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이어지는 웨딩마치.


레드 카펫 위, 사뿐히 내디뎌지는 신부의 발걸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새신랑.


신랑이 훤칠하네, 신부 예쁘네, 수군거리는 군중들.




대체 왜 왔던 걸까, 나는? 무얼 확인 하고 싶었던 걸까? 그의 행복한 모습? 아님 불행한 그의 표정? 예쁜 신부의 행복에 겨운 미소? 그게 보고 싶었던 걸까?


쏟아지는 물음표의 홍수 속에서 예준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보지 않아도 괜찮아. 스스로를 다독인다. 의자 등에 기대어 둔 가방을 쥐는데



“도망가니?”



비웃듯 들려오는 말에 저도 모르게 움찔하게 된다. 정면, 눈이 마주친 건 서하라 양의 최측근인 장서영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아니라는 의사표시를 했다. 하지만 실상은 어찌 보면 그게 맞는 거다. 도망. 그래서 슬쩍 시선을 내리깔게 된다.



“아니라면 앉아. 하긴 그렇더라도 앉아서 자리 지켜. 서하라가 끝까지 지켜봐 달라고 전해달래.”



그리고 결국 붙잡혀 버렸다. 털썩 주저앉아 바라보게 된 건 장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며 신부의 손을 건네받는 그, 김기원의 살짝 미소 짓는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로 웃지 마, 나 아닌 다른 여자 보며 그렇게 웃지 마.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이었다. 한 편의 영화를 본다고 생각하자. 그래서 그렇게 마음을 다독인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무덤덤한 얼굴로 결혼식을 지킨다. 하지만 ‘신랑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라는 상투적인 말로 시작하는 혼인 서약을 할 때는 그럴 수 없었다. 주례 선생님의 ‘……신랑은 신부를 사랑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깔끔하게 세팅 되어 있는 하얀 테이블을 바라보며 속으로 빌게 된다. 아니잖아. 아니니까 아니라고 말해, 아니라고 말해 줘.



“네.”



짧은 대답은 그 간절함을 배반했다. 낄낄 낮게 웃어버렸다. 그렇게 만들어버린 주제에 배반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랬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서하라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김기원이 사랑하는 건 이예준이니까. 이예준이 사랑하는 건 김기원인 것처럼 김기원은 이예준이니까, 그러니까 아니라고.



“……이에 주례는 이 혼인이 원만하게 이루어진 것을 여러분 앞에 엄숙하게 선언 합니다.” 



성혼선언이 끝나고 주례가 이어졌다. 위트 섞인 멘트에 하객들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지만 이예준의 시선은 오로지 김기원의 뒷모습에 못박혀있었다. 



‘네가 버려. 그러면 도와줄게.’



그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김기원, 당신이 그 심정을 알까? 알아줄 날이 찾아올까? 하긴 그런다고 이제와 달라질 건 없겠지, 김기원 당신…… 이제 새신랑이니까.



‘마당 넓은 하얀 양옥집에 그네 의자도 놓고 작은 티테이블도 놓자. 아이는 둘이 좋을까, 셋이 나을까? 어쨌건 하나는 안 돼, 외롭거든. 아이들이 마당에서 뛰어놀고 우리는 그 티테이블에서 아이들이 넘어지지 않을까, 다치지 않을까 조마조마해가며 그 아이들을 바라보는 거야. 초록으로 물든 잔디밭에 아이들 옷은 흰색이 아무래도 어울릴 거야, 그치? 상상해봐, 그 안에서 행복하게 웃는 너랑 나, 우리 아이들.’



낮게 즐거운 목소리로 귓가를 부드럽게 울리던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때는 즐거웠었지, 걱정할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저 꿈만 꿨으면 됐으니까. 그게 지금은 아프다. 김기원, 당신이 꾸는 꿈을 내가 알아버려서 그 꿈을 같이 할 상대가 내가 아니라서 나는 아파. 아플 자격 따위 내겐 없는데 그래도…… 아파.



“왜, 다시 도망이라도 가려고?”



어느 샌가 자리에서 일어났나보다. 장서영이 잔뜩 비꼬는 걸 보니 말이다.



“아니, 볼 꼴 다 봤으니 가려는 거야.”



가라앉은 건 마음뿐이 아니다. 제 입에서 낮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은 그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경했다.



“브라보, 포장 센스 죽이는데?”



들려오는 야유에 예준은 피식 답하고는 예식장 입구로 발걸음을 돌렸다. 한걸음, 그와 멀어진다. 또 한걸음, 좀 더 그와 멀어진다. 다시 한걸음, 그와 멀어진다. 마지막 한걸음, 이제 뒤를 돌아도 그는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그와 멀어진다. 멀어지는 그 길이만큼, 당신이 행복하길…….




성대한 그의 결혼식이…… 끝났다.






슛.


골인.



