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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21
“학생, 여기 교무실이 어딘가?”
검은 승용차에서 내린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중년이 뛰어가는 남학생 한 명에게 물었다. 중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뛰어가던 남학생이 멈췄다.
“교무실이요? 주 교무실은 1층인데요. 각 학년별로 층마다 따로 있어요.”
“아, 나는 2학년 학부형인데.”
“그럼 3층으로 올라가셔야 하는데요. 3층 중앙에….”
학교 건물 3층을 가리키며 조목조목 설명하는 남학생의 설명을 듣는데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저 쪽에서 이야, 를 연발하며 기현이 달려왔다.
“오! 기현이구나.”
방정맞게 뛰어오던 기현이 중년의 앞에 절도 있게 멈춰서 아주 단정하게 허리를 굽혔다.
“어쩐 일이세요? 출장 가셨다고 들었는데.”
“빨리 마무리 돼서 아침에 들어왔다. 마침 감독님 전화도 받았고 해서. 그런데 태양이 녀석이 전화를 안 받네.”
“그 녀석, 휴대폰 잘 안 들고 다니잖아요. 교무실 가시죠?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그래. 참. 학생 고마워요.”
기현과 중년의 대화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던 남학생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중년은 친근한 기현의 이야기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기현은 새삼 이 속담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
“어이, 태양이 아버님 오셨다며? 무슨 일이야?”
아저씨를 담임선생님께 안내하고 화장실을 들려 교실로 가던 기현에게 반장이 따라붙었다. 프린트물을 한 아름 안고 있는 반장을 보고, 기현은 반을 나눠들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대단하다. 우와, 5분도 안 걸렸다.”
“허허. 그렇지. 이 좁은 학교에서. 난 마침 교무실 들어갔다가 얼굴 뵈었거든. 태양이가 아버지를 닮았나봐. 키며, 체격이며, 외모도.”
“음, 그런 감이 없지 않아 있어. 바다형은 아주머니 쪽이어서 선이 좀 더 가는데.”
“헤에~ 형도 있었구나. 그런데 진짜 무슨 일이야? 학부모 상담 이런 거 아직 아니지 않아? 야아, 조심해.”
어디서 불어온 미풍에 날리려는 프린트물을 기현이 엉거주춤 턱으로 찍어 막았다. 모양이 우스꽝스러웠지만, 아슬아슬하게 잡혀있는 프린트에 반장이 안도의 숨을 쉬었다.
“아, 태양이 유학 갈 거 같아. 아마 그래서 오신 걸 거야.”
다시 날릴까봐 턱을 떼지 못하고 억눌린 목소리를 내는 기현이었다.
“뭐? 유학? 무슨?”
반장이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기현이 얼굴을 찌푸렸다.
“야, 나 귀 안 먹었거든. 조용히 말해. 무슨 유학이긴. 축구지. 그럼 윤태양이 영어 배우러 가겠냐?”
“그건 그렇지. 어디로? 이렇게 갑자기?”
“영국. 우리 국가대표 선발 겸 해외파견선수 선발전 있었잖아. 거기서. 사실 그 녀석 옛날부터 생각이 있기는 했어. 그런데 축구를 늦게 시작해서 좀 더 쌓고 나가야지 했는데. 윗분들 눈에 한방에 찍혀서. 요즘 또 우리 선수들이 영국에서 먹어주시잖아.”
기현의 말투에는 태양에 대한 자랑스러움 반, 그리고 어쩔 수 없는 부러움이 섞여있었다.
“헤, 윤태양,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나중에 그 뭐야, 베컴, 루니, 이렇게 되는 건가?”
“언젠가는 되겠지. 녀석이라면. 야아! 근데 너는 비교를 해도 베컴, 루니 뭐 이런 외국놈들이랑 하냐. 자랑스러운 박지성 선배님이 있잖아!”
기현이 멈춰 서 가슴에 안고 있던 프린트를 반장의 프린트 위에 턱 올려놓았다. 갑작스런 기현의 행동에 반장이 순간 움찔했다.
“다 왔거든. 이제 네가 들고 가!”
드르륵, 교실 문을 열며 기현이 소리침과 동시에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세영아, 우와. 이세영! 정말! 와!”
5교시가 시작되기 전, 자투리를 이용해 어제 본 모의고사 시험지를 훑고 있던 세영에게 보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어왔다. 보배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아는 세영은 피식 웃고는 다음 시간인 국어를 대비해 언어영역 부분을 펼쳤다.
“이세영, 진짜 네가 남자는 잘 물었다니까!”
빈 의자를 끌어 세영 앞에 앉은 보배가 양 팔을 주체하지 못하고 흔들며 이상한 소리를 했다.
“무슨 소리야?”
“아, 왜, 윤태양 유학 간다며.”
막 시험지를 다음 장으로 넘기던 세영의 손이 정지했다.
“응?”
“몰랐어? 윤태양 영국으로 축구유학 간다던데.”
“…응?”
세영의 얼굴빛이 창백했다. 세영의 반응에 놀란 보배도 입을 다물었다. 세영과 보배를 향해 걸어오던 서경도 그들의 표정만으로도 상황이 파악되었다.
“무슨 말이야?”
세영이 침을 꼴깍 삼킨 후, 침착하게 물었다.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아닐 거야. 그냥 뜬소문이겠지.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했지만, 이성은 말하고 있었다. 사실일 거라고, 진짜일 거라고.
“아니. 나도 확실히는 몰라. 그냥… 그냥, 얘들 하는 말이 그래. 태양이 아버지가 오셔서 국사랑 축구감독이랑 상담하는 거 봤다고.”
세영은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뻑뻑했다. 너무 시험지를 봤나. 왜 이렇게 건조하지. 몇 번 눈을 깜빡이고, 입술을 괴롭히던 세영이 갑자기 시험지를 뒤적였다.
“아, 그랬었어. 응. 그랬었어.”
괜히 시험지를 뒤적이며 세영이는 어설픈 미소를 만들었다. 누가 보기에도 어색한 미소였다. 서경이 뭐라 위로할 생각에 다가가던 차에 종소리가 울렸다.
“종 쳤다. 가서 앉아. 국어가 오늘은 또 어떤 말을 할지. 참, 오늘 모의고사 시험지 본댔지?”
세영은 호들갑스럽게 혼잣말을 하며 필통을 닫았다 열었다, 시험지를 뒤적였다, 공책을 폈다 접었다를 반복했다. 서경이 보배에게 험악한 눈짓을 했다. 너 왜 말 했어! 질책이 담긴 눈빛을 받은 보배가 꼬리를 내리고 자리로 돌아갔다. 서경도 불안한 행동을 하는 세영을 뒤로 하고 자리에 앉았다. 위로의 말이라도 꺼냈다가는 세영이 더 비참해지는 상황이었다. 보아하니 세영은 아무 것도 모르는 눈치다. 하기는 태양이 쉽게 말을 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서경은 교실에 들어서는 국어를 보며 그저 얕은 한숨을 지었다.
“시험지 다 가져왔지? 시험은 어땠니? 이번에 어려운 몇 문제 빼고는 평이한 수준이었는데.”
국어의 말에 에이, 하는 아우성이 쏟아졌다. 세영은 멍하니 칠판만 바라볼 뿐이었다.
“뭐가 에이야. 이 정도가 어려우면 너네 3학년 올라가서 어쩌려고 그래? 이번에는 내가 나온다는 지문들 많이 나왔잖아.”
“에이, 선생님이 언제요?”
“그래요. 전 모르겠던데요.”
국어가 생색을 내자 여기저기서 언제 그랬냐는 이야기가 퍼졌다. 옆에 앉은 짝이 세영에게 다가와 언제 그랬냐며, 말도 안 되지? 라고 물었다. 세영은 멍한 얼굴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세영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윤태양 영국으로 축구유학 간다던데.
