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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98
3. 그와 그녀의 Eve.
"스트레턴 호텔이라니. 그 비싼 데를?"
"뭐 어때? 이번 한 번인걸. 그리고 이거."
민국이 아리수에게 흰 봉투를 내밀었다.
"잘 놀다 와. 응?"
"야. 웬지 겁나잖아. 너 사실 나 빨리 시집 보내고 싶은 거 아냐?"
"그런 거 아냐."
민국이 심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물론 포악스러운 누나의 존재가 가끔은 정말 싫기도 했지만 누나가 없는 집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까.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말고. 사실 내가 따라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오늘 아빠가 날 들들 볶을 생각을 하신 것 같으니."
"민국아! 화분 나르다 말고 어디 갔냐?"
방 문 너머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질색한 얼굴을 한 민국이 속삭였다.
"잘 다녀와. 그리고 재미있게 있다 와."
"응. 그래."
스웨터에 일자 바지를 입고 모자를 눌러쓴 누나는 서툰 솜씨로 모처럼 화장까지 했다. 털모자를 눌러쓰고 한숨을 내쉬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귀여워 보여 민국은 쿡 하고 웃었다.
"너무 늦지 말고. 밤 길 조심하고. 너무 늦으면 연락해. 마중 갈게."
"미친 놈. 잡아가라고 해도 안 잡아갈 거다. 새우잡이 어선에 팔아 넘길 거라면 모를까."
"어쨌든. 알았지?"
"그래. 다녀올게."
현관을 나서는 누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민국은 걱정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묘하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이, 좋지 않았다.
"머리 썼구나."
"쉿. 비밀이에요."
"뭐 하는 수 없지."
지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한국에 오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형의 간섭이라면 지긋지긋해하는 막내 의붓 아들을 건드린 것은 그녀였다. 그 의붓 아들이 형들을 피해 서울 거리를 쏘다닌다는 것까지 그 형에게 일러바친다면 아마도 이 사람 좋아보이는 의붓 아들은 드물게도 화를 낼 것이다.
"하루종일 뭐 하고 쏘다니려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사람들에게 치이게?"
"뭐 그래도 좋고요. 보고 싶었던 영화도 있고. 별신굿 자료 찾으러 서점에도 가야 하고. 그러니까 지인."
"응?"
"내 핸드폰 좀 맡아줘요."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띄며 세드릭이 핸드폰을 지인의 열린 핸드백으로 떨구고는 지하철 역 입구로 빠르게 사라졌다.
"잠깐. 세디! 세디!"
지인의 다급한 음성이 들린 것도 잠시. 이미 세드릭의 모습은 지하철 역 안으로 사라진 후였다. 지인은 한숨을 쉬었다.
"나보고 도대체 뒷 감당을 어떻게 하라는 거야?"
"분명히 여기가 맞을 텐데."
스트레턴 호텔의 지하에 위치해 있는 작은 칵테일 바에서 일자 청바지에 빨갛고 귀여운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앉아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여기서 여섯시가 맞을 텐데."
벌써 세 시간 째였다. 익숙하지도 않은 칵테일 바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왔다갔다하던 아리수는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내 복에 무슨 잘생긴 남자. 민국이 녀석 들어가면 죽었어!"
투덜거리면서 막 일어서려는 순간, 금빛 단발 머리에 푸른 눈을 한 남자가 칵테일 바로 막 뛰어들었다.
"늦으면 어떻게 해요?"
한국어에 서툴다고 했던 동생의 말도 잊고 아리수가 소리를 빽 질렀다.
"저기."
"세 시간이나 기다렸단 말이에요. 이럴 거면 뭐하러 약속을 잡냐고요!"
"그게."
남자의 푸른 눈이 재미있다는 듯 빛났다.
"나가서 이야기하죠. 오늘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뭐야. 생각보다 매끄럽게 이야기 하잖아.
아리수가 그 남자에 대해 처음 느낀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분명 우리말에 서툰 유학생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생각 외로 남자의 발음은 매끄럽게 돌아갔다.
