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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 푸아!”
뜨거워진 얼굴에 찬 물이 닿자 열기는 금세 식었다. 격렬하게 세수를 한 덕분에 상의 체육복이 축축했다. 빨리 갈아입어야지 라는 생각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왔을 뿐 세영의 머릿속은 좀 전에 있었던 체육실기가 리플레이 되고 있었다.
4월 18일 수요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6시에 기상을 했다. 어제 언니와 밤늦게 떠들었지만 세영의 눈은 시계초침보다 정확하게 눈이 떠졌다. 샤워를 하고 가볍게 컴퓨터에서 흘러나오는 영어회화를 중얼거리고 옷을 입었다. 교복을 입는 손길이 좀 느리다고 생각하면서. 식탁에는 굽지도 않은 식빵 한 조각과 딸기맛, 포도맛 잼이 있었다. 평소에는 토스트기에 넣고 1분을 기다린 후, 딸기맛 잼을 바를 텐데. 세영은 밥솥 옆에 있는 과일바구니에서 바나나를 하나 집어 껍질을 까고 입에 물었다. 그리고 버스를 타러 나간 시간은 7시 20분. 8시부터 0교시가 있으니까 적당한 시간이야 하고 나가려는데 신발 끈이 풀렸다. 초조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오늘따라 유독 교통 체증이 심해서 5분 시간이 초과되었다. 세영은 이상하게 초조해졌다. 0교시 자습시간에는 수학문제를 푸는데 그녀가 좋아오는 B색 샤프심이 톡톡 끊어졌다. 1교시 세계사 시간에는 자꾸 휴대폰으로 눈길이 갔다. 액정의 시간이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9시 50분에 종이 울렸다. 오늘은 체육실기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29번 이세영.”
체육복을 어떻게 갈아입었는지 준비운동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세영은 승부차기 선에 서 있었다. 지난 며칠 간 보았던 낡은 공이 아닌 새 공이 정확히 둥근 라인 안에 박혀있었다. 손가락 끝이 따끔따끔했다. 점점 따끔함이 손등을 넘어 팔꿈치, 어깨로 이어지고, 나아가 무릎까지 따끔해졌다. 이세영은 긴장감에 빠져있었다.
‘이 까짓 거 아무것도 아냐. 연습했던 데로 차주면 되는 거야.’
그런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찼었는지. 어떻게 멋지게 공을 넣었었는지.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하면서 생각해 내보려 했지만 정말 백지였다. 누가 펑하고 눈앞에서 폭죽을 터뜨린 것처럼 펑하고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세영! 호루라기 불면 시작해라.”
S대. S대. S대. 주문을 걸었다.
“삐-”
달렸고 하얀 운동화가 공에 맞닿은 순간, 기억난 건.
-발목에 힘을 주고, 발등으로 쑥 밀어 주는 거야. 가볍게. 눈은 공이 골대에 들어갈 때까지 떼지 마!
그리고 그 녀석이 공을 차던 영상이 어렴풋이 나타났다. 찰나에 그 모든 것이 지나갔고.
“성공!”
담임의 외침에 공이 들어갔음을 알았다. 그 이후에는 마치 공이 세영의 발에 착착 맞아떨어져 남은 아홉 번의 기회도 골로 연결시켰고 최초 10번 성공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구기중은 난리법석을 떨면서 여자축구부를 만들어야 한다느니, 세영이 네가 축구의 여신이었구나. 라며 황당한 말을 했다.
“띠리리리~ 이이이~”
다음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체육복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손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교실로 뛰어갔다. 그런데 왜 그 순간에 그 느물느물이 떠오른 걸까?
세영의 발걸음은 매점을 향하고 있었다. 3층 복도는 조용했고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고요했으며 1층 복도에는 개미 한 마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아무도 없었다. 6시 20분. 6시에 석식이 끝나고 남아있는 1,2학년은 도서실에서 야자를 하고, 3학년은 맨 꼭대기 4층에서 자습을 하고 있을 터였다. 사실 이 시간까지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체육 실기는 A+라는 결과를 안겨주었으므로 이제 축구연습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과외선생에게 예전 시간에 공부하자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10번의 시도에 10번의 성공은 그녀에게도 엄청난 환희와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더불어 체육 내신 1등급이라는 근사한 전리품도 가져다 줄 것이리라. S대에 갈 수 있는 기틀이 좀 더 다져진 것이다. 단지 그것인데 실기가 끝나고 자꾸만 언니의 대화와 그 녀석의 느물느물한 웃음이 생각났다.
어제 밤에 오랜만에 언니와 화상채팅을 했다. 세 살 위의 언니인 이영과는 이영이 유학을 떠나면서 살가워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영이 한번 추락의 고배를 마시고 세영 역시 지독한 실패를 맛보면서 친해진 것이다. 이영은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최고의 특목고를 나와 아주 순조롭게 미국의 아이비리그에 입성했다. 그와 동시에 세영도 이영의 후배가 되어 입학을 했다. 아빠는 Y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였고 엄마는 중학교 영어선생님. 외가며 친가며 법조인부터 외교관, 의사 등 다들 저명한 인사가 그득했다. 이영과 세영은 한 번도 어긋남 없이 그들의 패밀리에 자랑스러운 측근이 되어가고 있었다. 적어도 얼마 전까지는.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더니. 이영은 치열한 그들만의 리그에 적응하지 못하고, 엄마, 아빠 몰래 휴학계를 내고 지금은 여기저기 파트타임을 하고 있었다. 이영은 감쪽같이 모두를 속였다. 세영이 전의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의지를 밝힐 때까지. 세영도 이영처럼 처음 겪는 뒤쳐짐에 자퇴를 선언했다. 그런 세영을 말리라며 엄마가 이영에게 전화를 하자마자 이영은 그녀의 사정을 고했고, 그래서 세영은 유학을 가라는 엄마의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결국 절충안이 전학이었다. 잘 나가는 언니의 뒤에서 언니만큼 잘 나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려오던 세영에게 이영은 넘어야 할 첫 번째 산이었는데, 어느 새 산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있고 그 산을 넘던 사람조차 절벽에 떨어져 나뒹구는 처지가 되었다. 둘 다 부모님이 정해놓은 완벽한 인생대신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 인생을 살아버리게 되었지만, 이영은 근 1년 사이 놀랄 만큼 아픔을 치유하고 다른 여러 가지를 눈에 담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세영은 실패라는 기억을 끌어안고 칼날을 갈고 있었다. 이영은 그런 세영의 마음을 다독이고 어르면서 다른 세계로 이끌려 노력했지만 세영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래도 이영은 가끔 연락하면서 세영이 더 이상 어긋나지 않도록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런 자식은 난생 처음 본다니까. 어떻게 그런 놈 따위가 나한테 못한다고 무시할 수 있어? 나 이세영한테.
막 흥분해서 자판과 목소리가 동시에 나가고 있었다.
-이세영. 그런 놈 따위라니. 너 또 그런다. 그거 안 좋은 버릇이라고 했지. 그리고 들어보니까 도와주려고 한 게 분명한데 그 지랄 맞은 성질 다 부리고. 어이쿠. 망신이다.
이영의 문장은 자못 진지했다.
-언니!!!!!! 진짜 나한테 막....... 나한테 막........
-막 뭐? 뭐라고 했는데? 너 밥맛없대? 재수 없대?
그 말은 다 세영이 한 말이었다. 그 녀석은 그러니까.......
-눈 뜨고 못 봐주겠다고 그랬어!!!
-정말 눈 뜨고 못 봐줄 정도로 너 몸치 맞잖아. 당연한 걸 말했네.
세영은 아악 소리를 지르고 윈도우 창을 닫아버리려다 참았다. 요즘에 이영이 일을 하나 더 시작해 연락이 뜸해졌기 때문이다. 또 언제 연락을 할지 몰랐다.
-세영아, 사람이 완벽할 수 없는 거야. 못하는 것도 있고 그래야 사람이지. 네가 무슨 신도 아니고. 너 운동 못 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 그거 대한민국 대부분의 여자가 못하는 거야. 그렇게 아득바득 잘한다고. 못하는 것 없는 완벽한 사람이라고 우길 거 없어.