보배가 한 말이 계속 맴돌았다.
-영국, 영국, 영국…
영국이라는 단어만 메아리쳤다. 태양이 유학을 간 댄다. 영국으로, 바다 건너 영국으로 간다고 한다. 세영은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태양이 유학을 가는데, 그게 영국이고. 그래서 부모님이 오시고. 그래서…그래서…, 그러니까 윤태양이 떠난다, 윤태양이 한국을 떠난다. 윤태양이 이세영을 떠난다. 세영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어머, 얘들이 정말, 봐봐. 이 고전부분 우리 다 같이 배웠던 거잖아. 어부사시사며 황진이 시조. 고전 부분은 죄다 알려줬던 지문이거든. 현대시 부분도 그래. 워즈워드 시도 한번 외웠던 거고. 비문학 부분의 과학 지문이 좀 어렵긴 했어도. 암튼 이거 다 한 거거든!”
“에이, 아니죠. 하긴 했지만 선생님 감상일기였잖아요.”
국어의 주장에 억울했는지 짧은 머리를 질끈 묶은 여학생 한 명이 외쳤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맞다는 동조가 줄을 이었다. 얘들의 거센 항의에 생색내던 국어가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알았어. 그럼 시험지 펴 봐. 일단 고전부분.”
한꺼번에 시험지를 펼쳐 부스럭대는 소리가 교실을 메웠다. 누군가가 시를 낭독하기 시작했고, 국어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국어에 따라 시험지를 넘기는 얘들 사이에 세영은 가만히, 멍하니 축 늘어졌다. 생각을 가다듬으려 해도, 마음을 진정하려 해도 되지 않았다. 태양이가 떠난다. 윤태양이 이세영을 떠난다니. 얼마 전, 세영이 태양을 내치던 그 순간에도 이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다. 태양을 볼 수는 있으니까. 말하지 않아도, 나에게 웃어주지 않아도 볼 수는 있으니까. 그런데 태양이 영국으로 간다면, 볼 수가 없다. 말하는 것도 웃는 것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 굉장히 바빠진다고. 학교도 잘 못 나가고, 비행기타고 경기하러 가고 그런다.
태양아, 너 어젯밤 나에게 말하고 있던 거니? 그렇지? 그는 슬픈 기색이었다. 세영의 이름을 몇 번이나 애달피 불렀었다. 그냥 피곤해서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사실 너 이 말을 하려고 했던 거지? 그래서 굉장히 바빠질 거라고. 학교도 잘 못 나올 거라고. 그리고…, 비행기타고 경기하러 간다고. 세영이 참았던 숨을 토했다. 퍼즐이 맞춰졌다. 바빠지는 거, 학교에 못 나오는 거, 비행기타고 가는 것. 이건 다 유학 간다는 의미였다. 바보, 바보, 바보! 이세영. 세영이 머리를 흔들며 떨어뜨렸다.
‘태양아, 정말 가는 거야? 그런 거야? 아니지? 그치? 네가 날 두고 갈 리 없어. 그래. 말도 안 돼. 네가 가면, 나 어떡해야 해? 누가 날 잡아줘? 누가 날 위로해줘? 누가 나에게 힘을 줘? 태양아! 나, 너 없이 안 돼. 네가 날 일으켜줬잖아. 네가 날 도와줬잖아. 네가…, 네가… 날 너 없이 살 수 없게 만들었잖아. 그런데 왜 날 두고 가는 거야? 응? 태양아!’
세영의 가슴이 점점 들썩였다. 누군가가 세영의 어깨를 쳤다. 불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돌아보니 짝이었다.
“세영아, 너 아냐?”
세영은 얼이 빠져 있었다.
“29번 누구야? 워즈워드의 초원의 빛 낭독해 봐. 29번? 안 왔니?”
반응이 없자, 국어가 출석부를 열었다.
“29번, 이세영. 읽어 보렴.”
국어가 교실을 둘러보더니 세영을 찾아 불렀다. 짝은 세영이 어느 부분인지 놓쳐서 그런 줄 알고 읽을 부분을 대신 펼쳐주었다. 세영은 어기적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눈에 보이는 대로 읽었다.
“…초원의 빛,… 윌리엄 워즈워드. 한때 그처럼 찬란했던 광채가… 이제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한들 어떠랴….”
미세하게 떨리는 세영의 목소리를 감지한 서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혼이 빠져 나간 듯 멍한 세영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초원의 빛, 꽃의 영광 어린 시간을…그 어떤 것도 되불러올 수 없다 한들…어떠랴.”
시험지를 꼭 움켜진 세영의 손이 덜덜 떨렸다.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라….”
띄엄띄엄 읽는 세영이 이상했는지 모두 세영에게 주목했다.
“음, 그만. 세영이 앉으렴. 그 다음은 이렇지. 지금까지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본원적인 공감에서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솟아나, 마음을 달래주는 생각에서, 죽음 너머를 보는 신앙에서, 그리고 지혜로운 정신을 가져다주는 세월에서.”
세영은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국어에게 옮겨가고, 세영은 쿵쿵 뛰는 가슴에 손바닥을 얹어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어때? ‘초원의 빛’은 원문과 번역이 많이 달라서 분분했던 시야. 요즘에는 원문을 따라서 의미를 해석하는 추세지. 모의고사에 나온 게 원문과는 가장 비슷하게 번역한 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뭘까?”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영생불멸을 깨닫는 노래, 라고 문제집에 나와 있어요.”
누군가가 답하자 국어가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 참 문제집스러운 답변이구나. 음. 맞는 말이지. 젊음의 상실은 곧 모든 경험을 둘러싸고 있는 생기와 광휘의 상실을 의미 한다. 심오한 해석이지.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너희가 죽어라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사회에 나가면, 지금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럴 거야. 아, 그 때는 그랬구나. 그러면서 힘들었던 지금을 그리워하고. 왜냐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젊은 날이니까. 이 시가 젊은 날의 상실만 언급했다면 훌륭한 시라고 주목받지 못했지. 하지만 워즈워드는 젊은 날의 상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
평소 국어시간을 따분해하던 얘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해졌다.
“워즈워드는 이렇게 말하고 있어.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영원한 상실만이 존재하는가? 찬란한 환상을 찾을 수 있는 근거를, 언제나 그러잡을 수 있는 불멸의 근거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너희가 커서 지금을 되돌아 볼 때, 그립지만 돌아갈 수 없다고 느낄 때, 너희들은 그저 망연자실 돌아갈 수 없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거야.”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세영이 고개를 들어 국어를 쳐다보았다. 뭔지 모를 벅참이 올라왔다. 눈가가 흐릿해졌다.
“그는 그것을 '뒤에 남은 것'이라고 부르고 있어. 그것은 원초적 공감에서,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샘솟듯 솟아나오는 위로의 생각에서, 또 죽음을 투시하는 믿음에서. 사색의 마음이 생기는 때가 되면 이러한 것들 속에서 힘을 찾을 수 있으리라. 라고. 얘들아, 그런 생각 많이 하지. 성적이 안 올라서,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돌아갈 수 없다고, 이미 다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끝난 게 아니야. 너희들의 마음에서, 생각에서, 그리고 믿음에서 다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거야. 안 된다고 못하겠다고 주저앉지 말고, 다시 찾는 거야. 너희들 스스로가 일어설 수 있는,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는 방법을 찾는 거야. 워즈워드는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거고. 알았니?”
교실이 조용했다. 숙연함이 감돌았다. 누구 한 명 움직이지 않고, 국어의 말을 되새기며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저마다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표정을 보던 국어도 살짝 미소를 짓고 입을 다물었다.
