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Christmas Tree -하-

  어두운 하늘, 늘 익숙한 서울의 밤하늘이었지만, 여전히 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땅 아래 불빛 탓이 아닌 낮게 깔린 두꺼운 구름 층 때문이었다. 조짐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은영은 싸늘한 강바람에 옷깃을 여몄다.
  "정말 이 한강변을 걷고 싶은 거예요?"
  지금이라도 제발 따뜻한 거리로 돌아가자고 말하기를 바라며 그녀는 애비의 입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싱글싱글 웃는 그의 입은 도통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바글바글한 연인들의 강변에, 크리스마스 특별로 온통 전구로 도배를 한 부두와 유람선을 바라보며 이 이상 재미있는 일이 없다는 듯이 구경하고 있었다.
  "왜요? 여기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인 거 아닌가요?"
  '도대체 그건 어디서 듣고 온 거야?'
  "부자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겠죠. 아니면 시간이 남아돌다 못해, 체력소모를 해보려고 날뛰는 인간들의 로망이던가요."
  안 그래도, 오는 내내 지하철 내 사람에 치이고, 바글거리는 차들에 치인 은영은 더욱 더 지쳤다. 그리고 강바람은 찼다. 애비는 그런 은영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은영씨는 한강 한번도 안 와봤어요?"
  "출근할 때 지나가긴 하죠."
  "……."
  별 감흥 없이 말하는 은영의 태도에 조금 실망한 듯 기운이 빠진 애비를 보고 은영은 검은 강물을 바라보며 조금 더 생각에 잠겼다.
  "한강에 얼음이 얼면, 정말 장관이에요."
  애비는 금새 자세를 바로잡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일단 말하기 시작한 은영은 꿈을 꾸는 듯이 자신의 말에 빠져들어, 애비의 존재를 잊어가고 있었다.
  "빙산이 둥둥 떠 있는 거 같죠. 뭐, 진짜 빙산은 본 적 없지만, 그걸 보고 있으면, 전 가끔 한강이 바다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즐겁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애비는 빙그레 웃었다.
  "은영씨, 사실은 여기 오고 싶었죠?"
  "예?"
  "말하는 모습이 즐거워 보여요."
  "음? 아, 아니에요. 음... 원래 사람들은 엄마 뱃속에서 헤엄치던 기억 때문에 물을 좋아한다잖아요. 그런 거예요. 좋아하긴..."
  "하하, 은영씨는 부정하는 방법이 특이하네요."
  은영은 횡설수설대다가, 애비의 웃음소리를 듣고는 목덜미가 붉어졌다.
  "애비씨는 내가 말하는 게 다 재밌죠?"
  그녀는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그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나에게 은영씨는 은영씨의 한강 같아요. 은영씨를 보고 있으면 즐거워요."
  "애비씨가 나무의 정령이라서? 내가 크리스마스 때마다 구해주니까?"
  그녀는 그를 놀리고 싶어서 반쯤 빈정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그는 또 다시 웃었다. 은영은 그의 그 진지함에 조금 당황했다. 그리고 그 따뜻한 미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그런 그의 얼굴에서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제발 그렇게 웃지 말아요."
  "네? 왜요?"
  은영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어 마음을 진정시켰다.
  '죄책감이 드니까...'
  가슴속의 두근거림을 속이고, 그녀는 눈을 떴다.
  "그러니까, 그런 순진한 척 묻지 말라니까요."
  가면을 쓰고, 마음 속 아련함을 얇은 천으로 아슬아슬하게 덮은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유람선... 타고 싶었는데..."
  그는 어느새 반짝거리는 유람선을 바라보며 부러워하고 있었다. 은영은 쓴웃음을 짓고는 다시 호통치듯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 같은 날은 남아있는 표가 없다고 했잖아요. 좀 좋은 데나 편안히 뭘 할 수 있는 곳은 예약하지 않으면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안된다니까요."
  "그럼, 걸어요. 어쨌든, 걷는 건 공짜겠죠."
  애비는 은영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는 망설이며 그가 내민 손을 무작정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연인처럼'이라고 했죠?"
  그는 은영의 코트 안에 숨겨진 손을 잡아 자신의 코트 주머니 안에 넣었다. 은영은 두근거림이 팔을 울려 애비에게 전해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애써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차가워요. 연인의 손은 좀 더 따뜻해야 할 것 같지 않아요?"
  "아, 미안해요."
  "후후, 됐어요. 농담이에요."
  은영은 자신의 말 한마디에 금새 시무룩해졌다가, 싱글벙글 웃는 그가 어린아이 같아서 좋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그녀가 애쓰지 않아도 웃을 수 있게 했다.
  "애비는 뭐를 좋아해요?"
  "나요?"
  "네."
  "으흠, 글쎄요."
  "뭘 좋아하는 지 금새 생각이 나지 않아요?"
  애비는 조금 생각하더니, 은영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녀는 뜬금 없이 자신을 보며 웃는 그의 행동에 의아했다.
  "왜요?"
  "사람."
  "네?"
  "난 사람이 좋아요."
  "사람이?"
  "은영씨는 싫어요?"
  "음? 아니, 싫을 때도 있고, 좋을 때도 있고...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는 또 다시 그 예의 미소를 지었다.
  "은영씨는 귀엽네요."
  "옛?"
  은영은 놀라 후다닥 팔을 휘저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애비는 또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은영은 자신이 마치 어린아이의 장난감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예를 들어, 이런 반응을 하는 은영씨 라든가. 이런 걸 보는 게 즐거워요."
