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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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분, 아니 십 분이면 다 끝난다고? 한기현, 이 자식! 태양은 잡은 공을 바닥에 튀기며 이를 갈았다. 눈은 왼쪽, 오른쪽을 더듬고 있었다. 어느 쪽이 더 쉬울까? 왼쪽의 놈은 퉁퉁한 체격 때문에 뒤의 여학생을 맞추기 힘들었다. 오른쪽 놈은 의외로 태양의 강력한 공을 한 손에 받아냈다. 벌써 몇 번째, 저 두 놈 때문에 경기는 지연되고 있었다. 태양은 두 녀석을 면밀히 살피다 재빠르게 경기장 안에 있는 기현에게 던졌다. 기현이는 받자마자 강속구로 퉁퉁한 체격의 뒤에 있던 여학생에게 던졌지만, 간발의 차이로 여학생이 피했다. 다행히 공은 기수 녀석이 낚아챈 터였다. 태양은 무심코 손목을 들었다. 평소에 차고 다니던 은색 손목시계는 당연히 없었다. 운동을 할 때는 시계는 빼두는 터라, 오늘은 아예 차고 오지 않은 터였다.


“혹시 시계 있니?”


옆의 부동의 자세로 서 있던 1학년 여자애의 손목에 핑크 시계가 보였다. 여자애는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수줍게 12시 되기 5분 전임을 알려줬다. 등 뒤로 여자축구 경기장에서의 함성이 덮쳤다. 빨리 이 경기를 끝내고 싶었다. 지든 이기든 상관없었다. 그저 빨리 끝나기를. 태양의 마음은 피구경기가 아닌 축구경기장에 쏠려 있었다.


“윤태양!”


소리와 동시에 공이 태양의 가슴이 정확히 날아왔다. 그래. 지금까지 버텼으면 잘 한 거다. 난 지금 아주 급하거든! 태양의 어깨에 지금까지의 것 중에서 가장 센 힘이 들어갔고, 퍽 소리가 났다.


“삑- 거기 나가요!”


또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녀석이 무서운 공의 속도에 반사적으로 머리를 숙였고, 뒤의 여학생의 어깨에 공이 맞았다. 여자애는 충격이 컸는지 표정이 일그러져있었다. 하지만 태양은 그 애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보여줄 매너가 없었다. 그는 지금 거의 폭주의 상태였으니까. 기현이 씩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지만, 태양은 기현을 향해 매서운 눈길을 보냈다.


“여자축구 준결승전에서 2,10반이 이겼습니다. 십분 휴식 후, 1,8반과 2,10반은 결승전을 치르겠습니다.”


운동장에 울리는 마이크 소리에 태양의 표정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십분. 십분 만에 저 녀석을 눕히고야 말겠어. 태양은 하늘 꼭대기에 걸린 해만큼이나 이글이글 타올랐다.



“삑. 경기 종료입니다. 1, 8반이 이겼습니다.”


태양, 기현 그리고 기수가 계속 공을 빠르게 패스하다 기수 쪽으로 등을 향하고 있던 여학생이 맞았다. 상대편은 전멸이었다. 태양은 경기종료를 알리는 호각소리가 나자마자 경기장을 벗어나려는데 기현이 녀석이 팔을 낚아챘다.


“야, 너 어디가?”


“왜? 끝났잖아. 네 소원대로 이겼잖아.”


방해하는 기현이의 팔이 너무나 거치적거렸다.


“잉? 뭔 소리? 한 판 더 남았어! 결승전은 5판 3승제거든.”


“뭐?”


기현이는 놀라 자빠져서 돌아버릴 것 같은 말을 하면서 이미 경기장 안에 들어가 있는 태양의 파트너를 돌아보았다. 야 이놈아. 내가 지금 저 여자애 지킬 군번이 아니라고! 입이 쩍 벌어진 태양의 귀에 엄청난 함성이 몰려왔다. 아, 진짜 미치겠다!



“경기 시작합니다. 양 팀 선수 모여주세요.”


상대편은 방금 경기를 끝낸 사람들 같지 않게 생기가 넘쳤다. 지친 흔적은 더러워진 체육복에서나 볼 수 있었다. 상대편과 마주보고 인사를 하고 자리를 잡았다. 발목이 상당히 무거웠다. 왼쪽 발목은 그렇다 치고 오른쪽 발목까지 축축 늘어졌다. 첫 경기가 끝나고 발목은 눈에 뜨일 정도로 부어있었다. 도저히 파스 가지고는 역부족일 거 같아 찾아간 의료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양호실에 가셨나 하고 기다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담임한테라도 말할까 하다 관뒀다. 괜히 호들갑떨며 경기에 나가지 말라고 할까봐. 귀퉁이가 말린 파스를 펴 잘 붙이고, 운동화 끈을 더 단단히 조였다. 그리고 40분은 더 뛸 수 있겠지. 그래, 뛸 수 있어. 라고 최면을 거는 게 고작이었다.


“우리 팀 응원 수가 좀 적어졌다.”


“아, 짝피구 결승이랑 2인3각 경기하잖아.”


관중을 살피는데 앞에 서 있던 보배와 서경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그래서 없는 건가. 세영은 계속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틈이 생길 때마다 눈길은 관중을 향해있었다. 준결승이 진행되는 동안 운동장 이곳저곳을 봤지만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보인다고, 그 녀석을 발견하다고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아니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눈은 계속 그 녀석을 찾고 있었다. 여자축구를 보러올 줄 알았는데. 코치까지 맡았었으니까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그 녀석이 보이지 않으니까 마음 한 구석이 시렸다. 참으로 이상하게 뜨거운 햇살에 몸은 덥다고 아우성인데 마음이 시렸다.


“1,8반의 공격으로 시작합니다.”


수진이 택한 동전 앞면이 나온 모양이다.


‘이세영. 어디다 정신 파는 거야. 이제 시작이야. 진짜 승리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 왔다고.’세영은 떠오르는 공을 노려보았다.



“삑!”


마지막 공이 살짝 연약한 어깨를 치고 떨어졌다.


“1,8반 우승!”


호각소리 뒤에 우승을 알리는 심판의 말이 있기도 전에 함성이 울려 퍼졌다. 기현이 녀석이 달려오고, 나머지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와 태양의 머리를 툭툭 쳤다. 수고했다는 뜻이리라. 여학생들도 손을 맞잡고 방방 뛰고 있었다. 태양도 환하게 웃었다. 이기는 것. 승리를 갖는 것. 이건 언제나 사람의 기분을 최고조로 만드는 최상의 묘약이었다.


“몇 시야?”


기뻐하는 것도 잠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최고 속도로 올라갔던 기분은 이미 희미해지고 있었다. 세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한 삼십분 됐나? 한참 뛰었더니 배고프다. 12시 30분부터 식당 문 연댔지? 어이들, 밥 먹으러 가자. 축구 뛰는 놈들은 빨리 먹고 1시까지 집합!”


방방 뛰던 기현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소리쳤다. 태양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는 녀석들을 제치고 여자축구경기장으로 달려갔다. 2인 3각 경기와 짝피구가 모두 끝난 덕분에 여자축구경기장 주위로 몇 겹의 사람들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태양은 몰려드는 얘들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삑! 작전타임 끝났습니다. 경기 시작합니다.”