“흑. 흑. 흑.”
하지만 흐느낌에 분위기가 깨졌다.
“어? 세영아, 왜 그래?”
짝이 세영을 보고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서경이 뒤를 돌아보았고, 국어도 놀라 세영에게 다가왔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높아지자 세영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으항. 흑. 흑. 으흥흥흥. 흑.”
“어머, 세영아, 어디 아프니?”
세영의 주위를 빙 둘러선 얘들이 세영의 등을 토닥이고 눈물을 닦았다. 세영에 대한 소문이며 근거 없는 악의는 모두 날아가고, 모두 세영을 걱정하고 있었다.
“흑. 으윽. 선생님. 흑. 아파요. 아파서. 흐흑. 너무 아파서 죽을 거 같아요. 으항-”
가슴을 탁탁 치는 세영의 행동에 모두 놀랐다. 국어는 빨리 양호실에 가라며 세영을 일으켰다. 서경과 보배가 나서서 세영을 부축했다. 세영은 양호실로 갈 때까지 서럽게 눈물을 쏟았다. 세영이 나간 후에도 몇몇 얘들은 걱정스럽게 세영이 지나간 자리를 바라보고, 몇몇은 같이 흐느끼고 있었다. 아마, 모두 말은 안 하지만 짐작할 터이다. 세영이 우는 이유를.
윤태양이 떠나니까.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책상에 누워 눈을 부치고 있던 태양이 주위의 물음에 얼굴을 들었다.
“너 영국으로 유학 가는 거 맞냐고.”
“그래. 축구협회에서 추천했다며. 이야. 이거 미래의 유명축구선수가 내 동창이라니!”
감탄사를 외치는 얘들 사이에서 태양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눈을 날카로웠다.
“너 네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야?”
“에? 아냐? 네 아버님 오셔서 담임하고 상담하셨다며. 축구감독님도 오시고. 뭐야, 교장선생님도 있었다지?”
“응. 그럼 가는 거 아냐? 누구 말이 맞는 거야?”
태양이 젠장, 하고 욕설을 뱉으며 책상 속을 뒤적였다. 휴대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이었다. 아버지로부터. 태양이 거칠게 머리칼을 헤쳤다.
“야, 이거 누구누구 알아?”
“응? 다 알겠지. 아침부터 소문났는데. 근데 아니야?”
“너네 다 입 다물어!”
대답을 채근하는 얘들에게 태양이 으름장을 놓고 기현을 찾았다. 마침, 뒷문으로 기현이 어슬렁거리며 걸어왔다.
“야, 한기현, 너야? 네가 불은 거야?”
“뭐가?”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기현이 태양을 쳐다보았다.
“영국 유학!”
“아~ 왜? 아버님 오셨기에, 내가 잘 안내해 드렸다. 근데 왜 소리는 질러? 잠 덜 깼냐? 우유줄까?”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 자리에 앉는 기현의 뒤통수를 갈기고 싶은 걸 태양은 간신히 참았다.
“야 이 자식아, 그걸 말하면 어떡해! 아직 세영이한테 말하지 않았다고.”
참담하게 말하며 옆의 의자에 주저앉는 태양을 보고 기현이 놀라 눈을 끔벅거렸다.
“에? 진짜? 좋은 일인데 왜 말을 안 해. 뭐, 어때. 축하해 주겠지. 너, 설마 세영이 때문에 안 간다, 뭐 이런 거는 아니지?”
침통한 태양의 얼굴을 보고 기현은 설마를 의심했다. 정말 윤태양이 이세영 때문에 이 황금 같은 기회를 날려버리겠다는 건 아니겠지? 설마. 설마. 그런데 녀석 표정이 가관이 아니다.
“설마라…, 몰라! 나도 모르겠다고!”
태양이 머리를 젖혀 소리쳤다. 기현의 표정도 굳었다.
“임마! 정신 차려. 이게 어떤 기회인데! 미친놈, 너 안 가면 진짜 미친놈이야. 축구협회 이사가 주선해주는 거야. 더 관심 받고, 더 좋은 환경에서 프리미어 리그로 갈 수 있는 기회라고. 너 혼자 힘으로 갔다가는 프리미어 가려면 십년도 더 걸릴 걸. 아니, 그 그라운드 밟을 수나 있겠어? 윤태양! 우리 약속했잖아. 거기서 뛰자고. 그 파란 잔디위에서 뛰자고. 네가 먼저 가야, 내가 더 열 받아서 미친 듯이 노력해서 갈 거 아냐! 정신 차려! 넌 가야 해. 너 안 가면, 내 친구 아니다. 나 너 평생 아는 척 안 해!”
기현은 진심이었다. 태양은 지그시 감은 두 눈 위에 양 손등을 덮었다.
“기현아. 그래도 그건 내가… 내가 직접 세영이에게 말해야 하는 거였어. 그게 세영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나의 최소한의 배려였다고….”
가늘게 떨리는 태양의 목소리에 기현도 더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흑…. 흑….”
세영이의 울음이 끊이지 않았다.
“너희들은 가보렴. 수업 중이잖아.”
“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조용해졌다.
“세영아, 머리 아프지 않니? 두통약이라도 먹을래? 그리고 푹 자면 좀 나아.”
커튼을 젖힌 양호 선생님이 안쓰럽게 물었지만, 세영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눈물을 흘렸다.
“그래. 아프면 울어야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서럽게 우는 폼이 아무래도 마음에 상처를 입은 모양이다. 양호 선생은 세영의 어깨까지 시트를 덮어주고 커튼을 닫았다. 세영은 모로 누워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샘이 고장 났나 보다. 계속 흐른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흐른다. 아니, 울고 싶어서 우는 거다. 이렇게 울어야, 그래야 마음을 먹을 수 있을 거 같다.
-한때 그처럼 찬란했던 광채가… 이제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한들 어떠랴…
자신의 떨리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울렸다.
-…초원의 빛, 꽃의 영광 어린 시간을…그 어떤 것도 되불러올 수 없다 한들…어떠랴.
눈을 감자 고여 있던 눈물이 밀려 또독 떨어졌다. 보인다. 눈이 부시게 웃던 태양이의 얼굴이. 나를 향해 웃었었지. 나만 보고 그렇게 웃어줬어. 그라운드에서 달리던 태양이가 떠올랐다. 환한 빛이 태양이의 몸을 감싸고 있었어. 태양이는 그 빛을 휘감아 뛰었어. 축구공을 가지고 이리저리. 그리고 골대 그물을 가르고. 푸른 잔디에 오직 태양만 있었어. 내가 못되게 말해도, 눈을 흘겨도 씨익 웃었어. 내가 힘들다고 도망간다고 그래도 끝까지 따라와 잡아줬어. 기억이 흘러갔다. 노을이 지는 저녁, 태양이와 공차기를 했었지. 같이 초코우유도 나눠 마시고. 내가 못 먹는 우유를 주기도 했었어.
눈물이 흐르는데, 살짝 입가에 미소가 묻어났다.
태양이를 위해 꼼꼼히 정리했던 노트, 그리고 답례라며 무서워하던 놀이기구도 타고. 그 때 나 엄청 소리 질렀었는데. 태양이가 손을 꼭 잡아줘서, 그래서 꺄악 소리쳤었어. 무섭지 않았으니까. 옆에 태양이가 있어서 하나도 무섭지 않아서. 생일선물은 바보같이 우유만 사다주고. 그걸 더 바보같이 태양이는 다 마시고. 응, 우리 바보였다. 정말 바보였어. 그리고 도서관에서 너와의 입맞춤.
