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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평생 복수의 가문으로 남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모두 죽였다. 복수는 피를 부르고 그 피는 다시 복수를 부를테니까. 남들이 들으면 그렇다고 수십 명을 죽여? 할 정도의 단순한 이유였지만 그녀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남편이 죽을 때 뱃속에 있던 아이는 이제 어엿하게 커서 가정을 이룰 만큼 커졌다. 그 아이에게는, 그 아이의 아이에게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복수라느니, 가문의 원수라느니. 이런 것들은 자신의 손에서 끝내고 싶었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이유였지만.
‘사너.’
괴팍한 이름이었다. 너, 라니. 대체 무슨 악취미란 말인가. 끌끌, 그녀는 혀를 찼다.
그녀의 복수는 아주 짧고 강했다. 한 달, 한 달의 시간 동안 모든 것이 끝났다. 한 달의 시간 동안 29명의 사람이 죽어갔고, 경찰은 의심했지만 범인을 잠지는 못했다. 너무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죽어갔기에 연쇄살인이라는 의심을 받지 못했다. 다만 한 가족, 이라는 점에서 수많은 의혹을 받았지만 범인을 잡지 못해서야 아무런 증거도 확신도 없을 뿐이었다.
단 한 명. 그녀의 핑거북에 없는 손가락이 있었다. 주성희. 사너의 엄마였다. 그녀는 시한부였다. 간암이었던가, 위암이었던가. 지독한 병에 걸려 죽음이 코앞이었지. 그래서 그녀답지 않게 관용을 베풀었던 게 화근이었을까.
살아 있었다니. 그 것도 6년씩이나. 암 말기라고 했다. 의사에게 몇 번이고 확인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죽지 않았다니. 명백히 그녀의 실수였다. 그녀는 그 실수를 좀 더 음미하기로 마음 먹었다. 어차피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목숨, 조금 더 악독하게 산다해도 뭐 차이가 있겠는가. 어차피 죽으면 지옥에 떨어질 게 뻔한데.
“또 왔네.”
귀찮다는 말투였고, 너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차가운 바닥에 누워있는 상태였다. 거실 바닥에 누워있는 건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취미생활이었다. 차가운 바닥에 누워 천장의 잔 무늬를 바라볼 때 그녀는 평화를 느꼈다. 세상 누구도 주지 못한 평화와 안식을. 그렇기 때문에 그 천장에서 갑자기 나타난 아정은 그녀에겐 호의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녀의 평화와 안식을 단숨에 무너뜨렸기에.
“저녁은 먹었어?”
해맑은 웃음이었다. 차갑게 생긴 남자는 그 생김과는 다르게 자상한 스타일인 듯 했다.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식사를 챙겼고 그로 인해 생긴 설거지 거리들을 아무 일도 아닌 듯 처리하고는 했다. 그게 신기해서 가만히 쳐다보기도 했다. 그녀의 시선에 그는 고개를 그저 갸웃 거렸을 뿐이었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을 거란 걸 예상한 걸까. 대답도 하기 전에 남자가 먼저 입을 연다.
“문 좀 잠그고 있는 건 어때?”
“그 열린 문으로 들어왔다는 생각은 안 들어?”
“나 들어오라고 열어놓은 문도 아니잖아.”
“문이 열려 있으면 누구든 들어오겠지.”
