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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영아, 안 나가?”
학교가 난장판이었다. 2교시가 끝나기 무섭게 각각의 교실의 문이 돌림노래처럼 하나씩 열렸고, 무너진 둑 사이로 거대한 물살이 넘쳐 쏟아지는 모양처럼 회색빛 파도가 일제히 복도를 덮쳤다. 금세 운동장 주위가 회색 물결로 넘실거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종이 울려도 꿋꿋이 시낭송을 한 국어 때문에 좋은 자리 놓쳤다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얘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창밖을 보고 있던 세영은 너무 놀라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설마 저기 있는 얘들 모두 시합 본다고 있는 건 아니지?”
조회 때 운동장에 나오라고 방송해도 족히 이십분은 걸리는 얘들이 5분도 안 돼서 모여 있었다. 이건 학교에서 넘버원의 힘을 가지고 있는 학년 주임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당연하지!!! 이건 횡재야!!! 축구대회는 매번 지방에서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거기다 오늘 상대는 우리 축구부의 철전지 원수, J고란 말씀!”
“거기다 J고도 우리 축구부 못지않게 꽃미남이 그득하단 정보!”
어물거리고 있는 세영의 양 옆으로 서경과 보배가 다가와 빨리 나가자는 압박을 보내고 있었다. 세영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그저 멍하니 바깥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럼 수업은? 이제 3교시 시작이야.”
“당근 없지! 저기 안 보여?”
서경이 가리킨 곳에는 구기중을 비롯해 학년 주임까지 웬만한 선생님은 다 모여 있었다. 방금 나간 국어 선생님도 맨 뒤에서 목을 빼고 서성이고 있었다.
“설마? 설마 교장까지 그러는 건 아니겠지?”
말을 하기 무섭게 조회대에 몇 개의 의자가 세워지더니 교무실 벽면 사진에서만 보았던 이사장과 교장, 교감의 행렬이 중앙 현관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세영은 기가 막힌 웃음이 나왔다. 친선시합. 말 그대로 연습 시합에 왜 높으신 분들까지 출연하신 건지. 이게 이렇게 대단한 건가? 우리 학교 축구부가 이 정도로 대단해? 우승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그저 잘하는 구나 했는데, 실제로 엄청난 인파가 축구부를 응원하고 있는 장면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실감이 났다. H고 축구부는 대단하다. 엄청나다. 그럼 그 안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윤태양은...? 의심할 필요 없이, 두 말할 필요 없이 굉장한 사람이었다.
“난 그냥 여기 있을게. 갔다 와.”
푸른 잔디 위에서 하얀 유니폼을 입고 몸을 풀고 있는 태양이 눈에 들어왔다. 3층에서 바라보는 태양은 언제나 작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눈에 쏙 들어올 만한 크기. 그건 태양과의 거리가 참 멀다는 뜻이지만 그렇게 느껴본 적이 없다. 태양과 함께 공유하고 있는 기억들이 태양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만들어 주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태양은 세영 안에 녹아 있었다. 그저 가깝다는 느낌보다 훨씬 가까운. 그러나 지금 윤태양은 150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안드로메다에 있는 것 같았다.
“아, 왜? 여기서는 경기의 생생함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몸도 아직 안 좋고. 괜히 나가서 더위 먹는 거 보다 낫지.”
어제 집에 돌아가 약을 먹고 잤다. 깨어난 건 오늘 아침 8시였다. 거의 하루 동안 자고 났더니, 체온이 뚝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하루 더 쉬라는 엄마의 말을 물리치고 1교시 전에 등교한 건 태양의 말한 친선시합 때문이었다. 분명 보러 왔으면 하는 뜻이었으리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생각이 단호해졌다. 태양은 그의 경기를 세영이 봤으면 한다고. 그리고 그 부탁에 세영은 응하고 싶었다. 많은 관중을 보기 전까지는 두 팔 올려, 목청 가다듬고 윤태양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찼었다. 아마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윤태양을 응원하는 건 이세영 한 사람이다, 라고. 오늘 윤태양은 이세영만 응원할 수 있다. 어제 그건 윤태양이 이세영에게 준 특권이다. 그런데 보라. 저 많은 학생을. 심지어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3학년까지. 경기 시작 전부터 윤태양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수많은 여학생들. 세영은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어깨에 가득 실어있던 기합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멀다. 윤태양. 참 멀다...그리고 밉다.
“그럼 뭐 할 수 없지. 교실에 있을 거지? 점심 때 교실로 올게.”
보배와 서경이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교실에는 세영 혼자 남아있었다. 복도에는 미처 나가지 못한 여학생이 우르르 몰려나가고 있었다.
“윤태양. 바보!”
전해지지 않을 말을 혼자만 웅얼거리고, 세영은 의자에 앉았다. 반쯤 펼쳐진 수학 문제집을 쫙 펼치고, 검은색 샤프를 들었다.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함성이 새어들고 있었고, 곧이어 경기를 알리는 환호가 들렸다. 그래도 세영은 열심히 샤프를 움직이고 있었다. 윤태양, 바보. 나쁜 놈! 이라고 중얼거리면서.
-내가 달리는데 공도 같이 나와 달리는 거야. 이 녀석은 조금 앞서서 나를 이끌어주는 기분이랄까. 나와 함께 달리는 친구 같은 느낌이었어.
윤태양이 처음으로 눈부시게 보였던 날 했던 말이 생각났다. 함께 달리는 친구 같은 느낌. 아무에게나 뻥뻥 차이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아닌 죽이 잘 맞는 배꼽친구처럼 둥근 축구공은 태양의 곁에서 자유롭게 노니고 있었다. 태양의 곁에만 가면, 라인 너머로 굴러가지도 않고 저 하늘 너머로 뻥 올라가지도 않았다. 찰떡궁합처럼 태양의 주위에서 태양이 원하는 데로 움직였다. 이보다 환상의 커플은 없을 정도로 완벽한 호흡이었다. 3층에서도 태양의 현란한 발 재주가 뚜렷이 보였다. 세영이 반쯤 열린 창문을 활짝 밀고 양손을 꽉 쥔 채, 운동장을 바라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학 문제집을 덮고 창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리고 월드컵도 제대로 보지 않았던 이세영이 상대편으로 넘어가는 공에 안 돼 라고 소리 지르고, 태양이 공을 잡을 때마다 두 손을 마주 잡고 있었다. 수많은 군중이 만드는 환호와 탄식은 세영의 세계 안에 침범하지 못했다. 세영은 오직 태양의 몸짓에 집중하고 있었다. 전반전이 막바지로 흘러갈 무렵, 스탠드에 앉아있는 학생들이 모두 일어났고, 세영은 놀이공원에서 소리를 질렀던 만큼 새된 비명을 터뜨렸다.
