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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05
“어이, 여기.”
기현이 의자를 비스듬히 빼고 앉으면서 태양의 책상에 흰 우유를 올려놓았다. 이어폰을 꽂고 창밖을 보고 있던 태양은 기현의 그림자에 땡큐. 하고 흰 우유를 흔들었다.
“넌 아직도 우유야? 이제 키는 좀 안 커도 되잖아.”
기현이 태양의 귀 한 쪽에서 이어폰을 빼 자기 귀에 꽂았다.
“키 크려고 마시나.”
“그럼 정력? 크크.”
태양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기현의 의자를 툭 쳤다. 기현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였다.
“우유가 얼마나 몸에 좋은데. 하루에 1.5리터 이상은 마셔야 해.”
“뭐 그게 생수냐? 요즘 대세는 생수더라. 하루에 2리터 이상은 마셔야 한다나.”
기현이 손에 500리터 생수 한 병이 들려있다. 이 녀석은 은근히 귀가 얇았다.
“그럼 많이 마시세요.”
“그럼. 건강은 젊어서부터. 이게 또 우리 집 가훈이잖아.”
어째, 너 네 집 가훈은 만날 바뀐다. 가훈이 있기는 한 거야? 아무튼 재밌는 녀석이라니까. 흔들었던 우유를 따고 한 모금 마셨다. 차다.
“저기, 8반이다. 체육 시간인가 보다.”
기현이 녀석이 외치자, 우르르 얘들이 몰려왔다. 월요일에 총 연습을 한 이후로 1반의 화제는 단연 8반 여자애들이었다. 더불어 1학년도 함께.
“오오, 쟤 있다. 야. 저기 커트 머리하고 맨 앞에 있는 얘 누군지 알아?”
“여기서 얼굴이 어떻게 보여.”
“왜? 나는 딱 보이는데.”
“어구, 벌써 사랑의 힘을 느끼세요? 크크크. 나는 저기 약간 갈색머리 쟤 괜찮던데.”
“아냐. 그래도 제일 괜찮았던 얘는 기현이랑 짝피구 했던 걔야. 야. 한기현 너 그래서 걔랑 짝했지?”
기현의 등에 올라타 있던 녀석이 기현의 목을 살짝 졸랐다. 기현이 오버해서 컥컥댔다.
“이 놈아, 무슨 소리야. 진짜 알짜배기는 따로 있었어.”
“뭐? 누구? 1학년? 걔네도 귀엽기는 했다만, 난 그래도 2학년이 조금 낫던데.”
“빨리 이름을 대렸다!!!”
서너 명이 기현에게 달려들었다. 태양은 혹여 자기에게도 엉겨 붙어질까 싶어 살짝 의자를 빼고 관망했다. 기현이 제일 아래에 깔려있는 모습을 보니 고소했다.
“......아, 걔 있잖아. 이세영.”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두의 동작이 멈췄다. 0.001초 될까 말까한 시간이었지만.
“야야야야. 걔는 사람이 아니잖아.”
“......음, 그렇지. 나도 8반하고 한 팀 되었다고 했을 때, 기대했거든. 도대체 그 면상이 어떻게 생겼나.”
“너도? 나도. 근데 그게 실망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얼굴을 보니까. 뭔가 탁 풀리는 거야.”
“재식이 너도 그랬냐? 나도 나도. 난 솔직히 엄청 못 생기고 뿔테에 몸매도 좀 푸짐하고. 암튼 그런 거 있잖아. 솔직히 그 정도 괴물이면 대개 그러니까.”
“그러니까, 너네는 그 여자애가 괴물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이라 실망했다?”
기현이 얘들을 밀어제치고 일어나 머리를 다듬으며 한 마디로 정리했다. 다들 곰곰이 생각하다 기현의 말에 오, 맞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야! 너네는 김태희도 모르냐? 김태희 미모도 공부도 본좌급이잖아. 이세영 걔가 김태희만큼의 외모는 아니지만....... 아니야, 아니야. 걔는 좀 다른 매력이 있어. 신비하다고 해야 하나. 가만 보니까 쌍꺼풀은 없고 눈이 엄청 큰 건 아닌데. 음....... 그 눈동자가 새까맣고.......”
“야야, 써클렌즈 낀 거 아냐?”
태양이 벌떡 일어났다. 크크 웃어대던 얘들이 갑자기 들린 소리에 시선을 집중했다.
“태양이 왜 그러냐?”
“어?”
'그러게, 내가 왜 일어났지?'
태양은 쏟아지는 시선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야! 세계사 떴어!”
서 있는 태양의 사이로 아이들이 수숙 빠져나갔다. 태양도 들어오는 선생님을 보며 재빨리 의자를 당기며 앉았다. 기현이 이상한 눈초리를 보내고는 칠판을 응시했다.
“반장, 오늘 몇 쪽이야?”
“78쪽입니다.”
“다들 책 폈지?”
