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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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가 공돌았다. 더운 여름에도 차가운 성질을 띠고 있는 문고리를 돌렸다. 예상대로 쉽게 열렸다. 요란한 TV소리가 가장 먼저 반겼다.


“다녀왔습니다.”


“왔냐?”


참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문 열려있더라. 또 형이 안 잠그고 들어왔지?”


양 발을 지렛대 삼아 운동화를 벗었다. 약간은 힘겹게 오른쪽을 벗고 나니 왼쪽은 가볍게 빠졌다.


“무슨 소리야. 어무이가 참기름 떨어졌다고 방금 나가셨거든!”


요란한 TV소리가 좀 줄여진다 싶더니 바다가 꽥 소리를 쳤다. 어지간히 억울한 모양이다. 문 잠그고 들어오라는 잔소리를 귀에 딱지가 생길만큼 듣는 바다였기 때문에 이번은 아니라는 것을 극구 강조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태양은 피식 웃으며 현관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갔다. 거실 큰 창 밖 뒤로 분재를 가꾸는 아버지가 보였다.


“다녀왔습니다.”


TV앞을 성큼 가로질러 조금 열린 창을 활짝 열었다. 일주일 만에 보는 아버지였다.


“어, 왔니? 연습은?”


“이번 주 주말까지 없어요. 다음 주 월요일이 개학이라서. 중국출장은 어떠셨어요?”


분재용 가위를 들고 있던 아버지가 허리를 감싸며 활처럼 당겼다.


“덥더구나. 입추도 지났는데. 아침에 미역국은 먹었지?”


생일 축하한다는 표현을 에둘러서 하는 것이라. 출장도 일부러 태양의 생일에 맞춰 끝내고 오셨다는 걸 안다. 짐짓 엄한 척하셔도 바다와 태양을 끔찍이 생각하셨다.


“그럼요. 한 그릇 다 비우고 학교 갔어요.”


“네 엄마가 음식 하더구나.”


“네, 씻을게요.”


다시 허리를 숙이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큰 창을 밀어 닫았다.


“야, 뭐 없냐?”


왔던 길을 되돌아가던 태양을 소파에 반쯤 누워있던 바다가 잡았다.


“뭐가?”


“왜. 엄청난 선물 꾸러미들.”


바다의 시선이 태양의 홀쭉한 책가방과 왼손에서 달랑대는 종이가방에 차례차례 머물렀다.


“없어.”


“아니! 왜?”


푹신한 소파의 등에 기대었던 머리를 팍 쳐들며 바다가 소리쳤다. 태양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긴, 그냥.”


“뭐? 그냥? 야! 설마 다 버렸냐? 준 사람 성의도 있지. 우씨, 오늘 일찍 들어온 보람도 없네.”


얼씨구. 방학과 동시에 허구한 날 새벽에 기어들어오다 갑자기 일찍 들어왔다 했더니, 저런 속셈이 있었군. 태양은 쯧쯧하며 바다를 흘겨보았다.


“버리긴. 부실 사물함이랑 학교 사물함이랑, 기현이 사물함도 빌리고. 대충 먹을 거는 얘들이랑 나눠먹고.”


세영이를 만날 건데, 그 많은 걸 들고 어떻게 만나. 태양은 작년보다 많은 선물들을 생각하며 몸서리쳤다. 예년보다 값비싼 선물이 많아 되돌려주려고 했지만, 이름도 없고 반도 없어. 할 수 없이 그냥 사물함에 고이 모셔두었다. 다들 무슨 생각으로 그런 고가의 선물을 이름도 안 밝히고 가져다주는 건지. 윤태양이 뭐라고. 윤태양을 얼마나 안다고. 태양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몇 몇 사람들을 생각하며 혀를 찼다.


“좀 나눠 가질까 했더니. 쳇. 가져오기는 할 거지?”


“뭐야? 형도 매년 그렇게 받으면서.”


“너만큼은 아니지, 임마. 너는 나의 수십 배야. 거기다, 네 건 일단 요게 좀 나가잖아.”


검지와 엄지를 이어 동그라미를 만들어 흔들었다. 음흉한 미소와 함께. 정말 내 형이지만, 이럴 때 보면 참 부끄럽다. 태양은 바다를 무시하고 넓은 주방의 한가운데 떡하니 서 있는 냉장고로 향했다.


“그래! 윤태양, 잘나셨어요.”


바다는 대꾸 없는 태양에게 입모양으로 마구 욕을 해주고는 다시 TV에 집중했다. 그런데 불현듯 생각났다. 그 재수 없다고 말한 여자애는 생일 선물로 뭘 주기는 했나? 스윽 고개를 돌리니, 태양은 갈색봉투에서 줄줄이 우유를 꺼내고 있다. 하나, 둘, 셋, 넷......끝이 없다. 쟤가 우유에 환장을 했나. 늦더위에 뭔 놈의 우유를 주렁주렁 사왔대?


“야, 너 무슨 우유보급소에서 일하냐? 무슨 우유가 그렇게 많아?”


바다의 외침에, 태양이 쓱 고개를 들더니,


“형, 이거 먹지 마! 손도 대지마!”


으르렁거렸다. 에헤? 우유 못 먹고 죽은 귀신이 붙었나? 우유를 잘 먹는 녀석이기는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야, 네가 상하니까, 먹어줘~ 먹어줘~ 하고 쫓아다녀도 안 먹는다.”


“진짜지? 저번처럼 홀라당 마셔버리지 마.”


“야! 내가 언제 마셨다 그래. 얘가 생사람 잡네.”


