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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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탁. 탁. 탁.


일정한 둔탁함이 이어지고 있었다. 새하얀 책상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서너 권의 책이 한쪽으로 밀려있는 책상은 참 깨끗하다. 연필 자국, 지우개 가루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맑은 책상 위로 까만 머리칼이 펼쳐졌다. 세영은 차가운 책상에 비스듬히 머리를 뉘여 일정하게 움직이는 휴대폰을 보았다. 태양의 웃는 눈빛이 세영을 향해 있었다. 인화된 사진이었다면, 이미 닳고 달아 색이 바랬을 거다. 수천 번, 수만 번 보고 있는 얼굴이다. 눈을 감아도 똑같이 그려낼 수 있는 얼굴. 눈썹은 약간 올라가게. 콧날은 선명하게. 살짝 말려 올라간 입술 끝에는 콕 점을 찍어주고. 광대뼈는 약간만 도드라지게. 세영이 초상화를 그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이 사진보다 더 실물처럼 그려낼 수 있으리라.


세영이 벌떡 일어났다. 풀어헤친 머리가 사방팔방으로 날렸다. 답답하게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귀 뒤에 걸쳐놓고 손가락을 바삐 움직였다.


-점심은 먹었어? 날씨 좋


엄지손가락이 갈 곳을 잃고 멈췄다. 한참을 화면을 들여 보다 꾹꾹 자판을 눌렀다. 글자가 하나하나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하얀색 공간.


‘훈련 중이겠지.’


생각이 미치자, 슬라이더를 내리고 다시 머리를 뉘였다.


탁. 탁. 탁. 탁.


익숙한 소리가 울린다. 휴대폰을 넘어 시선을 따라간 곳에는 둥근 시계가 보였다.


1시 40분.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먹는 게 세 시간 전이라 배고프지 않다. 오늘 세영은 10시에 일어났다. 주말이라고 10시까지 자본 건 요 몇 년 하지 않은 일이었다. 아프지도 않은데 10시라니. 엄마와 아빠가 골프모임으로 일찌감치 나가지 않았다면 한바탕 잔소리를 듣고도 남을 일이었다. 얘가 해이해졌다느니. 이게 다 학교가 뭐 같아서 그렇다느니. 휴대폰을 비껴 눈이 닿은 곳에는 가지런히 책이 쌓여있다. 그 옆에는 필통의 지퍼도 열려있지 않다. 그리고 다시 휴대폰. 태양의 희미한 눈동자가 세영을 향해있다.


-힘들 거야.


보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개학날, 교실에 들어오고 나니 교실 분위기는 싸했다. 어느 누구하나 세영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다시금 윤태양의 위치가 실감났다. 그리고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세영은 전혀 몰랐다. 그저 비장한 얼굴로 그 싸한 분위기를 헤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서경도 보배도 무표정한 얼굴로 세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렇게 되는 거였나? 이제 다시 안녕인가. 예전처럼 혼자 밥 먹고, 쉬는 시간에 공부 더 많이 하면 되는 거잖아. 이세영, 네가 10년 동안 해 오던 거. 그냥 그렇게 하면 되는 거잖아. 그런데 마음이 무척 아팠었다. 다시 그 누구와 인사하지 못하고, 같이 밥을 먹지 못하고, 이야기 하지 못한 다는 거. 이미 친숙할 만큼 했던 그것들을 하지 못한 다는 거. 그게 참 아팠다. 차라리 친숙한 무엇도 아니었다면, 아직도 그런 것들이 익숙하지 않았다면 다행이련만. 이제 ‘친구’라 명명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세영은 친밀하고 즐거웠다. 아마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라면, 그렇게 한 마디도 안하고 학교에 왔다 집에 가는 생활을 반복하라면, 아마...아마도...지금의 이세영은 못할 거다.


-고생길이 훤하다.


흐릿해진 눈동자를 부여잡으며 안간힘을 쓰던 세영의 등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들려온 정겨운 목소리.


-그러게. 어떻게 되었는지는 남녀관계 다 과정 비슷비슷한 거고. 이렇게 된 거 차후가 문제 아니겠어? 그런데 세영이, 너 앞으로 참 어둠이 짙다. 짙어.


세영이 고개를 홱 들었다. 어느 새, 보배와 서경이 세영의 눈앞을 차지하고 있었다.


-얘들아...


‘너네, 지금 나한테 말 걸어 주는 거야?’


-에, 이세영 뭐야? 그런 느끼한 눈으로 쳐다보지 마. 그런 눈은 윤태양에게만 해라.


보배가 우욱 토하는 시늉을 했다. 세영이 픽 하는 웃음에 눈가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쏙 들어갔다. 평소처럼 말하는 보배와 서경이, 그 때의 감정은 고맙다고도 기쁘다고도 다행이라고도 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저 웃음 끝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친구라는 거구나.’ 친구, 보배. 서경. 그리고 태양이. 충만했다. 세상 모든 만물이 몸을 감싸 안은 것 마냥 따뜻함이 차올랐었다. 행복했던 그 날, 보배가 했던 그 말. ‘힘들 거야’ 그 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제대로 짚어볼 수 없었는데.


“힘들다.”


머리를 돌려 이마를 책상에 짚었다. 내뱉는 숨결이 다시 세영의 얼굴을 덮었다. 보배가 말했던 ‘힘들 거야’, 그 말이 절실히 와 닿을 줄은 그 때 미처 몰랐다. 개학하자마자 태양은 다시 훈련에 돌입했다. 9월 추계연맹전 대비 훈련은 아침이고 낮이고 정신없이 몰아쳤다. 태양이 보내오는 문자는 딱 세통. 아침인사, 점심인사, 저녁인사. 주로 밥 먹었어? 그리고 자기 전 짧은 통화. 잘 자. 이게 벌써 한 달 째. 훈련 때문에 짬이 안 나. 연락 자주 못해서 미안. 이라고 말하는 태양에게 그래. 라고 대답했지만. 적어도 그 때는 그래 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라는 한 마디로 끝내지는 게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휴대폰을 붙잡고 있었고, 책들은 저만치 밀어두고 태양이의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계를 확인하고 언제쯤 연락이 올까 기다리고. 5분마다 찍고 있는 문자에 어이없어 그만두기를 수 백 번. 오전수업에 영어나 수학이라도 있으면 기분은 좋아졌다. 오후에는 훈련을 하는 대신 오전에는 수업을 하는 태양이를 볼 수 있으니까. 고작해야 일주일에 두 번이지만. 그 두 번도 번번이 가로막혔다. 이미 학교에 태양과 세영의 소문은 파다했고, 여자애들의 극성을 심해졌다. 1반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태양을 꽁꽁 둘러싸고 있는 여자애들 때문에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난처한 태양의 눈빛을 마주하면서도 왜 그리 짜증이 나던지. 빈 노트를 펴고 볼펜으로 마구 휘갈긴 것도 몇 번이다.