기다리고 있었다, 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기실 저 남자를 기다린 건 아니었다. 누구든 나타나 그녀가 기다렸지만 기다리지 않은 죽음이라는 걸 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엄마가 그랬다. ‘미안하다, 아가야. 엄만 널 지켜주지 못 해. 그래도 살아주렴. 언제 어디서 무엇이 나타나도 놀라지 말고, 어떤 위협이 있어도 넌 살아남아 줘.’ 그게 마지막 말이고 유언이 되었다. 하지만 그거야 옆에서 지켜주었던 해단 아저씨 덕분에 기억하는 거였고, 너의 기억엔 파리한 엄마의 얼굴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떤 위협이 살아 있어도 살아남아 달라니. 그녀의 상황을 알았다면 엄마도 그런 말을 하지는 못했을 거였다.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년에 몇 번씩 그녀는 죽음에 맞닥뜨렸다. 남들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교통사고부터 시작해서 심지어 그녀는 번개까지 맞았다. 번개를 맞고 다 나은 후 그녀는 로또까지 사 보았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살아남았던 건 순전히 재수가 좋았다고 볼 수밖에 없었으니까. 재수가 좋았다, 라고 표현하다니. 그녀는 스스로의 생각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한 달에도 몇 번씩 사고가 나는 그녀의 별명은 ‘신이버린아이-신버아’였다. 집중하고 길을 걷다가도 맨홀에 빠지고, 늘 다니던 길에서도 넘어져 뒤통수가 깨지는 아이가 사너, 바로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죽겠구나, 하고 체념하게 된 건 그 때문은 아니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살의’를 가진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지만-그녀는 가족이라고는 없는 혈혈단신의 몸이었으므로. 더구나 해단아저씨에게 말하면 같이 살자고 할 게 뻔했다. 하지만 결혼도 하지 않은 노총각 아저씨와 함께 사는 건 그녀가 싫었다.-그녀는 자신의 집에 누군가 함께 사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던 적도 있었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 일어났을 때 침대 옆 협탁에 잘 벼린 칼이 깨끗한 헝겊위에 놓여 있던 적이 있었다. 꿈인가 싶어 눈을 비벼봐도 자신의 얼굴이라도 비칠 듯 쨍한 칼은 무서울 정도로 반짝거렸다. 하지만 현관문은 물론이고 창문도 어제 저녁 잠근 그대로였다. 그 다음엔 동물들이었다. 개, 고양이, 새 등등. 어느 날은 아파트 옥상에서 커다란 화분이 떨어져 그녀의 눈앞에서 터지기도 했다. 그것은 그녀가 어슴푸레한 공포의 도가니에서 벗어날 쯤이었다. 철렁했던 가슴이 조금 진정되어 아무 일도 아니었어, 하고 지나가면 다시금 악몽은 시작되는 거였다. 그러길 어느 새 10년이었다. 집 안팎으로 CCTV를 설치해도 교묘히 작동이 멈춘다거나 하는 일이 발생했기에 그녀는 저도 몰래 자포자기하게 된 것이었다. 차라리 무슨 일을 저지를 거라면 지금 당장! 하고 바라게 된 것이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는 공포란 실로 무서운 것이었다.
그러던 때, 마침 저 남자, 아정이 나타난 것이었다. 죽을래 말래, 하는 어설픈 질문을 던지며. 그래서 그녀는 확신했다.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일 거라고.
“난 오무라이스 해 먹을건데, 너도 먹을래?”
흔연한 말투에 너는 저도 모르게 응, 하고 대답할 뻔했다. 이내 너는 인상을 쓰며 아정을 째려봤지만. 그 모습에 아정이 어울리지 않게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너, 정말 웃긴다.”
무슨 소리. 그건 이 쪽에서 할 소리야. 너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생긴 걸 멀쩡하게 생겨서는 하는 말이라고는 다 폭탄급이다. 오무라이스를 먹자니. 지금 네 번째, 아니 다섯 번째 무단가택침입을 한 사람이랑 밥 먹게 생겼냔 말이다. 세상에. 벌써 남자가 나타난 지 그렇게나 됐단 말이야.
‘뭐, 못 먹을 걸 또 없긴 하지만.’
너는 생각지도 못하게 친근해져버린 남자에 대해 묘한 반감을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못하는 게 없는 데 그 중에서 특히 요리를 잘 하거든.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건방지기 짝이 없는 자세-한 손은 주머니에 들어가 있고, 다른 한 손은 무려 담배를 피우는 채-로 그는 싱크대를 우당탕 거리더니 후라이팬을 찾아들고는 가스레인지 위에 척 올려놓았다. 그런데 그 태도가 아주 자연스러워서 너는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어쩌지, 집에 아무 것도 없는데?”