이영 역시 쓴 약을 먹고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제 세영이 꼭 알아야 할 차례였고.
-아니. 난 뭐든지 잘해. 뭐든지 노력하면 뭐든지! 뭐든지 이룰 수 있어. 두고 봐. 보란 듯이 합격해서 그 녀석들 앞에 던져 줄 거야. 그리고 당연히 내일도 성공할거야.
세영의 눈빛은 아주 짙게 변해있었다. 이영은 얕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세영이 갈 길은 먼 듯하다. 하지만 반드시 가야할 길이다. 세영 자신을 위해서.
-오냐. 어쨌든 성공하면 그 친구 덕분인 거 같으니까. 사례는 해. 누구한테 빚지고 살지는 마. 그거 정말 비참한 거야. 알겠어?
그 녀석한테 빚진 거 없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래봤자 계속 언쟁이 이어질 거 같아 대꾸하지 않았다. 체육시간이 끝나고 계속 언니의 말이 윙윙댔다.
매점에는 매점을 지키는 아주머니만 있었다. 아주머니가 이 시간에 매점에는 웬일이냐는 눈길로 쳐다보았지만 가뿐히 무시하고 먹을 게 잔뜩 놓인 선반들을 둘러봤다. 오랜만에 온 슈퍼 비슷한 가게에 세영은 조금 흥분됐다. 이 학교에 전학을 오고 매점에 온 횟수가 두 번이었나 세 번이었나? 매점은 항상 북적북적해 그녀의 에너지를 소모시켰다. 뭐 딱히 매점에서 뭘 사먹지 않는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그득한 군것질거리에 세영의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카스타드. 아, 프렌치 파이다! 음, 포카칩도 맛있겠는데. 마실 거도 사야겠다.’
음료수 냉장고에는 갖가지의 신제품이 빼곡히 정열 되어 있었다.
‘저건 무슨 맛이야? 망고오렌지? 으, 하나로만 만들지. 왜 섞어?’
세영은 미간을 찡그리고 꼼꼼히 음료수를 살폈다. 그녀가 아는 거라곤 우유 종류뿐이었다. 그래서 초코 우유 몇 개를 들었다. 계산을 마치고 비닐 안을 살펴보니 이건 하나도 빠짐없이 세영의 취향이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 자신의 취향에 좀 바꿔야겠다고 쓱 둘러봤지만 황급히 시선을 거뒀다.
‘아무거나 주면 되지. 뭘 그렇게 고민해.’
식당을 돌아 나가자, 반대편 운동장에 있는 수돗가에 축구부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6시 30분. 그녀의 생활리듬만큼이나 축구부 감독도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것 같다. 그녀가 조회대까지 가는 사이 축구부원들은 저쪽 코너를 지나 사라지고, 운동장 중앙에는 언제나처럼 그 녀석이 공을 마주하고 있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고맙다는 말은 죽어도 하기 싫었다. 분명 저 녀석은 그거 다 내가 가르쳐서 그런 거다. 라고 말 할 거다. 그렇게 이죽대는 꼴은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사양이다. 세영의 자존심은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 지고 있었다.
“어? 어이~”
어떻게 말을 꺼낼까 고민하고 있는 사이, 그 녀석이 그녀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세영은 슬그머니 군것질거리가 든 비닐을 뒤로 감췄다. 그 녀석은 벌써 조회대 가까이 와 있었다.
“어라? 오늘은 체육복 아니네.”
태양은 말끔히 교복을 차려입은 세영의 모습이 낯설었다. 칙칙한 체육복 입은 모습만 보았지 교복 입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매일 보는 교복인데 이상하게 생소했다.
“자.”
세영은 불쑥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태양이 어리둥절하게 세영을 바라보며 뭐야? 라고 물으려 입술을 달싹이기 무섭게.
“성공했어.”
봄바람이 살랑 세영의 머리를 치고 태양의 머리를 쳤다.
“열 개 다.”
세영은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겹쳤다. 바싹바싹 말랐다.
“하하. 축하해.”
‘저 웃음의 의미는 뭐야? 그거 봐라. 내가 하라는 대로 하니까 됐지? 이러는 거지!’
라고 생각하고 면밀히 살폈지만 그 녀석은 말 그대로 축하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는 별말 없이 그녀의 봉지를 받아들었다. 뭔가 이상하다. 이게 아닌데. 그녀가 생각했던 반응은 이게 아닌데. 분명 저 녀석은 생색을 내면서 그녀를 무시해야 하는데. 지난 11일 동안 그녀에게 했던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했던 것처럼 막 생색을 내야 하는데. 씨익 웃고 있다. 이런 기분을 보고 ‘김 새’라고 하는 거구나.
“그럼 이만.”
빨리 자리를 피해야 할 것 같다. 이 이상한 기분을 벗어나려면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서자마자.
“어? 잠깐만.”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 눈앞에는 커다란 초콜릿이 우유에 퐁당 빠져 있는 그림이 있었다.
“이거 마시고 가.”
세영은 얼떨결에 빨대가 꽂힌 초코우유를 손에 들었다. 녀석도 비닐봉지를 몇 번 뒤적이더니 같은 초코우유를 꺼내들었다. 어느 새 녀석은 스탠드에 앉았고 세영은 그 녀석과 두 계단 위의 스탠드에 앉아 있었다.
저 녀석은 초코우유를 정말 좋아하나 보다. 입에서 빨대를 떼지 않는 걸 보니. 학교 운동장 울타리 너머로 슬금슬금 붉은 기운이 종종걸음을 했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구름이 소리 없이 빠르게 물들어 갔다. 붉게 아주 붉게. 세영의 시선은 노을에 머물렀다가 노을 앞에 앉아있는 그 녀석에 머물렀다. 왜 이렇게 조용한지. 평소에는 신경 쓰지 말라고 해도 옆에서 참견하더니 오늘은 조용하다. 자리가 생소하고 어색하다. 이렇게 사람과 단 둘이 있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잘 생각해보면 처음 같기도 하다.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그렇게 친한 친구는 없었으니까. 같이 임원을 하는 얘들끼리 문제집 얘기며 학원 얘기 뭐 그런 것들을 얘기했었다. 고등학교에 와서는 그런 얘기도 안 했지만.
‘사람과는 어떻게 대화를 하는 거지? 언니와 하던 것처럼 하면 되는 걸까?’
해가 점점 가라앉는다. 온통 붉다.
이 녀석도 참견하는 것만 알지. 대화하는 법을 모르나 까지 생각했을 때, 픽픽픽 하며 빨대에 바람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초코우유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세영의 목으로 흘러갔다는 표시. 시간은 어느 새 7시다.
“그럼 갈게.”
가방을 고쳐 메고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녀석도 일어나 세영을 보고 있었다. 녀석의 손에 들린 초코우유가 세영의 눈에 스쳤다. 그 녀석의 초코우유는 오그라져있었다. 어지간히 빨대를 빤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바람만.
“근데 이름이 뭐야?”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는데 들려오는 질문에 풋 하고 웃을 뻔 했다. 그러고 보니 난 이 녀석의 이름도 몰랐다. 뭐 몰라도 상관없는 인물이기는 하지만. 굳이 앞으로 만날 일도 없으니까, 이름정도는 알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중에 회상할 때 나에게 무한한 무례감을 준 그 느물느물한 웃음의 소유자가 있었지. 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그나마 이름을 살짝 붙여주는 게 나쁘지는 않을 테니.
“이세영”
세영은 스스로 이름을 말하는 게 살짝 부끄러웠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윤태양.”
그게 참 절묘했다. 녀석이 이름을 말하는데 마지막으로 죽을힘을 다해 이글거리던 태양이 녀석의 뒤에 서 있었고, 두 개의 태양이다. 라고 생각하는 찰나에 태양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빨갛던 그 녀석의 주변이 퍼렇게 변했다.
“그럼 잘 먹을게.”