“힘들다고.”


입으로 뱉고 나니 정말 힘들다. 조울증이 아닌 가 생각될 정도로 시시각각 바뀌는 기분이 마음을 지치게 하고,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복구할 수 없어 힘들었다. 이건 이세영이 아냐. 책 펴놓고 딴 생각하고,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나고, 짜증에 겨워 애꿎은 노트만 버리는 짓을 하는 건 이세영이 아냐. 그런데 다시 돌아갈 수 없다. 힘들고 지치고 짜증나다가도 이세영 미친 거야. 돌아가. 라고 굳게 마음먹다가도 태양이의 문자 하나에, 잘 자라는 전화 한 통에 무너진다. 태양의 연락이 끝나면 다시 기다리면서 힘들어 할 걸 알면서도.


“윤태양. 너 정말 뭐니?”


중간고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한 열흘.


2시 되기 5분 전.


세영은 흘러내린 머리를 빗어 넘겨 묶고 옷장을 열었다. 손에 닿는 대로 옷을 꺼내 입고 가지런히 놓여있는 책을 전부 가방에 넣어 집을 나섰다. 9월로 접어들어 높아진 하늘 아래 빠르게 걷는 세영을 따스한 햇살이 따라가고 있었다.



분류번호 800번 대다. 도서관 제일 안쪽에 가장 구석진 곳. 책장 사이에 있는 창문이 아니라면 햇볕도 안 들어오고 사람도 없는 음침한 곳. 출판된 지 오래된 책만 놓여있는 곳이어서 사람이 잘 찾아오지 않는 곳이었다. 주위에 보이는 시선이라도 있으면 공부가 되겠지 하고 가까운 도서관에 온 터였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어린애들이 즐비한 1층을 지나쳐, 2층에서도 사람이 없는 한 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고서와 헌 전집이 있는 곳이라 서넛이 큰 책상에 띄엄띄엄 앉아있을 뿐이었다. 잡다한 책을 펴놓고 열심히 펜을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니 갑자기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이 끓어올랐다. 후다닥 가방을 열고 책을 죽 쌓아놓고, 필통을 열었다. 준비 운동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수학문제집을 펴고, 막 연습장에 숫자를 적어내려고 폼을 잡을 때만 해도 머릿속에는 공부, 딱 그 한 단어였다.


-드르륵. 드르륵.


이 두 번의 진동으로 사라졌지만.


-어디야?


태양의 것이었다. 매일같이 안녕? 밥은 먹었어? 라고 운을 떼던 문자가 단 세 글자뿐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그 흔한 이모티콘 하나 없이. 어디야? 태양이다 하고 눈이 띄게 즐거웠던 것도 잠시, 기분이 하락했다.


-도서관.


그래서 세영도 꾹꾹 딱 세 글자로 보냈다. 너도 기분 한 번 나빠 봐. 라고 보낸 건데 답이 없다. 정말 기분이 상했나? 긴장된다. 혹시 기분이 상해 답문이 없는 거라면? 내 문자에 질렸나? 싫어졌나? 괜히 초조해진다. 그저 답문 한번 안 보낸 건데. 세영은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잡고 있는 샤프에 힘을 줬다. 샤프심이 톡 부러졌다. 훈련 들어갔을 거야. 그래서 그래. 샤프 꼬리를 반복적으로 눌렀다. 샤프심이 피노키오의 코처럼 점점 길어졌다. 그리고 결국에는 툭 떨어졌다. 휴대폰은 계속 조용하다. 샤프를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멘트 바닥을 긁는 의자 다리의 삑, 소리에 띄엄띄엄 앉아있던 몇 몇의 사람의 시선이 세영에게 박혔다. 살짝 미안함의 미소를 지었다. 책상 주위를 몇 번 돌다 그마저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오자 오래된 서가를 쭉 걸었다. 몇 번이나 휴대폰과 함께.



-드르륵. 드르륵.


답 문자다. 기뻐서 손에 들린 휴대폰을 끌어당기는데 드르륵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액정에 태양이라고 적혀있다.


“여보세요.”


세영의 음성은 아주 작았다. 책상에서도 조금 떨어져 책장 사이에 머물러있는 터라, 사람이 없었지만 저절로 소리가 낮아졌다. 여기는 도서관이니까.


“몇 번대야?”


어제 밤에 들었던 음성이 타고 흘렀다. 초조했던 마음은 어디가고 슬그머니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뜬금없이 몇 번 대라니?


“무슨?”


“분류번호.”


책장에 적혀있는 그 분류번호를 말하는 건가? 세영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800번대.”


“응.”


끊어졌다. 난데없이 전화해서 또 살가운 인사 다 빼먹고 질문 하나 던져놓고 끝났다. 좋았던 기분이 또 나빠졌다. 정말 조울증인가. 정말 심각한 기분변화이다. 세영은 어두워진 얼굴을 흔들고 생각을 다 잡았다. 생각하지 말자. 그냥 바빠서 그렇겠지. 그래, 시합이 코앞인데.


그럴 거야. 그러면서도 이미 갖가지 생각에 초조라는 양념을 치고 있었다. 고개를 흔들며 손이 닿는 거리에 있는 책을 꺼냈다. 표지가 너덜너덜하고 먼지가 수북한 책이었다. 책장은 노랗다 못해 누렇게 바래 거칠거칠했고, 활자도 콩알만큼 작았으며, 세로로 문장이 이어지는 아주 오래된 책이었다. 간간히 보이는 한자가 무슨 말일까 짐작하는데 발자국 소리가 났다. 그리고 오래된 책에 어두운 그림자가 닿았다.


“안녕.”