간신히 경기장 가까이 갔을 때, 호각이 울렸고 선수들이 경기장에 들어왔다. 태양의 눈은 바쁘게 돌아갔다. 어디에 있는 거니? 바쁘게 움직이던 눈이 멈췄다. 경기장 중앙에 세영이 있었다. 앞머리는 땀에 젖어 한쪽으로 올라가있고, 찰랑이던 머리칼은 머리끈에서 빠져나와 흩어져있었다. 남색 체육복 어디에나 잔디가 붙어있고. 그리고 가장 염려스러웠던 왼쪽 발목. 서 있어서 어떤지 가늠이 오지 않았지만, 분명 고통스러우리라. 그런데 세영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세영의 뒤로 자신의 존재를 타는 것으로 분출시키고 있는 해처럼 세영의 눈은 빛내며 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뺨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저 눈빛. 아, 저 눈빛이다. 처음 운동장에서 만났던 그 눈빛. 골문 언저리에도 가지 못하는 공을 보면서도 절대 꺾이지 않았던 눈빛. 사실 그 눈빛에 괜한 참견을 했던 거였으리라. 꺼지지 않는 눈빛이 이글이글 타도 절대 잿더미로 바스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눈빛이라면 공을 넣게 해주고 싶었다. 아까 양호실에서의 세영에게는 그런 눈빛은 없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세영을 몰아넣은 건, 아무렇지 않다는 그 눈빛. 분명 세영이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 아닌데 꺼져버린 눈빛이 태양을 자극했고 폭발시켰다. 그런데 지금 저기 서 있는 세영은 처음 만났던 그 눈빛보다 더 타오르고 있다. 활활. 정말 즐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몇 분 남았어?”


“한 5분 정도.”


에서 들린 소리에 태양은 점수판으로 눈을 돌렸다. 0과 0이 나란히 있었다.


“나 지금 손에서 땀나. 여자축구가 이렇게 재미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나도. 이거 우리 팀 경기 아닌데도 미치게 가슴 떨린다.”


옆에 있는 여자애들은 흥분의 도가니인 것 같다. 공은 상대의 진영에서 우리의 진영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패스며 드리블이 썩 괜찮아보였다.


“여자애들이 이렇게 잘 할 줄이야. 그 중에서도 쟤. 쟤가 괴물 이세영이지? 쟤 완전 공 막아주는 거 끝내주는데.”


“짱이다. 골키퍼한테로 공이 안 가잖아. 뭐, 다른 얘들도 움직임이 나쁘지 않아. 아까 예선에서는 이세영 혼자 날아다녔는데. 이번에는 안 그러잖아.”


태양은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뭔가 대단한 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놓친 게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숨이 거칠었다. 쓱 훑어보니 보배도 서경이도 1학년 녀석들의 가슴도 오르락내리락했다. 모두 지쳤으리라. 그건 상대편도 마찬가지였다. 결승이라는 타이틀이 붙어서인지 경기는 초반부터 거칠었다. 이게 정말 여자축구야? 라고 할 정도로 몸싸움과 공 다툼이 남자축구 저리가라였다. 넘어지고 구르고도 몇 번이었다. 이건 어느 한 팀이 쓰러지지 않는 한 승리는 가져갈 수 없어! 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마치 실제 전쟁처럼. 누군가가 지핀 성냥 하나에 불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고, 경기장을 넘어 관객 아니 학교 전체가 그 불구덩이에 말려들어있었다. 세영은 거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미 지쳐버린 얘들을 데리고 공을 넣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이대로 끝나기를 기다려 승부차기로 몰고가야했다. 세영은 뺨에 얽혀있는 머리칼을 떼어내고, 상대편의 발을 떠나 공중에 뜬 공을 향해 머리를 치켜들었다.


“저 공 잡아!”


누가 소리쳤을까? 보배? 서경이? 아니면 내가? 우리는 달려가고 있었다. 상대편도 성난 황소처럼 돌진해 오고 있었다. 공은 상대와 우리의 사이에 떨어졌다. 중앙을 넘어서 세영 팀의 진영으로 반이나 넘게 들어온 곳이었다. 순간, 서로의 탐색이 이뤄졌다. 누가 채갈 것인가? 순간의 눈빛이 교차와 함께 서로는 움직였고, 공을 낚아챈 건 세영의 팀이 아닌 상대였다. 바람이 불었다. 넘실넘실. 저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을 타고 녀석들의 몸짓이 점점 커졌다.


“일팔, 막아!”


“저거 막아!”


“아! 어떡해! 막아! 막아!”


뒤에서 옆에서 동시에 들어왔고, 세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어디로 올 것인가! 세영의 초인적인 집중력은 오직 공에만 향했다. 공을 차 오던 녀석이 오른쪽으로 굴렸고, 오른쪽 옆에 있는 녀석이 잡았다. 그리고 직감했다. 온다. 공이 온다. 옆을 봤다. 1학년 녀석이 서 있었다. 공과 가장 가까운 녀석이었다. 막아! 막아! 세영의 절규를 듣지 못했던 걸까? 공은 빠르게 그 녀석을 스쳐지나갔고, 골대를 향하고 있었다. 세영은 달렸다. 이렇게 죽을힘을 다해 달려본 게 언제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달렸다. 공이 닿을 듯 말 듯. 조그만 더. 조그만 더. 한 발만 더. 어깨에 닿을 만큼만.


“앗!”


누구의 비명이었나.


“착!”


“삑!”


“와와와!”


비명은 잠깐이었다. 함성에 묻혔으니까. 세영은 잔디에 주저앉아있었다. 공은 골대 안에 도도하게 박혀있었다. 주위의 함성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알싸한 통증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공이 들어갔다는 사실만 느껴졌다.


“삑!”


“경기종료. 2반, 10반 승리!”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제대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주위가 어두워졌다. 몇 개의 팔이 자신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세영아, 괜찮아?”


“걸을 수 있겠니?”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수고했어. 진짜 너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야.”


“그나저나 발목은 정말 괜찮은 거야? 미안해. 내가 아침에 그러지만 않았어도.”


‘지금 뭐라고 하는 거니? 이렇게들 있지 말고 뛰란 말이야! 나는 패배자 따위 되고 싶지 않아. 될 수 없어. 평생!’


세영의 눈은 초점 없이 흐릿했다.


“안되겠다. 일단 양호실로 옮겨야겠다. 얘들아, 세영이 좀 업혀라.”


몸이 떠올라 누군가의 등에 안착했다. 아, 선생님이구나. 근데 왜? 나 괜찮아요. 나 뛸 수 있어요. 뛰어야 해요. 뛸 수 있다고요. 세영은 그렇게 말하려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이 멨나 보다. 물을 많이 마실 걸. 뒤에서 따라오는 얘들이 보였다. 얘네가 지금 뭐하는 거야?


“이 녀석아, 아프면 진즉 말하지. 여하튼 정말 수고했다. 이 다리 끌고 그만큼 달려준 거. 정말 고맙다. 사실 이기고 지고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안 그러냐?”