오무라이스는 커녕 계란 하나도 없을 거였다. 며칠 동안 조금 바빴다. 시험기간이기도 했고, 시험기간이 아니었다 해도 집 안에 음식물 냄새를 풍기는 날은 많이 있지 않았다.
“정말 대충대충 보네. 아까 내 손에 들린 봉지 못 봤어?”
남자는 톡, 하고 계란을 까며 턱으로는 휑한 식탁위에 놓인 검은 봉지를 가리켰다. 아. 그러고 보니 못 보던 봉지인 것도 같았다.
알 게 뭐야. 너는 남자를 등지며 거실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보고 싶지 않아졌다. 맑게 웃으며 친한 척 하는 남자 따위. 머릿속으로 미리 써놓았던 유언장을 되새김질 해 보았다. 하루에 한 번, 그녀는 유언장을 고쳤다. 그건 마치 하루를 잘 버텼다고 스스로를 위무하는 행동과도 비슷했지만 사실은 내일도 장담할 수 없다는 그녀 식의 체념이기도 했다.
“사 너. 밥 먹어, 어! 이게 뭐야?”
밥 먹으라는 아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엌 창문으로 무언가 툭, 툭하고 던져지는 소리가 나며 퍽, 유리 깨지는 소리가 심하게 들려왔다. 너는 예상치 않게 들려온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툭, 데구르. 무게가 제법 나가 보이는 돌덩이였다. 돌맹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큰.
그 것도 세 개나 됐다. 요리를 하고 있었다면 제대로 한 방은 맞았음직한.
남자가 잠시 냉장고문 앞에 서 있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휴우. 너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돌덩이는 치우면 된다. 속으로 몇 번이나 그렇게 되새김질 하고서야 겨우 마음이 진정 됐다. 오래간만의 일이라 심장이 덜컹 덜컹 고장난 소리를 냈다.
한 편으로는 실망이었다. 저 아정이란 남자가 기다리던 사람이 아닐까, 내심 좋아했던 너였다. 너는 뭐라 중얼중얼거리며 현관문 밖으로 향하는 아정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이미 몇 번이고 말했었다. 자기는 재수 없는 아이라고.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예고였고, 경고였다. 오지 말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 했지만 대충 그런 의미였다.
가버리는 건가. 기다리던 사람이 아닐 거라는 추측과는 다른 실망감이 그녀의 마음에 차올랐다. 그럼 그렇지. 그렇게 기다리던 일이 한 번에 이루어질 거라고는 그녀도 생각지 않았다. 그래도 실망스러운 걸.
터벅터벅.
“괜찮아?”
그 남자였다. 그녀의 어깨를 양 손으로 쥐고 안부를 묻는 사람은. 너는 자신도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는 아무렇지 않아, 하는 말은 혀 끝에서 사라졌다.
“누가 장난친 건가 봐. 금세 도망갔네.”
그게 아니야. 날 위협하려고 그런 거야. 안심하지 말라고. 긴장하라고. 마음 놓지 말라고 그러는 거야.
너는 마음에서 외치는 말, 혀 끝에서 맴맴 도는 말을 꿀꺽 삼켰다.
“괜찮아.”
“심하다, 이건. 경찰에 신고해 버릴까?”
“아니. 그건 됐어.”
경찰은 별로 믿음직한 존재가 못 되었다. 몇 번이나 신고해 봤지만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했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 그녀 밖에 없었고, 스스로를 지킨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결론 내린지 오래였다.
“가.”
“응?”
“가. 왜 자꾸 오는 지 모르겠지만 오지 마. 당신이야말로 이상하잖아.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네 집에 이렇게 자꾸 오는 거 수상한 거 모르겠어? 가.”