“삐!”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었고, H고의 점수판이 한 장 넘겨졌다. 태양이 여름날에 팍 하고 터지는 분수마냥 시원하게 J고의 그물을 갈랐다. 에어컨은 꺼져 있는데 싸사사 닭살이 돋았다. 굉장하다. 멋지다. 엄청나다. 같은 수식어로 표현이 안 될 만큼의 감동이었다. 1등을 할 때조차 이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프리카 밀림을 가르는 치타처럼 날렵한 몸이 공중에 솟았고, 통통 튀겨진 공은 태양의 정확한 조준에 두 명의 수비를 제치고 아슬아슬하게 골키퍼의 어깨를 스치고 떨어졌다. 너무나 절묘한 공의 포물선에 아! 하고 탄복했다.
-그래서 같이 달리다보니까, 못 견디게 좋아졌어.
버스 안에서 했던 말이 웅웅거리고, 방금 본 태양의 환상적인 장면이 펼쳐지는 와중에 세영은 다급하게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필드를 누비는 윤태양을 보고 싶어. 윤태양, 그저 윤태양이 보고 싶어!’
미친 듯 달리고, 미친 듯 뛰었다. 이세영이 이거 저거 재지 않고, 윤태양을 위해 발을 내딛고 있었다. 윤태양의 세상 속으로.
태양은 못 견디게 좋아서 하는 거라고 말했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미소를 담뿍 담고. 그 미소에 홀린 순간부터 나는 궁금했었다. 못 견디게 좋아서 하는 건 무엇일까? 그건 어떤 느낌일까? 그 순간은 언제 찾아오는 것일까? 그 중에서 가장 궁금했던 건, 못 견디게 좋아서 하는 그 순간에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저 말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눈부셨는데 진정 못 견디게 좋은 그 순간에 너는 태양처럼 강렬한, 그것보다 몇 십 배, 몇 천배는 강력한 빛을 보여줄까? 그래. 나는 너의 표정이 궁금했다. 그리고 윤태양, 너는 지금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감히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눈부시다. 네 앞에서 느꼈던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 깨끗하게 정화될 정도로 너는 눈부시구나.
정신없이 사람들을 비집고 본 태양의 표정을 세영은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달궈진 필드에 넘어져도, 상대편의 무지막지한 태클에 공을 뺏겨도 태양은 웃었다. 찌푸림 하나 없이 흔한 욕설 한 마디 없이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슛을 날리던 그 순간이나 넘어지는 순간이나 태양은 이름 그대로 태양이었다. 뜨거웠고 눈부셨다. 좌중을 휘어잡는 것으로도 모자라 상대편 선수까지 주춤거리게 만들 정도로. 지구상의 생명의 원천이며 인류에 있어서 생활을 지배하는 천체, 태양. 윤태양은 에너지였다. 빛의 에너지. 시들었던 만물이 태양의 빛이 살아나는 것처럼 축축 늘어져 있는 다른 선수가 태양이 지나간 자리마다 생기를 머금고 태어났다. 태양의 빛에 스며들어, 22명의 선수들은 최고의 기량을 뽐내고 관중과 한마음이 되어 걸작의 경기를 만들었다.
“어머, 세영아! 너 언제 나왔어?”
식당으로 몰려가는 학생들 속에서 보배와 서경이 세영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이 대단한 경기를 어떻게 교실에서 봐? 대단했지! 난 한일전보다 재미있었다.”
“윤태양, 정말 대단하지 않아? 어떻게 그런 그림 같은 슛을 날릴 수 있어? 왜 윤태양, 윤태양 하는 지 확실히 알겠더라.”
세영을 끌고 식당으로 향하면서 보배와 서경은 경기에 대한 칭찬을 침이 마르도록 헸다. 세영은 혼이 쏙 빠져나가 멍한 눈으로 둘의 보폭을 간신히 쫓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경기는 H고가 1대 0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시종일관 날아다니던 윤태양의 작품이었다.
-못 견디게 좋아서.
오늘에서야 못 견디게 좋아서 하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리고 넌 그런 표정을 짓는구나. 윤태양. 윤태양..윤태양...세영의 마음속에서 윤태양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아, 그렇다. 이세영은 윤태양의 눈부심에 마음을 뺏겼다. 온전히, 온 마음이 윤태양에게 향하고 있었다.
상큼했다. 정확히 무슨 향인지는 모르지만 참 상큼한 비누향이었다. 한 마리의 맹수처럼 필드를 누비던 윤태양은 없고, 깔끔한 교복을 차려입은 평범한 윤태양이었다.
“몸은 괜찮아?”
버스 정류장 표지판을 사이에 두고 태양이 한걸음 움직였다. 오렌지 향 같다.
“응, 괜찮아.”
펄떡거리는 가슴을 안고, 오후 내내 어떻게 수업을 했는지 모르겠다. 어물쩍 끝난 보충수업 후에도 미약한 떨림을 진정시키느라 늦게 나왔는데 정류장 앞에 윤태양이 있었다.
“경기 봤어?”
‘형용할 단어를 찾을 수 없는 엄청난 경기라면, 본 게 맞을 거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세영은 다시 경기를 회상하는 것만으로 전율이 흘렀다. 경기 속 장본인이 앞에 실재하는 지금, 멈출 수 없었다. 세영은 태양에게로 폭주하는 기관차였다. 버스가 도착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떨리는 손을 윤태양에게 덥석 내밀었을 거다. 그리고 그 눈부신 미소를 쓰다듬었을 거다.
“집에 갈 거지?”
태양의 옆을 지나쳐 버스에 올랐다. 껍질 까기 어려워 생전 먹지 않던 오렌지가 너무 먹고 싶었다. 바로 쫓아온 태양은 남아있는 자리 중에서도 역시나 제일 뒷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한 듯, 옆자리를 툭툭 쳤다. 이리 와. 어색하고 불편했던 지난번과는 달랐다. 태양의 인도에 마음이 떨렸다. 연두색 마을버스는 태양과 세영을 싣고 짧은 여행을 시작했다.
“늦게 끝났어?”
주먹 하나가 들어간 만한 공간이 태양과 세영의 사이에 있었다.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틈은 사라지고, 세영의 드러난 오른 팔꿈치와 태양의 그을린 왼 팔꿈치가 스쳤다. 스침 속에 피어나는 묘한 긴장감. 세영은 가방을 끌어당겼다.
“아니.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넌?”
“회식 좀 했지. 우리 감독님 기분 좋으셔서 아주 거하게 쏘셨어.”
“뭘?”
“삼겹살.”
세영이 고개를 숙이고 픽 웃었다. 눈동자를 굴러 태양과 눈이 마주치자 태양도 픽 웃었다. ‘아, 너무 좋다. 좋아. 좋아 죽겠다. 윤태양.’
