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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타닥. 질질 맥없이 끌려오던 파란색 휴지통이 어느 순간부터 통통 튀었다. 세영의 허벅지까지 오는 제법 커다란 휴지통이 경쾌하게 세영의 뒤를 따랐다. 조용한 복도를 지나는 세영의 발걸음도 훨훨 날아다니는 가벼운 나비의 날갯짓과 같았다. 종업식이 끝나고 각반 종례가 이미 다 파한 뒤라, 학교는 벌레 한 마리 기어 다니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이 학교에서 처음 맞는 방학이었다. 운동장에서의 종업식은 특별할 것 없이 일찍 끝났다. 교실에 들어와 1학기 성적표를 받고, 일주일 전에 보았던 모의고사 성적표도 받고, 종이와 잉크가 아까울 정도로 낭비된 과목 우수상도 여러 장 받았다. 별 것 없는 방학숙제 종이가 넘겨졌고 일주일의 짧은 방학 후의 보충수업 시간표가 그 뒤를 따랐다. 상투적인 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이렇게 한 학기가 갔구나. 라고 감상에 젖을 겨를도 없이, 한 시간 가까운 구기중의 얼토당토않은 설교를 들었다. 그리하여 다른 반보다 훨씬 늦게 대청소를 시작했고, 하필이면 이번 주에 주번인 세영은 마무리까지 하느라 고요한 학교를 파란색 휴지통과 함께 거닐고 있었다. 혼자 쓰레기 처리를 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3층 교무실 앞 게시판에 붙어있는 1학기 총 성적표를 보고난 후부터 점점 가벼워졌다.
맨 아래에 박혀있던 세 글자.
윤태양.
삼일 전에 게시된 1학기 총 성적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모의고사가 시행되었고, 기말고사 점수가 나오는 데로 실기와 수행평가 등이 합쳐져 1학기 총 성적이 완벽하게 나오기까지는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번 기말고사는 괜한 잡생각에 미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중력이 바닥이었다. 그래서 첫 날, 시험지를 받는 순간까지 초조함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런데 시험지를 받고 마지막 OMR카드를 걷을 때까지 아주 편안하게 시험을 봤다. 인정하기 싫지만, 태양에게 주려고 만들었던 정리노트가 세영에게 큰 힘이 되었다. 국어부터 세계사까지 이건 선생님이 강조했었지. 이건 별 다섯 개라고 했으니까. 이건 저번에도 나왔으니까 안 나올 거야. 하며 적었던 내용들이 고스란히 시험지에 담겨있었다. 마지막 세계사 시험지를 접으며 이렇게 편안히 시험을 본 적이 처음일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든 생각, 태양이는 내 정리노트가 힘이 되었을까? “드디어 성적 떴다!”고 누군가가 소리쳤을 때, 가장 궁금했던 건 자신의 점수도 등수도 아닌 윤태양의 결과였다. 100등까지만 나열된 게시판의 주위를 스치기만 몇 번. 세영은 똑바로 윤태양이라는 이름을 찾으려고 시도하지 못했다. 설마 있겠어, 하는 생각에 정말 시험을 못 쳤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 하지만 태양이 시험을 잘 보았기를 기원하는 마음까지. 게시판 앞을 오며 가며 세영은 수 만 가지의 감정을 맛봤다. 혹시나 태양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까 싶어 귀를 쫑긋 세웠지만, 들려오는 건 괴물 이세영이 또 한 건 했더라. 한 과목 빼고 다 1등이더라. 정말 괴물이다. 등의 세영 자신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한 차례 세영의 괴물파문이 학교를 휩쓸면서 게시판 앞은 연일 북새통이었고, 그 현장의 주인공인 세영은 그 앞에 한 발자국도 제대로 디디질 못했다.
타당타당. 파란 휴지통이 세영의 무릎까지 튀겨 올랐다 떨어 졌다를 반복했다. 세영의 자유로운 왼팔이 넘실거리고, 발걸음은 시멘트 바닥을 탁탁 치고 올랐다. 하나로 묶은 긴 머리가 찰싹찰싹 얇은 하복 셔츠를 치고, 단정하게 빗어 내린 앞머리가 살짝 흔들리며 반짝거렸다. 그리고 세영의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게시판에서 본 윤태양 이름 세 글자를 확인하는 순간부터 무겁게 얹혀있었던 무언가가 말끔히 사라졌다. 태양이 운동하는 사람은 공부 못한다는 속설을 한방에 넉다운 시킬 줄이야. 설마 하는 마음에 100등부터 차례차례 훑어가는 세영의 눈길은 정확히 80등에 걸려있는 윤태양에서 멈췄다. 그 이름에 눈을 여러 번 비볐다. 혹시 세영이 아는 그 윤태양이 아닌 게 아닐까? 하지만 2학년 1반. 거기다, 윤태양은 학교에서 딱 한명이었다. 맞구나. 윤태양이 80등이라니. 내 공책을 봤을까? 이동수업시간에 살짝 책상 안에 넣어둔 주황색 공책.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치면서 기분은 점점 고조되었다. 태양에게 잘 된 것인데 왜 자신이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도 모른 채, 세영의 발걸음은 그저 들떠, 한달음에 교실로 달려갔다.
“드르륵.”
결에 따라 때가 묻어있는 책걸상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서 있었다. 오랜만에 걸레질을 한 칠판은 청명한 초록빛을 띠었고, 매일 열려있던 청소도구함은 차분히 닫혀져 있었다. 꽉꽉 닫힌 이중창 안으로 말끔한 교실을 삼켜 버릴 만한 빛이 양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쏟아졌다. 그리고 마지막. 세영이 본 것은 검은 실루엣. 빛에 삼켜진 교실 안에 유일한 검은 형체. 창가 쪽 1분단 책상 위에 머물러 있는 검은 형체는...
“안녕?”
윤태양이었다. 바깥을 응시하고 있던 얼굴이 살짝 돌려 세영에게 향했다. 쿵.쿵.쿵.쿵.쿵.쿵. 세영의 심장이 격정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세영의 모든 감각이 오직 심박수를 쫓고 있었다. 어째서 윤태양이 여기 있는 거지?
“늦었네.”
태양은 세영의 손에 들린 파란 휴지통을 흘긋 쳐다보았다. 교실에 온 것이 다행이었다. 교문 앞에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타나지 않아 혹시나 해서 세영의 교실에 왔다. 고맙게도 세영의 가방이 덩그러니 책상에 놓여있었다. 그러고도 한참이었다. 태양에게 그 시간은 참으로 길었다.
“...주번이라서.”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라고 묻고 싶은데, 바보같이 어눌함이 한껏 묻은 목소리로 요상한 대답이 나왔다. 태양은 걸쳐있던 엉덩이를 떼었다. 시선은 세영에게서 떼지 않은 채. 세영은 강렬한 태양의 시선에 엉거주춤 휴지통을 청소도구함 옆에 밀어 넣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태양의 발자국 소리가 시작되었다. 세영은 마지막 순간이라도 되는 듯 폭주하는 심장에 고개를 숙이고 하얀 양말의 언저리에 집중했다.