세영은 긴 손가락으로 입술을 쓸었다. 느껴졌다. 그 날의 촉감을. 태양이의 입술이 닿은 것 같은.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태양아, 고마워. 기억할 추억을 많이 줘서. 너무 많아서 앞으로 두고두고 꺼낼 볼 수 있을 거 같아. 그래서 나 안 슬퍼할 거야. 그냥, 지금만, 지금만 조금 울게. 앞으로 안 울 거니까, 안 슬퍼할 거니까 지금만 울게. 세영이 다시 아랫입술을 꾹 물고 흐느꼈다.
-오…히려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라….
나 바보였어. 남들이 낙오자라고, 실패자라고 불러도 아무 말 못하는 바보였어. 너를 만나기 전까지 난 내가 평생 그렇게 살 거라 생각했어. 기계처럼 공부하고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그런 비참하고 재미없는 삶을 살 거라 여겼어. 그런데 달라졌어. 네가 알려줬어. 포기하는 게 진정 낙오자가 되는 거라는 걸. 그만 두는 게, 도망가는 게, 나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거라는 걸. 그리고 넌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을 줬어. 못 견디게 좋은 게 뭔지 그걸 찾아줬어. 나 이제 알아. 이제 나도 빛이라는 걸 찾을 수 있을 거 같아. 네가 가지고 있는 빛만큼 눈부시진 않지만, 나만의 빛을 찾을 거야. 너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내 힘으로 찾을 거야.
-지금까지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본원적인 공감에서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솟아나, 마음을 달래주는 생각에서, 죽음 너머를 보는 신앙에서, 그리고 지혜로운 정신을 가져다주는 세월에
어느 새 눈물이 그쳐 있었다. 세영은 눈을 떴다. 얇은 커튼 안으로 오후의 빛이 쏟아졌다. 응, 태양아. 네가 보여준 길을 따라서 갈 거야. 힘든 일이 생겨도, 아픈 일이 생겨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갈 거야. 네가 준 모든 것들을 기억하면서 그렇게 갈 게. 빛이 곧게 세영의 눈 안으로 들어왔다. 촉촉했던 눈동자가 마르고, 부옇던 장막이 걷어지고 맑아졌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누워있자. 이제 곧 마지막이니까.
“똑똑-”
태양이 정중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오후에 여학생 한 명이 왔는데….”
원탁 의자에 걸터앉아 책을 보고 있던 양호 선생이 고개를 들었다.
“세영 학생? 괜찮다졌다기에 보냈는데. 수업도 끝난 지 꽤 되었고.”
코끝에 걸려있는 돋보기를 벗고 눈가를 지압하는 양호 선생은 평안한 표정이었다. 태양은 세영이 머물렀을 침대에 한번 눈길을 주고 인사를 했다. 수업이 끝나고 찾아간 세영의 반에 세영은 없었다. 보배와 서경에게서 세영도 알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둘은 시간을 주라는 말로 양호실로 달려가려는 태양을 막았다. 그리고 한참, 세영은 교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딜 간 걸까?
“아마 저기 있을 거야.”
발길을 돌리던 태양이 멈춰 서, 양호 선생이 가리키는 창가로 달려갔다. 창문 너머 운동장 스탠드에 세영이 앉아있었다. 얼마나 저러고 있던 걸까? 태양은 고개를 끄덕이고,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다.
“세영아.”
스탠드에 앉아있던 세영은 잔디 운동장을 거닐고 있었다. 그의 기척을 느꼈는지 발걸음을 멈췄다. 태양은 세영에게 가까이 가고 싶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세영의 뒷모습이 태양에게 오지 말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세영아.”
태양은 목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세영을 불렀다. 하지만 세영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어떻게 말해야, 네가 받은 충격을 없앨 수 있을까? 태양은 입술을 깨물었다.
“…세영아, 나. 영국에 가려고 해.”
세영의 어깨가 움직인 것 같다. 태양은 심장을 아프게 쥐어짰다.
“축구를 배우려고. 내가 그랬었지. 프리미어 리그에 가는 게 내 꿈이라고….”
세영을 바라보는 태양의 눈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그래. 그래서 가려고 해.”
세영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느슨하게 묶인 그녀의 머리칼이 바람에 날려 얼굴을 가렸다.
“응, 태양아, 알아.”
세영은 흩날리는 머리칼을 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아주 편안한 음성으로 말했다. 막상 태양이에게 들으니 아무렇지 않았다. 그냥 잔잔히 흐르는 호수의 한 가운데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
“세영아! 가자!”
멀찍이 떨어져있던 태양이 격하게 몇 걸음 다가왔다. 세영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무슨 뜻이야?’
“너도 가는 거야. 세영이, 너 어차피 유학 갈 생각 있었잖아. 너희 부모님도 그러길 원하시고. 이 기회에 같이 가자. 공부하는 거야. 거기 가면, 네가 좋아하는 공부 더 할 수 있어. 응?”
태양의 갑작스런 제안에 세영은 당혹감이 스쳤지만, 바로 평상심을 찾았다.
“아니. 안 가.”
간결하지만 단호한 세영의 답은 일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튀어나왔다. 이제는 태양이 당황할 차례였다.
“…왜?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런 거지? 괜찮아. 좀 더 생각해보고 준비하면 되잖아. 지금 바로 가자는 거 아니야. 나도 준비하려면 시간 좀 걸리고….”
“태양아. 안 가. 너와 같이 가지 않아.”
횡설수설하는 태양의 말을 세영이 가로막았다. 태양은 멍한 눈빛으로 세영을 응시했다.
“……왜?”
바람이 방향을 바꿨다. 얼굴을 가리던 머리칼이 젖혀졌다. 태양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얼이 빠져 세영을 응시하는 태양. 바보, 난 너의 그런 표정은 별로 보고 싶지 않다고. 웃어. 웃는 얼굴을 보여줘.
“아직은 아니야.”
태양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무슨 뜻이야? 하고 묻고 싶은 거겠지.
“넌 네가 되고 싶은 걸 위해 가는 거잖아.”
세영이 바람을 마셨다. 차갑다.
“나도…,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 알게 되면, 그 무언가를 위한 게 그 곳에 있다면, 그 때 갈 거야.”
세영은 방긋 웃었다. 지금까지 이세영이 살아오면서 했던 말 중, 최고의 말이다. 세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에 실려 저절로 끄덕여졌다.
“이세영.”
태양의 눈은 오묘했다. 놀란 것 같기도 했고, 기쁜 것 같기도 했고, 슬픈 것 같기도 했다. 그 어느 하나의 감정이라고 정의내릴 수 없는 눈이 세영을 응시했다.
“태양아, 난 네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힘을 나눠준다거나 용기를 북돋아 준다거나 하는 건 못하겠어. 누군가를 도와주는 건 나에게 매우 어설픈 일이잖아. 하지만 태양아, 나 너를 응원할 수는 있어. 묵묵히 너의 뒤에서 너를 응원할게. 네가 잘 되라고, 네가 이기라고 하는 응원이 아니라, 네가 못 견디게 좋아하는 걸 언제까지나 하라고, 그렇게 응원할게.”
그러고 나서 하얀 이를 보이며 웃는 세영은 아름다웠다. 여태껏 보아 온 그 어떤 모습보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눈이 부셨다. 태양은 세영의 주위를 에워싸는 빛을 보았다. 어느 틈에 세영이 이렇게 성장한 걸까? 태양은 한 걸음, 한 걸음 세영에게 다가갔다. 강렬한 빛이 밀려와 태양을 감싸 안았다. 이게 세영의 빛이었다.
“응, 고마워.”
태양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크고 굵은 태양의 손을 바라보던 세영도 자신의 자그마한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그녀의 기운이, 그의 기운이 스르르 녹아들었다. 서로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태양아, 나 비로소 편안해졌어.’