선생님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졌다. 진 거다. 이세영이 졌다. 졌다. 졌다. 또 졌어. 세영 일행을 제치고 애들이 우르르 달려갔다. 우르르 달려가는 애들 사이로 푸른 잔디가 펼쳐져 있었고, 그 위로 파란 하늘이. 그리고 그 위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세영은 그저 그렇게 멍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1시 30분부터 남자축구 준결승 시작합니다. 1,8반 선수와 5,11반 선수는 1시 20분까지 본부석 앞에 모여주세요. 오후부터는 응원전 평가가 시작되니, 각 팀은 자리를 이탈하는 하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방송 소리에 식당 안에 있는 얘들이 분주해졌다. 여자축구가 생각보다 오래 끈 탓에 1시 즈음에서야 다들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오백 명은 거뜬히 소화하는 식당이지만, 떼를 지워 우르르 몰려온 탓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태양은 밥이며 반찬을 마구 휘젓던 젓가락을 기어이 팽개쳤다.


“야! 안 먹어? 너 그러다 쓰러진다. 두 탕은 뛰어야 할 텐데.”


기현이 일어서려는 태양의 팔을 붙잡고 끌어 앉혔다.


“왜 그래? 윤태양, 너도 긴장하냐? 크크.”


마주보고 앉아있는 반장이 음흉스럽게 웃었다. 태양은 자연스럽게 찡그러지는 표정을 막을 수 없었다. 지금 태양에게 그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진짜 왜 그래? 빨리 먹어라. 반찬 투정하는 것도 아니고. 으갸갸! 십분이야. 빨리 먹고 일어나. 아씨. 밥 먹고 뛰면 배 열라 아프겠다.”


기현이가 남아있는 밥을 죄다 쓸어 넣고 경망스럽게 씹었다. 태양은 기현이 놈을 쳐다보다 남아있는 밥과 반찬을 국그릇에 쓸어 넣고 일어났다. 기현이의 짜증스런 눈이 보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 그의 짜증과 비교해 누구 것이 더 클까? 태양은 처연히 앉아있던 세영이 눈에 밟혔다. 분명 발목 때문이었다. 마지막 공을 막으려 뛰던 세영의 모습을 처절했다. 세영이 쓰러졌을 때, 하마터면 뛰어갈 뻔했다. 경기가 진행되고 있는 필드에. 곧이어 호루라기가 불렸고, 경기는 끝났다. 마지막 골로 우리 팀은 졌다. 태양은 사람들을 제치고 달려가고 있었지만, 세영은 이미 구기중에게 업혀 옮겨지고 있었다. 양호실로 들어가는 일행을 따라갔지만, 세영을 눕히고 나오는 구기중에서 잡히고, 뒤쫓아 온 기현에게 잡혔다. 좀 있다 시합 나갈 녀석이 뭐하냐며 빨리 밥 먹어야지. 하고 잡아끄는 선생님과 기현이 때문에 식당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우유라도 뽑아줘?”


태양을 따라 얘들이 줄줄이 일어나 따라왔다. 멀쩡한 음식을 잔반통에 버리는 태양과는 달리 기현이는 깨끗이 비워진 식판을 개수대로 밀어 넣었다. 태양은 그저 쓰게 웃고 어깨를 살짝 올렸다. 별로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것보다 경기에 나가기 전에 세영이를 봐야했다. 태양의 발걸음은 운동장이 아닌 2층 계단을 향하고 있었다.


“어어어, 어디가? 야, 임마! 시간 다 되었어! 어라라?”


기현의 말을 싹 무시하고, 두 계단씩 껑충껑충 뛰어올랐다. 2층 복도 끝에 양호실이 보였다. 태양은 한 걸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젖혔다. 하얀 가운을 입은 양호선생님이 그를 보고 있었다.


“어머, 무슨 일이니? 참, 아까 내가 너한테 맡겨놓고 병원 갔구나. 수고했어. 경기 못 나간 건 아니지? 부상 환자는 없었니?”


잠깐 놀래더니, 이내 태양의 얼굴을 확인하고 질문이 이어졌다. 태양은 주위를 살폈다. 침대 앞에 커튼이 젖혀져 있었다. 그 옆의 침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저 휑한 침대만 보였다.


“여기 있던 여자애는요?”


“누구? 아아아. 아침에 왔었던 얘? 구기중 선생이 하도 성화셔서 전화 받고 달려왔는데, 없어서 나도 궁금해 하던 참인데....... 어디 갔나?”


양호선생님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태양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양호실은 왜? 너 어디 아프냐? 소화 안 돼? 그래서 밥 못 먹은 거야?”


뒤따라 온 기현이가 태양의 어깨를 툭 쳤다. 태양은 막막했다. 그 녀석을 찾아야 하는데. 도대체 어딜 간 거지?


“1,8반과 5,11반 남자축구선수는 빨리 본부석 앞에 모여주세요.”


저 스피커가 이렇게 짜증스러운 존재일 줄이야. 태양의 입에는 가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런 거 뛰면 다 없어진다. 빨리 와.”


이번에는 정말 기현이의 말을 들어야 했다. 태양은 한껏 찌푸린 얼굴을 하고 운동장에 나갔다. 이세영. 너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세영은 화장실 변기통 뚜껑을 내리고 앉아있었다. 까슬까슬한 얼굴을 한 번 쓸었다. 정면으로 연두색 화장실 문이 들어왔다. 고개를 내리니, 차가운 시멘트 바닥이다. 그리로 그 아래로 구겨 신은 운동화가 있고, 그 위로 너덜너덜해진 파스가 붙은 발목이 보였다. 힘을 주니 상당한 통증이 느껴졌다. 화장실까지는 어찌어찌해서 왔는데. 주저앉아버리니 다시 돌아갈 힘이 날아가 버렸다. 엉덩이가 차가웠다. 땀이 식어버려 더 추위가 느껴졌다. 머리를 차가운 칸막이에 비스듬히 뉘였다. 역시나 차가웠다. 차가움 때문인지 발목의 통증이 덜한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아, 내가 거기서 넘어졌지. 그리고 구기중이 날 업었어. 아침에 누워있었던 그 침대에 누워있었고. 구기중이 휴대폰을 들고 뭐라고 소리쳤던 거 같은데. 그리고 양호선생님이 곧 오실 거라고 그랬어. 녀석들은 안쓰럽게 나를 쳐다봤어. 저 밖에서 나를 욕하던 녀석들의 눈이 정말 진심 같았어. 그리고 점심을 가져오겠다며 나가고. 나는 화장실에 가고 싶었고. 엉덩이가 시린데. 그런데. 그런데 졌구나. 그렇구나.



“물 좀 줘.”


태양은 건네받은 물병을 머리에 그대로 쏟았다. 차가운 물줄기가 갈래갈래 퍼져 태양의 얼굴을 타고 흘렀다. 기현이 목에 걸려있던 타월을 냅다 던졌다.


“야, 감기 걸려. 아무리 오뉴월이라지만. 조심해라. 너 뭔 일 있냐? 오늘 하루 종일 이상해. 경기도 맥없이. 그게 뭐야? 아무리 체육제지만, 축구선수가 그렇게 달리면 쓰나. 어쨌든 이겨서 다행이지만. 결승 때도 그러면 알아서 해라.”


태양은 젖은 머리를 털었다. 좀 시원해졌다.


“결승은 언제야?”


“여자 발야구 결승 끝나고. 아무리 그래도 4시 30분에는 시작하겠지. 릴레이도 있고.”


