꺼내었다.

"느이 외삼촌한테 아까 전화가 왔는데, 괜찮은 아가씨가 있다고 ..."

처음 시작과는 달리 점점 말 끝에 힘이 없어지더니, 중간에 끊기고 만다.

"한번 만나보면 어떻겠냐 셔."

결심했다는 듯 서둘러 말을 끝내어 버리고, 시선을 피해 애꿎은 밥 공기를 노려 보고 있는 어머니가 안 되었다는 생각은 들지만,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다. 한번 만나 보는 것쯤이야 별 일이 아닐 테지만, 계속해서 보여지는 은근한 기대감에 대응하는 것은 무척이나 피곤할 것이다.

"안 해요."

단호하게 대답하는 나를 보며, 어머니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이지만, 그대로 침묵한 채 단념한다. 차마 입 밖에 내지 못 한 그 말이 무엇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고, 어머니 역시 말을 꺼내 봐야 본전도 찾지 못 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평소에도 즐거운 대화가 오고 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지만.



방으로 들어와 창을 열고, 담배를 한 개피 꺼내어 물었다. 성윤은 담배를 피웠다. 처음 사랑을 고백한 날, 그녀는 엉뚱하게도 ‘사실 나 담배 피우는데 괜찮아?’ 하고 물었었다. 줄곧 같이 지낼 텐데 숨기는 거 힘들 것 같아서, 라며. 얼떨결에 상관 없다고 대답은 했지만, 사실 그녀가 담배를 피우는 건 못 마땅했다. 안 그래도 눈길을 끄는 인상인데 입술 사이로 연기까지 흩날리며 주변의 시선을 모으는 게 싫었다. 약속한 게 있어 잠자코 참고 있으면 그녀, 종종 내게 말했었다. 미안해, 라고. 도도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사과를 무척 잘하는 사람이었다. 불리할 때 마다 자동적으로 튀어 나오는 미안해, 그 한 마디에 내 마음은 햇살을 맞는 하얀 눈처럼 녹아 내렸다. 단단히 반해있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성윤이 죽고, 벌써 6년. 처음 2년이 힘들었고, 그 후로는 그저 살만은 하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그 시절 나는 끊임없이 몸을 혹사 시키며 가능한 한 생각을 스톱 시키려 필사적이었다. 동료들과 야근을 바꾸어 주고, 이른 새벽 그녀의 꿈을 꾼 후 돌아 버릴 정도로 괴로워질 때면 몇 시인지 상관 않고 그대로 병원까지 뛰어 이른 출근을 했다. 그래도 머리 속을 뚫고 올라오는 상념이 생기면 단식을 했고, 병원 침대에서 깨어나기를 몇 번. 그러는 동안 시간은 착실하게 흘렀고 절대로 흐려지지 않을 줄 알았던 무수한 상념들이 아주 조금씩 흐릿해져, 지금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녀를 추억하며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다만 원래도 그다지 많지 않았던 말 수가 더욱 적어져 과묵하단 소릴 적잖이 듣게 되었고, 그녀를 대신하여 담배를 입술에 물게 되었으며, 또, 많이 예민해졌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비에서 그녀의 흔적을 찾거나, 내 주변만을 빙글빙글 배회하는 작은 곤충이 혹시 그녀인 것은 아닐까, 남 보기에 터무니 없을 상상을 진지하게 하는 일이 종종 생기는 것이다. 물론 이런 건 누구에게도 말 하지 않는다. 바보처럼 보이는 것도, 불쌍하게 여겨지는 것도 싫다.

*            *             *

요즘 통 술을 마시지 않아 그런가. 별로 마시지도 않았는데 심한 감기에 걸린 것처럼 의식이 조금 몽롱하다. 지나가는 사람들, 반짝 거리는 간판들이 멀게 느껴지며, 나 자신, 세상과 격리되어 홀로 버려진 느낌이 든다. 곤란하다. 이런 식으로 감상적이 되면 곤란해진다. 이럴 때면 막무가내로 성윤이 보고 싶어진다. 성윤이 그리워진다,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무작정 전화기를 꺼내어, 성윤이 살던 집의 전화 번호를 눌렀다. 쓸데 없는 짓이라는 것은 이미 의식하고는 있지만 이것 외에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