태양이었다. 상큼한 교복도 매일 입는 유니폼도 아닌 진청바지에 깔끔한 하얀색 폴로셔츠를 입고 있었다. 바람이 조금 차가워졌는데 뭐라도 걸치고 오지.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태양의 사복은 꽤 신선했다. 다시 가슴이 두근두근. 내가 초조하고 화나고 짜증났었나?


“안녕. 훈련은?”


두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 태양이 섰다. 휴대폰 액정화면에 가득 차 있는 얼굴 말고 실물이었다. 이렇게 마주보는 건 개학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조금 마른 것 같다. 얼굴이 해쓱하다. 햇볕에 그을려 하얗던 피부의 흔적은 없다.


“오늘 오전만 하고 끝냈어. 수요일부터 시합이니까.”


세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난다. 액정화면에는 웃고 있는 눈 때문에 볼 수 없었던 그 눈동자가 또렷이 보였다. 한 발자국 내딛었다. 머리로 생각할 새 없이 저절로 발이 움직였다.


“책 읽으러 온 거야?”


태양의 시선이 세영이 들고 있는 오래된 책에 잠깐 머물렀다 다시 세영을 바라보았다. 얼굴 보고 말하는 건 거의 한 달 만인데 익숙하다. 하루 세 번 문자와 한 번의 통화가 태양과 세영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오고 있었나 보다.


“글쎄.”


너 때문에 공부가 안 되서 온 거야. 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그래도 아직 자존심은 있다고.


“그럼 나가자.”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을 흐리는 세영을 한참 보고 있다가 태양이 대뜸 말했다. 태양이는 밑도 끝도 없이 본론만 말하는 구나. 하기는 처음 봤을 때도 그랬다. 갑자기 튀어나와서는 발등으로 차라고 소리 질렀지.


“어디?”


세영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낮아졌다.


“영화보고 밥 먹고.”


태양은 가만 생각하다 말했다. 어제 저녁 형에게 물어본 거였다. 주로 여자랑 무엇을 하냐고. 그 눈치 빠른 형에게 티 나지 않게 물어보느라 땀 좀 흘렸지만 동그랗게 눈을 뜨고 쳐다보는 세영을 보고 있으니 그깟 고생이 대수였나 싶다.


“책 읽어야 해.”


다짜고짜 나타나 영화보고 밥 먹자는 태양에게 괜히 심통이 났다. 이렇게 앞에 서 있는 게 너무 좋은데, 그간 많이 연락 못하고 학교에서도 여자애들한테 둘러싸여 있던 게 떠올랐다. 그것도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기분은 나쁘다. 사실, 나는 초조하게 너의 연락만 기다렸는데,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 나가자고 말하는 태양이 때문에 기분이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싫어’라고 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삼킨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럼 나도 책 읽을게.”


순순히 대답한다. 표정을 찡그리거나 당황한 기색도 없이 아무렇지 않게 답하고, 세영이 뽑은 책의 옆에 있던 책을 빼들었다. 역시나 오래된 책이었다. 그리고 정말 진지하게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먼지 가득하고 거칠거칠한 책장을. 그리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로로 읽어야 하는 그 책을 너무 진지하게 보고 있었다.


“정말 읽을 거야?”


“응. 네가 못 견디게 싫어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아야겠어.”


버스 안에서 했던 말. 몇 달 전의 일인데, 그 때 태양과 나누었던 대화는 똑똑히 기억한다. 왜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냐는 태양의 질문에 ‘너도 못 견디게 좋아서 하는 거지?’ 라는 태양의 질문에 세영은 그렇게 답했었다. ‘못 견디게 싫어서 하는 거라고.’ 그 말 아직도 기억하고 있던 거야? 태양의 눈은 책에 묻어 있었다.


“내가 네가 못 견디게 싫어하는 것보다 못한 거야?”


바스락. 책장 넘어가는 소리에 태양의 서운한 음성이 섞였다. 시선은 여전히 책이었지만 세영은 약간 빨개진 귀가 눈에 들어왔다. 쿡쿡 웃음이 나왔다. 너도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구나. 너도 내 말 하나하나에 기분이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는 거지? 도서관임을 상기하며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참을 수 없었다. 목 울림이 떨리지 않는 바람이 빠진 웃음이 나왔다.


“참지 마.”


고개를 숙이고 입을 가려도 나오는 웃음에 안간힘을 쓰는데 태양의 목소리가 바로 위에서 들렸다. 세영이 무슨 말이야. 하는 눈빛을 보이며 고개를 들었다.


“웃는 거 참지 마. 예쁘니까.”


놀라 웃음이 멈추자마자 태양의 눈동자가 가까워졌다. 저번처럼. 태양의 생일날 그 보도블록에서처럼. 그 때와 다른 게 있다면 태양의 눈동자가 좀 더 오래 머무르고 있고, 세영은 그 반짝이는 눈동자를 깊게 음미할 사이도 없이 눈을 꾹 감았다는 것. 그리고 놀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매끄럽고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들어왔다는 것. 이곳은 800번대 분류 번호의 오래된 책이 즐비한 외진 구석.



탁.


세영의 손에 들려있던 오래된 책 한 권이 바닥에 떨어졌다. 세영은 스르륵 뒷걸음을 쳤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연결된 입술과 입술로 태양도 스르륵 따라온다. 턱. 등이 닿았다. 책장과 책장 사이에 큰 프레임을 만들고 있던 창문. 더 갈 데가 없다.


탁.


태양의 손에 들려있던 또 다른 오래된 책 한 권이 바닥에 떨어졌다. 태양의 팔이 세영의 허리를 옭아매려 하고 있었다. 촉촉하다. 세영의 입술은 이슬을 머금고 있는 싱싱한 잎사귀였고, 세영의 여린 입 안은 흩어지는 꽃잎이었다. 한 장 한 장 떨어지는 꽃잎을 줍는 것처럼 태양은 세영의 입 안을 아주 살짝. 그리고 빨리 훑고 이리 저리 도망 다녔다. 세영은 대중없이 움직이는 태양의 말캉한 그것에 갈 곳을 잃고 표류했다. 정처 없이 움직이는 세영의 것을 태양은 살짝 건드리고 지나갔다. 세영의 손바닥이 꾸물거렸다.


‘안고 싶어. 안고 싶어. 안고 싶어. 윤태양을 안고 싶어.’