미안하다고 말하며 자연스럽게 팔을 두르고 뒤로 돌아서는 남자에게 아리수는 별로 수상한 구석은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막 남자의 뒤를 따라 들어온 두 명의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세디였단 말이야.』
『잘못 본 게 맞다니까. 게다가 내가 세디라도 오늘 이 호텔엔 안 와. 레녹스 형.』
레녹스 스트레턴이 자신의 눈을 비비며 다시 칵테일 바 안을 샅샅이 살폈지만 막 나가는 한 쌍의 연인들과 다른 몇몇 평범한 동양 연인들 말고는 막내 동생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요즘 너무 피곤했던 거야 레녹스 형. 그만 포기하자고.』
『쳇.』
자신을 슬슬 달래는 동생 콜린의 말을 들은 레녹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포기하곤 칵테일 바를 나갔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볼 일이 많아서요."
"한국어 원래 그렇게 잘 해요?"
"열의만 있다면 누구나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세드릭은 위기의 순간을 헤쳐나갈 수 있게 도움을 준 여자를 바라보았다. 볼살이 통통한 여자의 머리에는 흰 털모자가 씌워져 있었고 반쯤 열린 검은 더플 코트 안에는 빨간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어쨌든 만나서 반가워요. 이 아리수에요."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아. 세디에요."
여자가 쿡 웃었다. 볼이 더 통통해지는, 귀여운 미소였다.
"애칭이에요?"
"아마도."
"그럼 세디씨. 무슨 바람이 들어서 스물 여덟살의 뚱뚱한 여자를 소개받는데 동의했는지 물어도 될까요?"
여자는 스트레이트 한 성격인 것 같았다. 처음 본 남자에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정도면 자신에 대해서 대범한 것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세드릭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냥 뚱뚱한 여자가 취향이라고 해 두죠."
거짓은 아니었다. 그는 항상 볼살이 귀엽고, 작고 통통한 여자가 좋았다. 손으로 잡으면 적당하게 살이 잡혀 늘어나고, 안으면 살집이 풍만해서 파묻히는 듯한 느낌이 나는 여자들. 눈 앞에 있는 여자도 스웨터와 코트의 중무장으로 눈이 속는 것이 아니라면 충분히 취향인 여자였다.
"별나시네요."
여자의 묘한 뉘앙스가 담긴 말이 끝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여자 쪽이었다.
"사실 동생을 죽도록 졸라서 겨우 성사시킨 소개팅인데, 기다리다 지쳤는지 별로 소개팅 같은 마음이 나질 않네요."
뭐라고 대꾸해 줄 수가 없어 세드릭은 그냥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서 있었다.
"모처럼 나오셨는데 죄송해요. 그냥 들어가시는 것은 세 시간이나 약속에 늦어서 벌 받는거라고 생각하시고. 저는 그냥 잘생긴 남자로 눈요기 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네요."
"저기."
여자의 말은 산뜻했다. 그리고 앞서 가는 발걸음도 산뜻했다. 아마도 잡고 싶었던 것은 그 산뜻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뒤에서 들려오는 형들의 목소리 때문이었을지도.
『글쎄, 정말 세디인줄 착각했다니까.』
『크리스마스 파티고 뭐고 싫다고 도망간 녀석이 설마 여길 올까. 설마 파티 집어 치울 거야 레녹스 형?』
"네?"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함께 할까요?"
크리스마스까지 앞으로 세 시간. 세드릭 스트레턴은 처음 보는 여자에게 함께 있어줄 것을 청했다.
"진짜로요?"
"진짜로."
세드릭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만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늦은 것은 아니었네요 그럼."
"그렇지 않았어요."
세드릭이 힘을 주어 말했다.
"세 시간 남았어요. 난 자정에는 들어가 봐야 한다고요."
"세 시간 동안 풀 코스로 모시겠습니다."
세드릭이 아리수에게 찡긋 윙크하며 말했다.
"최상의 서비스를 해 드리지요."
이 남자. 선수 아냐?
아리수가 세디에게 두 번째로 느낀 감정이었다.
아무리 뚱뚱한 여자가 취향이라지만, 선수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꽃미소를 풀풀 날리면서 상냥하게 자신의 말에 대꾸해 줄 리 없었다. 게다가 처음 만나는 여자를 데리고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들어와서는 최고급 풀코스 정식을 시키다니.
"민국이의 3년치 용돈을 모으면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입 안에서 살살 녹는 티 본 스테이크를 씹으며 아리수가 우물거렸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사실에 가까운 말을 하며 세드릭이 속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대답했다. 호텔 경영주의 동생으로서 그는 스트레턴 호텔 내에서의 모든 서비스를 무상으로 받을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받지 않았던 혜택을 지금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큰 형인 레녹스가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뭘 그렇게 걱정해요?"