기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털고 있던 타월을 기현의 머리에 푹 던지고 태양은 달렸다. 먼저 양호실. 문이 잠겨있었다. 오는 도중, 양호선생님이 본부석에 있는 걸 본 터였다. 그럼 어디지? 교실인가? 3층 교실로 뛰었다. 학교는 조용했다. 8반 교실의 문은 잠겨있었다. 창 너머의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어디지? 어디에 있을까? 매점. 식당. 학교 오두막.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데도 없었다. 발목이 심해져서 집에 간 걸까? 어떻게 갔을까? 그 다리를 가지고. 태양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세영을 뒤로 하고 태양의 힘없는 발걸음은 운동장으로 향했다. 집에라도 잘 들어갔으면 다행일 텐데 라고 생각하며.



“앗!”


세영은 엄청나게 큰 환호에 놀라 깼다. 얼마나 잤는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푹 잤다. 문을 열고 나가니, 양호실 창문 너머로 여러 가지 응원가가 뒤섞여 스테레오로 들렸다. 한창 체육제가 무르익었나 보다. 자고 일어나니 발목은 더더욱 무거웠다. 부상 이후가 더 여파가 심하다더니 그 말이 맞는 듯 했다.


“세영아? 너 여기 있니?”


양호실 너머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배의 목소리였다.


“......응”


세영이 엉거주춤 일어나 다리를 끌고 나가 양호실 문을 열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보배와 서경이, 수진이가 서 있었다.


“아까 양호실에 없기에 이리저리 찾아다녔어. 담임이 걱정된다고 옆에 있어주라고 하기에......”


보배가 말을 흐리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 다가왔다. 근심어린 얼굴들.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모르겠다. 원만한 사이에서도 어떤 말을 해야 모르겠는데. 이 애들과는 더욱 모르겠다. 서로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배고프지? 너 없어서 급식은 버리고, 먹을 거 좀 사왔는데.......먹을래?”


“응. 여기 빵이랑 음료수랑. 뭐...좋아해? 이거 먹을래?”


서경이 보배의 말을 거들며 봉지 안에 든 빵을 꺼내 들었다. 기본적인 대화였지만 서로 눈치를 봤다. 세영은 친절해진 얘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였다.


“자. 이거 받고 좀 더 쉬어. 뭐 도와줄까?”


어색함을 어떻게든 무마시키고자, 보배가 봉지를 세영의 손에 쥐어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화장실에서 세영을 욕하던 그 얘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정했다. 세영은 어색했다. 한 마음이 돼서 경기에 임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마주하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기는 세영에게는 너무 어색한 일이었다. 하지만 보배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지 못하고, 봉지를 들었다.


“괜찮아. 난 그냥 교실에 가 있을게.”


양호선생님이 푹 쉬라며 문을 닫고 나가셨지만, 더 이상 누워있어도 밖의 소리에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차라리 교실에 가서 혹시 몰라 가져온 문제집이라도 푸는 게 훨씬 나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럴래? 그럼 내가 교실 열쇠 가져올게. 서경이랑 수진이는 부축해주는 게 좋겠다.”


세영의 말이 끝나자 머뭇거리던 얘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보배는 벌써 휑하니 나갔고, 서경이와 수진이는 어색하게 세영의 팔을 잡았다. 정말 어색하다.


“괜찮아. 그렇게 까지 안 해도.”


서경이와 수진이의 어깨에 걸쳐 있는 팔이 과연 내 팔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계단 하나를 올라가고, 교실에 갈 때까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실 문을 열자마자, 열어두었던 창문을 통해 시끄러운 소리가 한꺼번에 덮쳤다. 소리만으로 얼마나 열기가 뜨거운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세영은 2분단 끝자리에 앉았다. 아침에 교복을 대충 개어 넣어둔 종이가방이 책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경과 수진이, 보배는 세영의 주위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아무리 얼싸안고 뛰었다지만 그 전의 일들이 눈 녹듯이 사라질리 만무했다.


“1,8반의 우승으로 축구경기가 끝났습니다. 시간이 지체된 관계로 십분 동안 응원전 채점을 하고 바로 마지막 종목이 릴레이가 시행되오니 모든 학생들은 각 스탠드에 위치해주세요.”


어색한 공간을 깨뜨릴 구세주였다. 사각이 막힌 교실에서 울리는 스피커 음성은 귀가 울릴 정도로 컸다. 밖의 응원소리도 만만치 않았지만. 세영은 창문을 곁눈질 했다. 창문틀에 걸려 밖은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 팀이 이겼구나.’


“어머, 이겼나봐!”


다들 같은 걸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어정쩡하게 있던 얘들이 대번에 환해졌다.


“나 릴레이 주자인데.......”


보배의 말에 다시 어색함이 감돌았다. 다친 세영이 걸리나 보다. 아침에만 해도 지금 여기서 이 애들이 미안한 눈빛을 보낼 거라는 건 상상도 못했는데. 이래서 인생은 모른다고 하는 건가. 앙 다문 입술이 달싹였다.


“나 괜찮으니까 가봐. 응원하는데 몇 명이나 없으면 안 되잖아.”


생각보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그래도.......”


“괜찮아. 빨리 가봐.”


“그럼 여기 있을 거지? 어차피 한 삼십분이면 다 끝나니까.”


얼떨떨한 웃음을 지으며 서경이 말했다. 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뒷문이 탁 다치자마자 복도를 뛰는 발소리가 들렸다. 볼썽사납게 흩어진 책상과 의자들 사이에 세영만 다시 남았다.


“후우.”


긴 호흡소리가 밖의 소음과 섞여 사라졌다. 5시 45분. 벽면의 시계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세영은 정적이고, 오히려 오랫동안 박혀있는 시계는 동적이었다. 시계를 가만히 보았다. 오늘은 7시에 과외를 하기로 했으니까, 지금 집에 가자. 가서 샤워를 하고 숙제를 하는 거야. 그리고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과외를 하자. 세영이 머리는 파닥파닥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의자에 본드라도 붙어있는 것처럼 엉덩이를 떼기 힘들었다. 생각하는 것을 멈추자 다시 각 반의 응원가가 들쭉날쭉 들려왔다. 아까부터 간질간질한 목 언저리에 손을 대자 뭔가 만져졌다. 얇고 짧은 무언가. 잔디. 털었다고 생각했던 옷 구석구석에 푸른 잔디가 박혀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떠올랐다.


‘축구를 했었지. 그런데 졌다.’


세영은 입 안의 여린 살을 꽉 물었다. 누구가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패배자. 패배자. 패배자. 그 소리에 세영은 도리질을 쳤다.


‘됐어! 필요 없어! 애초에 축구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었어! 그래, 이세영!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한 게 아냐!’


세영은 갑자기 번쩍 정신이 들었다. 의자에 걸려있는 가방을 사납게 낚아챘다. 집에 가자. 오늘 하루 날려버린 시간만큼 공부를 해야 해!



_08



“1,8반 주자 대단한데요. 4등에서 2등까지 따라붙었습니다. 반 바퀴나 차이가 나는 5,11반을 제외하고 모두 마지막 주자만 남았습니다.”


