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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No.01 재회와 감회 : 현재진행
<미안. 앞에서 사고 나서 십분 정도 늦을 거 같다. 정말 미안.>
그럼 그렇지. 정우는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 보다 비죽 웃었다. 아무렴, 매일 지각을 교칙처럼 엄중히 지키던 권윤후 어디 갈 리가. 낮은 하늘이 먹구름으로 치장한 궂은 날엔 어김없이, 윤후가 자습시간의 침묵을 헤치고 헐레벌떡 교실로 뛰어 들어와 의자에 몸을 늘어뜨리고 벨트부터 풀었더랬다. 정말이지 만인과 흉허물 없이 지내는 그야말로 박애의 아이콘이랄까. 미풍양속을 해치는 일종의 공개 탈의 - 혁대도 의복이라면 의복이다 - 에 대고 경멸의 눈길을 쏘아주면, 반 뼘 남는 바지의 허릿단이 자꾸 흘러내리는 탓에 저로선 도무지 도리가 없이 벨트를 단단히 죄고 내달려야 했다고, 열어둔 귀가 가여워지는 무가치한 해명을 떠들어댔다. 하기는 호리호리하니 마른 체격에 비해 싱겁게 키만 커서, 얼추 길이만 맞춘 교복 상의의 소맷부리나 어깨가 곁눈으로 보기에도 헐겁게 늘어졌다. 어지간히 비루하긴. 정우가 공연한 트집을 잡아 까거나 말거나, 한껏 옭죄어 놓았던 벨트를 바지에서 죽 뽑아 의자에 건 녀석은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면서도 끊임없이 싱글거렸다. 나름대로는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왔는지 두 볼이 바깥의 낮은 기온을 무시한 채 붉게 익었다. 담임선생님의 추상같은 호명이 그저 간지러운 듯, 손이 닿지 않는 등 한복판을 긁적이며 체벌을 상장처럼 받으러 교단으로 나서던 느긋한 걸음.
휴대폰의 얕은 자판위로 정우의 엄지가 돌아다녔다. <늦어도 좋은데 와서 벨트만 끄르지 마.> 농담 섞인 문자메시지 화면이 까맣게 꺼질 때까지 응시하던 정우는 전송을 포기하고 휴대폰을 닫았다. 그래도 결국, 녀석도 변했을 테니.
있지, 정우야 내가 오늘은 정말로 늦지 않으려고 그랬거든? 그런데 오는 길에 내 자전거 바퀴 아래로 지렁이가 두 마리가 지나가는 거야. 에……절에서는 개미가 죽을 까봐 뜨신 물도 바닥에 함부로 안 쏟는다며. 나도 초등학교 수학여행으로 불국사도 다녀왔고 해서 자전거 핸들을 기역자로 홱 꺾은 다음 자리에 멈췄어. 그……뭐더라? 있잖아, 왜. 임전무퇴, 살생윤택? 아……유택. 아무튼 그리고서 손으로 턱을 괴고 곰곰이 따져보니 지렁이는 땅을 비옥하게 가꿔주는 영화로운 생물이기까지 한 거야. 손가락 딱 튕기고서 지렁이 집어다 길섶으로 피신시켰지. 여기까지는 좋았는데……오는 길에 한 열댓 마리 더 만났어. 그……그게 걔네도 차별당하긴 싫지 않을까 싶어서……. 어제? 맞아. 어제는 날도 맑아서 지렁이 구출도 안했지. 느닷없이 타이어에서 바람이 새지 않았더라면 어제는 정말 일착으로 등교했을 거야. 신후, 내 동생이랑 비슷한 시간에 일어났거든.
주절주절, 과거의 권윤후가 쏟아내는 지각사유들이 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정우를 웃게 했다. (물론 당시의 정우는 쇼펜하우어처럼 미간에 줄을 잡고 가능한 가장 통렬한 비난을 돌려주었다.) 바른 말로, 소년시절의 윤후와 말을 섞노라면 쇼펜하우어라도 한 번쯤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을 테다. 비록 염세에 찌든 비웃음이라할지언정. 가만한 미소가 입가에 머물도록 두고, 정우는 머그잔을 들어 카페라테를 머금었다. 음료가 부드럽게 식도로 흘러들었다.
