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2.


“바빴어?”


테이블 맞은편에 앉으며 정우가 물었다. 마지막으로 통화를 한 날이 그가 소개팅을 하던 그 날이었으니까 정확히 2주 만이었다. 연우는 그저 피식 하고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바쁘지는 않았다. 바쁠 일 따위도 없었다. 단지, 그와 마주치기 싫었을 뿐이었다. 그의 연락도 피하고, 하다못해 안부문자조차 못 본 척 무시했었다. 참다 참다 못 참은 그가 나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겠다며 시간과 장소를 정한 문자를 보내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오늘도 이렇게 마주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물론 무시해버리면 그만이기야 했지만, 그 자신이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질 줄 아는, 평소 자신이 알아오던 그런 정우가 맞는다면 분명 그녀 자신이 나올 때까지 그는 정말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런 성질머리를 알고 있기에 무작정 무시하기에는 정우에게 한없이 약한 연우였고, 심지어는 자신이 먼저 약속장소에 와서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는 상황을 연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연우는 따뜻한 블루 마운틴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씁쓸한 웃음이 입가에 머무르는 것을 느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사실 창밖은 별 볼일 없었다.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살 속을 혼자서 바쁘게, 혹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느긋하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뿐이니까.


“그냥, 내가 보고 싶어 죽기 직전이었다고 말 해.”


밋밋한 어조로 연우가 농담을 건넸다.


“네가 보고 싶어 죽기 직전이 아니라 거의 죽다 살아났다는 게 맞는 표현이야.”


가벼운 농지거리에도 연우의 가슴이 팔딱 팔딱 뛰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엎드려 절 받는 것도 짜증나.”
“진심이야.”
“피, 마음은 딴 데 있으면서.”


억울하다는 정우의 말에 연우는 야유를 던졌다. 그저 장난질일 뿐이지만, 그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심장이 뛰는 건 본능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었다. 연우는 다시 한 번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담았다.


“뭐 안 마실 거야?”
“너랑 같은 거 아까 들어오면서 갖다 달랬어.”


정우의 대답에 연우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침묵. 연우는 애써 할 말을 찾으려 애쓰지 않았다. 늘 그래왔던 일이었기에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었고, 그 침묵마저도 편안히 느꼈던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불편해서 거북스럽기까지 한 느낌. 이런 침묵이 불편할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기에 연우는 지금의 이 느낌들이 생소하기만 했다. 물론, 그건 언제나 둘 사이에 화제가 거의 끊이질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만남을 시작한 이후로 오늘까지 침묵이 이렇게 길게 지속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별 일 없었지?”


흐음, 하고 한 숨을 내쉰 그가 먼저 그간의 안부를 물었지만, 왠지 어색하게 다가왔다.


“늘 지루하냐고 물어야 맞는 말 같은데?”
“밥은 제 때 먹고 다녀?”
“요새도 술독에 빠져 사느냐고 묻고 싶은 게 아니라?”


정우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이제 그만해야 하지만,


“누가 너 건드렸어?”
“그냥, 너 왜 이리 시비냐고 물어야 되지 않아?”


연우는 그만두지 못했다.


“그래, 너…….”


마침 주문한 음료를 가지고 온 아르바이트생 때문에 정우가 하려던 말을 중단했다. 뭐 빤하게도 너 왜 이리 시비냐는 되물음이었을 거다. 아르바이트생이 음료를 세팅할 동안 정우의 질문에 대답을 준비할 시간이 잠시나마 주어지긴 했지만, 연우는 어떤 대답도 생각해 내지 못했다. 뭐라고 한단 말인가, 뜬금없이 난 너 좋아하는데 네가 다른 여자 만나서 심술부리는 거라고?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게 뭔데? 이 위태로운 관계마저도 끊어버릴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말을 꺼낼 용기나 있어?


“미안, 요새 그냥 신경이 좀 날카로워서 그래.”


물론 그럴 용기 따위 있지도 않았다. 그 탓에 아르바이트생이 도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간 뒤 연우는 정우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선수를 쳤고, 정우의 미간에 잡혔던 주름이 사라졌다.


“힘든 일 있음 이 오빠에게 말 해. 뭐든 다 처리해 줄게.”


“그렇게 자신하지 마. 네가 감당 못 하는 일도 있을 수 있으니까. 근데 보자는 이유가 뭐야?”