너는 자신의 팔을 잡고 있던 아정의 팔을 뿌리쳤다. 팔에 남은 그 온기가 스르르 사라졌다. 결국은 혼자서 해결할, 혼자서 감당할 문제였다. 누군가 끌어들이기엔 그건 너무 미안한 짓이었다. 차라리 혼자 연기처럼 사라지는 게 마음 편한 일이다.
“경찰에 신고해도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아. 당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야. 그러니까 가.”
“이래도?”
남자가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더니 무언가 그녀의 앞에 내민다. 뭐 생전 처음 보는 거라 잘 모르겠지만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아, 이 남자 검사였구나. 그래서 뭐? 변하는 건 없다. 괜히 그러다 나 혼자 죽을 일, 둘이 죽게 되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 건 싫었다.
“그래도 변하는 건 없어. 가. 오므라이스 따위 안 먹어.”
너는 자신이 할 말만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한 구석에 놓인 1인용 소파로 가 무릎을 감싸고 앉았다. 당신과 얘기하고 싶지 않아, 그런 오오라를 발사하며.
민폐 따위 끼치고 싶지 않아. 더구나 그렇게 따스한 온기를 가진 당신한테는 더욱 더.
“그래, 간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남자는 미련도 없이 현관문을 나갔다. 피이. 뭐야. 혼자 남은 사너는 고개를 숙였다. 좁디 좁은 집 안이 갑자기 너무나 넓게 느껴졌다.
아정은 너의 말에 갑자기 실망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알고 있었다. 무언가 그녀와 자신 사이에 두꺼운 벽 같은 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하얀 유령처럼 예쁜 그녀를 지켜주고 싶었다. 할머니의 독버섯보다 질기디 질긴 미련과 복수의 집념에서 해방시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바쁘디 바쁜 시간을 쪼개서 들여다 본 참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일어난 돌덩이 투하라. 할머니 답다고 해야할지, 쪼잔하다고 해야할 지. 그대로 두고 온 유리창은 또 어쩐단 말인가. 아정은 너의 집을 나오면서도 투덜투덜거리고 있었다. 띠리리리링. 전화벨이 울렸다. 마침 할머니였다.
“할머니, 이럴 거야?”
“아정이 이 놈, 전화를 받으면 접니다, 해야지. 어디서 다짜고짜 이럴 거야, 가 나오누?”
“아 진짜. 유치해서 내가 웃음도 안 나온단 말이지. 죽은 동물도 유치해 죽겠구만, 저 돌덩이들은 다 뭐야.”
“나이가 들면 독창성이 떨어지는 거다, 이놈아. 그건 그렇고 언제 들어올 게야? 어깨가 쑤셔 죽겠다. 들어와서 할미 어깨나 좀 주물러.”
“싫어요. 할머니 혼자 냉장고에 어깨를 문대시든가 말든가 알아서 해요!”
아정은 심술궂은 표정으로 띡, 종료 버튼을 눌렀다. 할머니가 안마를 해달라는 건 할머니가 자신을 보고 싶다는 의미의 말이라는 알면서도 어쩐지 심술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없는 틈을 타 너에게 해꼬지라도 하려는 건 아닌가, 하는 억측까지 드는 참이었다.
‘막을테면 막아봐라.’
할머니의 말이 귓가를 쟁쟁 울리고 있었다. 쳇! 할머니, 두고 봐. 쟨, 내가 살릴 거야.
“네. 이거 방탄유리 맞죠?”
“아이고, 젊으신 양반이 어찌 이리 의심이 많을꼬. 몇 번이나 확인 시켜드렸으면 알아들으실만도 한데, 허허.”
속 좋은 웃음-한 끝이 일그러져 있긴 했지만-을 지으며 중년의 남자는 커다란 유리를 들고서도 성큼성큼 걸어 이내 부엌에 당도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너는 깜작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정, 뿐만 아니라 유리가게 아저씨 두 명까지 합해져 그녀의 작디 작은 거실은 그야말로 꽉 차버렸다. 너는 그 어색한 광경이 생경해 아정에게 따따부따 따져버리려던 말을 그만 혀끝에서 녹여버리고 말았다.