꾸물거리는 손바닥이 타고 올라와 세영의 팔을 제멋대로 움직였다. 점점 태양의 허리를 감아가고 있었다. 느릿하게. 그리고 미세함 떨림을 가지고. 태양의 허리를 감았을 때, 태양의 말캉한 그것이 세영의 그것을 살짝 건드렸을 때. 그리고 태양의 따뜻한 손이 세영의 허리에 닿았을 때. 생각난 건 오로지 하나.


태양아. 너 너무 좋아.


너무 좋아.


너무 좋아.


너무 좋아.



살랑살랑. 귀밑머리가 보드랍게 뺨을 간질거렸다. 끝물의 여름이 끝나 시원하기 그지없는 바람이건만 세영의 뺨은 땡볕에 익은 것 마냥 벌겋다. 시골집 안마당에 장승처럼 서 있는 감나무에 빨갛게 익어 달려있는 잘 여문 홍시 같기도 하다.


“더워?”


걱정스러움이 가득 묻어있다. 도리도리. 고개만 젖는다. 시선은 온전히 앞을 향한 채. 하지만 느껴진다. 태양의 눈길이 고집스레 세영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볼 빨개. 손바닥은 축축한데?”


세영의 입술이 살짝 깨물렸다. 바보. 윤태양. 그거야 당연히...너 때문이잖아. 너와 맞잡은 손이 얼마나 후끈거리는데. 네가 바라보는 눈길이 얼마나 뜨거운데. 그리고 너와의 키스가 얼마나...얼마나 부드러웠는데. 바보, 바보, 윤태양.


“싫어?”


동시에 살짝 맞잡았던 손을 움직였다.


“아니!”


태양이 정색을 하며 세영의 오른손을 꽉 잡았다. 세영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조금씩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은행나무 길을 걸어가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일 줄은 태양도 세영도 몰랐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만 아니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처음이었고. 사물들이 커지면서 옆을 지나치는 게 아쉽다.


“세영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목소리.


“응.”


“결승에 올라가면...”


고집스레 앞만 쳐다보던 세영이 고개를 올려 매끈한 태양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담담하고도 담담한 태양의 옆모습. 세영의 그윽한 눈동자가 잠깐 사라졌다 나타났다.


“보러 와줄래?”


원하지 않았는데 세영의 눈동자가 살며시 내려앉았다 올라갔다. 그 사이사이 태영의 담담한 옆모습이 언뜻언뜻 비쳤다. 주문이라도 걸린 듯 두 사람의 발길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음...”


이제 세영이 끈질기게 태양을 쳐다보고 태양이 앞을 보았다.


“과외 안 하는 날이면.”


태양이 홱 고개를 돌릴 거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앞을 보고 있다. 담담했던 옆모습에 난처한 빛만 떠올랐다.


“미안. 중간고사였지.”


되레 심각해진 태양의 반응에 세영이의 눈이 커졌다.


“그런데 와.”


놀란 커진 세영이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단호히 말했다.


“응?”


반사조건 같은 반응.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네가 못 견디게 싫어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게 너무 싫어!”


“응?”


“그러니까 와!”


‘뭐야, 태양이 너 지금 심통 부리는 거야? 응? 그런 거야? 어떡해, 윤태양, 너 너무 귀여워.’


세영이 씩 웃더니 깔깔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청아했다. 참으려는 듯 참지 않으려는 듯 터지는 세영의 웃음은 예뻤다. 어리둥절해 세영을 바라보던 태양은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씩 웃었다. 그냥 세영이가 웃으니까. 그녀가 웃으니까. 웃음이 한 가득 가을바람을 타고 옷을 갈아입는 나뭇가지를 건드렸다. 살랑살랑.


햇살이 좋았던 그 가을날. 은행나무 길을 걸으며 함께 웃었던 그 날. 그 날이 영원했다면, 영원했었더라면.......어쩌면 영원하지 않아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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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을 싸는 손길이 느릿했다. 고작 세 권의 교과서와 한 권의 노트. 주위는 시끄러웠다. 간단히 쓰레기만 줍고 가라는 선생님의 말도 무시한 채 모두 삼삼오오 모여 교실을 빠져나가기 급급했다.


“너 진짜 갈 거야?”


시끌벅적한 소리 사이에 보배의 목소리가 뛰어들었다. 특별구역 청소라 땡땡이 칠 수 없다며 삐쭉거리며 사라지더니 벌써 나타났다. 역시 그거 때문이겠지.


“그럼. 이런 기회는 정말 흔치 않다고!!!”


서경이 청소도구함에 대걸레를 넣으며 소리쳤다.


“그렇기는 한데. 내일 공포의 국어야. 윽.”


“야, 그럼 넌 코 박고 공부나 해라. 어차피 국어는 예측불허 문제만 내잖아. 그리고 이보배, 네가 공부한다고 잘 볼 거 같아? 어차피 저거 봐. 다 가잖아. 고로 내일 시험은 모두 죽 쑬 거야.”


“진짜? 정말? 너 장담해?”


“아! 그럼!”


세영은 서경과 보배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고 다시 손을 움직였다. 이전보다 더 느려진 손짓이었다. 괜히 필통을 열어 펜을 세어보고 다시 닫고, 노트를 한번 죽 훑어보고. 역시 그거 때문인가.


“어이, 이세영.”


세영의 미간이 갑자기 모아졌다. 쭈글쭈글. 서경의 손바닥이 탁. 세영의 등을 강타했다.


“안 가?”


훑고 있던 노트를 가방에 넣었다. 아주 찬찬히, 무슨 신주단지 모시는 것 마냥 잘.


“가겠지. 낭군님이 출전하시는데. 거기다 두구두구두구두구 대망의 결승전! 뺨빠밤!!!”


추임새까지 넣으며 호들갑을 떠는 보배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렇게 신나는 걸까? 저렇게 즐거운 걸까? 저렇게 재밌는 걸까? 세영은 복잡한 심경이 깔린 눈빛을 숨길 수 없었다.


“야, 왜 그런 눈으로 봐?”


보배가 괜히 머리를 만지며 세영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도 세영의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가야 하는 건가?”


서경과 보배의 눈이 커진 것은 물론이고, 오늘 결승전에 대해 떠들던 무리들이 세영을 쳐다보았다.