책장 넘기는 소리에 맞춰, 태양도 책장을 넘기다 슬쩍 밖을 보았다. 한 눈에 세영이 잡혔다. 준비운동이 끝났는지 뿔뿔이 흩어져 체육제 준비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담임이 8반과 한 팀이라고 했을 때,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든 생각이 그 애를 볼 수 있겠구나. 봐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그냥 단지 그렇게 안녕하고 못 봐서 그런 거였다. 얼굴 아는 처지에 인사 안하고 지내는 것도 이상하니까.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남색 체육복에 긴 머리를 나풀대는 세영을 보았을 때, 너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인사할까? 고민하는데, 구기중이 대뜸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사전에 한마디도 하지 않은 말을 하는 거다. 코치 어쩌고, 우승 어쩌고. 태양은 구기중이 선생님이라 뭐라 말도 못하고, 체면 깎이시지 않을 만큼 대꾸했다. 그러자 꺅꺅대는 여자애들. 이거 잘못했다가는 또 시달리게 생겼다 싶은데, 꺅꺅대는 얘들 사이로 그 애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그게 또 이상하게 신경을 자극했다. 구기중이 2학년 얘들 중에서 유일하게 승부차기를 100% 성공한 녀석이라고 그 애를 가리킬 때, 그러니까 그 애와 눈이 마주쳤을 때, 또 이상하게 신경이 살살 긁혔다. 도대체 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연습 중, 유난히 혼자만 넘어지고 부딪히는 그 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졌다. 입을 떼면 처음 공차기 연습했을 때보다 더 심한 말을 할 거 같아 꾹 참았다. 그 때야 그 애 혼자였는데, 월요일에는 보는 눈이 많아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알려줬다가는 옆에 있는 여자애들이 난리가 날 거 같았다. 그래서 꾹꾹 눌러 담고, 보다 못해 일찌감치 연습을 끝냈다. 다시 구기중에게 붙들려 쓸데없는 이야기를 듣는 사이, 세영은 사라졌다. 이렇게 또 안녕해야 하나보다 그러는데, 연습이 끝나자마자 1층 로비로 뛰어 들어갔던 기현이 우유 하나를 던졌다. 그 녀석의 손에는 이온음료가 들려있고. 우유가 손에 들어온 순간, 생각난 건 이세영이었다. 그래서 부르는 기현이를 뒤로 하고 동쪽 수돗가를 지나, 여자 반으로 올라가는 신발장으로 달려갔다. 그 얘가 있었다. 앞머리가 젖어 삐친 사이로 하얀 이마가 보였고, 양 쪽 뺨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검은 구슬만큼 짙은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 눈동자가 기묘하게 짙었고, 깊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그 눈을 나만 본 줄 알았는데, 어느 새 기현이 녀석이 알아챈 건지. 불쾌했다. 이놈을 그냥. 태양은 녀석의 등에 대고 입에 잘 올리지도 않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번 시간에 나눠준 중국역사 가로 넣기 프린트 다 해 왔지? 다 꺼내라. 첫 번째 괄호는......”
책 속에 끼워 두었던 프린트 한 장을 펼치고도 계속 창밖으로 힐끔거렸다. 서쪽 골대에서 연습을 해서 그런지 조금 더 잘 보였다. 구기중이 웬일인지 골키퍼를 하고 있었다. 함께 패스를 하며 골대로 공을 몰고 가는 연습을 하는 모양이었다. 월요일처럼 공 하나를 두고 네 명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형세였지만. 세영은 태양을 처음 만났던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공을 차는 폼이 확실히 잡혀있었다. 그게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그렇게 가르친 것이 기분이 좋아 미소가 슬쩍 빠져 나왔다. 그런데 그 우유는 먹었을까?
“그 다음 괄호. 그 다음! 그 다음 누구야? 윤태양! 어디다 한 눈 팔고 있어!”
태양은 날아오는 분필을 사뿐히 피했지만, 선생님의 불호령은 피할 수 없었다.
연습은 순조로웠다. 확실히 담임이 실기시험에서 출중했던 애들만 선수로 넣어서 그런지, 여학생 치고는 그냥저냥 하는 모양새가 났다. 담임도 우승을 예감했다며 한껏 들떠있었다. 그저 한 가지 이상한 건, 오늘도 세영만 주구장창 넘어지고 부딪혔다는 것이다. 집에 가서 보니 월요일에 생긴 멍이 하나 두 개가 아니었다. 이상하다 생각했던 게 오늘도 이어지자, 이상함을 넘어서 의심을 하게 되었다. 혹시 일부러? 세영은 심하게 까진 팔꿈치를 물로 씻으며 하나부터 열까지 연습 중에 일어난 일을 면밀하게 따져보았다. 확실히 뭔가 있었다.
“이세영 봤냐? 아, 진짜.......”
화장실 문 너머에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에 세영은 칸막이 안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진짜, 왜 걔를 괴물이라고 부르는지 알았어. 어쩜 그렇게 오뚝이 같아?”
“그러니까 그게 더 재수 없는 거 있지. 뭐, 눈물바람 보이는 것도 짜증나지만.”
“난 걔 뭘 하든지 짜증이야. 지가 뭐가 그렇게 잘라서.”
“난 솔직히 작년에 공지랄이랑 같은 반일 때, 공지랄도 엄청 재수탱이었거든. 근데 이세영 걔는 더 심해. 으, 완전 괴물괴물.”
“담임만 아니었으면 걔랑 부딪힐 일도 없는데.”
“나도 처음엔 담임이 걔랑 축구시켜서 짜증났는데, 걔를 좀 많이 굴렸더니 재밌더라. 호호. 그런 애는 지 잘난 줄 알고 나대기 전에 밟아줘야 한다니까.”
이렇게 된 거였군. 세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별로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이래서 성적게시는 인권유린이라니까. 차라리 이게 더 나은 거라고 생각하자. 전학 오기 전에는 세영 자신을 제하고 모든 사람이 그랬다. 서로가 서로를. 앞에서는 세상 둘도 없는 친구처럼 안녕하고 인사하면서, 뒤에서는 문제집이며 공부시간을 알아내려고 갖은 수단을 다 썼다. 그게 그룹이 그러는 게 아니고, 한 명씩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갉아대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 아닌 이상, 모든 학생이 적이었다. 웃음 뒤에 숨겨진 비틀어진 욕심. 서로 알면서도 우리는 안녕하고 인사하고, 오늘 수학이 글쎄. 이러면서 평범하게 수다를 떨기도 했었다. 서로가 가식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그 누구하나 위태로운 관계를 깨뜨리려고 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나가떨어진 건 세영 혼자였다. 그들은 그런 세영을 실패자라고 불렀다. 아니, 그들은 마지막까지 세영에게 웃으며 잘가라고 했지만. 그 눈은 잊을 수 없다. 평생. 넌 패배자야. 넌 패배자야. 넌 패배자야. 그 때 결심했다. 백배 천배 성공할거다. 너희들이 나를 마주하고 다시는 웃지 못하게 보란 듯이 성공할거다. 세영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나는 절대 쓰러지지 않아. 이까짓 넘어지고 부딪히는 거 나한테는 생채기도 낼 수 없어. 죽어도 그 애들보다 훨씬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죽을 거야! 너희들이 하는 짓 따위는 아무것도 아냐. 바보 같은 뱁새들.’