  은영은 확신했다. 이 인간은 분명히 날 갖고 놀고 있다는 사실을.
  "애비씨, 이 크리스마스에 왜 정령타령하면서 연인처럼 해달라는 지 알겠어요. 분명 당신한테 여자친구 안 생겨요. 사람 괴롭히는 걸 즐기잖아요."
  "예? 으흠, 왜요? 난 사람 괴롭히는 거 아닌데."
  그녀는 또 다시 확신했다. 이 인간이 자각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애비씨, 그 성격 안 고치면..."
  "아! 다리다!"
  걷고 있던 그들 앞에 다리가 있었다. 애비는 다리를 발견하고는 기쁘다는 듯이 외쳐댔다.
  '더불어 사람 말도 안 듣는군...'
  "여기 건너요. 재미있겠다."
  "재미없어요."
  은영은 딱 잘라 말했다. 신나게 다리로 걸음을 옮기던 애비는 당황했다.
  "네?"
  "거긴 사람용 아니에요."
  "네? 그럼 저 인도는 뭐예요?"
  "장식이예요."
  "예~?"
  "혹은 강바닥에 볼일 있는 사람, 혹은 주목받고 싶은 사람들 전용도로예요."
  "예에?"
  은영은 놀라면서 전혀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인도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싫다고요."
  "아?"
  "이 추운 날 강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면서 걸어서 이 강을 건너고 싶은 거예요?"
  애비는 그제서야 이해됐다는 표정을 하더니, 은영의 손을 놓고 한쪽 코트를 벗었다. 그리고 코트를 열어 그녀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뭐하는 거예요?"
  은영은 예고 없이 하는 그의 행동에 조금씩 익숙해져서 그다지 놀라진 않았지만, 그가 그러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기분 좋을 거예요. 같이 걸어요."
  그는 웃으면서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 대신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따뜻하죠?"
  그의 큰 몸에서 흘러나오는 열기 때문인지, 은영의 얼굴이 달아올라 더웠다. 다리의 불빛은 끝에서 중앙까지 7가지 색깔로 바뀌며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긴 거리를 걸으며 은영은 씁쓸하게 위를 바라보았다. 바로 앞에 있는 다리 중앙의 철골 장식물은 보이지 않았다.
  "장식물 때문에 사람이 죽는 건 이상하죠?"
  애비는 은영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올렸다. 월드컵 기념물인 금속조각이 다리 위에 있었지만, 그의 눈에도 그것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아니에요."
  은영은 다시 위를 올려보았다.
  "어쩐지, 이 장식물을 보는 건 죄책감이 들어요. 그래서 예쁘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렇다고 아~주 예쁘다면, 사람이 죽을 정도로 예쁘다고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고..."
  애비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던 손을 올려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자신을 행해 돌려놓았다.
  "아니에요, 은영씨. 그건 '사고'예요. 장식물 탓이 아니에요."
  그의 코트가 흘러 내려, 은영의 어깨는 추위에 떨렸다. 하지만, 그의 손은 어느새 인가 따뜻해져 차가운 은영의 볼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러니까, 장식물을 바라보며 아파하지 말아요."
  그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은영은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마음 아파 까지 안 해요. 모르는 사람이고..."
  그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말없이 떨어진 코트자락을 올려 은영의 어깨를 감쌌다. 그는 은영이 시선이 아래로 향한 사이 고개를 들어 금속조각으로 향했다.
  "이런 날일수록 더 예쁘겠죠?"
  은영은 애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살짝 웃으며 다시 은영을 내려보았다.
  "크리스마스 트리요."
  "……."
  "어쩐지, 난. 은영씨가 줄에 걸려 넘어져서 전선이 꼬이고 끊기는 바람에 트리 전구가 꺼졌을 때도, 사람들에 밀려서 들고 있던 커피를 마침 연결해놓은 플러그에 쏟았을 때도, 그건 크리스마스에 크리스마스 트리에 일어나는 기적 같았어요."
  "정말 3년 내내... 봤네요."
  "그래서 묻고 싶었어요. 왜 작년에 정말 가위로 잘랐는지... 여지껏 사고였지만, 작년은 아니었으니까요."
  그의 얼굴이 똑바로 그녀, 은영을 바라보았다. 그랬다. 그것은 처음 자신에게 자기소개를 하며 바라보던 그 얼굴이었다. 그 엷은 색의 눈동자가 왜 그렇게 자신의 마음에 파고들었는지 은영은 알 수 없었다.
  "그건..."
  그의 손가락이 은영의 긴 머리카락 몇 가닥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은영은 두려웠다. 무엇이 일어날지 마치 알고 있는 듯이 두려웠다. 그 때였다.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졌다. 둘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저기 봐요."
  그가 번화가를 향해 가리켰다. 아니, 번화가였을 곳을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그랬다, 그가 가리킨 곳은 아무것도 없었다. 불과 수십 초... 크리스마스를 남겨두고, 도시는 인위적인 불빛을 잃어버렸다.
  "정전인가봐요."
  "아니면, 올해도 크리스마스 기적이 일어난 건지도 모르죠."
  "곧 다시 들어 올 거예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럼 기적이 일어난 동안..."
  그는 고개를 숙여 은영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의 가벼운 키스에 은영의 눈이 커졌다.
  "나, 은영씨 안고 싶어요."
  그녀는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순진한 얼굴로 말하지 말라고... 그러나, 그러기에 그녀는 그에게 너무 휘말렸다.

