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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사년 첫날의 해가 밝으며
더이상 꽃띠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다짐시켰건만,
죽어라도 빼보아도 무슨 빚쟁이모냥 철떡 들어붙어 있는 살을 보며
그렇게 스스로가 늙어가고 있음을 조금씩 느끼긴 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한 마음으로는
지가 아직 스물 서너살 먹은 줄만 알았던 저였건만

오늘 저는 완전히 삼십대로서의 자아를 확립해버린 기분이예요.

글쎄, 예전엔 그냥 지나쳤던 노래가
갑자기 가슴에 퍽 박혀서 꽃혀버리는 거 있죠,
좋은 노래라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있었지만
이렇게 구구절절이 공감해 버릴줄은 몰랐단 말이죠.
무슨 노래냐.


이겁니다.



창문을 열고 음 내다봐요
저 높은 곳에 우뚝 걸린 깃발 펄럭이며
당신의 텅빈 가슴으로 불어오는
더운 열기의 세찬 바람

살며시 눈 감고 들어봐요
먼 대지 위를 달리는 사나운 말처럼
당신의 고요한 가슴으로 닥쳐오는
숨가쁜 벗들의 발굽소리

누가 내게 손수건 한장 던져 주리오
내 작은 가슴에 얹어 주리오
누가 내게 탈춤의 장단을 쳐 주리오
그 장단에 춤추게 하리오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상념 끊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오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 가는
고행의 수도승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테요

우산을 접고 비맞아 봐요
하늘은 더욱 가까운 곳으로 다가와서
당신의 그늘진 마음에 비뿌리는
젖은 대지의 애틋한 우수

누가 내게 다가와서 말건네 주리오
내 작은 손 잡아 주리오
누가 내 운명의 길 동무 되어 주리오
어린 시인의 벗 되어 주리오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상념 끊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오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 가는
고행의 수도승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테요

                  - 정태춘, <시인의 마을>


야, 노랫말이야 그 자체로 '시'의 숙명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이건 정말 너무 아름답지 않나요.
여기서 찡하게 저려오던 가슴은,
다음노래를 들으며 결국 눈물을 뽑아내고 말더군요.


초저녁 별빛은 초롱해도 이 밤이 다하면 질 터인데
그리운 내 님은 어딜 가고 저 별이 지기를 기다리나

손톱 끝에 봉숭아 빨개도 몇 밤만 지나면 질 터인데
손가락마다 무명실 매어주던 곱디고운 내 님은 어딜 갔나

별 사이로 맑은 달 구름 걷혀 나타나듯
고운 내 님 웃는 얼굴 어둠 뚫고 나타났소

초롱한 저 별빛이 지기 전에 구름 속 달님도 나오시고
손톱 끝에 봉숭아 지기 전에 그리운 내 님도 돌아오소


                   - 정태춘 박은옥 <봉숭아> -


그리하야 지금 우이동에서는 어느 뚱땡이 노처녀 한명이
이 노래들 두개를 거의 세시간째 리와인드해서 들으며
저며오는 가슴 부여안고 윗층남자를 수술하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올리가 없잖아요 울컥;



Miney

2004.06.30 01:50:24

중딩시절 하교할 때 저녁놀을 바라보면서 불러제끼던; 노래네요. ^^ 오랜만에 들으니 참 그리운...   [01][05][03]

리체

2004.06.30 01:58:33

ㅋㅋㅋ. 무척이나 감상적인 순간이신가 봅니다.^^
수술 성공하셨기를..ㅋㅋ  [01][01][01]

Lian

2004.06.30 09:20:34

오오. 이런 우연이!
저도 요즘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에 퓔 받고 있는 중이에요. -0-   [12][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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