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여어, 오랜만이다.”


“자아식. 살아 있었냐. 난 하도 연락이 없어서 저승사자가 잡아간 줄 알았지.”


정혁이 툭, 성훈의 어깨를 치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다들 바쁜 터라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정혁, 성훈, 도건, 준우, 선후는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이다. 그리고 한 둘을 빼놓고는 대학교 동문이기도 했다. 그 말인즉슨, 이제는 거의 20년을 향해 가는 지기라는 말이기도 했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면서 예전만큼 붙어 다니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러 사람과 어울릴 것만 같은 스펙의 도건임에도 불구하고 뭉쳐다니고 함께 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도건의 친구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윤도건이 결혼을 다 하는구나.”


“그러게. 난 저 자식은 영영 혼자 살 줄 알았더니.”


“그래도 의외잖아. 난 적어도 이 중에선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능글맞은 윤도건. 옛날부터 보면 은근히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고양이란 말이야 이거 원. 왠지 진 기분이 드네.”


“인마, 너도 억울하면 선은이랑 결혼해. 벌써 몇 년이냐. 지겹지도 않냐.”


다섯 중에 결혼을 한 사람은 정혁이 유일했고, 애인이 있는 사람은 그나마 준우 하나였다. 그렇기에 애인이라든가 하는 이야기도 없이 불쑥 결혼을 한다는 도건의 말을 믿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 중에서도 정혁은 청첩장을 받기 전까지는 윤도건이 신종농담을 한다고 여겼을 정도니까. 청첩장을 보면서도 ‘오늘이 만우절이냐?’라는 소리를 할 정도였으니까.


“축하, 하면 되는 거 맞지?”


어쩐지 눈치를 보는 눈치랄까. 이마의 주름을 팍팍 만들며 정혁이 도건에게 술과 함께 말을 건넨다. 쪼르르륵. 호박색 액체가 작은 술잔을 넘칠 듯 채웠다.


“아니면?”


말리기라도 할 참이냐? 하는 말을 도건은 술과 함께 삼켰다. ‘도망가고 싶다.’ ‘결혼하고 싶지 않다.’ 봄날,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올라오는 생각을 지웠다가, 무너뜨렸다가 하루에도 수십 번 고민한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누구나 이런 감정을 가지겠지. 결혼이란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 도망가고 싶을 수도, 무르고 싶어질 수도 있는 거였다. 생각은 아무 것도 아니니까, 힘이 없으니까, 무언가를 구체화시키지 않으니까 괜찮았다. 그저 자신의 마음 속에,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건 괜찮았다. 그리고 그걸 굳이 결혼을 축하해 주려고 모인 친구들에게 말할 필요는 없는 거였다.


오늘은 그저 웃으며 장난기 어린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면 그만인 일이었다.


“자자자. 다들 조용히 해 봐. 앞으로 두 달 후면 새신랑이 될 우리 윤도건의 한 마디 좀 들어봐야지.”


사회자 기질이 있는 선후가 당당당, 포크로 술병을 두드리며 사람들을 주목시켰다. 도건은 인상을 팍 썼다.


“들을 말이 뭐가 있냐. 그냥 술이나 먹여. 아우, 배 아파. 윤도건, 성훈이한테 들으니까 미모도 출중하다던데. 괜찮은 친구 좀 없다고 하냐.”


“있는 놈들이 더 하다더니. 준후 넌 좀 가만히 있어라.”


애인이 있는 준우가 괜찮은 친구 타령을 하니 듣고 있던 정혁이 금세 타박을 한다. 다섯 명이나 되니 한 명이 한 마디씩만 해도 이야기는 끊길 새 없이 계속되었다.


도건은 맞은편에 앉은 성훈을 흘깃 바라보았다. 술이 센 편이 아닌 녀석이 연거푸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윤성훈, 천천히 마셔.”


도건의 말에 술을 넘기던 성훈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본다. 도건은 다른 때와 달리 불편한 표정의 성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다. 어딘가 어색하고 경직되어 있는 얼굴이다.


“그래, 성훈아 같이 마시자. 왜 그렇게 혼자 마시냐. 자, 모두, 윤도건의 결혼이 행복하고 아름답길 기원하며. 건배!”


짠, 하고 모두 흥겹게 술잔을 비워나가기 시작했다. 어지간지 질풍노도의 시기를 험하게 보냈고, 대학에 가서는 아예 물 대신 알콜을 마시다시피 한 그들이라 그들은 별로 취하지도 않은 채 술을 없애나갔다.