  창 밖은 크리스마스 특수를 누리듯 방금까지 걷던 다리의 아름다운 빛의 전희와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이 불빛밖에 보이지 않은 형체의 유람선이 까만 강 위를 흐르고 있었다. 낮선 방에 들어온 은영은 두려움에 익숙함을 갈구하며 창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꺼진 방에서 밤의 전망은 그녀의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키스해도 될까요?"
  그녀의 두려움을 감지한 애비는 손이 닿는 거리까지 오자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등뒤에서 손을 뻗어 그녀의 손가락에 얽었다. 흠칫 놀라 은영은 긴장해서 몸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순순히 그에게 손가락을 내 주었다. 애비는 그녀의 손을 서서히 잡아당겨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도록 하였다.
  "나, 당신 좋아하지 않아요."
  그녀는 그가 상처받을까싶어 걱정되었지만, 솔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애비는 따뜻하게 웃으며 다른 손가락들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따라 얼굴 선을 따라 훑었다.
  "알아요, 당신이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어째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상처받을 거라 걱정되며 말한 말에 대한 답이 은영의 마음에 파고들며 아픔을 안겼다. 그리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미안해요. 안 그럴 게요. 안 해요. 걱정 말아요. 자, 이렇게 떨어질게요."
  놀란 애비는 다급하게 손을 떼며 떨어지려 했다. 그러자 은영이 멀어져 가는 그의 손을 잡았다.
  "아니에요. 그래서 그런 게."
  그녀는 애비의 한 손을 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울었다. 마치 엄마의 손을 붙잡고 울면서 집으로 향하는 아이처럼, 계속, 계속 눈물을 흘렸다. 애비는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은영의 등에 손을 얹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손을 들어 그의 고개에 가져댔다. 둘은 침대에 휩싸여서 서로의 옷을 천천히 풀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열린 옷 사이로 갈비뼈를 거쳐 배를 쓰다듬으며 허리를 감쌌다.
  "응..."
  그녀가 기분 좋은 목소리를 냈다. 애비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자신의 윗옷을 벗어 던졌다. 어둠 속에서 그의 체취가 그의 몸무게에 깔린 은영의 코끝에 스쳤다.
  "애비..."
  은영이 두려운 듯 손을 뻗었다. 애비는 그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어 맞추며 속삭였다.
  "나 여기 있어요."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깊게 키스했다. 은영은 갑자기 공기가 사라지는 듯한 딥키스에 숨이 막혀왔다. 그리고 곧 그의 손이 그녀의 청바지 속으로 흐르듯 들어왔다. 애비가 은영의 허리띠 버클을 풀자, 은영도 그의 허리띠로 손을 가져갔다.
  "예의 같아요. 혼자 풀고 다하면, 어쩐지 이상하잖아요."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쑥스러웠는지, 시키지도 않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애비가 웃음을 터뜨렸다.
  "은영씨는 정말 귀여워요."
  은영은 입을 내밀며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또 내 반응 보는 거예요?"
  하지만, 애비는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쓸어 내리고, 목덜미에, 쇄골에, 그리고 가슴 계곡에 키스를 하면서 내려갔다.
  "애비?"
  "당신이 정말 갖고 싶어."
  한번도 말하지 않은 강렬한 말투에 은영은 전율을 느꼈다. 자신 앞에서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이 엷은 색 눈동자의 남자는 정말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은영은 말없이 그의 얼굴을 당겨 키스했다. 그리고 둘은 손가락이 얽히듯 키스하며 서로를 끌어당겼다.