또렷이 기억 한다, 그 날을. 한번 밖에 뵌 적이 없는 성윤의 큰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걸려와서 내심 굉장히 당황했었다.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생긴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설마 사망 소식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 했다. 마감 시간이 훨씬 지나 한가해진 토요일, 의국의 전화를 붙잡고 멍하게 선 채로 내게 전해진 충격적인 소식을 몇 번이고 되뇌며 그 의미를 떠올렸다. 잠이 부족한 머리가 말의 뜻을 잘못 이해했길. 병원 정문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대전의 K병원까지 가는 2시간 30분 동안의 그 끔찍했던 시간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하리라.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영안실로 옮겨진 후였다. 즉사였다. 평소 그렇게 화려하게 치장하길 즐겨 했던 그녀인지라, 망가진 육체가 더욱 가슴 아팠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평생을 평범한 전업주부로 살던 어머니가 빌딩 청소며 파출부를 나가게 되셨을 때도 나는 그 정도로 비참하진 않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열심히 살아서,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며 이를 악물고 투지를 불태웠다. 그랬는데, 성윤과 성윤의 가족, 두 달만 있으면, 나의 가족이 되었을 사람들의 시신을 앞에 두고 나는 완전히 절망했다. 어디에서도 희망은 찾을 수가 없었다. 끝이다, 라고 그렇게. 침착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유일한 끈은 의자에 앉아 넋을 잃고 눈물을 흘리는 지윤이었다. 나는 연인을 잃었을 뿐이지만, 지윤인 한꺼번에 아버지, 어머니, 언니 둘과 오빠를 잃었다. 어떻게 든 지켜 주어야 한다, 라는 사명감. 지윤이 호주로 떠나 버리자, 사명감마저 잃은 나는 몸을 혹사 시키기 시작했다.



전화기 너머로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 전혀 생소한 목소리임에도 어리석은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성윤이네 집입니까?' 불필요한 질문을 묻는다. '아닌데요.' 그 당연한 답변에 뜨거운 눈물이 차가운 뺨을 타고 흐른다. 12시가 조금 못 된 밤, 큰 길에서 눈물을 쏟고 있는 젊은 남자 (아니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은지도 모른다)에게 스쳐 지나치는 사람들이 노골적인 시선을 던진다.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배경에 불과할 뿐이다. 이 넓은 지구 어느 한 구석에도 성윤이 있을 곳은 없다. 성윤은 사라졌다. 한 톨도 남김없이, 완전히. 뼛속까지 스미는 외로움. 신은 없다, 반드시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작별의 시간 마저 허락치 않을 정도로 잘못하며 산 일은 없다.


   *            *               *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병원에서 십 분 거리에 있는 스타벅스에 자주 들른다. 성윤은 스타벅스의 프라푸치노가 마시고 싶다고, 종종 이야기 했었다. 그때는 우리나라에 스타벅스가 입점을 하기 전이었고, 나는 프라푸치노가 어떤 건지 알지 못했다. 병원 근처 지하철 역 앞으로 스타벅스가 처음 입점을 했을 때 나는 약간은 서글픈 심정으로 스타벅스의 유리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곧장 메뉴판 위에서 프라푸치노를 찾아 헤맸다. 벅찰 정도로 다양한 프라푸치노에 당황했지만, 성윤이가 말한 게 어떤 걸까, 곰곰이 추측하며, 결국 화이트 초콜릿 모카 프라푸치노를 주문했다. 커피를 좋아했으니까, 커피가 들지 않은 프라푸치노를 제외하고 남은 네 가지 중 어쩐지 써 보이는 검정 톤의 커피, 모카, 에스프레소 프라푸치노를 또 다시 추려낸 후 남은 두 가지 중 좀 더 밀키하게 느껴지는 화이트 초콜릿 모카 프라푸치노를 선택했다. 그것은 내게 지나치게 강렬하고 달았지만, 황홀했다. 성윤이 원했던 프라푸치노를 나의 혀 끝으로 음미하고, 몸 안으로 흡수 시키며 나의 일부로 만든다. 어느덧 하루의 일과처럼 된 스타벅스, 프라푸치노. 성윤이 말한 것이 어느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나는 커피가 들은 다섯 가지의 프라푸치노를 번갈아 주문하여 마신다.