태양은 마지막 라인에 서서 발목을 돌렸다. 저기서 키 큰 여자애 한명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결국 1등까지는 따르지 못하고, 다른 주자가 먼저 출발하고 나서도 몇 초 후에 바통을 넘겨주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오버 페이스를 한 모양이다. 태양은 바통을 넘겨받는 짧은 시간에 고마워. 라고 답했다. 하얗게 질려있는 그 애의 얼굴 위로 흠칫 놀란 표정이 스쳤다. 그 후에 그 애가 쓰러졌는지 주저앉았는지 모르겠다. 태양은 달리고 있었으니까. 휙휙 바람이 태양을 막고 있었다. 강한 저항을 보내며 태양의 길을 막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 태양은 몹시 급했으니까.


-세영이 괜찮니?


릴레이 주자를 앉혀 사람 수를 확인하던 구기중이 태양의 옆에 앉은 여자애에게 묻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네. 교실에 있겠다고 해서 저희는 나왔어요.


집에 간 것이 아니었나 보다. 아무래도 저쪽 일행과 태양이 계속 엇갈린 모양이었다. 세영이 학교에 있다는 것이 확인되자 태양은 다시 성마른 강아지가 되었다. 하루 종일 초조해 한 태양의 마음을 아는지 릴레이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정시간보다 삼십분이나 지체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새 출발 총성이 울렸고, 지금 태양은 달리고 있었다. 약 5m 정도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4,7반 주자의 등이 성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1,8반 마지막 주자 4,7반 주자를 거의 따라잡았습니다!!!”


“일팔! 일팔! 윤태양! 윤태양!”


태양이 한발자국 빠르게 디딜수록 함성도 한 단계씩 높아갔다. 태양은 눈앞에 등을 보고 달릴 이유가 없었다. 기현이가 부러워했던 그의 달리기는 언제나 탁 트인 시야를 보며 달려야했다. 그 누구도 태양의 달리기를 따라갈 수 없었다. 오직 하나. 바람이라면 모를까. 태양은 여유롭게 첫 번째 주자를 따돌리고, 탁 트인 시야를 맞이했다. 발의 움직임, 팔의 움직임이 더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가자. 빨리 가자.


“삑!”


호각이 울렸고, 발밑에 하얀 띠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내 녀석들이 달려와 안았고 주위에서 여자애들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마지막 라인을 잡고 있던 구기중도 달려와 태양의 머리를 툭툭 쳤다. 태양은 달려드는 녀석들을 한 명씩 제치고 인파를 빠져나왔다. 태양이가 없어도 자기들끼리 얼싸안고 난리였다. 다른 반 녀석들도 자기네 팀끼리 안고 뛰고. 모든 경기가 끝났음을 자축하고 있었다. 흥분의 도가니에 줄을 정렬하라는 학년주임의 목소리는 깡그리 묻혀 졌다. 태양은 모든 걸 뒤로 하고 다시 달렸다.



세영은 1분단 맨 끝 책상에 기대 운동장을 바라봤다. 집에 가기 전, 땀내와 잔디가 굴러다니는 체육복을 벗고 교복으로 갈아입던 세영은 함성이 갑자기 커지자, 호기심이 나 창문에 붙어 운동장을 살폈다. 세영의 교실과는 정 반대쪽에 전교생이 다 모여 있는 듯 했다. 릴레이가 끝났나 보다. 내리지 못한 조끼를 내리면서 교실 스피커로 다소 흥분한 학년주임의 목소리를 들었다. 끝났구나. 체육제가 끝이 났구나. 훤하게 열린 창 안에 세영의 조그만 머리와 어깨가 갇혀있었다.


“드르륵.”


미닫이 뒷문이 확 열리면서 문틀에 쾅하고 부딪혔다. 갑자기 들린 소리에 세영은 가슴이 쿵 떨어졌다. 올 사람이 없는데. 밖에는 아직도 흥분의 열기로 가득했다. 뒤를 돌아보았고, 세영의 가슴은 다시 쿵 떨어졌다. 오른손을 문틀에 짚고 허리를 굽히고 헐떡이는 숨을 연거푸 몰아쉬고 있었다. 윤태양이. 왼손에는 하얀색 바통이 들려있었다.


‘마지막 주자였구나.’


세영은 태양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눈동자를 옮겼다. 그리고 마주친 눈. 눈빛이 매서웠다. 화가 난 사람처럼. 양호실에서의 화가 아직도 풀리지 않은 걸까? 분명 경기 내내 이 녀석을 찾고 있었는데 실제로 녀석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태양의 숨은 편안해지고 있었다.


“이겼어.”


‘응?’


허리를 펴고 녀석의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겼어. 내가 네 몫까지 달렸어.”


‘응?’


네가 뭔데 내 몫까지 달려? 라고 말하려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상하다. 시야가 뿌옇다. 녀석의 발걸음은 들리는데,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겼다니까.”


‘나는 졌어. 졌다니까!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니? 네가 말한 패배자가 되었어. 아니, 원래 패배자였는지도 몰라!’


어둡다.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뿌연. 매우 뿌연 무언가가 눈을 멀게 했다. 녀석의 체취가 파고든다.


“바보. 많이 아팠지?”


태양이 바로 앞에 있다. 뿌연 이물질을 제거하려 손을 올려 눈을 비볐다. 뜨겁다.


‘이거 설마?’


태양이 손에 감고 있던 체크무늬 손수건을 푼다.


‘........설마 이거.’


태양이 더 가까이 다가왔고, 구겨진 손수건이 눈가에 닿았다.


‘이거 설마 눈물이었구나.......’


태양을 바라보지 못하고 눈가에 자잘하게 옮겨지고 있는 손수건만 보았다. 갈색 체크무늬가 여러 겹으로 접혀 일그러져 있는 손수건이 비대하게 커보였다.


“아프면 울어도 돼.”


이 말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세영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하지만 새어나오는 뜨거운 무언가는 잠기는 않았다. 한 줄, 두 줄. 한계다. 얼굴을 덮는 눈물. 세영은 소리 나지 않는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 공을 막지 못하고 쓰러졌던 그 순간, 사실 울고 싶었다. 양호실에서 화장실에서 괜찮냐고 물어보는 얘들 앞에서 사실은 울고 싶었다. 진 게 억울해서, 분해서. 왜 그 때 넘어졌나. 왜 그 때 발목이 힘을 내주지 못했나. 그런 것들을 다 눈물을 쏟아내고 싶었다. 정말 많이 울고 싶었다.


“흑...흑...”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숨을 참지 못하는 호흡과 코를 훌쩍이는 소리. 세영은 지금 울고 있었다. 태양은 땀에 젖은 손수건으로 세영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자신보다 한참 작은 여자애의 조그마한 어깨가 떨리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여자애가 우는 걸 실제로 본 건 처음이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숨 넘어 갈 듯 우는 세영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꾸깃꾸깃한 손수건으로 닦아주는 것 밖에는. 고개 숙인 세영의 머리가 태양에게는 너무 작아보였다.


