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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좀!”
지연이 교은의 팔을 잡아끌었다. 교은은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도마에 소리 나게 내려놓고 지연을 노려봤다.
“안 꺼질래?”
“안 꺼져, 못 꺼져!”
지연이 곱게 단장한 머리를 거칠게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교은이 엄마를 설득해 준다면 조금 승산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 남자, 좋은 남자라고. 아깝지 않은 남자니까 허락해 줘도 된다고.
“한지연, 나 칼 든 거 안 보여?”
교은이 다시 도마 위에 있는 칼을 집어 들었지만 지연이 코웃음을 친다.
“언니, 제발. 나 좀 살려줘. 응?”
“살아, 제발.”
교은은 최대한 험악하게 말을 내뱉고 다시 도마 곁에 다가섰다. 색다른 무조림을 만들 작정인데 오늘은 왜 이렇게 바쁜 건지.
“언니, 언니! 나 죽어, 정말. 응?”
지연이 교은의 팔을 다시 잡아끌었다.
“너, 지난번에도 죽는다 그랬어. 그런데 잘만 살아있네.”
교은은 도마 위에 있는 하얀 무에 집중했다. 조리하는 것보단 그 전처리가 더 좋았다. 특히나 정확한 크기로, 오차 없이 썰어내는 것을.
“언니, 나 정말 이 남자밖에 없어.”
이제 지연이 교은의 앞치마 자락을 붙잡았다.
“웃기시네.”
“이 남자 없음 나 죽어.”
“인생을 포기할 남자가 더럽게도 많아서 참 좋겠다.”
사각사각 무가 사뿐하게 도마 위에 내려앉는다. 곱다, 고와. 교은은 조각난 무를 보며 감탄하고 있는데 갑자기 도마가 위로 붕 솟아오르더니 싱크대 안으로 사라졌다.
“뭐하는 짓이야?”
교은은 정말이지 할 수만 있다면 사촌동생인 지연을 무처럼 확……. 화를 참기 위해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다시 떴다. 뒤에서 생선을 다듬던 형은과 미영이 사라지고 없었다. 하긴 이런 진상이 주방에서 난리를 치고 있는데 피하고 볼 일이지.
“나, 이만큼 절박해.”
지연은 차가운 타일바닥에 주저앉더니 훌쩍이기 시작했다. 얼른 끝내고 가서 경진이랑 맛있는 거 해먹기로 했는데, 더구나 도현까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마음이 급했다. 그런데 지연 때문에 모든 일이 ‘지연’되고 있다.
“그 성질 가서 그대로 부려서 네가 원하는 걸 얻어내. 왜 여기서 이 난리야?”
“그럼 우리 민재 씨 더 싫어할까봐.”
“미치겠다, 정말.”
교은은 머리에 썼던 수건을 거칠게 잡아챘다.
“한지연, 죽을 거 같지? 아파서 숨도 못 쉬겠고?”
“응.”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그래도 못 죽어. 누가 죽이지 않는 한.”
“언니!”
지연이 빽 소리를 질렀다. 편을 들어준다 했나 보다.
“너 죽으려면 벌써 죽었어. 못 죽지. 삶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 줄 알아?”
“그러니까 민재 씨랑 같이 살고 싶어!”
“민재 씨 아니어도 너 잘 살 거야. 걱정마. 인간 이기적이다? 시간 지나면 다 잊어. 지금이야 죽을 것 같지, 나중엔 그깟 이런 일로, 이럴 거야. 늘 그렇듯이 넌 또 다른 사랑을 찾을 거고.”
교은은 지연처럼 바닥에 주저앉았다.
“언니 어쩜 자기 일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
지연이 마스카라가 번지거나 말거나 손으로 눈을 문질렀다.
“너 이해한다고 거짓말 해줄까? 이해 좋아하네, 개뿔, 누가 누구를 이해한다는 거야? 그것만큼 거짓말 없어. 난 거짓말 못하고, 그러니까 난 너 이해 못해.”
“이해 못해도 좋아, 그러니까 얘기 좀 해줘, 응?”
지연이 교은의 어깨를 잡고 매달렸다.
“그 사람 맘은 생각해 보고 이러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그 사람도 날 사랑하지.”
“그럼 결혼 안 해도 되겠네.”
“뭐!”