“그게 거한 거야?”
“아마도. 우리 감독님한테는.”
세영의 그윽한 눈동자가 살포시 휘어진 눈가에 덮여 사라졌다. 버스가 달리는 속도에 따라 바람이 타고 들어와 세영의 머리를 건드렸다. 귓가에 흩어진 잔머리가 세영의 미소를 가렸다. 꿈에서 그리던 그 미소가 가리는 머리칼이 미워 태양은 손을 뻗어 세영의 가느다란 머리칼을 걷었다. 세영의 미소는 사라졌고, 검은 눈동자가 보랏빛이 일렁일 정도로 커졌다. 잠식되었던 묘한 긴장감이 확 살아났다.
“왜 태양이라고 이름 지었어?”
서로의 눈빛을 강렬히 흡입하던 순간을 깨뜨린 건 세영이었다. 태양은 세영의 보드라운 귓가에서 배회하던 손을 아쉽게 떨어뜨렸다.
“내가 태어났던 날이 그 해 중에 최고로 더운 날이었거든.”
태양은 넓은 등을 파란색 등받이에 여유롭게 기댔다. 세영도 태양을 따라 조금은 딱딱한 그 곳에 몸을 맡겼다. 안락하다. 고개를 아프게 올려다보지 않아도 되는 태양이 옆에 있었고, 오렌지향이 더운 기운을 쫓아내고 있는 지금이 너무 안락했다. 세영은 등받이에 닿은 머리를 굴려 태양에게 향했다. 해를 보고 자라는 해바라기처럼, 세영은 태양의 해바라기가 되었다.
“더위를 쉽게 타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그 날만은 나오지 마라 했는데 기어이 내가 나온 거지. 더운 탓에 내가 둘째 애였는데 거의 하루의 진통을 겪으셨대. 그렇게 태어난 날 보고, 아버지가 그래, 저렇게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뜨겁게 살아라. 하고 태양이라고 지었대.”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뜨겁게 살아라. 정말 그 의미로 지어진 게 맞는다면, 태양은 딱 이름에 어울리게 살고 있었다. 아주 뜨겁게. 제 몸을 태워도, 태워도 사그라지지 않는 영원불멸의 태양처럼.
그렇게 더운 날이라면...필시,
“언제인데?”
“19일.”
“8월?”
“응.”
8월 19일. 늦더위가 반짝 했어나 보다. 가만, 19일이면... 세영은 들고 있는 휴대폰의 슬라이더를 올려 달력 메뉴로 들어갔다. 오늘의 날짜는 빨간색으로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빨간색은 18일. 고로 내일은 19일.
“...양력?”
“응.”
태양이 씨익 웃었다. 나의 놀란 눈빛을 꿰뚫은 사악한 미소였다. 아무래도 내 무덤 스스로 판 것 같다. 세영은 휴대폰을 내리며 씨익 웃고 있는 태양을 다시 쳐다보았다.
“내.......일?”
다시 묻지 말 걸 그랬다. 태양은 답하지 않고 긍정의 의미도 부정의 의미도 없는 옅은 웃음만 보였다.
‘이세영,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는 덫에 걸렸구나. 가족 말고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해준 적은 없는데......’
세영은 태양을 바라보던 눈길을 태양 너머 가로줄로 뭉개지는 가로수를 향해 옮겼다. 가라앉은 열이 다시 오르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라고 상냥히 말하는 종업원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카운터 앞에 있는 노란색 바구니를 꿰찼다. 야채 코너를 지나치니 더운 여름인데도 찬 기운이 확 올라왔다. 네댓 명의 주부로 보이는 아주머니들이 야채를 고르고 있었다. 바구니를 앞으로 들고 몸을 움츠려 좁은 통로를 통과해 가장 구석에 있는 음료코너에 다다랐다.
-....Hello? Um.... Yes.... 야! 이세영! 너 지금 장난해?
집에 도착하자마자, 국제전화카드를 찾아 이영에게 전화를 했다. 가방은 푹 꺼진 침대에 널브러뜨리고, 전화카드를 찾느라 서랍은 죄다 열려 있었다. 신호가 가는 도중, 교복 치마를 벗고 반바지로 갈아입고 있었다. 왜 이렇게 안 받지, 짜증을 내면서 상의 단추를 끄르는데, 이영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렀다.
-언니!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있지, 선물! 선물! 그러니까 생일에는...
세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영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듣기 어려울 정도로 갈라져 고함을 쳤다. 이 언니가 왜 그러나 생각하면서도 세영은 시원한 하늘색 반팔티를 목에 걸었다.
-왜 그래? 언니, 있잖아. 생일에는...
-야! 이세영! 너 지금 여기는 몇 시인 줄 알아? 새벽 세시 거든!!!
어? 세영은 침대 옆 탁자 위에 언니를 위해 맞춰놓은 탁상시계를 보았다. 세시에서 조금 모자랐다. 한국이 오후이니, 언니가 있는 보스턴은 새벽이 맞았다. 새로 시작한 햄버거 고기 굽는 맥도널드 알바가 너무나 힘들어서 초죽음이 돼서 귀가한다는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세영은 언니가 바로 옆에 있는 거처럼 멋쩍은 웃음을 짓고, 책상 앞의 의자를 끌어 바른 자세로 앉았다.
-아하, 그러게. 미안미안. 근데...
미안한 건 미안한 거였고, 지금 물어보려는 질문은 정말 중요한 거였다. 세영은 다급함을 지우고 가다듬은 목소리로 운을 띄었다. 띠띠거리는 배경음만 들린다.
-언니야, 생일선물은 뭘 해줘야 하는 거야?
한동안 정적이었다. 세영은 언니가 휴대폰을 붙들고 다시 잠이 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 찰나.
-이세영!!! 너 정말 그거 물어보자고 새벽 세시에 곤하게 자고 있는 사람 깨운 거야!!!
방금까지 자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괴기한 호통이었다. 세영은 움찔했지만, 지금은 답변을 듣는 게 더 시급했다. 세영이 겪은 생일은 할아버지, 할머니 생신, 아빠, 엄마 생신, 그리고 언니 생일이 다였다. 그리고 항상 같이 외식을 하는 걸로 끝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남들은 생일에 어떻게 하는지 감이 안 왔다. 영화에서처럼 케익을 준비해야 하나? 아니면, 생일 때면 내미는 조그마한 사각케이스에 담긴 반지? 목걸이? 이런 거? 근데 영화에서는 주로 남자가 여자한테 주는 거였다. 그것도 나이 많은 사람들이. 결코 세영의 또래가 주고받지는 않았다.
-언니, 난 심각해!