태양이라 말한 그 녀석이 비닐봉지를 들어 흔들었고, 세영은 그게 마지막 인사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돌아오는데 뭔가가 생각날 듯 말 듯 했다. 그 날 침대에 누울 때까지 세영을 괴롭혔다. 뭔가 생각날 듯 하다가 안 나는 게 가장 괴로웠다. 정말 모르겠다며 눈을 감는 그 순간, 불현듯 생각났다. 영어이동수업시간에 여자애들이 떠들었던 게.
-한번 스쳐지나가기도 어렵다는 그 윤태양의 눈길을 받았단 말이냐!
‘그 놈이 그 놈이었군.’
그리고 세영은 깊은 잠에 빠졌다.
어제 대회를 마친 터라 오늘은 아침훈련이 없었다. 오랜만에 7시에 일어나 밥을 느긋하게 먹고, 7시 30분쯤 마을버스를 탔다. 학교까지 가는 마을버스는 51번이 유일했다. 고작 평소와 30분 늦은 시각인데 지하철역으로 가는 회사원과 H고등학교로 가는 학생들로 버스 안은 복작복작했다. 더는 안 된다며 문을 닫으려는 버스 운전사를 못 본 척하고 두 계단을 올라 간신히 자리를 잡아 섰다. 찌릿하고 아저씨가 째려봤지만, 씩 웃고 고개를 돌렸다. 쫓아낼 수도 없었다. 이렇게 바쁜 아침에. 거칠게 출발하는 아저씨 덕분에 살짝 중심을 잃었지만 균형 감각이 뛰어난 태양에게 이까짓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방심할 수 없기에 손잡이가 달려있는 바를 잡았다. 이럴 땐 키가 커서 좋았다. 태양이 잡은 곳 아래에 남색 재킷에 회색 바지를 입은 남학생 두 명이 서 있었다. 분명 H고 학생이었다.
“봤냐?”
“그거? 완전 괴물 아니야?”
“암, 괴물이지. 내 십 팔년 인생에 그런 건 처음 본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얘야?”
“내가 요즘 그 면상 한번 보려고 학교 가잖아.”
나보다 머리 두 개 정도는 작은 녀석이 목소리는 무척 걸걸하네, 하고 생각하는데 말하는 내용에 호기심이 일었다.
“보나마나 뻔하지. 뭐 영화나 드라마처럼 다 그렇게 생긴 거 아니겠어?”
“그렇겠지. 그래도 궁금하지 않냐?”
도대체 뭐기에 저러나 곰곰이 생각하는데 지하철역이 있는 다음 정류장에서 우르르 사람이 빠지고, 다시 내린 사람만큼이나 많은 학생들이 타고 있었다.
“뒤로 좀 들어가세요!”
각자 자기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주어진 손잡이를 잡고 있던 학생들이 몇 번 씩 소리치는 운전기사의 말에 마지못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태양도 호기심을 일으킨 두 남학생을 따라가는데,
“어머머, 야, 윤태양 아냐?”
“야야야야야야! 맞아! 맞아! 웬일이니! 오늘 늦게 일어난 게 다 이러려고 그랬나 보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태양은 아씨, 라는 나름의 감탄사가 나오려는 걸 참고 버스 제일 안 쪽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역시나 그를 알아본 여자애들이 줄줄이 그의 주위를 에워쌌지만.
“오늘은 웬일이래?”
“너 축사모 맞아? 어제 대회 끝났잖아.”
“축구부 또 우승! 아싸. 거기다 저기 윤사마가 득점왕!”
“넌 진짜 소식도 빠르다.”
“이런 거야 기본 아니겠니.”
“오늘 윤사마님 완전 제대로 간지. 야야, 디카 있지? 핸폰으로는 도저히 저 간지를 표현 못하더라.”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 있지. 으윽. 어제까지는 주구장창 들고 다니다가 오늘 딱 놓고 왔단 말이야.”
“윤사마 다리 길이 봐라. 저거 이기적인 몸매 아니냐?”
“아! 아저씨가 급정거 한번 해줬으면 좋겠다. 그럼 단번에 저 넓은 등짝에 폭 쓰러질 텐데. 으으으, 나 지금 닭살 돋았다. 흐흐흐.”
이래서 아씨,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거다. 대놓고 인사도 못하면서 아주 들으라는 식으로 구시렁댔다. 다리 길이? 간지? 뭐 등짝에 쓰러져? 축구를 좋아해주고, 응원해주는 건 참 고마운데 저런 민망한 단어들을 당사자 주위에서 확성기를 댄 것 마냥 말하는 건 뭔지. 대체 나보고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건지. 다가가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예뻐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라고 답해달라는 거야? 아씨. 진짜. 태양은 학교 입구 정류장까지 버스 안의 모든 여학생들이 떠드는 소리에 시달려야 했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휙 가방을 책상에 던지고 의자를 빼고 털썩 앉았다. 훈련 없는 아침이건만 훈련보다 몇 배는 되는 체력을 쓴 것 같았다.
“윤태양. 한 건 했더라. 축하한다.”
그 옆을 지나가던 반장이 축 늘어진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그 말을 신호탄으로 0교시 시작 전, 삼삼오오 모여 있던 얘들이 축하인사를 건넸다. 소식 한번 정말 빠르군.
“어, 고맙다. 다들.”
갑자기 미소가 가시고 어깨에 강한 힘의 압박을 느꼈다.
“야야야야야야! 니들 나한테는 안하냐! 이게 다 이 한기현님의 천재적인 수비 실력으로 이뤄낸 거 아니겠냐?”
“기현이 저게 왜 가만히 있나 했다. 간신히 지각은 면했다.”
교실 중간 책상에 앉아 만화책을 돌려보고 있던 현수가 큭큭대며 손목시계가 있는 왼손을 쑥 내밀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거의 8시였다.
“야, 손 치워라. 힘들다.”
“오호, 이제 윤태양도 늙었구나. 고작 대회 하나 끝냈다고 이렇게 힘이 빠지셨어요? 그래, 넌 그렇게 쭉 가라. 이제 한기현의 시대가 도래할 테니. 크크크.”
“도래고 다래고 간에. 나 일진 안 좋다.”
“왜?”
태양의 목소리가 조금 퉁명스러웠는지, 기현이 조용히 물러나 앞자리 의자를 당겨 앉자마자 띠리리리리리~종소리가 울렸다. 기현이 성격에 종소리 따위는 당연히 개의치 않았지만 선생님의 등장은 다른 문제였다.
“이 녀석들, 벨 안 들리나!”
불호령에 사위는 삽시간에 정리되고 고요했다.
“오늘 자습시간에는 설교 좀 해야겠다.”
책을 펴려던 손길들이 동시에 멈춰졌다. 알림내용 빼고는 별로 말이 없으신 담임선생님인데, 갑자기 설교라니. 그런데 얘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무슨 일이 있나보다.
“어제 다들 봤겠지?”
고요하다.
“내가 웬만하면 말은 안 하는데. 성적이 그게 뭐냐? 어떻게 된 게 과목등수 10등 안에 드는 놈들이 없냐! 엉? 적어도 담임 과목인 국사는 1등은 못해도 10등 안에 드는 놈 한 명은 나와야 할 거 아냐!”
‘으흠, 중간고사 이야기였군.’
태양은 대통령배 고교대회 때문에 부득이하게 중간고사 4일을 모조리 결석했다. 기말고사 시험은 치를 수 있었기 때문에 중간고사 성적은 기말고사 성적이 100% 반영될 것이다. 대회는 학교에서 인정한 결석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이번 중간고사가 어려웠나 보다. 태양의 반에는 그래도 1학년 때 한 가닥 한다던 녀석들이 몇 명 있었는데. 반장도 그렇고 비실대는 창서도 그렇고.
“아무리 여풍(風), 여풍 한다고. 여자가 득세라지만, 어떻게 각 과목 5등 안이 다 여학생 반에서 나올 수 있냐? 엉? 정신 차리고 공부하는 거야? 안하는 거야? 저번 모의고사는 그래도 좀 하더니, 너 네 내신이 요즘 더 중요한 거 몰라?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대학 문턱에도 못가. 알겠어?”
