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그녀의 네이트온 대화명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데 그건 주로 그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아이돌이기 일쑤다. 그런데 요 몇 주째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문구가 있다. 그게 뭐냐면 말이지. “내 짐작대로라면”이라는 구린 제목의 드라마다. 내 생각엔 말이야, 그건 그냥 평범하고 진부한 드라마일 뿐이란 말이야.


어제 봐도 오늘 봐도 내용이 이어지는 그런 흔한 드라마 말이지. 근데 아 진짜. 글쎄 말이야. 보기 시작한 건 걔 때문인데 푹 빠져버린 건 오히려 난 지도 모르겠어? 뭐 모르겠다고? 글쎄 그냥 흔하고 진부한 이야기라니까.



쉿, 이제 조용. 시작했단 말이야.


-빈달



“할머니.”


“조심해야지, 넘어진다.”


찬별이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움에 할머니를 향해 내달음질 쳤다. 미유는 마당 언저리에 쌓인 부서진 것들을 애써 외면하며 들고 온 것들을 마루에 내려놓았다. 작은 걸로 골랐는데도 수박이 무거워 손바닥에 붉은 줄을 그었다. 들큰한 수박냄새에 무거운 줄도 몰랐는데 내려놓으니 팔이 쑥 위로 올라가는 기분이다.


“수박 없을까 봐. 미련하게 그걸 들고 와. 요샌 배달 다 되는데.”


“요 앞 시장에서 산 거예요. 김씨 아저씨가 달다고 어찌나 그러든지. 안 달면 확 교환해달라고 할까?”


다정한 손길로 찬별일 보듬는 것과 다르게 무심하게 말하는 엄마의 말에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엄마는 그새 찬별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는 데 열중이다.


“우리 찬별이 무릎은 누가 이랬어?”


“내가. 쩌번에 연못에 올챙이랑 우렁이랑 구경하러 갔었는데요. 어, 돌멩이가 있는 걸 몰라서, 어, 넘어졌어요.”


“아휴, 어디보자. 많이 아팠겠네. 호오.”


“하나도 안 아파쪄요.”


자신 앞에서는 아프다고 엄살을 부렸으면서도 할머니 앞에서는 큰 소리 땅땅치는 찬별이었다. 미유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장을 봐 온 걸 냉장고에 하나하나 넣었다.


“엄마, 말도 마. 얼마나 울었다구. 엄마, 엄마, 하면서 우는 거 달래느라 혼났다니까.”


“아니야, 할머니. 나 안 울었어요.”


그녀는 냉장고를 정리하고 세탁기를 돌리고서는 집을 청소해가기 시작했다. 부지런하고 깔끔한 엄마였지만 일 년 전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몸을 움직이는 게 힘들어졌다. 때문에 그 후로는 더욱 자주 집을 찾게 되었다.


“그냥 두고 앉아서 쉬어.”


엄마의 말이 들려왔지만 그녀는 아니라고 손을 저으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청소를 했다. 어린 시절부터 대책 없이 명랑하고 낙천적인 성격이어서 덜렁댄다고 엄마에게 수도 없이 혼난 그녀였지만 천성인지 밝고 맑은 성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어릴 적부터 그런 그녀를 답답해하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세월에 모질어졌다고 해도 미유는 자신이 엄마를 닮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더욱 더 그녀를 몰아세웠다는 것도.


“엄마. 엄마.”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오빠 한수의 방을 청소하던 그녀는 피가 묻은 옷가지들이 보여 기겁을 하며 마루로 뛰쳐나왔다.


“쉿. 웬 소란이야. 별이 막 잠들려고 하는 참인데.”


피곤했는지 어느 새 할머니의 무릎베개를 하고는 새액새액 잠이 든 찬별을 보고 미유는 침을 한 번 삼키고는 들고 있던 옷을 흔들었다.


“이게, 이게 뭐야?”


“어디서 또 싸움질이나 한 모양이지.”


“아직도 그래?”


“아직도가 뭐냐. 도박질 아니면 싸움질이지. 저번에도 집으로 검은 양복 입은 사람들이 찾으러 왔더라.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 건지. 못된 것만 배워먹어서는. 나쁜 놈.”


“엄마는 아들보고 나쁜 놈이 뭐야.”


“나쁜 놈이 나쁜 놈이지.”


평소 말이 없이 조용한 엄마가 그 동안 아들에게 쌓인 것이 많았는지 모진 말을 했다. 미유는 옷가지를 세탁기 위에 올려놓고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걱정스런 마음에 오빠에게 전화를 했다. 통화음이 끊어지길 몇 번, 오빠가 전화를 받았다.


