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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 메이트>
친구보다는 가깝고 그렇다고 애인은 아닌 ,
그런 관계
일주일에 한번 쯤 적어도 이주일에는 한 번은 꼭 만나서
함께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거나 드라이브를 하거나 때론 술을 마셔도 좋고
같이 차를 마시거나 산책을 해도 좋고
서로의 일상을 이야기하며
절대 어색해하거나 불편해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
늦은 밤 홀로 집으로 가는 길
조금 무섭거나 짠한 마음이 들 때
전화해서 "오늘 어땠어" 물을 수 있는 사람
함께 있을 때 누군가 애인이냐고 물어도
펄쩍 뛰며 아니라고 손 젓지 않을 사람
이삿날 찾아와 무거운 짐 날라주며 힘 자랑 해주고
내가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슬쩍 일어나 주는 사람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거나 때로 가벼운 포옹도 좋지만
키스 이상은 절대 안되고
서로의 소개팅 이야기에 서로 충고해 줄 순 있어도
누군가 서로 소개해 줘서는 안되고
서로의 생일에는
하루나 이틀 전에 만나서
정성스레 준비한 선물을 나누며 축하해 줄 수 있고
혹시 새로운 애인이 생겨서
소홀해 지고 멀어져 갈 때는
조금 궁금하고 서운해지기도 하겠지만
절대 후회하거나 비참해지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사람
1.
2주 째. 연락이 없었다.
물론 그는 살아 있을 것이다. 뭐 한 두 번 겪은 것도 아닌 일이라 무소식을 걱정한다는 건 조금 우스운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와 연인이 아닌 이상 왜 이리 연락이 없느냐는 투정은 불필요한 감정이었다. 뭐, 친구보다 가까운 관계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쨌건 연인은 아니었으니까.
"오늘 어땠어?"
침대에 누우며 연우가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그래도, 뭐 아쉬운 사람 혹은 궁금한 사람이 안부 전화하면 되는 거라는 생각에, 그래도 굳이 핑계를 대자면 곧 그의 생일이 다가온다는 건더기로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다.
"뭐, 그냥 그랬지. 너는?"
들려오는 나직한 남자의 대꾸. 약간 숨소리가 거칠게 들려오는 것으로 보건 데 밖이고, 걷는 중일 거라는 추측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늘 똑같지. 어디니?"
"지금 집에 가는 길, 거의 다 왔어. 너는?"
"난 집인데……,"
연우가 시계를 힐끔 쳐다봤다. 11시37분, 전화 걸기에도 좀 늦은 시간이다.
"늦었네. 술이라도 마신 거야?"
"그르게, 이 늦은 시각에 남자에게 전화를 하다니!"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술을 마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그의 발음이 약간 꼬여있는 것 같기도 했다.
"딴소리 말고."
"조금. 내일 생일이라고 친구들 잠깐 만났어."
"차는 어쩌고?"
"그냥 뭐 회사 주차장. 실은 나보다 내 차의 안부가 더 궁금한 거지?"
"그러엄, 그런 거지. 그게 좀 좋아야 말이지."
연우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인정하며, 경대에 놓인 포장된 박스 하나를 힐끔 쳐다봤다. 내일쯤 줘야겠지?
“내일 시간 어때?”
“와우, 그거 데이트 신청 맞지?”
“쯧, 여자에 굶주렸군.”
“이런, 근데 미안해서 어쩌지?”
예상치도 못한 멘트에,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뭐가? 여자에 굶주려서?”
거절을 인정하기 싫어서 못 알아들은 척 했다.
“으흠.”
“뭐야, 그 뜻은.”
“아쉽지만, 그 신청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아서.”
물론 이렇게 결국 거절당했지만.
“선약?”
“응, 여자에 너무 굶주려서 생일 선물로 소개팅 받기로 했거든.”
“선 봐서 장가갈 나이에 애들처럼 소개팅은.”
소개팅을 한다는 소리에 쿵 하고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진 것도 잠시, 씁쓸한 어조가 건네는 말에 묻어나지 않을까 신경 쓰며 연우가 살짝 핀잔을 주었다.
“그르게 말이다.”
“그 놈의 소개팅, 백날 하면 뭐해, 제대로 성공한 적도 없으면서.”
“그래, 맞어. 이젠 정말 선이나 봐야 할 까봐.”
정우의 동의에 흐음, 하고 한 숨을 내쉰 연우가 자리에 똑바로 누웠다. 폐에 들어간 숨이 도무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지, 가슴이 꽉 막혀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늦었다, 내일 출근하려면 그만 자야 돼.”
“그래, 잘 자.”
“응, 조심히 들어가구.”