  "애비?"
  은영은 혼자가 된 침대에서 깨어났다. 그는 곁에 없었다. 은영은 천천히 일어나 방을 둘러보았다. 은영은 거짓말처럼 정리되어 있는 테이블 앞에 앉았다. 방은 고급호텔답게 고요했다. 그 고요에 그녀는 더욱 불안했다. 1시간쯤 지났을까. 은영은 문득 창 밖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다. 밤 공기가 차갑다고 느끼긴 했지만, 그건 강바람이라서 그런 줄 알았다. 은영은 테이블에서 일어서 창으로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이건... 싫었어. 그 사람이 없는 크리스마스 트리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도..."
  창에 대었던 그녀의 손이 주먹 쥐어졌다. 그리고 은영은 이마를 차가운 창유리에 대었다. 창이 은영의 볼에 흐르는 따뜻한 물에 김이 서렸다.
  "그러니까... 당신이 없는 '기적'같은 거, 단 하루만의 기적 같은 거... 나 싫어요."
  하얗게 된 세상도, 그리고 그 위를 여전히 내리고 있는 눈도, 은영은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어제의 기적이 평범한 오늘이 되어버린 것처럼, 오늘의 이 하얀 기적이 내일 녹아버린 본래의 빛으로 돌아가 버릴 것이 너무 아팠다.
  "나... 당신한테 좋아한다고 말도 안 했잖아요, 애비... 이럼, 이럼 똑같잖아. 다시 켜진 크리스마스 트리 불빛처럼. 똑같잖아!"
  은영은 주저앉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딸랑,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커피숍에 들어섰다. 그녀는 추운 듯 따뜻한 실내로 들어서자마자 떨면서 목도리를 풀었다.
  "오빠, 오빠 탓이니까. 어떻게 해봐!"
  목도리가 풀리면서 입도 같이 풀린 듯, 들어선 여자는 다짜고짜 바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알아..."
  민사장은 그녀를 위한 커피를 따르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바에 있는 의자에 자신의 코트와 목도리를 걸치고 앉았다. 그리고 그가 따라준 커피를 감싸쥐면서 잠시 따뜻함을 갈구했다.
  "정말! 이게 뭐야!"
  "……."
  "도대체! 왜 생판 모르는 외국인한테 은영씨를 맡긴 건데!"
  "맡기지 않았어."
  그녀는 그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은영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려서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은영씨가 울었을 때, 정말 놀랐지만..."
  "은영씨는 그 동안 너무 안 운 거야."
  "알아! 알지만..."
  지연은 할 말이 없어져, 커피를 입가에 가져갔다.
  "이런 거... 정말 싫다구."
  그녀는 희미한 커피숍 창문 밖으로 어느 비석 앞에 서 있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늘은 그녀의 기분처럼 회색 빛으로 꾸물거렸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독일가문비 [獨逸-, Norway spruce]
겉씨식물 구과목 소나무과의 상록교목.
학명  Picea abies
분류  겉씨식물 구과목 소나무과
원산지  유럽
서식장소  토양이 깊은 기름진 땅
크기  높이 30∼50m