“우리 가게에서 이만한 사이즈를 구하기 힘들어 어렵게 어렵게 구한 것입죠. 벌써 말씀 드렸잖습니까. 아마 어른 한 명이 와서 들이 받는다고 해도 멀쩡할 겁니다.”
“정말요? 한 번 해볼까요?”
농담 같은 아저씨의 말에 정색을 하며 달려갈 듯한 자세를 하는 남자가 바보 같아 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던 아저씨도 그 썰렁함에는 어쩔 수 없는지 지그시 고개를 돌려 그녀는 핏, 하고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아저씬 참.”
그녀의 비웃음을 알아들은 걸까. 아정이 유리가게 아저씨의 어깨를 툭툭, 치는데 감정이 실렸는지 아저씨가 앞으로 휘청한다. 하하, 어색한 웃음을 짓으며 너를 바라보느라 아정은 그런 아저씨의 움직임은 보지도 못한다. 그 사이 다른 아저씨는 탁탁, 유리창을 쳐보며 마지막 마무리를 끝냈다.
“얼마죠?”
너는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지갑을 들고 유리가게 아저씨에게로 다가갔다. 생각지도 못한 돈을 쓰게 됐지만, ‘방탄유리’는 꽤 마음에 드는 아이템이었다. 지금까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아, 아닙니다. 계산은 이미 저 분이 다 하셨습죠. 이 봐, 최씨. 이만 가자구.”
“그래, 그러자구. 그럼 다음에 필요하실 때 또 이용해 주시구랴.”
“네, 고맙습니다.”
현관까지 따라가서는 깍듯하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마치 집주인 모양새와 진배없어서 너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그런 아정을 보다가 너의 시선이 반짝반짝 빛나기까지 하는 유리창이 눈에 들어왔다. 구석에 붙은 보호용 테잎들을 떼어내야 할테지만, 그래도 꽤 깨끗하고 깔끔한 유리창이었다.
‘정말 방탄일까.’
순간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쪼르를 베란다로 향했다.
있다. 너는 베란다 화분에 놓여 있던 작은 조약돌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거실로 향했다.
챙-.
툭. 데구르르. 작아서였을까. 그녀의 손에 가득 쥐어진 조약돌은 있는 힘껏 날아가 반짝이는 유리창에 제 몸을 힘껏 부대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데구르르르. 조약돌은 거실바닥을 구르다 그렇게 멈추었다.
“안 깨지네. 그래도, 조금 더 크면 깨질지도 몰라.”
중얼거리며 너는 현관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요 밖에 나가면 던져볼만한 큰 돌이 있을지도 몰랐다.
“사 너!”
아. 이 남자가 있었지. 너는 갑작스레 자신의 팔을 붙잡는 손에 그제야 자신이 아정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게 생각났다.
“응?”
“너도, 죽고 싶지는 않지? 그렇지?”
확신한다는 듯, 능글맞게 웃는 남자의 웃음에 너는 머리가 핑, 도는 듯 어지럽다. 그런가. 그런 걸까. 사실은 살고 싶은 걸까?
“모르겠는데.”
“그래? 모른다면 할 수 없지. 그런데 너, 그건 왜 던져보는 거야? 방탄유리라니까.”
“방탄유리면 돌덩이도 안 깨지나? 깨질 것 같은데. 방탄은 탄알을 막는 거잖아. 아닌가. 돌도 막을 수 있는 걸까. 흠, 당신이 말해 봐. 검사라면 알 거 아냐. 한 번 대답해봐.”
“……한 번 해볼까?”