세영은 이 자국이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오랜만에 학교가 시끌시끌하다. 3학년을 제외한 모든 학생이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에 반 별로 서 있었다. 학생들은 뭐가 좋은지 떠들고 웃고 장난을 쳤다. 날씨도 봄바람이 적절히 섞인 맑은 날이다. 오늘따라 교장선생님의 개회사도 짧다. 개회사가 시작되기 무섭게 끝나고, 각 팀별로 지정된 스탠드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첫 게임은 가볍게 줄다리기 예선, 그 다음에는 미니축구장에서 여자축구부 경기가 농구장에서는 남자농구 경기였다. 당연히 남자축구를 맡은 태양은 시간여유가 많이 있는 터였다. 줄다리기 팀이 나가자 선생님들이 얘들을 끌고 응원을 하러 달려 나갔다. 개회사가 끝나고 세영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스탠드에는 구기중 선생을 비롯해 여자 축구를 맡은 얘들 또한 없었다. 경기 전까지 맹렬히 연습중인가 보다고 생각하다 일어났다.
“야, 어디가? 응원안가?”
“우유 사러.”
화단에 굴러다니는 ‘무적의 18반’이라고 적힌 플랜카드를 들고 응원에 나서던 기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까 시작하기 전에 마셨잖아.”
“임마, 응원이 얼마나 체력을 소모하는데. 비축분이다.”
휘이휘이 얼른 따라가겠다는 손짓을 보이고 매점으로 달려갔다. 물론 비축분이 아니었다. 왠지 고생하고 있을 세영이 생각나자 저절로 떠오른 게 흰 우유였다. 그런데 매점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각 반에서 간식과 음료수를 사러 온 탓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할 수 없다. 자판기에 가야지. 다행히 1층 로비는 텅 비어 있었다. 지폐를 넣고 우유를 누르자 투둑하고 우유와 짜랑짜랑 동전이 떨어졌다. 밖에서는 오칠 이겨라, 일팔 이겨라. 하는 응원소리가 들렸다. 경기가 시작된 모양이다. 빨리 전해주고 가봐야지 하고 보니 어디에 있는지 감이 안 온다. 운동장은 당연히 아니고, 학교 뒤편인가? 체육관에 있을 수도 있겠군. 잔디가 깔린 이후로는 체육관은 비가 올 때나 조회를 하는 공간이 되었다. 구기중의 빽이라면... 체육관에서 연습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걸음을 옮기는데 불쑥 떠올랐다. 연습 중이면 당연히 세영만 있는 게 아닐 것이었다. 그렇다고 세영에게만 달랑 주었다가는 그 후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뻔했다. 다시 매점으로 가야겠다. 태양은 머리를 살짝 흔들고 지나온 길을 되돌아갔다.
“윤태양, 응원 안하고 뭐하냐?”
전체 교무실 앞을 지나가는데 구기중 선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와와와와!”
함성이 새어 들어왔다. 새하얀 벽면에 걸려있는 시계는 9시 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머릿속에 그대로 스캔이 된 프로그램 종이를 더듬어보았다. 9시에 개회사고 9시 10분부터 줄다리기가 시작되고, 10시부터 남자농구부 예선이 운동장 뒤편 농구장에서 있고, 여자축구부 예선이. 여자축구부 예선이. 여자축구부 예선이라 적혀있던 활자가 한 자 한 자 눈에 박혔다. 세영은 머리를 썰레썰레 저었다. 이런 거 생각해서 뭐해. 차라리 잘 됐지. 그렇게 하기 싫어서 용을 썼는데, 잘 된 거야. 힘 안 빼고 잘 됐지. 코를 찌르는 파스 냄새에 이끌려 눈을 돌렸다. 세영의 왼쪽 발목에는 큼지막한 파스가 붙어있었다. 전혀 상큼하지 않은 냄새에 얼굴을 찡그리다, 연습했던 나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감상적인 건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삐끗한 발목은 세영의 감정선을 건드렸다.
“하기는 싫었어도 공차는 건 나름 재미있었는데. 그 녀석들이 밀고 걸어도 끝까지 할 생각이었는데.......”
세영의 발목에는 눅눅한 파스가 붙어 있다.
사건은 너무 간단하게 일어났다. 아침까지 응원도구를 만든다며 분주한 교실 사이를 헤쳐 화장실에서 체육복을 갈아입고 나오는데 담임이 불러 세웠다.
“개회 전에 1학년하고 한번 맞춰보자.”
“예? 어디서요?”
운동장은 라인을 긋고, 본부석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체육관. 다른 얘들한테도 말했으니까 바로 와라.”
전학을 오고 체육관은 외양만 구경했지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잔디가 풍성한 운동장이 생긴 후로는 체육관에서 하는 체육 종목은 거의 사라졌다고 들었다. 구기중이 축구를 너무 사랑한 탓도 있지만. 세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교복을 두고 체육관에 갔다. 오늘만 지나면 깨끗이 축구에서 손 털 수 있다 다독이면서.
체육관은 건재했다. 빵빵한 졸업생들이 기부금을 많이 준다더니 헛말이 아닌 듯하다. 지어진지 십년이 넘었다고 들었는데 디자인도 얼추 세련됨을 갖추고 있었다. 서쪽 끝 복도와 연결된 문을 열자 담임과 축구선수가 보였다.
“1학년도 체육시간에 연습했지? 그래도 1,2학년이 함께 연습한 게 벌써 월요일이잖아. 그래서 자기 포지션 정하고, 제대로 연습한번 하고 나가자. 전반전은 1학년 상미가 골키퍼하고, 서경이랑 보배, 나래, 수진이랑 세영이가 전반전 뛰고, 후반전에는 지수, 성희, 서경이, 보배, 세영이가 들어가는 거다. 그 때 그 때 상황 봐서 교체는 할 거니까.”