평소에 안하시는 말씀을 맹렬히 내뱉고 교탁 위를 뒤지셨다.
“주번! 출석부 어디 있어?”
4분단 끝에 앉아있던 대성이가 움찔했다.
“이 놈들이 아주 군기가 빠졌군.”
“지금 다녀오겠습니다.”
대성이 엉거주춤 일어나 뒷문에 손을 댔다.
“됐다. 다들 공부해라. 떠드는 사람은 반장이 보고하고!”
담임선생님은 쾅하고 문을 닫고 나가셨다. 어지간히 화가 나신 게 분명하다. 수업시간에도 묵묵히 수업만 하시는 선생이신데. 한바탕 훈계가 있었음에도 선생님이 나가시자마자 얘들은 긴장했던 근육을 풀며 웅성거렸다.
“담임도 엄청 충격 받았나 보다.”
“어제 나도 보고 충격 먹었는데, 뭐. 여자애들은 왜 그렇게 잘하냐? 진짜 과목마다 1등부터 5등까지 여자 이름인 거 보고 충격. 반장, 넌 왜 그렇게 죽 쒔냐?”
“묻지 마라. 나도 가슴이 아프다.”
반장은 들고 있던 펜을 놓고는 짧은 머리를 쓸었다. 표정이 썼다.
“반장, 그럴 거 없어. 솔직히 어렵긴 했어. 가뜩이나 내신등급제 어쩌고 해가지고, 변별력 있게 시험문제 엄청 어렵게 낸다고 선생들이 그랬잖아.”
“그건 그런데, 국어는 진짜 웃기지 않냐? 만날 낭만 어쩌고 낭독 어쩌고 쌩쇼를 하더니, 시험문제는 모의고사보다 어렵더라. 진짜 누구 물 먹이려고 작정을 했나. 그 순진한 얼굴에 그런 재주가 숨어 있을 줄이야.”
저렇게 말하니 시험문제가 한번 보고 싶어진다. 그 맹한 국어 선생이 낸 문제라.......
“근데, 국어 1등 점수 봤냐? 걔 100점이었어. 내 눈이 잘못됐는지 의심했잖아.”
“나는 아예 내가 눈을 뜬 건지 몰랐다. 걔 이름이 계속 종이 제일 위에 있는 거야.”
“아으, 진짜 괴물. 괴물. 으. 진저리 나.”
‘잠깐. 아침에 들었던 낱말인데.’
“근데 그런 애가 있었냐? 솔직히 그 정도면 1학년 때도 길고 날고 했을 거 아냐.”
“반장, 너 뭐 좀 아는 거 있냐?”
반장은 1학년 때부터 전교 10등 안에 드는 공부 잘하는 녀석이었다. 공부 잘하는 녀석들은 으레 또 공부 잘하는 녀석을 파악하고 있으니까 교실의 시선이 반장에게 쏠렸다.
“낫씽. 진짜 하나도 몰라. 나도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궁금할 정도야.”
쏠렸던 시선들이 실망해서 쓰러졌다.
“괴물이라? 야, 태양이 넌 뭐 좀 생각나는 게 없냐?”
기현이 홱 돌아보며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을 비췄다.
“뭐가?”
“솔직히. 괴물이란 호칭은......”
“호칭은?”
“이 한기현에게 더 어울리지 않냐? 필드를 누비는 괴물, 한기현. 거, 작년에 개봉한 봉준호의 괴물도 대박이었잖아. 아! 내가 왜 진즉에 그 생각을 못했을까? 안되겠다. 내 팬클럽 얘들한테 ‘필드의 괴물, 한기현’ 이걸로 플랜카드 만들라고 해야겠다. 어때?”
태양은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렇지, 한기현.
“그건 그렇고, 찾았냐?”
턱을 괴고 아직도 괴물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녀석들을 바라보는데 기현이 녀석이 물었다. 태양은 새까만 기현의 머리를 바라보며 혀로 입안을 쓸었다.
“뭘?”
“요즘에 뭐 찾고 있는 거 아니었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럼 그렇지, 한기현. 이놈의 간교한 술책에 말려들면 그 날로 평생을 이 녀석의 혀 세치에 놀아나야했다.
“글쎄다.”
“흠. 시합 가기 전까지 너 바빴잖아. 1층부터 4층까지 두리번대느라. 그거 뭐 찾을 거 있어서 그런 거 아냐?”
역시. 한기현. 너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낸다. 부라보!
“그랬었나?”
“너......”
“뭐하는 거야! 이놈들이. 보충수업 끝나고 다 야자해!”
갑자기 들이닥친 담임선생님들의 호통에 얘들이 그대로 굳은 것도 잠깐. 야자라는 말에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태양은 기현이의 추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기현은 너 운 좋은 줄 알아 하는 오라를 내뿜고 고개를 돌렸다. 다른 애들과 마찬가지로 태양도 영어책을 펴고 샤프를 들었다. 학교 공부도 웬만큼 해야 하지만 영어공부는 게을리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영어 관련 책자를 항상 소지하고 다녔다. 매번 0교시 때마다 읽었던 영어책인데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고개를 털고 집중하지만, 눈으로 읽은 한 쪽을 이해 못해 다시 앞으로 돌아가기를 몇 번했다. 괜히 기현이 자식이 상기시켜서 그렇다. 그 녀석이 꺼내지만 않았어도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아니 어차피 또 복도에 나가고 식당에 가면 도리반거릴 게 맞지만. 기현은 들었던 샤프를 책 사이에 끼워 넣고 밖을 내다보았다. 확연히 짙어진 나무와 그 아래로 빨갛고 노란 색색의 꽃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잔디가 깔린 넓은 운동장.
이세영. 그 여자애는 자신의 이름이라고 했다. 꼬빡꼬빡 말대꾸에 매서운 눈초리로 흘겨보기만 하는 여자앤 줄 알았는데 그 애가 먹을 게 담긴 봉지를 내밀었다. 성공이라는 승전보와 함께. 그 봉지는 참 생소했다. 그래서 금방 돌아가는 그 애의 발걸음을 잡고 싶었나? 정신을 차려보니 봉지 안에 있던 초코우유를 건네고 있었고 스탠드에 앉아있었다. 나는 그저 초코우유를 마셨고, 그 애도 그랬겠지. 집에 가야겠다며 일어서는 그 애를 보고 불현듯 생각났다. 초코우유를 빨 때는 꽁꽁 숨겨져 있었던 궁금증. 이름. 그 애는 이세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다. 뭔가 놓친 게 있는 거 같은데 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게 뭔지 모른 채 찜찜한 기분으로 하교를 해 샤워를 하는데 탁 떠올랐다. 몇 학년 몇 반. 그게 엄청나게 중요한 건 아닌데. 정말 알 필요가 없는 건데. 샤워를 하는 동안 타일 벽에 몇 번이나 머리를 쳤다. 바보 같다고. 그리고 계속 바보짓을 했다. 시합가기 전까지 쉬는 시간마다 복도를 서성이고 괜히 1층에 한번 갔다가 2층에 한번 갔다가, 혹시 3학년인가 싶어 4층 화장실에 가보고. 식당에서 볼까 싶어 배식 받을 때도 슬쩍슬쩍 여학생들을 훑고, 10분이면 먹는 점심을 한 20분은 걸리게 먹다 기현이한테 타박을 받은 게 여러 번이었다. 그랬으니 능구렁이 한기현이 눈치를 채고도 남았다. 이보다 바보 같을 수는 없다. 대충 요즘의 태양의 모습이었다. 몇 학년, 몇 반. 그게 정말, 정말.......
“정말 필요 있는 건 아닌데......”
태양은 흐늘흐늘한 잎사귀를 보면서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뭐해? 안 가?”
아이팟에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으려 하는데 기현이 낚아챘다. 태양은 흘끗 기현은 어리둥절하게 보았다.
“괴물. 그 괴물 한 번 보자고.”
한기현의 호기심이 당길 만한 일이긴 하지.
“됐어. 귀찮아.”