“글씨가 예쁘던데.”
하얀색 양말 위에 주황색 공책이 겹쳐졌다. 태양의 적당히 굵은 음성이 세영의 머리 위에서 맴돌았고, 태양의 야릇한 체취는 세영의 조막막한 코를 괴롭혔다. 오감을 자극하는 태양의 모든 것에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세영은 주황색에 초점을 맞췄다. 처음에 세영이 꺼내들었던 그 주황색 공책이 아니었다. 귀퉁이가 휘어져 있었고, 꽤 손 떼가 묻어 얇실했던 공책이 부풀어져 있었다. 봤구나. 그것도 아주 많이. 세영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 꼬리가 쓱 올라갔다.
“...예의는 차리라며. 재수 없어도......”
‘아, 이세영. 정말 바보다. 정말 바보 천치다.’
세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태양이 자신이 밤새 만든 공책을 정성껏 봐준 것도 좋고, 태양의 시험결과가 좋은 것도 참 좋은데. 세영의 말은 마음과는 다르게 엇나갔다.
“무슨 예의?”
‘응? 뭐라고?’
세영은 고개를 홱 들었다. 태양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약간 해쓱한 얼굴은 아그리파처럼 무표정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그...그러니까...그 때 붕대에 대한 예의야.”
‘그래, 맞아. 그거 때문이야.’
세영은 자신이 생각이 맞다고 여러 가지 이유를 끌어다 붙여 합리화시켰다. 하지만 정말 그거 때문이었을까? 정말?
“그래? 그럼 나도.”
태양이 바로 옆의 책상에 있던 세영의 가방을 낚아챘다. 그리고 성큼성큼 교실 밖으로 향했다. 세영의 곁을 지나치는 태양의 행동에 세영은 어리둥절했다.
‘지금 뭐하는 거지? 그건 내 가방인데.’
“나도 재수는 없어도 예의는 차리니까.”
하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세영의 가방을 왼쪽 어깨에 메고 유유히 세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야! 그거...”
세영이 태양을 쫓아 복도에 나가자 태양이 뒷걸음을 치고 있었다. 단정한 태양의 얼굴에는 좀 전과는 다른 눈부신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태양은 세영에게 손짓했다.
“이세영, 가자!”
태양의 손짓이 세영을 부르고 있었고, 소리치던 세영은 멍하니 점점 작아지는 태양의 미소를 바라보다가 태양을 놓칠세라 뛰어갔다. 타닥타닥. 두 사람의 발소리가 3층 복도에 고요히 울려 퍼졌다.
세영은 얼었다. 딱딱하게 얼어 미세한 떨림도 없었지만, 등줄기에서는 땀줄기가 죽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7월의 뙤약볕 때문이 아니었다. 거대한 물체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걸 타자고?”
“응.”
단단하게 얼어 눈동자도 굴리지 못하는 세영의 앞에 태양의 얼굴이 쏙 들어왔다. 장난꾸러기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 반면, 세영은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퍼렇게 사색이 되어있었다. 몇몇 사람이 줄 서 있는 이곳은 아주 커다란 물체가 좌우를 굉장한 속도로 움직이다 못해 360도로 회전까지 하고 있었다. 맞다. 여기는 L월드였다. 꿈과 낭만이 가득한 놀이공원. 중학교 소풍 때 딱 한번 왔던 그 곳에 다시 서 있었다.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그 곳에. 천하의 이세영에게 놀이공원은 꿈과 낭만이 가득한 환상의 세계가 아니라, 공포가 가득한 끔찍한 세계였다. 세영은 반사적으로 한발 두발 뒤로 물러났다. 처음 저 물건을 탔을 때, 붕붕 공중에 떠서 마구잡이로 휘둘려질 때, 딱 죽는 줄 알았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찔끔찔끔 울기까지 했었다. 정말 이세영 인생에서 그렇게 나약하고 찌질 했던 순간도 없으리라. 항상 최고였던 세영에게도 저 물건은 한마디로 난공불락. 세영은 본격적으로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어디가?”
태양의 손이 세영의 가는 손목을 잡았다. 조금 후덥지근한데 비해 세영의 살갗은 차가웠다. 세영은 뜨거운 태양의 촉감에 발걸음을 멈추고 태양을 째려보았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윤태양, 이 녀석 때문이었다. 다짜고짜 따라오라더니 한참을 걸어간 버스정류장에서 721번 버스를 타고 내린 곳이 바로 L월드. 세영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두 장의 이용권을 끊고 당도한 곳이 이 무시무시한 물체였다. 가방만 뺏기지 않았어도 지금 여기에 서 있을 이유가 없었다. 태양의 성적을 보고 기분 좋아했던 건 다 취소다! 이게 뭐가 예의를 차리는 거야? 이건 완전 물 먹이는 거잖아!
“어라...?”
태양은 갑자기 돌변한 세영의 표정에 의아했지만, 가만 보니 이건 세영이 긴장한 거였다. 쏘아보는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고, 입술을 달달 떨리고 있었으며 얼굴이 퍼렇게 떠 있었다. 나 무서워 죽겠어! 라고 얼굴에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었다. 태양은 재미있어졌다. 곧 죽어도 눈을 부라리던 세영에게 이런 대단한 게 숨어있을 줄이야. 이것도 나름 재미있지만, 세영이 도망치는 건 결코 재미있지 않았다.
“이게 성적에 반영된다고 하면 탈 거 아냐?”
세영의 눈에 불꽃이 피었다. 바로 이거다. 처음 그리고 체육제에서 보았던 그 불꽃. 태양은 승리의 미소가 흘러나오는 것을 막았다. 또 재수 없다고 할지 모르니까.
“다음 차례 들어오세요!”
아주 정확한 타이밍에 입구가 열리고, 줄 서 있던 사람들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태양은 다시 한 번 도전적인 눈빛을 세영에게 보냈다. 세영은 오랜만에 보는 느물느물한 눈빛에 왈칵 분노가 치밀었다. 분명 윤태양은 비꼬았다. 이세영을 앞에 두고 적나라하게 비꼬았다. 다들 뒤에서 수군거리기는 했어도 대놓고 비꼰 사람은 윤태양이 처음이었다. 뒤에서 들을 때야, 앞에 나서서 당당하게 말해보시지! 했지만, 윤태양에게 직접 듣고 나니 기분이 여간 더러운 게 아니었다. 녀석 앞에서 느꼈던 시궁창에 빠졌던 그 기분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윤태양,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고! 세영은 더러운 기분에 욱해서 사람들을 따라 생각하기도 싫은 무시무시한 물체에 탑승하고 있었다.
“꺄!”
아직 시작도 안 했는지 비명을 지르는 여자가 있었다. 타자마자 눈을 꼭 감고 있던 세영은 비명소리에 심장마비에 걸릴 뻔했다. 막상 탔지만 세영은 지금 죽도록 후회하고 있었다. 이미 허공에 두 다리가 떠 있었다. 조금씩 덜덜거리며 올라가는 기구가 느껴졌다.