“야, 세영아, 너 왜 그래? 결승전이잖아. 태양이가 한 번도 지지 않고 올라간 결승전. 그리고 이 대회가 얼마나 큰 대회인 줄도 알잖아. 네가 안 가면 누가 가?”


세영의 입술이 지그시 물렸다. 서경이의 말이 옳다. 안다. 태양이가 심통을 부리며 꼭 오라고 했던 결승전이다. 태양이가 혼신의 힘을 다해 보냈던 뜨거운 여름의 결과물이다. 오매불망 세영의 속을 태우고 올라간 경기이다. 그리고 보고 싶다. 태양이가 보고 싶다. 그런데 세영은 망설이고 있었다.


“어머? 진짜 이세영 너무 한다. 뭐야? 남친이 경기한다는데. 그럼 그렇지. 이세영이 중간고사를 두고 경기장으로 갈 리가 없지.”


교실 뒷문으로 사라는 무리 중 한 명이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복잡한 세영의 눈망울 안에 서늘한 빛이 스쳤다.


“뭐야? 누가 사람 앞에 두고...”


성격 급한 보배가 홱 돌아서서 외쳤지만, 이미 무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신경 쓰지 마. 괜히 샘나서 그래. 그러니까 네가 가면 되지.”


머쓱해진 표정을 감추며 보배가 세영을 부추겼다. 세영은 깨물던 입술을 놓고 가방을 닫았다.


“너 정말 중간고사 때문이야?”


잠자코 있던 서경이 기어이 물었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가방을 메던 세영의 손길이 잠깐 멈췄다. 백퍼센트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세영은 처참히 구겨져 책상 속에 쑤셔 넣은 시험지를 상기했다. 국사, 수학, 윤리. 세 개의 시험지를 받아들고 세영은 처음 외고에서 시험을 보았던 그 날이 생각났다. 떨렸고 불안했다. 한 번에 읽히던 문제들을 두 세 번씩 읽어야 했고, 수학은 간단한 더하기 빼기가 맞지 않아 다시 풀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야 했다. 문제를 다 풀고 나서 몇 번은 검토하는 평소에 비해 오늘은 OMR카드도 허겁지겁 작성했다. 마지막 종소리가 울렸을 때, 손은 부들거리고 있었다. 떨리는 손을 보면서 세영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화가 났지만 절망적이었지만 이유를 알고 있었으니까. 지난 몇 주, 책을 펴도 펜을 잡아도 공부를 하는 게 아니었다. 언제나 생각의 끝은 윤태양. 바로 윤태양이었다. 시험이 다가오면서 초조해졌지만 태양이의 경기가 더 걱정이었다. 혹시 다치지는 않았는지, 이기지 못해 풀이 죽어 있는 건 아닌지. 결국 오늘 아침 시험지를 받아드는 그 순간, 불안함은 극도에 올랐다.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불안감이 시험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분명 아는 데 답을 쓸 수 있는데 손이 떨렸다. 가눠지지 않는 불안감. 이 불안감을 꼭 일 년 만에 다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불안함의 결과는 항상 절망적이다. 시험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손이 떨렸다. 세영은 꽉 주먹을 말아 쥐었다.


“만약 그렇다면...?”


세영의 두 주먹에 파란 핏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그럼 너 평생 후회할 거야.”


왜 그 순간 일말의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말하는 서경이에게 안도했을까? 세영은 마른 입술을 촉촉이 쓰다듬었다. 후회라...


“갈 거야.”


세영의 입 꼬리가 아주 잠깐 움직였다 멈췄다. 부유하던 물질로 어지러웠던 눈동자가 깨끗해져 있었다. 빠른 발걸음으로 교실을 나가는 세영을 따라 보배와 서경이 웃으며 달려 나갔다. 세영은 달려드는 서경과 보배를 향해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도 모르게.


-이래도 저래도 후회하겠지만….


하지만 가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세영과 태양이 조금은 편했을지도….



그 날은 완연한 가을이었다. 하늘이 저만큼 높았고 따가운 광선이 드넓은 그라운드를 무한정 쏘아댔다. 하지만 오후가 되서는 멀리서 우중충한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오후에 약한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기억났다. 경기장의 한 쪽에는 회색의 물결이 펼쳐진 반면, 반대편은 남색의 물결이 물들였다. 넓은 경기장에 비한다면 얼마 되지 않았지만 고교축구 결승전에 이만큼의 관중이라면 놀라운 것이었다. 몇 명씩 무리지어 맨 앞부터 중간까지 약간의 공간을 두고 앉아 있었다. 선수석과 가까운 자리에는 모자를 쓴 학부모들이 차지했다. 경기장에 들어서자마자 보배와 서경은 쭉 둘러보더니 제일 앞으로 갔다. 경기가 잘 보이는 중간을 기준으로 좌우는 이미 극성 열혈 팬으로 채워져 있어 왼쪽 코너에 자리를 잡았다. 그나마 후반전이 우리 골대 뒤쪽이라며 좋아하는 서경과 보배였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호각이 울렸다.


저 멀리 원을 그려 몰려있던 축구부원들이 흩어져 자리를 잡았다. 아주 멀리, 좋은 시력으로도 그저 윤곽만 보이는 곳에 있었지만 한 눈에 알아봤다. 등번호 10번을 달고 최전방에 서 있는 윤태양을. 꼬박 보름을 보지 못했다. 경기도 일대에서 토너먼트로 하루 걸러서 경기를 치르는 통에 세영이 가슴을 얼마나 졸였던가. 자기 전에 걸려오는 전화 한 통. 태양이는 공부에 방해된다고, 그리고 세영이는 경기에 방해된다고.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위해 배려하고 또 배려한 전화 한 통이었다. 하지만 세영이는 전화 한 통을 받을 때까지 초조하게 울리지 않는 휴대폰만 바라보았다.


‘태양아, 그거 아니? 초조하게 멍하니 있다가 네 전화 받을 때면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건네는 나를 눈치 챘어? 나는 오늘 시험도 엉망진창으로 봤어. 내가 왜 그랬는지 아니?’