아리수가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묻고는 포도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네?"
"내가 민국이를 찾으려고 소리소리 지를 때의 민국이와 대한이 표정을 하고 있네요. 형님이라도 쫓아와요?"
정곡을 찌른 말에 세드릭이 펄쩍 뛰었다.
"아. 아뇨. 아니에요."
아리수가 쿡 웃었다. 볼살이 부풀어오름과 동시에 귀여운 보조개가 보이자 세드릭은 침을 꼴깍 삼켰다.
"거짓말 잘 못하네요."
"네?"
"그렇게 웃지 말아요. 너무 귀엽잖아요."
반쯤 꼬인 말투로 아리수가 말했다.
"취했어요?"
"아, 어쩌면. 내가 술 못한다고. 민국이가 이야기 안 해요?"
반쯤 꼬인 말투가 귀여웠다. 말투는 꼬여있었지만 말은 따박따박 하고 있다. 제정신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모습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일탈이 지나친가?
세드릭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지웠다. 자유라면 한국으로 와서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하고 싶은 공부도, 가고 싶은 곳으로의 여행도. 무엇보다도 형들의 잔소리도 충분히 잘 피하고 있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하기 싫은 일을 적당히 피하는 평소와 같은 생활의 연장인데도 이상하게 엇나가는 느낌이었다.
"아리수씨?"
"흐응. 민국이가 얘기 안 해줬네? 헤헤."
베시시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평소에 술 취한 여자를 귀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무슨 조화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민국이 덕에 호사 해 본다. 세디를 꼭 달믄 잘생긴 남자. 힉. 게다가 풀코스 정식에 포도주."
세드릭은 노파심에 포도주를 살펴보았다. 2/3 이상이 아직도 병 안에서 찰랑거렸다. 기껏해야 한 잔, 아니 반 잔 정도 마셨다는 이야긴데 벌써 저렇게?
하지만 아까보다 희고 뽀얘진 얼굴로 키득거리고 있는 아리수는 분명 술에 취해 있었다.
"즐거워요. 나. 이런 경험. 처음이야. 힉."
"정말로요?"
"거짓말. 안 해. 힉. 들어가면. 민국이. 힉."
딸꾹질을 거듭하면서도 스테이크에 칼질을 해대는 아리수를 바라보던 세드릭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접시를 당겼다.
"힉. 나. 아직 다 못. 힉."
"썰어줄게요."
세드릭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차분하게 고기를 써는 세드릭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리수가 툭 말을 내뱉었다.
"힉. 저기요."
"네?"
"힉. 최고의 크리스마스 이브에요."
세드릭이 고개를 들었다.
"나. 이대로 친척 아닌 남자와 힉. 손도 못 잡아 보고 죽는 줄 힉. 알았어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힉. 잘생긴 남자랑 끝내주. 힉. 곳에서 밥도 먹고, 잘생긴 남자가 서비. 힉. 헤헤."
순진한 건지. 아니면 취해서 헛소리 하고 있는건지 당최 가늠이 되지 않았다.
"힉. 저기요."
"네?"
"힉. 초면에 실례지만 나랑 자 줄래요?"
"네?"
세드릭이 눈을 크게 떴다.
"보시하는 셈 치고. 힉. 나랑. 힉. 자줘요, 힉."
반쯤 눈이 감겨서 아리수가 중얼거렸다.
"잠깐만요."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야... 처녀 딱지만 떼면..."
웅얼거리는 말을 듣자니 정신이 없었다.
"자. 잠깐만요. 아리수씨. 지금 취했어요."
"취중 진담. 힉. 힉. 힉."
아리수가 딸꾹질을 연속으로 하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닮았어..."
"잠. 잠깐만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까지 접시가 있던 곳에 머리를 박는 아리수를 바라보던 세드릭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그리고 가까스로 잡은 객실 침대에 아리수를 눕혔을 때도 같은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세 시간 동안 풀코스로 모신다고 했는데."