“왜?”


“오빠. 어디야?”


“바빠. 할 말만 해.”


“그냥 잘 지내나 해서. 엄마한테 왔다가 생각나서 전화했어. 밥은 먹었어?”


“별 것도 아닌 걸로, 아! 잠깐. 에이 씹. 너 때문에.”


웅성웅성 시끄러운 소리 속에 오빠의 말은 끊는다는 말도 없이 끊겼다.


“오빠, 오빠.”


끊어진 전화기에 대고 오빠를 부르던 그녀는 다시 울려대는 벨 소리에 얼른 전화를 받았다.


“오빠?”


“여보세요?”


“여보세요? 오빠?”


“너무 열렬한 환영이라 기분 좋은데.”


“아, 성훈 오빠구나.”


“김빠지는 목소리네.”


“아. 아니에요. 그보다 웬일이야?”


“너무 예상대로라 재미가 없는데. 나와. 오랜만에 같이 밥이나 먹자.”


예상 밖의 말에 그녀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주춤했다.


“음, 지금 일하는 중이라서.”


“아, 진짜 재미없다. 나 지금, 너 일하는 미용실인데. 서현씨가 오늘 너 쉬는 날이라고 하던데. 강미유, 변했네. 이젠 거짓말도 술술이야. 튕기지 말고 나와.”


오빠야말로 수다스러워졌네요. 미유는 속으로 투덜대면서 결국은 더 이상 댈 핑계를 찾지 못한 채 알았다는 대답을 하고 말았다.



“미안해. 기다렸지?”


“아니. 나도 금방 왔어. 더운데 얼른 앉아.”


성훈과의 대화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안부 후에는 가벼운 일신의 얘기로 이어졌고 찬별이 얘기도 나왔다.


“찬별인 유치원 잘 다녀?”


“그럼. 얼마나 인기도 많은데. 글쎄 얼마 전에는 여자친구도 생겼다는 거야. 나 그 날밤에 왠지 억울하고 슬퍼서 잠도 안 오는 거 있지. 막 정말 아들을 뺏긴 기분이었어.”


“그래. 엄마를 닮았으면 인기 많을 거야.”


“오빤 무슨 그런 말을. 그치만 내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예쁘다니까. 처음에 병원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예쁘단 소릴 정말 많이 들었잖아. 그래서 일부러 머리에 리본 꽂고 사진도 찍고 그랬는데. 이젠 완전히는 몰라도 여자, 남자 다른 걸 아는지 리본을 달아주면 질색을 하는 거 있지. 정말 귀여워. 유치원 선생님도 찬별이가 얼굴만 그런 게 아니라 하는 행동도 참 귀엽다고. 아, 그런데 오빤 이런 얘기 재미없지?”


“아니야. 재밌어.”


미유는 찬별이 예쁘다는 얘기에 팔불출 같다는 걸 알면서도 활짝 웃음을 띤 채 이야기를 풀어놓았고 성훈은 더 이상 재미있는 게 없단 얼굴로 듣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르륵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난 네가 이만큼 커서 애 엄마라는 게 더 재밌다. 예전엔 정말 꼬맹이었는데. 많이 컸어.”


“에이, 그 때도 키는 이만 했는데. 이 키는 중학교 때 다 큰 거야, 뭐.”


꼬맹이. 한 때는 그녀의 이름보다 자주 불렸던 이름에 코끝이 시큰해졌지만, 그녀는 아닌 척 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성훈을 만나면 불편했다. 잊고 싶은 과거의 한 자락을 쥐고 있는 이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한 없이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인데도 그랬다. 그건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런가. 예전엔 정말 작아보였는데. 네가 도건이 옆에 서 있으면 정말 꼬맹이란 말이 딱 맞았어. 워낙 도건이 녀석이 크기도 했지만.”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 같았지?”


그녀는 이제는 식어버린 커피를 괜히 저으며 자못 명랑하게 대꾸했다. 아무렇지 않게 그 때의 얘기를 한다는 게 조금은 어려웠다. 하지만 흘러 간 얘기처럼 꺼낸 말에 일일이 정색을 한다는 게 더 우스운 일이었다.


“그래도 잘 어울렸어. 예뻤어.”


마땅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녀는 그냥 웃었다. 그렇게 봐주었다니 고마운 이야기다. 이제는 정말 오래 된 얘기였지만.


“한성훈?”


그녀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웃음을 멈추었다. 차갑고 어두웠지만, 더구나 너무나 오랜만이었지만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였다.