“정말? 못해도 30분은 가야되는 B마트에, 그것도 반짝 세일 한다고 밤 11시에 뛰어가서 사온 멸균우유 2리터. 그거 기억 안 나? 아버지는 출장 중이셨고. 어머니는 우유 안 마시는 거 알지? 그럼 누가 남더라? 뻔뻔한 윤바다가 남는 군.”


냉장고 문을 잡고 태양이 바다를 잡아먹을 듯 눈을 부라렸다.


“그게 네가 사온 거였냐?”


곧 죽어도 깨갱이라고 바다는 눈썹을 한번 쓰윽 올렸다 내리고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말을 했다. 태양이 우유를 들고 들어오는 것 까지 다 보고 있었으면서! 태양은 팽 소리치고 싶지만 저 만 겹의 가죽을 두른 두꺼운 낯짝 앞에서는 씨알이 안 먹힐 소리였다. 태양은 이를 득득 갈며 우유 넣기에 집중했다. 음료를 넣어놓는 문 안 쪽 공간이 모자라 반찬통을 한 쪽으로 몰아 공간을 만들었다.


“그 여자애는 뭐 줬어?”


어느 새 바다가 주방 식탁 의자에 앉아있었다.


“누구?”


조심스럽게 우유를 하나하나 뒤에서부터 차곡차곡 배열했다. 태양의 손길은 아주 세심했다.


“너한테 재수 없다고 한 애.”


우유 넣기 작업에 몰두하던 태양이 단번에 고개를 돌려 바다를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알아서 뭐하게?”


바다는 이상한 태양의 반응에 윙 소리를 들었다. 이 소리는 바다의 뇌에만 있는 재미를 발견했다는 신호. 옳다구나! 윤태양, 뭐가 있었구나. 오호, 왜 이 녀석 일을 까맣게 잊고, 술을 퍼 마셨는지. 그 물도 안 좋은 클럽에서.


“뭐하다니. 그게 첫 번째인지 두 번째인지, 그거 알았냐?”


마지막 우유를 집던 태양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시선이 떨어졌다. 한 손에 잡히는 200ML 우유로. 그리고 세영의 얼굴이 겹쳐졌다. 천천히 드러나던 하얀 이. 그 주위에 묻어있던 초콜릿 우유. 그리고 엄청나게 달콤했던 입술. 아주 단, 아주 달콤한...달콤한. 태양은 빠르게 우유팩의 입구를 열어 꾸륵꾸륵 들이켰다. 몇 초 안에 빈 우유팩을 탁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럼!”


그리고 씨익 웃었다. 바다는 4배속 영화를 본 것처럼 샤샤삭 지나간 장면에 눈을 깜박였다. 이거 뭐야? 어...어...감이 온다. 분명 첫 번째 의미였고, 아니 그걸 넘어선 더 대단한 뭔가가 있었다. 바다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디까지?”


“뭐가?”


태양이 냉장고 문을 닫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키스? 아니다. 넌 특별히 성장이 느린 아이니 손잡기?”


“뭐?”


태양의 입이 함지박하게 벌어졌다.


“형! 됐거든.”


“그럼 예뻐? 몸매는? 키는?”


태양이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자 바다가 졸졸 쫓아왔다. 윤바다 성격에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게 분명했다. 그래도 태양은 절대로, 한 마디도, 아무 것도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윤바다의 입으로 말할 거 같으면 그 무게를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벼웠다.


“오라. 못생기고 뚱뚱하고 땅딸만한 여자애인가 보네?”


뭐? 세영이가 못 생기고 뚱뚱하고 땅딸만하다고? 이건 세영이에 대한 최고의 모욕이다. 깊이 있는 동그란 눈동자에, 살짝 올라간 콧방울에, 너무나 달콤한 입술에. 안쓰러울 정도로 가는 손목의 소유자에게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태양이 뒤돌아 바다에게 돌진했다. 그리고 입술을 꾹 다물고 눈빛으로 바다를 압도했다. 물론 그렇다고 절대 기죽을 바다가 아니었다. 형만 한 아우 없다고, 바다는 태양의 강함을 부드러움으로 제압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너 눈 안 아프냐?”


‘쳇. 윤바다!’


태양은 조그마한 욕설을 뱉으며 몸을 돌려 상의 단추를 끌렀다.


“사진 없냐? 윤태양이 형한테 눈까지 부라릴 정도로 생각하시는 그 여자 분이니 사진 정도는 있겠지? 요즘 다 그렇고 그런 관계는 딱 폰카로 찍어서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저장해 놓는 거다.”


바다가 주절주절 떠들었다. 그리고 태양은 옷을 갈아입는 척하면서 귀를 쫑긋 세웠다. 폰카? 배경화면? 다 그런 걸 한다고? 하기는 그러면 수시로 세영이의 얼굴을 볼 수 있겠네. 그런 좋은 방법이 있었다니. 먹을 거 없이 비싸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휴대폰이 이렇게 유용하게도 쓰이는 군. 태양은 편한 바지를 남은 왼쪽 다리에 꿰고,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설마, 너 휴대폰 안 들고 다녔냐?”


태양은 바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안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전원 키를 누르는 폼을 보니 몇 달 전에 산 최신형의 휴대폰을 고스란히 어두운 서랍에 모셔두었던 게 분명했다.


“어이쿠, 이봐요. 크로마뇽인! 지금은 2007년이에요!”