연우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머금으며 성질 급하게 용건을 물었다. 커피 탓일까? 입 안이 쓰게 느껴졌다.


“으응, 다른 게 아니라…….”


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 폼 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랍쇼, 볼이 살짝 붉게 물들기까지 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듣기도 전에 거부감이 먼저 생겼다. 연정우가 이렇게 수줍어하는 모양은 처음 보는 거라 두고두고 우려먹으며 놀려댈 수 있는 건더기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왜 이러는지 알 듯 한 느낌에 이런 모양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기분이 정말 나빠지려 하고 있었다.


“뜸들이면 할 말 없는 걸로 간주하고 나 갈래.”
“야, 야 너 못 본 새 성질 급해졌다?”
“할 말 없다는 말이지?”


연우가 옆에 있는 의자에 놓아둔 가방을 집어 들며 일어서려고 몸을 움직이자 그보다 좀 더 빠른 동작으로 정우가 가방을 도로 빼앗아 자신의 의자 옆에 놓고 그녀를 자리에 도로 앉혔다.


“나, 미주가 좋아.”


그러더니 순식간에 더 이상은 참고 기다리기 힘들다는 듯 뱉어버린 말. 그 즉시 연우는 자신이 속해 있는 세상의 모든 게 일시에 정지해 버린 듯 한 착각에 빠졌다. 불안하다고 했잖아, 마음에 들지 않고, 기분이 정말 나쁘다고 했잖아.


“내가 알고, 동시에 네가 아는 사람 중에 미주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니? 참고로 내 친구들 중 미주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지만.”


연우는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웠다.


“아, 이름 말 안 해줬니? 맞다, 얘기할 틈이 없었지. 왜 나 소개팅 했던.”


바보, 그걸 꼭 말로 해줘야 아니? 내가 그렇게 머저리로 보였어?


“근데 어쩌니, 난 미주가 아닌데.”


연우가 고백은 본인에게 해야 하는 거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잠깐, 나 손 좀 씻고 올게.”


그러고는 잠시 자리를 피해 화장실로 도망을 갔다. 더 이상 그 앞에 앉아 태연히 그를 쳐다볼 자신이 없었던 탓에 조금이나마 마음을 추스를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화장실로 도망을 친 순간 연우는 서영에게 SOS를 쳤다. 다시 그에게 돌아가면 그의 앞에서 그의 연애상담을 해 주며 무심한 태도로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어야 하는데, 연우는 자신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며 그러고 앉아 있을 정도로 용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길게 느껴지는 신호음의 끝, 주변의 시끄러운 소음에 묻힌 서영의 작은 목소리가 크고 똑똑하게 들려왔다.


“까닭 묻지 말고, 5분 있다가 나한테 전화해서 급한 일이라고 좀 보잔다고 말 해.”
 


 


 


 


 


-어떻게 고백을 해야 할까? 이런 기분 처음인 것 같아. 그냥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난다니까.


그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연우가 화장실에서 돌아오자마자 물어오며 주저리주저리 떠들었었다. 화장실에서 하릴없이 3분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왔던 덕분에 정우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꺼낸 첫 번째 말의 끄트머리에서 연우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잠깐만, 하고 전화를 받았던 연우는 그 순간만큼은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받은 어느 여배우 못지않은 숨은 연기 실력을 십분 발휘해, 화들짝 놀라는 표정 연기를 선보이며 금방 가겠다는 대꾸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정우에게


-어쩌지, 서영인데 무슨 일 있나봐. 애가 울어서…….


굳이 가야할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자신의 통화를 옆에서 다 들었던 탓에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가야 하는 상황이란 것을 알 테니까 말이다. 정우가 다소 걱정하는 표정으로 빨리 가보라고 말을 할 때, 연우는 거의 죄책감을 느낄 뻔했다. 하지만 그때는 자신의 코가 석자인 상황인지라 연우는 정말 급하다는 듯 재빨리 가방을 챙겨 커피숍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서영에게 전화해 늘 만나던 술집에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로 했다.


피식.
좀 전의 상황을 회상하며 연우가 실소하는데,


“뭐냐, 그 웃음은.”


어느새 맞은편 자리에 앉으려던 서영이 꽤 불편한 기색으로 시비를 걸었다.


“왜 그런 일을 벌이게 됐는지에 대한 웃음.”


연우가 빈정거렸다.


“그니까, 뭐냐구.”