‘말도 안 돼. 설마, 아닐 거야.’


그녀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성훈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그녀를 이런 상황에 빠트린 거라면 아무리 그녀라도 화를 내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성훈의 표정이 더욱 놀란 것이었다. 커다래진 눈동자는 거짓이 아니었다. 후우. 그녀는 숨을 들이쉬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지난 7년 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윤도건.”


“맞구나. 저쪽에서 보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여서 인사나 할까 했지.”


“어. 아는 사람 좀 만나고 있었지. 인사해, 서로.......오랜만이겠다.”


“오랜만이에요.”


담담하게, 오래 전 아는 사람을 만난다면 느낄 수 있는 약간의 반가움을 담아 그녀는 미소도 지었다.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는 것도 맞았지만 이렇게 보게 되어 반갑기도 했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해 했던 사람이었다. 당황스러우리만큼 알 수 없는 반가움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났다. 그보다 강한 건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불편함이었지만.


찡. 눈이 마주쳤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에, 그녀는 활에 꽂힌 작은 동물처럼 꿰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얼굴이었지.’


그녀는 7년 만에 보는 얼굴에 새삼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굵고 남성다운 눈썹. 그 아래 쌍꺼풀 없이도 보기 좋은 커다란 눈. 곧은 콧날.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남성다운 인상이었다. 7년이라는 세월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낯익을 얼굴에 미유는 금세라도 그 얼굴로 손을 가져갈 것만 같아 주먹을 쥐었다. 이 남자는 여전히 지독하게 매력적이었다. 그때만큼, 아니 그때보다 더.


“아는 사람이라......”


그래서 그 낯익은 저음이 울려 퍼졌을 때, 마음 밖에서 바람이 불어 와 그녀의 가슴을 때린 것처럼 그녀는 흔들렸다. 팡-. 바람의 여파가 통증이 되어 퍼져나갔다. 차가운 눈빛을, 무심할 말투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한 그녀가 입을 열려고 할 때, 제 3의 누군가가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도건씨. 아는 분들이면 합석할까요?”


여자였다. 잘 정리된 올림머리, 단정하고 우아한 정장의 여자는 고운 말투를 짓는 여자는 까페의 사람들이 한 번은 바라볼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럴 것 까지는 없을 것 같군요.”


도건은 여자를 바라보며 정중하게 말했다. 미유는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여자에게로 떨어졌을 때, 자신의 낡은 치마를 꾹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것이 심장을 관통한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윤도건. 그러지 말고 오랜만에 만난 김에 식사나 같이 하는 건 어때?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눴잖아. 오랜만에 만난 회포도 풀 겸. 불편할 것도 없잖아?”


미유를 바라보던 성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는 급히 그 말을 막았다.


“아니에요. 전 이만 가볼게요. 성훈오빠, 나 집에서 찬별이가 기다릴 것 같아. 먼저 갈게.”


미유는 자리에서 급히 일어섰다. 이런 분위기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 풀 회포 따위는 없었다. 그녀가 핸드백을 들고 막 자리를 벗어나려는 찰나,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꾹 잡힌 손목에 엷은 통증이 느껴졌다.


“그래.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냥 헤어지면 꽤 섭섭하겠지. 같이 식사나 하자. 서연씨, 괜찮다면 합석해도 괜찮겠습니까?”


도건이었다. 그녀는 보지도 않은 채 그녀의 팔목을 붙잡고, 그는 다른 여자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팔을 힘껏 뿌리쳤지만 더욱 강한 힘으로 그는 그녀의 팔목을 옥죄였다.


“제가 껴도 될까요. 다들 친해 보이시는데요.”


“물론이죠. 그렇지, 한성훈, 강미유?”


“그럼.”


흔쾌한 성훈의 대답에 미유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성훈을 가볍게 노려봤다.



‘불편해 죽겠다는 얼굴이군.’


도건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미유를 보며 생각했다. 불편한 얼굴에 좌불안석인 모습이 이 자리를 얼마나 불편해 하고 있는지 보였다. 저런 모습일 게 뻔한데도 잡아버린 자신 때문에 도건은 입이 썼다. 생각지도 않게 손이 나갔다. 자신과 부딪히고 싶지 않았다는 걸 온 몸으로 말하는 그녀에 대한 순간적인 반감이었다. 그 정도로 내가 보기 싫었던 거니. 이제는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은 거야.