카페라테. 파열, 파찰음 거센소리로 이뤄진 음운의 생경한 조합. 표준어 맞춤법대로 읽기가 여간 곤혹스럽지 않은 이국의 말. 어린 정우가 내심 동경했던 음료이며 또한 어머니의 아침식사이기도 했다. 혹여 아버지의 첫사랑이 쌍화탕 전문점에 달걀이라도 납품했던 모양일까. 정우의 기억이 왜곡 없이 옳다면 아버지는 쇄국주의를 표방했던 흥선대원군 못잖게, 카페인이 다량 함유된 이국의 음료를 혐오했다. 냉엄하고 까다로운 아버지를 몹시 불편하고 어렵게 여긴 소녀 정우는 차마 마음껏 일요일 오후처럼 달콤하고 그윽한 향을 맡을 수 없었다. 때문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사실상, 법률상 양면으로 완벽하게 정리된 다음에야 정우는 카페라테의 맛이 풍기는 향만치 달고 온유하지만은 않다는, 차가운 진실의 벽 앞에 서게 되었다.
과정은 이러하다. 아버지로서의 자격과 권한을 포기한, 하필 정우가 바라지도 않은 심드렁한 눈초리를 물려준 중년 남자를 조롱하고자 정우는 야심차게 혼자만의 송별식을 계획, 실행했다. 우선 머그잔에 밥숟가락으로 인스턴트커피를 퍼 담고서 수북이 쌓인 가루 위로 따뜻하게 덥힌 우유를 부었다. 한 방향으로 수차례 원을 그리는 숟가락을 따라 흰색과 짙은 갈색이 조화롭게 섞여들었다. 이제 건배를. 정우는 뿌듯함 어린 동작으로 잔을 들어 음료에 입술을 담갔다. 다음 순간, 미각세포가 반응하기 무섭게 개수대로 달려든 정우가 일말의 주저도 없이 수챗구멍에 배덕의 음료, 혹은 기만의 음료를 쏟아 부었음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열네 살 정우가 주옥같은 경험 끝에 내린 바 결론에 의하면 커피는 정말이지 사랑이었다. 이를 부정할시 그녀와 커피가 처음 입 맞춘 달 밝은 밤, 몸을 북삼아 미친년 널뛰듯 뛰어대던 심장과 세상의 커피 알갱이를 다 세어버릴 기세로 또렷했던 의식을 설명할 길이 없다.
정우는 다시, 추억이 가미되어 맛이 달라진 그녀의 기호품을 음용했다. 지옥의 쓴맛이 이런가 싶은 게 괜히 악마의 음료가 아니구나, 유명한 시구를 퍽 창의적으로 해석하곤 혼자 납득했는데. 고개를 떨어트리고 킬킬 웃는 정우의 뺨에 바깥바람이 와 닿았다. 공간을 메운 체향이 일순 희석됐다. 무심결에 상쾌한 공기를 따라 얼굴을 돌리자, 마침 정우의 또 다른 추억이 바람을 데리고 문턱을 넘는 중이었다. 여어- 하고 손을 들어 위치를 알려주려던 정우가 멈칫했다. 겉옷을 벗어 한쪽 팔에 건 남자의 가슴과 어깨가 반복해서 크게 들썩였다. 정우의 조용한 기다림 아래, 그는 이내 호흡을 고요하게 가라앉혔다. 차양처럼 이마를 받친 손이 편한 자리로 돌아가자, 엷은 색이 흡사 커피와 같은 두 개의 눈동자는 사람으로 붐비는 속에서도 금세 정우를 찾아냈다. 시선을 정우에게 단단히 잡아매어둔 채, 그가 휘적휘적 걸어왔다.
“늦어서……미안.”
큰 키로 천장을 떠받든 남자가 선 그대로 정색하고 말했다. 정갈한 얼굴에 참회와 반성의 빛이 가득 떠오른 본새가, 사과를 바로 받아주지 않았다간 별이 바람에 스치우고 봄비가 속살거리는 밤에 십자가 걸린 첨탑에서 뛰어내릴지 모른다, 하는 협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래서야 일찍 와서 시간 죽이고 기다렸노라 생색낼 기회도 없다. 내심 투덜거리며 정우는 직접 남자가 앉을 의자를 빼주었다. 하기는 고교시절, 문학교과서 한편에 게재된 윤동주의 증명사진을 보고 그 단정한 외견에 퍽 감탄한 여학생들끼리 윤동주의 참회라면 무조건 받아주어야 한다는 상당히 불합리한 사담을 나누었더랬다. ……거, 김구 선생께는 대단히 송구하게 되었더라만.