40분 내내 뛰라고? 세영이 얼굴에 미묘한 표정 변화가 있었지만, 수진이는 아예 드러나 있었다. 2학년 중에서는 혼자만 20분 뛰는 게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그러면 네가 내 대신 뛰라고 말하고 싶지만 구기중이 앞에 있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럼 월요일에 했던 것처럼 나눠서 패스 연습위주로 하자.”
구기중이 공을 놓고 호루라기를 불었다. 체육관 바닥은 잔디운동장과는 다르게 미끄러웠다. 농구라인과 배구라인이 겹쳐 그려진 코트에서 평범한 운동화를 신고 달리기에는 위험한 감이 있었다. 여기서 넘어지기라도 했다가는 잔디밭과는 차원이 다른 아픔이 있을 게 분명했다. 세영은 어디서 들어올지 모르는 공격을 위해 신경을 곤두 세웠다. 다른 얘들도 미끄러운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판국에 설마 저번처럼 밀고 넘어뜨리진 않겠지. 했지만 공이 세영에게로 날아오는 즉시 누군가가 오른쪽 어깨를 쳤고, 세영은 넘어지면서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간신히 일어났지만 왼쪽 발목이 편치 않았다. 바닥에 발을 부딪칠 때마다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세영아! 괜찮냐?”
멀리서 심판을 보고 있던 담임이 달려와 절뚝거리는 왼발을 살폈다. 세영은 이런 적이 없어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턱이 없었다.
“글쎄요. 왼발이 무거운데.”
“아무래도 접질린 것 같은데. 안 되겠다. 양호실 가자. 걸을 수는 있겠니?”
솔직히 발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찌르르한 통증이 등까지 타고 올라왔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누가 자기를 도와준다고 할지. 쟤네의 도움을 받느니 기어서라도 혼자 가는 게 낫겠다. 세영은 주위에 서 있는 여자애들을 쭉 훑었다. 아니,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기어이 밀치고 넘어뜨리더니 사단을 내는 구나. 세영의 눈빛이 거셌는지 2학년 여자애들이 마주치던 시선을 피했다.
양호실에는 체육제 때문에 이것저것 약을 챙기는 양호 선생님이 있었다.
“아니, 개회도 하기 전에 부상자 속출이야? 청춘이 뜨겁구나. 체육제 때문에 이렇게 열성이고. 아침부터 응원가 소리에 아주 귀가 호강이다. 안 그러세요. 선생님? 호호”
세영의 다리를 보고 약을 챙기던 양호 선생님이 담임을 쓱 쳐다보았다. 오십대의 지긋한 양호 선생님은 이 학교를 졸업하고 간호대를 가서 현역으로 뛰시다 몇 년 전에 모교에 왔다며, 체육제 하는 모습을 보니 그 때가 생각난다고 좋아하셨다.
“그 때는 운동장에 잔디도 없고, 공에 바람도 제대로 못 넣어서 잘 차지도 못 했는데. 요즘에는 얼마나 좋아? 안 그래요?”
한참을 옛날은 어쨌는 데를 줄줄이 읊으시던 양호 선생님은 고작 파스 하나를 붙여줬다. 담임은 잠자코 웃음으로 응수하더니 못 참았는지.
“얘 상태는 어때요? 오늘 뛸 수 있을까요?”
아니, 왜 아픈 나한테 물어보지 않고? 뛰는 건 난데.
“살짝 접질렸어요. 넘어질 때 발목 꺾였지? 심한 건 아닌데. 뭐, 붕대 감고 뛰자면 뛰겠지만. 그럼 낫는데 오래 걸려요. 자칫 하다 계속 접질리기 십상이고. 남자애도 아니고, 여자애한테 좀 무리 아닐까요? 어차피 즐기자고 하는 체육제인데.”
양호선생님의 말에 담임의 어깨가 축 쳐졌다. 아무래도 세영에 대해 기대가 컸었나 보다. 승부차기 10번 성공이 저 정도의 맹목적인 신뢰를 불러일으키다니.
“그럼 세영이 넌 안 되겠다. 쉬어라.”
“괜찮으면 쉬다가 나오렴. 모처럼 노는 날인데 혼자 누워있는 것도 심심해. 경기는 못해도 신나게 응원하고. 얼마나 재밌니?”
세영은 그저 쓰게 웃었다. 세영에게 체육제 응원을 재미있을 리 없었다. 담임도 양호 선생님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 듯 대꾸도 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와와와와와! 일팔! 일팔! 와와와와!”
아무래도 우리 팀 인 것 같다.
“네, 줄다리기에서 1,8반 연합이 이기고, 4,12반 연합이 이기면서 오후에 결승전을 갖겠습니다.”
방송반 아나운서의 목소리였다. 이겼나 보다. 세영은 창문에 드리워진 블라인더를 올릴까 하다 관뒀다.
“봐서 뭐해. 나랑 상관도 없는데.”
다시 머리를 뉘이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하얗다. 블라인더로 하얗고. 침대 옆에 쳐져있는 커튼도 하얗다. 사각의 하얀색이 갇혀있자니, 자신이 정말 병자 같다. 이 발로 나가서 앉아있기도 그렇다. 응원은 축구만큼이나 하기 싫은 것이니까. 그냥 교실에 가서 공부나 할까. 혹시나 해서 가져온 영어문제집도 수학문제집도 교실 안 가방에 들어있었다. 그걸 오늘 풀게 될 줄이야. 세영은 그래야겠다 싶어 알록달록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 시트를 걷으려 하는데, 벌컥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이크, 양호선생님인가 보다.’
괜히 걸리면 체육제 예찬론자께서 운동장에 나가라고 할 거 같았다. 이거 자는 척 이라도 해야겠다 생각하기 무섭게 커튼이 젖혀졌다. 하얀 공간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녀석이었다. 갑작스런 등장에 세영은 무방비했다.
“.......왜?”
세영의 목소리가 거칠었다. 태양은 세영의 의사도 묻지 않고, 시트를 걷고 파스가 붙은 발목을 발견했다.
“다쳤어?”
