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 ........... 우리.. 사귈래?"

나는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잠시 멈춘다.
한적하기 짝이 없는 일요일 오후.
나는 그가 남겨놓은 흔적들때문에 바쁘게 걸레질을 하고 있다.
마구잡이로 벗어놓은 가방을 한켠으로 옮기고,
반쯤 먹다가 바닥에 놓아둔 과자봉지를 똘똘 말아 고무줄로 감는다.
화장실에 있던 걸레를 들고 방을 닦기 시작하면..
침대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던 그는 얄밉게 다리만 달랑 들곤 한다.

잠시의 침묵을 사이에 두고 나는 다시 바쁘게 걸레질을 하며 대답을 한다.

" 싫어."

치지직. 돌아가던 비디오 테잎이 끝났다.
일어서서 비디오 위를 닦으며 정지 버튼을 눌렀다.
이제는 둘 사이를 메우던 소음조차 사라져버렸다.

"사귀면 안되냐?"

심드렁해빠진 말투에 맥이 빠진다.

"왜?"

나는 걸레를 뒤집어 깨끗한 쪽으로 돌려 놓으며 묻는다.

"그냥. 너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
"무슨 뜻인데?"

잠시 설레였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새삼 잘보일 필요도 없고, 억지로 맞출 필요도 없고. 쓸데없는 감정싸움도 안할 거고.."

나는 이제 또 더러워진 걸레를 들고 화장실로 가서 수도꼭지를 한껏 돌린다.
시원한 물소리가 나고, 걸레에 붙은 먼지들이 떨어져 나간다.

"왜 사람말을 안듣냐? 너는?"

나는, 그의 말을, 정확하게 듣고 있다.
가만히 가슴을 들썩여 크게 숨을 쉰 다음에 돌아보지 않고 말한다.

" 너는 그냥 외로운거야. 심심하기도 하고 여자가 그립기도 하겠지.
  그리고 나는 네게 가장 가까운 여자인 사람이고.
  더군다나.. 나는 네게 쓸데없이 피곤하기만한 투정도 안부릴테고.
  매일 같이 전화해달라고 하지 않을테고, 왜 학교앞까지 데리러
  오지 않았냐고 화를 내지도 않겠지. 그리고 집에 바래다주지 않아
  도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너는 그런 말을 하는거잖아. 안그래?"

속사포처럼 쏘아붙이고 나니.. 괜히 울컥 한다.바보같은 놈. 바보같은 나.

"너 원래 씩씩하잖아."

씩씩하다.. 그래, 그렇지. 난 네게 영원히 씩씩하고 무서울것 없는 당찬 아이니까.

처음 몇번인가 그가 나를 바래다 주었을때, 민망한 나는 마구 화를 냈었다.
친구사이에 이러지 말자고. 나 연약하지 않다고.
그가 돌아서서 가야하는 길이 길어지는 것이 싫었다.
쓸쓸한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한참을 돌아가야 하는 그길이
내가 걸어가야 하는 길보다 가슴이 아팠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정확하게 가운데 지점에서 만나.. 가운데 지점에서 헤어졌다.
혹시라도 돌아보면, 그가 가고 없을까봐 늘 재빨리 등을 돌려 돌아보지 않고 똑바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가 무슨 씨디가 필요하다고 하면, 재빨리 있다고 말부터 꺼낸다.
그리곤 재깍 겉옷을 걸치고 사러나가곤 했다.
빌려간지 일주일. 그후에 나는 신속하게 돌려받는다.
다시 한번, 그를 볼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아직까지 회수하지 못한것이 10개가 넘는다.
그래도.. 그래도 괜찮았다.
그냥, 주고 싶었던 것이었으니까.

그는 이런 내 마음을 모른다.
세상이 피곤에 늘어져버린 일요일 오후에.
씩씩해서 좋다는 그 말을, 나는 꼭꼭 씹어먹는다.
그래서, 나는 거절할수 밖에 없다.

받아들이면.. 얼마나 마음이 시릴까.
편해서 좋다는 그 공허한 관계에 혼자 매달리며 집착해버리는것따위.
그래서 네가 내게서 점점 지치고, 멀어지는 것. 그럴까봐 겁이 난다.

"언젠가 인연을 만날꺼야 너도. 치사하게 심심하다고 장난을 치냐."

나는 한순간에 지난 몇분에 걸쳐 있었던 수많은 생각과 몇마디의 말들을 장난으로 만든다.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때 진심으로 사랑해."

덧붙여, 스스로 마음에 칼질을 해버렸다.
힘껏 틀어놓은 수도에서 물이 계속 흘러 걸레를 담아놓은 세숫대야를 넘어간다. 돌아보지 않은 내 두 눈에서 흐른 한방울의 눈물도 함께 하수구 속으로 소용돌이를 그리며 사라져갔다.

힘차게 세수를 하고 걸레를 들고 나와보니  그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나는 그제야 멈춰놓은 눈물꼭지를 한껏 틀어버린다.