‘이세영, 넌 지금 땅에 서 있는 거야. 그래, 상상하자. 너는 지금 안전한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어.’
계속 암시했지만 기구의 움직임이 세세하게 스며들었다. 서서히 바람도 움직였다. 안전바를 잡고 있는 손바닥은 이미 축축하다 못해 미끄러졌다.
“덜컹.”
시작이다! 물체가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점점. 점점. 점점. 가속도가 붙었다. 돈다. 흔들린다. 돈다. 마구 흔들린다.
“아악!”
주위에서 괴성에 터져 나왔다. 세영은 모든 것을 상상에 맡기고 있었다. 아무 것도 보지 않으려 눈을 꼭 감고 생명줄인 안전바를 꽉 잡았지만, 모든 상황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태양은 세영의 질끈 감은 눈을 보고 미끈거리는 양 손을 포착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세영은 엄청난 공포에 빠져있었다. 눈으로 직접 보는 것보다 실제 눈을 감고 느껴지는 것들을 상상하는 게 더 무섭다는 걸 세영은 모르나 보다.
“이세영! 이세영! 눈 떠! 눈 뜨라고!”
거칠게 쓸어내리는 바람을 통과해 태양의 말이 세영의 귓가에 도착했다. 세영은 태양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할 수 없었다. 눈을 뜨면 세영은 정말 심장마비에 허공에 매달린 채 생을 그대로 마감할지도 몰랐다.
‘안 돼! 못 떠!’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고 안전바에 매달렸다. 제발 빨리 지나가길. 빨리! 무언가가 닿았다. 축축한 세영의 손에 닿았다. 마침 놀이기구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 바보야! 그렇게 눈 감고 있으면 더 무서워!”
어? 태양의 목소리였다. 태양의 손이 안전바에서 미끄러지는 세영의 오른손을 잡았다. 태양의 왼손과 세영의 오른손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세영은 약간 뜨거운 태양의 손을 상상하고 있었다. 크고 더운, 그러나 믿음직한 태양의 손이 세영의 상상 속에서 부풀어 올랐다. 세영은 꽉 감겨있던 눈을 서서히 풀어 태양을 쳐다보았다. 태양의 걱정스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태양의 표정을 음미할 사이도 없이 다시 놀이기구가 빙빙 돌았다.
“이세영! 소리질러봐. 이렇게! 아악!”
다시 눈을 질끈 감으려던 세영에게 태양이 소리쳤다. 태양의 손이 끈끈하게 세영의 손을 잡고 있었다. 점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지만 태양은 필사적으로 세영의 손을 잡고 있었다. 손을 타고 태양이 세영에게 다가왔다. 서서히 스며들었다. 태양의 눈부신 빛이 조금씩 그리고 빠르게 세영을 채워갔다. 세영은 흔들리는 시선 속에서 태양을 보았다. 태양도 세영을 보고 있었다. 새파란 하늘 속에서 출렁거리는 거대한 물체에 몸을 매달고, 태양과 세영의 시선이 얽혔다.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고, 격렬한 바람이 온 몸을 휩쓸고. 이미 공포심은 저 끝까지 올라갔지만, 얽히는 시선 속에서 이상한 편안함이 몰려왔다. 옆에 있어서. 태양이 옆에 있어서 왠지 괜찮을 것 같다. 태양이 있으니까.
기구는 절정에 치닫고 있었다. 회전하고 좌우로 흔들고를 상상 초월의 속도로 반복했다. 그리고 꽉 닫혀 있던 세영의 입에서 커다란 비명이 쏟아졌다.
“꺄악!”
동그랗게 떠진 눈 사이로 세영의 비명이 지나갔고, 또 지나갔다. 뻥. 뻥. 뻥. 풍선이 파바박 터지듯 세영의 속 안에서 펑펑 터졌다. 아주 시원하게 세영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자유롭게 뚫렸다. 야릇한 희열이 터진 통로로 쑥 올라왔다. 쫙 닭살이 돋았다. 얕은 희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세영을 집어삼켰다. 격렬한 기구의 움직임과 쓸어버릴 것 같은 바람. 공포의 원천이던 것들이 한 순간에 희열의 대상으로 돌변했다. 세영의 비명은 계속되었고, 태양은 얼굴이 빨개지도록 소리를 지르는 세영을 보며 같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둘은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자. 마셔.”
“고마워.”
세영은 태양이 건넨 투명한 플라스틱 통을 받아들었다. 커피색의 자잘한 얼음이 담겨있었고, 그 중간에 검은색 빨대가 끼어있었다. 알알이 맺혀있던 물방울이 세영의 뜨거운 손을 식혔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의 열기가 사라질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태양은 가방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세영 옆에 두 개의 가방, 그리고 태양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세영은 물끄러미 태양의 앉는 모양새를 지켜보다 빨대를 쪽 빨았다. 달콤한 초콜릿 향이 입 안을 가득 메웠다. 초코 셰이크였다. 태양의 손에도 세영과 똑같은 초코 셰이크가 들려 있었다.
“흰 우유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바라보는 세영의 궁금한 눈빛에 태양은 피식 웃었다. 이세영이 윤태양에게 궁금한 것도 있었네.
“좋아 한다기보다는 체력을 키워야 하니까. 일종의 의무식품.”
태양은 세영처럼 입술을 오므리고 셰이크를 쪽 빨았다. 달다.
“그럼 흰 우유 먹어.”
세영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꼭 태양이 흰 우유를 먹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게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태양은 다시 피식 웃었다. 태양의 눈이 살짝 휘었고, 광대뼈가 조금 도드라졌다. 참으로 해맑구나. 이 아이는. 세영은 태양의 웃음이 너무 맑아 그 웃음에 홀리고 싶었다.
“사실 초코우유 좋아해.”
세영은 푸흣 웃음이 나왔다. 빨대를 쪽쪽 빨며 말하는 태양이 너무 귀여웠다. 태양처럼 세영도 입술을 말아 올리고 눈이 작아지는 웃음을 지었다. 웃다보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입 안을 가득 메운 초코 셰이크도 좋고 뻥 뚫린 마음도 좋고 해맑게 웃는 태양의 미소도 좋았다. 그냥 모든 게 좋았다. 그저 이 순간이 좋았다.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태양이 그만큼이나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왜?”
태양의 광대뼈 부근이 붉은 것은 착각일까?
“아니...아니야.”
태양이 고개를 돌려, 빨대를 빠는 일에 열중했다. 세영은 급격히 줄어가는 태양의 초코 셰이크를 쳐다보며 마치 시합이라도 하는 듯 자신의 검정색 빨대를 쪽 빨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픽픽하는 바람만 빠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보고 씩 웃었다.
“솔직히 좀 놀랐어.”
세영의 말에 태양의 웃음기가 가셨다.
“네 성적”
태양은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도 놀랐다거나 하는 끄덕임이 아니었다. 그럴 줄 알았어나 혹은 그것 말이구나 하는 끄덕임이었다.