19XX년, 수입되어 명사동 1가 21번지에 서 있었던 이 나무는 수명이 다 되어, 독일 환경연구가의 요청으로 송환되었습니다. 20여 년 동안 한자리에서 변함 없이 거리를 지키고, 크리스마스 트리로 늘 거리를 꾸며주었던 이 나무를 기리며 이 자리에 이 기념비를 세웁니다.

20XX년. 12월 31일.

  은영은 기념비의 글자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학명, Picea abies. 그녀의 손가락이 그곳에 멈추자, 그녀의 눈시울이 다시 뜨거워졌다.
  "학명, 피케아 아비에스..."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려봤다. 현실감이 없는 목소리. 결국, 그녀의 볼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적...이면, 사람을 웃겨야 할 거 아니에요. 순, 지만 웃고 가고... 사기꾼."
  그러자, 뒤에서 걷던 사람이 놀라서 발을 멈췄다.
  "아니에요. 그건, 저기. 그러니까, 학회는 끝났는데, 갑자기 친구가 도와달라고 불러서, 그게 연구자료에 관한 얘기를 하다보니까 길어져서..."
  "응?"
  은영은 잠시 잘못 들었나 싶어서 멍하니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섰다. 그러자, 그녀의 앞에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며 서 있는 금발의 남자가 있었다.
  "아, 저기, 해가 바뀐 건, 잠깐 들어온 거라서 그러니까 마침 비자가 만료일이라 다시 나가지 않으면 안됐는데... 비행기는 그거 하나였고... 저기, 은영씨?"
  "신분증명서, 아니면 여권."
  "네?"
  "신분증명서! 아니면 여권!!"
  "네..."
  그는 순순히 여권을 꺼내서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피씨-애비스 신?"
  "...아니요, 피케아-아비에스 신이에요. 아버지가 식물학자인데, 마침 내가 태어난 날이 크리스마스라서, 병원 복도에 있는 나무를 보고 지었다고. 그게 독일 조림목이었는데, 독일가문비는 독일에서는 일반적인 나무라서..."
  "진짜예요?"
  은영은 손가락으로 그의 얼굴을 만졌다. 그가 오기 전에 터뜨린 눈물은 벌써 흘러내린 자국을 따라 계속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은영씨..."
  "진짜냐고요!"
  애비는 자신보다 작은 은영을 살짝 숙여서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내 이름을 딴 농담이었는데...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으흑... 흑..."
  "나, 진짜예요. 거짓말 아니에요. 여기 있어요."
  "나... 흑."
  은영은 눈물을 삼켰다.
  "나, 당신 좋아해요."
  애비는 조금 멈칫하다가 그녀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도, 좋아해요."
  회색 빛 기념비, 회색 빛 거리, 회색 빛 하늘. 그 무채색 겨울의 도시 위로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1-05 17:39)

댓글 '18'

Jewel

2004.12.22 01:07:32

아하하; 애비는 장난꾸러기야요 >_<

Junk

2004.12.22 01:08:33

억. 새로운 다크호스가... 과객연가님 반갑습니다. 애비, 너무 매력적이군요.