퇴근이 빠른 토요일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빠짐 없이 역 앞의 스타벅스에 들른다. 나는 자동차가 없다. 집까지는 전철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굳이 차를 사야 할 이유가 없다. 나는 직장 이외에 가야 할 곳이 많은 사람은 아니므로. 오늘은 에스프레소 프라푸치노를 마실 차례다. 에스프레소 프라푸치노가 받쳐진 쟁반을 들고, 줄곧 앉는 구석 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확인한 후 걸음을 옮겼다. 자리에 앉자마자 곧장 에스프레소 프라푸치노의 맛을 깊이 음미한다. 아니, 음미하려는 건 맛이 아니다. 눈을 조금 가늘게 뜬 채 그녀는 어떤 표정을 하고 이걸 마셨을까, 구체적으로 상상해 본다. 씨애틀의 스타벅스라고 했다. 나는 씨애틀에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다. 혼자 계신 어머니를 두고 혼자서 외국으로 여행을 가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모시고 성윤을 추억하는 것은 더더욱 내키지 않는다.  



혼잡할 정도는 아니지만, 꽤 잦은 빈도로 열리고 닫히는 유리 문을 무심히 바라보며 프라푸치노를 한 모금 머금는데, 충격과도 같은 실루엣이 눈에 들어온다. 입에 아직 머물러 있는 액체를 그대로 내뿜어 버릴 뻔했다. 가까스로 머금고 있던 프라푸치노를 삼키어 넘기고는 계산대로 다가오는 여자의 모습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지윤이! 말도 안돼. 그러나 지윤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모습이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계산대 쪽으로 다가갔다.

"지윤아!"

어깨를 붙들자 돌아 보는 눈초리가 낯익다. 역시 지윤이다. 지윤이가 맞다. 심장이 부들부들 격하게 떨린다.

"오빠!"

울 것 같은 표정이다.

"웬일이야, 너무 오랜만이다."

손을 내밀어 온다. 많이 걱정했는데, 혼자서 어떻게 지내는지 많이 궁금했는데, 다행히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다만 낯설은 기분이 들 정도로 어른스러워 보인다. 생각해 보면 그때의 성윤보다 세 살이나 많다. 지윤이가, 벌써.

"어떻게 지냈어. 연락도 안 하고."

"미안해, 오빠. 걱정 많이 했지?"

"누구셔?"

목소리가 난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동행인인 듯한 사람이 서 있다. 단정하게 생긴, 학생처럼 보이는 남자. 남자의 질문에 지윤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고르며 멈칫한다.

"아, 친한 오빠. 어떻게 하지. 재준아, 미안하지만, 너 먼저 집에 들어 갈래? 오빠랑 할 얘기가 좀 있어서."

지윤의 말에 재준으로 불린 동행은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따지듯 묻는다.

"왜? 내가 있으면 안돼?"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지윤이의 둘째 언니 약혼자였던 이주형입니다.
지윤이한테는 친오빠나 마찬가지예요."

곤란한 표정을 하고 서있는 지윤을 대신해 스스로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윤이 누나 남자 친구, 류재준입니다."

많이 어려 보이는데 남자 친구라니, 내심 놀랐다. 남자 친구가 있었구나. 지윤이 걱정과는 다르게 잘 지내고 있었다는 안도감 속에 아주 슬쩍 배는 쓸쓸함.

"오빠, 잠깐만. 이거 좀 자리에 놓아 줘."

커피 잔이 두개 놓여진 쟁반을 내게 건네더니, 지윤이 재준의 팔을 잡고 밖으로 나간다. 유리 벽 너머로 굳은 표정의 재준을 향해 무언가를 말하며 사정을 하고 있는 듯한 지윤의 모습이 보인다. 본의 아니게 데이트를 방해한 모양이지만 미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눈동자에 힘이 하나도 없었는데, 6년 만에 본 지윤은 생기가 돈다. 그 모습에 깊이 안도하는 동시에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멈춰 서 있는 건 나 뿐이라는 사실이 나를 조금 고독하게 만든다.



유리문이 열리고, 지윤이 들어온다.  슬며시 거북한 심정이 된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이네."

머쓱한 말이다.

"응. 그렇지, 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지윤이 테이블 위에 놓인 머그잔을 든다.

"오빠,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야?"

오히려 내 쪽에서 묻고 싶은 말이다.

"병원이 근처야. 성수대교 사거리 쪽으로 쭈욱 올라가다 보면 오른 쪽으로 바로 보여."

"개업 했어?"

"아니, 페이 닥터."