하얀 얼굴. 검은 눈. 어깨에 닿지 않는 고운 단발머리는 미유를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귓가에서 찰랑대던 부드러운 머리에 넋을 잃곤 했던 자신이었다. 소의 눈망울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눈도 여전했다. 모든 게 7년 전의 모습처럼 그대로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더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서연씨 같은 분만 나오신다면 제가 선을 몇 번이라도 보겠습니다.”


“어머, 성훈씨는. 과찬의 말씀이세요.”


그가 아는 성훈은 여자들에게 기본적으로 친절하고 다정했지만 이런 실없는 이야기를 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다른 때보다 조금 들뜨고 흥분한 기색이었다. 아니면 그런 척을 하는 지도.


“아닙니다. 진짭니다.”


“옆에 계신 분도 예쁘신대요. 미유, 미유씨라고 하셨나요?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잘 어울리시는데, 사귀시나요?”


“하하핫. 아닙니다. 그냥 선배 후배 사이죠.”


“그, 그럼요. 그냥 선배 오빠에요.”


순간 성훈이 당황한 듯 그를 바라본다. 자신의 눈치를 보는 듯한 성훈의 시선에 그는 오히려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나마 정색을 하는 미유 때문에 기분이 놓였다.


“그런데 세 분은 어떤 사이세요. 성훈씨와 도건씨는 죽마고우시라구요. 그럼 미유씨는요?”


경계심이랄까. 조심스러운 서현의 시선이 미유에게 향했다.


“선배님들이시죠.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까지 전부 같은 학교였거든요.”


“어머, 세 분 다요?”


“네. 중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재단이었고, 대학교는 공교롭게도 같은 곳으로 갔죠.”


“어머, 미유씨도 같은 대학교인가요. 실례지만 몇 학번이시죠?”


“......00학번이에요.”


“아. 그러셨구나. 그런데 00학번이면 저랑 같은 나이시네요. 세상이 정말 좁네요. 동문을 두 명이나 만나다니요.”


“하하, 그러게요.”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다니셨으면 많이 친하셨겠어요?”


“아, 그렇다고 해도 저는 세 살이나 어려서 학교를 같이 다닌 적은 없었어요. 그냥 오고 가며 지나친 게 다예요. 아, 잠깐만요. 전화가 와서요.”


‘하. 오고 가며 지나쳤다라.’


끊길 듯 가만히 이어지던 대화는 갑작스레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의해 끊겼다. 도건은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는 미유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기분 나쁜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연은 선을 보고 처음으로 두 번 만난 여자였다. 몇 달 동안 보아온 선마다 거절을 하는 그 때문에 한숨을 쉬시는 어머니를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 적당하게 말이 통하고 예쁜 여자였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선을 보는 것보다 이 사람과 만나보는 게 어떤가 하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 오래 전이지만 사귀었던 여자와 마주쳤을 때, 함께 동석을 한 것은 서연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도 몰랐다. 더구나 그걸 제 입으로 말할 필요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데 문제는 미유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데 짜증이 났다는 사실이다.


“도건이 이 녀석이 지금은 이렇게 말끔해 보여도 중학교, 고등학교 때 엄청난 문제아였단 말이죠,”


“어머, 정말요? 전혀 그렇게 안 보여요.”


“그렇죠. 다들 이 녀석 겉모습에 속는다니까요. 한 번은......”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난 모습으로 성훈은 그의 이야기를 뚜르르 쏟아냈다. 도건은 그런 성훈을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전화를 받고 있는 미유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제길.’


웃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을 때는 급체한 사람처럼 불편하고 뚱한 표정이었던 미유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오늘 보았던 표정 중에 가장 밝은 표정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미유의 웃는 모습에 그는 가슴에서 뭔가 울컥한 기분이 되었다.


네가 궁금했어. 네가 보고 싶었어. 네가 그리웠어. 그런데 넌 몇 년 만에 만난 내가 불편하고 어색하니? 이제는 더는 나란 사람이 반갑지 않은 거야?


왜, 왜 변한거야. 왜 너는 이렇게 멀어진 거야.


오랜 시간 동안 마음에 묵었던 답을 찾지 못한 질문들이 다시 그의 마음속에서 요동쳤다.


“헤어숍이요?”


“네. 헤어 디자이너랍니다. 더불어 사장님이기도 하구요.”


“아, 헤어디자이너시군요. 그런데 전공이 뭐였는데 그쪽 길로 가신 건가요?”


그에게서 시작됐던 이야기는 미유에게로 이어졌다. 평소였다면 자리에 없는 사람을 이야기할 성훈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 쪽을 흘깃거리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서연에게라기보다는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은 그야말로 궁금한 이야기였다. 그랬기에 그는 귀를 기울였다.