우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운동장의 함성도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폐회식이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창밖을 한번 힐끔, 다시 고개 숙인 세영이를 힐끔. 그러다 왼쪽 발목이 눈에 들어왔다. 왼쪽만 운동화 뒤축이 구겨져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지 않아도 복숭아 뼈 부근이 아침과는 다르게 몇 배는 부어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침에 붙어있던 파스의 귀퉁이는 말려있었다. 세영이가 얼마나 아픈 다리를 가지고 뛰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잡아봐.”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손수건을 움직이던 태양의 까끌까끌한 음성이 들렸다. 물기 묻은 눈동자에 눅눅해진 손수건이 들어왔다. 태양은 입을 꾹 닫고 눈물을 훔치던 세영의 손에 손수건을 내밀었다. 세영은 태양이 내민 손수건을 잡았다. 손수건을 내주자마자 태양은 체육복 주머니를 뒤지더니 뭔가를 꺼내고 세영의 몸을 반쯤 가로막고 있던 책상을 밀었다. 그리고 털썩 교실 바닥에 앉았다. 세영은 그가 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태양이 하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밀어봐.”


세영은 태양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러자 태양은 두 번 묻지도 않고, 무릎을 굽혀 충격을 줄이고 있던 왼쪽 발목을 잡아챘다. 갑자기 잃은 균형에 내려앉을 뻔했지만 허리 뒤에 있는 선반을 잡았다.


“많이 아팠지?”


태양은 조심스럽게 구겨진 운동화를 벗기고 너덜너덜해진 파스를 떼고 있었다. 찌르릇. 전기가 통했다. 맨다리였다. 부은 발목 때문에 왼쪽은 양말조차 신지 못했다. 난감했다. 오늘 하루 종일 뛰어다녔는데. 눈물이 쏙 들어갔다. 온 몸의 세포가 태양의 손길에 아우성쳤다. 찌르릇. 찌르릇. 머리칼이 곤두설 정도로 쭈뼛쭈뼛. 세영은 양손으로 애꿎은 손수건을 꽉 당겼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몸이 제멋대로 움찔될 것 같았다.


태양은 세영의 부은 발목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짐작했던 데로 심하게 부어있었다. 얼마나 혹독하게 뛰어다녔으면 이렇게 된 건지. 달랑 파스 한 장 붙이고 뛴 게 문제였다. 아침에 붕대를 감아주지 않은 자신이 너무너무 바보 같다. 이 발목을 가지고 넘어지고 뛰어다닌 것을 상상하니 가슴이 아팠다. 이상하게 쿡쿡 쑤셨다. 쓰윽 세영에게로 고개를 올렸다. 물기를 머금고 있는 동그란 눈동자가 가슴에 박혔다. 태양은 다시 머리를 내리고 아까 양호실에 갔을 때 혹시나 해서 받아둔 붕대를 풀었다. 먼저 항상 소지하고 다니는 주먹보다 작은 냉각 스프레이를 뿌렸다. 태양이 간혹 접질리거나 근육이 놀랐을 때 뿌려주는 것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닿자 세영이 흠칫 놀라는 것 같다.


“괜찮아.”


태양의 목소리가 부드럽다. 조그맣지만 세영을 안심시키는 나긋한 목소리다. 그의 손은 능숙하게 붕대를 감았다. 조금이라도 허투루 감지 않고 흘러내림 없이 완벽하게 발목을 감쌌다. 이 녀석, 축구선수였다. 스피커에서 교장선생님 말씀이 흘러나왔지만, 태양도 세영도 둘 만의 공간에 갇혀있었다. 오직 이세영과 윤태양, 둘 만의.


“발 디뎌볼래?”


세영은 마치 주술에 걸린 것처럼 태양의 말을 따랐다. 시멘트 바닥은 차가웠지만 발은 편안했다. 땅에 닿을 때마다 느껴지던 통증이 말짱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발에 보호막이 형성된 것 마냥 푹신한 기분이 들었다.


“미안.”


푹신한 기분을 만끽하는데, 태양의 목소리가 처연하게 들렸다. 세영은 발목을 바라보던 눈길을 들어 태양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의문을 가득 담아.


“......아까 그렇게 심한 말해서.”


그건 아까도 미안하다고 했잖아. 세영은 양호실의 일이 상기됐다. 그 때 느꼈던 분노가 생경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태양이 말했던 패배자. 그 단어가 지금은 둥둥 떠다니는 먼저처럼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 버렸다. 붕대에 감싸인 왼쪽 발을 땅에 디딜 때마다 조금씩 분노가 녹고 녹아 먼지만큼 작아졌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런데 태양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어떻게 말해줘야 하는 걸까?


“.......윤태양.”


세영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정확히 스피커에서 나온 소리였다. 세영은 칠판 위에 달린 고동색 스피커를 쳐다보았다.


“최우수 선수상. 2학년 1반 윤태양.”


태양의 입에서 욕설이 나온 건 착각인가.


“2학년 1반 윤태양! 윤태양?”


학년주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하고 있었다.


“가 봐.”


세영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이 말이라니. 세영도 씁쓸했고, 태양도 어딘지 모르게 쓸쓸했다. 그래도 태양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윤태양 없습니까?”


이러다 정말 혼나게 생겼다. 학년주임한테 잡히면 중간에 날랐다며 혼쭐이 날 것이다.


“가 보라니까.”


세영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태양은 눈물기가 사라져 말간 세영의 눈을 올려다보고는 일어났다. 이제 세영이 그를 올려다 볼 차례였다.


“미안. 다시 올 테니까 여기 있어.”


태양은 단호한 눈빛을 보내고는 뒤를 돌아 전력 질주했다. 오늘은 마가 낀 게 분명하다. 하루 종일 왜 이리 그를 괴롭히는 사람이 많은 거야! 태양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 본부석으로 향하면서 아는 욕설을 몽땅 웅얼거렸다. 태양은 순식간에 본부석에 도착해 교장선생님 앞에 섰다. 옆에 있는 학년주임의 눈초리가 잡아먹을 듯 날카로웠지만 교장 선생님은 싱긋 웃으며 상장을 건네주셨다. 태양은 상장을 받고 다시 교실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전교생이 다 있고 학년주임이 그를 주시하고 있는 터라, 울며 겨자 먹기로 1반이 서 있는 줄로 향했다. 또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폐회식은 언제 끝나는 거야!



세영은 학년주임이 읊는 상장을 들으며 바닥에 떨어진 스프레이와 하얀색 바통을 주웠다. 바보. 네가 어떻게 다시 와. 폐회식이 끝나면 반 얘들이 몰려올 것이고 종례가 이어질 텐데. 세영은 피식 웃고 구겨진 운동화에 왼발을 집어넣었다. 찌릿. 다시 전기가 올랐다. 녀석의 손길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발목에서부터 전기가 올라왔다.


윤태양, 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차렷, 경례!”


구기중이 들어오자마자, 반장의 구령에 검은 머리들이 꺾였다.


“그래. 다들 잘 쉬었나? 허허.”


구기중의 얼굴에 꽃이 폈다. 아주 활짝. 혼자 봄기운은 다 빨아드린 것 같다. 오늘따라 유독 좋은 구기중의 얼굴에 얘들이 서로 쳐다보며 의아해했다.


“세영이 발목은 괜찮니?”


너털웃음을 하던 구기중의 눈이 뒤쪽의 세영에게 닿았다. 빤히 구기중을 쳐다보고 있던 세영은 살짝 몸을 빼 의자 아래 있는 왼쪽 발목을 흘긋했다. 오른쪽 발목과 똑같은 하얀 양말이 신겨져 있는 왼발은 멀쩡했다.