답답하다는 듯 서영이 대답을 재촉했다. 


“걔가 미주가 좋대.”
“걔는 누구고, 미주는 누군데?”
“나한테 걔는 걔밖에 더 있겠어? 미주는 소개팅 한 애고.”


씁쓸하게 내뱉으며 연우가 잔에 따라놓은 술을 한 번에 비워냈다. 서영이 엎어져있던 잔을 들어 술을 채운 뒤, 연우의 빈 잔도 채워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잔을 금세 비워내며 짐짓 심각한 투로 물었다.


“오늘 먹고 죽을래?”
“회사 가야지.”
“까짓, 제 껴 버리면 되지.”
“넌 늘 느끼는 거지만, 세상사는 거 참 편해 보여.”
“내 얘기하자고 이 시간에 널 만난 거 아니다, 정연우.”


어느새 비워진 잔에 다시 술을 채워 넣으며 서영이 꽤 진지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앞으로 어쩔 거야?”


연우가 갑작스런 물음에 그저 피식거렸다. 뭔가를 곰곰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또 피식 씁쓸한 웃음을 뱉어내고는 잔에 남아있던 술을 툭 털어 마셨다.


“둘 중 하나지, 모르는 척 지금처럼 지내던가, 드러낸 뒤 예전처럼 모르는 사람이 되던가.”


여전히 피식거리며 연우가 중얼거렸다.


“어느 쪽이든 상처겠다. 넌 왜 이리 항상 어렵게만 가니?”
“그러게나 말이다, 뭐하나 쉬운 게 없네.”


한숨 섞인 어조로 서영의 말에 동의하는 말을 꺼내던 숨이 거칠어지는가 싶더니, 금세 그 큰 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너무 갑작스런 모습에 서영이 놀라는 것도 잠시 이내 테이블에 있던 휴지를 건넸다.


“그래, 울어야지. 실컷 울어.”
“난, 모르겠어. 어떡해야해? 확 고백을 해버릴까 싶다가도, 그냥 모르는 척 묻어버릴까 싶어. 정말 미치겠어.”
"빌어먹을 놈. 망할 놈. 진작 이따위 만남 관두라고 애초에 널 말렸어야 했는데. 미안, 내가 그러질 못했다. 내가 그랬으면, 너 지금 이런 일 따위 안 겪어도 됐을 텐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서영이 연우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연우를 품에 안고 다독였다. 한 번 터진 눈물이 멈추는 법을 잊기라도 했는지 연우는 끊임없이 울었다. 진작 말릴 걸, 처음 네 맘대로 하라며 방치한 걸 이제와 후회한 들 무슨 소용이랴 싶긴 하지만, 어쨌건 서영은 끝없이 우는 연우를 달래며 자책했다. 왜 처음부터 그런 흐지부지한 관계를 모르는 척 방치했는지, 결국 이렇게 될 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못 본 척 외면했는지. 생각할수록 후회뿐이었다.


“그래, 니 말 맞아. 빌어먹을 놈. 망할 놈. 못된 놈. 못난 놈.”


연우가 애써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내며 말하다 체념한 듯 웃어버렸다.


“근데 있잖아, 그래도 그 망할 놈이 좋아. 나 정말 미쳤나봐.”
 


 



“그걸 왜 나한테 묻니?”


연우가 수화기에 대고 날카롭게 따져 물었다.


“같은 여자니까 넌 알 것 같아서.”
“같은 여자라도 사람이라, 열길 물 속 알아도 한 길 사람 속 모른다는 것처럼 그걸 내가 어찌 장담하듯 너한테 말해주니? 그리고 그 미주씨, 난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다!”
“그러지 말고, 너라면 어떨 거 같은 지만 말해 주라.” 
“네 일 네가 알아서 해.”
“야아, 그러지 말구. 응?”
“네가 알아서 하라구. 내 말 못 알아들어? 난 모르니까 네가 알아서 해.”


신경질이 나 눈물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정 연우, 너 오늘따라 비싸게 군다. 그르지 말구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친구? 누가 너랑 친구하고 싶대? 연우가 친구라는 단어에 결국 울컥했다.


“모른다고 몇 번 말해야 돼? 몰라, 모른다구!”