“얘들아, 정혁이 녀석 피곤해 보이지 않냐?”


갑작스런 선후의 말에 다들 정혁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피곤해 보인다, 라고 할 수 있을까. 언제나처럼 멀끔한 얼굴이었다. 더구나 유난히 햇살에 타지 않는 피부라 평소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정혁이었다.


“잘 모르겠는데. 왜, 무슨 일이라도 있냐?”


워낙 착한 성격의 준우가 걱정스레 되물었을 때, 선후는 파하하하하고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배까지 끌어안고 깔깔대는 모습에 다른 사람들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고, 정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저 녀석 글쎄, 입덧한단다.”


“뭐?”


선후와 정혁을 제외한 모두가 경악해서는 정혁을 바라보았다. 정혁은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와이프가 임신 3개월이란다. 그런데 지가 입덧을 한 대요. 그래서 아침이면 우웩, 우웩 하느라고 밥도 못 먹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난 또 뭐라고. 아 새끼, 유난 떨기는.”


준우가 과일 안주에 있던 파슬리를 정혁에게 던지며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그런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정혁은 그저 씨익, 한 번 웃을 뿐이었다. 어쩌면 난 니들이 아무리 그래도 행복하다, 이러는 것 같기도 했다.


“니가 입덧하면 부인이 음식을 사다 바쳐야 하는 거냐?”


“한 2주 잠깐 그런 거다. 김준우, 인마, 넌 촉새처럼 그걸 그렇게 얘기하고 싶냐.”


“그럼 물론이지, 너 더 창피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러면 안 될텐데. 얘들아 글쎄, 저 자식 부인 임신했다고 업고서 아파트 한 바퀴 빙빙 돌았단다. 와이프가 남우세스럽다고 내려달라는데 뭐가 어떠냐고 하면서 ‘여러분, 우리 와이프가 임신을 했답니다.’ 소리치면서 다녔대요. 사내 자식 망신은 저 자식이 다 시키고 있어.”


“니들이 내 맘을 아냐. 내가 사랑하는 여자 뱃속에서, 내 자식이 커가는 느낌, 니들은 죽었다 깨놔도 모를 거다, 자식들아.”


“어후, 저 자식. 닭살.”


제 새끼를 가진 남자로서의 자부심이랄까, 뿌듯함이랄까. 한 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광채가 정혁의 얼굴에서 흘러넘쳤다. 사랑을 하고, 온전히 그 사랑을 누리고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빛이었다.


타-앙. 떼구르르르. 성훈이 던지듯 내려놓은 술잔이 테이블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성훈은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간다.”


“어이, 한성훈, 뭐야. 와선 한 마디 말도 없이 술만 마시고.”


“그래, 오랜만에 보는 건데 더 있다 가.”


친구들의 만류에도 부득불 대답도 않은 채 성훈은 룸 밖으로 나섰다. 그런 성훈의 얼굴이 뜨겁게 달궈진 돌덩이 위에 서 있는 사람처럼, 차가운 얼음송곳 위에 있는 사람처럼, 무언가 참아내고 견뎌내는 듯한 얼굴이었다. 도건은 서둘러 그런 성훈의 뒤를 쫓았다. 아무래도 택시라도 태워 보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성훈이 술에 취한 건지 갈지자로 걸으며 비틀대고 있었다. 도건도 다른 때와 달리 많이 마셔서 그런지 성훈에게 가는 발걸음이 조금은 휘청였다.


“한성훈, 택시라도 타고 가.”


“들어가.”


도건이 성훈의 팔을 잡는 순간, 동시에 성훈이 그의 팔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내친다. 그리고는 후우, 하고 커다란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한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모습에 도건이 인상을 팍, 쓴다. 혼자서 얼마나 퍼부은 거야. 성훈은 술이 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섯 중에 센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놈들이 이야기하는 사이에 혼자 퍼붓는 듯 하더니, 많이도 마신 모양이었다.


“한성훈!”


“신경 꺼. 들어가서 계속 결혼축하나 받으시지.”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성훈의 말에 그는 주춤, 성훈에게 뻗던 팔을 거두었다. 무언가 몹시 마음이 상했다, 고 성훈의 얼굴에 써져있는 느낌이다.


“너도 축하해 주러 온 것 아니었어? 난 아직 네 축하, 못 받은 것 같은데.”