정말 귀찮았다. 대회에서 쌓인 피로도 그랬고, 복도에 나가면 또 바보 같은 짓거리를 할 거 같아 귀찮았다. 정말 필요 있는 게 아니니까.
“에에에, 너 진짜 노화 진행 중이냐? 너 이런 화제에서 빠지면 가뜩이나 연습이나 대회다 해서 학교 오는 날도 얼마 없는데 소외되기 십상이다. 그거 알아? 바로 왕따. 아니다. 요즘엔 좋은 말로 아싸.”
“그게 뭔데?”
“아웃사이더의 줄임말.”
“끌어다 붙이기는.”
태양은 픽 실소하고 기현이 낚아챈 이어폰을 집어 들었다.
“이 놈이. 내가 하는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니까!”
기현이 태양의 오른팔을 잡아끌었다. 이놈이 성웅이한테 말한 근육 트레이닝이란 거를 진짜 하고 있나 보다. 완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어쩐지 이번 대회에서 유난히 가슴 트래핑을 고집하더라니. 그 덕에 수비를 수월하게 해줘서 발 빠르게 공격할 수 있게 해줬지만. 그런 능력을 이런 식으로 남발하는 건 기분 좋지 않은데.
“야야야, 저기 맞지? 얘들이 우글거리는 거 보면.”
2학년 교무실 앞 게시판에 예닐곱의 학생이 모여 있었다. 우글거리는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뭐든지 과장해야 좋은 걸로 아는 한기현이니까.
“알았으니까, 이건 좀 놔라.”
“왜? 빨리 와봐. 어디 보자. 국어 1등이랬지?”
끝내 오른팔을 붙잡고 놓지 않는 기현의 뒤통수에 가벼운 욕지거리를 뱉어주었다.
“오오. 여기 있다. 2학년 8반 이세영.”
‘뭐?’
이제는 도리어 태양이 기현을 제치고 게시판을 훑었다. 이세영. 이세영. 이세영. 이세영. 이세영. 이세영....... 중간고사 일곱 과목의 맨 첫 번째가 모조리 이세영이었다. 설마 내가 아는 그 이세영은 아니겠지.
“이야, 얘 진짜 괴물이다. 괴물. 어떻게 이렇게 하냐? 다섯 과목 백점이야!!!”
설마. 설마. 이건 정말 괴물이 할 만한 일이잖아.
“진짜 얼굴 한 번 보고 싶다. 이런 얘는 공부를 어떻게 하나? 진짜 밥 먹고 잠자고 볼일 보는 시간 말고는 공부만 하겠다. 진짜 악바리. 으. 무섭다. 안 그러냐?”
악바리. 맞다. 그 애는 악바리였다. 헛발질하던 축구공을 정확히 11일 만에 100% 골인시켰다. 그게 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그 애가 찼던 공의 횟수는 수 백 번이 넘으면 넘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래, 그 애는 지독한 악바리였다. 공이 중간에 떨어져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굴러가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내는 해냈다. 설마는 설마가 아니었다.
“야. 야. 너 왜 그래?”
설마가 아니라면 2학년 8반 이세영은 그 이세영이었다.
“기현아, 네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게 맞다.”
정말 필요 있는 게 아니었던 몇 학년 몇 반을 알았다. 태양은 다시 한 번 쓰윽 첫 줄에 나열되어 있는 이세영이라는 이름을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웃음이 삐져나오는 걸 막고.
“야아. 윤태양! 뭐야? 너 왜 그래? 쟤가 봄날에 드디어 실성을 했나 야야!”
2학년 8반 이세영이었어.
_04
시선이 따갑다. 뒤통수가 가렵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 요 며칠 세영에게 일어난 신변변화였다. 영화에서 보면 남들은 2배속으로 움직이는데 주인공 혼자 덩그레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지내왔던 지난 두 달 동안의 시간은 깨끗이 지워졌다. 오늘 아침 버스 안에서부터 교문을 통과하고 교실에 들어오기까지 그녀의 주변은 소란스러웠다. 누가 딱히 무슨 말을 하는 것은 아닌데, 이 소란스러움의 원인은 세영 자신이라는 걸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기까지는 필시 중간고사 성적 게시 때문이리라. 교무실 앞에 떡하니 붙어있는 50등까지의 과목등수에 놀란 건 다른 애들이 아니라 세영이었다. 어떻게 개인의 성적을 동의도 없이 적나라하게 펼쳐놓을 수 있을까? 인권문제 아닌가? 그런데 아무도 반박하지 않고, 게시판에 몰려들어 소리 지르고 울고불고 하는 애들의 모습에 두 번 놀랐다. 쟤네는 뱁새이기 이전에 무개념이 아닐까? 자신들의 민망함 점수가 저렇게 공개되어 있는데 그저 ‘웃고 울고’로 끝낼 수 있는 건가? 당연히 세영은 무리 없이 톱을 차지했지만 저런 공개는 원치 않았다. 이건 시험의 주체를 싹 무시하는 처사였다. 그 전 학교에서는 이런 짓은 하지 않았다. 고만고만한 성적가지고, 붙이고 할 게 뭐 있겠나. 그것도 그렇지만 등수를 나열한 종이 쪼가리를 붙이는 날로, ‘그게 바로 너다’라고 규정하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시험 성적을 조금씩 알기 시작하면 몇 반에 누가 몇 점이더라 라는 것이 순식간에 퍼진다. 그렇게 비밀리에 알기만 해도 서로 자존심이 상하고, 자신의 쓸개마저 베어 먹으며 칼날을 갈 텐데. 1등부터 꼴등까지 나열한 걸 보면 혀 깨물고 죽을 얘들이 여럿 나오기 때문에 시험성적게시는 시도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뱁새들은 저런 작태를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것도 모자라 몇 날 며칠 자랑스럽게 달려있는 종이를 당연하게 바라보았다. 결국 직접적인 피해를 받고 있는 건 세영 자신이었다.
“쟨 어디서 튀어 나온 거야?”
“솔직히 난 게시판 보기 전에 저런 애가 우리 반이었는지도 몰랐다.”
“야, 근데 어떻게 공부하면 저런 성적이 나오냐?”
“쟤 봐봐. 밥 먹고 화장실 가는 거 빼면 공부만 하잖아.”
“에이, 설마 저렇게 해도 안 되는 애가 얼마나 많은데.”
“그럼 아무래도 그거겠지?”
“뭐?”
“하루에 한 장하는 족집게 과외!”
“하긴, 계속 보니까 귀티가 싹 흐르는데 돈 꽤 있는 집 애 같지?”
“솔직히, 이 학교에서 돈 없는 애들이 어디 있어. 근데 쟤는 그 중에서도 아주 왕(王)급수가 아닐까?”
“야야야. 무슨 책 보나 한번 쓱 보고 와봐.”
세영의 주위로 반경 1m는 텅 비어있고, 그 너머로 여학생들이 속닥속닥 댔다. 이게 벌써 삼일 째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 여하튼 수업시간 빼고는 세영은 동물원 철창 안에 있는 원숭이 신세였다. 아니, 원숭이면 그나마 낫지. 얘네는 세영의 얼굴은 코끼리, 몸은 기린, 다리는 토끼처럼 이상한 동물로 만들었다. 한 시간마다 한 장인 족집게 과외, 뒷거래로 움켜진 시험지 원본, 아이큐 200 등 등 새로운 그녀가 그녀의 귀에 속수무책으로 들어왔다. 모자이크 없이 무삭제로 들려오는 루머의 향연에 책을 보고 있어도 보는 게 아니고, 영어를 들어도 듣는 게 아니었다. 이세영에게 공부를 못 하게 만들다니. 짜증을 넘어서 분노가 치밀었다. 차라리 얼굴 맞대고 또박또박 말해주면 반박이라도 하지.
“누가 이세영이야?”
앞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사람은 선생님이 아니었다.
“2학년 8반 이세영. 누구야?”
눈매가 찍 올라가도록 잔 머리 하나 없이 완벽하게 머리를 올린 여자애였다.
“너야?”