세영은 태양이 앞에서는 말로는 절대로 꺼내질 못할 이야기를 그저 눈짓으로 이야기했다. 그것도 아주 멀리에서 달려오기 시작하는 태양에게로. 태양이는 질풍처럼 질주했다. 옆으로 앞으로 뒤로. 세영이는 태양이의 눈만 쫓는데 태양이의 눈은 공을 쫓았다. 심장이 뜨끔거렸다.


‘나 여기 있어. 태양아. 윤태양, 나 여기 있다고.’


다가오는 가 싶더니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공이 큰 포물선을 지어 우리 편 진영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축구공은 참 쉽게도 태양이에게 뻗어갔다. 그리고 태양이는 참 쉽게도 낚아챘다. 이세영이 여기 있다는 건 알아주지 않는데,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너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아주지 않는데. 공을 참 쉽다. 한숨이 나왔다. 아주 깊은.


“웬 한숨이야? 응원을 해야지! 완전 막상막하라고. 역시 J고 잘하기는 잘한다. 저번 연습경기보다 훨씬 재밌지 않아?”


어깨를 툭툭 치며 열을 올리는 보배 덕에 그제야 째지는 여자애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J고 학생들의 응원도 엄청났다. 경기장을 반도 메우지 못한 관중인데 응원은 월드컵만큼 강렬했다. 가만히 있는 세영은 이 공간에 속해있지 않은 투명인간 같았다. 선수들 몸이 풀리기 시작하고 경기가 흥미진진해지자, 서경과 보배는 본격적으로 일어나 경기상황에 따라 일희일비했다. 한 명, 두 명 일어나더니 아예 관중석 전체가 일어나 학교 이름을 외치고, 공을 잡은 선수의 이름을 외쳤다.


“윤태양! 윤태양!”


단연 많이 들리는 이름. 세영은 관중석 저 끝에서부터 고개를 찬찬히 옮겼다. 저 많은 사람이 윤태양을 연호하고 있었다. 목이 터져라 윤태양을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시선에 닿은 윤태양.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듯 다른 세상에 있는 듯 달리고 또 달리고 있었다. 태클에 넘어져도 상대편의 거친 파울에도 미친 듯 공을 쫓았다. 세영을 향해 하얀 이가 드러나게 웃던 밝은 미소는 없었다. 아주 치열하게 입을 굳게 다물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윤태양만 있었다.


‘너는 웃지 않는데 왜 그렇게 행복해 보일까? 사람들은 왜 너의 몸짓 하나하나에 죽어라 소리칠까?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너는 오직 공만 생각하고 있겠지. 그래, 윤태양… 윤태양…,윤태양…, 너…….’


세영은 박차고 일어나 두 손을 꼭 잡았다. 상대편의 골대 앞이 접전이었다. 공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선수 사이에 막혀있던 태양의 발이 중심을 잃고 뻗어졌다. 태양의 몸은 휘청거렸지만 공은 태양의 발에 채여 앞으로 전진 했다.


“와아!”


“골인!”


‘너 눈부셔.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 할 정도로 눈부셔. 견디게 좋아서 한다는 게 어떤 건지 이제 알겠어. 아니 나는 오래 전 이미 알아버렸어. 다만 인정하지 못했던 거지. 내가 인정하면……, 그러면 내가 너무 비참해 지니까. 오늘 망설였던 건 중간고사 따위 때문만은 아니었어. 널 보면, 네가 경기하는 모습을 다시 본다면, 나는 돌이킬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거든. 내가 얼마나 볼품없고 비참한 아이인지. 눈부신 네 곁에서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너를 알고, 못 견디게 좋아하는 것을 위해 사는 너를 알고 나는 초조했어. 불안했어. 윤태양의 뒤에 숨어있으면 나도 빛날 거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네가 가지고 있는 빛을 조금을 가질 수 있는 거라 감히 생각했었어. 하지만 너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에 있구나. 나조차는 숨을 수도 없는 곳에 말이야. 그런 터무니없는 것을 바란 내가 너무 비참해. 네가 이렇게 비참한 나에게서 자존심까지 앗아가면 나는 뭐가 남을까? 두려워. 너무 두려워.’


골인을 알리는 호각소리에 뛰어가는 태양의 뒤로 다른 축구선수들이 한 명씩 달려가 얼싸안았다. 서로의 어깨를 등을 두드리고 머리를 헤집는 손길들이 멋있다. 윤태양 뿐만이 아니다. 푸른 그라운드에서 달리고 있는 모든 선수들에게서 빛이 보였다. 굳어져 있던 표정의 선수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언제나 보여주던 태양의 미소도 흩어지고 있었다. 눈부시다.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아, 너무 기뻐서 죽을 거 같아, 그들이 말하는 것 같다. 외면하고 외면했던 질문이 숨지 못하고 표면으로 튀어나왔다.


‘이세영, 넌 뭘 하고 있는 거니? 넌 저런 표정 지을 수 있어? 넌 못 견디게 좋아하는 거 하고 있니? 이세영, 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니?’


세영은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경기를 끝내 보지 못하고, 눈이 부시게 웃는 태양을 뒤로 하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비참하고도 비참하여. 티끌보다 작고 나약한 무(無)존재. 그게 이세영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한 줌도 남아있지 않은 자존심. 아무 것도 없는 이세영은 윤태양을 볼 자격 없으니까. 이제 이세영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관중석 사이의 문으로 사라지는 세영의 뒤로 때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부슬부슬. 청명한 소리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가을비가 내렸다. 갑작스런 비에도 관중들의 함성은 끊이지 않았고 경기장의 호각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다행이야.”


세영의 달싹이는 입술 사이에 가을비가 떨어졌다. 촉촉함이 퍼진다. 그래도 차가운 빗물이 어두운 하늘이 있어서 다행이다. 비참한 지금, 외롭기까지 한다면 떠날 수도 없으니까. 세영의 뒷모습은 천천히 함몰되어 갔다.



“야아! 특종이야! 초특종!”


음악시간이 끝나자마자 식당으로 달려간 아이 중의 한명이 황급히 교실로 달려들며 소리쳤다. 이왕지사 늦은 거 천천히 가자고 교실로 돌아온 얘들이 깜짝 놀라 시선을 집중했다.


“뭐야? 오늘 떡볶이라고 미친 듯이 뛰어가더니. 국에서 애벌레라도 나온 거야?”


“애벌레가지고 특종이라고 하면 혜자 너 죽는다!”


