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병원에요?"
"아르바이트 생이 못 온다는 연락이 왔어. 하필이면..."

지원이 씨근거리며 전화기의 폴더를 세게 닫았다. 탁 소리가 나는 전화기를 바라보던 예후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성질 부리다가 전화기 다 망가지겠어요."
"짜증나 죽겠으니까 그렇지. 뭐 일이 이따위야? 이런 녀석 따위 당장 잘라버릴 거야."
"그래도 부르면 재깍재깍 와 주잖아요."
"다 늦게 이게 뭐냐고. 어차피 다 알고 시작한 거 아냐? 그런데 갑자기 친구랑 약속이 생겼다. 아니면 동생 때문에 자리 비워야겠다. 그것도 아니면."
"자자. 이모님."

예후는 한참 신경질에 물이 오른 지원을 달래기 위해 평소에 쓰지 않는 호칭을 들먹이며 다독였다.

"진정하세요. 이렇게 화를 내시면 미용에 안 좋답니다."
"누구 약올리니?"

앙칼진 목소리가 자신을 향하자 예후가 두 손을 들었다. 경험상, 이 정도까지 독이 오른 지원을 건드리다가는 신경질에 뼈도 못추렸다.

"어쨌든. 너 가게에 아르바이트 생 이미 불렀다고 했지? 나도 이러고 싶진 않지만 시간이 빈 게 너 뿐이니 네가 다녀와. 오늘은 예약 손님이 있어서 병원에 갈 수 없으니까. 빌어먹을 성희 요 년, 당장 모가지야."
"예."

눈치를 살피니 정말로 병원에 가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가던 책 구입 외출을 제외하고는 나가기를 싫어하는 지원의 성격상, 이런 반응은 의외였다.

"제가 가게를 보면."
"예약 손님 우리집 단골이야. 게다가 30명이나 된다구. 너, 어쩔래?"
"죄송합니다."

예후는 곧바로 고개를 조아렸다. 말 한참 잘못 꺼냈다.

"그냥 정기 검진이야."
"앗. 시윤씨."

예후가 구세주를 만난 것 같은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전동 휠체어의 스틱을 밀며 시윤이 다가오고 있었다.

"겁주지 마."
"겁은 무슨."

지원이 시윤에게 다가가 입고 있는 파카의 깃을 올리고, 지퍼를 적당히 여며 주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시윤이 빙긋 웃었다.

"하나 밖에 없는 조카잖아. 나중에 봉양 받으려면."
"말했잖아. 난 딱 50살 되면 죽어 버릴 거야."

시윤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예후만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곧 시윤은 예후에게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혼자 가도 돼."
"헛소리."

지원이 딱 잘라 말하며 시윤에게 몸을 떼어 살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예후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 시윤이에게 무슨 일 있으면 죽여 버릴 거야."
"예."
"그리고 이거."
"이게 뭐예요?"
"점심 먹으라고."
"이야. 짠돌이 이모님 주머니에서 나온 것 치고는 돈이 좀 큰데... 아야."
"이 잡것이."
"잘못했어요. 귀 그만 잡아당기시라구요."

예후가 엄살떠는 것을 본 지원이 어깨를 으쓱하며 귀를 놓았다. 예후가 귀를 어루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으아. 정말 아프네. 어쨌든 감사합니다. 맛있는 거 사 먹을게요."
"초밥."
"예?"
"시윤이가 그거 좋아해. 연어랑 성게."
"예."
예후가 속으로 눈물을 펑펑 흘리며 대답했다. 불행히도 그는 대부분의 생선을 지독히도 싫어했던 것이다


"어쩌다가 이모랑 얽히셨어요?"

차를 몰며 예후가 전 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백밀러로 부드럽게 웃는 눈을 한 시윤이 대답했다.

"아. 어쩌다 보니."
"그럼 언제부터요?"
"음. 한 25년 정도 됐지."
"상당하시네요. 하긴 그 정도 돼야 이모 성질을 감당하지."
"지원이는 좋은 사람이야."