“내 정리노트가 만능노트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아.”
사실 묻고 싶은 건, 운동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왠지 이제 대놓고 태양에게 모욕이 될 만한 혹은 무시하는 투가 있는 말은 하기가 싫었다.
“응. 네 노트가 시험지는 아니니까. 그래도 나에게 꽤 성능 좋은 노트였어. 참 고맙게 생각해.”
태양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스윽 세영을 보았다. 하지만 세영의 얼굴에는 아직도 뭔가를 더 원하는 눈빛이었다.
“지금 네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 운동장에서 공만 찼을 녀석이 그만한 성적이라니. 말도 안 돼. 이거지?”
세영의 눈동자가 커졌다.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니...그러니까...”
또 모욕이 된 걸까? 또 무시한다고 느낀 걸까? 세영은 이럴 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아니만 반복했다. 이렇게 태양 앞에서 전전긍긍할 줄이야. 자신의 생소한 모습에 놀라면서도 태양이 혹시 기분이 상했을까가 걱정이었다.
“맞아. 운동하는 놈치고 공부하는 놈은 드물지. 나도 운동하는 놈이니까 공부에 소홀해지는 것도 사실이야. 그런데 공차기 시작한지 이제 4년째고, 그 전에는 그래도 꽤 책을 많이 읽었지. 아버지가 워낙 다른 건 필요 없으니 책 많이 읽으라는 분이셔서. 거기다 영어는 얼마나 강조하시는지. 영어 영화, 영어책, 영어 라디오 등등. 하루 종일 영어에 시달리면 살았거든. 무역을 하셔서 외국어 쪽에는 양보 못하시는 게 있으시거든. 거기다 어머니도 통역가로 일하시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이래저래 주워들은 게 많은 잡학과지.”
세영은 새로운 그리고 놀라운 태양의 배경에 사뭇 놀란 표정이었다. 태양은 새삼 자신의 배경이 그렇게 특이한가 싶었다. 하기는 처음엔 기현도 호들갑을 떨었었다. 어떻게 그런 유전자에서 이렇게 발 빠른 놈이 나왔냐고. 그렇다고 부모님과 형 모두 운동신경이 떨어지는 편은 아니었다. 유독 태양이 운동신경이 특출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런 부모님 덕에 축구를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영어와 책읽기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운동하는 놈 치고는 괜찮은 성적을 유지했지만, 이번은 자신도 정말 의외였다. 그만큼 어수선하게 놓여있던 자신의 지식들이 세영이 만들어 준 노트로 깔끔하게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세영의 정갈한 글씨를 읽고 또 읽고, 시험 전 주말동안 세영의 노트만 수 십 번은 읽었다. 이걸 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썼을 세영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노트 고마워, 정말.”
세영은 태양의 진지한 한마디에 놀랐던 표정을 지우고 후끈거리는 양 볼을 쓰다듬었다. 몇 시간 전 만해도 태양에게서 ‘고마워’라는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이 말을 들으려고 밤새 노트를 만든 것도 아닌데. 태양의 입술을 타고 나온 그 한마디가 세영을 들뜨게 했다. 다시금 심장이 요동쳤다. 쿵.쿵.쿵.쿵.쿵.쿵.
“띠디딕.”
쿵쿵거리는 심장을 헤집고 들려온 소리는 세영의 알람소리였다. 종업식이라고 전보다 일찍 잡아놓은 과외시간을 알리는 소리. 쿵쿵거리는 심장을 위해 기가 막힌 타이밍이구나 라고 안도하면서도 이 순간이 안녕이라는 생각에 안타깝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 또 한 번 놀라면서 세영은 벌떡 일어섰다.
“과외 때문에.”
태양이 세영은 따라 일어서고 태양의 어깨에는 두 개의 가방이 그리고 손에는 두 개의 텅 빈 플라스틱 초코 셰이크 통이 들렸다. 세영보다 한참은 위에 있는 머리를 휙휙 돌리더니, 성큼 걸어가 휴지통에 플라스틱 통을 버리고 세영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태양의 고개가 세영을 부르고 있었고, 아주 익숙하게 세영은 쪼르르 태양의 옆을 따랐다. 그것이 참 자연스럽고 친밀하다는 것을 태양도 세영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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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화가 새하얗다. 오랜만에 마음먹고 화장실 한 쪽에 치워 두었던 헌 칫솔로 한 시간여 동안 문질렀다. 복숭아 향기가 나는 섬유 유연제도 두 방울 똑똑 떨어뜨리고, 향기가 잔잔히 밴 젖은 운동화를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정원의 달궈진 돌 위에 올려놓았었다. 그리고 바짝 마른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운동화는 세영의 발에 살그머니 끼워져 있었다.
“너 기어이 가겠다는 거야?”
현관 앞에 앉아 운동화만큼이나 하얀 끈을 조이던 세영에게 질긴 잔소리가 따라붙었다.
“얘가 정말! 뭐 하러 시간 낭비해? 나가서 좀 이영이도 보고, 거기 대학도 보고 이러면서 뭘 좀 해야지. 그렇게 비전 없는 학교만 계속 나가서 뭐할래? 얘가 이제 정말 보통 얘들처럼 하려고 그러네.”
종업식을 하고 온 다음 날부터 시작된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하시는 거겠지 그랬는데, 엄마의 학교가 방학에 들어간 지난 금요일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여름방학 동안에 어학연수 겸 이영한테 가 있으라는 이야기.
“너 성적 좀 잘 나왔다고 우쭐한 모양인데. 이깟 학교랑 너 다니던 외고랑은 천지차이나는 거 알지? 거기서 잘해 봤자 뱀 머리 밖에 더 돼? 아예 이참에 이영이처럼 아이비리그로 알아보자. 그래. 응, 한국에서 대학 나와 봤자 뭐해. 어차피 미국 아이비리그 쪽 대학 나오면 한국 오면 다 할 수 있어.”
어떻게 한 단어도 틀리지 않고 삼일 내내 똑같이 읊어대는지. 영어 선생을 할 게 아니라 국어 선생을 했어야 했다. 세영은 다 묶은 왼쪽 발을 뒤로 빼고, 오른쪽 발을 내밀었다. 갓 내린 원두의 진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주방 쪽에서 들리던 엄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울렸다.
“네 언니 봐라. 잘하고 있잖니. 너 여기서 한번 그런 건 그냥 경험했다 치면 돼. 한번 실수한 거 안 하면 되고 가서 열심히 하면 돼. 외고 나와서 S대 가는 거보다 그 쪽 대학가는 게 더 좋은 거야. 응?”
네 언니 봐라. 잘하고 있잖니.라고? 찬란할 정도로 완벽했던 이이영께서는 지금 맥도널드에서 햄버거 고기를 뒤집고 있다고. 언니가 새로 파트타임을 구했다며 유니폼까지 입고 찍은 사진을 보내온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것도 예전에는 볼 수 없는 커다란 미소를 달고. 세영 자신도 사진을 보고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놀랐는데 저 고매하신 엄마가 본다면 당장 거품 물고 졸도할 거다.