뭔가 아쉬웠다. 드물게도 진심으로, 이 여자의 세 시간 상대가 되어서 풀코스로 해 줄 마음이 났었다. 팔짱을 끼고 바깥을 누비는 다른 연인들 사이에 끼어서 명동으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러 나간다든지, 카페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든지, 그것도 아니면 분위기가 있는 재즈바에서 재즈 연주를 들으며 진과 소다수를 마신다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꽤 로맨틱한 심야영화를 본다든지 하는.
솔직함과 어쩐지 바보같아 보이기까지 하는 순진함이 묘하게 섞인 여자라서 그랬을지도.
"잘 자요. 어쨌든 아쉽군요."
털모자와 코트를 벗기며 세드릭이 천천히 그녀의 콧등에 키스하며 말했다.
"으응."
머리가 아프고 목이 깔깔한 어딘지 모르게 깔끔치 못한 기분을 느끼며 아리수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목 아파."
"물 마실래요?"
불쑥, 눈 앞에 보이는 파란 구슬 한 쌍.
"힉!"
"생각보다 빨리 깨네요. 잠드는 것 만큼이나 빨라요."
세드릭이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다가가 생수를 꺼내며 말했다.
"자. 잠깐만요. 지금."
"마셔요."
약간이라도 이성이 있는 여자라면 가운만 입은 낯선 남자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내미는 물을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먹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막 잠에서 깨어났다고는 하지만 아리수에게는 약간의 이성이 남아있었다.
"지. 지금."
"목. 안 말라요?"
너무도 태평한 남자의 태도에 아리수는 할 말을 잃었다. 어색함과 낯뜨거움에 물병을 낚아챈 아리수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지금 어떻게 된 거죠?"
"자고 일어난 거죠 둘 다. 난 오늘 하루종일 밖으로만 돌아서 피곤했고. 당신은 술에 취했고."
"그게 아니라. 그. 그 가운은 뭐에요? 그리고 난. 난 또 이건 뭐고요?"
"가운은. 내가 샤워하고 잠들었으니 당연한 거에요. 그리고, 술에 취하면 벗는 거에요? 아니면 잘 때 뭐 입고 자는 거 싫어해요?"
당황해서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대는 그녀와는 달리, 남자는 느긋했다. 얼굴이 벌개진 아리수는 더듬거렸다.
"그. 그러니까. 술에 취하면. 아씨."
반쯤 덜렁거리는 브래지어와 또 왼쪽 발 끝에서 덜렁거리는 팬티를 느끼고 아리수는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넣고 고개를 숙였다.
"크큭."
남자가 작게 쿡쿡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술에 취해서 실수를 한 것은 자신. 하지만 남자의 쿡쿡거리는 소리가 심하게 귀에 거슬린다.
"귀여워요."
"어디가요!"
"머리서부터 발 끝까지 다."
한참 쿡쿡거리던 남자가 천천히 침대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까. 진심이었어요?"
"응?"
"같이 자자는 말."
"자. 잠깐. 분명히."
"처녀 딱지 떼고 싶다는 말. 사실이었냐구요."
남자의 푸른 눈이 자신을 응시했다. 바람둥이 같은 미소도 그대로 걸려있었다.
"농담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술 취한 사람의 말을 그런 식으로 진지하게 듣는 것도 웃기는 거잖아요."
"같이 잘래요?"
남자의 눈은 진지했다. 그리고 약간 허스키해지고 외국인 특유의 억양이 섞인 듯한 말투도 진지했다.
"농담이죠?"
"진심인데?"
남자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가슴 위로 닿았다.
"말 했잖아요. 난 통통한 여자가 취향이라고."
말하면서 내뿜어지는 남자의 숨결이 그녀의 얼굴과 코 끝을 간질였다.
"자. 잠깐. 이건. 이건."
"같이 자요."
밀크 푸딩같이 부드럽고, 달콤하고, 사악한 목소리.
"이. 이봐요."
가슴을 천천히 애무하는 손길에 아리수의 말은 더듬거리며 허덕여대고 있었다.
"이. 이건. 아."
"그러니까 같이 가자고요."
왼쪽 가슴을 주무르고 있는 손길처럼 부드럽고, 뜨겁고, 달콤하고 사악한 목소리.
"아학. 하. 하지만."
저항의 소리는 입술을 막는 남자의 입술이 의해서 막혀 나오지 않았다.
4. 그리고 크리스마스.
"미쳤어. 내가 미쳤다고."