대화가 끊기자 어색한 적막이 찾아 온다. 무슨 말을 꺼낼까 열심히 궁리하고 있는데 지윤이 커피를 한 모금 삼키고는 불쑥 말을 꺼낸다.

"아까 걔, 재준이. 걔도 의대생이야."

"그래? 어느 학교인데?"

"오빠 후배는 아니야. C대."

한 숨을 내 쉬듯 자조적인 웃음을 웃더니 덧없는 말을 한다.

"그러고 보면 성윤 언니도 그렇고, 우리 자매들이 의사랑 인연이 많네."

지윤의 입에서 나온 성윤이라는 이름에 마음이 술렁인다. 겨우 이런 정도로 이렇다니, 기가 막히는군. 지윤이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테이블 위에 머그잔을 내려 놓는다. 나는 스트로우를 들어 절반쯤 남은 프라푸치노를 의미 없이 휘젓는다.

"저기 그거,"

지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게 후라푸치노라는 것을 알고는 일순 당황했다. 스트로우를 들고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지윤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며 조금 긴장하고 있다.

"좀 뜬금 없다. 추워 죽겠는데, 웬 얼음이야."

긴정하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성윤과 전혀 관계 없는 말에 허탈한 기분이 든다.

"이한치한이란 말은 없나?"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계속해서 머뭇거리던 화제를 꺼내어 본다.

"산소는 가 보니?"

지윤의 표정에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오빠는 자주 가?"

"가끔."

다시 말이 끊긴다. 스토로우를 다시 집어 또 다시 프라푸치노를 휘젓는다. 화제를 바꾸는 게 낫겠다 싶어 좀 전의 남자 친구에 대해 물어 보려고 고개를 드는데 지윤의 눈이 내 쪽을 향해 있다. 어쩐 일인지 무척 걱정스러운 눈빛이다.

"오빠. 그러지 마."

뭘, 이라고 굳이 묻지 않아도 전달되는 지윤의 마음, 아마도 염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좋은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 적당히 농담을 하며 장난스럽게 넘겨버리는 것은 나로서는 흉내 조차 낼 수 없는 일이다.

"가끔 상상했었어. 오빠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하고.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당연히 다른 사람 만나서 결혼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 하면 굉장히 슬퍼지고 서운하고 그랬었는데, 막상 오빠 이러고 있는 거 보니까, 마음이 굉장히 안 좋다. 오빠가 혼자 지내고 있으면 굉장히 고마울 것 같았는데, 전혀 아니야."

첫눈에 이런 말을 들을 만큼 그렇게 지독한 몰골을 하고 다녔던 건가, 싶어 난감하다. 이만하면, 나아졌다, 라고 생각해 왔던 자신감에 상처다. 그렇지만 새삼스레 나아질 건 또 뭐란 말인가. 적당히 살만큼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잘 살려고 아둥바둥 하느라 지치고 싶지도 않고, 그럴 의욕도 없다.

"결혼하지 않은 건 맞지만,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야. 내 동기들 중에서도 아직 결혼 안 한 녀석들 꽤 있어. 너한테 이런 말을 다 듣고, 다행이라고 안심을 해야 되는 건가. 아무튼 놀랍다."

"나야말로 여기서 이렇게 오빠를 만나고 같이 커피를 마시게 되다니, 진짜 놀랐어. 상상도 못 했다니까. 어째 여기가 오고 싶더라니. 백화점에 들렀다가 일부러 커피 마신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웃기지? 오빠는 여기 자주 와?"

"응. 퇴근 길에 자주 들러. 토요일은 거의 안 빠지고 와."

그랬구나, 하며 지윤이 고개를 몇 번씩이나 끄덕인다.

"오빠, 우리 나가자. 오빠네 집 근처에 아직도 그 튀김 집 있어?"

지윤이 표정이 어느새 예전으로 되돌아 가있다. 개구쟁이처럼, 소녀 같은.

"있어. 가자."

역 앞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노점 중 한 곳을 성윤이 좋아해서 지윤과 같이 간 적도 여러 번 된다. 가난한 주머니를 배려해 주는 건 아닌가, 내심 전전긍긍 했던 나의 얄팍한 자격지심을 한 순간에 날려 버릴 정도로 맛있게도 먹었다.



스타벅스를 나와 역 앞에서 택시를 잡으려는 나를 지윤이 만류한다.

"차 막히는데, 지하철 타자. 토요일이라 엄청 밀릴 거야. 벌써 저기 늘어선 것 좀 봐."