-남의 생일선물에 네가 왜 심각해? 생전가야 나한테도 선물 안 주던 녀석이...
흐리는 말끝에 묘한 기운이 서려있었다.
-설마? 너 설마...그 때 그 녀석? 네가 밥맛없다 재수 없다 무례하다 했던 녀석?
‘밥맛없지 않아! 미소가 얼마나 눈부신데. 당연히 재수 없지도 않아! 손길이 얼마나 다정한데. 무례라니? 다정스러운 태양이에겐 가당치도 않아.’
세영이 흠칫 놀랐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람? 황급히 떠오른 생각을 지웠다. 말끔하게 지워지지 않고, 군데군데 흔적이 남아 계속 맴돌았지만. 그나저나 언니는 어떻게 안 거지? 분명, 태양을 언급한 건 축구실기를 할 때 딱 한번 뿐이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지나가는 말로라도 운을 띄운 적이 없었다. 이상한 생활을 하더니 이제 천리안까지 생겼나보다.
-암튼!!!
-오호? 이세영, 요즘 아주 재밌게 사네.
뭉텅 거리던 이영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완전히 잠에서 깬 목소리였다. 그리고 약간의 흥분이 가미된.
-몰라. 그래서 생일선물은 뭘 해줘야 해?
-헤... 글쎄. 일단 어떤 사이냐가 중요하지.
평소 같으면 이영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다는 것을 깨달았을 텐데 세영은 정신이 없었다. 내일이 태양의 생일이라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어떤 사이라니?
-단순한 친구냐? 아니면 좋아하는 사이냐? 아니면 미치도록 사랑하는 사이냐?
-뭐? 그런 게 중요해?
-아! 그럼. 그거에 따라서 선물의 종류가 바뀌는 법이다.
그것도 모르냐는 핀잔이 가득 든 어투였다. 어렸을 때부터 이영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으니, 세영은 이영의 질문에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명확하지 않았다. 친구나 좋아하는 사이나 사랑하는 사이. 이건 모두 세영이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관계들이라, 태양이 어느 분류에 해당하는 지 한 자락의 느낌도 오지 않았다.
-모르겠어.
-허! 뭐가 그래? 벌써 몇 달이고만. 아직도 진도가 거기까지 인거야? 그럼 너는 어떤데? 걔가 좋기는 한 거야?
세영이 알기론 이영도 남자 한 번 사귀어 본 적 없는 숙맥이었다. 그런데 지금 엄청 경험이 많은 사람처럼 세영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영의 말이라면 무조건 다 맞는다고 생각하는 세영은 무슨 국어지문을 읽듯이 이영의 말을 곱씹었다.
-......그...그러니까 물어보지!
천천히 잔디 위를 뛰어다니던 태양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태양의 발끝을 스치고 들어간 골 뒤로, 두 주먹을 불끈하고 공중에 흔들었던 모습. 얼마나 시원하게 웃는지. 그 웃음이 다시 가슴을 콩닥거리게 했다. 벽에 걸린 거울에는 귀까지 빨개진 자신의 얼굴이 있었다.
-오오오~ 어이구, 우리 세영이가 이제야 어른이 되네. 잘 생겼어? 키는? 성격은?
터져 나오는 질문에 세영이 왼쪽 눈을 찡그렸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언니! 그래서 생일선물! 생일선물!
-재촉하기는... 그래서 걔가 좋아하는 게 뭔데? 설마 그 정도는 알지?
-좋아하는 거?
-자주 하는 거라든지.
‘매일 하는 게 있지, 축구.’
-자주 보는 거라든지.
‘그것도 아마 축구?’
-자주 노는 거라든지.
‘어... 축구.’
-아니면, 자주 먹는 거라든지.
‘아마도 그건......’
입술을 모으고 지난 기억 속으로 돌진했다. 체육제 축구 첫 연습 후에 주었던 흰 우유. 양호실에서 주었던 흰 우유. 그리고 자판기 앞에서 세영이 건네주었던 흰 우유. 세영은 방문을 열고 다다다 주방에 큼지막한 냉장고에 앞에 가, 벌컥 열었다. 팽창이 되어 빵빵해진 흰 우유 두 개가 문짝 선반 코너에 몰려있었다. 그러니까, 자주 먹는 건 흰 우유.
-있다! 언니! 땡큐! 그럼 굿 나잇~
-야아, 세영아! 그래서 걔랑은 어떻게.......
처음 받을 때와는 달리 말이 많아진 이영은 꺼진 휴대폰 속에서 부서졌다. 그리고 세영은 바람처럼 지갑을 훔치고, 이미 회색 골목길을 벗어나고 있었다.
열여섯.
열일곱.
.
.
.
스물셋.
“정말 이거 다 사시는 건 아니죠?”
상냥하게 인사했던 단발머리 점원이 바코드기를 찍을 생각을 하지 않고 멀뚱히 세영이 내려놓는 우유만 바라보고 있었다. 세영의 뒤에 서 있던 아주머니들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세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세영은 이상한 반응에 고개를 살짝 기울여 생각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아! 맞다! 잠깐만요!”
세영의 말에 그럼 그렇지 하는 눈빛으로 점원이 흰 우유를 치우려고 손을 옮기는데.
“더 살 거 있어요! 죄송합니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주머니들에게 양해의 인사를 드리고, 다시 음료 코너로 뛰어갔다.
-사실 초코우유 좋아해.
음료코너에 남아있는 초코우유는 딱 세 개. 옆에서 남색 티셔츠를 입은 점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비어있는 음료수를 채우고 있었다.
“저기, 초코우유는 더 없어요?”
“네, 아직 물건이 안 들어왔어요. 이구, 오늘 우유가 다 나갔네. 어이! 김씨, OO우유 있나 봐봐!”
아저씨는 황토색 테이프가 꼼꼼히 붙어있는 박스를 억지로 열고, 진열대에 녹차 음료를 집어넣는 일을 반복했다. 세영은 입술을 쭉 내밀고 나머지 세 개의 초코우유를 누가 가져갈까, 잽싸게 가슴에 안고 카운터로 향했다.
“여기, 이것도 계산해 주세요.”
상냥했던 점원의 표정이 굳어있었다.
“정말요?”
세영의 순진한 얼굴이 위 아래로 흔들렸다
“아유, 학생이 우유를 좋아하나 보네.”
“그러게. 말라가지고 곯게 생겼는데 아닌 가봐.”
뒤에 서 있는 아줌마들이 아줌마 특유의 화통한 웃음을 뽑았다. 세영은 고개를 돌려 어색하게 웃었다.
‘네, 우유를 많이 좋아해요. 태양이가.’
아주머니의 말에 조금 순응을 했는지 점원이 바쁘게 바코드기를 움직였다.