"어디가 좋아요 저 성격이. 뭘 부탁하면 잘 해 주는 법이 없죠. 말투도 엄청 무뚝뚝하고 성질 부리면 욕 하고 자주 짜증 부리고 남의 말에 썰렁하게 참견이나 하고, 물론 손님들에게는 스마일 어게인이지만 손님이 아닌 사람의 경우에는 되먹지도 않을 일 떠 넘기고 빈정거리기도 잘 하고. 그리고 이거, 외모는 헐뜯지 말라고 했지만 키 170도 안 되는데 몸무게는 100이 넘는 뚱땡이에다가, 나이가 벌써 서른인데요."

예후가 쌓인 것이 많았는지 씨근거리며 지원의 단점을 줄줄이 쏟아냈다. 시윤이 키득거렸다.

"큭큭. 쌓인 것이 많았나 보지?"
"당연하죠! 조카인 제가 그런데, 이모를 잘 아는 사람은 얼마나 짜증스럽겠어요? 아무리 사촌 사이라곤 하지만 저런 사람하고 25년 동안 살고 계셨다니 전 진정으로 존경스러울 뿐이에요."
"틀려."
"에?"
"좋으니까 함께 있는 거야."
"... 그런 인간이?"

예후가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반문했다.

"응. 그런 인간이."
"정말로?"
"응. 정말로."
"... 세상에 보살이란 존재했군요."
"그런게 아니야."

시윤이 부드럽게 웃었다.

"지원이가 아니면, 내가 살 수 없어."


"맛있게 드세요."

지원이 생긋 웃으며 티 트레이를 치우며 말했다. 테이블 6개. 티 세트 12개. 손님들은 만족한 표정이었다.

"신간 로맨스 대여 상황은 어때요?"
"지금 보고 계신 손님은 안 계십니다. 어떤 것으로?"
"이시원의 '당신 곁에 언제나' 도 있어요?"
"예. 가져다 드릴까요?"
"감사합니다."

차를 냈고, 간식도 완벽했다. 이제 당분간 저 손님들은 그녀가 가져다 준 책을 보며 먹고 책에 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앞으로 한 시간 정도는 걱정 없었다.
무심코 시계를 보니 벌써 2시였다. 병원이 그다지 먼 것도 아니니 지금쯤 도착했을 것이다. 뺀질뺀질하게 굴던 예후가 떠올라 지원은 인상을 구겼다.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예약 손님들이 원하던 책을 찾아 가져다 준 지원은 3층의 화장실이 엉망이 된 것을 보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변기 뚫는 기구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다른 층에서 빌려와야 할 것 같았다.

"또요?"
"응. 아무래도 하루 날 잡아서 양변기 시설 바꿔야 할 것 같아. 그런데 아무래도 냄새가 심할 것 같아서."
"그렇겠지요. 그렇다고 3층을 닫아두기엔, 책이 너무 많지 않아요?"
"그것도 문제야. 책에 냄새가 나면 시윤이가 난리칠걸."
서현이 약간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윤씨가 난리를 쳐요?"
"3층은 시윤이 관할이야. 내가 좋아하는 책은 4층에 있어."
"상상이 안 가는데요."

서현이 아는 시윤은 항상 부드러운 미소로 일관하며,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사람 속을 편안하게 해주는 진중한 성격이었다. 화를 낸다든가, 난동을 부리며 난리를 친다든가 하는 일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단연 시윤을 꼽을 정도로.

"그렇지? 그래도 한 번 화가 나면 무섭거든."
"힘들지 않으세요?"
"응?"
"시윤씨는 정말 좋은 분이지만, 오피스텔에는 두 분 뿐이잖아요. 그리고 시윤씨는 다리가."
"그런 건 상관 없어. 시윤이가 계속 옆에 있어준다면 작은 댓가일 뿐이지."
"예?"

지원은 엉겁결에 입을 막았다. 입이 방정이다. 사실 꺼내고 싶지 않은 말까지 꺼내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최근 들어 예후의 영향을 받아 호기심이 늘어난 서현의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지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뭐. 그렇다는 거지."
"그러고 보니, 도대체 몇 년이나 함께 하셨던 거에요?"
"알아서 뭐 하게?"
"궁금해졌어요. 제가 건물에 들어올 때도 이미 한 집에 북앤드도 같이 운영하고 계셨으니까요."