칠판 앞에 서 있는 어떤 여자애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눈길을 세영에게 보냈다. 완벽한 머리는 도전적으로 콧김을 뿌리고 저벅저벅 세영에게 다가왔다. 세영은 이어폰을 꽂고, 책을 펼치며 다가오는 그 애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0교시가 시작할 시간이니까.
“네가 이세영이야?”
‘서두 잘라먹고 주민증 검사부터야? 네 이름은 어디다 팔아먹고.’
세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너 과외 누구한테 해?”
‘이건 신상명세조사보다 더 디테일한데?’
세영은 치켜 올라가는 입 꼬리를 간신히 잡았다. 이 여자애의 표정은 마치 먹이를 앞에 두고 으르렁대는 한 마리의 사자였다. 그럼 내가 먹이? 흐음. 이세영 인생은 날 때부터 먹이라는 위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고, 될 수도 없으며 돼서도 안 되었다. 물론 된 적은 있지만, 적어도 이 뱁새들이 우글거리는 학교에서는 돼서도 되지도 말아야 했다.
“너 혹시 강남에 지선생 잡은 거야? 아니면 미국에서 들어왔다는 데이빗 김?”
쯧쯧. 그 시대가 바뀐 지가 언제인데. 이 소리를 전의 학교 얘들이 들으면 아주 박장대소를 하겠구나. 이래서 뱁새 천지인거다. 그런데 네가 누군데 신상명세를 넘어서 기타 란에 적을 법한 걸 물어보냐고. 세영은 그저 그 애의 표정을 응시할 뿐이었다. 역시 궁금증은 가까운 곳에서 해결되었다.
“우와! 오늘 이건 완전 특종! 저거 공다운 이잖아.”
“공지랄, 완전 열 받았나본데. 친히 우리 반까지 어려운 걸음하고.”
“한마디로 개털 됐잖아. 전교 1등만 했는데, 완벽하게 이세영이 밀어냈으니.”
“하긴, 공지랄도 7개 과목 1등은 절대 못했지.”
“안되겠다. 나 말이야. 입이 근질거려서 못 참겠어! 이과반에도 쫙 뿌리고 와야지.”
으흠, 그런 위인이셨어요. 이 애는 자기 말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는지, 관심이 없는지 거친 콧바람을 불어대며 이글이글 타는 눈빛으로 세영을 죽일 듯 태웠다. 얼굴 맞대고 또박또박 말해주면 반박이라도 하지, 라고 했던 말 취소다. 이 얘는 흥분상태였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하던지 간에 세영은 조만간 공다운인가 공지랄인가 하는 거에게 물어 뜯길게 분명했다. 몇 달 전에 저 눈빛이 세영의 눈빛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그 눈빛을 마주하니, 그 때 자신이 얼마나 패배감에 젖어있었는지 뚜렷이 알 수 있었다. 추하고 더럽고 바보 같은 눈이었다. ‘다시는...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저런 눈빛은 보여주지 않을 거야!’
세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애의 눈은 빨리 말해! 라고 다그치고 있었다.
“이거 뭐하는 거야!!! 다들 종소리 못 들었어!!! 너 8반 아니지? 빨리 제 교실로 돌아가지 못해!”
구기중이 출석부로 앞문을 퍽퍽 두드리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탓에 0교시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묻혔었나 보다. 구기중의 출연에 수 십 명의 얘들이 혼비백산하게 움직였다. 세영을 째려보고 있던 공지랄인지 공다운인지는 세영에게 아무 것도 못 얻은 게 아쉬운지 마지막으로 장렬하게 뜨거운 눈빛을 보내고 사라졌다.
“시험 끝났다고 누가 물 흐리냐! 다다음주에 모의고사 있는 거 몰라! 3학년이 뜬 구름 위에 있는 거 같지? 그거 눈 한번 깜빡하면 오는 거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란 말이다.”
웬일로 구기중답지 않게 공부예찬론이다.
“내가 한 번도 말은 안했지만 공부! 이거 중요한 거다. 대학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말이야. 인생을 살면서 이 공부라는 게 얼마나 유용하고 필요한지! 니들이 살아보면 다 알게 될 거다.”
8반 얘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다들 웃고 싶은 걸 꿋꿋이 참고 있었다. 세영의 출연으로 구기중의 교무실의 입지가 180도 달라졌다더니, 아주 어깨에 힘이 팍팍 들어가 있다.
“어쨌든 분위기 흐리지 말고 이번 시험 본 것만큼 쭉 해라. 알았지?”
구기중의 입이 쭈욱 귀에 걸려있다. 어지간히 대우가 좋아졌나 보다. 비주류 담당이라 은근히 천대 받더니. 헤벌쭉한 얼굴로 출석부에 이름을 기입했다.
“그리고 다음 주 금요일에 체육제 있는 거 알지? 오늘 아침에 제비뽑기 했는데 우리 반은 1반하고 한 팀이다. 1학년 8반하고 1반하고 다 같이 한 팀이니까. 지금 경기선수 명단 짜서 이따 점심시간에 각 반 반장끼리 모여라. 반장, 나와.”
구기중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졌다. 세영은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당황했다. 개학식에 받은 연간 계획표에 적혀 있는 체육제인 건 알겠는데, 제비뽑기는 뭐고 1학년은 뭐며, 1반은 또 뭔지. 대충 추리해보면 세영이 속한 8반과 2학년 1반, 더불어 1학년 8반과 1반이 같은 팀이라는 건데. 그러니까 남녀 각 한 반씩 한 팀이 되고, 1학년도 2학년을 따라 같은 반이 한 팀이 된다. 이런 것 같았다. 하기는 중학교 때도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같은 반이 쪼르르 한 팀이 되었었다.
“다 알지? 짝피구와 여자 축구, 여자 발야구, 줄다리기, 2인 3각 경기, 릴레이. 1인 1종목은 필수니까 다 들어가야 해.”
어느 새 구기중은 창가에 서 있고 반장이 칠판에 경기 종목을 적고 있었다. 1인 1종목 필수라? 세영은 이런 이벤트를 좋아하지 않았다. 당연한 건가. 하루 수업을 안 하고 날리는 것도 짜증났지만, 그 전에 준비하고 연습하는 게 더 싫었다. 그렇다고 운동실력이 특출 나서 이기는 맛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일에 그저 머릿수만 채워주면 되는 줄다리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반장! 나나나나! 나는 짝피구!”
“어?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반장이 종목을 다 적자마자, 얘들이 벌떼같이 짝피구에 달려들었다.
‘오라, 남녀가 한 짝이 되어 하고 싶은 게지. 누구 좋아하는 얘라도 있나. 그래도 너무 노골적인 거 아냐?’
세영은 벌떡 벌떡 일어나서 애원하는 얘들의 모양새가 과히 귀엽게 보이지는 않았다.
“난리 났네. 저거 다, 한기현이 짝피구는 꼭 한다고 해서 저러는 거 아냐?”
“아마 그럴걸. 한기현 팬클럽이 물어봤는데 짝피구는 꼭 할 거라고 그랬대. 걔가 왜 그러겠냐? 여자 한번 꼬셔볼라고 그러는 거지. 쟤네는 딱 제비인 한기현을 왜 좋아하나 몰라.”
한기현인가 뭔 가하는 녀석이 원인이었군.
“몇 명이야? 다섯명? 그럼 짝피구 인원이 다섯 명이니까 니들이 해. 여자 축구? 이거 인원이 4명이야.”
하자마자, 짝피구처럼.
“나!”
“나!”
“나도!”
“나”
하는 소리가 피용피용 날아왔다. 얘들이 담임의 영향을 받아서 축구광신도가 되었나보다. 실기 시험 때는 골 하나도 못 넣는 얘가 태반이더니. 세영은 앞이고 옆이고 뒤고 다다닥 일어난 얘들을 올려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러면 줄다리기는 그냥 따 놓은 당상이었다.
“거기. 미영이, 지선이, 경희 다 앉아.”
흥분한 얘들에게 찬물을 던진 건 구기중이었다.