“스물세 개, OO우유와 세 개, OO초코우유 계산하셨습니다. 거스름돈을 530원입니다.”
묵직한 봉투와 영수증과 잔돈을 내미는 점원에게 살짝 웃음을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점원 언니의 얼굴에는 처음에 보여준 상냥함이 다시 배어 있었다.
_14
바보, 이세영. 바보, 이세영. 이세영이 천하에 둘도 없는 최고의 바보에 등극하는 일이 발생했다.
“고선애 얘기 들었지? 우리학교 최고의 퀸카께서 40만 원짜리 아이팟을 준비하셨대.”
“그건 익히 퍼졌고. 그거보다 더 쇼킹한 건, 공지랄이 장미꽃다발이랑 케익 퀵서비스로 쏜 거야. 나 그거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어떻게 고 대단하신 분이 퀵서비스를!!!”
“9반 신애는 그거 보고 울면서 화장실로 뛰어 가더라.”
“왜?”
“공지랄이 주문한 케이크는 2단이고, 자기 건 1단이라고.”
“정말? 허. 진짜 기가 탁 막힌다. 그런다고 누가 알아준대? 윤태양은 눈길 한 번 안 준다더라. 아, 바리바리 선물 싸서 갖다 바치는 얘들 보면 정말 바보 같아. 왕바보들! 안 그래? 세영아?”
멍한 세영의 주변에 의자를 끌어다 앉아 학교를 발칵 뒤집은 윤태양 생일사건에 대한 가차 없이 비판을 가하던 보배가 반응 없는 세영을 끌어들였다.
“응?”
“아이팟이며 장미꽃다발이며, 케이크며 진짜 바보들 아니냐고!”
“어. 진짜 엄청 많이 무진장 바보 같아!”
그저 동조를 바랐을 뿐인데, 세영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 격정적으로 소리쳤다. 식후 소화거리로 그저 질겅질겅 씹을 만한 아이템으로 별 뜻 없이 말한 건데, 세영의 눈동자는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보배와 서경은 어리둥절한 눈길로 세영을 올려보았다.
“어, 그래. 그렇긴 한데. 그렇게 흥분할 것까지야...”
“근데...있지...... 사실 나도 준비하기는 했어.”
세영을 끌어 앉히는 보배의 손길 옆으로 서경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뭐?”
이건 정말 동시에 외친 세영과 보배의 비명이었다.
“야! 김서경! 너 원래 한기현파잖아! 아주 죽고 못 살더니!”
“아니, 그게. 그랬었는데... 어제 경기 봤잖아. 솔직히 어제 경기 본 사람이라면, 윤태양한테 집문서라도 훔쳐다 주고 싶은 심정일 걸?”
기어가던 목소리가 점차 커지더니 서경은 양 손을 마주잡고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있었다. 흐린 눈동자는 어제의 경기를 더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솔직히 그 기분을 완전히 모른다고는 말할 수 없기에, 세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뭐 준비했는데?”
말도 안 된다. 이서경. 이건 배신이고 배반이다. 죽을 때까지 온리 포에버 한기현이라고 같이 외쳐놓고 이렇게 뒤통수를 때리나. 등등 삿대질까지 하며 악다구니를 하는 보배를 제치고, 세영이 아주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뭐, 그냥. 그냥 옷 같은 거.”
“옷? 너 설마 아디스나 나이키에서 파는 트레이닝복 세트 그런 거야?”
보배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떨고 있었다. 그런 보배를 향해 서경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우와! 미쳤다! 미쳤어! 김서경! 그게 얼마짜리라고. 용돈 구멍 났다고 난리 브루스 칠 땐 언제고, 그렇게 목돈을 마련했대?”
“......아니, 가불 좀 받고.”
서경이 보배 앞에서 저렇게 맥을 못 추는 건 처음 봤다.
“야! 배신자! 너 내 생일에는 영화로 때우더니! 윤태양한테는 그 비싸다는 아디다스에서 트레이닝복을 사주냐?”
“저기...나이키인데.”
“아디다스나! 나이키나!”
보배는 미친 듯이 발을 구르고 팔을 흔들었다. 분에 못 이겨 뒷목잡고 넘어갈 정도로 치를 떨었다. 서경은 그 화를 고스란히 받아주고 있었다. 5000원짜리 조조할인 영화와 10만원은 족히 되는 나이키의 트레이닝복의 차이란 어마어마한 거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배와 서경의 상황이었고, 세영은 머리를 책상에 마구 찧고 싶을 정도로 자괴감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그건 땀 뻘뻘 흘리며 들고 온 스물여섯 개의 우유가 든 봉투 때문에.
“근데 뭐가 제일 바보스러운 선물이야?”
은근슬쩍 운을 띄었다. 누군가에게 아냐, 너도 괜찮은 선물을 준비한 거야. 라는 말을 듣고 싶은 세영이었다. 하지만 왠지 괜찮은 선물 목록에는 발끝도 걸쳐놓지 못할 거 같았다. 제발 가장 바보스러운 선물은 아니길.
“글쎄다. 그게 딱 기준이 있는 건가?”
서경이 화제를 바꿔줘서 고맙다는 눈길을 보냈다.
“가령, 먹을 거라든지.”
“케이크? 이런 거? 초콜릿, 쿠키 뭐, 이런 건 양호하지 않나? 형편 따라 하는 거지 뭐.”
‘나도 돈은 있다고!’
세영은 꼭 자신이 돈이 없다는 소리로 들려 발끈했다.
“먹을 거 하니까 생각 난 건데. 누구야. 작년에. 이지선 선배. 지금은 3학년이지. 암튼 그 선배가 영양식이라고 뱀탕을 선물로 가져왔잖아. 푸하하하하하하. 박지성이 장어즙으로 보양했어요. 그 기사 보고, 그거로는 부족하다며 그 비린내 팍팍 나는 뱀탕을 떡 하니 내밀었지. 그리고 최악의 선물 1위로 등극.”
“왜?”
‘그거 몸에 좋은 거 아닌가?’
세영의 눈빛은 엄청 진지했고, 방금까지 핏대를 세우고 흥분하던 보배가 이제는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감정표현이 참 풍부한 보배였다.
“비위가 엄청나게 좋은 어른들도 코 막고 먹는 게 뱀탕이라던데. 당연히 윤태양 냄새 맞고 우욱! 푸하하. 거기다, 그게 뭐야? 로맨틱! 로맨틱이 없잖아. 반평생 같이 산 마누라가 남편 정력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 여하튼 그 때 이지선 선배 표정을 봤어야 해. 크하하하. 나는 잊을 수 없다. 그 넋 빠진 얼굴을!”