지원은 신경질이 났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물어봐도 될까요?"
"응?"
"꼭 그 사람이어야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잡아."

이것만은 대답해 줄 수 있었다.

"무슨 수를 쓰던 좋아. 병신을 만들건, 돈으로 위협하던, 소중한 것을 가지고 위협하든 아니면 서서히 목줄을 조이던. 어쨌든 떠나지 못하게 해야 해."
"그 사람이 원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죠?"
"원하게 만들어야지."

지체없는 대답.

"사람이 하는 일이 다 잘 된다고만은 할 수 없으니, 원하게 만드는 일이 잘 되지 않으면 어떤 상황이든 이용해서 옆에 있게 만들던지. 왜? 예후가 속 썩여?"
"그런 건 아니지만."

서현은 입을 다물었다. 지원이 서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너에 대한 그 녀석의 마음이라면."
"하지만."
"당당해 질 수 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욕심 내라구. 욕심 내지 않으면 가질 수 없어. 아무것도."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알고 있다. 사실 그 누구 보다도 욕심 내는 일에 서투른 것이 서현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런 서현이기에 이렇게 겁에 질릴 수 있다는 것을.

"너만 그런 걸로 힘든 거 아냐. 나도 힘들어."
"에?"
"운이 좋았어. 사고 따위가 나다니."

지원이 씹어뱉듯 말했다. 그래. 운이 좋았다. 아마 그 교통사고가 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렇게 함께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가시 투성이의 몸을 억지로 곧추세우고 있던 자신과 달리 어떤 일에도 여유 만만했던 시윤은 바깥으로 나가서 더 좋은 사람을 만났을테니까.
그러니까. 사고로 불구가 된 시윤을 돌봐주는 것은 작은 댓가. 아니, 댓가라기 보다는 그녀가 그에게 지어주고 있는 빚.
누구보다도 감정적, 육체적 빚에 약한 시윤을 묶어두는데는 그것이 최고였다. 그리고 그 덕택에 시윤은 계속 묶여주고 있었고. 그리고 그것으로 지금껏 그래왔던 것 처럼 그녀는 시윤을 옆에 둘 수 있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그녀를 알고 있고, 누구보다도 익숙하고 누구보다도 그녀와 오래 함께 한.
그리고 유일하게. 어쩌면 평생 동안이라도 옆에 있어 줄 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가지게 한 사람을.


"보호자 분 잠시 들어오세요."

시윤이 물리치료실인가 어딘가로 들어간 직후 하릴 없이 대기실을 서성이고 있던 예후는 자신을 찾는 간호사의 말에 움찔했다.

"아. 저기. 저는."
"어서 들어오세요. 선생님께서 급하게 찾고 계시거든요."
"아니 그러니까."

서두르는 간호사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진료실에는 중년의 의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한 마디.

"환자 분을 설득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에?"
"신경이 되살아나고 있어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이대로라면 아마도 2~3 년 동안 신경을 꾸준히 자극해 주고 다리에 적당한 운동으로 근육을 살려 준다면 아마도 다시 걷는 일이 가능할 겁니다."

예후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시윤이 걸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거."
"예. 희망이 보입니다. 이대로 불구자가 되는 것 보다 조금 더 힘들어도 몇 년을 노력해서 걸을 수 있다면 환자에게 더 좋겠죠. 그런데 환자는 극구 싫다고 하는군요."
"에?"

이해가 가질 않았다. 물론 그 동안 시윤이 불구가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는 모습을 보인 일은 없었다. 오히려 어느 때는 그것을 즐기는 것 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불구 보다는 두 다리로 걷는 것이 훨씬 더 낫다. 그런데 어째서 그것을 거부하는 것일까?

"보호자께서는 왜 그런지 모르십니까?"
"아. 그게. 사실 오늘 저, 대리인 격으로 와서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십니까? 이거, 곤란하군요."