“괜찮으니까 앉아. 우선 앉고 나서…….”
겸연쩍은 표정은 여전했지만, 그는 정우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동석해 달라 청하지 않은 어색함이, 눈치도 없이 육중한 둔부를 테이블에 턱 걸었다. 아무래도 고등학교 때의 똥오줌 못 가리고 방방 뛰는 권윤후를 기대하긴 무리다. 자리를 만든 주체로서, 순식간에 분위기를 장악한 어색함의 뒷덜미를 잡아 내던져야 한다는 사명감이 정우를 몰아붙였다. 둘 곳 모를 눈을 굴리며 윗니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놓았다, 정우가 수초 간 고행을 거듭했다. 차라리 기분상한 흉내를 내서 사과라도 계속하게 둘까? 아니, 이 정도 늦은 걸 가지고 눈을 세모꼴로 하는 편이 더 이상…… 아, 그래. 지각……! 알전구에 반짝 노란불이 들어오자마자 과단을 내린 정우는 과장된 동작으로 팔짱을 끼고 턱을 살짝 추켜올렸다. 실상, 연기엔 썩 자신이 없어서 정우의 바람처럼 오만해보일는지는 미지수라 해도.
“에……좋아. 이제 시 읊으면 돼.”
“……시?”
뜬금없는 지시에 당황한 남자의 눈길을 거리낌 없이 되받아치며 정우가 싱글, 환한 웃음을 그려보였다. 시 읊기는 정우네 반 아이들이 지각할 적에 떨어지는 엄벌이었다. 사디스트 교사와 마조히스트 학생의 환상적이고 이상적인 조합이 아닌 다음에야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불유쾌한 매질을 대체할 겸, 국어교사의 정체성도 공고히 할 겸해서 고심 끝에 고안한 정우네 반 한정 특별법인 셈이다. 식습관의 변화로 성장이 빨라진 요즘, 턱에 거뭇하게 올라온 수염을 고의로 방치한 남학생이 뒷짐을 지고 교단에 서면 정우가 미리 채택해둔 간지러운 연애시를 건넨다.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을 표정에 오롯이 담은 남학생이, 손으로는 구레나룻을 생명줄처럼 절박하게 부여잡고 간헐적으로 발뒤축을 굴러가며 설움이 밴 음색으로 무려 다섯 편의 시를 읊는 광경은 분명 그로테스크하다. 낭독이 끝나면 없어진 손발을 찾을 방도가 요원한 말 그대로 청각테러이자, 연좌제 - 고통의 공동분담이라는 측면에서 - 의 일종인 시 읊기는 지각 방지에 제법 효과적이었다. 머리에 핏기는 진작 다 말랐다나, 웃기지도 않은 허세를 부리며 잰체하는 아이들에게는 유치함의 강요가 굉장한 고통인 것이다. 의도는 바로 먹혀들어, 2학년 아이들 사이에서는 삼장법사가 손오공에게 속삭이는 밀어 이상의 정신공격으로 정평이 났다. 반면, 학생들과 입장이 완전히 다른 한학년 여선생님들은 - 황감하게도 - 미덕의 체벌이라 칭송하여 비주류 외길 인생 28년차 이정우를 쑥스럽게 했지만. 정우가 대강의 해설을 마치자 일절 대꾸 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던 그가 입을 뗐다.
“맞아. 늦은 건, 확실히 늦은 거니까.”
“어?”