‘세영아, 너 이렇게나 많이 컸구나.’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저 끝에서 붉은 해가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점점 하강하는 해 주위에 구름이 붉은 색에 물들었다.
‘태양아, 그 때 네 뒤로 태양이 지고 있었어. 난 태양 뒤에 태양이 진다며, 절묘하다고 생각했었지. 오늘도 태양이, 네 뒤로 태양이 져. 아주 빨갛게 노을이 타. 그 때의 난, 그저 구경하는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너의 장면에 나도 있는 거 맞지?’
태양이 맞잡은 세영의 손을 당겨 안았다. 떠나는 태양의 기운이 뻗어 뜨거움이 주위를 덮쳤다. 이 내음을 기억하자. 상큼하지만 달짝지근한 이 내음을. 이 손길을 기억하자. 투박하지만 따스한 이 손길을. 그리고 이 입술을 기억하자. 촉촉하고, 촉촉하고 또 촉촉한 이 입술을.
“안녕, 윤태양.”
‘안녕, 세영아.’
태양의 눈이 말했다.
‘응, 그래. 태양아, 안녕.’
노을은 빠르다. 언제나. 그 찰나가 영원처럼 긴 것 같지만 실제는 아주 빨리 사라진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온다. 태양을 보이지 않게 숨겨버린다. 하지만 아침이 오면 언제나 아침이 오면 태양은 다시 나타난다.
안녕, 윤태양.
_Ever after
청명하기 그지없는 하늘 아래 뜨거운 태양이 온 도시를 태웠다. 이상기후변화로 요 몇 년 영국의 여름은 한국의 여름보다 잔인했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주변에서 발생한 계절풍이 점점 강력해진다는 전문적인 원인을 읊조리던 잉글랜드 토박이 대런의 말이 사실이기는 한가 보다. 태양은 훤히 드러난 이마를 손바닥으로 비스듬히 가리고 거침없이 타오르는 해를 쳐다보았다. 손바닥 아래로 드리워지는 그늘 안에서도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일기예보에서는 올 여름의 마지막 혹서가 다 끝났다고 했다. 이번 시즌 리저브 첫 경기 날에 날씨가 한풀 꺾일 거라며, 다행이라며 동료들과 이야기가 나눈 것이 얼마 전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 고개를 저었다. 어제와 같은 열기가 뜨뜻하게 그라운드를 달구고 있었다.
“헤이~해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군.”
짐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내리던 태양의 뒤에 육중한 몸이 기대었다. 껄렁거리는 말투로 보아 루이스가 분명했다. 태양은 머리를 뒤로 뻗어 대꾸를 대신했다.
“이거 징조가 좋아. 오늘 썬이 오랜만에 복귀하는 줄 안 모양이야.”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는 태양의 옆에 바짝 붙어오던 루이스가 휘파람을 불었다.
“갔다 붙이기는.”
태양이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실소였다. 여기서 태양은 썬이라고 불리었다. 처음 영국에 왔을 때, 태양이라는 발음에 익숙하지 않은 동료들이 태양의 뜻을 알고는 ‘썬’이라고 불렀다. 장난기가 가득한 루이스는 그라운드를 빨갛게 익게 만든 해를 보고, 태양을 연상한 것이리라.
“헤이~썬. 좋게 생각하라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오케이. 네 말이 다 맞아.”
태양이 마지못해 끄덕이자 루이스가 어깨를 으쓱대며 으스댔다.
“썬! 오늘 컨디션은 어때?”
버스에서 가장 늦게 내린 조나단이 뛰어왔다.
“그럭저럭.”
“노노! 최상이어야지! 오늘 경기가 어떤 경기인데. 썬이 일 년 만에 복귀하는 경기라고!”
남 챙기기로 유명한 조나단이었다. 갈색머리가 정확히 2대 8로 나뉘어져 있고, 단정한 옷차림 등 딱 모범생 이미지인 그는 이미지에 맞게 도덕 교과서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하는 친구였다. 그 이야기가 마치 부모가 자식 챙기듯 다 동료들을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 누구도 조나단의 충고에 군소리를 달지 않았다. 태양은 새삼 듣는 조나단의 말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선더랜드에 임대 간 일 년 동안 가끔 보기만 했지, 그럴듯한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는데. 녀석은 태양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참 고마웠다.
“조나단, 이 몸은 언제나 최상이야! 흐흐.”
“으악, 썬. 내 머리는 내 생명이야!”
태양은 조나단의 정돈된 머리를 헝클이며 고마운 마음을 대신했다. 단정함을 좋아하는 조나단은 태양에 의해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내리기 바빴다. 그런 조나단의 모습을 보며 같이 걸어가던 동료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일 년 만에 돌아왔는데, 이 친근한 느낌은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았던 것 같다. 더 마스톤스 아레나도 변함이 없다. 푸른 잔디가 짧게 깔려있고, 양 사이드에 높지 않은 관중석. 홈 필드인 올드 트래포트의 비하면 협소하기 그지없지만, 태양에게는 그 어느 필드보다 훌륭한 곳이었다. 태양은 벤치에 가방을 내려놓고 저 끝부터 반대쪽까지 필드를 훑었다.
‘윤태양. 다시 시작이다.’
태양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뜨거운 기운이 그의 호흡기를 타고 내려가 가슴을 데웠다. 지난 1년이 슥슥 지나갔다. 선더랜드로의 임대가 결정되었을 때의 착잡했던 심정이 다시금 생각났다. 영국에 와, 순조롭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카데미에 입단했을 때만 해도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했었다. 대한축구협회의 전폭적인 지지와 수준급의 영어 구사로 태양은 사립고에 편입할 수 있었다. 축구의 나라, 영국은 공부도 중요시 여겼다. 그래서 보통 학생은 정규 학교를 다니고, 그 외의 시간에 훈련을 받았다. 맨유는 태양의 사립고 편입과 영어실력을 마음에 들어 했고, 큰 국제 경기 경력이 없지만 오디션에 흡족함을 보이며 입단을 허락했다. 태양은 한국과 다른 알찬 훈련 시스템에 한 번 놀라고, 세계 각지에서 날아온 쟁쟁한 선수들에 두 번 놀랐다. 그래서 주눅 들고 향수병에 시달릴 새도 없이 오로지 축구에만 매달렸다. 언어라는 장벽이 한시름 덜어져 좀 더 훈련에 매진할 수 있었다는 것이 태양에게는 행운이었다. 태양의 엄청난 열정은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는 실력에서 보여 졌고, 빠른 적응으로 동료들과도 금세 친해졌다. 이렇게 가면, 유스를 졸업하자마자 2군에 들고, 1군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유스 1년 후, 버스비 감독은 선더랜드의 임대선수를 제안했다. 맨유에서 신과 같은 감독님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노, 라는 대답은 존재하지 않았다. 카리스마를 내뿜는 감독님 앞에서 태양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선더랜드에서의 1년. 이제는 감독님의 뜻을 알았다. 2부 리그이기는 하지만 그 곳에서 태양은 유스팀의 대결과는 다른 진정한 프로의 세계를 겪었다. 치열한 프리미어리그를 알게 되었다. 지지 않기 위해서는 달려야 했고, 골을 넣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했다. 그 일년 태양은 무섭게 성장했다. 2부 리그의 선더랜드도 태양의 활약에 힘입어 올 시즌에는 1부 리그로 승격되었다. 선더랜드에서는 태양에게 완전 이적을 제안했지만, 태양은 거부했다. 그는 아직 맨유에서 펼쳐야 할 꿈이 있었다. 그리고 돌아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번에 감독님은 2군 카드를 꺼내셨다. 태양의 지난 1년의 활약에 대해 그 어떠한 코멘트도 없이, 2군 훈련에 들어가라는 말씀만 하셨다. 그러나 이번에는 입술을 깨물지 않았다. 태양은 씩 웃으며 예스라고 말했다. 세계 최고의 명장이라 불리는 버스비 감독님의 뜻이 그렇다면, 기꺼이 간지러운 날개를 잠시 접으리라.