참다 못 한 연우가 그만 버럭 화를 내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런 일은 처음인지라 연우의 뜻밖의 행동에 정우가 적잖이 당황했는지 전화가 끊긴 뒤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야 전화벨이 다시 울렸고 연우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망설임 없이 그냥 뚝 끊어버렸다. 물론 이렇게 그의 전화를 끊어버리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사실에 또 한 번 당황했는지, 전화가 다시 울리기까지는 처음보다 시간이 좀 더 걸렸고, 핸드폰 액정에 정우의 이름이 또 한 번 떠오르는 순간, 연우는 신경질적으로 배터리를 빼버렸다.


어떤 이벤트로, 어떤 분위기에서 어떤 멘트로 고백을 하면 좋은 지 얘기 해 달라고? 넌 같은 여자니까 어떨 거 같은 지 말해 달라구? 무릎을 세워 가슴 쪽으로 끌어당긴 채 정우가 한 말을 곱씹어보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감히 나에게 그런 걸 물어올 수가 있느냐고 성을 내던 순간도 잠시, 연우는 금세 그라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자신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그를 대했는지 알지 못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말이다.


순간 씁쓸한 미소가 입가를 점령했다. 여전히 그의 모든 행동을 합리화시킬 명분을 찾고, 상황에 적당히 꿰어 맞춘 뒤 그를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려는 자신을 본 순간이었다. 절대 그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눈물이 찔끔 또 베어져 나오려는 순간, 연우는 자신의 방으로 쏟아지는 뜨거운 햇살을 느꼈다. 화창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날이었다. 집안에 들어앉아 있어봤자 울기 밖에 더 하겠냐는 생각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최근 읽기 시작한 소설책과 MP3, 핸드폰을 챙겨들었다.


 


집 근처 공원의 벤치에 앉아 내리쬐는 햇볕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자니, 몸이 노곤해지는 게 금세 나른해졌다. 그 탓에 들고 나간 책은 펴지도 못 한 채 무릎 위에 올려두고 눈을 감았다. 바람까지 살랑거리는 게 조금 전까지 흥분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느낌이었다. 연우는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장단 맞추듯 고개를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찾았다!”


이어폰이 빠졌다고 생각한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연우는 감았던 눈을 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씨익 웃는 그의 얼굴이 저녁 햇살에 눈부셨다. 가벼운 티셔츠에 흰색 면바지, 스니커즈 차림으로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눈으로부터 전달되어 뇌리에 깊숙이 박혀졌다.


“여긴 어떻게 알구 왔어?”


아무렇지도 않다는 그 표정이 밉다는 생각에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리 곱지 않았다.


“집에 갔더니 어머니께서 너 갑자기 책 챙겨들더니 나가더라고 하시기에. 너 가끔 책 챙겨들고 여기 오잖아, 그래서 혹시나 하고…….”
“왜?”


왜 집에 갔느냐, 왜 여기까지 찾아왔느냐를 시작으로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헤매었지만 연우는 압축해서 물었다. 정우가 벤치의 빈자리에 앉는 순간, 그의 행동을 빤히 쳐다보던 연우의 머릿속에 최근 방송되던 광고의 카피가 떠올랐다. 옆에 자리 있느냐 물으며 자리에 앉는 남자 후배에게 속으로 대꾸하던 여자 선배의 멘트, 방금 찼어.


“전화 그렇게 끊은 적 없잖아, 안 받은 적 없고, 전원까지 꺼버린 적 없고.”
“그래서?”
“걱정되잖아, 네가 갑자기 그러면.”


걱정된다는 그 말에 마음이 설레는 것도 잠시였다.


“내가 네 종이야? 네 전화면 그렇게 받아선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그런 게 아니란 거 네가 더 잘 알잖아. 왜 이렇게 삐딱하게나와?”


연우는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리고 깊게 한 숨을 내 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이내 열을 식히기라도 하는 듯 양 볼을 톡톡 두들겼다. 그러다가 정우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너 왜 여기까지 쫓아와서 시비야? 전화로 모자랐던 거야? 왜 여기까지 와서 날 못 살게 굴어?”
“말은 바로 하자, 시비 거는 건 너잖아.”
“그래, 시비 거는 건 나라고 치자. 내가 시비 걸게끔 여기 온 사람은 너야, 그냥 좀 내버려두면 안 돼? 꼭 그렇게 득달같이 쫓아와서 걱정된다는 말을 앞세워 전화 끊어버리고, 안 받고, 전원 꺼버린 이유를 꼬치꼬치 캐야 돼? 그래야 네 속이 시원해?”