차라리 취해 있었다면 취해 있어서 그랬다고 변명이라도 했겠지만, 일이 벌어진 것은 술에 취해 자고 일어나 술에서 깬 다음이었다.
옷을 빠르게 챙겨입으며, 아리수는 자신을 향해 온갖 욕설을 주워섬겼다.
"죽자. 죽어. 설마 민국이가 나 보고 왜곡인에게 잡아먹히라고 내보냈겠냐? 내가 미쳤지. 정녕 미쳤어!"
첫 경험은 꿈처럼 아릿하게 지나갔다. 사실 꿈이라면 더 믿을 정도로 괜찮았다. 그리고 아침에 은근슬쩍 눈을 뜨면서 꿈이기를 바랬다.
"미친 게야 내가 분명."
하지만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금발머리 남자의 자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익숙치 못한 통증은 분명히.
"소원 성취 했네. 제기랄."
물론 처녀딱지를 떼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식으로 이름도 제대로 다 알지 못하는 낯선 외국인과 하룻밤을 보낸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그냥 어렴풋이 상상한 이런 저런 것에 어젯밤에 벌였던 일이 포함되지 않았던 것 처럼.
급하게 옷을 챙겨입고 코트를 걸친 채 핸드폰을 보자 스무 통도 넘는 전화가 와 있었다. 그리고 발신자 표시에 찍혀있는 선명한 이름 '빌어먹을 민국군'.
"아씨."
습관처럼 머리를 긁어올린 아리수는 자고 있는 남자를 그대로 놔둔 채 급하게 호텔방을 나섰다. 그리고 집에 들어서자 마자.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민국이 펄펄 뛰며 물었다.
"뭐가?"
"소개시켜주기로 한 사람에게 전화가 와서, 급한 일이 있어서 고향으로 출국하니까 못 만나겠다고 연락이 왔었단 말이야. 도대체 어젯밤 누구랑 어디서 뭐했어?"
"뭐?"
코트를 걸던 아리수의 손이 떨렸다.
"그 금발 남자. 네 소개 받고 온 남자 아니었어?"
"뭐?"
이번에는 민국이 황당해 질 차례였다.
"아냐. 그럴 리가 없다구."
"하지만 분명히."
아리수는 필사적으로 기억의 파편을 뒤졌다. 분명 금발 벽안의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아는 척을 하면서 달려들기에.
아니지. 아는 척을 한 것은 내 쪽이야. 그러니까 그게.
그제서야 그 남자가 단 한 번도 민국의 이름이나 민국이 소개시켜준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을 떠올린 아리수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저기. 누나. 누나?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거냐고?"
"아. 어제 술 마셨어."
"정말?"
민국이 기가 질렸다는 듯 말했다.
"어떤 금발 남자를 만나긴 했는데, 그 사람도 일행을 착각한 것 같다고 하더라. 약속이 파토난 것 같아서 차 타고 홍대로 가서 재즈바에서 재즈 들으면서 술 마셨어."
"또 개 됐겠네."
"응. 그리고 선옥이네서 잤어."
"선옥이 누나 욕봤겠다."
"으. 으응."
"걱정했잖아. 전화라도 좀 하지. 너무 열 받아서 그럴 정신도 없었어?"
"응."
"저기 누나. 숙취야?"
"그래. 머리 빠개질 것 같아 이 개 자식아."
기운없어 보이는 누나가 수상쩍었던지 계속 캐묻는 민국에게 아리수는 소리를 빽 질렀다.
"앗 따거. 미안해. 잘못했어. 그럼 좀 푹 자."
"민국아."
"응?"
뭔가 말을 하려던 아리수는 그냥 손을 내저었다. 누나의 방을 나오며 민국이 중얼거렸다.
"뭔가 있긴 있는데."
"여자를 찾는데 스트레턴가의 영향력을 사용해 달라고 하면 형들이 화낼까요?"
세드릭이 진지하게 묻자 지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왜?"
"제 크리스마스 선물을 되찾을까 하고요."
"응?"
"최고의 이브를 보냈어요. 어제."
세드릭이 사악해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자랑?"
"예. 무지무지 귀여운 여자랑."
지인이 피식 웃었다.
"레녹스는 펄펄 뛰겠지. 네가 크리스마스 파티를 파토내고 만난 여잘테니까. 그리고 릭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할 테고. 콜린 정도가 편을 들어주긴 하겠구나."
