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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쳤어.
정말 미쳤어.
진짜 미치지 않고서야.
아침부터 지금까지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되뇌는 말은 결국 이 세 개에 국한되어 있었다. 죽도록 마신 술 때문에 속이 쓰렸지만 그렇다 해서 어제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물론 기억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이유도 없지만.
핸드폰의 삐빅거리는 소리에 연우가 핸드폰 액정을 힐끗 쳐다보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문구가 깜빡이고 있었고, 그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얼굴 좀 보자니까. 나 할 말 있어.> 벌써 몇 번째 독촉이었지만, 연우는 무시하고 있었다. 아마 정우 역시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계속 독촉을 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물론 이미 그가 걸어온 세 통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애가 더 닳아 있을 터였다.
어제 일 따위 기억이 안 나는 척 연락하지 말라던 말 그새 잊었느냐 새침을 떨 생각도 잠시 했지만 그런 거짓말이 입 밖으로 술술 나와 줄 것 같진 않았다. 게다가 설사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말 몇 마디만 더 오가면 빤히 들통 날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마냥 무시만 하고 있기에는 뭔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빚지고 도망치는 신세도 아닌데 마치 그런 것 마냥 그의 연락을 피하는 꼴이 딱 그 모양새였고, 그 생각이 스쳐지나가자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느냐는 한탄 섞인 짜증이 밀려왔다.
“너, 짜증나.”
그 탓에 무작정 익숙한 번호를 손가락이 누르게 내버려둔 뒤, 상대가 기다렸다는 듯 벨이 채 한 번도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자마자 연우가 다짜고짜 짜증을 부렸다.
“어떻게 해 줄까?”
쿡쿡대는 웃음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건너왔다. 연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지구에서 사라져. 참고로 나 장난 아니거든. 네 얼굴 정말 보고 싶지 않아.”
심각한 어조로 연우가 요구했다.
“거짓말. 눈 빠지게 내 연락만 기다린 게 아니라 내 얼굴도 보고 싶었잖아. 아니면 아니라고 말 해봐.”
“아냐.”
정우의 단정에 연우는 괜한 오기가 생겼다. 대꾸를 하는 동안 바짝 마른 입술을 저도 모르게 혀로 적셨다.
“너 입술에 침 바르고 그 말 뱉은 거 눈에 보여.”
“그 말하고 침 발랐어.”
“뭐 거꾸로 말한다고 토마토가 다른 이름이 되나?”
“뭐 그렇죠, 거꾸로 말한다고 토마토가 다른 이름이 될 리는 만무하지요. 아주 대단한 발견을 하셨습니다. 노벨상 후보에 이름이라도 올려드릴 깝쇼?”
속이 비틀린 연우가 잔뜩 이죽거렸다.
“정 연 우.”
거기에서 그만 하라는 의미로 그가 연우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했다.
“그렇게 내 이름 말 안 해도 나 정연운거 다 알아. 내가 이렇게 나올 거 모르고 연락하란 거 아니었잖아. 어느 정도 예상한 거 였잖아.”
연우가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빈정거림을 왜 끝까지 못 받아주느냐는 투정을 부려왔다.
“전화로 이러지 말고, 우리 저녁에 좀 만나자.”
“싫어. 널 만날 이유 없어.”
딱 잘라 말하는 순간 팔을 톡톡 건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연우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은정이 자신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왜 그러냐는 물음을 입만 벙긋거려 물어왔다. 연우는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입 모양으로 잠깐만 이란 단어를 그렸다.
“나 할 말 없을 때, 너 할 말 있다고 해서 내가 그냥 전화 받아줬던 것처럼, 내가 볼 이유 있으니까 너 그냥 나와.”
“아니, 너 만나는 거 나 편하지 않아. 알잖아, 나한테 너 친구 아냐. 그만 하자는 거 그냥 해 본말이 아니라 진심이야.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마. 네 이름조차 내게 들리게 하지 마.”
“집 앞에서 기다릴게.”
“거야 니 자유지만, 널 못 본 척 지나는 것 또한 내 자유야.”
막무가내로 나오는 그에게 그래봤자 헛수고라는, 그냥 지나쳐 안으로 들어갈 거라는 통보였다.
“내가 보면 돼.”
“뭐, 넌 네 맘대로, 난 내 맘대로 하면 돼. 지금 내가 너한테 양해도 안 구하고 전화를 그냥 끊어버리는 것처럼.”