떠돌이별

2004.12.22 01:13:43

아웅~ 넘 멋져요 //ㅅ//b 애비가 넘 귀엽! 근데 궁금궁금- 어떻게 해서 애비는 3년여동안 은영을 지켜본걸까요...은영의 전 애인은 왜 헤어지자고 한걸까요...에필을 기대해 볼까나...'ㅡ'a

ciel

2004.12.22 01:15:53

... 올렸군 결국... ... 그러니까 애비를 날 달란 말이쥐... (투덜투덜)
저런 아기자기한 것을 보면 항상 연애를 하고 싶어져... ㅠㅠ (그러고 보니 올해도 솔로부대... OTL)

과객연가

2004.12.22 01:25:56

Jewel/^^;;; 원래 성격이죠. Junk/예, 안녕하세요.^^ 좋아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떠돌이별/애비 인기 폭발이네요.^^ 감사합니다. 근데...에필 써야 합니까...?ㅜㅜ ciel/응, 그래... 그러니까... 어쩌라고?? (나도 동병상련이야...ㅜㅜ)

까망사자

2004.12.22 02:55:10

님의 글은 아마도 처음 읽는 거 같네요. (아닌가?)
너무 즐겁게 읽었습니다. 애비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답니다.
애비와 은영처럼 저에게도 그리고 정파의 모든 가족들에게도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가 되었음 합니다.
정파에 좋은 글 많이 남겨주시고 해피 크리스마스입니다!!!!

수룡

2004.12.22 08:42:47

구라쟁이 애비 ㅎㅎ; 즐겁게 잘 읽었어요! >_<

리체

2004.12.22 12:07:49

어쨌거나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에는 기적을 바라는 거 같아요. 그 바램대로 실제로도 기적이 일어난다면 정말 좋겠는데. 흑흑. 잘 읽었습니다.

선영

2004.12.22 12:24:08

넘넘 잘읽었어요~~에필에필!!

과객연가

2004.12.22 21:12:21

까망사자/네, 처음 올려봐요. 즐거우셨다니 다행이네요. 까망사자님도 좋은 크리스마스 되세요!^^
수룡/^^ 감사합니다.
리체/네, 크리스마스는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은 걸 기대하죠. ^^ 감사합니다.
선영/^^ 감사합니다. 에필...크윽..(ㅜㅜ)

agjac

2004.12.23 00:44:00

크리스마스는 가까워오고...글들은 솔로의 가슴에 불을 땡기고....
어떻게 책임지실래요..-_-;;;

토리아

2004.12.23 03:19:48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에필올려주시면 감사감사^^

릴리

2004.12.23 10:08:47

불은 유부의 가슴에도 지펴졌습니다.;;;
너무 귀엽고 재밌었어요.>.< 에비같은 스토커라면 언제든 환영인데..흑흑(정신차려!!)
저기.. 근데 ciel님 친구세요? 앞으로 느무느무 기대됩니다.*_*

과객연가

2004.12.23 12:27:48

agjac/아하하...^^;;; 저기... 그게...
토리아/감사합니다.^^ 에.... 그러니까 그건...ㅜㅜ
릴리/허걱... 아, 저기... ^^;;; 재밌게 읽으셨다니 다행이네요. ^^;; 애비.. 달라는 사람이 많네요. 네, ciel과는 오랜 친구사이입니다.^^ 감사합니다.

은기

2005.01.16 08:15:43

앞에서 부터 몇 편 쭈~욱 외국인 남정네들이 나오네요
것도 넘 매력남들만 ,,, 음 ,,, 그래서 ,, 왠지 서럽다는 ??? ..
그게 뭐시냐 ,, 한번의 경험도 없이 동글한 토종이랑 결혼 해서 애까정 낳았다는 ,, ^^;;;
아!! ,, 여기서 경험이랑 그냥 단순한 만남 !! ,,, 누가 뭐랬나 *^^*

과객연가

2005.01.17 14:47:07

글쎄요... 딱히 외국인 선호는 아니라서. 전 그냥 평범하게 한국남자랑 만나서 결혼하고 싶다라는 쪽인데요.^^;; 그리고 남자는 뭐, 경험상 그게 그거인 듯 싶으니, 지금 결혼하셨다면, 무척 운이 좋으신 분이네요. (일단, 싱글의 입장에서는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바람마녀

2005.12.21 18:23:35

크....클수마스에 염장지르는 글이 많이 올라오지만 대리만족이랄까....작가님들 고마워요

과객연가

2005.12.28 21:50:02

허걱... 일년전 글인데요...ㅜㅜ 그래도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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