"역시 그렇겠죠?"
"그렇게 좋았니?"
"정말 귀여운 여자였다니까요. 술 주정하는 것도 그렇고, 웃을 때 볼살이 부풀면서 폭 들어가는 보조개도 그렇고. 통통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웠어요. 게다가 안을 때는."
"아."
"지인이 손 좀 써 주세요. 빚 지신 것은 알고 있죠?"
"세디."
지인이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자기보다 연상인 의붓아들이지만, 이렇게 애원하는 표정을 지을때는 한 열 두 살 난 소년의 조르는 표정과 닮아있어 거절하기 힘들었다.
"부탁이에요."
"일단 말은 건네볼게. 하지만."
"알아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 꺼내기도 꽤 망설였다. 하지만 털모자 하나 남겨놓고 떠나버린 여자를 찾을거라고 결심한 다음 바로 생각난 것은 바로 그렇게 싫어하는 가문의 영향력인데 어쩌겠는가.
놀라던 모습도 귀여웠고, 목덜미를 깨물 때 신음하던 모습도 귀여웠다. 게다가 취해서 딸꾹질하던 모습이 떠오르자 금새 달아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 아리수라고 했지."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난 선물 상자 같은 아가씨.
"마음 먹었으니 꼭 찾고 만다고."
5. 재회는 뜻밖의 곳에서.
"그래서?"
"등록해 버렸어. 아. 아바님은 너무하셔."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민국이 투덜거렸다. 집으로 날아온 성적표의 교양 영어 과목을 보신 아버지가 불호령을 내리시면서 외국어 학원에 등록하라고 엄포를 놓으신 것이다.
"잘 됐네 뭐. 학원비 삥땅쳐서 우리 불닭이나 먹으러 가자."
"저기 누나. 동생의 불행에 그런 사악한 생각 밖에 안 들어?"
"불행이 아니잖아. 집에서 차비도 대 주고 학원비도 대 줄 걸 뭐. 나도 다닐까?"
"됐네요. 어차피 하루 가고 땡땡이 칠 거면서."
"그것도 그렇지?"
아리수가 한숨을 쉬며 읽던 책을 덮었다. 멍하니 한 쪽 벽을 응시하는 누나를 민국이 유심히 관찰했다.
약속이 파토났던 크리스마스 이브 이후, 누나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성질은 여전했지만 가끔 멍하니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을 바라보기도 하고, 때때로 한숨을 쉬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놀라운 것은 거금을 주고 구입해서 애지중지하던 구체관절인형 세디를 상자에 넣어서 구석에 처박아 둔 것이다.
"저기 누나."
"응?"
"요즘 어디 안 좋아?"
"아냐. 아무것도."
건성으로 대답하는 일이 하루이틀이 아니지만, 크리스마스 이후의 건성 대답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건성 대답이라 신경이 쓰였다.
"저기 누나.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된 남자 하나 소개시켜 줄까? 정말 건실한데."
"됐어."
묘하게 힘빠진 대답에 민국도 동시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저기. 그만 나가 줄래?"
"어. 응."
나갈 때까지도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는 누나를 바라본 민국은 엉거주춤한 태도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음날.
「뭐? 교재 안 사가지고 갔다고?」
아리수가 수화기에 대고 소리를 빽 지르자 한참 뒤에야 비굴한 목소리가 들렸다.
「학원에서 교재 안 팔아. 한 번만. 응? 불닭도 사 주고, 피자도 사 주고.」
「배반하면 죽는 거 알지?」
「예 누님.」
「금방 갈게 기다려.」
입고 있던 츄리닝에 아버지의 낡은 오리털 파카를 걸친 아리수는 동네 서점에서 급하다는 영어 교재를 사가지고 지하철을 탔다.
"날도 추운데 이 자식이 누님 똥개훈련을 시키나."
투덜거리는 와중에 종로에 도착해 학원 안으로 들어서자, 안 쪽에서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우왕좌왕하는 동생이 보였다.
"교재도 돈도 안 챙겨가면 어쩌자는 거야?"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피자는 리치 골드. 불닭은 소금구이다."
"예, 누님."
한참을 굽신거리고 있는 동생을 두고 막 학원 밖으로 나갈 때였다.
"이 아리수?"