멋진 점프로 슛을 넣은 그가 착지를 하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스탠드를 향해 손을 흔든다. 친구들과 농구를 하는 운동장 스탠드에 조용히 와서 앉아 있었는데 그는 늘 언제 자신이 와 있는지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아?’ 던진 질문에 ‘느낌으로. 느낌이 와, 네가 주변에 있으면 네 숨결이 느껴져.’ 그렇게 4년을 그와 보냈다. 그와 함께, 웃으면서.



왜 이곳으로 왔는지 모르겠다. 그와 함께 한 곳은 이곳이 아니더라도 차고 넘치는데 말이다. 아니, 알고 있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가장 많은 곳, 그래서 그와의 추억이 가득한 곳. 이곳으로 온 이유는 그거였다.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서.



주말인데다 방학이라 그런지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예준은 늘 앉던 스탠드에 자리를 잡았다. 어쩐지 농구 골대 앞에서 자신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짓는 김기원이 눈에 들어온다. 경기를 끝내고 숨차게 한달음에 달려와 ‘많이 기다렸지?’ 라고 금방이라도 물어올 것 같다.



“이예준.”



낮지만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 미쳤구나, 미쳐가는 구나, 환청이 들리는 걸 보니 그런가 보구나. 예준은 피식 웃고 말았다. 오지 말아야지. 그럼 이런 환청도 안 들릴 거고, 미쳐가지도 않을 테니까.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물끄러미 내려다본 땅바닥에 자신의 그림자가 아닌 다른 그림자가 보인다. 이게……뭐야?



“예준아.”



자신의 이름이 다시 한 번 불린다. 예준은 그제야 환청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릴 생각도 없었다. 어쨌건 그는 오늘 결혼한 새신랑이니까. 낄낄. 다시 한 번 낄낄. 쿡쿡. 그렇게 예준은 웃었다. 그리고 한 계단 내려선다. 봐서 뭐해? 못 본 척, 못 들은 척 예준이 걸음을 옮겼다.



“멈춰!”



못 들었어. 예준은 다시 한 계단 내려선다.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올려 졌다고 느낀 순간 몸이 휙 돌려 세워진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다.



“할 말, 없어. 우리, 아니 당신과 나 사이엔.”



다시 돌아서려는 데 그가 막아선다.



“한 번 버렸으면 됐잖아.”


“그러니까. 이미 버렸으니까. 다시 주울 마음 없어.”


“날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런 말 하지 마!”



기원이 버럭 화를 냈다. 그럼에도 예준은 그를 볼 수 없었다. 버린 주제에 다시 쳐다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결혼식까지 갈 배짱은 있었지만 그의 앞에 당당하게 설 처지는 못 된다. 그를 팔아넘긴 죄, 너무 크니까.



“나! 당신 열 번도 넘게 버릴 수 있어. 그럴 목적이었으니까.”


“넌 버릴 수 없어. 죽어도 사랑하는 건 나잖아.”


“죽을 때 까지 신부를 사랑하겠다고 맹세한 건 당신이야!”


“그래서 삐친거구나?”



웃음기 섞인 그의 말끝이 흔들렸다.



“그럴 리…… 없잖아?”


“이러지 말자, 이예준. 미안해, 지켜주지 못해서. 그러니까 이러지 마.”



결국 그의 말끝에 눈물이 묻어난다.


결국 둘 중 악역은 자신이 되는 거였다.



“당신이나 이러지 마. 나 당신 버거워. 내내 그랬어. 내내 힘들었어. 좀 편해지자고 그런 거니까 나한테 그만 달라붙어. 찐덕 찐덕 달라붙지 마.”


“어머니 일, 내가 먼저 나섰어야 했어. 네가 그런 것도 결국 내 탓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만 해. 너도 아프잖아, 내가 없으면 숨쉬기도 힘들잖아.”



그의 눈물이 뚝,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약해지지 말자. 흔들리지 말자. 그를 위한 거라고 사모님이 그랬잖아.



“착각하지 마. 당신 없이도 나, 잘 살아.”



단호하고, 차갑고, 딱딱했다, 예준의 말은.



“애쓰지 마. 너 애쓰는 거 눈에 보여.”



습기 가득한 말. 여전히 그는 아파하고 있었다.



“가. 가버려. 그만하자. 우리 여기까지 하자. 눈 감아, 나 보지 마.”


“그럴 수 없다는 거…….”


“당신, 오늘 결혼했잖아. 새신랑이 이러면 곤란해.”



기원이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그거 쇼야. 쇼였어. 새신부 서하라 양은 지금쯤 파리로 갈 준비하느라 바쁠 거야.”



그리고 별거 아니라는 식의 말을 내뱉는다.



“쇼?”



예준이 물었다.



“그래, 쇼. 서하라가 이 결혼 무마시키려면 일단 식은 해야 한다고 했어. 부모님들이 안심한 사이에 파리로 자신은 도망갈 거라면서.”