“아! 쓸 일이 없잖아. 들고 다녀봤자 또 모르는 여자애들이 문자 보내고 전화 걸고 그럴 텐데. 귀찮아.”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알아서는 초 단위로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해대는 통에 죽을 맛이었었다. 또 굳이 휴대폰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훈련에 수업에, 휴대폰 붙들고 살 시간도 없었고, 반 얘들이나 다른 학교 축구부와 연락할 때는 주로 메신저를 이용했기 때문에 휴대폰은 거치적거리는 부속품일 뿐이었다. 적어도 방금 전까지는. 형은 진즉에 말해 줄 것이지. 뭐 하러 쓸데없는 질문으로 시간 낭비했는지... 월요일에는 꼭 사진 찍어서 저장해야지. 그리고 배경화면에 넣고. 그것도 배시시 웃는 얼굴로. 세영이의 웃는 모양을 생각하니, 가슴이 뜨겁게 벅차올랐다. 바다는 황홀해하는 태양의 표정에 기가 찼다. 이 자식, 이거. 완전 맛이 갔네. 아주 확 갔어.


“그럼 너 번호도 없냐? 그 여자애 번호?”


그러고 보니 없다. 세영이의 검은색 휴대폰은 만날 때마다 봤는데 정작 그 안의 중요한 알맹이는 몰랐다.


“그렇고 그런 사이는 맞는 거야? 이거, 이거, 이상한데. 뭐 그런 사이면 남자가 안 물어봐도 여자가 알아서 번호 주고 그러는 건데. 진짜 이상하다. 윤태양, 설마 너 혼자 삽질하고 있냐?”


바다의 말투는 얄미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진짜? 진짜 그래?”


태양은 이미 바다의 말에 혹한 상태였다. 쯧쯧, 윤태양. 요즘은 영웅이 미녀를 얻는 게 아니고, 눈치와 정보로 미녀를 얻는 거다. 이 눈치 없고 시대감각 없는 둔탱아. 바다는 아주 열심히 태양을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사실, 이럴 때가 아니고는 녀석을 이렇게 쳐다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그럼. 내가 보기에는 너 혼자 아주 열심히. 아주 꿋꿋이 삽질하고 있는 거야. 삽.질!”


태양이 씩씩댔다. 녀석, 조급하지? 미치겠지? 역시 옛말은 위대해! 형만 한 아우는 없다고! 허허허. 바다는 고개를 숙이고 사악한 미소를 그렸다.


“그럼 사랑하는 동생아, 삽질이 힘들면 형에게 말해라. 내가 그래도 한 때 막노동 하겠다고 따놓은 굴삭기운전기능사 자격증 그거 있잖아. 형이 친히 널 위해 포크레인을 끌고 한달음에 달려가마. 그거 있으면 삽질보다는 몇 배는 쉽게 할 수 있다. 흐흐.”


바다는 끝내 참지 못하고 큭큭거렸다. 바보, 윤바다. 태양이의 시뻘건 눈빛을 놓쳤다.


“형. 어제 좀 일찍 들어오지 그랬어.”


슬리퍼를 직직 끌고 나가던 바다가 멈춰 섰다. 얘가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람?


“왜? 네 생일 전초전으로 갈비라도 뜯었냐?”


“아니. 형 앞으로 우편물 왔기에.”


별 것도 아니구먼, 얘가 왜 이러나 싶어 바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 어디 있어? 내 방에 갔다 놨어?”


“아니. 아버지 서재 책상 한 가운데 잘 놓아두었어.”


바다의 고개가 푸르르 떨렸다. 아니, 왜 내 우편물을 아버지 서재에? 설마 휴대폰 고지서인가? 저번 반에 휴대폰 결재를 남발했더니 이십만 원이 넘는 요금에 아버지의 불호령을 들었던 터였다. 설마 내가 또 막 결재했나? 아닌데.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고. 이번에는 아예 고지서를 이메일로 받게 조치를 취해놓은 터였다. 그럼 카드 결재서인가? 이것도 아니다. 이번에는 주로 얻어먹었기 때문에. 그럼...뭐지? 어쨌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일단, 내 손에 그 물건이 들어오는 게 시급했다. 다급히 나가니 베란다에 있어야 하실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왔더라? K대였나?”


설마!!!


“그거 등록금 고지서 아냐? 그리고...”


설마!!! 아악!!!


“아마, 내 기억으로는 그 옆에 성적표도 딸려 있었지.”


으아아아악!!!


“윤바다! 당장 들어와!”


서재 안에서 거대한 고함이 나왔다. 으악, 난 죽었다. 아흐!!! 바다는 아주 죽상이 되어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태양에게 엑스가 가득한 욕을 퍼붓고.


“형! 그래도 우유는 먹지 마! 먹으면 정말 나 꼭지 돈다!!!”


바다의 성정을 아는 태양이 닫히는 서재 문에 대고 최후의 경고를 날렸다. 그래도 불안했는지 태양은 덜컹 냉장고 문을 다시 열어 연거푸 우유를 들이켰다. 이러다 우유 빨리 마시기 대회 1등 먹은 거 아닌 가 몰라.



초록색 시금치 무침, 빨간색 열무김치, 하얀색 물김치, 갈색 버섯볶음, 검은색 김, 노란색 계란말이. 그리고 중간에는 온갖 색이 어우러진 해물탕. 주먹만 한 대하가 둥그렇게 둘러져 있고, 그 사이에 열기를 담뿍 머금고 얼기설기 쌓여있는 깨끗한 두부. 그 위에 어슷썰기 모양의 하얗고 새파란 파가 흩뿌려져 있다. 진한 주황빛 국물 사이에 떠오른 오징어 조각들, 꽃게 다리들. 선명하게 빨간 기름덩이가 둥둥 떠다니는 해물탕은 분명 먹음직스러웠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을 항상 달고 다니시는 도우미 아주머니 덕에 오늘도 역시나 눈이 즐거운 진수성찬. 그런데 세영은 수저를 살짝 입에 물고 아름다운 빛깔이 머무르고 있는 식탁을 조용히 관찰할 뿐이었다.