“끊는다. 참, 내 꿈꾸는 거 잊지 마라.”
전화를 끊는 마지막 순간에 들려온 그 말이 신경을 긁어버렸다. 도로 전화를 걸어 그 딴 소리 다시는 하지 말라고 소리를 빽 질러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건, 늘 하던 일종의 말버릇과 같은 거라서 그런 반응은 너무 예민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화를 한다 해도, 소리를 빽 지르지는 못 할 것이다. 앞에 서면 숨 한 번 제대로 크게 못 쉬는 처지에, 소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 번 시계를 힐끔 쳐다봤다. 12시가 코앞이다. 전화를 끊기 위해 자야한다는 핑계를 댄 건 아니었지만, 소개팅을 할거란 말 한 마디에 오던 잠이 몽땅 달아났기 때문에 그 말이 핑계가 된 것 같았다. 연우는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메인 화면으로 설정한 탓에 그의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연우는 사진 속 그의 얼굴을 톡톡 쳤다.
“이 바보, 멍충이. 나쁜 놈.”
창가를 통해 들어온 햇살이 따뜻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평소와 뭔가가 다르다는 느낌이 강하게 와 닿았다. 공기 자체가 다른 듯,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다가왔다. 연우는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서둘러 곁에 놓아둔 핸드폰을 열었다.
8시 10분 전.
미쳤지, 미쳤어.
일어나기 싫어 1분만, 1분만을 중얼거리며 못 일어나던 평소와는 다르게 자리를 벌떡 박차고 일어난 연우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속으로는 지금 당장 열심히 씻고 나가서 눈썹 휘날리게 달려간다면 회사까지 얼마나 걸릴 것인 지 계산하느라 바빴다. 물론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회사가 있어서 꾸물거리지만 않는다면 절대 지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천만다행이지. 연우는 초스피드로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한 다음 재빨리 머리를 감은 뒤 수건으로 감싼 채 옷걸이에 걸린 옷들 중 대충 손에 집히는 대로 입고는 머리를 감았던 수건을 풀어 대충 탁탁 털어 말렸다.
머리를 대충 손가락으로 빗질하며 힐끔 시계를 다시 한 번 쳐다봤다. 8시. 눈썹만 재빨리 그린 뒤 가방을 둘러메고 방에서 나왔다. 주방에서 엄마가 뭔가를 만드는 지 도마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코를 찌르는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 저걸 두고 그냥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배에서는 밥 달라고 요동을 친다.
“연우야, 아침 안 먹구 가?”
“늦었어, 일찍 좀 깨우지. 저녁에 늦을지도 몰라요!”
왜 안 깨웠느냐는 원망 섞인 대답을 돌려주며, 밖으로 나온 시간은 8시 5분이었다. 빌어먹을 연정우. 뜬금없이 소개팅 한다고 자랑을 해대는 바람에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잠까지 설쳤다.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하고 말 것이지, 대충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둘러대고 말 것이지, 뭐 좋은 일이라고 자랑 따위를 해서 남 잠까지 방해를 하느냔 말이다.
9-2.
연우는 연신 투덜거리면서 지하철 개찰구를 지나쳐 늘 서던 플랫폼에 자리를 잡았다. 출구로 올라가는 계단과 제일 가까이 연결된 자리라 꼭 그 자리에서 지하철을 타곤 하던 게 어느새 버릇이 되어버렸다.
연우는 늘 서던 그 자리에 섰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가방에서 mp3를 꺼냈다. 귀에 이어폰을 꽂으려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린 찰나, 시선 끝에 정우가 들어왔다. 일진도 사납지. 어제 아침이었다면, 분명 행운이라고 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오늘 새벽, 상황이 바뀌었다. 그래도, 웃는 낯으로 빤히 쳐다보는 데 계속 모르는 척 할 수 없어 연우 역시 피식 웃음으로 아는 척을 했다.
“속은 괜찮아?”
“뭐, 많이 마신 건 아니니까. 그나저나 너, 늦었지?”
옆으로 다가선 정우가 힐끗 시계를 쳐다보면서 던진 물음은 질문이 아니라 그저 확인일 뿐이었다. 연우는 못마땅한 시선으로 그를 한번 쏘아보고는 엠피를 도로 가방에 넣었다.
“속이나 확 뒤집혀라.”
연우의 악담이 도착하는 지하철의 소음소리에 묻혔다. 자신을 보며 표정으로 무슨 말이냐고 묻는 정우에게 연우는 또 한 번 피식 웃고 말았다.
“아아, 사돈 남 말 한다구. 너두 늦었잖아?”