- 그.

"........... 우리.. 사귈래?"

나는 지난 세월동안 건내지 못한 말을 조심스레 건내본다.
비디오를 틀어놓고 있지만 그건 그저 배경에 불과할 뿐이다.
내 눈은 항상 바쁘게 움직이는 그녀를 쫓고 있으니까.
일부러 그녀를 쫓고 있는 내 눈을 감추기 위해.. 나는 늘 그녀에게 할 일을 준다.
그녀는 내 말에 잠시 움직이던 걸레질을 멈춘다.

"사귀면 안되냐?"

나는 그녀의 침묵을 견뎌내지 못하고 성급하게 굴어버린다.

"왜?"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지나가는 말투로 대답한다.
왜.
왜냐면, 너를 담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 말을 하기엔 나는 너무 소심하다.
그냥 시작부터 하고 나면.. 그러면 난 네게 남자로 보일 것 같은데.
그 말을 전하기엔 그녀가 멀어질까 두렵다.
언제나 칼같이 정확한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하면, 돌아설까 무섭다.

"그냥. 너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

네가 나라서 그냥 괜찮다고 생각했으면 좋겠어.  그냥 그 이유만으로도 나는 기쁠텐데. 그래서 나는 수줍게 시작부터 제안한다.
그러고 나면, 네가 나를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지길 바라면서.

"새삼 잘보일 필요도 없고, 억지로 맞출 필요도 없고. 쓸데없는 감정싸움도 안할 거고.."

편안하게 시작하자면.. 혹시나 부담갖지 않고 응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해본다. 너는 그냥 편하게 내 옆에 있으면.. 내가 전부 맞출테니까. 옆에만 있어주길 바라면서.

입으로 나가는 말과 .. 내 마음은 완전하게 모순된다.
지금처럼 네게 잘보이기 위해 매일같이 나오기 전에 거울을 여전히 한시간씩 들여다볼테지.
추운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너를 위해 늘 한겹씩 더 입고 나가겠지.
쓸데없는 감정싸움이라도 너라면 기쁘게 할수 있을텐데.

그녀는 이제 또 더러워진 걸레를 들고 화장실로 가서 수도꼭지를 한껏 돌린다.

"왜 사람말을 안듣냐? 너는?"

나는 그녀를 쫓아 화장실로 간다. 내 눈에서 사라지지 말아줘.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속사포처럼 쏘아붙인다.

"너는 그냥 외로운거야. 심심하기도 하고 여자가 그립기도 하겠지.
  그리고 나는 네게 가장 가까운 여자인 사람이고.
  더군다나.. 나는 네게 쓸데없이 피곤하기만한 투정도 안부릴테고.
  매일 같이 전화해달라고 하지 않을테고, 왜 학교앞까지 데리러
  오지 않았냐고 화를 내지도 않겠지. 그리고 집에 바래다주지 않아
  도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너는 그런 말을 하는거잖아. 안그래?"

그녀는. 내 마음을 모른다.
다행일까.. 불행일까.

" 너 원래 씩씩하잖아."

그래서.. 지금처럼 위태롭지 않게 해주고 싶어.
너무 씩씩해서 불안하니까. 가끔은 내 안에서 우는 너도 만나보고 싶은데. 안되는걸까.

처음 몇번인가 내가 그녀를 바래다 주었을때, 그녀는 마구 화를 냈다.
친구사이에 이러지 말자고. 나 연약하지 않다고.
불같이 화를 내는 그녀 앞에서 나는 그러마 하고 했지만 그 뒤로 어김없이 나는 그녀를 따라간다.
혹시나 술취한 남자들이 시비를 걸지는 않을까. 저래보여도 무척 겁이 많은 아이인데.
나는 그녀가 씩씩할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녀는 모른다. 내가 늘 뒤에서 함께 걸었단 사실을.

그리고 난 늘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녀에게 말부터 건낸다.
혹시라도 한번 더 만날까 해서.
그리고.. 그녀의 음악 취향과 나의 취향이 같아서, 나는 수시로 음악 이야기를 꺼낸다.
그냥 심심할때 들었던 음악이었을 뿐이고, 꼭 듣지 않아도 되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나도 함께 하고 싶으니까.
그녀는 칼같이 일주일후면 어김없이 전화해서 씨디를 돌려달라 그런다.

나는 두번, 세번 그녀를 보기 위해 씨디는 두고.. 몸만 나간다.
이제 그녀가 포기한 씨디는 내 곁에 있다. 너도 씨디처럼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인연을 만날꺼야 너도. 치사하게 심심하다고 장난을 치냐."

철철 넘치는 물속에서 걸레를 빨며 그녀가 말한다. 장난이 아닌데.
그렇지만 난 장난인척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심각한 내 마음을 그녀가 부담스러워할테니까.
부담스러워서 자꾸만 뜸해지다가.. 그러다가 영원히 못보게 될까봐.
나는 장난인척. 그렇게 또 넘겨버리고..
또 다음이면 아무렇지 않게 너를 만나는게. 그게 너를 다시 볼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장난처럼 넘겨버려야 한다.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때 진심으로 사랑해."