회상을 마감하며 태양은 얕은 숨을 뱉고 벤치에 앉아 축구화를 정비했다. 오랜만에 비상할 때였다. 훨훨 필드를 누빌 시간이었다. 태양은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축구화의 끈을 조였다. 아래를 향해 숙여있던 태양의 등 뒤로 누군가가 덮쳤다.
“윽! 뭐야?”
“썬. 허리가 많이 굳었군. 스트레칭이 필요해.”
정확한 영국발음을 구사하는 것으로 보아, 대런이 분명했다. 태양은 벌떡 등을 제쳐 대런을 물리쳤다.
“썬, 너무 과격한데. 그럼 이건 필요 없다는 이야기? 프런트의 에이미가 전해주라고 했는데, 그냥 내가 열어 볼까?”
간신히 균형을 잡아 뒤로 자빠지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모면한 대런이 사악하게 웃으며 오른손에 들린 하얀 봉투를 흔들었다. 봉투 끝에 찍힌 도장을 보고, 태양은 순식간에 손을 뻗어 낚아챘다.
“어? 역시 이 편지에는 상당히 민첩하군. 큭큭.”
대런이 감탄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의 정신은 이미 손에 들린 편지에 쏠려 있었다. 보내는 사람이 적히지 않고 오직 구단 주소와 태양의 이름만 깨끗하게 적힌 하얀 봉투. 태양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어? 저거 봐라. 헤이! 썬 표정 봐. 가관이구나. 일 년이 지났어도 똑같아! 진짜 대단하다.”
대런의 외침에 그라운드에서 스트레칭을 하던 동료들이 다가왔다. 태양은 그러거나 말거나 봉투를 열었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두 번 접힌 편지지를 여는 데 자꾸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이야, 저거 정말 썬이야? 저렇게 당황하는 모습이 썬인거야? 말도 안 돼!”
오버하는 것이 분명한 대런의 모습에 조나단이 다가와 대런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거 봐, 대런. 저것이 바로 사나이의 순정이라고. 이 여자, 저 여자 기웃거리는 네가 알 리가 없지.”
“뭐? 야. 조나단! 너는 이 여자, 저 여자도 없잖아!”
어느 새, 조나단과 대런의 말싸움으로 번지자, 동료들이 우르르 달려갔다. 모두 둘의 장난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달려가 같이 부둥켜안으며 필드를 굴렀다. 모두 이번 시즌의 첫 경기를 앞두고 긴장을 하고 있는 터였는데, 조나단과 대런과 함께 뒹굴면서 긴장감을 태워버리고 있었다.
태양은 무리를 제치고 벤치에 앉아 조심스레 편지를 폈다. 심장이 뛰었다. 사실 어제 밤잠을 설쳤다. 요 며칠 세영에게 연락이 없었다. 태양도 선더랜드의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맨체스터로 돌아오면서 이것저것 바빠, 세영에게 연락이 뜸했었지만, 그래도 이메일은 꾸준히 보냈다. 하지만 세영은 저번 주부터 하루에 서너 통씩 보내던 이메일도 며칠에 한 통씩만 보냈다. 시차 때문에 전화 연결이 계속 어긋나기를 몇 번, 간신히 이틀 전에 통화가 이어졌지만 그냥 목소리만 듣는 걸로 끝났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바쁘다고 했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언니가 들어왔다고도 했다. 이번 방학은 너무 할게 많다고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연락이 되지 않았던 적이 없었기에 태양은 불안했다. 2년 반. 잘해왔다고 믿었는데, 혹시. 설마. 하는 추측이 난무했다.
재작년 겨울, 세영과 그렇게 이별하고 태양은 자신과 약속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세영을 놓지 않을 거라고. 비록 꿈을 위해서 가지만, 결코 세영을 먼저 놓는 일은 없을 거라고. 세영에게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태양의 다짐은 견고했다.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하루에 한 번씩 세영에게 메일을 쓰고 전화를 했다. 그렇게 2년하고 반이었다. 힘든 고3을 겪고 있을 세영을 위해, 태양은 짜증 한 번 낸 적이 없었다. 경쟁이 심하고, 훈련이 고단해도 그저 묵묵히 세영의 말을 들어주고 격려했다. 사실 하루가 못 견디게 힘들어도, 세영의 나긋한 목소리만 들으면 모든 걸 잊었던 태양이었다. 먼 영국 땅에서 세영은 태양에게 빛이었다. 간혹 보내주는 세영의 사진을 보며 피로를 씻어내는 것도 잠깐, 실제의 세영이 사무치게 보고 싶어 딱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세영은 그런 태양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점점 밝아지고 점점 생기를 머금었다. 대학생이 되었으니 세영이를 눈독 들이는 사람이 많아졌겠지. 누군가가 세영이를 채어 갈까봐, 태양은 언제나 전전긍긍이었다. 세영의 이메일 하나에, 전화 한통에 밝아지는 태양의 표정에 동료들은 혀를 내둘렀지만 태양은 개의치 않았다. 세영이 목소리 한 줄기 들을 수 있다면, 사진으로나마 그 미소 한번 볼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그런데 세영의 연락이 줄어들고 있었다. 바쁘다고 그랬지만, 할 일이 많다고 그랬지만. 태양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이 맨유 복귀 첫 경기임을 알면서도 잠을 설쳤다.
-안녕? 태양아.
여전히 예쁜 글씨체였다. 세영의 편지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전화와 이메일은 자주했지만, 2년 반 동안 편지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 세영에게 편지라니. 그것도 특급우편이었다.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태양은 더운 햇볕도 잊은 채, 편지에 몰두했다.
-이렇게 편지를 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그치? 어떻게 지내고 있어? 아, 방금 메일에 잘 지낸다고 했다. 새 집도 아주 좋다고 그랬지. 날씨는 덥다고 그랬어. 많이. 서울도 너무 더워. 정말 날씨가 이상해.
새 집? 나흘 전인가에 보냈던 메일에 쓴 내용이었다. 왜 전화를 하지 않고, 편지를 쓴 거지? 태양은 고개를 갸웃했다.
-빨리 여름이 가면 좋겠다. 참! 네 기사 봤어. 21살에 세계 최고의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는 선수. 이렇게! 근데 나 좀 그랬어. 스포츠면 한 귀퉁이에 나와 있었거든. 우리 태양이가 얼마나 대단한데. 고작 한 귀퉁이라니! 말도 안 돼! 그치?
태양은 찡그렸던 미간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요즘 연락 자주 못해서 미안해. 내가 말했었지. 이번 방학에 까페 아르바이트 한다고. 근데 내가 너무 만만하게 봤나봐. 그거 꽤 어렵더라고.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고, 각종 음료수 다 만들고. 아! 나 그래서 이제 별 거 다 만들어. 커피도 내릴 줄 알아. 근데 우리 태양이는 커피 안마시니까. 내가 생과일주스 만들어 줄게. 딸기? 키위? 오렌지? 복숭아? 말만 해. 나 정말 맛있게 만들어. 보배는 좀 달다고 하는데…. 그건 보배가 단 걸 싫어해서 그러는 거야.
세영이 바로 옆에서 조잘대는 것 같았다. 태양이 숨 죽여 웃었다.
-꼭 정해 놔. 뭐 먹을 건지!
“그럼 와서 해주려고?”
태양은 느낌표를 남발한 편지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곧은 아니어도, 언젠가 세영이가 만들어주는 생과일주스 먹을 날이 오겠지. 언젠가는….