“니네 이번 실기 때 공도 하나도 못 넣어놓고, 무슨 여자 축구야. 이왕 하는 거 이기는 게 맛 이고만. 무슨 일이 있어도 축구는 다 우승해야 된다. 내 체면이 있지. 그러니까 너네는 앉고. 반장. 수진이랑 서경이는 적고......”
구기중이 부른 이름은 승부차기 시험에서 적어도 70%의 적중률을 보여준 얘들이었다. 그 외에 서 있던 얘들이 오만가지 인상은 찌푸리고 자리에 앉았다. 어지간히 하고 싶었나 보다.
“그리고 저기 세영이랑 보배 적어라.”
세영의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고양이 벽창호 긁는 소리야. 오만가지 인상이 즉시 그녀에게 향했다.
“세영이만 A+ 맞았지? 보배는 A맞고. 내가 다 기억한다. 여자 축구 우승해야 한다.”
그 A+가 이런 식으로 발목을 잡을 거라곤 생각을 못했는데. 세영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다른 얘들은 아주 입술을 터뜨릴 만큼 씹어 먹고 있었다. 여자 축구가 뭔데 저 난리들인지. 나도 하기 싫다고. 줄다리기 하겠다고 말하고 싶은데, 축구광신도 구기중이 한번 말한 말이 번복 될 리 없었다.
“그럼 그 외에 안 속한 사람은 다 줄다리기야.”
그렇게 경기종목 짜기가 끝났다. 처음의 환호하는 다르게 얘들의 표정이 우중충했다.
“이따 반장이 미팅해봐야 알겠지만, 주말 지나면 체육제까지 나흘밖에 없으니까. 월요일부터 체육시간하고 0교시랑 보충수업 시간에 연습 있을 거다. 몇 개 종목은 목요일 예선 있으니까, 주말에 공부 많이 해 놔라. 알겠나?”
대답하는 소리가 시원치 않다. 분명 여자축구는 연습이 있을 거다. 이래서 싫었는데, 그나마 다행이라면 방과 후에는 시키지 않아서 과외시간을 옮길 필요가 없는 거다. 그래도 너무 싫다. 이런 이벤트.
아침에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엄마는 바쁘게 재킷을 걸치고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엄마?”
“왜?”
“엄마?”
“왜? 할 말 있어?”
엄마의 굵게 웨이브 진 단발머리가 살랑하고 넘어가며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큰 눈에 이지적인 콧날. 탱탱한 입술. 이제 오십대를 바라보는데 엄마의 얼굴은 삼십대 후반으로 볼만했다. 중학교 여선생치고 정기적으로 피부 관리며, 메이크업을 받고. 학교가 끝나고 꼭꼭 헬스장에 들려 런닝 머신을 한 시간씩 뛰고 왔다. 그게 다 아빠라는 든든한 배경을 만나서 가능한 거지만. 어쨌든 세영은 그런 엄마에게 말을 할까 망설이고 있었다. 좀 늦게 가도 되냐에 대해.
“얘가. 불렀으면 말해. 너 안 늦었니? 어머, 벌써 7시 30분이다. 너 빨리 먹고 일어나. 여보, 여보. 당신 오늘 9시 강의 전에 총장님 뵙는다고 안 했어? 빨리 서둘러요.”
아무래도 안 될 거 같다. 엄마에게 그런 요청을 했다가는 왜 그러냐는 질문이 따라올 것이고, 그러면 체육제에 대해 말해야 했고. 그렇게 되면 그녀가 맡은 경기도 말해야 했고. 그렇게 되면.......
-그러게! 누가 그런 학교 가랬니? 얘가 정말 별 걸 다 하고 있어. 당장 그만두고 언니한테 가!
이럴 게 뻔했다. 안되겠다. 이 방법은 무리수가 있었다. 세영은 남은 식빵 쪼가리를 접시에 내려놓고 일어났다. 일단 학교에 가서 생각해 보자.
“저쪽에서는 피구 연습하고, 저기에서 2인 3각. 여기는 여자 축구야. 이따 오후에는 여자 발야구 할 거니까 남아라. 우리 반 시간은 오늘이랑 수요일 체육시간 밖에 없으니까. 1학년이랑 맞춰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러니까 열심히 하자!”
구기중이 나머지 세반 선생을 뒤로 하고 크게 소리 질렀다. 그리고 각자 맡은 경기가 있는 구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세영은 옆쪽에 그려진 여자축구 라인에 다가가 섰다. 결국은 이렇게 되었다.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양호실에 가려다 담임한테 거절당하고 붙들려 나온 참이었다. 얘들은 자습을 안 해도 돼서인지 아주 신이 나서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공부시간을 빼앗겨 짜증이었지만, 이런 어색한 자리에 있는 게 더욱 짜증이었다. 안면 없는 1학년 여자애들이 세영을 엉거주춤하게 쳐다보고 있고, 또 같이 뛰게 된 반 얘들은 경계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어색한 자리와 조합을 어디서 찾아 볼 수 있을까?
“다들 뭐해? 1분 1초가 아까운데. 대충 얼굴 알았지? 그럼 연습 들어간다.”
구기중이 축구팀을 놔두고 어디 갈 리가 없었다. 세영의 꾀병을 일언지하 막아버릴 때는 확 얼굴을 긁어버리고 싶었는데, 이 쭈뼛쭈뼛한 상황에 딱 맞게 나타나 구해주다니. 아까의 충동은 사라졌다.
“우리 최강팀의 축구 우승을 위해 비밀 병기를 데려왔다.”
‘비밀 병기 같은 게 있으면 나를 빼고 그 비밀 병기를 쓰라고!’
세영은 무언의 외침을 구기중에게 보냈지만, 구기중은 실실 웃으며 누군가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윤태양. 이리 와라.”
세영의 눈앞에는 초코우유를 마지막으로 안녕,했던 그 남자애가 서 있었다.
‘자...잠깐만,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세영은 눈을 깜빡이며 상황을 정리하려는데, 그녀 옆에 서 있던 다른 여자애들은 꺄악, 꺄악, 소리를 질렀다.
“윤태양 알지? 축구부의 기대주, 태양이가 여자축구 코치해 줄 거다. 내가 제비뽑기는 잘 했지. 1반이 딱 뽑히더라니. 이것으로 우리가 누워서 떡 먹기로 우승컵을 드는 게 아니겠냐? 하하하하.”
“글쎄요. 그거야 선수들이 잘 해줘야......”
맞다. 그 녀석 목소리가 맞다. 한 달 가까이 지났는데, 목소리를 들으니 뚜렷하게 기억났다. 그 녀석의 낮은 목소리가. 얘들은 그 녀석이 입을 떼자마자, 더 꺅꺅 소리쳤다. 얘들은 민망하지도 않나. 당사자 앞에 두고 어떻게 저렇게 당당하게 소리를 치는지. 그 녀석의 모습에 한번, 여학생들의 반응에 한번. 세영은 자신이 꼭 이상한 세계에 발을 잘 못 디딘 것 같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태양아, 저 녀석은 이보배인데 골 실력이 괜찮다. 그리고 저기는 이세영. 쟤가 유일하게 2학년 체육 실기에서 100%승부차기 성공한 녀석이니까, 포지션 좀 잘 만들어봐.”
꺅꺅 소리가 멈추고 구기중부터 여자애들의 시선이 모두 세영에게 향했다. 마지막으로 그 녀석의 시선도. 세영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녀석의 눈빛이 세영에게 정확히 날아들었고, 잠시 서로의 시선이 얽혔다. 녀석은 살짝 웃은 거 같다.
“그래요? 그럼 공격수로 써야겠네요.”
태양은 세영을 보면서 가볍게 구기중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근데 그게 세영에게는 무겁게 들렸다. 이제 정말 이 상황을 탈출할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퍽.”
또다.
“미안, 공만 보고 가다가.”