“얘가 왜 이래? 아직도 열 있니? 너 힘없다고 과외 선생도 말하더라. 너 기운차리라고 오늘은 아줌마한테 너 좋아하는 해물탕 하라고 했는데. 왜 멍하니 있어?”


마주앉은 엄마가 수저를 들어 환상적인 해물탕의 자태를 휘저었다. 딱 요리책에 나왔을 법한 해물과 야채, 두부의 조화는 순식간에 무너져, 그저 그런 잡탕 찌개로 보였다. 더 입맛이 가셨다.


“얘가 진짜? 입...”


“응?”


‘입’이라는 단어가 들리자마자, 단말마와 함께 세영의 구부정한 등이 빳빳하게 세워졌다. 게슴츠레했던 눈도 빨갛게 도드라졌다.


“어휴. 깜짝이야! 얘가 이제 사람까지 놀래 켜! 아니! 입추도 지났는데! 너 아직도 더위 먹은 거니?”


엄마가 과장되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세영은 침을 꼴깍 삼켰다. 빠르게 잔소리를 토해내는 엄마의 입술이 쉼 없이 움직였다. 입, 입, 입...입술. 생각하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썼지만 허사였다. 버스를 타고 어떻게 집에 왔는지, 고작 서너 시간 전의 일인데 뿌연 안개가 가려진 것 마냥 기억나지 않았다. 뚜렷이 기억나는 건, 태양의 입술이 부딪혔다는 것. 바로 내 입술에. 태양의 빛나는 눈동자가 참 많이 가까웠다는 것. 그거 하나만 기억났다. 검은 눈동자가 참 맑구나. 참 깨끗하구나. 그 순간 찾아왔던 느낌. 그 후 두 번 더.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그게 어떤 느낌이었는지. 차가웠는지, 뜨거웠는지, 부드러웠는지, 거칠었는지. 그저 기억나는 건 태양의 눈동자. 그리고 버스를 타고 태양이 바래다 줄 때까지의 기억이 싹둑 자려버린 것처럼 삭제되어 있었다. 비로소 방에 들어와 딱 세영의 키만 한 거울 속에 자신을 들여 보고 나서야 알았다. 마른 복숭아 빛을 하고 있던 입술이 익을 대로 익어 농염한 장미꽃잎 빛을 띠고 있다는 것을. 윤태양의 입술이 이세영의 입술을 훔쳤다. 입술을. 입술을...


은수저에 닿아 있는 아랫입술에 경기가 났다. 찌릿찌릿. 생각할 새도 없이 입술을 앙 다물어 수저를 물었다. 떨림이 납작하게 찌그러졌다.


“다 커서 반찬 투정 하는 거니? 얘가 정말, 자꾸 이상해 져. 너 공부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야? 그깟 보충 수업 뭐라고. 이거 봐. 네 몸만 상했잖니? 정말 너 보면 내가 답답해서 못 살겠다. 영선이 걔는 지금 SAT 준비한 다더라. 아니, 너보다 공부도 못 했던 얘가 미국 가서 아이비리그 가겠다고 아득바득 인데. 네가 뭐가 꿀린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졸업하고 미국으로 보낼 것을.”


동갑내기 사촌 영선이 얘기는 요 근래 새롭게 등장한 레퍼토리였다. 큰아버지 막내딸인 영선은 어려서부터 세영과의 비교대상이었다. 정확히는 세영이의 그림자 격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서 세영이 먼저 걸음마를 하고, 말을 했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반장이다, 경시대회 대상 이다 뭐다 하면서 세영이 훨씬 앞서 나갔다. 그 후로는 안 봐도 뻔했다. 생김새도 세영이 예쁘장해서 어른들은 항상 세영을 보고 흐뭇해하셨고, 영선을 보고는 쯧쯧 혀만 차셨다. 잘 나가는 변호사이신 큰 아버지는 영선을 보다 못해 중학교 졸업하자마자 미국에 보냈고, 요즘에는 안부전화마다 영선이 아이비리그를 갈 거라고 자랑을 했다. 가야 가는 거지만 엄마는 그 말을 듣고 기함을 했고, 세영을 더욱 닦달하는 중이었다. 솔직히 영선의 이야기를 듣고 동요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아이비리그라는 말을 듣는 순간, 주먹을 불끈 쥐지 않았던가. 뭐가 잘나서, 이영선이 아이비리그를!!! 하위 외고도 못 가서 앙앙 울었던 그 영선이었다. 그런데 지금 영선은 아이비리그를 바라보는 미국 고등학생이었고, 세영은 외고에서 실패하고 일반고에 전학 온 그저 그런 고등학생이었다. 몇 날 며칠 눈 감고 잠도 못 잘 정도로 이를 득득 갈만한 일이다. 예전이라면, 몇 달 전의 이세영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세영은 물고 있던 수저를 정결하게 잡고 해물탕의 진한 국물을 떴다. 수저의 주황빛 국물이 앙 다문 입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영선이 걔가 뭐 볼 거 있니? 키도 너보다 작아, 덩치도 있어. 그런데 미국 가더니 음식이 안 맞아서 살이 쪽 빠졌다더라. 그래서 아주 눈도 커지고, 코도 커지고. 아주 네 큰 엄마가 입이 닿도록 말하더라. 예뻐져. 거기다 아이비리그 간다지. 내 눈치만 보던 형님이 아주 당당해지셨더라. 얘! 세영아! 넌 그게 지금 입으로 들어가니?”