“얘, 세영아! 너 내 말 듣고 있어?”
왼쪽과 똑같으리만치 매진 운동화 끈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펄쩍 일어났다. 평소보다 가벼운 가방을 메고 사뿐하게 돌아섰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얘가! 세영아! 얘가 정말! 이따 아빠오시면 알아서 해!”
닫히는 현관 문 사이로 엄마의 마지막 소리가 묻혔다. 아침부터 햇살에서 강렬한 소리가 난다. 바람 한 점 없는 푸른 녹음이 즐비한 정원을 지나쳐 아치형 은색 대문을 열고 나가면 긴 회색길이 열려있다. 저 앞에는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 몇 명이 걸어가고 있었다. 일주일의 방학은 하루 종일 뭉그적대는 걸로 시작해 뭉그적대는 걸로 끝났다. 아침에 일어나 영어단어를 외우고, CNN과 BBC뉴스를 차례로 듣고 아침 겸 점심을 먹으면 전날 표시해 놓은 부분까지 수학 정석을 풀고, 언어영역 문제집 2회 정도를 풀고 좀 이른 저녁을 먹고 과외를 하고 과외숙제를 하다 잠이 들기를 반복했다. 그 사이사이 엄마는 지치지 않고 미국을 다녀오라 성화였고. 작년이었다면 엄마가 말하기도 전에 가겠다고 했을 것이다. 남들보다 무엇이든지 빨라야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남들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카드를 잡을 수 있다면 미국이 아니라 우주 저 멀리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변했다. 정반대로. 엄마가 말하는 한 번의 실수는 생애 최고의 실수였고 참담한 경험이었다. 거기다 덧붙여서 언니의 실패까지. 그런 곳에 세영은 갈 수 없었다. 언니의 실패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면 여기서보다 더욱 걷잡을 수 없는 패배의 진한 쓴 맛을 보게 될 것이다. 세영의 비릿한 미소가 뜨거운 햇살 앞에서도 구겨지지 않았다.
“넌 고 사이에 좀 탔다?”
“야, 그래도 여름인데 방학식하자마자, 동해로 한번 튀었다 왔다. 하하. 어떠냐?”
“단과학원 알아봤어? H학원이 괜찮다던데...”
“어제 무한도전 봤어? 야, 나 완전 쓰러져 죽는 줄 알았다! 아, 재석오빠 너무 좋아!”
학교 앞 버스정류장에서부터 교문까지 회색치마와 바지의 행렬이 이어졌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웃는 남학생 한 무리가 세영을 스치고, 연예인 이야기를 조잘대는 서너 명의 여학생이 세영의 뒤를 쫓았다. 세영은 여전히 어두웠다. 엄마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지만 이미 마음은 한 차례 어지럽혀진 상태였다. 별 것 없는 보충수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고 있는 자신이, 또 실패할까봐 미국을 갈 수 없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까악.하고 놀이공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맘껏 토해냈던 그 때처럼 소리를 질러서 이 한심스러움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생각 뒤로 태양이 떠올랐다. 응당 당연히 매일 뜨는 해처럼 태양은 언제나 세영의 마음에 동그랗게 떠 세영의 하루를 소리 없이 지켜보다, 세영이 다시 상기하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얼굴을 반짝거렸다. 똑같은 자리에 떠 있는 해처럼. 그리고 어둠이 찾아오면 슬며시 사라지는 해처럼. 세영이 눈을 감으면 서서히 세영의 생각 속에서 잠겼다. 요 며칠 태양은 세영과 함께 밥을 먹고 공부를 하고 잠을 잤다. 지겹게 쫓아다니던 태양의 상상에 괴로웠던 나날이 언제였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세영은 태양의 해맑은 미소에 피식피식 웃는 나날이 늘어갔다. 그리고 어느새 구겨졌던 얼굴이 환하게 피어있었다. 태양의 미소만 생각하는 것만으로.
“이세영! 너 아침부터 광년이처럼 웃음이 질질 새냐? 비도 안 오는구먼.”
세영의 가방을 치며 보배가 거친 입담을 과시했다. 이제 간단한 인사는 생략할 정도로 보배와는 친한 사이가 되었다.
“질질 새다니? 내가 뭐.”
세영은 부풀어있는 입 안 여린 살을 쪽 빨아 웃음을 없앴다. 그 모습을 보고 보배가 현란한 손동작을 보이며 숨넘어갈 듯 웃었다. 얼마나 방정맞은지 복장검사를 하던 학생주임부터 지나가던 학생까지 모두 보배를 주목했다.
“이보배, 그만 해. 아침부터 망신이다.”
그리고도 보배는 발걸음을 옮기지 못할 정도로 한참을 웃고 진정되었다.
“삐!”
보배의 웃음이 멈추기 무섭게 호각소리가 귀를 울렸다.
“어이구, 열심히 달린다! 우리의 영웅, 축구부!”
보배가 신나게 박수를 쳤다.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솔직하게 행동하는 보배였다. 세영은 여학생들로 붐비는 서쪽 현관 앞에서 운동장을 바라봤다. 서른 명은 족히 되는 선수들이 감독의 호각소리에 맞춰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줄을 맞춰 달리고 있었지만, 멀리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굉장히 힘들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찍부터 찾아온 더위가 새벽부터 쉽게 땅을 달궜다. 그리고 축구부는 여름 방학동안 가을 대회를 위해 특별 훈련에 들어간 참이었다. 이 더위에 이 햇볕에 공을 차는 건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라도 힘에 부칠 것이다. 세영은 멀리에서 돌아오는 축구부원 사이에서 태양을 찾았다. 중간쯤에서 달리는 태양이 점점 커져 세영의 망막에 들어왔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씩씩하게 팔을 젖고 발을 올리고. 못 본지 일주일은 넘었는데 전혀 낯설지 않았다. 생각 속에 머무르고 있는 그 얼굴 그대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근데 정말 미친 짓이다. 땡볕에서 저게 뭐하는 거야? 나는 백만 원 줘도 안 할래.”
“이보배, 네 눈앞에 백 만 원이 살랑거리면 당장 운동장으로 뛰어갈 거잖아. 물론, 돈 싸들고 쫓아다니면서 누가 너보고 축구해주세요 라고 애걸복걸 하겠냐마는. 쯧쯧.”
소리 없이 다가온 서경이 보배의 어깨를 툭 치고 말을 이었다. 세영은 서경의 말에 동의한다는 끄덕임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얼씨구. 그럼 서경이, 넌 할 수 있어?”
“미쳤냐! 거품 물고 쓰러질 일 있어? 솔직히 쟤네 얼굴 봐. 완전 빨개가지고, 힘들어죽겠다고 하잖아. 우리학교 축구부가 아무리 최강이라지만, 저렇게 힘든 훈련까지 하면서 상 받고 싶은 마음 없다.”