근데 미안한 기운은 눈곱만큼도 안 보인다. 세영은 허벅지 부근에 묻은 잔디를 털어냈다. 벌써 세 번째다. 운동하다 보면 넘어지고 치이고 그러는 게 당연한 건데, 이건 뭔가 석연치 않다. 같은 편끼리 발 맞춰보는 시간인데 이건 서로 한번 맞춰보는 게 아니라, 본 시합마냥 격렬했다. 그것도 은근히 세영에게만. 태양은 공차는 걸 한번 시켜보더니, 1학년 4명과 2학년 4명을 섞어 두 팀으로 나눴다. 1학년 각각 한 명을 골키퍼로 선정하고, 나머지는 뛰라고 했다. 수비, 공격 뭐 이런 것도 없었다. 하기야 축구라는 그럴듯한 명칭이 붙었지만, 여자축구는 한마디로 공만 쫓아다니다 어쩌다 한 골 들어가면 이기는 그런 식이었다. 이것도 정말 어쩌다 나오는 행운이었다. 그래도 꼭 무슨 월드컵처럼 해보겠다고 여자애들은 이리저리 공을 따라 갔다. 잡으면 헤딩도 하려고 하고, 드리블도 하려고 했다. 그러다 결국 공이 라인을 넘어 흘러가거나, 누구 하나가 자빠져서 0대 0이 되어 승부차기로 넘어가는 거다. 아마도 태양은 그걸 노리고 있는 건가 보다. 라고 세영은 생각했다. 기껏 해야, 두 번의 연습에 여자애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할리도 없고. 혹시 모를 골을 대비해 골키퍼에는 체격이 다른 여자애들보다 큰 1학년 여자애 둘을 골키퍼로 세운 걸 보니, 확실히 감이 왔다. 그러므로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할 필요가 없는 거다.
“아얏.”
공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뛰던 세영의 뒤로 누가 퍽 등을 쳤다. 가속도가 실려 있어서 그런지 충격이 컸다. 다시 넘어지려는 걸 중심을 잡아 멈췄다.
“어, 미안. 미안.”
저쪽 편에서 뛰고 있는 수진이었다. 가냘프게 봤는데, 등이 따끔한 걸 보니 은근 통뼈가 분명했다. 쌜쭉 웃고 공을 따라 가는 얘를 보고, 이건 뭔가 아닌데. 라는 생각이 다시 솟아났지만 그 뭔가가 딱 꼬집어 보이지 않았다. 왼쪽 어깨 죽지를 주물러주고 공을 향해 뛰어갔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아침 댓바람부터 공을 쫓아 이리저리 뛰는 것도 힘들고, 자꾸만 자신 혼자 넘어지고 치이는 게 이상했다. 거기다 윤태양. 시합을 시킨 후로 아무 말 없이 잔디에 앉아 보고만 있는 얘가 신경 쓰였다. 세영은 공중에 뜬 공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데, 태양은 편안히 앉아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거다. 그 때처럼 뭐라고 소리라도 치면, 반발심이 생겨 부끄러운 생각 따위는 들지 않을 텐데. 너무 조용하니 이렇게 한심하게 왔다갔다 뛰는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넘어지는 것도, 공을 쫓아 수비고 뭐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도. 정말 빨리 들어가고 싶다.
“우리 이러지 말고, 친목도모 해야 하지 않겠어? 시간 얼마 남았어?”
“좀 일찍 끝나서 쉬는 시간까지 하면 한 이십분?”
“그럼 우리 매점가자. 1학년 니들 괜찮아? 통성명도 좀 제대로 하고 그래야지. 금요일까지 많이 볼 텐데. 내가 음료수 쏠게.”
“정말요? 네에~”
여자 축구 하고 싶은 사람 손 올리라고 할 때 제일 먼저 소리를 질렀던 서경이었다. 딱 나서기를 좋아하는 유형이었다. 세영은 우르르 몰려가는 얘들에게 빠져나와 수돗가로 갔다. 가만히 보고만 있던 태양이 0교시 십분 정도를 남기고 한 말은.
-수고했어. 잘하는데? 골은 못 넣어도 이런 식으로 골대까지 안 오게 잘만 막아줘도 승산 있겠어. 그럼 골키퍼는 지금 하는 얘들이 하는 게 좋은 거 같고. 나머지는 너무 공만 보고 쫓아가다가 같은 편끼리 충돌하지 말고. 시합 때는 상대편만 눈에 들어오겠지만. 힘들지? 오늘은 그만하고 그럼 당일에 보자.
그리고 태양을 부르는 구기중에게 갔다. 삼십분 동안 한 마디로 않다가 고작 한 말이 저거라니. 그럼 나도 코치하겠다고 세영은 속으로 씩씩댔지만, 다른 얘들은 또 꺅꺅거렸다. 멋있다나, 자상하다나, 뭐라나. 얘네 정말 왜 이러니? 아, 그러고 보니, 누가 그랬지. 한번 스쳐지나가기도 어렵다는 그 윤태양의 눈길을 받았단 말이냐!고. 아아, 니들이 지금 그 한번 스쳐 지나가기도 어려운 윤태양의 눈길을 받아서 그러는 거야?
-쏴아아아아아아
괜히 성이 났다. 졸졸 흐르는 수도꼭지를 끝까지 돌렸다. 콸콸콸 쏟아지는 물에 손을 받쳐 되는대로 세수했다. 앞머리도 젖고 체육복 상위 라운드 부분이 진하게 물들었다. 다섯 번쯤 얼굴을 적시니 기분이 한결 나았다. 생각해서 뭐해. 되는 대로 차다보면 끝날 텐데. 금요일만 참고 지나가면 돼. 하고 주머니에서 꺼낸 체크무늬 손수건으로 얼굴을 대충 닦고 발길을 돌렸다. 운동장에서 발야구와 피구연습 등을 끝낸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한참 뛰었더니 목이 말랐다. 혹시나 해서 주머니에 넣어 둔 천 원짜리가 생각났다. 매점에 가서 뭐라도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다, 서경이가 1학년 애들을 끌고 간 게 기억났다. 자판기라도 가서 뽑아야겠다. 교내에 두 개 있는 자판기는 식당 안과 1층 로비에 위치에 있었다. 여자 반으로 올라가는 동쪽 계단에 있는 신발장에 넣어둔 실내화를 꺼내 갈아 신고, 운동화를 집어 들고 일어서는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느낌이란 게 참 무서운 거라는 걸, 이럴 때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리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열심히 하던데.”
이 녀석은 말끔했다. 지친 기색이 없다.
‘하긴 뭘 한 게 있어야지.’
“그래?”
땀 한 방울 없는 깨끗한 모습에 울컥했다. 앞머리는 젖어 제멋대로 뻗어있고, 체육복도 젖어 축 쳐진 자신의 모습이 꼴사나웠다. 거기다 그 녀석 앞이라니. 이상하게 이 녀석 앞에서는 약점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첫 만남부터 꼬여서 그런가.
“이거.”
뽀로통하게 대꾸하는데, 그 녀석이 뭔가를 휙 던졌다. 아차, 하는 사이 세영은 들고 있던 신발을 떨어뜨리고 태양이 던진 물체를 받았다. **우유라고 쓰여 있는 흰 우유.
“영양보충제.”
세영은 흰 우유를 물끄러미 보다가 태양의 얼굴을 쳐다봤다.
“너무 잘 넘어지더라. 그거 먹고 금요일에는 넘어지지 말라고.”
눈을 깜빡깜빡하며 태양의 말을 반복해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옆으로 잔디밭에 넘어졌던 자신의 모습이 회상되었다. 얼굴이 엄청 화끈거렸다. 이 상황에서 뭐라고 말해야지? 세영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숙이고, 뜸을 들이다 떨어진 운동화를 집어 들었다.
“한기현 완전 멋있지? 어떻게 그 공을 다 받아?”
“아씨, 난 성희 완전 부럽더라. 짝이잖아.”
“2학년보다 1학년 남자애들이 더 낫지 않아? 완전 귀엽더라. 걔 누구야......”
여자애들 소리가 커졌다.
“그럼 다음에 보자.”
세영은 끝까지 태양을 볼 수 없었다. 대꾸도 못했다. 왜 그렇게 화끈거리는 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태양이 사라지고 여자애들이 실내화를 갈아 신고 들어갈 때까지 멍하니 태양이 던지고 간 흰 우유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나 흰 우유 못 먹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