찰나, 길게 빠진 눈매가 순하게 휘었다가 이내 바로 돌아왔다. 정우가 말릴 새도 없이 선이 또렷한 입술을 비집고 문장이 탄식처럼 흘러나왔다. 이상하게 낯선 음성은, 9년 동안 접점 없이 각자의 레일을 밟아온 두 사람의 거리만큼 깊고 안타까웠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정부 방식을 빌어 변명하자면, 정우로선 전혀 예상치 못한 반격에 좀체 발 빠르게 대응할 수가 없었다. 왼쪽은 내려둔 채 오른쪽 입매만 슬며시 말아 올린 반절짜리 미소는 미묘한 긴장감을 둘 사이에 가로놓았다. 말간한 눈이 흑경(黑鏡)처럼 정우를 담았다. 아직은 사냥의 때가 아닌 터 그저 나른한 몸짓으로 따가운 볕을 피해 초원의 응달을 누비는 맹수의 황금빛 눈동자처럼, 절제 아래 미처 억누르지 못한 광기가 넘실거리는. 물정모르는 순한 눈망울이 한 마리 사슴 같던 애한테 이런 몹쓸 기술은 누가 가르친 거람. 고래로 남자에게 나쁜 물을 들이는 원흉은 둘 중 하나, 동네 아는 형 아니면 군 시절 선임이다. 정우는 이름 한자 모를, 윤후의 선임을 청정해역 오염원으로 낙점하고 진심에서 우러난 저주를 보냈다.
“모자라?”
“아니, 멍해서. 그게, 하여가대로 사는 녀석이 다른 소릴 하니까……으음, 편견은 나쁜 거지, 암.”
단심가의 성공적인 낭독으로 탄력 받은 그가, 지면을 몇 장씩 잡아먹는 장대한 길이의 사미인곡이나 기미독립선언서를 읊기 전에 용무를 마쳐야 한다. 마음이 급해진 정우는 훈훈한 담소를 단념하고 무릎으로 끌어온 가방을 뒤져 카드를 꺼냈다. 과거의 공공연한 비밀과, 이제는 남의 얘기만 같은 당시의 속내를 까발리다 손뼉을 치며 우리 그땐 그랬지 - 조금, 해보고 싶었는데. 아니. 그래봐야 마음 맨 밑바닥엔 여과되지 못한 미련과 후회가 찜찜하게 가라앉을 테지. 같은 날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상을 영유한 사람들 간의 묵은내 나는 교감은 환상일 따름으로, 굵직한 사건사고를 한 번씩 들먹인 후 억지로 뽑아낸 시시한 화젯거리마저 동나면 무한정 불타오를 것만 같던 동료애와 연대의식은 중강진의 1월처럼 차게 식는다. 유려한 나이테가 엷게 지나는 목재 테이블위에 새파란 카드 봉투가 누웠다. 턱을 괸 남자가 눈길을 봉투에 고정하고 높낮이 없이 차분한 어조로 혼잣말하듯 물었다.
“이 편지는 영국에서 시작되어……케네디도 일곱 명한테 써서 보내지 않아서 죽었다……라는 건가.”
“……네 안의 내 이미지가 어떻게 뒤틀렸는지 몰라도, 행운의 편지 아냐. 참고로 보증 서달라는 것도 절대 아냐.”
아무래도, 진지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국적의 백인들과 어울려, 나누는 대화라곤 오직 토론뿐이다 보니 농담의 주파수가 엉뚱하게 맞춰진 모양이다. 너그러운 정우가 다그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주는데도, 겉봉을 면밀히 살피는 남자의 안색이 확연하게 나빠졌다.
“청첩장?”
“아냐, 틀려. 세속의 눈 말고 마음의 눈을 떠.”
“청첩장 아니면 다행이고. 결혼할 여자한테 단심가는 좀 그렇지. 내가 예비 신랑이었다면 남의 여자한테 이딴 고리타분한 수작 거는 놈 뺨을 글자 수대로 후려쳤을 테니까.”
“……그건 게르만족 마인드야? 너 독일서 지낸다더니 사람이 상당히 공격적이 됐네.”
“사람은 원래 변하는 거니까. 변할 수밖에 없으니까. 변해야만 하니까.”
그가 신념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입가에 머무른 웃음이 자조와 회한의 추를 매달고 무거워졌다. 그러나 그마저도 잠시다. 연필로 적은 초벌 답안을 지우고 수정하듯 재빠르고 능숙하게, 남자는 표정을 본래대로 고치고 시침을 뚝 뗐다. 태연함을 가장한 훤칠한 낯에서 흡사 표본이 되어버린 곤충과 같은 ― 숨을 잃은 생명체 특유의 기이한 정체감과 박탈감이 배어나왔다. 본질적인 고통은 여전하나 단지 통각이 마비되었을 뿐. 사연이야 아무래도 상대가 필요로 하지 않는 알량한 위로는 정곡을 찌르는 독설만 못하다. 사심 없이, 그저 등을 토닥여주고픈 충동에 못 이겨 자제력 부족한 몸이 함부로 나서면 곤란하기에, 정우는 가슴 앞에 바짝 거둬들인 손으로 머그잔을 둘렀다. 가벼운 한숨이 절로 샌다.