세영은 입맛을 다시며 밥 한술을 떠 넣었다. 먹으라고 성화일 때는 언제고 이제 먹는다고 뭐라고 하신다. 엄마는 참 변덕스러운 사람이다. 한두 번 느끼는 게 아니지만, 엄마의 변덕이 기승할 때마다, 세영은 기분이 나쁘다. 엄마는 나를 걱정하는 걸까? 아니면, 엄마 자신을 걱정하는 걸까? 내가 잘 되라고 하는 걸까? 아니면, 엄마의 위신을 위해 그러는 걸까? 외고를 그만두면서 알게 된 엄마의 이면. 엄마는 진정 나를 위하는 걸까? 밥알을 꽉꽉 눌러 옹골차게 만들어 우겨 넣었다. 큼지막한 계란말이를 베지 않고 넣었다. 하얀 두부도 쑥 넣고, 뭉텅이로 잡힌 시금치도 팍팍 밀어 넣었다.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볼이 눈 밑에서 아른거렸다. 우적우적. 그저 씹는다. 엄마의 잔소리도 같이 씹는다.


“얘가! 미련스럽게도 먹네! 입술에 밥풀이나 떼든지. 얘가 갈수록 칠칠맞아져.”


“딩동딩동.”


엄마는 세영의 모습을 쌀쌀맞게 쳐다보더니 벨소리에 후다닥 식탁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먹으면 미련스러운 거야? 엄마는 내가 미련스럽게 보여? 다른 엄마들은 자식이 밥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고, 더 먹으라고 성화라던데. 엄마는 이렇게 먹는 내가 미련스러워? 다른 엄마들은 뭐 묻었으면, 손수 떼 준다는데. 엄마는 못 볼 걸 본 것처럼 정색을 하고 칠칠맞다고 해? 세영은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입을 멈추고 입술을 쓸었다. 조그마한 밥풀 하나가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밥알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공기 안에서 떨어져 나온 밥풀 하나. 밥풀이 나 같다. 외롭게 떨어져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밥풀 하나. 먹자니 뭐해 버려지게 될 운명인 밥풀. 이게 바로 지금의 이세영. 외고를 박차던 그 순간, 이세영은 이 밥풀이 되었다.


“오늘은 김교수님하고 식사하고 오신다더니?”


“김교수가 맹장으로 응급실 갔어.”


“어머머. 웬일이래요? 그래도 방학 때 그래서 다행이에요.”


“내일 한 번 가봐야지. 내일 어떻게 돼?”


“당연히 가봐야죠. 녹즙 드려요?”


엄마가 간드러지게 웃었다. 방금까지 미련스럽다, 칠칠맞다. 야멸치게 나무랐던 목소리가 아니다. 엄마의 변덕은 역시나 기분이 나쁘다. 세영은 꿀꺽 입안에 있는 음식을 삼켰다. 잘게 씹어놔서 인지 매끄럽게 넘어갔다.


“다녀오셨어요.”


어정쩡하게 일어나 인사를 했다. 아빠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빠는 무뚝뚝했지만, 세영이 인사할 때면 “어, 그래. 학교는 어땠니?”라고 물어보는 분이셨다. 그냥 고갯짓 한 번으로, 눈 맞춤 한 번으로 대신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러신다. 엄마의 변덕은 기분이 나쁜데, 아빠의 무반응은 서럽다. 시큼해지는 코끝을 찡그리고, 다시 식탁에 앉았다. 엄마는 분주하게 갈아놓은 녹즙을 살짝 넘치지 않을 만큼 따라서는 사라졌다. 식탁의 오색빛깔 반찬이 정말 맛없어 보인다. 코가 시금시금하더니 눈도 시금시금했다. 이 해물탕 끝맛이 있네. 눈을 깜빡이다, 다시 입술을 쓸었다. 화끈거린다. 아주머니가 청양고춧가루를 넣었나 보다.


크고 동그랗던 깨끗하게 빛나던 태양이의 눈동자가 시야를 메웠다. 눈을 감았다 떴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았다. 태양의 눈동자가 세영을 마주보고 있다. 너는 가지 않는 구나. 너는 나를 외롭게 서럽게 남겨두고 가지 않는 구나.


‘윤태양, 보고 싶다.’


고요한 공간 속에 세영은 값비싼 식탁에 혼자 앉아있었다. 부엌의 창문 뒤로 푸르스름한 어둠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뜨거웠던 여름방학은 끝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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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맴맴맴맴.”


떠나는 여름을 잡고 싶은지, 애절하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교정을 메웠다. 끝물의 진한 더위가 두 개의 현관에서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을 덮쳤다. 서늘한 교실에서 있다 나와서 인지 한층 더 뜨거운 열기에 잔뜩 찌푸린 학생들이 운동장이 아닌 스탠드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햇빛 차양제가 그만인 스탠드 아래에서 움직일 생각을 안 하던 학생들이 학년 주임의 등장에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다. 꽁지에 불붙은 것 마냥 놀라 뛰어가는 얘들을 바라보며 태양은 운동화를 신었다. 걸음이 느릿느릿했다.