연우가 자신의 말대로 전화를 그냥 끊어버렸다. 그리고 채 2초도 지나지 않아 전화벨이 울리며 액정에 정우의 핸드폰 번호가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연우는 전화의 배터리를 확 빼 버리더니 책상 서랍에 넣고는 문을 쾅 닫아버렸다.
“커피나 한 잔 할까?”
잠깐,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은정의 존재를 잊고 있던 연우는 갑작스런 제안에 고개를 돌려 은정을 쳐다봤다. 쭉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은 은정이 씨익 웃더니 뒤돌아 탕비실로 성큼 걸어갔고, 연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언니가 타는 거지?”
“지금만. 난 네가 타 주는 게 더 맛나드라.”
“자, 이제 말해 봐.”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컵을 손에 쥐는 순간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의미 없는 농담을 나누는 동안 은정이 탄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후후 불어가며 연우가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담았다. 자신이 앉은 반대편 테이블에 은정이 자신의 것을 올려놓으며 마주앉았다.
“딱히 말 할 건 없는데.”
연우가 일단 슬쩍 오리발을 내밀었다.
“웃기지 말구.”
하지만 물론 은정은 속아 넘어가는 척 조차 하지 않았다.
“할 말 있다고 좀 보자네.”
“그 놈?”
연우는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다.
“연락도 없다더니 갑자기 왜?”
“만나서 하겠다고 말 안 해서 나도 모르겠어.”
연우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담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만나기로 한 거야?”
“아니, 집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거 그냥 못 본 척 집에 들어갈 거니까 네 맘대로 하세요, 그랬어.”
“기집애, 승질은.”
은정이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으며 팔짱을 꼈다. 그러더니 연우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그리고 또?”
혹시의 의미가 아니라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게 또 다른 이야기를 요구했다. 연우는 그런 은정의 모습에 그냥 피식 웃어버렸다. 누가 그녀의 눈치를 따라가랴 싶었던 탓이었다.
“하여튼 귀신이라니깐. 미아리에 자리 하나 정말 봐줘야겠어.”
“뜸 너무 들이면 맛없다.”
“어제 만났어. 술 완전 취해서 걔가 집에 데려다 줬어.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다른 말은 안 하디?”
은정의 요구는 끝나지 않았다. 목이 타는 느낌에 연우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물었다.
“내 연락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대.”
남 얘기하듯 툭 내던진 말이었지만, 연우는 아직도 어제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그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물론 술에 취해 정신을 반 이상 놓고 있던 상황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 말을 직접 듣던 그 느낌, 그 떨림은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은 연우에게 약간의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게 만드는.
“그리고?”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연우의 귓가에 또 다른 뭔가를 요구하는 듯 한 은정의 물음이 들려왔다. 계속 그 다음만을 찾는 모양을 보니 아직 만족할 만한 뭔가를 찾지 못한 듯 했다.
“뭐, 그게 다야. 나 술 떡 됐거든.”
하지만, 하늘에 맹세코 그게 전부였다. 은정의 계속되는 요구에 연우가 드디어 제동을 걸었다.
“너 오늘은 나랑 술 먹자.”
한참을 묵묵히 커피만 마시던 은정이 따뜻한 커피가 다 식은 뒤에야 한 말은 제안이라기보다는 통보에 가까웠다. 연우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은정을 쳐다봤다.
“뜬금없이 술은 왜?”
“아님 밥 먹을래?”
어쨌건 집에는 늦게 가란 소리였다. 연우의 미간은 여전히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대체 갑자기 왜 이르세요?”
“혹시 네가 밤늦게 집에 갔는데 그 때까지도 집 앞에 그 놈이 있다면, 너한테 마음 있는 거니까 무슨 말하는지 한 번 들어보라구.”
“싫어. 더 이상 맘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관둘래.”
“언니 말 들어. 내 말 틀리면 너 성공할 때까지 소개팅 책임져 준다.”