“네, 괜찮아요.”


괜찮을 수밖에 없었다. 종례가 끝나고 아무래도 버스는 무리일 것 같아 택시를 타고 집에 갔다. 그날따라 컨디션이 안 좋다며 헬스장에 가지 않고 곧장 퇴근한 엄마와 현관에서 딱 마주쳤고,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던 세영을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강남의 유명한 단골 한의원까지 가는 도중에 똑같은 레퍼토리를 읊었다.


-그러게, 그런 학교 가지 말랬잖니. 이게 무슨 생고생이야? 생전 다리 한번 접질린 적이 없는데. 무식하게 뜀박질 같은 거 하니까 그렇잖아. 엄마가 뭐랬니? 엉? 너 당장 유학 알아보자. 내 말 듣고 있는 거니? 한의원에서 진료를 기다릴 때도, 한의사 선생님이 어쩌다 그랬냐고 물어볼 때도, 심지어 침 맞으러 들어갔을 때도. 엄마는 끈질기게 말했다. 금토일 삼일을 아예 한의원에서 살다시피 했더니, 붓기는 하루 만에 빠졌다. 일요일에는 일어나보니 발이 너무 편안했다. 대신 주말동안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엄마의 잔소리 때문에.


“그래, 다행이구나. 어쨌든 다들 수고했다. 금요일에는 일정이 늦게 끝나서 제대로 얘기도 못하고 끝냈는데. 너희들도 알다시피 우리 팀이 전체우승을 하지 않았겠니? 하하”


세영은 의자를 바짝 당겼다. 바닥에 닿는 왼발이 너무 가볍다. 아픈 적이 없던 것처럼 너무 가볍다. 금요일에 정말 자신이 다쳤던 게 맞는지 모르겠다. 다치고 지고 울고, 그리고 그 녀석. 그게 꿈은 아니었다. 세영의 가방에 들어있는 조그만 스프레이 통과 체크무늬 손수건이 있으니까. 꿈이 아니라면 그 때 그 느낌들은 뭐였을까? 찌릿찌릿하던 전율. 사실 두통은 엄마의 잔소리보다도 이것 때문이었다. 자꾸만 떠오르는 태양의 영상과 이상했던 느낌. 이상하고 생소했지만 거북하지 않았던 느낌. 그게 뭔지 도저히 딱 하나로 정의가 되지 않아 머리가 아팠다.


“그 전체우승이라는 게 말이야. 알고 보니 부상이 있더구나! 하하.”


조용한 교실에서 구기중 혼자만 아주 신이 나 있다. 모두 얘기하려면 빨리 하지, 뜸 좀 그만 들이고. 하는 짜증나는 눈빛을 마구 발산하는 데도 불구하고, 구기중은 혼자만의 기쁨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얘들아, 너네 공부하느라 힘들지?”


그러니까, 본론이 뭡니까? 얘들의 눈빛이 전부 이랬다. 세영은 책상 속에 넣어둔 수학 문제집을 꺼냈다. 차라리 수학문제를 푸는 게 낫겠다.


“걱정마라. 오늘 너희들의 체력을 책임지겠다. 쇠고기가 좋냐? 돼지고기가 좋냐? 아무래도 쇠고기가 좋겠지. 흠흠. 자아! 기대하시라! 오늘 보충 끝나고 회식이다!”


짜잔, 하고 마술사가 마술을 보여줬는데, 아무도 박수를 안치면 그거 얼마나 민망한 상황일까? 지금이 딱 그랬다. 구기중이 과장된 몸짓을 보이면서 외쳤지만 교실은 여전히 조용했다. 세영은 문제를 읽으며 풋.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반응이 왜 그러냐? 그러니까 부상이 꽤 묵직한 봉투여서 1학년하고 반 나눠서 학년끼리 회식하기로 했는데. 싫......”


“꺄악! 꺄악! 아악!”


구기중의 말을 무참히 잘라버린 얘들의 함성소리가 무시무시했다.


“선생님, 그럼 1반하고 같이해요?”


“으응. 그래.”


예측하지 못했던 곳에서 환호가 나오자 구기중은 얼떨떨한 얼굴이다.


“아싸, 이게 웬 봉이냐! 윤태양과 한기현하고 밥을 먹다니!”


“그러게. 아, 열심히 달린 보람이 있구나.”


“지현이 너 화장품 챙겨왔어?”


“어어, 나도! 나 오늘 완전 거지같단 말이야!”


1반이라는 말에 난리가 난 거였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어이! 다 조용하지 못해? 너희들 이러면 회식 없다!”


상황파악이 되었는지, 구기중이 칠판을 두드리며 정리했다. 얘들은 다시 조용한 조회시간을 조성했다. 대단들 하다. 1반과의 회식이 뭐라고. 그렇게 윤태양이 좋은 건가? 하긴, 그럴 만...세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세영! 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 차려. 붕대 좀 감아줬다고, 손수건 좀 빌려줬다고. 혹하면 안 돼. 이제 그만 생각해. 이제 공부해야해. 너무 놀아서 정신이 어떻게 된 거야. 그래. 그런 거야.’


세영은 모든 것을 차단하고 다시 수학문제에 몰입했다. 아주 필사적으로.



“청소 마무리 하고 교문 앞에 나와 있어라.”


구기중이 나가자마자, 얘들이 모두 화장실 혹은 사물함 옆에 달려있는 거울 앞에 달려들었다.


“야야야, 그거 줘봐. 나 오늘 쌍꺼풀 없어졌다고.”


“으이고, 넌 원래 없잖아! 그냥 생긴 데로 나가렴.”


“지현아, 파우더 있어?”


“이 색 어때? 좀 안 어울리나? 기현이가 좋아하는 색이 오렌지랬는데.”


“진짜? 태양이는? 윤태양은?”


“아, 몰라. 말 좀 시키지 마.”


세영은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열심히 비질을 했다. 청소시간이건만 다들 회식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화장실에 향했던 얘들은 짠하고 변신을 해서 나타났다. 컬이 들어간 머리며 립글로즈에. 아침에는 안 가져왔다고 소란을 피우더니 어디서 다 공수를 했나보다. 세영은 혼자 하기에는 역부족인 교실을 대충 쓸고 빗자루를 도구함에 넣었다. 가방을 메고 교실을 빠져나가는 얘들을 보며 고민하고 있었다. 회식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가방 속에 들어있는 스프레이와 손수건은 가서 전해줘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친하지도 않은 얘들 틈에 끼어서 고기를 먹기는 부담스러웠다. 과외도 있었고, 주말 내내 다리 때문에 집중하지 못한 공부도 해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녀석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두려웠다. 뭔가 금요일 같은 이상한 감정이 생길 거 같아서. 그 감정 때문에 두통이 생길 지경인 걸 보니 그 감정을 다시 느껴서는 안 될 거 같았다. 세영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공부였고, 가장 이루고 싶은 목표는 S대 최고학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결정은 간단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깔끔하게 집에 가면 되는 거였다.


‘그래, 가면서 밀린 영어단어를 외우고, 가서 타임지를 읽고 과외를 한 다음에......’


세영은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섰다.


“어? 이세영!”


보배였다. 오늘 아침에 어색하게 안녕이라고 인사했던.