세영은 예고도 없이 일어난 일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태양은 가만히 세영의 발목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낯빛이 되었다.
“만져 봐도 돼?”
세영이 대답도 하기 전에 이미 태양의 손은 세영의 발목을 배회하고 있었다. 파스를 붙였음에도 손가락 감각에 찌릿찌릿했다.
“아프니?”
많이 아픈 건 아니었지만, 세영은 얼이 빠져 그가 하는 모양새만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 시합 안 나갈 거야?”
태양이 연거푸 복숭아 뼈 부근을 더듬더니 물었다. 태양의 말투는 차분했고 부드러웠다. 그런데 세영은 울컥했다.
‘시합이 중요한 거니?’
“보면 몰라? 안 나가는 게 아니라 못 나가는 거야!”
그래, 그게 사실이니까.
“그렇게 열심히 연습 했잖아.”
“고작 몇 번.”
“뭐?”
이제 태양이 울컥했다.
“이 정도면 크게 지장 안 받아. 내가 붕대 감아 줄게.”
뭐가 울컥 한지 모르겠지만, 태양은 세영이 줄기차게 공을 차던 모습이 떠올랐다. 안 되도, 못해도 세영은 끝까지 찼고 성공했다. 연습 때도 넘어지고 치이면서도 못 하겠다 징징대지 않았다. 왜 그렇게 까지 열심히 했는데 아무렇지 않게 고작이라는 말을 하는 거야?
“필요 없어! 성적에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세영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네가 뭔데. 네 따위가 뭔데. 나한테 추궁하는 거야!’
“뭐? 성적? 성적이든 뭐든, 그렇게 연습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때려 치는 게 아깝지도 않아? 악바리인 줄 알았는데. 그래. 네가 말한 고작 그깟 부상에 포기해? 열 번 공 넣겠다고, 아득바득 수 백 번, 수 천 번 찰 때는 언제고. 이제는 고작 이깟 부상에 못해?”
세영은 윗입술을 꾹 물었다. 태양의 눈빛이 무서웠다. 처음이었다. 세영이 꼬박꼬박 소리칠 때도 피식피식 웃기만 하는 녀석이었는데. 지금의 태양은 온 몸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이런 고작에 포기하는 사람을 뭐라고 하는 줄 알아? 패배자. 패배자라고 하는 거야!”
태양은 거칠게 머리를 쓸며 세영의 눈과 마주치자, 한숨을 내셨다. 세영의 어깨는 부들부들 떨리고 세영의 눈은 금세 빨개졌다. 태양은 세영의 시선을 빗겨 하얀 벽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보다는 오래, 태양과 세영은 무서운 공기에 짓눌렸다. 태양은 벌써 후회하고 있었다. 이렇게 몰아붙이려던 건 아니었는데. 흥분이라면 저리가라고 할 정도로 절제심이 강했는데. 고작이라는 세영의 말에 말이 헛나가도 한참 헛나갔다. 태양은 차마 세영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잔 한숨을 쉬었다.
“......미안.”
그리고 태양은 들어올 때만큼이나 순식간에 사라졌다.
-패배자. 패배자. 패배자.
태양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얀 블라인드에 부딪혀 반사되고, 천장에 커튼에 부딪혀 세영의 귀에 명중했다.
-패배자. 패배자. 패배자.
분노도 잠시. 세영의 깊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세영, 넌 정말 패배자니? 또다시 패배자가 되고 싶은 거야?’
세영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어찌나 세게 흔드는지 긴 머리칼을 묶었던 검정색 끈이 느슨해져 있었다.
‘싫어! 싫어! 절대 다시는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아!’
세영은 거칠게 시트를 제치고, 왼발을 바닥에 디뎠다. 움찔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고작 이거에 다시 패배자라는 멍에를 쓰고 싶진 않아.’
세영은 아픔 따위는 무시하고 일어섰다. 걸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다리가 부러져서 아니 문드러져서 걸을 수 없게 된대도 하겠어! 윤태양, 네가 말하는 패배자는 이세영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단어니까!’
세영의 얼굴에는 결연함이 감돌았다. 도저히 누가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에너지가 세영의 온 몸에서 발산되고 있었다. 세영은 재빨리 시트를 정리하고 커튼을 치는데 익숙한 물체가 보였다. 흰 우유. 오금이 저릴 정도로 화를 내던 태양의 모습과 사색이 되어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태양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도대체 뭐가 그 녀석인지 알 수 없었다. 세영은 흰 우유를 집었다. 우유팩은 미지근했다. 영양보충제라고 했었지. 그리고 금요일에는 넘어지지 말라고 했었지. 그래서 이렇게 다친 내가 패배자로 보이는 거야?
세영의 눈에 침대 옆에 놓인 파란색 휴지통이 들어왔다. 우유팩을 들고 있는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까짓 것.”
그런데 던질 수가 없다. 그저 놓아버리면 되는데 누가 잡고 있는 것 마냥 오른 손이 꼼짝을 안했다.
“바보, 이세영.”
세영은 몇 겹으로 보이는 휴지통을 응시하고 있던 눈동자를 굴렸다. 눈이 무거워졌다. 바보, 이세영.
“여자축구 선수들은 본부석 왼쪽에 마련된 경기장에 모여주세요.”
세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무거운 왼발을 옮겼다. 촉촉한 손아귀에는 미지근한 우유팩이 들려있었다. 세영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바보, 나 흰 우유 못 먹는 다니까.”
세영의 손에 들린 우유팩 뒤로 양호실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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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 나가겠습니다.”
여자축구 경기장 주위로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세영은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구기중을 찾았다. 한 쪽 코트에서는 다른 두 팀의 경기를 알리는 휘슬이 요란하게 울렸다. 세영의 팀 경기도 시작 직전이었다. 한쪽에는 구기중과 선수들이 모여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상대편 선수가 모여 있었다. 세영이 구기중을 불렀을 때, 담임은 놀라는 눈치였다. 교묘하게 세영을 밀치던 같은 반 여자애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뛸 수 있겠니? 그러다 덧나면......”