결국 마지막 말에 혹해버린 연우는 은정과 저녁을 해결한 뒤 가볍게 술 몇 잔을 걸친 뒤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하철 역사를 빠져나온 뒤에야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연우는 픽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집 앞에서 기다리겠다더니 개뿔이었다. 왜 이리 늦느냐, 빨리 안 오느냐는 독촉은커녕 여태 문자 하나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냥 해 본 말이지 싶었다. 그런 말에 흔들려 일부러 늦게 귀가하는 꼴이라니. 연우는 스스로의 한심함에 혀를 끌끌 내찼다. 어느 쪽 때문에 더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할 말 있다 잠깐 만나자던 말을 거절 한 것, 아니면 집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에 일부러 집에 늦게 돌아온 것.
“기다리겠다더니 순 거짓말쟁이.”
“그래서 언제까지 기다리나,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궁금해서 일부러 늦은 거야?”
혼자 중얼거리는데 갑자기 들려온 말도 말이지만, 툭 튀어나오듯 나타난 그의 모습에 연우는 문자 그대로 소스라치게 놀라긴 했으나,
“아, 깜짝이야.”
라는 단조로운 한 마디의 건조함만으로 놀랐다는 감정 표현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 못 한 것처럼 발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고, 예상치 못한 연우의 반응에 정우가 멈칫한 시선으로 연우의 뒤를 쫓기만 하다가 큰 보폭으로 성큼 성큼 걷기 시작했다.
“봤음 아는 척 안 해?”
바로 옆에서 붙어 걷게 됐을 때에야 정우가 투덜거리는 어조로 말을 건넸고, 연우의 반응은 그저 못 본 척, 못 들은 척 이었다.
“야, 이젠 인간 취급도 싫다는 거야?”
연우의 무반응을 꾹 참아낸 정우가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하고, 무슨 일이든 일단 시작을 했으면 적어도 삼 세 번은 해 봐야하며,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는 없다고 한 옛 말을 되새겼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하냐는 비아냥거림이 이어졌다. 정우가 옷깃을 잡아당기자 그에 반응을 하는 것처럼 잠깐 멈칫했던 연우가 자신이 옷깃에서 손을 떼자마자 여전히 없는 사람 취급하며 제 갈 길만 바삐 찾아갔기 때문이었다.
“너 어제 술주정한 게 창피해서 이러는 거지?”
“…….”
“그게 아니면, 너 나한테 먼저 키스한 게 민망해서 이러는 거지?”
“…….”
“그거 아니면, 분명 너 나한테 먼저 고백한 게 부끄러워서 이러는 거야!”
두 번의 물음 끝에 정우가 단정 지어 선언했다. 몇 번의 불편한 시선을 던졌던 것을 제외한다면 물론 연우는 끝끝내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러는 사이 연우의 집에 다다랐다는 걸 깨달은 정우의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야, 정연우.”
그 탓에 소리를 지른 게 아니라 고함을 친다고 표현을 해야 할 지경이었지만 속이 답답해 금방이라도 그 속이 터져 버릴 정도로 연우는 무반응이었다. 그러더니 대문 앞에 도착한 순간 핸드폰을 꺼내들어 쉴 새 없이 버튼을 눌러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놀림을 멈춘 순간, 핸드폰 액정을 정우의 코앞에 들이댔다.
<나도 전화로 했으니까 너도 굳이 할 말 있음 전화로 해.>
정우의 시선이 핸드폰에서 도로 연우의 얼굴로 돌아오자 연우가 핸드폰 폴더를 탁 덮더니 돌아서서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연우는 등 뒤로 손만 돌려 대문을 닫은 뒤 그대로 대문에 기대어 크게 한 숨을 내쉬었다. 말 한 마디, 시선 한 번 안 건네기 위해 어찌나 공을 들였는지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지만, 뭐 결국엔 해냈다.
마음을 묻기로 했으면 그를 흔들어 놓지 않기로 했으면, 그가 보여도 보이지 않는 척, 그의 목소리가 불러 세워도 안 들린 척, 그렇게 우연이라도 마주치면 모르는 척 해야 겠다는 자신의 생각을 실천한 것이다.
연우가 대문에서 몸을 떼어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한 발 디딘 순간,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조용한데다 한 밤중이라 그런지 평소에는 예쁘게만 들렸던 소리가 거대한 소음처럼 느껴져 연우는 당장 벨소리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며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가 왔다는 사실을 알리며 반짝거리는 가운데 그의 번호가 화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
폴더를 열어 통화키를 누르고 귀에 핸드폰을 가져다 댔지만, 연우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잠깐 종료키에 손이 닿았지만 끝내 누르지 못 한 건, 얼마 전 자신의 전화를 받기만 했던 그의 행동이 생각난 탓이었다. 어쨌건, 전화를 하라고만 했지 대답을 해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연우야, 듣고 있어?”