“응?”


“회식 갈 거지? 같이 나가자.”


세영은 보배의 제안에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말이지? 네가 지금 나에게 회식에 같이 가자고 하는 거야?’


“서경이랑 수진이랑, 우리 여자축구도 뒤풀이해야지. 비록 우승은 못 했어도, 비공식적으로는 우리 경기가 가장 인기 많았다고.”


하고 교실에 들어가 잽싸게 가방을 메고 나왔다. 세영은 붙박이처럼 서 있었다.


“서경이랑 수진이는 먼저 갔나보다. 가자.”


“......아니. 나는 일이 있어서.”


세영의 옆에 와 서는 보배의 행동에 세영은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게 사실은.......”


세영의 주춤거림에 보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대로 사과하지 못한 거 같아서. 아침에 회식 얘기 듣고 잘 되었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말고 정식으로 사과해야 할 것 같았거든.”


보배 얼굴의 어두움은 미안함의 어두움이었다. 화장실에서 욕하던 그 사람이, 연습 중에 밀치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보배는 완전히 다른 보배였다. 이 상황에서 “안 돼”라고 다시 거절의 말을 하는 건, 아무리 이세영이라도 무리였다.


“.......그럼. 뭐.”


보배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떠올랐고, 세영은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니 살짝 미소가 새겨졌다. 그러다 교문 앞에서 만난 태양 때문에 사라졌지만.



쇠고기 어쩌고 하더니, 들어간 곳은 학교 앞 돼지갈비 전문점이었다. 뭐야, 구기중 하면서 수군대는 얘들도 있었지만, 금세 밝은 얼굴로 목소리를 바꿨다. 심할 때는 얼굴을 찌푸릴만한 욕설을 내뱉는 얘들이 양가집 규수처럼 참하게 미소를 짓는 모습에 세영은 입이 딱 벌어졌다. 여자는 정말 대단하다. 그래도 아직 부끄러움은 있는지, 남학생은 남학생대로 여학생은 여학생대로 앉았다. 이건 단체회식이 아니라 각 반 회식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완벽한 이분법이었다. 그나마 두 담임이 한쪽 구석에 마주보고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기에 같이 온 사람들로 보였다. 세영은 가장 바깥쪽에 앉았다. 따라오기는 왔는데 대규모의 학생을 보자 단박에 불편해졌다. 그래서 계속 뒤로 가고, 뒤로 가고를 반복해 가장 바깥 자리를 차지했다. 거기다 남자애들은 세영과는 정반대쪽에 앉아있거나, 혹은 뒷 테이블과 앞 테이블에 앉아있어서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주머님, 예약한 고기 주시고요. 테이블별로 사이다랑 콜라 한 병씩 갖다 주세요. 서선생님, 저희는 살짝 이슬이 한 병만 딸까요? 하하.”


1반 담임선생님인 국사 선생님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시간에는 무표정에 농담 한마디 안하고 수업하시던 선생님이 의외였다. 고기는 착착 나왔고, 밑반찬이며 음료수며 회식을 위한 모든 것이 눈앞에 대령되었다. 불 앞에 앉아있는 누군가가 고기를 굽기 시작했고, 지글지글 고기 굽는 소리와 탁한 연기가 공간을 채웠다.


“사이다? 콜라?”


“음? 어...사이다.”


옆에 앉은 서경이 쪼르르 투명한 사이다를 따라줬다.


“.......고마워.”


서경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 거 같다.


“그럼 우리 건배하자. 여자축구의 준우승을 위하여? 어때?”


서경의 구령에 짠하고 유리잔을 부딪쳤다. 쨍. 참으로 청명한 소리였다. 세영은 사이다를 쭉 들이켰다. 옆에서 보배가 이게 무슨 소주냐며 킥킥 웃었다. 정말 자연스럽게 우리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음.......이세영, 아니 세영아. 다리 다친 게 한 거 미안했어. 그래도 뛰는 내내 네게 진짜 미안했어.”


수진의 말에 킥킥거림이 멈췄다.


“나도. 이번에는 정식으로 사과하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어. 이렇게 자리가 생긴 것도 어쩌면 그래서 그랬나보다. 미안해.”


“그러게. 너무 심했지? ...미안해.”


갑작스런 사과 공세에 세영은 차가운 유리잔을 만지작거렸다.


‘이거 너무 화끈거리네. 나 정말 소주라도 벌컥 들이켠 거 아냐?’


세영은 뜨거운 볼을 양손으로 비볐다.


“......아니...뭐. 이렇게 까지 안 해도.”


진심이었다. 이거 정말 민망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세 녀석들은 모두 세영에게로 집중되었다. 무슨 말이 나올 것인가 기대하는 눈빛들.


“그러니까, 그게. 괜찮다고. 다리도 괜찮고. 그러니까......”


이렇게 진심어린 ‘미안해’라는 사과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미안해’라는 것은 지나가다가 모르고 떨어뜨린 상대방의 펜을 주워주면서 하는 인사 정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 세영에게 이 진심어린 ‘미안해’에 대한 적절한 매뉴얼은 없었다. 그저 어색하게 씩 웃는 모양을 만드는 것 밖에는.


“그럼 우리 다시 건배하자! 자아, 잔 받으시고.”


활발한 서경이 대충 세영의 심정을 파악했는지 옆에 있는 콜라병을 집어 콸콸 따르고, 건배, 건배를 시원하게 외쳤다. 세영은 다시 콜라를 다 비웠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 아니라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근데 뭐 반응이 그래? 이럴 때는 그래, 괜찮아. 뭐 이렇게 가볍게 말하면 된다고. 네가 그러니까 미안해라고 말한 내가 더더더더 긴장되잖아.”


탁, 유리잔을 내려놓은 수진이 부채질을 하며 말을 했다. 수진의 잔도 깨끗이 비어져 있었다. 역시나 세영처럼 긴장했던 모양이다.


“미안해. 이 말에 얼마나 많은 긴장감이 서려있는데. 이세영. 나쁘다. 크크.”


옆에서 서경도 한 술 떴다. 앞에 앉은 둘의 긴장 풀린 모습이 재미있어서 세영도 큭큭 웃었다. 그러자 보배도 수진도 큭큭 웃었다. 어색함과 긴장감은 휑하고 도망간 지 오래였다. ‘미안해’라는 말에 담긴 긴장감. 그 말에 긴장감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말하고 나면 그리고 상대방의 반응을 보고 나면 어깨가 축 늘어질 정도로 힘든 것이었구나.


-미안.


환청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미안이라는 두 글자가 귀에서 속삭였다. 태양이 했던 말. 입술을 꾹 깨물고 백지장처럼 허연 낯빛으로 했던 그 말. 처연한 음성으로 했던 그 말.


‘너도 이만큼의 긴장감을 가지고, 나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니? 그저 떨어뜨린 펜을 주워주며 하는 미안은 아니었던 거니?’


세영은 고개를 살포시 돌렸다. 세영이 앉은 테이블의 맨 끝에 태양이 앉아있었다. 앞에 있는 얘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크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세영의 눈에 한 줄기의 빛이 보였다. 분명 실내인데, 사방이 벽면인데, 태양의 얼굴에 선명한 한 줄기의 빛이 보였다. 그 녀석, 윤태양이 정말 빛나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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