지금 이 시간엔 지하철이 한참 붐빌 때다. 그런 수라장에 지윤일 밀어 넣고 싶지 않다.

"아무리 막힌다 해도 오늘 안으로는 도착하겠지."

지겹도록 막히는 도로를 어떻게 든 헤집고 나와 드디어 총신대 역 앞 T 쇼핑몰의 간판이 보인다.

"와, 저기 보인다."

손가락으로 포장마차를 한 군데를 가리키며 지윤이 들뜬 표정을 짓는다. 그것을 보고 있으려니 절로 흐뭇한 심정이 된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찬 공기가 맨 살을 드러낸 곳을 골라가며 공격한다.

"춥지 않아?"

"아니, 상쾌한데?"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지윤이 대답한다.

"이렇게 혼잡한 공기가 상쾌하다고? 비위도 좋다."

"나 원래 비위 좋잖아."

대답하는 지윤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자꾸만 과거를 떠오르게 만든다. 한 사람, 여기서 꼭 한 사람만 더 있으면. 부질없는 소망을 생각하는 것 따윈 그만 두라고, 스스로를 다그친다. 지긋지긋하다고.

가판대 위에 즐비하게 쌓여있는 튀김 더미 위에서 한 개를 집게로 집어, 한 입 베어 무는 지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멋대로 휘저어질 것이 두려워 머리 속에 떠올리기 조차 거부했던 추억 한 조각. 마치 반쪽이 잘려나간 사진 같다. 옆에 서서, 오빠도 하나 먹어 봐, 라며 귀찮게 굴었던 성윤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도로 없애 버리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오빠도 하나 먹어 봐."

거짓말처럼 그대로 성윤의 대사를 재현해내는 지윤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지윤은 성윤이 아니고, 그 대신이 될 수도, 가능성도 없다.

"오랜만에 먹었더니 더 맛있는 것 같다."

말하는 지윤의 표정이 쓸쓸해 보인다. 묻지 않아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아마도, 나와 같은 생각.

"오빠, 요번 크리스마스에 뭐 해?"

크리스마스 계획. 잊은 지 오래다. 잠자코 있자,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지윤이 재차 묻는다.

"우리 그날 같이 산소 갈까? 파티하자. 우리끼리. 응?"

대체 무덤에서 무슨 파티를.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그러나,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고 싶은 기분이 든다. 성윤, 그리고 시끄럽고 사람 좋았던 그녀 가족들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걸 믿고 싶다. 함께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절실해진다.

"그래."

결국은 바보 같은 장단을 맞춘다. 어처구니 없게도 입 가에 미소가 생기는 것 같다. 오랜만에, 정말로 오랜만에. 거리를 메우고 있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이제서야 들려오기 시작한다. 경쟁이라도 하듯 강렬하게 작렬하는 꼬마 전구의 불빛이 눈으로 들어온다. 크리스마스. 분주하게 오고 가는 사람들의 행렬에 끼어, 오랫동안 있고 있었던 감정을 기억해 낸다. 뭔가를 기대하며 설레는 들뜬 기분. 정말이지 너무 오랜만에.

*         *         *

선산에 있는 작은 밭뙈기에서 농사를 지어 먹으며 선산 관리를 맡아 해주고 있는 김 씨 아저씨가 보인다. 겨울인데도 밭에 쪼그리고 앉아, 뭔가 일을 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아이구, 오셨습니까?"

서둘러 허리를 펴며, 쭈글쭈글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푸근한 웃음이다. 입에 발린 성탄 인사를 건넬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소박하고, 토속적인 풍경. 다시금 밭 일에 몰두하기 시작하는 아저씨를 뒤에 남긴 채 지윤과 어깨를 맞대고, 말없이 눈길 위를 걷는다. 어제 내린 눈이 아직 채 녹지 않았다. 추위로 얼어 붙은 하얀 표면은 밟으면, 부수어지는 소리를 낸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차분한 날씨다. 옆에서 걷고 있는 지윤을 바라보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여기구나. 그땐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살펴 보지도 못했어."

하얀 눈이 동그랗게 쌓여있는 산소에 도착하자, 지윤이 덤덤한 어조로 차분하게 말을 한다.
신발로 대충 잔디 위에 쌓인 눈을 처리한 후 갖고 온 돗자리를 곱게 펴고, 그 위에서 지윤과 나란히 절을 올렸다.
왔습니다, 진심을 담아.
허리를 펴며 천천히 일어서는 지윤의 뺨에 눈물이 흐른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 뿐이다.