“십분 내로 운동장에 정렬하기 바랍니다!”


운동장에 나가서도 뭉텅뭉텅 서 있는 학생들을 보고 학년주임이 소리쳤다. 마이크 대고 말하면서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셨다. 태양은 쩌렁쩌렁 울리는 학년주임의 소리를 무시하고 초연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눈동자는 성급하게 돌아갔다. 왼쪽, 오른쪽, 멀리 또는 가까이. 세영이 어디에 있을까? 몰려있던 학생들이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차례대로 줄을 맞췄다. 흩어지는 얘들 사이에서 세영이를 찾기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빨리 줄 서!”


전교생이 다 나온 개학 첫 날이었다. 쉽게 정렬이 될 리가 없었다. 보다 못한 구기중이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중앙현관을 나오는 각 반 담임들이 제 반을 찾아 줄을 맞췄다.


“어이~ 여기!”


교실에서 나올 때부터 보이지 않던 기현이 1반 맨 끝에서 태양을 부르고 있었다. 여하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녀석이다. 저 멀리 8반을 찾았다. 1반줄에서 8반줄은 너무 멀었다. 그저 똑같은 여학생 교복만 보일 뿐이었다. 빨리 보고 싶은데.


“넌 발도 빠른 녀석이 제일 늦게 나온다.”


기현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태양은 살짝 눈을 치켜떴다. 그만 하라는 뜻. 보충수업 없고 훈련 없는 4일을 이 녀석 얼굴과 대면한 것으로 족했다. 매일 보는 얼굴, 한 4일쯤 보지 않아 잘 되었다 싶었는데. 심심하다며 4일 내내 출석도장을 찍었다. 대단한 성적표로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된 형이랑 아주 죽이 맞아서, 어찌나 잘 노는지. 그러니 그 천연덕스러운 표정은 좀 치우지. 한기현.


“그래도 내가 성의를 아는 놈이잖아. 너 네 집 밥도 많이 먹고 해서. 자!”


조회대에서 마이크를 만지는 학년주임을 보고 있던 태양의 앞에 우유가 보였다. 저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어라? 뭐야? 야! 내가 친히 매점까지 가서 최상품으로 골라온 거거든!”


그러시느라 아침부터 보이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어째, 이거 전혀 반갑지 않은 성의다. 태양은 보기만 해도 올라오는 쓴물에 가슴을 쳤다.


“에? 진짜 왜 그래? 너 체했냐?”


“아니. 성의는 고마운데, 너 마셔라.”


“으잉? 웬일이래?”


기현이 눈을 계속 깜빡였다. 하루에 2L를 정량으로 마시는 윤태양이 지금 갓 들어온 시원한 우유를 마다하고 있는 건가? 이게 웬일! 그러고 보니 얘가 금요일까지는 줄기차게 마시더니 주말에는 우유에 ‘우’자도 안 꺼냈다.


“우유 끊었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좀...”


말도 흐린다. 기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냄새가 난다!


“아까 마셨거든. 그럼 주든가. 나중에 마실게.”


기현의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낀 태양은 마음을 고쳐먹고 우유를 받았다. 손에 닿는 감촉은 서늘한데 오장육부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삼일 동안 22개의 우유를 해치웠다. 미친 듯이 걸신들린 듯이 마셨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생일날에는 저녁도 먹기 전에 4개의 우유를 보내버린 덕에 어머니가 해 주신 맛난 음식은 손도 제대로 대지 못했다. 더 먹으라는 어머니의 성화가 그렇게 무서웠던 날도 없으리라. 그리고 생각나는 대로 먹은 우유. 유통기한의 마지막 날인 금요일에는 딱 10개가 남아있었다. 저녁에는 5개가. 그리고 자기 전에 남은 다섯 개를 원샷! 그리고 잠을 못 잤다. 화장실 가느라. 그렇게 배 아파 본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밤새 게임기를 붙잡고 있던 기현과 바다는 십분 간격으로 화장실로 달려가는 태양을 그저 의아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축구를 하기 시작하면서 먹기 시작한 윤태양표 영양 강장제가 손에 들려있지만 전혀 기쁘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었다.


미안하다. 당분간만 안녕 할 게.


“지금부터 개학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국기에 대한 경례.”


우렁차게 시작을 알리는 소리에 태양은 우유를 왼손에 넘기고, 가슴에 손을 올렸다. 오랜만의 운동장 조회는 마지막 더위를 뽐내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순식간에 지나고 있었다.



“뭐해? 빨리 와.”


모이는 시간에 비해 너무나 빨리 끝난 조회를 뒤로 하고 학생들은 우르르 현관으로 몰렸다. 중앙현관은 쓸 수 없기에 서쪽 현관은 여학생만 우글우글, 동쪽 현관은 남학생만 우글거렸다. 뜨거운 기운을 참기 어려웠는지 서로 들어가려고 난리였다. 3학년, 2학년, 1학년 순서로 들어가는 것인데 선생님들이 대부분 들어가자마자 모두들 정신없이 현관으로 달려갔다. 물론 이 동참의 행렬에 보배와 서경이 끼어 있는 것도 당연했다. 세영은 엉겁결에 따라오기는 했는데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응. 가고 있어. 사람도 많은데 왜 그렇게 빨리 가?”