연우가 버럭 소리를 질러버렸다. 그러자 답답했던 속이 좀 시원해진 듯 했다. 그 탓에 저도 모르게 싱긋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오늘 정 연우가 연 정우에게 처음으로 해 보는 일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늘 조심조심 차분한 모습만 보여 왔는데, 소리까지 질러 버리다니.


“네가 이렇게 소리까지 버럭 질러대는 이유까지도 캐야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아.”


정우가 진지한 어조로 대꾸하며 마치 생전 처음 대하는 물건 보는 듯 한 시선으로 연우를 쳐다봤다.


“이유?”
“그래, 대체 너 요새 왜 그러는 거야?”


이유가 뭐냐구? 연우가 속으로 스스로에게 되묻는 사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냈다. 그리고 정우를 똑바로 쳐다봤다.


“정말 궁금해?”
“그래, 그러니까 빨리 말 해. 나도 참는데 한계가 있어.”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연우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가 그녀의 대꾸에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연우는 그에게 물은 게 아니었다. 확 다 고백한 뒤 설령 그를 못 보게 된다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어 본 말이었다. 연우는 똑바로 쳐다보던 정우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정우도 연우도 눈을 뜨고 있던 처지라 연우는 정우의 점점 커지는 눈을 감상할 기회를 놓치지 않아도 됐고, 정우는 연우의 점점 감기는 눈과 점점 다가오는 입술을 두 눈 부릅뜬 채 지켜볼 수 있었다. 문득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한 순간, 정우는 연우의 입술을 느꼈다.


가볍게 한 번 닿았던 입술이 떨어진 찰나, 연우는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정우의 입술을 찾았다. 그리고 이번엔 대담하게 정우의 입술 사이로 자신의 혀를 쏙 밀어 넣었다. 타인의 입 속에서 자신을 느끼는 건, 자신의 것과 똑같은 것을 그 안에서 느낀다는 건, 무의식적인 행동이라 해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를 만큼 자극적이었다. 자신의 입 속에서 그의 것을, 자신의 것과 맞닿은 그를 느낀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자극적이었다. 심장이 멈춰 숨이 멎을 만큼, 심장이 터져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만큼, 그렇게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그와의 키스에 흠뻑 빠져 서로의 입술을 탐닉하던 어느 순간 연우의 입술 사이에서 저도 모르게 내뱉어진 탄성.


“사랑해, 너를.”


뜨거운 불길 위에 찬 물이 쏟아진 느낌, 정신이 확 깨어버린 말 한 마디에 정우가 놀라 연우를 그만 밀쳐냈다. 못 만질 걸 만진 사람처럼 화들짝 놀란 시선, 당황한 듯 허둥대는 행동,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 채 허공에 흩뿌려지는 언어.


“나중에…… 나중에…… 전화할게.”


 


*
생각해보니,
주인공 이름, 짜깁기했;; ㅜ.ㅠ
정연우
연정우
-_-a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1-13 18:15)

댓글 '7'

sunflowers

2008.12.15 09:28:00

밀치다니, 좀 많이 안조으네요, 제 기분까지, 빨리 담편을...

진하

2008.12.15 10:23:14

갑자기 키스를 해서 헉00 했는데..
오히려 정우에게는 이런 특단의 키스가 나을지도..
암튼 빨리 담편을.ㅋㅋㅋ

하누리

2008.12.15 11:51:36

sunflowers님, 진하님...빨리 담편, 요 글자만 눈에 확 들어와요..ㅋㅋ

ssuny

2008.12.15 12:34:53

응;;; 정우 야 야야야!!!!!!!!!!!
너 설마 아니지? 그동안 정말 아무 감정 없었던거야? 글면 나빠나빠 나쁜ㄴ ㅗ ㅁ
괜히 흥분 -_- 빨리 담편 봐야쥐

하늘지기

2009.06.01 17:13:02

세상에..
밀치기까지 해야 했니..

핑키

2009.06.25 01:12:50

오~ 하누님 계실때 댓글 사랑 맘껏 해 드릴걸ㅠㅠ

ßong

2010.12.19 17:18:27

이름 짜깁기한거였군요.ㅋㅋ 어쩐지... 얘네 이름이 헷갈리더라니..ㅋㅋ 정우놈, 지도 느껴놓고.... 키스만 하고 내빼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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