구기중의 눈길이 세영의 왼쪽 발목에 닿았다.
“아니요. 괜찮아요. 제가 뛸 수 있으면 뛸 수 있는 거예요.”
세영은 구기중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그녀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담임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심각한 얼굴로 세영과 세영의 발목을 번갈아 보았다.
“그럼 수진이 빠져라.”
수진이가 반박할 여지도, 세영이 회심의 미소를 날릴 새도 없이 호각이 삑 울렸다.
“그럼 양 팀, 경기 시작합니다.”
세영은 경기장 안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통증이 느껴졌다. 뛸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뛰어야 했다. 무조건 뛰고 또 뛰고 계속 뛰는 것. 그리고 패배자가 아닌 승리자가 되는 것. 그것만은 똑똑히 알았다. 이제 시작이다. 운동화 끈을 꽉 조였다. 달릴 시간이다.
‘윤태양. 네가 말한 대로 내가 패배자인지, 아닌지는 이 시합이 끝나고 알게 될 거야.’
세영의 표정은 베일 듯 날카로웠다.
“으윽.”
상대편 선수와 부딪혔다. 왼쪽 발목 때문에 넘어질 뻔했지만, 이런 거에 넘어질 수 없었다. 세영은 오른발을 움직여 균형을 잡고 굴러간 공을 따라갔다. 예상했던 대로 여자애들은 공만 쫓아다녔다. 그 모습이 웃긴지 응원석에서는 웃음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세영은 진지했다. 질 수 없어! 질 수 없어!
세영은 악착같이 공을 따라갔다. 라인을 벗어나려는 공을 바닥에 미끄러지면서까지 잡았고, 골대 근처로 오는 공을 등으로 어깨로 막아냈다. 사람이 독기를 품으니, 왼쪽 발목도 훨훨 날아다닐 수 있을 만큼 가벼웠다. 6반, 7반 연합은 체구가 좋아 공을 차는 강도가 세영의 팀보다 셌다. 자칫하다가는 정말 골을 내어줄 것 같았다. 세영은 공격은 관두고 수비 진영에서 날아오는 공만 막았다. 이렇게 끌다가 경기가 종료되면, 할 수 없이 승부차기이다. 체육실기보다 가까운 거리니까 분명 좋은 성적을 거뒀던 얘들이 성공할 수 있을 거다. 세영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세영은 서너 발자국 골키퍼 앞에서 그렇게 공만 막고 있었다. 땀이 비 오듯 흘렀고, 머리도 옷도 엉망진창이었다. 깔깔 거리며 박장대소하던 관중들도 어느 틈에 조용해졌다. 꽹과리 소리, 북소리와 응원 노래도 없이 고요했다. 모두의 시선은 경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것도 이세영에게.
“세영아, 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니? 발목은 괜찮은 거야? 어디 보자.”
후반전 작전 타임시간이었다. 여자 축구에만 허용된 룰이었다. 쉽게 지치는 여학생의 체력을 고려해 넣은 작전 타임은 너무 귀중한 시간이었다. 모두들 쓰러지듯 앉아 물 또는 이온 음료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세영은 옆에 놓은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요.”
세영처럼 지쳐 앉아있는 여자애들은 그런 세영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삑.”
“경기 시작합니다.”
심판을 보고 있는 남학생이 소리치자, 세영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일어나 뛰어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다. 뛸 때는 몰랐는데 발목이 갈수록 물 먹은 솜 마냥 무거워지고 있었다.
“저기, 진짜 괜찮아?”
오른쪽 진영에 서 있던 보배였다.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니 갑자기 걱정하는 척이 눈에 거슬렸지만,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괜찮아.”
세영은 머리를 한번 가로 젓고, 다가올 공에 몸을 움츠렸다.
“삑.”
조용한 공간의 호각 소리로 주위가 급격히 시끄러워졌다.
“영대 영. 5분 후, 승부차기로 넘어갑니다.”
결국 여기까지 왔다. 미스만 안하고 잘 차면, 다음 경기에 갈 수 있었다. 세영의 예상대로 체육실기에서 점수가 좋았던 보배와 수진, 서경. 그리고 불안했던 1학년 녀석이 무난하게 골을 성공했다. 세영만 남아있었다. 상대편은 먼저 시작해 네 번을 성공하고 한 번을 실패한 터였다. 이제 마지막, 세영의 순서였다. 세영은 승부차기 라인에 섰다. 체육시험보다 절반은 가까운 거리였다. 시험과는 다르게 골키퍼는 있었지만. 세영은 눈을 감았다. 가만히 서 있으니 바람이 그녀의 뺨을 훔치고 사라졌다. 그 순간 여러 가지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태양과 연습했던 나날. 지난 며칠 축구연습. 화장실에서 들었던 것들. 그리고 태양이 했던 말.
-고작에 포기하는 사람을 뭐라고 하는 줄 알아?......패배자
태양의 음성이 바람에 날아와 세영의 머리칼을 치고 콧날을 치고 뺨을 치고, 그리고 격렬하게 뛰는 심장을 때렸다. 한발, 두발, 세발......,물러났다. 그리고 달렸다. 휙휙, 바람소리가 살짝 들렸다. 바람이 발목을 감싸고 세영의 질끈 묶은 머리가 춤을 췄다. 오른쪽 발등에 공이 닿은 느낌은 굉장히 따뜻했고, 왼쪽 발목이 잔디 사이에 사뿐히 안착했을 때, 들린 건 함성이었다.
“꺄악! 성공이다.”
어깨에 누군가의 손길이 스쳤다. 또 다른 누군가의 손길. 그리고 또 다른 손길. 누군가는 세영을 안았다. 그 뒤로 또 누군가가. 누군가가. 그녀를 에워쌌다. 세영은 잃었던 초점을 맞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기서 구기중이 파란색 모자가 벗겨지는 것도 모른 채 달려오고 있었다. 예의 심각했던 표정을 벗어던지고 입을 큼지막하게 벌리고서는. 구기중의 뒤로 그녀가 찼던 축구공이 도르르 굴러가고 있었다. 어깨동무를 하고 승리의 응원가를 부르던 남학생 한명이 공을 집어 들더니 뻥 찼다. 공이 정확하게 하늘에 쏘아 올려졌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검고 하얀색이 뒤섞여 빠르게 회전하면서 둥실 매달려 있었다.