세영은 이미 저만치 뛰어가는 보배와 서경에게 소리쳤다. 서쪽 수돗가가 크게 보였다. 이거 정반대 방향이다. 세영은 반쯤 몸을 돌려 동쪽을 두리번거렸다. 그저 얼굴 한번 보고 싶은데. 하지만 육백 명이 넘는 전교 남자학생이 빼곡히 서 있는 동쪽 현관은 너무 멀었다. 스치듯 아주 희미하게나마 보고 싶었다. 윤태양을. 마주보고 안녕, 하고 인사하는 건 죽어도 못하겠는데, 그래도 얼굴은 너무 보고 싶었다. 눈을 뜨면 보이는 태양의 말간 눈 때문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책을 펴도, 밥을 먹어도, 눈을 감아도. 생각나는 거라곤 윤태양. 윤태양. 윤태양. 미쳤다. 이세영. 돌았다. 이세영. 어떻게 이 이세영이 책을 펴고 딴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윤태양을 만나고부터, 세영의 딴 생각은 오직 태양이었다. 한 치의 빈 틈 없이 살아온 이세영에게 나약한 빈틈을 허용하는 윤태양.


‘나에게 무슨 주문을 건거야? 그 빛나는 눈동자로, 그 날렵한 입술로 주술을 건 게 분명해. 그러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잖아. 이렇게 보고 싶어 미치게 만들 수는 없는 거잖아!’


“찾았다!”


커다란 손이 세영의 손목을 잡았다. 그것과 동시에 세영이 돌아섰고. 그것과 동시에 비명이 솟구쳤다. 세영의 긴 포니테일이 세영의 목을 휘감아 떨어졌고, 무릎 아래를 약간 덮는 후레야 치마가 차르륵 펼쳐져 빙그르르 돌아 물결을 만들고 조용해졌다. 세영의 눈도 입도 동그랗게 벌어져 귀여웠다. 태양은 귀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영을 향해 씩 웃었다. 조회시간 내내 세영을 찾을 수 없어서 짜증나고 초조했던 마음이 스르르 녹았다.


“안녕?”


세영은 손목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곧 볼도 화끈거렸다. 그 다음에는 귀가 화끈거렸다. 주위의 시선이 너무 뜨거워서. 너도 나도 빨리 들어가려던 현관 앞에서 모두 멈췄다.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딱 멈췄다.


“응. 안녕?”


생방송, 풀 라이브로 실황중계 되고 있는 적나라한 상황인데. 볼도 귀도 따가운데, 세영은 살짝 치열을 들어내며 웃었다. 방금까지 미칠 것만 같았던 마음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 두근거림이 손목을 타고 태양의 손에 흘러갈까 조바심이 났다. 세영이 살짝 잡힌 손목을 흔들었다.


“아, 미안.”


태양이 화들짝 놀라 잡은 세영의 손목을 내려놓았다. 연결점이 지워지자 주위의 환경이 확 눈에 들어왔다. 굳어있는 학생들의 얼굴은 곁눈질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자리를 옮기자.”


세영이 하고 싶었던 말을 태양이 주저 없이 꺼냈고, 학생들의 눈을 피해 가까운 교문 밖으로 나갔다. 그저 열려진 교문 옆, 나무 사이로 돌아섰을 뿐인데. 조용했던 교정이 비명과 환호와 경악에 휩싸였다. 세영은 태양의 뒤에 서서 눈을 질끈 감았다. 큰일 났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어느 틈에 태양이 돌아서서 바로 코앞에 있었다. 옅은 오렌지향이 파고들었다.


“아니.”


뭐라 변명할 말을 생각지 못한 세영의 답은 간결했지만 느렸다.


“주말은 잘 보냈어?”


다시 보면 한 마디도 못할 거야, 라고 예상했던 세영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대화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태양은 아무렇지도 않은가? 그런 일이 있고도 태연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심장이 강한 걸까? 아니면...


“응. 너는?”


아니면 태연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일이 아무것도 아니었나?


“나는 너 때문에 잘 못 보냈는데.”


설마 그런 거야? 나에게 그런 걸 후회한 거야? 기분이 나빴던 거야? 하지만 그건 태양이, 네가 훔친 거잖아. 아주 가볍게 훔쳐간 거잖아. 그래도 후회하면 후회할 수 있겠지. 내가 예뻐서 산 옷도 후회하고 안 입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런 걸 수도 있겠지. 그래도 네가 미안해라고 말하거나 잊으라고 말한다면...


“......왜?”


어떡해. 너무 아파. 너무 아파서 죽겠어. 제발. 부디.


“이거 때문에.”


세영과 흡사한 검정색 휴대폰이었다. 가슴을 쥐어짜던 세영은 의외의 물건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휴대폰이랑 나랑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거야?


“우리 이제 보니까, 휴대폰 번호도 교환 안 했더라.”


우리. 우리. 우리. 말의 첫머리에 나온 ‘우리’라는 단어에 세영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이것저것 딱딱 구별하지 않고, 모여 놀기 좋기 좋아하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명칭. ‘우리’ 이게 이렇게 대단한 의미가 있고, 엄청난 달콤함이 있는 단어였던가? 세영은 점점 피치를 가해 올라가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휴대폰을 쥐었다. 꾹꾹 번호를 눌렀다. 한 번도 바꾸지 않은 듯 단순한 배경화면에 세영의 번호가 하나하나 떠올랐다.


“네 것도.”


태양의 휴대폰을 내밀자마자 태양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냥 이 번호로 전화하면 될 것을. 하면서 세영은 치마 주머니에 들어있는 휴대폰을 재빨리 꺼냈다.


“방법이 없잖아. 연락 하고 싶은데.”


번호를 누르는 태양의 손가락이 다급했다. 세영의 주먹만 한 휴대폰이 태양의 큰 손에 갇혀있는 모습이 제법 재미있었다.