“간당간당 할 거 같긴 해. 밥은 먹구 나온 거야?”
출근하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서며 정우가 밥을 챙겼다. 언제 만나건 일단 밥부터 챙기는 정우는 한국인은 밥 심으로 살기 때문에 때 되면 밥은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주의였다.
“일어난 지 20분도 안 됐는데 밥은 무슨.”
연우가 입을 삐쭉거리며 대꾸했다. 누구 때문에 늦었는데. 집을 나서기 직전, 솔솔 코끝을 간질이던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가 다시금 풍겨오는 듯 했다. 아, 근데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다. 이래서 일찍 나왔어야 했는데. 속으로 툴툴거리는 연우의 신경이 꽤 예민해졌다. 사람들과 몸이 닿는 게 싫다는 이유로, 유난히 아침에 일찍 나와 버릇했는데 오늘은 늦어버린 탓에 꽤 사람들로 복작거리는 지하철을 타야 됐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 탓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왜 그래?”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짜증날라 그래.”
여전히 얼굴을 찡그린 채로 연우가 대꾸했다.
“으이그, 그럼 아예 지하철을 타지 말던가.”
“내가 누구……,”
정우의 핀잔에 버럭 성질을 부리려던 연우가 멈칫했다. 그리곤 작게 한숨을 포옥 내쉬더니,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쏘아봤다.
“됐다, 그만 하자.”
네 탓이라고 해버리면 연우의 입장에서는 그만이었지만, 정우의 입장에서는 내가 뭐? 라며 잘잘못을 따져 묻기 시작할 것이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자신에게 유리한 것 따위 없으니까 차라리 말을 말자는 생각에 연우가 도로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그래도 답답한 마음에 그만 정우를 흘겨봤다.
“야, 무슨…….”
“어머, 선배님!”
분명 정우가 무슨 말이냐, 하려던 말해라, 말 안 하면 궁금해서 종일 아무것도 못 할 거다, 그러면 회사 잘릴 테고, 그렇게 되면 네가 나 먹여 살릴 거냐는 말을 한 바가지 쏟아내며 자신이 하려던 말을 듣기 위해 닦달을 하려는 찰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누군가 연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어, 안녕. 지금 가는 거야?”
“네, 선배님은……, 좀 늦으셨네요?”
수연이었다. 연우가 회사 후배인 수연에게 인사를 건네자 씨익 웃던 수연이 시계를 보고 나서야 말을 마쳤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라면 지금 이 시간에 연우는 회사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연우의 짜증이 좀 더 짙어졌다.
“근데 선배, ……누구?”
수연의 시선이 정우에게 향하더니 떨어지지 않았다. 연우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정우를 아래위로 훑었다. 짙은 회색의 말끔한 슈트차림으로 고급스러워 보이는 까만 서류가방을 들고 서 있는 그의 얼굴은, 분명 여자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만큼 준수했다. 아니, 준수하다는 표현보다 실은 조금 더 잘생겼다. 165센치인 자신이 7센치 높이의 힐을 신어도 약간 고개를 치켜들어 올려다봐야 할 정도의 키를 가졌으니 그 정도면 족했고, 테니스나 스쿼시, 농구 등의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니 적당한 근육으로 뒤덮인 건장한 체격일 것이란 추측은 추측이 아닐 것이다. 뭐, 그래봤자 못 먹는 감이지. 연우가 슬쩍 정우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고 정우의 왜 그러냐는 질문이 가득 담긴 얼굴을 보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연신 내저었다. 뭐, 못 먹는 감은 찔러라도 보는 게 예의긴 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상대에게 일러줄 필요 따윈 없기 때문이었다.
“으응, 내…….”
“안녕하세요, 연우 남자친구 연정웁니다. 같은 회사 다니시는 분인가 봐요?”
“아, 예, 안녕하세요. 선배 회사 후배예요.”
대꾸하는 수연의 밝은 목소리는 평소와 같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새초롬한 느낌이었다. 정우가 당연하게도 남자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연우는 자신의 말을 빼앗아 스스로를 소개한 정우를 한껏 노려봤다. 소개한 것까지는 좋은데, 오늘 소개팅을 목적으로 말끔하게 빼 입은 주제에 누구 앞길을 막으려고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단어를 이용해서 자신을 소개하느냔 말이다.