“죽을 것만큼 사랑한다며? 그럼 다른 남자랑 결혼하지 말고, 그 남자랑도 결혼하지 말고 그냥 계속 만나. 그럼 문제없는 거 아냐? 결혼만 하지 말랬다며?”
“그게 뭐야?”
“뭐긴 해결책이지. 네 사랑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결혼 알게 뭐야, 죽는다는데.”
지연이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있자 교은은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싱크대 안에 버려진 무 조각들을 건져내기 시작했다.
“언니가 사랑을 알아? 사랑도 모르면서!”
지연이 교은의 등을 쏘아보며 울먹였다.
“하! 기가 막혀서.”
“왜 할 말 없지?”
“할말 완전 많거든? 나 잘 알지, 사랑. 엄청나게. 지겨워 죽겠어, 아주. 사랑, 사랑, 사랑! 삼십 년 내내 사랑 찾아서 집 뒷전인 우리 모친, 그런 사랑 때문에 밖에서만 도는 우리 부친, 모친 라이프 스타일을 그대로 빼다 박은 내 동생, 그리고 매번 사랑 때문에 죽겠다는 사촌동생, 너. 참, 또 있지. 종연선배까지. 아우, 정말이지 사랑 짜증나고 토 나오거든! 그러니까 입 닫아!”
교은은 지겹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건져낸 무 조각들을 그릇에 담았다. 그리고 계속 중얼거렸다.
“무슨 놈의 사랑이 그렇게 맨날 와? 그게 무슨 사랑이야. 툭하면 사랑이래. 사랑 겁나게 흔하다, 흔해. 위대한 사랑, 그레잇 러브라는 게 말이야, 그렇게 흔해 빠지고 간사하고 그럼 쓰겠어?”
“그래도 이번엔 진짜란 말이야.”
지연이 훌쩍이며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웃기고 있네.”
“나도 마지막일 것 같았단 말이야.”
“그래, 그러다 또 네 돈 때문이었다고 하지마, 알았어? 돈 때문인지 너 때문인지 구분을 못해? 그러니 네 부모님이 믿으시겠어?”
지연은 유명 백화점의 외동딸이라 그걸 노리고 접근하는 남자들이 많았다. 그렇게 속았으면서도 또 속는 지연을 교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 어때? 돈 때문이라고 해도 나는 행복했어, 그런 게 사랑이야.”
지연이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듣고 보니 무슨 시 같다.
“그래, 실컷 행복해라.”
“연애도 몇 개 했다면서 대체 왜 이래?”
“연애하면 다 사랑하는 줄 아는 거야, 아니면 사랑하면 연애하는 줄 아는 거야?”
그게 연애였나. 몇 번 밥 먹고 공원 가고 영화도 봤으니 나름 연애지, 암. 교은은 뉴욕에서의 ‘연애’를 떠올려봤다.
“아, 머리 아파. 배도 고파.”
“시끄러. 제발 네 사랑인지 연애인지는 너 혼자 알아서 해. 나 바빠.”
교은은 깎아놓은 오이 하나를 지연에 손에 쥐어주었다.
“바쁘긴 뭘 바빠? 밤마다 너덜거리는 머리띠 차고 무릎 튀어나온 츄리닝 입고 혼자 맥주마시면서 그 시뻘건 피가 나오는 범죄물이나 보면서.”
지연이 교은의 행복한 여가활동을 비웃었다.
“어, 바빠. 그리고 난 그거 사랑해. 매일 그 시간에 나를 위해서 해줘. 언제나 그 시간에 나를 기다린다니까. 이것도 사랑이지. 맨날 보고 싶고 하루라도 안 보면 안 돼. 근데 왜 범죄드라마는 일주일에 한번만 하는 거야? 매일 매일 해줬으면 좋겠어.”
오늘도 샤워를 하고 뽀얀 거품이 올라오는 맥주를 들이키며 드라마 봐야지. 아차차, 오늘은 두 동생들을 위해 내 여가활동은 쉬어야 한다. 그 생각에 교은은 마음이 급해졌다.
“언니, 그러지 말고 좀 우리 엄마한테 얘기 좀 해줘.”
“이제 내 말 안 믿으실 걸.”
“언니, 정말 말만 잘 해주면 여기 밀고 내가 엄청 좋은 레스토랑 지어줄게, 응?”
한지연, 이것이 이렇게 뻑하면 돈지랄이니 남자들이 돈 냄새를 안 맡을 수가 없지.