어딘가 낯익은 부드러운 목소리.
"맞아요?"
그냥 무시하고 문을 미는 순간. 자신을 돌리는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한참 찾은 거 알아요? 놀랐다는 것은 짐작했지만 그렇게 갈 줄은 몰랐단 말이에요."
"이 봐요."
"모자 두고 간 거 알아요?"
남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씨."
"크큭. 변하지 않아서 좋군요. 여전히 귀엽잖아요."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귀여워요. 이 통통한 볼 살도. 그리고 이 동그란 콧등도. 그리고."
남자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이 깨물어주고 싶은 입술도."
그리고 두 사람은, 놀라움에 입을 벌리고 쳐다보느라 강의시간도 놓친 민국이 바라보는 앞에서 오래오래 키스를 나누었다.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1-05 17:39)
댓글 '15'
까망사자/ 세디 (구체관절인형이 아닌 남주) 에게는 실제 모델이 있습니다. 저희 아파트 어디엔가 서식하시는 '이웃의 토마스군' 입니다. 민속학 전공... 은 아니고, 우리 국어를 배우기 위해서 함부르크에서 유학온 금발 벽안의 청년이죠. 물론 한국어는 (부끄럽지만) 저 보다 더 매끄럽게 잘 합니다. 그리고 아리수양도 물론 실제 모델이 있습니다. (저런 성격이 마음에 드신다니...;;;) 재미있으셨다니 감사합니다.
수룡/ 사실. 요즘 서점에 일이 많고 집안 일도 줄줄이 쌓여서. 욕구 불만 해소용 환상 단편인 겁니다 저거. (저도 세디요... ㅠㅠ) 그래서 장편으로는 절대 못 써요... ㅠㅠ
가야/ 에필로그는 설날까지 기다리시면 그 때까지는 어떻게... (퍽)
떠돌이별/ 아리수 성격은 실제 모델이 있지만, 세디는 외모 모델만 있을 뿐이니까요... (비중이 약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김영주/ 할 수 있습니다.
선영/ 감사합니다. (--)(__)(--)
chika/ 더 이상 길게 썼었더라면 전 잠을 못 잤을 겁니다. (스트레스 해소와 더불어 밥 하기 위해서 밤 새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한 안간힘이었죠...;;;)
Junk/ 감사합니다. 대한 민국 형제가 실제로 있었군요...;;;; (몰랐습니다.) 그리고 아리수와 민국 남매에서 저와 김군의 삘을 느끼신다면 그건 오해이십니다... OTL (어이. 어이.)
수룡/ 사실. 요즘 서점에 일이 많고 집안 일도 줄줄이 쌓여서. 욕구 불만 해소용 환상 단편인 겁니다 저거. (저도 세디요... ㅠㅠ) 그래서 장편으로는 절대 못 써요... ㅠㅠ
가야/ 에필로그는 설날까지 기다리시면 그 때까지는 어떻게... (퍽)
떠돌이별/ 아리수 성격은 실제 모델이 있지만, 세디는 외모 모델만 있을 뿐이니까요... (비중이 약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김영주/ 할 수 있습니다.
선영/ 감사합니다. (--)(__)(--)
chika/ 더 이상 길게 썼었더라면 전 잠을 못 잤을 겁니다. (스트레스 해소와 더불어 밥 하기 위해서 밤 새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한 안간힘이었죠...;;;)
Junk/ 감사합니다. 대한 민국 형제가 실제로 있었군요...;;;; (몰랐습니다.) 그리고 아리수와 민국 남매에서 저와 김군의 삘을 느끼신다면 그건 오해이십니다... OTL (어이. 어이.)
제 베스트 프렌드도 구체관절인형 매니아거든요.
(그래서 시간날 때마다 옷 만들어 주는라고 한 바쁨한답니다.ㅋㅋㅋ)
글구 아리수의 성격도 짱 맘에 듭니다.
솔직히 우리나라에서 통통하다는 거 별루 좋게 봐주는 사람 없으니까요
대부분의 통통녀들은 아리수처럼 옷입는 거 꺼려할 듯 싶기도 하구요......
하여튼 멋집니다.
님의 글 보고 이제 꿈나라로 가렵니다.
설기차표 예매 땜시 스트레스 왕창 받았는데 그나마 좀 풀렸네요
무한한 감사드리며......재밌는 글 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