“집도 근처까지만 가봐서 어딘지 잘 모르겠고. 근데 이거 이름은 어떻게 저장하는 거야?”


번호가 주르륵 나열된 하얀색 화면이 세영에게 보였다. 저장하는 버튼을 누르, 공란이 가득한 화면이 떴다. 이름, 번호, 벨지정...기타 등등. 가만히 윤이라고 누르다, 지우고 태양이라고 채웠다. 너 이렇게 친근하게 불러도 되는 거지? 세영은 가만가만 천천히 저장하고 고개를 들었다. 태양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연락하고 싶었는지 알아?”


그러게. 갑자기 얘들이 보는 앞에서 잡아채고, 휴대폰 번호를 교환하고. 콩닥거리는 심장 때문에 상황 파악이 전혀 되지 않았던 세영은 그제야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보고 싶어서.”


태양이 갑자기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에 빠진 세영을 기다리지 못하고 말했다. 세영이 얼굴이 빨개졌다. 막 피어오르는 장미꽃처럼 생기를 머금은 진분홍빛 볼을 건드려보고 싶었다.


“넌?”


건드려보는 대신 직구를 날렸다. 나는 널 못 본 사일동안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는데, 넌? 넌 어땠어? 넌 나 안 보고 싶었어? 아니면...


“응?”


나처럼 딱 미칠 만큼 보고 싶었어? 세영의 귓불이 참 빨갛다. 반문하는 입술도 참 빨갛다. 그리고 그 빨간 얼굴이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참 예쁘다. 투지에 불타올라 쏘아보던 그 얼굴도 참 예뻤는데 이렇게 수줍게 끄덕이는 얼굴은 더 예쁘다. 그리고 예쁜 얼굴과 예쁜 대답에 자못 심각했던 태양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럼 이 예쁜 얼굴을.


“여기 봐봐.”


고개를 약간 숙이고, 회색 보도블록에 시선이 가 있는 세영을 불렀다. 홍조가 띤 얼굴이 태양을 보자마자, 찰칵! 아, 너무 예쁘잖아.


“뭐야?”


얼어서 묻는 세영도 예쁘다. 저걸 찍을 걸 그랬나?


“사진. 봐봐. 짠.”


순식간에 배경화면으로 저장해 보여줬다. 다시 빨개진다.


“이상해.”


목소리가 살짝 떨려있다.


“왜? 예쁘기만 한데.”


“...뭐....뭐?”


두 번째 직구에 세영이 입술을 오물거린다. 약점발견. 완벽한 이세영이 직구에는 약하다 것. 당당함이 사라지고 난처해하는 모습도 태양은 꽤 마음에 들었다. 저절로 미소가 흘렀다. 바라만 보는 데도 좋다. 너무 좋아. 세영아.


“그럼 나도!”


찰칵. 경쾌하지 못하고 약간 둔탁한 소리 뒤로 세영이 씩 웃었다. 그리고 몇 개의 버튼을 누르더니, 환한 웃음을 달고 손을 뻗었다. 낯설지 않지만, 또 한편으로는 낯선 모습이 있었다. 이렇게 웃었던가? 윤태양, 네가 이렇게 웃는 녀석이었던가? 치열이 드러나지 않은 그저 입술 끝이 말려 올라 간, 그래서 입가에 약한 주름이 있고, 그 위로 눈은 가늘어져 있다.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지만, 행복함이 가득 있어 보인다. 이게 나구나. 윤태양, 너 행복해 보이는데.


“내 사진보고 매일 안녕이라고 인사하기! 문자도 많이 보내기! 아, 전화도 많이 해야 해!!!”


세영이 피식 웃으면서 휴대폰을 내렸다. 떼쓰는 어린애 같다. 꼭 다짐을 받아야겠다는 뜻이 역력한 모습에 세영은 웃음이 나오면서도 마음이 벅차올랐다. 자신과 같은 마음인 거 같아서 울컥했다. 생전 느껴본 적 없는 벅참이 오르고 또 올랐다.


‘태양아, 넌 나에게 느껴본 적 없는 것들을 알게 해줘. 너 그거 아니? 그게 많이 두려웠는데, 이제 많이 두근거린 다는 걸. 난 내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뛸 수 있다는 걸 알았어. 너로 인해서.’


“그럼 넌? 넌 안할 거야?”


세영이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주름을 만들고 오물인 입술이 동그란 알사탕 같았다.


“안녕, 세영아!”


빨개진 얼굴로 휴대폰을 올려 세영의 사진에 대고 외치고는, 열심히 손가락을 놀렸다. 그리고 드르륵. 세영의 휴대폰이 울렸다.


-잘 부탁합니다.


태양이란 이름 아래 적혀진 글자들. 고개를 돌려 딴 곳을 보고 있는 태양의 얼굴이 시뻘겋다. 태양은 세영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윤태양, 너 부끄럼쟁이였구나.’


삐져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세영의 얇은 손가락도 바쁘게 움직였다. 이어서 태양의 휴대폰이 드르륵 울렸다.


-저도 잘 부탁합니다.


“훗.”


태양이 웃었다. 눈이 마주쳤다. 세영도 웃었다. 초록색 마을버스가 빠방하고 지나가고 있었다. 교문 옆에 죽 늘어선 나무들 사이로 매미가 울고 있었다. 이울음 소리 그치면 가을이 오겠지. 낙엽이 소리 없이 떨어지는 가을, 그런 쓸쓸한 가을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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