“무적의 일팔! 무적의 일팔!”
세영의 눈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축구공에 향해있었고, 귀에는 아직 외우지 못한 팀의 응원가가 들렸다. 그리고 세영의 몸은 구기중과 선수들 사이에 묶여있었다.
“끼얏호! 우리가 이겼어!”
“이세영, 진짜 완전 짱이잖아!”
“우리 이대로 결승까지 가는 거야!”
“그래, 일팔 우승이다! 우승!”
흥분의 목소리가 파고들었고, 세영은 뛰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의 발에 맞춰 같이 방방 뛰고 있었다. 어느 새 서로의 팔이 서로의 어깨에 얽혀있었다. 이겼다. 이겼다. 이겼다. 세영의 멍해 있던 표정이 환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발을 더욱 굴렀다. 세영의 눈에 보배와 성희와 수진. 그리고 서경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 얘들이 과연 세영을 욕하고 교묘하게 밀쳐내던 얘들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웃고 있었다. 세영을 향해서. 그리고 세영의 어깨를 잡고 같이 뛰고 있었다. 아예 수진이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입은 웃고 눈은 울고. 그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세영의 코끝도 시큰했다. 참으로 묘하고 묘한 기분이었다.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이상한 기분. 이 녀석들이 밉지도 싫지도 웃기지도 않고, 구기중이 헤벌쭉해서 아이처럼 뛰고 있는 모양은 세영에게 흥분을 일으켰다. 이게 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녀는 흥분상태. 그리고 이렇게 누군가와 얼싸안고 환호하고 있는 것이 미치게 짜릿하다는 것. 그래. 짜릿짜릿. 온 몸의 신경세포가 짜릿짜릿하게 곤두섰다. 이겼다. 기쁘다. 이겼다. 기쁘다. 세영의 신경세포가 계속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하늘에 떠 있던 공이 잔디에 툭 떨어졌다. 세영은 공의 흐름을 좇으며 환희를 만끽했다. 그 공에는 태양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불같이 화내던 얼굴도 사색이 돼서 쩔쩔매던 얼굴도 아닌, 피식 웃던 그 얼굴이.
‘윤태양, 넌 아니? 이런 짜릿짜릿한 기분.’
“헉헉. 야 이 자식아! 여기서 뭐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는 기현이 태양의 옆에 아무렇게 널려있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긴 체육복 바지는 무릎까지 올라가 있고 하얀 반팔 티셔츠는 가슴까지 말려있었다.
“옷이나 좀 내려. 네 몸매 뭐 볼 거 있다고.”
태양의 말이 퉁명스럽게 나갔다. 당연했다. 지금 그의 기분은 한마디로 썩었다. 세영을 놔두고 그렇게 뛰쳐나와서 학교 뒤 정원 오두막에서 한참을 앉아있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스스로를 책망하며. 누구보다 다친 사람 마음이 더 속상할 텐데, 거기다 대고 시합에 나가라는 둥, 고작이라는 둥. 그리고 아주 결정적인 패배자라고도 했다. 다시 양호실로 가고 싶었지만, 선뜻 나서지 못했다. 아니, 가지 못했다. 도저히 빨갛게 물든 세영의 눈길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마음은 양호실로 향했지만, 발걸음은 운동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발걸음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잡혔다.
“됐거든. 얌마, 근데 너 뭐하는 거야? 여기서. 줄다리기는 이미 애초에 끝나고도 한참이나 지났구먼.”
기현이 태양의 주위를 쓱 훑어보았다. 구급상자가 있고, 음료수병도 있고. 이곳은 본부석 의료석이었다.
“잡혔어.”
“누구한테?”
“누구긴. 여기 앉아있으니까 당연히 양호선생님이지.”
“왜?”
기현은 좀 여유로워졌는지 탁자에 올려있는 건강음료 하나를 땄다.
“급한 환자 발생이라나. 병원 갔다 올 때까지 지키고 있으라고 하시더군.”
그랬다. 운동장을 향하는 발걸음은 헐레벌떡 양호실로 뛰어 들어가시던 양호선생님과 마주치면서 멈춰졌다. 지갑을 챙기러 들어가시던 선생님은 갑자기 부상을 당한 학생 때문에 병원에 가야하니, 본부석 의료석 좀 맡아달라고 부탁하셨다. 태양은 경기도 있고, 응원도 있다며 양해를 구하려다 선생님이 너무 급하신 것 같아 아무 말도 못했다. 그 후로 쭉 아무도 찾지 않는 텅 빈 곳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얼씨구. 열혈학생이구만.”
기현은 한 번에 쭉 들이켠 병을 탁 내려놓고 이죽거렸다. 그런 기현에게 대꾸하기조차 귀찮아 태양은 기현을 바라보고 있던 눈길을 거둬 앞을 향했다. 경기를 알리고 전체적인 진행을 맡고 있는 아나운서 석과 상품이 즐비한 탁자가 운동장을 보고 싶은 태양의 눈을 막았다.
“어쨌든, 일어나.”
태양의 왼쪽 눈가가 찡그려졌다.
“왜? 아직 축구까지 시간 있어.”
태양은 기현의 너무 당연하다는 말투에 어이없는 콧바람이 나왔다.
“너 시간 없어.”
“왜? 축구 시간 바뀌었냐?”
기현이 태양의 팔을 낚아채 당기는 폼이 농담이 아닌 듯 했다.
“아니.”
“그럼 왜?”
“그 부상 학생이 상학이거든.”
“뭐?”
태양은 눈만 끔벅거렸다. 그 부상당한 녀석이 상학인데 그게 왜? 태양의 눈빛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러니까 시간 없지.”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걔 짝피구 선수였잖아. 근데 그 녀석이 아까 줄다리기할 때도 연습하더니. 갑자기 우지끈. 뭐. 내가 보기에는 인대 끊어진 거 같더라.”