“그래서 축하 받으려고 여기까지 쫓아나왔다, 이거야? 그래. 못할 것도 없지. 빌어먹을 윤도건, 그 결혼 축하한다. 오래 오래 잘 먹고 잘 살아라. 벽에 똥칠하고 살만큼 오래, 오래!”


성훈이 버럭버럭 화를 내며 지르는 소리에 그도 얼핏 화가 치밀려고 한다. 따뜻한 축하의 한 마디는 아니라 하더라도 친구에게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고 잘 하고 있는 일이라는 걸 확인받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한성훈은 갑자기 뭐가 못마땅한지 술만 처마시다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그걸 축하라고 하냐?”


“왜, 샴페일이라도 빵빵 터트려줘야겠냐?”


“그래. 터트려 봐.”


도건은 뻗치는 열을 지그시 눌러가며,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뭐가 이리 기분이 나쁜지 알 수 없지만, 자신도 점점 화가 나고 있었다. 하하, 도건의 표정을 보고 헛웃음을 치던 성훈이 갑자기 목이 조이는지 넥타이를 거친 손길로 풀어헤치더니 무성의하게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그러더니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저는 한성훈이라고 합니다. 이 옆에 자알 생긴 이 놈은 제 친구, 윤도건이라고 합니다. 네네, 다른 게 아니라 이 친구가 두 달 후면 결혼을 합니다. 말 그대로 여우같이 예쁘게 생긴 와이프가 생깁니다. 여러분 다들 축하해 주십시오, 많~이, 많이 축하해주십시오. 네!? 네, 이 친구와 그 와이프 될 사람이 어떻게 만났냐! 궁금하실 겁, 윽.”


도건은 갑작스레 대로변에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는 성훈의 입을 막아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갔다. 하도 어이가 없어 창피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이 자식아, 그게 무슨 짓이야. 너 미쳤냐?”


“이거, 놔. 그래, 미쳤다. 제정신이기 힘들어서 미쳤어. 왜!”


“미칠 거면 곱게 미쳐. 술 취해 이게 무슨 짓이야.”


“그래? 넌 그럼 제 정신이냐?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랑 홧김에 결혼하는 게 제정신이야. 너야말로 미친 거 아니야?”


성훈의 목소리는 작고 날카로웠다. 하지만 도건에게는 어떤 천둥소리보도다 크게 들렸다.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랑 홧김에 결혼하는 게 제정신이야? 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귓가에 울려 퍼졌다.


“결혼에서 사랑, 이 다라고 생각하지 않아. 더구나 홧김,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그래. 그렇겠지. 잘나~안 윤도건이 제 인생 마음대로 굴릴 리 없겠지. 그래, 그럴 리가 없지. 내가 미친 놈이지. 제 인생 마음대로 굴리는 줄 알고 착각했지 뭐냐. 재수 없게 잘난 윤도건이 그럴 리가 있나.”


“한성훈, 술 깨서 부끄러울 말은 말자.”


“……훗. 윤도건. 난 가끔, 네가 불행했으면 좋겠어. 바닥까지 떨어져서, 더 이상 떨어질 수 없을 때까지 떨어져서, 죽도록 불행했으면 좋겠어. 윤도건, 넌 아무 것도 몰라. 이대로라면 죽을 때까지 모르겠지. 그래 그렇게 잘 살아봐라 새꺄.”


한성훈은 술김이다, 술 취한 개새끼에 지나지 않는다. 도건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분노를 억누르려 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이를 악물고 도건은 으르렁거렸다.


“말 다 했냐?”


“다 했냐고, 다했냐고! 아니 못했다. 이 병신, 머저리, 쪼다, 등신, 병신 같은 새끼야. 내가 니 친구라니 부끄러워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새끼야!”


퍽. 더 이상 참지 못한 도건의 주먹이 성훈의 턱을 날렸다. 아마 술이 취하지 않았다면, 아니 술 취한 성훈의 모습에 미유의 얼굴이 오버랩 되지 않았다면 도건은 그저 웃으며 성훈을 택시에 태워보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힘이 실린 도건의 주먹이 성훈을 날렸고, 성훈은 입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오히려 씨익, 웃음을 지으며 도건에게 달려들었다. 퍽퍽. 아무래도 감정이 실렸다고밖에 볼 수 없는 서로의 주먹이 서로의 어깨를, 배를 그리고 얼굴을 퍽퍽 때리는 소리만이 거리를 가득 채웠다.