그녀가 내 가슴에 칼질을 한다.
진짜 좋아하는 사람은 이미 생겨버렸는데. 이미.. 진심으로 사랑하는걸.
나는 장난처럼 받아넘기는 멋진 대사들을 생각해봤지만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만 간다.
그래 장난처럼 넘겨야지.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어느 말도 할수가 없다.
나는 그대로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워 문다.
내 마음도 다 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담배가 타는 동안 내 마음이 다 타고 나면.. 우리 장난으로 넘기고, 다음번에도 그 다음번에도
나는 너를 볼수 있겠지.

나는 연이어 담배 세대를 피운후에야 그리고도 크게 숨을 들여마신 뒤에야 다시 집으로 들어갈수 있었다.



- 그리고, 그들.

타버린 담배꽁초를 멍하니 바라보고, 발로 툭 차본후. 얼굴에 웃음을 억지로 띄우며 문을 열었다.
환하게 쏟아지는 햇살속에서 그녀가 울고 있다.

"너.. 울어?"

왜, 우는걸까. 울고 싶은데 웃고 있는 것은 나인데. 난감해진다.
웃어줄 준비 다 하고 들어왔는데. 가만히 그녀의 등뒤에 서서 토닥토닥 두드려준다. 흠칫 놀란 그녀가 억지를 쓴다.

"나 안울어. 안울어."

손끝으로 눈물을 닦아줘본다.

"울지마, 내가 울고 싶은데. 니가 울면 안되는거잖아. 너 혹시 내가 울까봐 선수치는거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내 앞에서 우는 그녀를 처음 보기에.. 솔직히 말해서, 기쁘다. 처음으로 닦아주는 눈물이 몇번이고 보았던 그녀의 웃음보다  가슴 저리게 사랑스럽다.

왜.. 우는걸까.

머릿속에는 이미 그 답이 떠돌고 있다. 너무 앞서가지 말자고 생각해보지만...
눈물이 희망의 전주곡이었으면 한다.




"왜 니가 울고 싶은데."

나는 민망한 눈물을 힘껏 훔치며 그에게 말한다.
간줄 알았는데, 희미한 담배냄새로 그가 담배를 태우고 왔다는 것을  우는  와중에도 알아버린다.

넌 왜 울고 싶니? 자존심 상한거니?

"나도 사람이야. 거절당해놓고 웃을 사람이 어디 있냐."

그렇게 말하는 그의 입이 희미하게 올라가 있다. 웃으면서, 위로하기는.
거짓말.

"너. 너 지금 웃잖아."

그가.. 슬프게 웃는다.

"내가 왜 지금 웃느냐면, 네가 내 앞에서 울어서 웃어."
   네 눈물을 닦아줄 수 있어서 웃어.
  바보같이 거절당해서 슬픈것보다 그게 좋아서 웃어."

그의 웃음이, 무슨 의미일까.  나는 가만히 눈만 껌벅이고 있다.
눈물은 이미 그쳐버렸다. 그와 함께 웃고 싶다.
숨어서 울지 않고.. 그 앞에서 울고, 그 앞에서 다시 웃는.
그의 웃음과 함께 할수 있을까.

그 미소에 작은 희망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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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기념으로 짧은 단편 하나 올려요..^^;;
제 미니홈피에 잠자고 있던.. 거죠.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9-06 21:37)

댓글 '7'

Junk

2004.04.13 23:45:41

제가 좋아하는 도철의 普通朋友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예쁜 글입니다. 남주도 여주도 너무 귀여워요.

리체

2004.04.14 00:49:59

남자와 여자가 연애를 하면, 저런 복잡함 때문에 놓치는 경우도 많다죠. 잘 읽었습니당.^^;

더피용

2004.04.14 13:19:04

유진님 글은 처음인데, 다른 글도 보고싶네요. 아이디만큼 참으로 이쁜 글입니다.^^

차칸여우

2004.04.21 22:54:58

크크크. 아싸~~ >_<

쟈넷

2004.04.24 16:23:46

상큼합니다.

cadfael

2004.05.24 18:19:36

너도 씨디처럼 내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라니!;; 아아, 가슴이 짠해지는군요. ㅠ_ㅠ 울먹울먹. 덤덤한듯 말하는 그말에 제마음은 이미 삽한구뎅이가 크게 파여져버렸네요. 이거, 왠지 엄청난 공감을 느끼는 표현입니다. 그기분에 맞출려고 성시경씨의 '동화'라는 곡을 듣고 있어요. 가사까지 분위기와 너무 맞군요. 어흐흑. 울고싶어라;;;;

유진

2004.05.25 03:30:10

정크/ 그 노래 저도 좋아해요. 정파에서 도철군 노래 접하고 열심히 찾아 들었어요.^^
cadfael/성시경의 동화 들어보고 싶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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