“…….”
“그래, 듣기만이라도 해.”
그나마 다행이라는 투의 말이 수화기를 통해 연우에게 전달되었지만, 연우는 그 나지막한 말이 대문 너머에서도 동시에 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정우도 자신의 벨소리를 들었을 테니, 자신이 대문 너머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을 것이었다. 연우는 도로 대문에 자신의 몸을 기대었다.
“처음엔, 당황했어.”
정우가 대문에 몸을 맡기며 말을 꺼냈다. 밤바람이 차다기보다 시원하다 느끼며 하늘을 쳐다보는데 까만 하늘이 꼭 자신의 심정 같아 답답한 마음에 이내 사람의 발길이 거의 뚝 끊긴 뒤 가로등 불빛만이 서성이는 거리를 무심히 쳐다봤다. 그제야 뭔가 자신의 심정에도 한 줄기 빛이 스며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
“나한테 넌 그저 편한 동네 친구 같은 그런 거였으니까. 같이 있으면 좋고, 안 보이면 그저 가끔 잘 있겠지, 잘 지내겠지, 그러다 문득 보고 싶어지면 잠깐 만나 차 한 잔, 영화 한 편 같이 보고, 다른 사람한테 하기 곤란한 얘기가 생기면 술 한 잔 기울이며 그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근데 네가 시작하고, 내가 되돌린 그 키스가 화근이었어.”
연우는 간신히 종료버튼을 누르고 싶은 마음을 다독였다. 이제 겨우 시작한 이야기에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차피 듣기만 할 작정이니 마지막까지도 이 상태라면 그 때 미련 없이 폴더를 탁 닫고 안으로 들어가면 그만인 탓이었다.
“그리고 처음엔 네 제안대로 우리가 아니라 나와 너의 모르던 사이로 돌아가 아는 척 안 하려고 했어.”
그러지 그랬느냐는 말이 금방이라도 툭 뱉어질 것 같았지만, 연우는 간신히 집어삼키고 자신의 마음을 다독거렸다. 어차피 그만 둔 사이인데, 그 까짓 거 어떤 말을 하던 무슨 상관이냐, 끝 간 데까지 가 봤자 우리 역시 그만 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이라도 이미 자신이 먼저 한 얘긴데 겁날 게 뭐냐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근데 연우야…….”
“…….”
“연우야……, 미치겠더라 내가. 처음엔 그냥 저냥 우리 그런 적도 많았으니까 참을 수 있었는데, 그렇게 이 주가 지난 뒤부터는 아주 핸드폰을 달고 살게 되더라. 문자라도 하나 오면 혹시 너한테 온 걸까, 일하던 중간에 핸드폰 벨소리라도 울리면 혹시 너한테 전화가 온 걸까. 내가 먼저 연락하려고도 몇 번이나 애는 썼는데, 잘 지내냐는 문자 하나 보내는 게 왜 그리 어렵던지.”
가만 듣고 있던 연우는 왠지 모를 기대감에 심장이 떨려왔다. 그래서? 란 말이 목 끝까지 나왔지만, 너무 오래 참았던 탓인지 끝끝내 말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그러고 난 뒤에는 모든 여자가 다 너로 보였어, 오죽하면 간난쟁이 애기만 봐도 네 생각이 났을까. 근데 널 봐도 못 본 척 해야 했을 땐, 그 땐 정말 돌겠더라, 네가 바로 내 코앞에 서 있었는데…….”
계속 이어지는 정우의 말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연우는 아직 감조차 잡지 못 했다. 그래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아니 할 말이나 있는지 머릿속을 찾아 한 참을 헤매었지만, 역시나 아직은 아무것도 없었다.
“연우야, 혹시…… 말이야. 보고 싶고, 그립고, 궁금하고, 걱정되고, 자꾸 생각나고, 그래서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은 이런 기분이 사랑이라면. ……연우야……, 정연우. 나 너…… 사랑하는 거…… 같다.”