물론 한 두 번 있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버럭 화를 낸다면, 그는 내가 남자친구지 그럼 여자친구냐는 말로 미꾸라지가 그물 빠져나가 듯 천연덕스럽게 잘 빠져나갈 터라 차마 그러지 못하고 그냥 노려보는 수준에서 끝내는 것이었다. 연우는 회사에 헛소문이 퍼지기 전에 수연의 입을 막기 위해 해명을 하려고 수연을 쳐다 본 순간, 의미심장한 눈길로 자신을 보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다 경악을 하고 말았다. 그녀의 시선 끝에 잡힌 건, 어느 새 자신의 어깨를 자연스레 감싸고 있는 그의 손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진실로 맹세하건 데, 인생 최악의 날이었다. 이 문구는 오늘의 일기에도 틀림없이 쓰여 질 것이었다.
“선배 완전 내숭이에요.”
탈의실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는 데 수연이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힐끔 쳐다보자
“만날 남자 없다고 하시더니 말예요.”
샘이 가득 담긴 말을 던졌다. 그저 친구라고, 백 번 아니 천 번 부인해봤자 소용없다. 그 짧은 순간동안 수연을 어찌나 그럴 듯 하게 녹여놨던 지, 사무실에 들어오는 내내 아니라고 했지만 이미 자신의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연우는 그냥 입을 꾹 다물고 마저 옷을 갈아입었다.
“뭐야, 연우 남자있어?”
“연우야, 너 정말이야?”
“기집애, 남자 소개해 준대도 싫다더니 그런 거였어?”
벌써 옷을 갈아입고, 아침 대용으로 사온 군것질거리로 빈속을 달래던 회사 직원들이 수연의 말에 너도나도 한 마디씩 던져왔다. 망할, 눈에 띄기만 하면 죽여 버릴 거다. 속으로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아마 지금쯤 귀가 간지러워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우, 정말! 아니에요.”
“또 또 또 내숭. 아까 다 들었는데 자꾸 이러시기예요?”
연우의 강한 부정을 수연이 내숭으로 치부해버렸다.
“제가 봤는데요, 정말 잘 생겼어요. 목소리도 좋고, 스타일 죽이더라니깐요. 그리고 본인 입으로 직접 연우 선배님 남자친구라고 하면서 연우 선배님 잘 부탁한다는 인사까지 하던걸요.”
그러더니 이어서 자기 남자친구 자랑하듯 잘도 말했다. 빌어먹게도 그가 그녀를 녹여놓은 흔적이 여실히 드러났다.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 거 순식간이라고 하더니 딱 그 꼴이었다. 연우는 진실을 밝히기를 포기하고 멋대로 떠들라는 심정으로 가만있었다. 아마 저녁 즈음이면 회사 내에 소문이 쫘악 퍼질 것이다. 정연우, 남자 없다더니 사귄 지 꽤 된 남자친구 있다고 하더라는 헛소문.
왜 흔들어, 지는 저녁에 소개팅이나 하는 주제에. 왜 사람 싱숭생숭하게 그런 헛소문 퍼뜨려, 나쁜 놈. 연우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들고 울컥하는 마음에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당분간 나 피해라, 더불어 밤길 조심하구.>
또르르 소리를 내며 잔에 따른 음료는 맑고 깨끗했다. 그 탓일까, 이 음료의 광고모델들은 하나같이 다 맑고 깨끗한 이미지의 예쁜 여자들이었다. 연우는 그 맑은 음료를 한 입에 툭 털어 넣었다. 순간 이마가 살짝 찌푸려지는 건 일종의 반사작용이었다.
“달다.”
“근데 인상은 왜 잔뜩 찌푸리고 난리야?”
마주 앉은 서영이 트집을 잡았다.
“그러는 넌 왜 트집인데?”
“너 무슨 일 있는 거지?”
서영의 물음에 연우가 말없이 자작으로 또 술 한 잔을 했다.
“뭐냐, 나 3년 동안 재수 없으라는 거냐? 게다가, 너 빈속에 그렇게 술만 마시면 탈난다.”
연우가 피식 웃으며 서비스로 나온 차가운 계란찜을 입에 넣었다.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 거리던 마음은 퇴근 무렵이 되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더니 종국엔 가만있어도 안정을 찾지 못했다. 더군다나 아침에 보낸 문자에 저녁이 다 되어 가도록 답이 없으니 계속 하릴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게 됐다. 그러다 결국 나중에는 혹시 망가진 게 아닌가 해서 스스로에게 문자를 보내보기도 했지만, 핸드폰은 지극히 정상이었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문자 하나에 목메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한심스러워 보일 수 없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이내 속에서 신경질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그가 소개팅을 할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1시간 후면, 30분 후면, 10분 후면, 이러면서 초조하게 시간을 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보일수록 그 신경질은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결국 연우는 서영을 불러들였다, 자신의 감정을 알고 있으면서 편하게 만날 수 있는. 한 잔 하지 않으면 지금은 그녀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의 행동반경을 재며 자신의 신경을 갉아먹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걔 오늘 소개팅해.”