의사가 정말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슬쩍 떠보기라도 해 보시죠. 의사 된 입장으로서 멀쩡하게 될 가능성이 큰 환자를 불구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진료실에서 의사의 말을 들은 순간부터 병원을 나와 차를 몰고 가까운 초밥집으로 가는 순간까지 예후는 오직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어찌나 골몰하고 있었는지, 결국 식사를 하면서 입에서 이런 말까지 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언제쯤 치료를 시작하실 건데요?"
"응?"

재빨리 입을 막았으나 이미 늦었다. 시윤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의사가 너한테 이야기 했어?"
"예. 뭐. 좀 설득 좀 해 보라고."
"너 혼자만 알고 있어."
"에?"
"지원이가 알면 안 돼."
"하지만. 이모도 기뻐할 거예요. 당연하잖아요. 이모 성격으로 지금까지 에 저. 어쨌든 시윤씨를 돌봤다는 것도 신기한데, 그런 귀찮은 일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분명 좋아할 걸요. 가끔 그것 때문에 투덜거리기도 하잖아요."
"안 돼. 하지 마."
"에?"

예후는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시윤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부드럽고 차분한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그를 무섭게 노려보는 모습이, 마치 이야기를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하면 안 돼."
"왜요?"
"내가 쫓겨나."
"에에에?"

말도 안 돼는 소리. 라고 부정하려고 했던 예후는 놀랄 정도로 진지하게 겁에 질린 시윤에 표정에 눌려서 그저 입만 크게 벌렸을 뿐이었다.

"이모가 그렇게 치사한 사람이었어요? 설마 땡전 한 푼도 안 주고 쫓아내겠어요? 아. 그리고 3층은 시윤씨 소유잖아요. 에. 북카페 동업도 있고. 어쨌든 - "
"지원이는 한 번 자기 세계가 아니라고 단정지으면 무서우리만큼 딱 잘라내 버려. 가게의 동업 문제라든지, 내가 3층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상관 없어. 만일 내 다리가 움직일지 모른다는 것을 지원이가 알게 되면, 내가 걸을 수 있게 되는 순간 난 그녀에게 쫓겨나는 거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예후에게 시윤은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부탁이야. 그건 말하지 말아 줘."
"그렇지만 계속 불구로 있는 것은 스스로에게 엄청나게 바보같은 짓이잖아요. 어째서."
"다리 따윈 상관 없어. 이걸 빌미로 지원이가 계속 옆에 있어 주면."
"에?"

예후가 놀란 눈으로 시윤을 바라보았다. 겁에 질린 강아지 같은 눈동자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25년을 함께 있으셨다면서요. 설마 그런 것으로."
"어쨌든 비밀이야. 나도 어떻게 해서든 의사 입을 막아볼테니까."

예후는 두 손을 들었다. 본인이 이렇게까지 싫어하는데야 더 이상 권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모가 그렇게 앞 뒤 꽉 막힌 사람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요. 설마 사촌이 멀쩡하게 정상인으로 되돌아온다는데."
"사촌따위."

시윤이 이를 악물었다.

"정말 그렇다면 걱정도 안 해."

예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돌아가신 정화여사 말씀으론 두 분이 사촌사이라고."
"사촌도 뭣도 아니야. 단지 정화씨가 그렇게 오해하고 계셔서 바로잡지 않았을 뿐이야. 설명하기 난감해 지니까."
"잠깐. 그럼 지금 두 사람. 한 오피스텔에 사는 전혀 남이라는 말이잖아요."

예후는 입을 쩍 벌렸다. 25년간 함께 해 왔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리고 누구보다도 가깝고 친밀해 보여 일견 남매로 착각할 정도였는데. 남남이었다는 말을 들으니 놀랄 법도 했다.

"응."
"저기."
"친척이라면 어떤 핑계를 대서든 만날 수 있어. 하지만 어차피 남남이니까 내가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에 우리 사이는 끝이야. 그러니까 그 사실을 말하면."

손에 잡힐 듯한 두려움이 예후에게도 전달되었다. 그러니까.

"진심이군요."