탁,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고 생각한 순간, 통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짧은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모든 움직임을 멈춘 채라 연우는 스스로가 전화를 끊은 건 아니라고 결론을 지었다. 그렇다면? 연정우였다. 문득 어떤 움직임이 들려오는 것 같아 연우는 숨소리조차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 같았다, 집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발소리. 연우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당장 몸을 돌려 급하게 문을 열었다. 천천히, 자신에게서 조금씩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이 눈에 잡힌 순간, 그를 붙잡아야 한다는 급한 마음에 입을 열었지만 여전히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흠흠.”
헛기침을 했는데, 소리가 너무 작았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하려는데, 그의 걸음이 문득 멈춰지는 게 지켜보던 눈에 들어왔다.
“야, 대답은 듣고 가야지!”
생각보다 목소리는 컸지만, 다행히 발음이 꼬이거나 쇳소리가 나지는 않았다. 스스로 만족해하는 동안, 정우가 몸을 돌렸고 연우가 도로 집 밖으로 한 걸음 나왔다, 그리고 그에게로 또 다시 한 걸음 걸었다.
“너 말 한 거 맞지?”
연우가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아마 깜깜한 어둠에 묻힌 상태라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우가 한달음에 다시 그녀의 앞에 달려와서 멈춰 서더니, 연우를 끌어당겼다.
“너, 나 책임져야 돼.”
그의 품에 안겨있던, 연우가 고개만 들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내가 왜?”
말도 안 된다는 듯 반문을 했다.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좋다고만 말했지, 그 외의 어떤 말은 한 적 없다.
“미주씨랑 헤어졌거든.”
“헤어졌어?”
“모든 여자가 다 너로 보이는 데 더 이상 어떻게 만나?”
당연한 것 아니냐는 대꾸에
“그래도, 내가 왜 널…….”
여전히 발뺌을 하려는데 그의 입술이 연우의 입술을 막았다. 따스한 느낌. 연우가 그 느낌을 좀 더 맛보기 위해 정우의 목에 팔을 감는 순간 키스가 끝났다. 아니, 그의 입술이 귓불로 옮겨갔다.
“빨리 말 해, 책임지겠다고.”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 가쁜 숨이 토해졌지만, 그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것인지 분간이 가지는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자신의 얼굴을 따라 움직이는 그의 입술의 따스함과 부드러움을 느끼기에도 벅찬 탓이었다. 그러다 그의 입술이 입가에 다가온 순간 연우가 그 입술을 잡기 위해 살짝 얼굴을 돌렸지만,
“대답하기 전엔 절대 안 돼.”
라며 그가 그녀를 밀어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입술은 그녀의 얼굴을 더듬어 내리고 있었다. 내쉬어지는 숨조차 떨릴 정도로 온 몸이 미세하게 떨렸고, 살짝 눈을 뜬 연우가 그의 입술을 찾았지만 그녀의 의도를 알아챈 그가 재빨리 입술을 떼어냈다. 그녀가 못 마땅한 시선으로 그를 흘겨보다가,
“이미 들었잖아.”
투덜거렸지만 원하는 대답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부족했다.
“아쉬워.”
뺨에 와 닿은 그의 입술이 미소 짓고 있었다.
“얄미워.”
“밤 샐 거지?”
정우가 의기양양하게 물어오며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목덜미를 살짝 물었다.
“키스해 줘.”
연우가 요구했지만,
“사랑해.”
못들은 척 정우가 재촉했다.
“나도.”
연우가 정우의 고백에 슬쩍 묻어가려 하자
“으응?”
나지막한 중얼거림으로 계속해보라며 정우가 다시 한 번 연우의 목덜미를 살짝 물어 당겼다.
“사랑한다고.”
수줍은 한 마디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정확히 그녀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그의 입술이 여전히 미소 짓고 있다는 사실을 맞닿은 입술을 통해 느낀 연우가 미소를 되돌렸다.
영혼이 통하는 입구.
맞닿은 입술에서 마찬가지로 연우의 미소를 느낀 정우가 문득 사람의 영혼이 통하는 곳이 왜 입이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순간, 문득 그녀의 영혼과 자신의 영혼이 만난 듯 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이보다 더 황홀한 착각은 세상에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사랑해.”
입술을 떼지도 않고 그가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그건, 자신의 영혼이 연우의 영혼에게 하는 고백이었다. 그렇게 정우가 그녀에게 하는 키스는 밤이 깊어갈수록 점점 더 깊어져만 갔다.
*
미리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 ^^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1-13 18:15)
계속 잘해 !
즐겁게 감상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연말 잘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