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이런, 부케 너무 빨리 던지는 거 아냐? 아직 식도 올리기 전인데?
히죽 웃으며 하라의 손에 다시 부케를 쥐어주는 데 하라의 눈이 울고 있었다.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보고나니 괜히 마음이 어지럽다. 왜 울어, 울 사람은 난데? 생각에 화가 나기도 하고 대신 울어주는 건가? 생각에 기특하기도 했다.


예준은 천천히 걸음을 식장으로 옮겼다. 30분전. 아직 시간은 넉넉했다. 하지만 그를 만나는 건 피했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는 데 예식을 알리는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예준은 걸음을 옮겼다. 또각. 또각. 대리석과 마주칠 때마다 힐이 내는 소리는 여전히 경쾌하다.


                                                                                ***


14시 정각.
김태영 윤영옥의 차남 김기원 군.
서정민 이주연의 장녀 서하라 양.


-바둑 잘 둬요?
-오목은 둘 줄 알아.
-에이, 뭐야. 이름은 기원인데 바둑은 못 두고.
투덜거림에 맑게 웃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기억에 예준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열여덟 예준은 고3을 앞둔 시점이었고, 열아홉 그는 S대 입학을 앞둔 시점이었다. 운전기사인 아버지를 따라간 집의 둘째 아들인 그는 예준이 집에서 부리는 사람의 자식이라고 해서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의 형인 기태가 예준에게 막말을 하고 함부로 대하면 예준의 편에 서서 형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따끔하게 충고까지 하곤 했다. 고3이 된 예준에게 자신이 쓰던 문제집이며 참고서, 직접 요약 정리한 과목별 정리노트까지 물려준 것도 기원이었고, 유난히 약했던 수학과 영어의 부족한 부분을 꽉 채워준 것 역시 기원이었다. 문제집, 참고서, 정리노트 속 기원의 필체는 그를 닮은 듯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깔끔하고 담백하게 다가왔던 그를 사랑하게 된 게 대체 언제였을까? 언제부터였지? 처음 그의 집에 있는 별채로 이사하던 날 쪽문으로 이삿짐을 나르다 우연히 마주친 그 때였을까? 아님 은테 안경을 쓴 말끔한 모습으로 처음 통성명을 하다가 이름은 기원인데 바둑은 못 둔다는 핀잔에 맑게 웃던 그 때였을까? 아님 그와 같은 대학에 합격한 걸 알고 나서 좋아라 앞으로 다니게 될 캠퍼스 교정을 가기로 약속하며 새끼손가락을 걸 때였을까? 캠퍼스 교정을 걷다가 날이 춥다며 덥석 잡은 손을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 밀어 넣었던 그 때? 아니, 아니 학교 동기건 선배건 후배건 상관없이 남자라면 무조건 늑대니까 믿지 말라면서 아버지와 자신은 예외라고 빡빡 우겼을 때? 그게 아니라면 동기 한 놈이 집 앞까지 바래다주는 걸 본 기원이 다시는 자신이 아닌 그 어떤 남자와도 다니지 말라며 처음 가볍게 입을 맞췄을 때일까?


아니, 사실 그게 언제였건 상관없었다. 그와 처음 마주쳤던 때부터 자신의 심장은 그를 볼 때마다 두근두근 살아 움직였으니까. 그를 생각할 때조차 심장은 두근거렸으니까. 다른 누구에게도 반응하지 않는 자신의 심장은 온전히 그렇게 그에게만 반응했으니까. 그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 자신이었다. 이예준은 그러니까 그를 알게 된 지난 10년 동안 그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 그가 오늘 결혼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를 사랑한다. 근데, 그도 그럴까? 아니 그렇겠지? 아플까? 화가 났을까? 속이 뒤집혔을까?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해줘야 할까? 사실 버린 사람은 그가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버리고 도망치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자신이었으니까. 그럼 오지랖이 되려나? 뭐, 어쨌건 쓸 데 없는 생각들.


예준은 자신이 했던 생각들을 한 마디로 압축시켰다. 쓸 데 없는. 피식 또 한 번 터져 나오는 웃음을 배어 물고 돌아섰다. 15분 남았다. 이제 그에게 얌전히 축하 인사를 하고 식장으로 들어가 너무 잘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잘 안 보이지도 않는 그런 적당한 자리를 잡고 앉아 그의 결혼식을 지켜봐야했다.