예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하지만 알 수 없다. 도대체 남매도 친척도 아닌 두 사람이 어떻게 25년 동안 함께 할 수 있었던 걸까?

"궁금해?"


"우리 부모님한테 시윤이를 맡기고 시윤이 아버님이 여행을 가셨어."
"에?"

서현은 입을 딱 벌렸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이라면 시윤은 겨우 3살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어린 아이를 남에게 맡기고 여행을?

"응. 그런데 문제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우리 부모님도 여행을 떠나셨다는데 있지."

이 대목에서 서현의 입이 더더욱 벌어졌다. 그런 황당한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전에 이야기 한 적이 있었지? 우리 집안은 역마살 낀 집안이라고. 사실 죽은 정화 언니도 집안의 역마살 때문에 한 곳에 1년 이상 못 있는 타입이었어. 우리 아버지라도 별 수 있나. 그나마 8년이나 버텨준 것이 대견한 거지."
"그. 어떻게 사셨어요?"
"시윤이 덕이야. 친가가 좀 사는 집안이라서 가정부도 보내주고, 기사도 딸려주고 이것저것 신경썼어."

하지만 정작 제대로 돌봐주지는 않았다. 가정부는 몇 개월도 되지 않아 바뀌고, 운전기사도 마찬가지 신세였다. 몇 번씩 사람만 바뀌면서 정작 시윤의 집안 식구들은 아무도 그들을 찾아오지 않았다. 몇 년에 한 번 정도 시윤의 아버지나 그녀의 부모가 며칠 들렀다 사라지곤 했을 뿐.
바뀌지 않는 것은. 사라졌다 나타나지 않는 존재는 시윤 뿐이었다.

"우리 부모님도 학비나 생활비 정도는 부쳐줬어. 잘은 모르지만 가정부는 우리 어머니가 돈 쓴 듯 하고."
"황량하네요."

서현이 간신히 입 밖으로 한 마디 내뱉었다. 자신의 부모도 꽤 유별난 사람이지만, 지원의 부모가 유별남이 더 심한 듯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를 타인에게 방치해 놓고서는 어쩌다 한 번씩 들르면서 여행을 즐기다니. 하지만 그런 게 일상 생활이었고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는 듯 이야기 하는 지원의 건조하고 평이한 어조에 더 소름이 돋았다.

"뭐랄까. 정신이 들어보니, 시윤이랑 못 떨어지겠더라. 일상이 되어 버렸어. 시윤이가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한."

중독. 이라기 보단 지나친 집착.

25년 동안 함께한 시윤은 그녀가 무얼 좋아하고 무얼 싫어하는지, 어떤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는지 모든 것을 꿰듯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대방에게 적당하게 숨 쉴 틈을 줄 줄 알았다.
적당히 배려하면서 은근한 거리를 두는.

"그래서 말이야. 사고가 났을 때 기뻤어."
"예?"
"시윤이 할아버지가 시윤이를 데리고 나갔다가 사고가 났거든."

막 부모와 시윤의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다음이었다. 밖으로만 나돌았지만 유일한 자식이었던 시윤의 아버지를 잃은 시윤의 할아버지는 지금껏 팽개친 손자를 억지로 자신의 차에 태우고 본가로 데려가려고 했다. 그리고.

"하지만."
"너무너무 기뻤던 거 있지?"

비정상적이리만큼 기뻤다. 시윤을 그녀에게서 떼어놓으려던 노인이 죽은 것도, 시윤이 불구가 되어 영영 걷지 못한다는 판결을 받았을 때도.
시윤의 곁에 아무도 없으니. 그리고 시윤을 돌봐준다고 나설 사람도 없을테니까.

"온전히 내 곁에 있을 수 있었던 거야. 시윤이에게는 돌보겠다고 나설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그 노인네도 콱 죽어 버렸으니까."

그 희열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무도 데려가지 못한다. 떠날 수도 없다. 그래서 온전히 내 곁에. 오직 내 곁에.
다시 떠오르는 희열감에 지원이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
"사랑은 아니야. 아마도."

그럴 것이다. 사랑을 하는 자신을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그녀가 시윤에게 가지고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가장 익숙하고 가장 친밀하고 가장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집착.