“그런다고 달라질 거 없어. 어쨌건 나는 당신 버렸으니까.”



그래서 너는 울고 있었던 걸까? 도리도리, 생각을 지운 예준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다. 차갑다. 차가웠다.


기원은 예준을 와락 안아버렸다.



“녹아라, 녹아라, 녹아라. 내 체온 36.5도야. 한여름 뜨거운 햇빛의 열기와 같아. 그러니까 녹을 거야.”



그 말에 결국 예준이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 뚝뚝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금세 녹네. 네 눈물, 네가 애쓴 흔적이야. 날 밀어내려고 애쓴 흔적.”


“바보. 왜 이렇게 한심해. 보내줄 때 가야지. 밀어낼 때 밀려나야지.”



이번엔 예준의 말에 습기가 가득찼다.



“네가 없으면 아프니까. 숨을 쉬어도, 숨이 쉬어지지 않으니까. 내 옆자리는 늘 네 것이었으니까.”


“나……당신 팔았어. 당신 어머니한테. 우리 엄마 수술이라도 했으면 해서. 안 그러면 후회할 거니까. 당신 보는 내내 괴로울 거니까. 결국 돌아가셨지만 당신 팔아서라도 수술해야 했어. 수술하게 하고 싶어서, 당신 내가 팔아…….”


“그만. 말 안 해도 다 알아. 알고 있어. 미안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먼저 알아서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내 탓이야, 그거. 날 우리 어머니한테 판 거 다 내 탓이야. 그러니까……나 용서해 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사랑하는 거야?”


“응. 널 사랑하지 않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고, 할 수 없는 일이야.”



예준이 활짝 웃었다.


기원도 덩달아 활짝 웃는다.



“그거면 된 거잖아. 용서 따위 필요 없잖아. 내가 당신 사랑하는데,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데.”


“힘들었지, 오늘 하루. 숨길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사랑이라는데, 너 그거 숨기느라 힘들었을 거야. 힘들게 해서…….”



미안해, 기원이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였을 거다.



“그만. 괜찮아. 난, 괜찮아.”


“그런 일 만들어서…….”



미안해, 기원이 또 하려던 말은 그거였을 거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된 거야. 당신이 뭘 하든 난 괜찮으니까 걱정 마.”


“사랑하니까?”


“응, 사랑하니까.”



기원이 활짝 웃었다.


예준이 그 모습에 덩달아 활짝 웃었다.


석양이 붉게 타올랐다.






터덜터덜 걷는 걸음. 그 걸음을 따라 예준이 걸음을 옮긴다.



“나 이제 빈털터리야. 말해봐, 그래도 나 따라 올 수 있겠어?”


“따라가면 뭐 있어?”


“아무것도, 없을지 몰라.”


“따라가면 좋은 거 있어?”


“싫은 것만 잔뜩 있을지 몰라.”


“따라가면 나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 줄 수 있어?”


“아마, 잔뜩 후회하게 만들어 주는 게 쉬울 거라서, 금세 후회하게 될지 몰라.”


“따라가면 행복할까?”


“불행할지 모르지. 힘들 테니까.”


“따라가면 죽을 때 까지 나 책임질 수 있어?”


“네가 애야? 책임지고 말고가 어디 있어?”


“따라가면, 나 사랑해?”


“안 따라와도, 너 사랑해.”


“따라가길 원해?”


“…….”


“따라가지 말까?”


“…….”


“그래, 가자.”


“어딜 가?”


“당신 갈 길! 따라갈 거야.”


“왜? 좋을 거 하나 없는데, 불행할지 모르는데, 너 아무것도 없어서 후회할지 모르는데.”


“나 사랑한다며.”



예준은 그거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평생 이렇게 같이 걸으면 돼.


그리고 예준이 조그맣게 중얼거린 말은 적어도 하늘이, 땅이 들었을 거다.

+
쫌 어설프지만 후딱 끝;;
에이, 너무 어설픈 건 아닐지 ㅜ.ㅠ
장편도 어렵지만, 단편은 더 어려운 거 같아요;;

+
즐거운 주말 되세요^^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1-13 18:15)

댓글 '6'

노리코

2008.10.18 23:56:43

오랜만이십니다.
그나저나 해주하고 하윤이는 잘 지내죠? -ㅁ-

으네

2008.10.23 13:24:18

누리, 여운이 찡하게 남아. 장편으로도 보고싶다...

Junk

2008.10.24 00:49:53

으네/ 그러게요...

하누리

2008.10.27 19:33:23

노리코님 // 헉 ㅜ.ㅠ 아...아마도...잘...ㅜ.ㅠ

으네님, 정크님 // 지금 깔아놓은 글 많아서 장편은 절대 무리...글 괜찮았다니까 다행이예요^^;;

하늘지기

2009.06.01 15:57:28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핑키

2009.06.25 01:02:10

정말 여운이 찡하게 남습니다. 하누리님이 없으시다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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