책상 안에 음악책을 집어넣으며 지현이가 으름장을 놓았다.


“헉. 헉. 진짜! 진짜! 헉. 잠깐만.”


있는 힘껏 달려와서 혜자는 곧 죽을 것 마냥 헉헉댔다. 몇 초가 흐르고 숨이 좀 차분해지자 혜자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떼었다. 혜자의 행동 하나하나가 결연해서 교실에 있는 나머지 얘들은 배고픔도 잊고 혜자에게 집중했다.


“괴물. 괴물 이세영이 주르륵. 확 쭈르륵 미끄러졌어.”


“어?”


“어어어어? 뭐가 미끄러져?”


“우리 학교에 미끄럼틀도 있었냐?”


모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혜자는 답답한지 가슴을 몇 번 쳤다.


“아니!!! 이세영이! 그 전과목 일등 이세영이!!! 공지랄한테 까였어!”


“잠깐! 그러니까 이번 중간고사에서 이세영이 2등이라고?”


“2등이면 초특종 정도는 아니고, 특종정도는 된다. 그래봤자 1,2점 차이 아냐?”


“그러게. 걔도 사람인데 연애하면 솔직히 좀 흐트러져야지. 가뜩이나 태양이도 뺏겨서 미치겠는데 성적까지 잘 나오면 배 아파서 못 살지.”


모두 그 정도는 특종이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더니 시계를 확인하고는 아우성을 치며 혜자를 지나쳤다.


“아니야! 공지랄은 물론이고 완전 쫙 미끄러져서 전교 20등 안에 간신히 턱걸이 했어!”


혜자를 지나쳤던 얘들이 몽땅 멈춰 서서는 고개를 돌렸다. 귀신에 홀린 것처럼 얼이 빠져 있는 사람부터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까지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진짜? 게시판에 떴어?”


“그래. 식당가는 데 학주가 딱 붙이고 있더라. 지나가던 얘들 다 입 벌어지고 학주는 아주 한숨을 내뱉더라. 그래서 지금 교무실 분위기 장난 아냐.”


“어머! 웬일이야! 이야, 원래 공부 잘하는 것들이 연애에 한번 빠지면 무섭게 빠진다더니 이세영이 딱 그 짝인가 보다.”


“자기는 성적 떨어지고 남친은 우승에 MVP라니. 이세영 거품 물고 쓰러지겠다.”


“그래서 걔 요즘 이상했나? 시험 때는 완전 넋 빠져서 있더니 끝나고는 날마다 이어폰만 끼고 있잖아.”


“이세영 반응 좀 보고 싶다. 그 잘난 낯짝이 어떻게 변할 지 궁금해 죽겠네.”


“지금 밥이 문제가 아냐. 성적 보러 가야지.”


식당으로 향했던 발걸음을 교무실 쪽으로 옮기던 얘들이 멈췄다. 가슴에 음악책을 꽉 안고 세영이 서 있었다. 입을 꽉 다문 얼굴은 서늘했다. 의심할 필요도 없이 지금까지의 말을 다 들은 게 분명 했다. 떼거지로 몰려가던 얘들은 숨죽인 채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방금 전까지 호들갑을 떨던 혜자도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세영이가 움직이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할 상황이었다. 세영의 심기를 살폈지만 기분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이세영 낯짝이 어떻게 변할 지 궁금하다던 지현이는 자기 입이 초사라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이? 너네 뭐해? 식당 안 갔어?”


세영의 뒤에서 날아온 서경의 목소리에 굳어있던 얘들은 속으로 구세주라고 외쳤다.


“어? 아, 가...가야지. 지금 막 가려고 했어.”


“오늘 메뉴 떡볶이라는데. 세영아 진짜 안 먹을 거야? 이따 체육인데 좀 먹어. 아참! 담임이 너 찾더라. 그럼 우리가 좀 싸놓을게. 다녀와서 먹어. 알았지?”


서경의 뒤에서 쫓아오던 보배가 말하는 틈을 타, 지현이가 잽싸게 몸을 돌렸다. 다른 얘들도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려 교무실과는 정반대쪽인 식당으로 내달렸다. 우당탕대며 사라지는 얘들의 뒤꽁무니를 보던 보배와 서경은 어리둥절했다.


“쟤네 왜 저래?”


서경이 세영의 표정을 살폈지만 허공을 바라보는 눈빛만 들어올 뿐이었다. 요 며칠 몸이 좋지 않다며 말도 안하고 그저 책상에 누워 이어폰만 끼고 있던 세영이었다. 허옇게 질린 얼굴을 보니 어디가 단단히 고장 난 모양이다. 태양이의 경기를 보러 간 것이 문제였나? 그 날 갑자기 사라진 이후로 얘가 계속 얼이 빠져 있었다.


“야아, 이세영? 세영아?”


“응?”


어깨를 몇 번 툭툭 치자, 그제야 동공에 초점이 맞춰졌다. 여전히 허옇게 질린 얼굴이 서경과 보배에게 향했다. 아무래도 다음 시간부터는 양호실에 보내야겠다.


“교무실?”


듣고는 있었는지, 세영이 보배에게 물었다. 보배는 서늘한 세영의 눈빛에 흠칫 놀라 고개만 끄덕였다.


“내 책상에 놔 줄래?”


가슴에 꼭 안고 있던 음악책 한 권을 건네주고 세영은 위태한 걸음을 떼었다. 기다란 복도를 걸어가는 세영이는 흐물흐물 풀려 가느다란 바람에도 쉬이 날아갈 것 같았다. 똑바로 앞을 향해 걷고 있었지만 세영의 마음은 나아가고 있는 발을 따라가지 못하고 여기저기 채여 만신창이가 되고 있었다. 보배와 서경은 황량하기 그지없는 세영의 뒷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둘은 그렇게 세영을 배웅해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후우-”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이었다. 구기중은 끼고 있던 팔짱을 풀어 목까지 올려져있던 트레이닝 점퍼 지퍼를 쭉 당겨 내렸다. 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이 앞에 놓여있는 성적표에 다시 돌아갔다. 갖가지의 숫자가 난무하는 성적표가 달갑지 않았다. 어떻게 1이라는 숫자만 적혀있던 성적표가 저렇게 화려한 숫자가 가득해진 건지. 역시 그것 때문인가. 이세영도 별 수 없는 십대 청소년이었나. 구기중은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세영을 보았다. 허옇게 질린 얼굴이 세영 스스로도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이세영.”