“허허. 경기하기도 전에 다치는 게 이번 체육제 모토야?”
태양은 헛웃음이 나왔다. 상학이 놈은 불안 불안했었다. 첫 연습 때 1학년 여자애한테 꽂혀서, 아침이고 점심이고 저녁이고 피구 연습만 했던 녀석이다. 운동을 평소에 안하던 녀석이 갑자기 그러니 걱정은 되었었다. 원래 그런 녀석들이 쉽게 부상을 당하니까. 끊어질 거 같으면 경기나 끝나고 그러든지. 하필 경기 당일에 그게 뭐람. 상학이 녀석도 꽤 속이 쓰릴 거 같았다. 아마 세영이도 그랬겠지. 그런데 몰아세웠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 자신의 행동에 한숨을 내쉬었다.
“여하튼. 그러니까 일어나. 가자.”
“아니, 상학이 놈이 다친 거랑 일어나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설마 내가 보충일까?”
“설마 맞아.”
기현이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나는 축구도 나가고 릴레이도 나가잖아.”
“이런 경우에는 아무나 들어가도 상관없어. 이왕이면 잘하는 녀석이 들어가서 이기는 게 좋지 않겠냐? 얘들도 다 찬성. 그래서 너 찾느라고 난리 났다.”
마치 준비했다는 듯 외우는 기현의 말에 반박할 새도 없이 의료석에서 끌려나와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야야야. 한기현. 너 잘 생각해라. 짝피구 하고나면 남자축구지. 그거 끝나면 바로 릴레이야. 날 죽일 셈이야?”
“어이어이. 하루에 우유 2리터 이상은 마시는 정력남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그렇게 몸이 걱정이면 실력 발휘를 하시라고. 그럼 한 이십분 아니 십 분이면 다 끝나겠다.”
기현은 작정을 했는지 태양을 놔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녀석에게 한심하게 끌려가고 있는 자신이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어이~얘들아!”
저 멀리서 무리지어 몰려오던 녀석들이 기현이를 발견하고 한달음에 뛰어왔다. 이제 완전 꼼짝없이 붙들렸다.
“찾았냐? 윤태양, 이자식. 어디에 꽁꽁 숨어있었냐?”
지후 녀석이 태양의 목에 팔을 감았다. 태양은 그저 긴 한숨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야야, 어떻게 됐어?”
기현이가 옆에 있던 기수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여자축구? 승부차기 점수가 우리 팀이 제일 높아서 부전승이다. 지금 나머지 두 팀인 준결승 중이야.”
여자축구 말이었군. 태양은 아직도 줄줄이 둘러쌓고 있는 녀석들 사이에서 발버둥치고 있었다. 보아하니, 첫 경기를 이긴 모양이다. 그 녀석을 빼고서.
“아까 봤냐? 진짜 오늘은 최고 경기는 여자축구 아닐까?”
“진짜 난 아무 소리도 못 내겠더라. 얼마나 처절하게 막는지 손바닥에 땀이......”
“그러게. 완벽한 괴물!!! 공부만 그러는 줄 알았더니, 축구도 만만치 않더라.”
태양은 녀석들의 대화에 뭔가 있다는 걸 눈치 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무래도 그 애가......?
“무슨 말이긴, 너 못 봤냐? 이세영. 장난 아니었어. 걔 혼자 공 다 막고. 아니지. 막은 게 아니고 거의 맞았다고 보면 되지.”
“우리 팀 이긴 건 다 이세영. 걔 공로야. 난 정말 다시 봤다. 걔가 쓰러지면서까지 막는데 닭살이 돋는 거야. 너무 흥분해서.”
“진짜 압권은 마지막 승부차기. 그렇게 폼 좋은 여자애는 처음 봤어. 솔직히 야! 나 반했다. 걔한테. 헤헤.”
“얼라리요? 괴물, 괴물 할 땐 언제고! 하하하.”
그 애가? 세영이가 경기를 했어! 태양의 귀에는 이세영이라는 이름만 들어왔다. 어안이 벙벙했다. 세영이 아픈 발목을 끌고 경기에 나간 것이다. 그의 말을 들은 것 같아 고마우면서 아픈 다리로 파스 한 장 붙이고 뛰었을 걸 생각하니 속상했다.
“걔 다리가 안 좋던데.”
태양은 기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다리? 어디가?”
“못 봤어? 왼쪽 발목. 걸을 때마다 미묘하게 부자연스러운 거. 뛸 때도 오른쪽으로 자꾸 중심이 쏠렸잖아. 아마 그래서 넘어지고 쓰러지면서 공을 막을 수밖에 없었을 걸. 뭐, 대단한 거지. 멀쩡한 얘들도 멍하니 서 있는 와중에.”
예리한 녀석. 잦은 부상에 시달리는 축구선수이니 만큼 기현은 세영의 부상을 눈치 챘으리라. 기현의 말을 듣고 보니 세영이 더 걱정되었다. 지금쯤이면 발목이 더 부었을 게 틀림없었다. 아까 다그칠 게 아니고, 압박붕대를 감아줄 것을. 태양은 후회에 후회만 거듭하고 있었다. 안되겠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당장 세영을 찾아서 상태를 봐야했다.
“야, 이거 놔봐.”
“어이어이, 왜 그래! 지금 경기해야 해!”
빠져나가려는 태양 때문에 세영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모두 태양에게 집중했다.
“야야. 한번만 하면 돼. 어차피 예선은 어제 다 끝났으니까.”
얘들은 더욱 태양을 옭아매어 피구 경기장으로 끌고 갔다. 태양의 시선은 준결승이 한창인 여자축구장에 꽂혔다.
“아씨, 진짜 놔 봐!”
“가만히 말 들어라. 윤태양.”
태양의 일행은 점점 여자축구 경기장과는 정반대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장정 네댓 명이 겹겹이 쌓여 빠져나가는 건 거의 무리였다. 태양은 그저 세영의 빨갛던 눈을 떠올리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