서경이 가방에서 슬리퍼를 꺼내며 정색을 했다.
“웃고 있는데.”
침을 튀기며 축구부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서경과 보배가 동시에 세영을 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묻고 있었다.
“누가?”
세영은 무심코 태양이라고 말하려는 입을 다물었다. 이러면 윤태양과 엄청 친한 사이 같았다. 세영은 몇 번 눈을 깜빡이고, 침을 꼴깍 삼키고 손가락을 펼쳤다.
“...저..기... 저쪽에.”
“누구?”
저기라고 하면 알아들을 이가 아무도 없었다. 서경이 답답한지 고개를 쭉 빼고 살펴보다 세영을 채근했다.
“저기 중간에 키 크고 머리는 좀 짧고...”
“아! 윤태양!”
뭐라 더 설명하기도 전에 보배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세영은 뻑뻑한 목을 간신히 끄덕였다. 윤태양이라는 이름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윤태양 석 자일 뿐인데. 마음속으로 생각하던 것과 직접 듣는 것은 너무 달랐다. 흑백텔레비전에서 보이는 회색빛 무지개가 일곱 빛깔 총천연색으로 갈아입고 팡팡 뛰어다녔다.
“쟤는 열외!”
“암! 윤태양은 좋아 죽어서 하는 거잖아.”
“차원이 틀리지! 바람돌이 한기현이 나 죽겠소 할 때도, 윤태양은 펄펄 날아다니잖아. 대단한 거야. 엄청!”
투덕거리던 보배와 서경이 언제 그랬냐는 듯 죽이 맞아 쉼표 없이 말을 주고받았다. 세영은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멀리 운동장을 보았다. 태양은 땀방울이 송송 맺힌 이마 아래로 씨익 웃고 있었다. 지면을 박차고 오르는 다리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저게 좋아 죽어서 하는 거구나. 태양이가 말한 것처럼 못 견디게 좋아서 하는 거야.’
격하게 뛰고 있는데도 미소가 빛났다.
‘못 견디게 좋아서 하는 건 어떤 느낌일까? 저렇게 빛이 나도록 뛸 수 있게 만드는 그게 뭘까?’
세영은 망연자실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 손에 들어있는 흰 우유는 세영의 멀뚱한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차가운 액체를 한 그득 들이켜고 싶어 내려온 자판기 앞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500원이 빨갛게 떠 있는 그 버튼을 누르고 만 거다. 초등학생 시절 급식으로 신청했다가 한번 먹고 줄기차게 화장실을 들락거리게 만들었던 그 흰 우유를.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자마자 아차 했지만 이미 따닥 소리를 내며 흰 우유가 투명한 창 너머 “나를 먹어주세요.”하고 쳐다보고 있었다. 어이없지만 이유를 알고 있었다. 세영의 머리에서 마음에서 뜨고 지고를 반복하는 윤태양. 자판기에 동그란 오백 원을 넣고, 쓰윽 음료수를 훑을 때, 그래. 딱 그 순간에.
-일종의 의무식품.
태양의 그윽한 목소리가 날아왔고, 정확히 아주 정확히 흰 우유의 아래에 볼록 솟아난 버튼만 몇 십 배로 확대 되서 보였다.
‘이세영, 미쳤구나. 돌았구나.’
머리를 한 대 꽁 쥐어박고, 아직도 한 손을 가득 메우고 있는 시원한 흰 우유를 들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흰 우유 못 먹잖아.”
방금 귓가에서 맴돌던 그윽한 목소리였다. 세영은 정말 미쳤구나 생각하는데, 묘한 땀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황급히 몸을 돌리니 물을 뒤집어썼는지 머리칼 끝에 물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태양의 얼굴이 있었다. 볼에는 약간 붉은 빛이 피어있었고, 생수가 들어가는 목울대에는 핏줄이 솟아 있었다. 하얀색 반팔 상의의 소매가 하얀 어깨가 보일만큼 말려 올라가 있었고, 훈련할 때마다 종아리까지 올라가 있는 양말이 돌돌 굴러 내려와 축구화 위에 걸쳐있었다. 그리고 눈 꼬리가 살짝 휘고 입가에 살짝 주름이 질 정도로 씨익 웃고 있었다. 항상 세영의 머리에 마음에 머물러있는 그 미소였다. 세영과 눈이 마주치자 하얀 이가 드러났다. 느껴졌다. 흰 우유를 들고 있는 왼손에 전류가 찌르륵 흘러 팔목을, 어깨를 타고 심장으로 가 거칠게 심장을 몰아치는 것이. 습기가 가득 찬 여름인데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목이 너무 탔다.
“..그..럼 너 먹어.”
목이 너무 탔나보다. 목소리가 갈아졌다. 심장이 몰아치다 못해 뇌의 신경까지 미쳐 날뛰나 보다. 왼손이 저절로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런데 어이없게 왼손이 떨리고 있다. 절대 200ML 흰 우유의 무게 때문이 아니었다. 미쳐버린 심장과 대뇌의 요동 때문이었다. 세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공간이동 시켜주세요!’
이거 정말 이세영의 생각이야?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이세영이 맞는 거야? 하는 오리지널 이세영의 생각은 아주 잠깐이었다. 세영은 할 수 있다면, 누가 해준다면 신기루처럼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공간이동 대신 촉촉함이 세영의 이마를 스쳤다.
“이제 아주 예의바른 어린이가 되었네.”
찰싹 붙어있는 눈꺼풀이 슬몃슬몃 올라갔다. 서서히 태양의 환한 웃음이 보였고, 바로 눈동자 위로 움직이는 긴 손가락이 보였다. 세영이 하지 못한 공간이동은 흰 우유가 했다. 시원했던 그것은 태양의 손에 이동되어 있었고, 태양의 촉촉한 손가락이 대신 세영의 이마 위에서 슥슥 움직였다. 물기에 젖은 상큼한 손가락이 단정한 세영의 앞머리를 연신 헤집었다. 마치 강아지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것 마냥, 그렇게 세영의 머리칼을 헝클였다. 살짝살짝 세영의 동그란 이마를 스치기도 했다. 태양의 손끝이 스친 부분에서 열기가 번져나갔다.
“정말 덥지? 얼굴이 빨갛다.”
찌릿찌릿, 태양의 손길이 지나간 이마에서 시작된 전류가 갑자기 오한이 나는 거처럼 팔에, 다리에 경련을 일으켰다. 하지만 태양이 손길이 떠나자마자 자율신경을 거스르고 날뛰던 경련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진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왜? 세영은 눈을 크게 떴다. 얇은 입술이 입 안으로 말려 다물어졌다. 뭔지 모르지만 정말 공간이동이 필요한 순간이다. 아니, 절실하다.
“으응...그럼 이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교실 1분단 맨 뒤의 책상이었다. 정말 공간이동을 한 게 아닐까 싶은 정도로 순식간이었다. 세영은 자판기 앞에서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입술을 꾹 물고 있었다. 그리고 회로가 타버렸는지 머릿속에서 번쩍번쩍하는 빛이 산발적으로 터지고 있었다.