“어머, 한선생님. 얼굴이 왜 그러세요? 설마 누구랑 싸우셨어요?”


“하하, 아닙니다. 이 나이에 누구랑 싸우겠습니까.”


성훈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아침에 자신이 거울을 확인한 상태 그대로라면 아무리 좋게 봐줘도 누군가와 진탕 싸웠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몰골이긴 했다.


쯧쯧. 성훈은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으로 혀를 찼다. 술이 문제였다, 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아니었다. 이런 저런 다른 핑계를 찾고 있었지만, 부끄럽게도 도건과 치고 박고 싸운 이유는 오로지 도건에 대한 질투였다. 다른 무엇도 아닌, 찬별의 아빠가 도건이라는 사실 때문 이었다. 까칠해 보였던 정혁의 얼굴에 해사한 웃음을 보는 순간, 임신중독증에 걸려 아무 것도 먹지 못해 꺼칠했던 미유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혁이 부인을 위해 이런 저런 음식을 나른다 이야기를 들은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몰아쳤다. 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던 미유의 얼굴이 떠오른 순간,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뱃속의 아기를 위해서 억지로 먹던 음식들을 전부 토해내면서도 씨익, 웃던 미유였다. 성훈은 그저 술을 들입다 퍼부었다. 도건을 원망해야하는 게 아님을 알면서도, 제일 멍청한 건 강미유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한숨지었다. 빠른 시간 안에 도건을 찾아가 사과를 해야할 일이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술을 먹고 실수한 적은 없다고 자부했는데, 처음 한 실수치고는 과하고도 민망한 일을 저질러 버렸다. 대체 그 둘의 관계에 자신이 끼어들어 잔소리할 명분이나 자격이 어디에 있다고. 성훈은 괴롭게 고개를 내저었다.


“한선생. 얼굴이 왜 그래?”


언제 봐도 붉은 립스틱이 제일 선명한 박선생이 어디선가 나타나 성훈을 붙잡으며 말했다.


“실험적인 얼굴인데, 봐줄만 하진 않다. 어디 가는 길이야.”


“잠깐 시간이 나서, 찬별이 좀 들여다볼까 하고.”


“아항, 네 꼬맹이.”


박선생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성훈은 네 꼬맹이, 란 말에 고개를 저었지만 가슴 한편 느껴지는 기쁨은 어쩔 수 없었다. 웃는 바람에 터진 입술이 쓰라렸다.


“꽤 잘 버티고 있어. 울지도 않고, 밥도 꼬박꼬박 잘 먹고. 먹을 때마다 토하긴 하지만.”


“그런데?”


성훈은 잘 버티고 있다는 박선생의 말이 기껍지가 않다. 어두운 박선생의 표정이 그게 다가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 그렇다고, 하는 얼굴을 하며 박선생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너도 알고 있는 얘기 해 봤자 입만 아프지. 가 봐. 아마 맛없는 밥 먹고 괴로워하고 있을 거야. 입이 그렇게 헐었으니 밥맛이 있을 리가 없지만. 그 꼬맹이 은근 귀엽다니까. 병원에 있으면서 안 아픈 척, 안 괴로운 척 하는 환자들 지겹게 봤는데 그 꼬맹인 귀엽네. 엄마 없을 때 긴장 탁 푸는 거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말이야.”


“그래.”


박선생의 호출기가 울려 더는 말을 잇지 못했고, 성훈은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다음 진료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성훈 선생님이요?”

도건은 손목시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걸려 시간을 내 성훈의 병원을 찾은 길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하지 않은 주먹질을 이 나이가 돼서 했다니 할 말이 없었다. 제대로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었는데, 성훈은 술김이었는데. 남은 건 후회와 자괴 뿐이었다. 하필 성훈의 말이 정곡을 찌르지만 않았더라면 그렇게 폭발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그저 검은 정장을 입은 도건의 모습은 하얀 가운에 질린 간호사와 환자들의 시선을 단번에 빼앗았다. 지나가는 사람은 물론 일을 보고 있던 간호사들의 시선도 흘깃흘깃 도건을 향했다. 하지만 그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갑고 지루한 표정으로 서 있는 도건이었다.


“아마, 거기 있겠지?”


“그럼 요새 한선생님 없으면 무조건 거기 계시잖아.”


비밀을 공유한 사람들의 비밀스런 웃음이랄까. 간호사들이 도건을 앞에 세워둔 채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 도건은 미간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천, 천백십삼 호로 가보세요. 아마 거기 계실 거예요오…….”