“그래, 변하지. 변했지. 너도, 나도. ……그래서 이건 미결과제였어. 시효를 한참 넘겨서 의미가 없어진 내 고백.”
“고백……이라.”
“응. 옛날에 내가, 널 좋아했거든.”
신후는 입안으로, 근 십년 시간의 위력에도 무릎 꿇지 않는 징그러운 외곬기질을 자찬했다. 망할.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발언이 신후를 집어삼켜 숨통을 조이는 줄도 모른 채 쌔액 웃는 얼굴이 미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뻐서, 담배가 고팠다. 정말이지 그를 강하게 키운 건 팔 할이 이정우다. 폭풍, 해일, 지진, 화산폭발……간만이라고 오늘은 크게 선심 써서 운석이 아니라 유성우로군. 꼬리를 빼고 지는 별이 무심코 할퀴어, 쓰라린 마음 한복판엔 어느덧 시커먼 어둠만 외로이 걸렸다. 머금었다 목 안으로 삼킨 감정 탓에 혀끝에서 시큼한 위산의 맛이 났다. ……괜찮다. 덜 아문 상처 위로 훈장처럼 앉았던 검붉은 딱지가 떨어져 나간 지 오래, 그는 이미 위태로운 소년을 버리고 밤의 어깨에 기꺼이 팔을 두를 수 있는 성인으로 변모했으므로 문제없다. 애써 심사를 추스른 신후가 머뭇거리며 카드를 챙겨 넣자 정우가 짧게 탄성을 질렀다.
“엇, 안 읽어봐? 나 철면피도 장착하고 나왔는데.”
체념에 젖어들어 낮게 가라앉은 음성과 달리, 신후는 담백하게 웃으며 진심을 밝혔다.
“나중에. ……읽고, 울지도 몰라서.”
헤어지는 길이었다. 횡단보도 건너편의 역사 입구까지 바래다주겠다는 신후를 극구 만류하고, 정우는 버스 정류장 푯말 아래서 비죽 손을 내밀었다. 자그마한 손이 행여 망가질라, 차마 힘주어 움켜쥐지 못한 신후가 힘을 뺀 손바닥을 가만히 마주 대었다. 가당찮은 온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신후의 손끝을 떠났다. 고개를 옆으로 까딱인 정우가 물 흐르듯 자연스레 신후로부터 등을 돌렸다. 오로지 헤어짐을 위한 만남. 옷자락을 활짝 열어젖힌 어둠이 정우의 뒷모습을 품에 안았다. 신후는 흐려지는 그림자를 그저 묵묵히 지켜보았다. 지겹게 익숙한 등이……싫다. 목소리도 미치지 않는 먼 데로 떠나는 정우가 밉다. 신후가 불현듯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후회할 짓거리는 집어치우라, 완강하게 뻗대는 이성 따윈 외면했다. 추진을 받은 두 다리가 성큼성큼 달려 나갔다. 호흡하나 변하지 않고 정우의 곁에 따라붙은 신후는 걸음의 박자에 맞춰 앞뒤로 흔들리던 손목을 낚아챘다. 돌아보는 얼굴에 당혹과 의혹이 먹구름처럼 끼었다.
“우와, 놀랐잖아!”
“미안.”
“사과 입에 붙겠다. 왜, 무슨 일이야? 차비가 모자라? 교통카드 잃어버렸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혹시, 내 미결과제 도와줄 생각은 없는지 해서.”
윤후 놈 덕분에 정우의 무른 성격을 익히 아는 바,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아서 신후는 일부러 간절함을 숨기고 말했다.