"정말 바보같다. 이게 뭐야. 설날도 아닌데, 웬 절?"

뺨에 흐른 눈물을 쓱쓱 닦더니 입술을 크게 움직이며 내 쪽을 향해 웃음을 지어 보인다.

"됐어. 이제부터 즐기자."

끝없이 추락하려는 마음을 억지로 붙들어 세우는 모습에 가슴 한 켠이 시큰하다. 들고 온 커다란 가방에서 와인과 치즈포, 그리고 직접 싸 온 찬합들을 박력 있게 꺼내어 돗자리 위로 하나씩 늘어 놓는 지윤의 모습을 바라보다 가방 앞 주머니에서 오프너를 꺼내어 와인 뚜껑을 열었다. 지윤이 건네 준 종이컵 두개에 와인을 따라 한 개씩 나누어 들고는 건배를 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싸늘한 공기로 울려 퍼지는 공허한 외침. 입 안 가득 퍼지는 포도 향이 시큼하다. 이게 어째서 좋은 와인인지 그다지 동의할 수 없는 맛이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화제로 올리지는 않는다. 와인의 맛을 이야기 할 정도로 잘 알지도 못 할 뿐더러, 관심도 없다.

"오빠, 안주도 좀 먹어. 안 그럼 금방 취해."

지윤의 말에 의무감으로 찬합 속에 곱게 담긴 치킨 강정을 하나 집어 들었다.

"너가 만든 거야?"

내 물음에 지윤이 멋쩍은 미소를 짓는다.

"재준이가 거의 했어. 걔가 요리는 나보다 훨씬 낫거든."

"언제 한번 정식으로 인사 시켜 줘."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강정을 빤히 들여다보는 지윤의 표정이 퍽 수줍다.

“알았어.”

무심한 척 대답하는 지윤의 목소리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절로 생각난다.

"그 친구, 너 오늘 여기 온다고 뭐라고 안 해?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둘이서 계획 같은 게 있었을 거 아니야."

전에 마주쳤을 때의 도전적인 태도가 떠올라 내가 물었다.

"아니."

"거짓말 안 해도 돼. 그때 보니까, 나를 쳐다보는 표정이 장난이 아니던데, 설명은 제대로 한 거야? 싸운 건 아니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윤이 웃음을 터뜨린다.

"제대로 맞췄어. 엄청 삐쳐 있는 걸 달래느라 이틀이나 걸렸거든. 좀 어린애 같은 면이 있어, 걔가. 좋은 애야, 그래도."

"우리 막내가 다 컸구나. 남자 친구한테 어린애란 말도 쓰고."

성윤은 늘 지윤을 막내라고 불렀었다. 별 뜻 없이 농담 삼아 흉내내어 본 건데 지윤은 목소리 가득 감정을 담아 감탄한다.

"진짜 오랫만이다! 막내라는 말. 오빠 왜 그랬어. 눈물 나올라 그러잖아. 아, 정말 미치게 보고 싶다."

눈에 눈물을 한 가득 담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 그러나 딱히 슬프다기 보다는 아련한 것을 대하는 느낌이다. 종이컵에 남은 와인을 단숨에 들이키더니, 지윤이 내 쪽으로 잔을 내민다. 말없이 컵에 와인을 따라 주었다.

"오빠. 언니가 죽었어도 우리 여전히 같은 식구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지윤의 질문에 갑자기 마음이 이상해진다. 대체 뭐가 어떻게 자극을 받은 건지, 바삭하게 말라있던 눈이 순식간에 촉촉하게 젖어 든다. 울 것 같은 기분. 대체 뭐를 어쨌다고. 지윤도, 나도 취기가 돈 건 지도 모르겠다. 입을 열면 그대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대답을 미루다가 ‘응.’ 하고, 간신히 떨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순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잔뜩 찌푸려 있던 하늘에서 하얀 눈가루가 흩날리기 시작한다. 누런 빛이 도는 메마른 전원 풍경에 쏟아지는 눈은 고요하다. 조용하고 상냥하다. 상처 받은 두 가슴을 가만히 어루만져 준다. 성윤이 그리고, 성윤의 가족, 아니, 나의 가족들이 우리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가슴으로 느낀다. 이런 기막힌 타이밍이라니, 절대로 우연일 리가 없다고.