보배가 검지를 팽팽하게 당겨 좌우로 흔들었다.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티를 팍팍 풍겼다. 제법 당당한 얼굴로. 그에 반해, 세영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아니, 그래도 뱀탕보다는 우유가 낫지. 그렇게 꿀꺽꿀꺽 잘 마셨잖아. 그래도 확실히 로맨틱하지는 않아. 백 번 다시 생각해도 장어즙이나 우유나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정말 로맨틱하지 않은 생일선물임에 세영 스스로도 동의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아직 미련이 생겼다. 우유 말고 준비한 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럼.......우유는?”
“엥? 뭔 우유? 누가 우유 선물로 줬대? 그건 자판기 가서 500원 넣으면 나오는 거잖아. 어머머. 누가 그걸 줬대? 누가? 응? 누가?”
특종 건수를 얻었다는 듯 눈빛을 반짝이는 서경에게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이세영, 넌 자판기에서 500원 동전 하나 넣으면 살 수 있는 그 우유만 스물여섯 개를 샀다고! 바보천치! 이세영, 네가 오늘의 최고의 바보로 등극했구나!’
세영은 참담한 심정으로 차가운 벽과 책상 다리 사이에 놓은 봉투에서 몇 개의 우유를 꺼냈다.
“아니, 우유 먹으라고.”
“언제 매점 갔다 왔어? 안 그래도 오늘 점심 부실해서 뭐 좀 먹을까 했는데 잘 됐다! 흐흐. 그럼 나 딱 두 개만 마신다.”
“아, 나도 속 타는 데 하나만 딸게. 땡큐!”
“근데 이거 왜 이렇게 미적지근해. 날씨가 덥기는 더운 가봐.”
세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턱을 올려 남은 한 방울까지 쪽 빨아먹는 보배와 서경을 봤다. 쭉쭉 잘도 마시는 구나. 세 개의 우유가 몇 초 사이에 말끔히 사라졌다. 이제 우유는 스물 세 개 밖에 안 남았다. 아니, 스물세 개나 남았다.
세영은 현관문 뒤에 숨어있었다. 운동화는 일치감치 다 신었는데 서쪽 현관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못 떼고 있었다. 오른팔에 통증이 와 우유꾸러미를 왼팔로 옮겨 걸쳤다.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모두 이 우유 때문이었다. 어쩌자고 이 많은 우유를 샀는지. 어제 생글생글 웃던 점원 언니의 표정이 굳었을 때, 아니 다 사는 건 아니죠? 라고 물었을 때, 그만 뒀어야 했었다. 정말 최고의 바보스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다 계산해 주세요. 라고 말했었지. 그건 최고의 바보 대사였다. 세영은 또 한 번 우유 봉투를 집어던지고 싶은 욕구가 끌어 올랐지만, 그럴 수 없었다. 산뜻하지 못한 이세영은 미련쟁이라서 그래도 태양의 선물이라고 산 이것들은 휴지통에 탈탈 털어 넣을 만한 대범함이 없었다.
‘그런데 왜 윤태양은 교문 앞에서 얼쩡거리는 거야!’
교무실 앞을 지나다, 구기중에게 붙잡혀 인쇄기 고장으로 2학기에 새로 나온 시간표를 무한 복사하는 단순하지만 무식한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니, 모두 집에 가고 세영의 가방과 아침부터 벽에 기대어 있는 우유 봉투뿐이었다. 힘이 쪽 빠졌다. 딱 그 자리에 벌러덩 누워 눈을 부치고 싶을 만큼. 아직도 냉방병이라 명명된 감기가 낫지 않은 거야. 하고 나왔더니, 이번에는 가장 무시무시한 복병이 있었다. 윤태양! 금방 가겠지. 금방 갈 거야. 라는 예상을 뒤엎고 태양은 오랫동안 교문 앞에 있었다. 그래서 세영은 지금 현관문과 하얀 벽 사이에 끼어 더운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왜 안 가는 걸까? 그런데 달랑 가방 하나만 메고 있다. 학교를 들었다 놓을 만큼 여자애들이 방방대고 돌아다녔는데, 양 손에 든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들고 갈 수 없을 만큼 너무 많아서 배달이라도 시킨 걸까? 여자애들 손에 쥐여 있던 색색의 포장지를 떠올리며 세영은 태양의 선물의 종적이 궁금했다. 아주 많이. 그런데 왜 안 가는 거지?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설마? 설마, 나는 아니겠지...?
“띠딕.”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솥뚜껑을 확 연 것처럼 뜨거운 기운이 세영의 얼굴을 확 잡아채는 것과 동시에 치마 주머니가 드르륵거렸다.
-오늘 과외 5시지?
맞다. 선생님이 일이 있다며 시간을 당겼었다. 문자가 온 시간은 4시 20분. 이렇게 안절부절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세영은 다시 밖을 살폈다.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짧은 거리 앞에 태양은 변함없이 서 있었다. 아주 반듯하게 서서 뜨거운 햇볕에도 아랑곳하고 당당하게. 왼쪽 손목에 힘겹게 걸쳐있는 봉투가 다시 세영의 시선을 붙잡았다.
‘버릴까? 정말 버릴까?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걸어 나가면 돼. 그냥 안녕이라 인사하고 가면 되는 거야.’
세영은 붉은 입술을 살짝 물었다. 무겁다. 정말 무겁다. 그런데 놓을 수 없다. 버릴 수 없다. 이세영이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의 생일을 위해 산 선물이어서. 그리고. 그리고, 온전히 윤태양의 미소만 생각하면서 사버린 것들이라. 주지 못해도, 썩어 못 먹게 되도 버릴 수 없었다.
4시 25분. 마을버스가 오는 시간은 대략 4시 30분 전후. 서쪽 현관에서도 고개만 빼면 나무 울타리 사이로 버스가 오는 지 안 오는지를 알 수 있었다.
‘버스가 오면 잽싸게 뛰어가면 돼. 네가 예의를 지키지 않는 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지금 이게 더 절박하다고. 어떻게 이렇게 바보스러운 선물을 줄 수 있어!’
세영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며 우유 봉투를 한번 들었다 놨다. 그리고 왔다. 초록색 버스가 저 아래에서 울창한 나무 사이를 지나쳐, 교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정류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뛰자. 세영은 날렵하게 뛰었다. 태양의 얼굴을 볼 새도 없이 초록색 버스가 정류장에 끼익, 하고 하차하는 것에 집중했다.
“어......어......”
초록색 버스가 홱 하고 지나갔다. 엄청난 속도로 뛰었다고 생각했는데 손끝에서 야릇한 전율이 온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동자를 굴렸다. 세영의 가느다란 오른 손목이 잡혀있었다.
“버스는 갔는데.”