당신에게 벗어나는 게, 내겐 지옥이 될까? 자유가 될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들려오는 힐의 소리는 여전히 맑고 경쾌하다.


                                                                                      ***


드디어 아니 기어코 기원의 앞에 섰다.


“축하해요.”


높낮이 없이 평이한 어조였다. 어떤 감정으로 생각으로 건네는 말인지 상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당황한다. 그리고 이내 화를 낸다. 곁에선 그의 어머니의 시선이 따갑다. 마주한 건 아니지만 자신을 못마땅한 듯 쳐다보는 시선은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마주한 그의 시선엔 이제 뭐랄까, 안타까움? 그런 감정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애타는 듯 흔들리는 그 시선에 예준은 잠깐 눈을 감았다.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자신에게 주문을 걸고 난 후. 다시 눈을 뜨자 들어오는 건 여전히 흔들리는 그 시선.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기원의 눈을 또렷이 응시한 예준의 눈이 차갑게 말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려요, 선배.”


가벼이 목례를 하는데 바닥에 닿은 시선 끝, 그의 신발이 들어왔다.


신발 사주면 도망간다던데?


장난스럽던 그의 물음.
오늘 만큼이나 뜨겁던 볕.
시리도록 맑았던 하늘.
그 하늘을 장식했던 새털 같은 구름들.
길목 길목 가득 메웠던 사람들.
그 속에 선 당신과 나.
그 속에서 당신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맑은 하늘보다 더 맑게 밝은 햇살보다 더 밝게 웃던 당신을 보면서 난……, 난…….


예준은 그를 지나쳐 예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결혼식. 날 사랑한다던 그가 오늘 결혼을 한다. 지켜보면서 난 대체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 걸까? 그 날은 아무것도 그에게 해준 게 없어서 선물이나 하나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이왕이면 훨훨 멀리멀리 내게서 도망가라고 신발을 사줘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환한 웃음 지으며 장난스럽게 물어왔던 당신에게 뭐라고 했더라? 아, 그럴 리 없다고 했었지. 나 없이 당신은 아무데도 안 갈 거 아니냐고. 속으로는 그 반대로 생각한 주제에.


가증스러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어쩜 그렇게 앙큼을 떨었을까? 당신 나중에 그 사실 알고 나서 얼마나 기가 찼을까? 황당했을까? 어이가 없었겠지? 내가 징그러웠을까? 근데 이제와서 아무렴 어때? 이젠 아무 상관도 없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라고.


무슨 상관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도 모르게 뚝, 눈물이 떨어졌고 아이러니하게도 신랑 입장을 외치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식, 웃으며 예준은 홀의 입구를 바라봤다. 레드 카펫을 밟으며 입장을 시작하는 그의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
짧게 한 편,
왜냐면, 더 늦어질 수 있을 듯 해서요 ㅜ.ㅠ

*
세 편으로 끝낼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네 다섯편으로 끝이 날 듯...^^

*
요새는, 올림픽 보는 맛으로 삽니다
ㄱㄱ ㅑ ~~~~~~~~~~~~
이러고 있어요;;; ㅋ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1-13 18:15)

댓글 '2'

하늘지기

2008.08.13 14:08:29

예준인 왜 기원이 놓아버렸을까..
고용인과 피고용인을 둔 부모의 환경때문에?
지금 맘은?

핑키

2009.06.25 00:58:36

정말 왜 기원이를 놨을까요?
문서 첨부 제한 : 0Byte/ 2.00MB
파일 제한 크기 : 2.00MB (허용 확장자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완결소설은 가나다 순입니다 Junk 2011-05-11
58 나의 사랑, 나의 신부. [22] Lian 2005-02-06
57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10] 편애 2004-04-23
56 꽤나 진부한 살인사건, 엄청 진부한 연애사건 (하) [6] Junk 2004-03-22
55 꽤나 진부한 살인사건, 엄청 진부한 연애사건 (상) [6] Junk 2004-03-22
54 금지애(禁止愛) [1] Junk 2004-03-22
53 그와 그녀의 성야 (Eve) - 하 [15] ciel 2004-12-21
52 그와 그녀의 성야 (Eve) - 상 [8] ciel 2004-12-21
51 그림집1 (완결) [12] 2월화 2005-08-12
50 그가, 결혼한다. -3 end [6] 하누리 2008-10-18
» 그가, 결혼한다. -2 [2] 하누리 2008-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