"눈이다."

지윤이 조용히 감탄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네."

컵에 가득 찬 와인을 무드 없이 꿀꺽꿀꺽 마시며, 지윤도 나도 애달픈 시선으로 눈 내리는 풍경을 말 없이 바라본다. 아마도 같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추억하며.

"메리 크리스마스!"

지윤이 내게.

"메리 크리스마스!"

내가 지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가 가족에게. 그리고, 마음 속으로 ... 성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반드시 가 닿을 것이라는 믿음을 담고.



[2003년 크리스마스 때 올린 글입니다. 이미 읽으신 분들이 많으실 것 같은데 ... ^^;;; 썰렁한 게시판에 조그만 훈기라도 주고자 거슬리는 문장 몇 개만 고쳐서 올렸습니다. 정성이 갸륵하지 않습니까? -_-(퍽!!!)]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5)

댓글 '18'

Junk

2005.02.06 10:01:37

다시 읽어도 좋군요. 흐뭇~   [01][01][01]

로민

2005.02.06 10:50:09

다시 읽어도 뭉클해져요. 리앙님 글에는 행복해졌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요.   [01][01][01]

수룡

2005.02.06 11:46:19

ㅠㅁㅠ... 넘 뭉클한 아저씨라는... 에휴...

참, 리앙님, 저 샛별이 이야기도 궁금해요;;; 걔네 커플도 알콩(알콜이라고 써졌음..-_-;)달콩함이 많이 예블 것 같은데... 기대해도 되나요? +_+   [01][01][01]

람람라미

2005.02.06 14:15:18

좋아요 이히히히히   [01][01][01]

아우라

2005.02.06 14:19:19

저도 단 두 장면 나오지만 주형의 부분에 눈물이 나오더군요...
주형이랑 성윤이의 삶의 한 도막을 보고 싶어요...물론 해피로...
주형이가 성윤이를 그리워하기 전 육년 전의 이야기가 보고 싶어요...   [01][01][01]

Jewel

2005.02.06 17:34:06

으흐흐흐흐흐흐 +_+ 역시 리앙님 쵝옷~ (ㅇ_ㅇ)b   [01][01][01]

hwiya

2005.02.06 20:23:24

ㅠ.ㅠ   [01][01][01]

떠돌이별

2005.02.07 04:54:11

힝...슬퍼요 ㅠ_ㅠ   [01][01][01]

위니

2005.02.07 08:13:15

남자가 새롭게 시작되는 사랑을 하는 에필도 좀 써주시면.....퍽....ㅎㅎㅎ....   [01][01][01]

마녀

2005.02.07 09:49:57

주형에게도 새로운 사랑이 왓으면~~흑흑..넘 슬퍼요~~   [01][01][01]

하늘바람

2005.02.07 11:47:08

너무 슬프네요... ㅜ ㅠ   [01][01][01]

레띠츄

2005.02.08 02:24:20

슬퍼요.. 이제 그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도 되련만..
근데 리앙님 위에 2004년 크리스마스에 올리신거 아닌가요?? (소심,소심) ㅋㅋㅋ   [01][01][01]

쿨핫

2005.07.02 13:45:01

소설을 읽으면서도 참 주형이가 가슴아팠는데 이글을 읽으니... ㅠ.ㅠ

하늘지기

2006.07.20 15:48:55

지윤이는 행복을 찾은 듯하니..
주형이도 빨리 행복해졌으면..

토토마

2007.01.10 00:29:04

처음읽었어여,
가족아 되더줘의 에필같은데,
넘 가슴이 아파여,
지윤이는 이제 행복한데....

키리

2007.02.19 21:40:41

참 슬프네요...
안그래도 오늘 우울한 일이 있어서 울고 싶었는데
지금 막 눈물이 쏟아지려고 .. 흐흑

방님마눌

2007.04.27 11:36:22

ㅠ.ㅠ...
주형도 좋은짝을 만나게 해주세요...

윤우

2007.11.14 11:42:16

오직 지윤이와 재준이만 봤는데 주형씨랑 성윤이 언니 얘기에 뭉클해집니다. 주형씨도 좋은 사람 만나길 바라는 마음과 동시에 계속 지윤이 언니를 그리워했으면 싶기도 하고.... 내 마음 나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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