“네.”


세영의 시선은 아무 곳에도 맞춰져 있지 않았다.


“설명해봐.”


평소답지 않게 진중한 담임의 목소리에 세영은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세영은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었다. 자신이 시험을 볼 때 얼마나 떨었는지, 불안했는지. 그 불안함의 원인이 나 자신이 너무 쓸모없다 여겨져서.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너무나 바보 같아서 그랬다고. 그 복잡한 심경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세영은 지그시 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네가 2등을 했다고 해도 놀랄 일이야. 그런데 20등이야.”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등수였다. 부모님이 들으시면 놀랄 정도가 아니라 기암을 하고 병원에 실려 갈 정도다. 세영은 이제 감각이 사라진 입술을 더욱 세차게 물었다.


“어머님은 S대 법대를 생각하시던데. 어쩌려고….”


세영의 눈이 구기중에게 맞춰졌다. 놀라운 기색을 담아서. 어머니라니. 엄마는 전학을 오던 그 날에도 세영 혼자 학교에 보냈다. 학부모 상담이니 하는 것에도 온 적이 없었다. 그런 꼴통학교에 다니는 내가 부끄럽다며 얼마나 혀를 차셨던가. 그런데 엄마라니. 거기다 S대 법대?


“어머님이 며칠 전에 전화하셨더라. 네가 요즘 통 딴 생각을 하고 사는 것 같다고. 학교에 무슨 일이 있는 거 아니냐며. 이세영. 이 내신이면 S대 밑에 학과도 못 가. 어머님은 S대 법대가 안 될 거 같으면 유학을 생각하시는 것 같던데, 너도야? 그래서 시험 이렇게 본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성적 떨어지는 게 좋아?”


구기중의 말투에 점점 힘이 실렸다. 잠시 엄마의 영향력을 잊고 있었던 자신이 웃겼다. S대 법대? 유학? 나도 가고 싶으냐고? 글쎄. 가고 싶으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하지만 그래서 시험을 이렇게 본 거냐고 묻는다면 아니라는 대답 밖에는 없다. 그리고 성적 떨어지는 게 좋으냐고 물으면...그러면 어떻게 그렇다고 말 할 수 있겠어. 싫어! 싫다고! 그깟 시험점수가 나를 빛나게 해주지 않는 거 알지만, 20등이라는 걸 들었을 때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시험 따위 등수 따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이제 그것마저 남아있지 않다는 것에 비참했다. 이제 이세영은 정말 빈털터리가 된 거다.


“이세영. 너 이러려고 외고에서 전학 온 거야? 아니잖아. 네 녀석도 뭔가 생각이 있어서 온 거 아니야? 설마 외고에서 왔다는 걸로 자만한 거야? 공부하지 않아도 1등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한 거야?”


세영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아니야! 이러려고 전학 온 거 아니야! 나는…난 S대 최고학과에 들어가려고, 그 잘난 놈들 코를 납작하게 해 주려고, 그래서 온 거야. 그래. 이세영. 넌 그래서 온 거야. 그런데…그런데…, 이제 알았다. 내가 아무리 S대 최고학과에 들어가고 그래서 걔네들 코를 납작하게 해 줘도 빛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다른 일도 있다는 거 안다. 그리고 나는 네가 그 일을 컨트롤하지 못 할 정도로 어리지 않다고 생각해. 지금까지 쭉 잘 해왔으니까. 네 욕심이 네 그릇이 크다는 거 아니까, 네가 이 정도 일에,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너도 지금 속상하지? 그럴 거다. 잘 다스려. 세영이 네 길은 이 길이야. 모두 네가 능력 있다는 걸 알고 또 우리의 기대에 부흥해 줄 거라는 것도 안다. 그러니 딴 생각하지 말고 그저 한 번 실수했다 치고 다음 시험 준비 잘해. 알았어?”


세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속상하다. 울컥울컥 솟아나는 응어리에 눈물이 날 것도 같다. 이 길이 내 길이다. 그저 공부하고 시험을 잘 보고 남들이 말하는 일류대학에 가는 것. 나에게 다른 길은 없다. 구기중의 말이 백번 옳다. 이세영은 윤태양처럼 빛날 수 없다. 못 견디게 좋아하는 것 따위 백 만년이 흘러도, 천만년이 흘러도 찾을 수 없다. 이세영은 애초에 그런 것 따위는 찾을 수 없게 태어난 사람이니까. 공부라도 하지 않으면, 1등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세영은 부정당하고 마는 그저 그런 사람인 거다. 욕심? 그릇? 그런 거 따위 없다. 하지만 1등하지 않으면 남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지면 부정당하는 그런 사람이기에 해야 한다. 공부를. 1등을.


‘이제 빛나는 거는 바라지 않아. 나는 빛나는 윤태양을 보는 것만으로 눈이 멀어버린 사람이니까. 감히 그 근처에 접근도 못하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니까. 그저 이세영을 부정당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이세영, 너는 1등을 해야 해. 그리고 S대 최고학과에 가는 거야.’


“이세영, 알아들었어?”


세영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길이 내 길이야!’


“네.”


“휴. 그럼 나가봐.”


구기중은 세영의 대답이 자못 마음에 들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성적표를 접었다. 세영은 목례를 하고 상담실 문으로 조용히 걸었다. 다시는 이곳에 들어오지 않으리라. 이 순간부터 내 길을 가는 거다. 아무 것도 보지 말고 듣지 말고 이 길만 가는 거야. 세영이 서글픈 다짐을 하며 문을 열려는 순간, 똑똑하는 소리가 문 저편에서 들렸다. 세영이 문을 열기도 전에 문이 스르륵 열렸다. 반장이었다.


“선생님, 비품실 열쇠 가지러 왔는데요.”


“아, 여기 있다. 다음 시간 우리 반이야?”


“네.”


“그럼 니들 빨리 준비하고 나와라.”


열쇠를 받아들고 나가는 반장의 뒤로 세영의 걸음도 빨라졌다. 이제 넋을 잃고 허망한 나날을 보내던 이세영은 없다. 이룰 수 없는 꿈은 꾸지 말고, 이세영, 넌 네 길을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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