반사적으로 침이 꿀꺽 삼켜졌다.
‘이세영, 침착해. 자, 들이쉬고 내쉬고.’
세영의 가슴이 느릿하게 올라왔다 내려왔다.
“어? 어. 그러네. 그럼 안녕.”
‘차라리 걷자. 걷는 거야.’
세영은 이 상황에서 정류장 앞에서 10분을 기다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세영은 못해도 40분은 족히 걸릴 거리를 가늠하며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대신하고 발을 재촉했다. 그런데 야릇한 전율은 여전했다.
“아니, 그게 저 바빠서.”
그래도 요지부동이었다. 태양은 전혀 세영을 놔 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따라 세영은 왜 이렇게 태양이 앞에서 작아지는지. 이건 빌어먹을 우유 때문이다.
“정말이야. 과외 시간이 당겨져서...그래서 그냥 걸으려고.”
이게 무슨 구차한 변명이란 말인가. 시간이 없는데 걷는다니. 오늘은 머피의 법칙이 아니라 바보의 법칙이다. 세영은 놓았던 입술을 다시 꾹 물었다. 그런데 팔목에 습한 공기가, 그러나 서늘한 기분이 드는 뭉친 바람이 스쳤다.
“그럼 잘 가.”
이 때다 싶어 세영은 걸음을 떼었다. 빨리, 빨리, 더 빨리. 그리고 끝까지 태양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했다. 빛이 가득한 눈동자도 마주치지 못했다.
“뭐 없어?”
분명 혼자 뛰듯이 걷고 있었다. 세영은 익숙한 음성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태양이 옆에서 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버스 정류장에서도 한참 지나고 사거리의 횡단보도도 지났다. 조금만 더 가면 다음 정류장이었다. 세영은 놀란 가슴을 쓰러 내릴 생각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장난기 가득한 태양만 보았다.
“정말 뭐 없어?”
따라오고 있었다는 것도 어안이 벙벙한데 다짜고짜 무슨 말이야?
“8월 19일. 내 생일. 설마 축하한다는 말 정도도 안 해 줄 거야?”
살풋 섭섭한 미소가 걸려있다.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밝음을 모두 먹어버린 그런 미소만 짓는 태양의 미소가 약간은 서글퍼 보여서. 그래서 세영은 진심으로 미안했다.
“생일 축하해. 진짜야.”
단지 한 마디인데 언제나처럼 밝아진다. 더욱 매력적인 미소를 보인다. 두근두근. 태양의 미소만 보면 나타나는 증상. 초과된 심장박동수가 들릴 때마다 세영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태양에게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고마워. 그런데 그건 뭐야?”
태양은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혹시 뭘 준비하지 않을까. 태양의 생일선물이라며 조심스레 내밀지 않을까. 그래서 어제 밤새 뒤척이지 않았던가. 세영이 주는 생일선물은 뭘까? 그러다가 그냥 세영이 축하한다고 말해주면, 그걸로 족하다고 다독이며 간신히 잠이 들었다. 여느 생일처럼 오늘도 역시 파란만장했다. 차라리 훈련이라도 있었으면 나았을 걸. 어제의 시합을 마지막으로 여름훈련을 마쳤다. 그래서 대담하게 남자 교실에 찾아와 선물을 주고 가는 여학생들에게 지쳐있었다. 사실, 세영은 언제 올까? 생각하며 뒷문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에 지쳤다. 그래도 나타나지 않자 세영이 성격에 남자 반에 오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틈만 나면 복도에, 식당에, 매점을 서성였다. 그런데 보이지 않았다. 머리카락 한 올 찾지 못했다. 그래서 무작정 기다렸는데 인사도 없이 지나치다니. 서운함에 울컥했지만 그저 얼굴 한번 본 것으로 마냥 좋고, 엎드려 절 받기이지만 ‘생일 축하해’란 말도 들었다. 제대로 자지 못해 날카로웠던 신경이 금세 가라앉았다. 그런데 사람 마음 참 이기적이다. 그래도 혹시 날 위해 뭘 준비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이 몰려왔다.
“이거?”
세영은 태양의 시선이 정확히 꽂혀있는 갈색봉투를 살짝 뒤로 감췄다.
“안 무거워? 이리 줘. 그런데 정말 걸어 갈 거야? OO마을까지는 최소한 40분은 걸어야 돼.”
태양은 손까지 내밀었다. 가뜩이나 더운데 등줄기에 맺혀있던 땀방울이 죽 흘렀다.
“아니...저...괜찮아. 안 무거워.”
세영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무겁지 않다니. 퍼런 핏줄이 올라와 있는데. 태양은 눈살이 찌푸려졌다. 세영의 가는 팔목에 철썩 같이 매달려 있는 봉투가 보기 싫었다.
“뭐가 안 무거워. 줘. 그거 들고 가다가 이번에는 손목이 삐겠다.”
세영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로맨틱! 로맨틱이 없잖아.
-자판기 가서 500원 넣으면 나오는 거잖아.
보배의 말이 튀어 나왔다. 그리고 태양의 표정은 좋지 않아 보인다. 세영은 고개를 퍽 숙이고, 들고 있던 봉투로 태양의 가슴팍에 쳤다.
“서...선물이야. 물론 로맨틱하지도 않고, 자판기 가서 500원 넣으면 나오는 거야.”
속사포처럼 다다다 말을 마치고, 걸음을 재촉했다.
‘사라지자. 부디 사라지게 해 주세요!’
“우유네.”
태양은 세영이 거칠게 넘긴 봉투 안에 망설일 새도 없이 손을 넣었다. 흰 우유였다. 봉투 안에는 흰 우유가 가득했다. 그리고 저 구석에는 세영이가 좋아하는 초코우유도 있었다. 태양은 엄청난 우유에 놀라움도 잠시, 너무 가슴이 벅차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뭐야, 예의 없게 선물 주고 내빼다니. 원래 선물은 선물 준 사람 앞에서 푸는 게 예의라고.”
세영의 종종걸음은 태양의 큰 보폭에 따라잡혔다.
“그럼 선물 받은 사람이 선물 준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것도 예의야!”
주고 나니 며칠 째 풀지 못해 끙끙거렸던 수학문제가 풀린 것처럼 시름이 쑥 내려갔다.
“고마워. 정말.”
그리고 고마운 인사까지 받고 나니 오늘 하루 전전긍긍했던 시간들이 먼지가 되어 날아갔다.
‘그래, 우유면 어때. 고맙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된 거야.’
세영은 애써 자신을 위로하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걸 다 어떻게 먹어?”
애써 위로하고 있던 세영은 덜컥했다.
‘그래, 인정해. 나도 알아. 전혀 너하고 어울리지 않는 선물이었어. 알아. 안다니까.’