아정은 호기심 가득한 너의 시선을 그대로 받으며 중얼거렸다. 검은 눈동자에 설마 정말 하자는 거야? 이런 의심의 빛이 역력하다. 아이고. 아정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렸다. 참 이상하지. 햇살의 농간인가. 부스스한 머리에 아무 것도 바르지 않은 게 분명한, 20대 초반이라는 나이만이 가질 수 있는 적당히 좋은 피부를 제외하고는 볼 게 아무 것도 없는, 저 너가 왜 반짝반짝 예뻐 보이는 걸까.
그래, 쌍까풀 없이 커다란 눈이 그의 취향이긴 했다. 그의 어깨에 닿을랑말랑하는 작은 체구 또한 그렇긴 했다. 아니, 그래도 지금 그가 너에게 반해서 치근덕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잖느냐 이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너 모르게 한숨을 한 번 더 폭 내쉬었다. 그는 그녀의 불구대천지원수! 의 손자이지 않은가 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도 그의 불구대천지원수의 손녀! 이긴 했다. 어, 이건 samesame 아냐? 그럼 그냥 그걸로 비기면 안 되나, 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도 잠시 들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안 궁금해?”
“뭐. 궁금해 죽을 지경은 아니야. 호기심으로 죽을 만큼이냐고 묻는 거면.”
“너! 나 정말 너 죽이러 온 거 아니거든!”
그는 뜨끔, 찔리는 양심을 뒤로 하고 너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죽이러 왔다면 잘 왔다고 하며 양팔이라도 벌려줄 듯한 너의 행동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자신이 죽이러 온 건 아니지만 할머니가 호시탐탐 그녀를 노리고 있는 걸 알기 때문에 한 쪽 가슴이 찔려왔기 때문이다.
“그럼 됐어.”
“되긴! 너 때문에라도 던져 봐야겠다. 니가 자꾸 죽겠다는 말 하면 나 열 받거든. 근데 이거 안 하면 니가 궁금해하다 확 죽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안 되겠어. 해! 해보자!”
평소 집 밖에서는 우아와 가증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오던 아정이 아니던가! 그런데 저 코흘리개 꼬맹이 같은 너 때문에 그는 할머니 앞에서만 드러내던 본색을 단박에 드러내고 말았다. 유치하고 다혈질인 본색을 말이다. 거기다 꽥꽥, 소리도 질렀다. 그의 동료들이 보면 저게 소아정이란 말이야? 하고 두 눈을 비볐을 일이었다.
킥, 너가 그런 아정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한쪽 입고리가 살짝 올라간 그 모습에 아정은 기분이 좋아진다. 자신이 바보 같아 보인다는 게 그 순간은 참 좋았다. 그래서 너가 웃었으니까.
“안 궁금해. 안 궁금해졌어. 그러니까 궁금해 죽는다, 이런 말 따위 안 할 거야. 그러니까, 진정하고 거기 앉아. 콩나물만 먹고 컸나. 무슨 키가 그렇게 커. 사람이야, 전봇대야. 정신업 없게.”
“내가 큰 게 아니라 니가 작은 거야.”
궁시렁대며 아정은 작디 작은 소파에 자신의 몸을 구겨 넣었다. 너가 앉았던 의자에 앉았던 의자, 라고 생각하니 뭔가 두근거렸다. 더구나! 너가 자신이 이 집에 온 후 나가, 란 말을 제외하고는 뭔가 제의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파는 너무 작아서 자신의 몸은 거의 우겨넣은 정도라고 했지만 그는 만족스러웠다.
“커피 마시고 싶어.”
“뭐?”
“커피.”
기회는 이때다, 싶어 아정은 은근슬쩍 커피를 밀어붙여 말을 건넸다.
“쪼기, 니가 맨날 내려먹는 에스프레소. 나도 그거 엄청 좋아해.”
“어쩌라구.”
“한 잔 타 줘.”
“아저씨가 저번에 해준다던 오무라이스 해주면.”
“아저씨?”
“그럼 그 얼굴로 오빠라고 우길 거야?”
“내참. 나 서른두 살 밖에 안 먹었거든.”