“세영아, 이 문제 말이야. 여기서 It이...야! 이세영!”
세영을 부르는 보배의 목소리는 세영을 둘러싼 막에 막혔다. 보배가 양 손을 펼쳐 세영의 눈앞에서 위아래로 흔들었지만, 세영의 눈동자는 아무것도 응시하지 않고 있었다. 세영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오직 헝클어진 앞머리 아래에, 빨갛게 익어있는 이마에 닿았던 촉촉함. 태양의 긴 손가락을 느끼고 있었다.
주말 내내 침대에 누워있었다. 온 몸이 으슬으슬하고 무언가 스치기만 해도 살갗이 쓰라렸고, 며칠째 음식도 제대로 넘기도 못했다. 급기야 금요일에 보충수업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쓰러졌다. 외출에 돌아온 엄마가 놀라 자빠지는 사태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굉장히 놀랐고, 덕분에 그 놈의 미국으로 시작되어 방학 내내 괴롭혔던 잔소리는 사라졌다. 말복을 끼고 마지막 더운 기운을 뿜어대던 그 주말에 세영은 두꺼운 이불 아래 누워 끙끙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집까지 친히 찾아와 주신 아빠 친구 분당의 김박사님은 물으셨다.
“열이 심한데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이건 꽤 되었어요. 윤태양이 내 머리칼을 헤집은 때부터.’
“글쎄요. 날씨가 더워서. 통 열이 안 나는 얘 인데......”
엄마는 이 정도로 열이 날 때까지 모르셨습니까? 라고 묻고 있는 김박사님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나는 그저 엄마의 얼굴을 힘겹게 보며 생각했다.
‘아니야, 엄마, 이건 3주도 더 된 열이라고.’
태양의 손가락이 스친 그 때부터 시작된 온도상승은 조금씩, 조금씩 세영의 몸을 갉아먹더니, 금요일에는 용량 과부하가 되어 세영을 망가뜨렸다. 김박사님은 냉방병에 의한 독감이라는 아주 평범한 진단을 내렸다. 세영은 감긴 눈 안에서 그게 아니고, 윤태양 때문이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너 괜찮아?”
주체 없이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에 세영의 입에서는 여름날의 기온보다 높은 호흡이 쉬지 않고 흩어졌다. 오늘 아침에는 죽도 다 먹고 여섯 개의 알약이 들어있는 쓴 약도 다 삼켰다. 토요일보다 그리고 일요일보다 한결 가벼운 몸짓에 학교에 왔는데 교실 안에서 가동되는 에어컨의 강풍은 회복되는 세영의 몸을 다시 금요일로 돌려놓고 있었다.
“세영아, 양호실에 가 있을래?”
흐느적거리며 교실에 들어설 때부터 국어, 영어 두 과목의 시간이 지나갈 동안 세영은 몽롱한 시선으로 선생님을 주목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보배가 세영을 일으켜 양호실로 인도했지만 세영은 기어이 3교시 수학까지 듣고 책상에 푹 고개를 뉘였다.
“이세영, 너 진짜 안 되겠어. 조퇴해.”
뒤에 앉아있던 서경이 걸상에 걸쳐있는 세영의 가방을 들었다. 세영도 아주 무거운 머리를 들어올렸다. 아아, 더는 못 참겠다. 이 차가운 공기를 더 쐬다가는 여기서 응급실로 실려 갈 수도 있는 상황이 발생할 지도 모른다.
“그러게. 정말 가야겠다.”
세영은 서경이 건네 준 자신의 가방을 슬로우 모션으로 어깨에 걸치고, 무거운 머리를 흔들어 인사를 했다. 서경과 보배의 걱정스러운 시선은 세영이 교실을 벗어날 때까지 따라왔다. 차가운 교실을 나오니 후덥지근한 기운이 덮쳤다. 극과 극인 온도 차가 세영의 몸을 더 움츠려들게 했다. 그래도 살이 에일 정도로 추운 교실 안보다는 나았다. 교무실에 들려 담임에게 조퇴를 허락받고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보충수업이 끝나는 이번 주 금요일 모의고사까지는 몸이 원상태로 되어야 할 텐데 걱정이다. 운동화를 신는데 왁자지껄한 소리가 서쪽 현관을 휩쓸고 지나갔다. 4교시가 이미 시작된 시간에 지나간 무리라면 축구부였다. 축구부는 더운 날씨 때문에 아침 일찍 훈련을 시작하고, 학생들 점심시간 전에 점심을 먹고 다시 해가 꺾인 3시부터 훈련을 재개하는 일과를 반복했다. 세영은 운동화를 다 신고도, 시끄러운 소리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현관을 나섰다. 보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볼 수 없었다. 태양이 만든 이마의 열의 흔적은 교실 창문 밖으로 녀석을 보는 것만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태양은 축구부 훈련으로, 세영은 빡빡한 보충수업으로 우연한 마주침 같은 건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양은 야릇하고 지독한 열병을 선사하면서 세영에게 또렷한 각인을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각인이 이상한 느낌에 흔들렸다.
“왜 벌써가?”
바로 교문을 통과하기 직전이었다. 근 한 달을 제대로 마주보고 이야기 한 적이 없건만, 태양은 방금 전까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한 사람처럼 아주 친근한 대화의 서두를 열었다.
“......그냥.”
몸이 반절은 뚝 떨어간 것처럼 아픈 이 와중에도 심장은 폭주했고, 교실을 나서면서 조금 떨어진 온도는 얼굴을 중심으로 치솟고 있었다. 태양을 향해 몸을 돌리기도 전에 태양이 세영의 앞에 다가왔다. 3층 위에서 바라보았던 레고만큼 작은 크기가 아니라 세영이 올려다봐야할 정도의 건장한 키의 태양이었다. 뽀얀 피부가 여름 햇볕에 그을려 있었다. 여름방학 동안 태양은 적절한 햇빛과 물과 거름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 건강한 나무가 되었는데, 세영은 비실비실 비틀어진 나무가 되어있었다.
‘이거 너무 불공평한 거 아냐? 누가 남긴 열흔 때문에 죽다 살아났는데, 원인 제공자는 너무 눈부시잖아.’
하지만 세영은 억울함을 토로할만한 힘도 없었다.
“어디 아파?”
열병의 원흉의 도구가, 감질나게 스쳤던 그 손가락이 이마에 닿았다.
“열 있다.”
태양의 손은 결코 차갑지 않았지만, 세영의 이마가 너무 뜨거워 반대로 얼음처럼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깨알 같은이 작은 동그라미의 열흔이 이분법 번식을 시작했다. 인간의 정상적인 체온은 36.5도. 하지만 장담하건데 지금 세영의 온도는 측정불가였다.
“...괜찮아.”
목소리조차 뜨겁다. 태양의 건강한 미소는 찡그려진 미간 아래에 묻혔다. 괜찮다는 말에도 태양의 손길은 세영의 이마에 얹혀 있었다. 태양의 심각한 얼굴이 왜 다정하게 보이는 걸까? 항상 웃음을 머금고 있는 눈가에 담겨있는 건 나를 향한 걱정스러움인 걸까?