‘자기 힘들어? 뭐가 먹고 싶어, 말만 다해. 내가 다 사줄게.’
지연이 애인이라고 데리고 온 남자를 앉혀놓고 하던 말이었다.
“할일 없구만, 아주. 난 여기 아주 좋으니까 내버려둬, 알겠어?”
스타일 나게 괜찮은 식당을 하라며 지연이 항상 하던 말이었다.
“뭐가 좋아, 이게. 뉴욕에 있던 레스토랑 반이라도 되어야지, 이게 뭐야. 간판도 너덜하고 이 알 수 없는 메뉴하며. 양식집인지 한식인지 분식인지.”
“안 오면 되지. 그리고 시대와 어울리는 인터내셔널 메뉴거든?”
“간판이라도 좀 바꿔, 그럼. 부부식당이 뭐야? 진짜 종연 선배랑 부부 되려고 이러는 거야?”
요새 은근히 간판 교체를 원하는 인간들이 많구나. 하지만 그래도 이전에 하던 사람들이 자리를 잘 닦아놔서인지 그다지 간판을 교체하고 싶지 않았다. 식당 이름이 조금 촌스럽긴 하지만 정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식당은 맛으로 승부해야 하는 법.
“야, 그건 내가 사양이거든? 사람들 정말 왜 이래, 이거.”
홀에 있던 종연이 주방 안쪽으로 들어오며 치를 떨었다.
“원래 붙어 있던 건데 뭐 어때?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교은은 종연에게 눈을 흘겼다.
“교은아, 이 오빠는 남들 생각 좀 중요해. 나는 아직 사랑을 기다리는 총각이란 말이야. 너야 주방에서 안 나오니까 상관없지만 나는 설명하느라고 매번 당황스럽다니까.”
“그렇게 사랑 때문에 죽겠다고 난리칠 땐 언제고 기다리긴 뭘 기다려? 정신 차려. 어라, 아까 간판을 한참 쳐다보는 거 보니까 말이야, 수상하네. 왜, 관심 있는 손님이라도 있나봐? 내가 말해줄게. 오해하는 손님 있음 모시고 와. 그리고 한지연, 너 당장 나가. 너 때문에 일이 안 되잖아. 한 달 후에도 죽겠거든 그때 와. 그럼 얘기해 주지.”
교은은 물기를 뺀 무 조각을 그릇에 담고 주방과 연결되어 있는 저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아우, 성질 하고는. 의대 관둔 게 잘 한 거지. 저 성질로 무슨 사랑을 담아 치료를 하겠냐.”
종연이 혀를 찼다.
“언니는 정말 너무해.”
지연이 핸드백을 조리대 위에 팽개쳤다.
“너도 너무 하다. 허구한 날 사랑 타령이냐. everyday new love도 아니고.”
“저는 충실해서 그런 거예요, 사랑에. 오빠도 아시잖아요, 사랑 어떤 건지.”
지연의 얘기를 들은 종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사랑 대충해야겠다.”
“그게 대충 되나요? 그럼 사랑 아니지.”
“아이구, 말이나 못하면. 네 돈 보고 덤비는 놈은 이제 그만 데리고 와. 그런 것도 구분을 못해?”
“아무리 돈 때문이라도 싫으면 그렇게 연기 못해요.”
지연은 핸드백 속에서 거울을 꺼내들었다. 거울을 보더니 자신의 몰골을 보며 눈을 굴리며 물휴지를 꺼내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거참. 너도 대단하다. 여튼 그만 해, 교은이한테는. 교은이가 사랑이라면 이 무 조각만도 못하게 생각하는 애야. 잘 알면서 못 살게 굴어? 네 부모님을 설득해야지 애먼 사람을 잡아?”
종연이 곱게 썰린 무 조각을 가리켰다.
“그래도 우리 엄마가 언니 말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신다구요. 그럼 이 결혼 인정해주실 지도 모르구요. 그리고 이번엔 진짜란 말이에요.”
“그럼 진짜면 교은이 말대로 한 달 뒤에 와.”
“우리 민재 씨가 돌아서면 어떻게 해요?”
“사랑 아닌 거지, 그건. 솔직히 말해서 너 사랑인지 모르니까 매번 이렇게 들고 들어오는 거 아니야? 너 멀었다, 사랑.”
종연이 무 조각을 마스카라로 얼룩진 지연의 부은 눈 위에 꾹 눌렀다가 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