“봐봐. 유통기한은 내일 모레까지인데. 21일.”
세영의 눈높이에 딱 맞게 내밀어진 우유에는 21이라는 숫자가 찍혀있었다. 바보천치. 이거야 말로 바보의 날에 최고의 바보스러운 일이다. 우유가 유통기한이 짧다는 건, 기본상식 중에서도 가장 밑에 있는 상식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쩌자고 스무 개가 넘는 우유를 산거야! 이제야 점원 언니의 놀라움도 아주머니들의 말들도 이해가 되었다. 이건 빼도 박도 못할 정도로 ‘나 바보요’라고 온 동네에 소문내고 다닌 거다. 그 완벽하고 이성적인 이세영이! 눈앞이 하얗다. 그리고 들려오는 가벼운 웃음소리. 명백한 태양의 것.
“쿡쿡.”
아는데...바보같이 굴었다는 거, 천하의 이세영이 정말 바보 같은 실수를 했다는 거 아는데. 그래도 그렇게 웃어버리면, 그러면... 아프다. 가슴이. 아니 몽땅. 세영의 모든 부분이 쓰라렸다. 수치심에, 금이 간 자존심에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윤태양에게 치부를 보였다는 게 그리고 그 치부에 아무렇지 않게 웃는 태양에게 화가 났다
“이럴 때 웃기더라.”
차라리 웃기만 했다면, 세영은 입술 한번 꾹 깨무는 걸로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양의 입에서 나온 말에 세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마! 그러지 마!’
“평생 실수 한 번도 안 할 것 같은 사람이 할 때.”
세영의 얼굴이 급격히 빨개진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머리칼이 곤두서고, 핏발이 섰다. 뭐라고 쏘아붙여야 하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 사이에 낮게 웃던 태양의 표정이 단정해졌다.
“바보, 실수 좀 하면 어때? 사람이니까 실수하는 건데. 아마 중국에 살던 공자님도, 인도에 살던 간디님도 다 한번쯤은 실수 하셨을 걸? 완벽한 사람들도 한번쯤은 실수를 하는 거야. 나는 가볍게 패스해야지 했다가, 뻥 날아가서 자살골 만든 적도 있어. 뭐, 연습시합이어서 지금 멀쩡하게 살아있는 거지만. 주황색 섬유유연제가 주스인 줄 알고 마시다가, 야밤에 응급실에 달려간 적도 있고. 기현이 녀석한테 훈련시간 잘못 알려줘서 한 달 내 내 시달린 적도 있고...”
태양의 손이 봉투에 들어가더니, 우유 하나를 꺼내 입구를 열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머니가 소금 치라고 했는데, 설탕 마구 넣어서 그 날 저녁 쫄쫄 굶은 적도 있어. 모르고 문 안 잠그고 나가서 도둑 들어올 뻔한 적도 있고. 맞다! 좋은 일 좀 해 보겠다고 축구부원들 세탁물 돌리다가, 모르고 물 빠지는 수건들도 같이 넣어서 하얀 유니폼에 얼룩덜룩 무늬 남긴 적도 있어. 당장 유니폼 없어서 그거 입고 뛰었는데. 얼룩덜룩 무늬들이 참 볼만했지. 크크. 그나마 내가 살았던 게 경기를 이겨서 였어. 지기라도 했으면.......으, 오금이 저린다.”
“픽.”
가만히 듣고 있던 세영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작은 실소. 그제야 태양의 긴 실수담은 끝이 났다.
“사람이면 다 하는 게 실수야. 설마 이세영, 사람 아닌 거 아니지?”
생글 맞게 웃으며 넌지시 묻는 태양에게 세영이 하하. 웃으며 고른 치아를 드러냈다.
‘정말 윤태양, 못 당하겠다. 너 정말 대단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랬다. 태양이 했던 말은 어딘지 모르게 설득력이 있었다. 공을 차는 법을 알려줄 때도 양호실에 누워있을 때도 예의를 운운할 때도. 세영은 화가 났지만, 태양의 말에 화가 누그러지고 되레 태양의 말에 수긍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게 또 화가 나, 도끼눈을 하고 쳐다보았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윤태양의 말에 설득 당했다는 걸. 그게 그리고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는 걸.
“자. 마셔.”
한참을 웃는데, 태양이 새 입처럼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벌어진 초코우유를 내밀었다. 참 달게 보였다.
“이건 내가 너에게 준 선물이라고.”
‘아무리 내가 실수를 했지만 그건 네 선물이야.’
“선물 받은 사람 마음이지.”
눈이 웃고 있다. 빙그레. 그 눈을 따라 세영의 눈도 휘었고 진갈색빛 액체가 세영의 식도에 흘러들어갔다.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맛있다!”
미적지근한데 목을 타고 들어가는 액체는 차가웠다. 그게 너무 달았다. 세영은 잠시 떼었던 초코우유를 다시 들어 끝까지 비웠다. 우유팩 뒤로 세영의 얼굴이 정말 달콤했다. 입가에 묻은 갈색 액체와 함께 씨익 웃는 모양새가 너무 달콤했다. 얼마나 달콤할까? 화이트 초콜릿만큼? 어제 먹었던 새빨간 수박만큼? 아니면......?
“쪽.”
비교할 수 없다. 세영이의 입술은 세상 어떤 단 것보다 달았다. 이렇게 달콤한 건 죽을 때까지 맛보지 못할 거야. 그리고 다시 한 번,
“쪽.”
세영의 눈이 동그랗다. 뺨도 붉다. 그리고 입술은 너무 달콤하다. 다시 한 번,
“쪽.”
닿은 입술이 녹는 거 같다. 스물스물. 녹아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거 같다. 입술의 형체가 사라져도 좋아. 이 달콤함을 맛볼 수 있다면. 아, 이세영, 너 너무 달콤한 입술을 가지고 있어. 한번만, 한번만 더, 하지만 세영이 주춤하고 물러섰다. 태양이 움칫했다.
“......뭐.....뭐.....야?”
세영의 입술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굳었던 태양의 몸이 풀리고, 경직된 얼굴에 다시 미소가 감돌았다. 바보, 이세영. 네가 너무 달콤한 입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우유에 대한 답례.”
그렇다고 네 입술이 너무 달콤해, 라고 말하지는 않을게. 아직은. 너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빨갛고, 떨고 있으니까. 태양의 입가가 살짝 비틀어졌다. 야릇한 미소. 그 뒤로 초록색 버스가 지나쳤다.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뛰자!”
세영의 손목이 태양의 손아귀에 잡히고, 두 다리가 태양을 따라 달렸다. 잡힌 손목이 뜨거웠고 입술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아. 아...
초코우유는 미적지근했던 거야. 아니, 뜨거웠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