‘어떡해! 너무 다정스러워.’
세영은 마른 침을 조심히 삼켰다.
“정말 괜찮아. 지금 조퇴하니까.”
조퇴라는 말에 태양의 미간이 더욱 모아졌다. 그리고 이마는 가벼워졌다. 여름의 습한 공기가 겨울의 찬바람으로 느껴질 정도로 이마는 불타고 있었다.
“약은? 아니, 밥은? 자는 게...아니 밥 먹고 약 먹고 푹 자.”
태양이 횡설수설하는 건 처음 본다. 짧은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 고개를 왼쪽 오른쪽으로 돌렸다, 큰 한숨을 내뱉기도 했다. 그 모든 행동이 세영의 눈에는 윤태양이 이세영을 많이 걱정하고 있구나로 보였다. 가뜩이나 몸이 뜨거운데 가슴 저 구석에서 또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다. 전혀 아프지 않은, 뜨거워서 너무 좋아라고 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픈데, 정말 딱 죽을 지도 몰라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팠는데 태양의 횡설수설을 보고 있노라니 아픔이 기쁨이 되었다. 그리고 윤태양이 너무나 다정스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당황스럽게도 실제로 알알이 눈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어, 그럼 이만. 안녕.”
세영은 걸음을 떼었다. 태양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내일은 올 수 있을까?”
교문을 넘어선 세영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친선 시합 있거든.”
태양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내가 보길 바라는 걸까? 세영은 태양의 속뜻을 알고 싶어 고개를 올려 태양을 보았지만 찡그린 표정 그대로였다.
“여하튼 푹 자. 알았지?”
유치원생에게 몇 번이고 알림장을 확인하는 선생님처럼 몇 번씩 말하는 태양을 뒤로 하고, 세영은 지나가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세영이 떠날 때까지 태양은 교문 앞에서 멀어지는 택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와. 대신 밥 퍼 놨어.”
기현이 식당을 들어서는 태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배식에서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서른 명의 부원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땀 냄새를 폴폴 풍기고 있었다. 태양은 기현이 앞의 빈자리에 앉았다.
“감독님이 뭐라 셔?”
“뭐, 그냥. 내일 시합에 관한 거지.”
9월 추계 고교연맹전을 노리고 있는 감독님이 친히 주선한 연습 시합이었다. H고와 쌍벽을 이루는 J고와. 6월에 있었던 고교축구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에 그친 J고는 감독님이 제안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수락했다. 공공연하게 추계 연맹전에서는 H고를 묵사발 만들겠다고 떠드는 J고 감독 때문에 태양의 팀을 이끌고 있는 이진수 감독도 열이 뻗혀있을 대로 뻗혀있었다. 그래서 친선이건만 이 감독님은 비장의 작전이니 필살의 슛이니 하며 태양을 닦달했다.
“밥 맛 없다.”
“왜? 감독님이 이번엔 뭐 왕년의 펠레같은 현란한 개인기라도 좀 보이라든?”
기현이 불고기를 입 안에 물고 우적우적 씹으며 농을 지껄였다. 성웅이와 지석이가 옆에서 낄낄거렸다. 태양은 한숨을 내쉬고 집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왜 그래? 밥 안 먹고 이따 훈련 어떻게 하려고?”
기현은 그냥 지나치는 말이 아닌 것을 알았는지 마침 1학년이 떠 온 물잔을 들고 태양에게 주목했다.
“얘가 정말 더위를 먹었나. 훈련 내내 미친 듯이 실실 쪼개고 다니더니 오늘은 아주 우울모드시네. 너 뭐 조울증 이런 거 있냐?”
기현이 목을 쭉 빼 실눈을 떠서 태양을 관찰했다. 아무리 좋아서 하는 축구라지만 십 년 만에 찾아온 대단한 무더위에도 아주 즐거운 얼굴로 뜀박질을 할 때부터 이상해 보였다. 뻘뻘 땀을 흘리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근데 왜 저런담? 너 어제까지 두 번이나 배식 받을 정도로 먹어댔거든!
“이상한 거 끌어다 붙이지마. 그냥 밥 맛 없어.”
지금 세영이가 열이 펄펄 끓어서 조퇴까지 했는데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냐! 얼마나 아프면, 공부, 공부 하던 얘가 조퇴까지 할까. 안 본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가뜩이나 마른 얘가. 한여름에 무슨 감기야... 어쩌자고 누가 세영이한테 감기 바이러스는 뿌린 거야. 뜨거웠던 세영의 이마의 열기가 상기되었다. 태양은 식판을 앞으로 밀었다.
“이 놈이 진짜인가 보네. 자식 상사병이냐? 기분이 업되었다, 다운되었다. 아주 골고루 한다.”
기현은 더 이상 토 달만한 말이 없는지 반쯤 남은 밥을 떴다. 하지만 태양은 놀란 기색을 감추려 살짝 고개를 돌렸다. 한기현, 저 놈은 계룡산에 올라가야 될 놈이다. 그나저나 상사병? 이런 게 상사병인가? 세영이 미소만 생각하면 오후 2시 불볕더위에도 공만 뻥뻥 차지는데, 반쪽 얼굴을 보고 나니 밥맛이 뚝 떨어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영이의 배시시한 미소가 떠올랐고, 공을 찰 때마다 골대 안에서 깊은 눈동자가 반겼다. 그리고 열대야에 간신히 잠이 든 어느 날, 환영처럼 꿈에 세영이 나타났다. 그리고 일어나서 느꼈던 축축함. 혈기왕성한 남자가 거치는 통과의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게 참 태양을 안달복달하게 만들었다. 그 상대가 세영이라는 것. 대단한 자존심에 초롱초롱한 눈망울 뒤로 연약함이 녹아있는 이세영. 축축함에 잠에서 깬 그 날 이후, 세영이 못 견디게 보고 싶어도 꾹꾹 참고 있는 중이었다. 말간 눈동자가 그 밤의 일을 간파할까봐 두려웠다. 거기다 강도 높은 훈련으로 교실 안에 발걸음하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이래저래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는, 그리워서 생기는 병이 상사병이라면 윤태양은 지금 상사병이었다. 다시금 세영의 이마에 머물렀던 손바닥에서 울긋불긋 열기가 솟아오르자 마음이 심란해졌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하얀 쌀밥을 국에 넣고 다른 반찬으로 수저를 옮겼다.
“어? 그거 진짜 버리게? 그럼 나 줘. 이게 날이면 날마다 나오는 불고기가 아니다.”
옆에 앉아 깨끗이 식판을 비우던 성웅이 잽싸게 태양의 불고기를 낚아챘다. 태양은 슥 식판 째 옆으로 밀어주었다. 그 앞에서 기현은 기묘한 시선으로 태양을 보고 있었고, 태양은 세영의 걱정에 더운 한숨으로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