‘뭐? 헤어디자이너?’


그가 아는 강미유는 어느 누구보다 선생님이 되고 싶어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수학교육과를 선택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던 그녀였다.


“수학교육과였어요.”


“그런데 왜?”


그가 궁금했던 것을 서연이 먼저 물었다.


“졸업을 못했거든요. 아, 제 얘길 묻지도 않고 얘길 한 거 알면 저 녀석이 화내겠네요. 사정이 생겨서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그 후에 일을 배우게 됐고, 가게를 차리게 된 거죠.”


졸업을 못했다니. 문득 그는 그녀의 가정환경이 집혔다. 노름에 빠져 가정을 책임지지 못하던 아버지나, 언제나 사고만 치던 오빠는 그가 그녀를 알고 있던 동안도 그녀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언제나 웃는 얼굴로 자신의 아빠와 오빠를 변명하던 그녀였다. 아마 그녀가 학교를 그만둔 거라면 그 때문일 거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옆에 있었다면 최악의 상황만은 면했을 거라는 게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저 먼저 가봐야겠어요.”


명랑한 말투는 10년 전의 어린 그녀를 연상시킬 정도로 발랄했다. 미유의 은은한 미소를 보며 도건은 깔깔 웃음을 짓던 어린 시절 미유를 떠올렸다. 그의 앞에서만 그렇게 웃었다. 그래서 그 웃음을 지켜주고 싶었다.


“벌써?”


“응. 찬별이가 보고 싶다면서 얼른 오라고 해서. 엄마가 감당 못하겠다고 얼른 오래.”


“그래? 데려다줄게. 같이 가자.”


미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치는 사귀는 여자친구를 챙기는 것처럼 살뜰한 모습이었다.


“아니야. 혼자 갈 수 있어. 아직 식사 안 끝나잖아.”


미유가 살포시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래. 그럼 가서 연락해.”


“응. 그럼 두 분 식사 맛있게 하세요. 먼저 가볼게요.”


“네, 안녕히 가세요.”


데려다 준다, 아니다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에서 그는 혹시나 하는 의혹이 들었다. 성훈과 미유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인사를 끝낸 미유가 빠른 속도로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찬별이가 누구야?”


“.....미유 아들.”


자리에 앉은 성훈이 담담하게 말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그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휘청했다.


아. 결혼했구나. 아이까지 있는 거였군. 괜히 혼자 미친놈처럼 가슴이 널을 뛰었군. 거기에 성훈이까지 갖다 대는 망상까지 하고 말이야.


“하하하, 그랬구나. 아들이 있었어.”


결혼을 한 거였어. 하하하.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갑작스런 웃음에 서연과 성훈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런 시선을 느끼지 못하고 바보처럼 헛웃음을 지었다. 심장이 날카로운 걸로 배인 듯 아파왔다.


서로의 인생이 겹쳤던 순간으로부터 아주 멀어져 이제는 두 사람의 인생이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는 걸 인정해야한다는 생각에 그는 가슴이 아팠다. 아직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7년 전의 그때까지의 그녀가 살아 있었나보다. 그런데 이젠 그런 환상마저 깨졌다. 그의 첫사랑이 이렇게 끝났다. 아니 오래 전 끝났던 사랑을 이제야 그는 인정했다. 강미유는 정말 윤도건으로부터 떠났다, 완전히.



댓글 '2'

하늘지기

2010.04.06 13:14:31

암것도 모르는 윤도건..

솜진

2010.04.10 16:10:38

전작 반짝반짝작은별은 슬퍼서 가슴이 먹먹했는데 편애님이 조금 더 미유를 행복하게 해주시지 않을까 희망을 갖고 오겠습니다~~ 자주 와주세용~~
문서 첨부 제한 : 0Byte/ 2.00MB
파일 제한 크기 : 2.00MB (허용 확장자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245 푸른봄 4-3 [2] 편애 2010-09-03
244 붉은 탈 <18> [2] 신지현 2010-06-11
243 푸른봄 4-2 [2] 편애 2010-05-13
242 푸른봄 4-1 [4] 편애 2010-04-26
241 푸른봄 3-2 [3] 편애 2010-04-21
240 푸른봄 3-1 [2] 편애 2010-04-16
239 푸른봄 2-2 [3] 편애 2010-04-12
» 푸른봄-2 [2] 편애 2010-04-05
237 푸른봄-1 [1] 편애 2010-03-28
236 2010 대통령의 딸 (03) [3] 베로베로 2010-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