“거야, 늘 하던 건 데 뭐.”
“걔, 오늘 내 회사 후배한테, 지가 내 남자친구라고 소개했어.”
“것도, 늘 하던 말이잖아. 그리고 지가 남자니까 너한테 남자친구 맞지 않냐는 논리에 반박할 수 없으니, 네가 참아야지 뭐.”
연우의 고자질에 서영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시원시원 대꾸했다.
“불안해. 왠지 이번엔 불안해.”
“정연우, 그만 해.”
“그게 안 되니까 문제지.”
연우가 한 입에 술을 탁 털어 넣으며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고백을 하던가.”
“세상 편해 좋겠다?”
“니들 나이가 몇이냐? 이번이 아니더라도, 너야 걔한테 맘이 있으니까 딴 놈은 눈에도 안 들어오겠지만 걘 굳이 이번이 아니더라도 조만간 다른 누구 만나 결혼이란 거 할지도 모르는데, 언제까지 마음 숨기고 친구인척 가장한 채 옆에만 붙어 있다가 결국 걔 결혼한담에 청승맞게 질질 짤 건데? 고백 한 번 못 했다고 땅 치고 후회하며 누굴 귀찮게 굴려고 그래? 그래봤자 벌써 기차 떠났는데.”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정곡만 콕 찌른 그 말에 연우는 대꾸도 못하고 끓는 속 식힐 심산으로 애꿎은 술만 또 입에 털어 넣었다.
“기집애, 너한텐 안 들러붙을 테니까 걱정 마.”
그리고는 섭섭한 마음만 표현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슬슬 드는걸 보니 술이 조금 취해 가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눈물이 찔끔 났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이 엉망진창,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 짜증이 밀려와서 이러는 거라며 자신이 눈물을 보이는 이유를 대고 다시 술잔을 집어 들었다.
“으이그, 이 순딩아.”
순간 서영이 못 살겠다는 듯 투덜거리며 연우의 술잔을 뺏고는 대신 얼음이 가득 담긴 물 잔을 밀어주었다. 연우가 피식 웃으며 한 모금 마시는데,
“너 취했다, 작작 마셔라.”
서영이 걱정을 담아 한소리 더했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테이블 위에 진동상태로 놓아둔 핸드폰이 드르륵거리며 요란하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연우는 눈 주위를 가리며 찰랑거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핸드폰을 집었다. 이놈의 눈물은 그칠 생각도 안…….
액정에 선명하게 뜨는 이름을 보는 순간, 연우는 숨조차 멈췄다. 멈출 생각도 안 한다던 눈물조차 딱 멎었다. 그였다. 받기 싫은 시점이었지만, 받지 말아야했지만, 연우는 폴더를 열어 통화키를 눌렀다. 단지 그의 전화였기 때문이었다.
“응.”
“어디야?”
자신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와 달리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밝게 들려왔다. 누구냐고 입 모양으로 묻는 서영에게 연우가 역시 입 모양으로 정우라고 답을 해준 뒤에야 정우의 물음에 대꾸도 안하고 그냥 말을 되돌렸다.
“뭐, 그러는 너는?”
“나 지금 들어가는 길.”
대답하는 목소리 자체에 웃음이 묻어있었다. 목소리가 약간이라도 가라앉아 있으면 울었느냐는 추궁을 시작으로 귀찮게 굴며 눈치 빠르게 굴던 그가 자신이 말을 얼버무리거나 말거나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걸 보니 기분자체가 좋은 모양이었다. 괜히 전화를 받았다는 생각에,
“좋은 일 있냐?”
건네는 말이 전혀 곱지 않았다.
“말했잖아, 소개팅 한다구.”
“그게 뭐 어쨌는데, 언젠 안 했어?”
나도 그렇게 만났잖아. 연우가 마지막 말은 속으로 꾹 참았다.
“나, 이번엔 정말 느낌이 좋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종일관 웃음기 잔뜩 머금은 말들만을 건넸다. 물론 그럴수록 연우의 기분은 점점 그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나한테 굳이 보고할 필요는 없잖아.”
“야, 야,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친구의 기쁨을 함께 만끽해야지. 나누면 두 배, 몰라?”
나누면 반이 된다는 슬픔, 나는 누구랑 나누니? 멈췄던 눈물이 순간 다시 뚝, 흘렀다. 이번엔 정말 괜히 받았다, 왜 했을까, 궁금해하고 말 것을.
*
잃어버린 단편 하나 찾았습니다..ㅋ
아싸아, 하고 올려버리는;;;;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1-13 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