추적추적 내려앉는 가을비가 온 거리에 푹신하게 깔린 낙엽을 두드리던 열일곱의 어느 날. 형이라는 존칭을 더럽혀 신후로부터 영구존칭생략형(刑)을 언도받은 얼간이 한 놈이 여학생의 전유물인 자주색 체육복을 교복재킷 아래 받쳐 입고 귀가했더랬다. 뭉개버리고 싶도록 희색이 만연한 낯이었다. 이제라도 정체성을 찾아 다행이로군, 누나라고 불러줄까? 비아냥대는 신후의 정수리에 윤후가 망치를 갈겼다. 윤후 본인은 모를 테지만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반격.
‘안 그런 척 물러 터져서, 져주기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거든. 걔한테 감기기운 있어서 춥다고 찡찡댔더니, 먹고 떨어지라며 빌려줬어. 어때, 잘 어울려?’
더 캐묻지 않아도 윤후에게 체육복을 갈취당한 사람의 정체가 뻔했다. 신후는 총알이 관통한 마냥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고 윤후 몰래 이를 갈았다. 가정교육을 엄격히 받은 소년은,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배로 돌려주란 금언을 뼈에 새기고 있던 차였다. 당연지사 상대가 형제라 할지언정 관용은 없었다. 이튿날 아침, 윤후가 흐물흐물 늘어진 자전거 타이어를 보고 울상을 짓는 동안 신후는 무사한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구르며 유유히 대문을 빠져나갔다. 범행에 사용된 흉기는 이미 본래 자리인 공구함 구석에 처박은 뒤였다. 두 번 다시 거지새끼처럼 남의 옷 구걸해 입었다간 자전거의 안위는 보장 못해, 형님. 아니, 누님. 흡족해하는 한편, 무르기가 찌개용 두부 맞먹는 이정우가 쓸데없는 잔정을 털어내고 부디 벽돌처럼 단단해졌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고 뇌까렸던 기억을 잊을 리가.
뱃속이 아릴만치 긴장한 신후를 상상도 못할, 여전한 두부 - 정우가 느릿느릿 말문을 열었다.
“그…….”
“도와주면, 안 돼?”
“……거절하면 너 울거지?”
“응.”
“그럼, 수락해야겠네.”
생각지 못하게 흔쾌한 태도였다. 신후는 멍하게 넋을 빼고 정우의 손목을 얽맨 손을 스르르 풀었다. 발원이 모호한 허탈감이 삭풍이 되어 명치 근처를 맴돌았다. 난……긍정적인 답을 바란 게 아니었나. 빈 손가락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결은, 짙은 봄 내음과 지척에서 번진 정우의 웃음이 무색하도록 유달리 차가웠다.
CHAPTER No.01/ fin
그러고 보니 신후, 커피 안 시켰(...) 괜찮겠죠, 아마.
원래 제가 일상적인 장면과 대화문을 유독 못써서(엄청 지루해진다죠.) 장면을 통편집하고 싶지만 그것도 곤란하고. 음, 뭐 아무튼 몇 바닥 만에 둘이 만났으니 이걸로 목/표/달/성!
다향님/ 아마도 설정은 조금 정리되겠지만요. 음(...) 저도 생각하고 혼자 뜨끔. 일요길이 워낙 묵은 글이라 드라마가 나오기 전인데도 말예요.(웃음)
ssunny님/ 아이고, 벌써 안타까우시면 안돼요! 이 녀석 많이 구르는(...) 녀석인걸요. 앞으로 불우의 길을 걸을테니 으, 응원을(...)
지마님/ 저 전에 글이 <불친절>하다, 라는 칭찬을 듣고 뿌듯했더랬지요. 사회성 떨어지는 문체를 받아주셔서 감사해요.(흑흑) 그런 의미에서 신후는 열심히 돌려보겠습니다!
plum님/ 앗, 전에도 보셨군요! 설정을 조금씩 다듬어서 그대로는 가지 않을테지만, 그래도 맥락이 어쩐지 비슷해서요.(웃음)
요요님/ 워낙에 중독성 강한 노래였더랬죠. 정작 드라마는 딱 두 편밖에 안봤으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게 되더라구요.
베로베로님/ 으헑. 저는 제가 쓰는 대사들이 뭔가 무진 답답시러워서 싫어하는데 고쳐지지 않아요.(꽥) 베로베로님의 건필을 기원하는 1人입니다. 매의 눈으로 연재간격을 살피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