-언니가 왔어. 엄마랑 아빠는 이제 많이 덤덤해지신 거 같아.
세영의 언니는 미국유명대학을 휴학하고 배낭여행을 다니고 있었다. 부모님 몰래. 그 사실을 안 세영의 집은 난리도 아니었다. 그게 1년 전이었다. 세영이 훌쩍이면서 전화를 해, 어찌나 깜짝 놀랐던지. 신상에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그날 당장 비행기표를 끊을 뻔 했는데, 다행이 언니의 일이었다. 그 때를 생각하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언니도 마음을 잡았는지, 9월에는 복학할거래. 언니 얼굴이 엄청 편해 보여. 예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뭔가 성숙함이랄까. 그런 거. 언니는 더 자란 거 같아. 내가 이만큼 따라갔다고 생각했는데, 언니는 더더 멀리 간 거 있지. 휴, 언제쯤 언니만큼 자랄까?
세영의 더운 한숨이 태양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세영이, 너 더 자라면 안 돼. 그럼 더 예뻐져서 누가 채 간다고!”
혼잣말이지만, 태양의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썬! 몸 안 풀어? 주위를 좀 둘러보라고!”
대런의 부름에 고개를 들어보니, 관중석에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상대편도 필드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잠깐만!”
태양은 다급하게 외치고는 눈동자를 굴렸다.
-어쨌든 언니와 오랜만에 신나게 놀고 있어. 이제 언니랑 만나기가 더 어려워질 테니까. 왜냐면, 언니는 미국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안 올 테고. 나는…. 태양아, 나 있지,
“썬!”
대런의 연속 외침에 태양은 편지를 잘 접어 봉투에 넣고 가방 안 깊숙이에 넣었다.
“간다. 가!”
코칭스태프까지 경기장을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태양을 일어나 동료들에게 뛰어갔다. 불안감이 녹아있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녀의 편지가 이 정도의 위력이 있다니. 대런은 환해진 태양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팔불출, 썬!
“삑!”
날카로운 호각이 울렸다. 뜨거운 햇빛 따위는 잊었다. 그들은 그라운드에 놓인 공 하나. 그것 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최전방 공격수인 태양과 루이스를 필두로 그라운드를 누비기 시작했다. 경기장 맨유 선수의 눈에서는 비장함이 흘러나왔다.
가자!!!
모두의 눈동자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응, 언니. 걱정 마! 언니도 건강해야 해. 응. 또 연락할게. 들어가.”
찰칵, 낡은 수화기를 걸었다. 카드를 집어넣고, 고개를 들었다. 정말 후덥지근하다. 지구온난화가 심각하다더니, 여기도 다름없었다. 얇은 라운드 티셔츠에 걸쳐놓은 선글라스를 썼다. 그제야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다시 여며 올려 묶고, 옆에 놓은 빨간색 트렁크의 손잡이를 쭉 뺐다. 허리만큼 올라온 손잡이를 잡고 몸을 돌려 자유로운 왼손을 번쩍 들었다. 몇 발자국 옆에 서 있던 클래식한 블랙 캡이 다가와 섰다.
“Please, drive me this adders.”
능숙한 영어가 이어지고, 종이를 받아든 운전기사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빨간색 트렁크를 운전사 옆에 놓고, 뒷좌석에 앉았다. 앞에 달린 백미러로 운전기사가 너무나 친절하게 웃음을 지었다.
“Where are you from?"
콧수염이 하얗게 있는 할아버지의 영국식 발음이 생소했지만 알아들을 만 했다.
“I'm from Korea."
아저씨의 미소를 따라 배시시 웃어주었다.
“Oh! I know. I heard Korea also likes soccer!"
"Sure."
고개를 끄덕이자 할아버지가 오오, 하며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I'm crazy about soccer! Manchester United is my team!"
운전대를 잡고 있던 왼손의 검지를 치켜 올리시고는 함지박하게 입을 벌리셨다. 축구에 대한 열렬함이 확 느껴졌다.
“Do you like Manchester United? I think you like it. Don't you?"
할아버지가 백미러로 곁눈질하며 좀 전에 건네준 너덜너덜한 흰 종이를 흔들었다.
“Yes. I love it."
할아버지가 대답에 흡족했는지, 허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So, are you going to see the game now? Oh~ That's why you came to England."
이제 뒷좌석을 보지 않고 할아버지 혼자 말을 이어갔다. 축구를 좋아한다는 이야기에 흥분에 빠져 있었다. 영국인들은 못 말리는 축구사랑이라더니, 못 말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Maybe, …or not?"
야릇한 대답에 신호등에 걸려 멈춰선 할아버지 운전사가 고개를 돌려 뒤를 흘깃했다.
“I came to England to meet somebody."
"Who?"
할아버지는 신호등이 바뀌자마자 호기심 가득한 눈을 앞으로 돌려 운전에 집중했다.
“……My sun."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던 선글라스를 밀어 올려 날리는 잔머리를 고정시켰다. 검은 안경에 감춰있던 깊은 눈동자가 할아버지를 향해 빙긋 웃었다.
-태양아, 나 있지, 영국에 가. 너에게 말은 안 하고 있었는데, 옥스퍼드 대학시험을 쳤어. 혹시나 떨어질까 말 못했어. 근데 붙었지, 뭐야. 좀 더 영문학에 대해서 공부도 하고 싶어졌고. 그래서 비행기 티켓은 내 힘으로 사고 싶어서 방학동안 열심히 아르바이트 한 거야. 언니도 사실 이제 앞으로 더 못 볼 테니, 겸사 들어온 거고. 놀랐어? 음, 네가 놀랐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아무튼 태양아, 나 네가 있는 영국에 가. 2년 반 만에. 그리고 곧…. 이만 줄일게.
“삑!”
심판이 다가와 요란하게 호루라기를 불고 반대편 쪽을 향해 팔을 뻗었다.
“젠장! 우리 볼이라고!”
엉켜 넘어져있던 대런이 벌떡 일어나 발을 동동 굴렀다. 굳은 얼굴의 심판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혈질의 대런이 달려들 기세를 취하자, 조나단이 달려와 대런을 막아섰다.
“대런! 진정해. 아직 시간은 있다고. 흥분 좀 가라앉혀!”
“그래, 대런. 이러면 더 불리해져.”
크로스로 공을 받을 준비를 하고 뛰어가던 태양이 달려와, 대런의 어깨를 툭툭 쳤다. 대런은 자로 잰 듯 정확한 찔러주기 패스가 일품이었다. 공은 언제나 뛰어 들어가는 태양의 발 앞에 떨어져 골로 연결시켜주었다. 오늘도 역시나 뒤에 짧은 패스로 이어오던 공을 받은 대런이 빠르게 달려 나가는 태양에게로 공을 차려는 순간, 상대편의 수비와 엉켜 넘어졌다. 그리고 맨유의 어드밴티지가 분명한데, 심판은 상대편을 가리킨 거다. 대런이 열 받을 만한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절대 항의를 해서는 안 됐다. 그래서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전과가 몇 번 있는 대런이었다. 모두 대런은 다 좋은데, 그 욱하는 성질이 문제라고 인정할 정도이니. 침착한 조나단이 대런을 자중시켰다.
“대런, 설마 이대로 저 쪽에 공을 넘겨줄 생각은 아니겠지?”
다시 위치를 재정비하는 틈에 태양을 씨익 웃으며 눈을 빛냈다. 씩씩거리던 대런이 태양의 눈빛에 정신이 돌아왔는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아니지! 썬! 뛰어!”