그나마 한 간호사가 눈치를 주며-그러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하겠는지 거의 끅끅 대며- 도건에게 성훈의 소재를 알려주었다. 그가 짜증을 참지 못한 채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고맙단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는 뒤돌아섰다. 동물원의 원숭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술 취한 한성훈이 한 방 제대로 날리는 바람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골이 띵하게 울렸다. 마치 멀미를 하는 것처럼 어지러운 기분도 들었지만, 그저 기분문제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겨우 몸을 추슬러 오전의 스케줄을 소화한 후 잠시 시간을 내어 성훈을 보러 온 참이었다. 사과를 해야할 지, 받아야할 지는 아직도 고민 중이었지만 말이다. 아니면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고 식사를 하고 가게 될지도 몰랐다.


띵.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도건은 천천히 그가 가야할 호실을 찾아 헤매었다. 1204, 1205, 1206, 1207……. 천천히 병실을 헤아리던 도건은 1213호에서 멈춰섰다.


“무균실이 뭐예여?”


“무균실은 세균들이 살 수 없는 방이야. 그래서 나쁜 세균들로부터 우리 찬별이를 보호해 주는 거지.”


“나, 그거 알아요. 엄마가 난 지금 나쁜 세균들이랑 싸우는 거랬어여.”


“엄마가 내일부터 무균실 들어간다는 얘기도 해줬어?”


“네! 거긴 엄마가 옆에 있어줄 수 없으니까, 찬별이 혼자 싸워야 된댔어여.”


반쯤 열린 문을 두드리려던 도건의 손이 허공에서 멈춘다. 성훈의 목소리였다. 또랑또랑한 아이의 목소리가 금세 시무룩해진다. 뜨끔. 도건의 가슴 한구석이 바늘로 찔린 것처럼 아파왔다. 아이의 목소리는 씩고 명랑했지만, 금세 시무룩해지는 목소리에 그의 마음도 가라앉았다.


아. 그는 벼락에 맞은 것처럼 아이가 미유의 아이라는 걸 깨달았다. 찬별.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아이가 아프다고 했었지. 그래서 여기 있었던 거군. 그제야 간호사들의 수근거림이 이해가 됐다. 성훈이 얼마나 이 병실을 자주 드나들었는지도.


“들어가실 게 아니라면 비켜주시겠어요.”


“죄송합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지금 이 순간 병실로 들어서 성훈을 아는 척 해도 될지, 미유의 아들을 볼 자신이 있는지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시간을 벌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강미유, 너군.”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려던 여자는 미유였다. 도건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팔꿈치를 빠르게 잡아챘다. 금세라도 그녀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전 예전부터 생각했어요. 작가들이 너무 바빠서 글을 못 올린다는 얘기를 듣고 핑계일 거라고....-_-;;;
근데 살다보니 그런 날도 오네요;;;
정말 너무 바빠서, 한글 열어볼 수도 없는 날이 오더라구요.
놀라움이랄지, 감격이랄지;; 알 수 없는 종합적인 느낌.....이었습니다.
거기다 이름밖에 못 들어본 병에 대해 최대한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쓰고 싶었던 게 문제인 것 같아요.
어색해도 좀 이해해주시고, 이상하거나 그런 부분은 지적해주심 정말 고맙겠습니다.
덕분에 4편은 아직 끝나지 않네요;;


댓글 '2'

hillcross

2010.05.16 20:55:14

결말을 보여주세요

하늘지기

2010.05.17 16:41:59

조마조마..
금방이라도 터질 듯 터질 듯..
문서 첨부 제한 : 0Byte/ 2.00MB
파일 제한 크기 : 2.00MB (허용 확장자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245 푸른봄 4-3 [2] 편애 2010-09-03
244 붉은 탈 <18> [2] 신지현 2010-06-11
» 푸른봄 4-2 [2] 편애 2010-05-13
242 푸른봄 4-1 [4] 편애 2010-04-26
241 푸른봄 3-2 [3] 편애 2010-04-21
240 푸른봄 3-1 [2] 편애 2010-04-16
239 푸른봄 2-2 [3] 편애 2010-04-12
238 푸른봄-2 [2] 편애 2010-04-05
237 푸른봄-1 [1] 편애 2010-03-28
236 2010 대통령의 딸 (03) [3] 베로베로 2010-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