"그렇지만 욕심 냈고. 모든 상황을 이용해서 가졌어. 그러니까 됐어."


"계속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신도 두렵지 않아."

시윤이 거칠게 말했다.

"그. 그렇지만. 차라리 결혼하는 것이 낫지 않아요, 그냥 솔직해 진 다음에."
예후가 제안한 것은 그 자리에서 무시당했다.
"지원이에게 결혼은 지옥에나 가라야."
"어째서?"
"지원이 부모님이 결혼을 잘 못했다는 것이 아니야. 그저. 아이를 낳은 것이 문제였어. 감당도 못하면서 책임 질 일을 만드는 것은 결혼의 폐해를 단 적으로 나타내는 거라고 항상 싫어했지. 그리고 책임 질 일을 하기 싫다면서 섹스도 싫어해."
"에에?"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예후가 되묻자 시윤이 고개를 저었다.

"아예 하질 않으면 결과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야."
"그거 참 대단하군요."

상처는 벽을 만들고 만들어진 벽은 주변에서 완전히 자신을 감싸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밖과의 연결도 차단한다.

"할 수 있는 것은. 지원이가 불구라는 이유로 나를 받아주는 것에 의지하는 것 뿐."

바뀌지 않는 것은 그녀 뿐이었다. 계속해서 바뀌는 사람들. 언젠가는 다시 보지 않을 사람들 속에서 25년 동안 계속 옆 자리에 있어 준 것은. 그리고 속속들이 그를 알고. 외로움과 쓸쓸함에서 그를 감싸준 것은.

"그러니까 부탁이야."

그것에 의지할 만큼. 간절해져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자라 버렸고. 지원이 그렇게 말하는 상식대로라면 서로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니까.

"그래요."

예후가 대꾸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좀 늦었어요. 미안해요."

예후의 이야기를 들은 서현이 한숨을 쉬었다.
이상하고. 이상한 사람들.
서현이 생각했다. 시윤의 사고가 기뻤다며 손을 부들부들 떨던 지원. 그리고. 기이하게 반짝이던 눈동자. 떠나고 싶지 않다며 손까지 떨며 애원하고 겁에 질렸다던 시윤.

"지원씨는. 아마도 사랑이 아니라고 했어요."
"시윤씨도 그러더라고요. 이건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친 거라고. 그래도 어쨌든. 서로 그렇게 죽고 못사니까. 그냥 깨끗이 고백하고 함께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텐데."

이상한 사람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방식.
함께 있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두 사람은 그렇게 어색하고 지나친 방법으로 서로를 얽어매기 위해서 몸부림 치고 있다.

"말해 줄까요?"
"아뇨."

서현이 고개를 저으며 북카페 북앤드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여느 때 처럼 책을 정리하며 투덜거리는 지원과, 커피를 만들고 있는 시윤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익숙하고 어색하지 않지만, 잠시 잠깐 슬퍼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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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까망

2004.12.01 10:30:23

ㅜ.ㅡ 우울합니다. 이것도 분명 사랑인데...

릴리

2004.12.01 11:07:04

저는 정~말 사랑과 집착의 차이가 뭔지 모르겠어요.

마리

2004.12.01 20:40:31

음..사랑을 해서 집착하는게 아닐까요.. 아~정말 어렵네요..

그린

2004.12.10 06:44:12

시엘님...단편인가요??? 넘 슬프다....까망님 말처럼 저런것두 사랑은 분명할텐데... 알콩달콩하고 가슴떨리고 뭐 그런것은 아니지만..그래두 ...

현은주

2005.07.05 18:42:33

집착도 사랑의 일종인데......
그게 지나 치면 병이 되는거지요.
서로를 확인하고 비밀이 없어야 사랑이 되지요.

레조

2005.08.16 14:51:51

이 커플은 서로 안아줘도 될 듯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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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잊혀진 계절 - 16 [15] 하누리 2009-03-10
170 잊혀진 계절 - 15 [8] 하누리 2009-03-09
169 잊혀진 계절 - 14 [5] 하누리 2009-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