대런의 외침과 동시에, 태양은 모두의 예상과는 반대로 상대 진영으로 뛰었다. 대런은 하프 라인을 넘어 공을 몰고 오는 녀석, 방금 자신을 밀쳤던 녀석을 향해 돌진했다. 인터셉트라면 도깨비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쥐도 새도 모르게 하는 대런이었다. 대런은 빠른 발놀림으로 상대방의 발놀림과는 엇박자로 움직이며, 어긋난 틈을 타 공을 낚아채 앞으로 달려가는 태양에게 정확히 패스했다. 상대 진영에는 수비수 한명과 그 뒤로 마지막 관문인 골키퍼 한 명만 있었다.
“와아!”
꽉 들어차지 않은 관중석임에도 함성소리가 대단했다. 태양은 수비수 한명과 공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태양의 이마에서 땀이 떨어졌다. 하얀 피부에 주근깨가 자글자글한 상대 수비도 마찬가지였다. 덥긴 덥구나. 하는 생각이 지나가기 전에, 태양은 왼발로 공을 휘감아 올리고, 오른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 바꿔서 한 번. 두 번. 세 번. 굉장히 빨랐다. 태양의 양 발은 공의 선점과 위치 선정을 한 번에 하며 상대방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계속 빈틈을 찾으려던 상대는 태양의 발재간에 눈동자를 굴리다, 어느 순간 치고 빠져나가는 태양을 놓쳤다. 역시, 태양의 보이지 않는 드리블의 위력은 대단했다. 자신의 앞을 치고 나간 태양을 잡으려 수비수는 죽어라 뛰었지만 스피드만큼은 프리미어 리그 어느 빠른 축구 선수 못지않은 태양을 따라잡을 리 만무했다. 태양은 벌써 골키퍼 앞에 가 있었다.
“썬!썬!썬!”
자신을 연호하는 함성이었다. 골키퍼와 일대일로 마주한 상황에서 그리고 오른발을 들어 올려 골키퍼의 틈을 노리던 태양에게는 아주 찰나 함성이 들렸다 사라졌다.
“이얏!”
기합만큼이나 강력한 공이 휘어져 날아갔다.
“탕!”
“와!”
그물에 정확히 빨려 들어가는 공이 클로즈업 돼서 보였다.
“아악!”
태양이 포효하며 그라운드를 달렸다. 대런이 달려와 태양을 껴안았고, 뒤에 있던 조나단, 루이스, 존 할 거 없이 동료들이 다가와 태양의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태양의 등에 올라탔다. 루즈 타임 8분이 주어지고 뜨거운 날씨에 이미 지친 상대편은 지리멸렬해져 호각 소리가 울리자 쓰러졌다. 태양의 골로 맨유 리저브가 올 시즌 첫 승리를 얻어가는 순간이었다. 땀에 젖은 선수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에워싸 서로를 축하했다.
“윤태양!”
서로의 젖은 어깨를 감싸던 선수들의 귀에 낯선 음성이 찾아들었다. 많지 않은 관중이었다. 고작해야 칠, 팔십 명 되는 관중 사이에서 들려온 소리였으니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중에서도 태양은 눈에 띄게 굳었다. 내가 미쳤나. 너무 듣고 싶어서 이제 환청이 들리는 건가. 태양은 젖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바로 잡았다.
“윤태양!”
설마.
설마.
설마!
미친 게 아니라면, 꿈이 아니라면, 거짓이 아니라면!
태양은 소리가 나는 관중석을 향해 돌아섰다. 열기가 식지 않은 경기장을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로 누군가를 찾았다. 잘 보이지 않았다. 태양은 관중석 가까이 다가갔다. 광고판이 나열된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찾았다.
“…설…서…얼마.”
목이 메었다. 세영이었다. 2년 반 만에 보는. 꿈결에서 보았던, 사진으로 보았던 세영이가 아니라 눈앞에 있는 세영이었다.
“…세…영이니?”
세영이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이마를 가리고 있던 앞머리가 없고, 하나로 질끈 묶었던 긴 머리칼이 돌돌 말려 있었다. 그렇지만 그 깊던 눈동자. 그 조막 만하던 코끝. 그리고 애태우던 입술까지 그대로였다. 그 겨울 헤어지던 그 때와 변함이 없었다.
“이세영!”
메었던 목이 뻥 터졌다. 혼자 부르던, 그리움에 사무쳤던 그 이름. 이세영.
세영이 관중석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와, 태양에게 다가왔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세영만, 그저 윤태양만 보였다. 마지막 계단 하나. 세영은 떨리는 손을 들어 뻗었다. 하지만 태양에게 닿지 않았다. 세영은 촉촉한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몸을 날렸다. 닿지 않으니까, 닿고 싶어서.
“태양아!”
푸른 그라운드에 태양이 쓰러졌고, 세영이 태양의 품 안에 있었다. 태양은 세영의 등을 어루만졌다. 혹시 사라지지 않을까. 이게 다 신기루가 아닐까. 이 뜨거운 이상한 날씨에서 비롯된 환상이 아닐까 싶어서.
“세영아. 세영아. 세영이니?”
“응. 응. 응.”
세영은 들썩이는 가슴은 태양의 가슴에 묻고, 태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약간 자란 것을 빼고는 똑같다. 떠나던 그 날과.
“세영아.”
“응.”
“세영아.”
“응.”
몇 번의 주고받음에 태양은 이제야 실감이 되는지, 세영을 꼭 껴안았다.
“뭐가 되고 싶은지 찾았어?”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 알게 되면….
“응.”
-그 무언가를 위한 게 그 곳에 있다면, 그 때 갈 거야.
“그걸 위한 게 이 곳에 있어?”
“응.”
노을이 지는 초겨울. 세영이 태양에게 다짐처럼 했던 말. 태양은 안고 있는 세영의 어깨 너머 뜨거운 태양을 보며 묻고 있었다.
“못 견디게 좋아하는 걸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라운드에 뉘인 태양의 머리가 점점 식어갔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와야만 했어.”
세영의 목소리가 태양의 목덜미를 흔들었다.
“못 견디게 좋아하는 게 뭔데?”
세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세영의 말간 눈동자가 태양을 향했다. 깊고 깊은.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눈동자에 태양도 빨려 들어갔다.
“태양.”
그리고 닿는 촉촉함. 영원히 기억할 촉촉한 입맞춤.
이글거리던 태양이 점점 소멸하며 마지막 빛을 뿌렸다. 그 아래, 아주 푸른 잔디가 펼쳐져 있다. 마치 초원처럼. 그리고 흩어진 빛의 한 줄기 쏘였다. 초원의 빛. 멀리서 그라운드에 쓰러져 아련한 입맞춤을 하는 둘을 보고 있는 태양의 동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초원의 빛이라고. 빛이 스러지고, 태양이 사라진다. 매일 찾아오는 노을이 젖어들었다. 승리를 자축하던 태양의 동료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뒤를 돌아 저벅저벅 걸어갔다.
태양아, 매일 노을이 지면 어둠이 찾아왔어. 너를 숨겨버렸어. 빛나던 너를 숨겨버렸어. 사라진 너를 보고, 나 너무 보고 싶어서. 그리워서 죽을 거 같았어. 그런데 있지. 아침이 오면, 언제나 아침이 오면 네가 다시 나타나더라. 나를 향해 너는 뜨거운 빛으로 인사했어.
안녕, 세영아. 라고.
그래서 나 너에게 답해주려고.
안녕? 태양아.
베로베로님...완결축하드려요. 태양이랑 세영이랑 이제 함께 날아가는거군요...^^
읽는내내 아련한 그리움 같은것이 자꾸 생각나서 막.. 마음이 찡하고..간질간질하고 그랬어요..
나는 저나이때 뭘 꿈꾸엇던가 그런생각도 해보고...너무 늦엇지만..즐겁게 읽고갑니다.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