“그러니까 나보다 아저씨지. 30대면 그럼 79년생이란 말이지. 우아. 70년대에도 사람이 태어나긴 태어났다더니!”
“내참. 말을 말자.”
오빠라고 굳이 우길 참은 아니었다. 아정도 남자니까, 오빠란 말을 싫어한다고는 차마 말은 못하겠다, 그래도 굳이 오빠라고 부르라고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저렇게 대놓고 늙은이 취급을 하니까 빈정이 확 상하는 거다. 그런데도 왜, 화가 안 나냐, 이 말이지.
“저번에 던져 놓고 간 달걀, 냉장고에 그대로 있어. 오무라이스 해 주면, 나도 커피 타 줄게.”
그에게 던지듯 말하고서는-당연히 그가 해줄 거라 생각했나보다.-너는 부엌 유리창 쪽으로 다가간다. 그리고는 통통, 다시 한 번 유리를 두들겨 본다. 탕탕! 맑은 소리를 내는 유리를 한참을 바라 보더니 씨익, 웃는다. 유리가 제법 마음에 드는지 썩 흐뭇한 얼굴이다. 아정은 그런 너를 바라보다 소파에서 일어서 냉장고로 향했다. 저번에 채 정리하지 못하고 간 야채들이 락앤락통에 들어간 채로 냉장고에 가지런히 정리 되어 있다. 그는 에효, 한숨을 쉬는 척하며 팔을 걷어붙이고 요리 재료들을 꺼내었다. 하고 싶지 않은 듯 한숨을 쉬는 모양새와는 달리 야채를 써는 아정의 손놀림은 자못 경쾌하다.
“아.”
이건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그녀의 예상대로라고 해야 하나. A4 한 장에 적힌 팩트는 그녀에게 충격을 준 건 분명했다. 꾸깃, 힘조절을 하지 못한 그녀의 손아귀에서 종이가 구겨지고 말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자신이 분명 누군지 알고 찾아왔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떠한 용건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기에, 너는 소아정이라고 자신을 밝힌 그 사람이 궁금해졌다. 물론 자신을 죽여줄 사람이었으면 좋았겠다가 아니었으면 바랐다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까지 발전하는 동안, 왜 자신을 찾아왔던가! 에 대한 강렬한 의문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역시, 친해질 수 없는 사이었구나. 원하던 게 있던 거구나.
너는 종이를 원래 있던 대로 다시 접어 봉투에 넣었다.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탄유리로 집 안의 유리를 제멋대로 다 바꿔주고, 현관의 잠금장치까지 새로 달아준 사람. 너의 핸드폰에 꾹꾹 자신의 번호를 눌러주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라던 사람. 자신을 위해 오무라이스며 스파게티며 요리를 해주던 사람.
그 사람과 친해지고 싶었다. 햇빛에 반사되어 갈색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소아정과 친해지고 싶었다.
“똑똑.”
아정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브랜드의 종이가방을 살랑살랑 흔들어대는. 오늘도 문을 잠그지 않았구나, 그녀는 그제야 깨닫는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반가움과 함께 가슴 저 밑바닥에서 치오르는 분노가 온 마음을 가득 채운다. 한 발짝, 한 발짝 아정이 다가올수록 그녀의 분노도 찰랑찰랑 넘쳐흐른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지 그랬어?”
“뭐?”
그녀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상처 받았다는 기색은 하나도 없이, 아무런 마음의 변화도 없었다는 듯이.
“처음부터 말했었다면 좋았을 걸. 그러면 기분은 조금 나빴겠지만, 이해할 수도 있었을 거야.”
“너. 무슨 말이야. 제대로 말해 봐.”
아정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역시, 자신의 예상이 맞았던 건가. 너는 입안이 갑자기 써진 느낌이 든다. 차라리 처음부터 솔직히 말했을테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까지 든다. 그랬다면 처음부터 마음을 여는 일 따위는 없었겠지.
3편으로 끝내려고 조금 추가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