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5>


 


美臥山冬夢短 미와산의 겨울 꿈은 짧기만 하다.


 


가지를 밟는 소리는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해단은 허리춤의 검을 쥐고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모든 신경은 주변을 향해 곤두섰다. 하나..둘..셋...헤아려 보니 다가온 자들은 모두 다 섯이었다. 그의 품에 안겨 곤히 잠든 연을 생각하면 상대하기에 쉽지 않은 수였지만 계속 잠자코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의 걸음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깊은 잠에 빠진 듯 낮은 숨소리를 내며 웅크린 연을 무포위에 살며시 내려놓고 해단은 몸을 일으켰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순간 빠르게 가까워지던 발걸음은 얼어붙은 것처럼 멈춰 열 보쯤의 거리를 두고 정지했다. 그리곤 이내 그들 모두가 눈밭에 꿇어 엎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발걸음이 거칠어 그대들이라 생각지 않았다."


해단은 손에 쥔 검을 다시 놓았다.


"옥체 보전하셨습니까? 남모른 잠행에 천기가 어지러워 시각이 지체되었습니다."


피곤과 안도가 묻어나는 인규의 음성이었다.


"별일 없었다."


그제서 가까이 다가온 인규의 입에서 황망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옥체에 어찌 상처를 입으셨습니까. 대체 무슨 일이! 저 자는 누구입니까??"


"별 것 아니니 큰 소란 떨 것 없다. 아직 이른 새벽이다. 고요함에 취해 잠든 자도 있으니 소리를 낮추어라."


경계하며 다가오던 무호사병 들의 얼굴로 당황한 기색이 스쳐갔다. 왕의 피갑을 떡하니 두르고 잠든 자는 왕의 기침에도 일어날 줄을 몰랐다. 게다가 그것을 용인하는 옥음은 왕을 곁에서 모시는 동안 처음 듣는다 할 만큼 다정한 음색이었다.


"흑우는 찾았느냐?"


"아. 예. 멀지않은 물가에서 다른 말 한 필과 함께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전하. 하온데..."


인규의 시선은 자꾸만 왕의 곁으로 향했다.


"따로 궁금해 할 것 없다. 차비가 되었으면 이만 가자."


왕은 더 이상의 물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당혹감에 어쩔 줄 모르는 무호사병들 사이를 지나친 왕은 흑우위로 가볍게 몸을 올렸다. 멍하니 서있던 무호사병들도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인규는 맨 뒤에서 따르던 무호사병에게 눈짓했다. 아직 말에 오르지 않고 있던 병사는 왕이 누워있던 곳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잠깐 동안 살펴보던 병사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며 그대로 얼어붙었다. 인규는 앞서나가는 왕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낮은 헛기침으로 병사를 재촉했다. 그제서 정신을 차린 병사는 빠르게 뛰어왔다. 아주 작은 음성이지만 병사는 분명 잠든 자가 여인이라 고하고 있었다. 인규는 의아함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서둘러 말에 올랐다. 급하게 왕의 뒤로 따르느라 눈 쌓인 가지가 어깨에 마구 부딪혔다.
평소 그답지 않은 행동에 해단은 고개를 돌렸다. 누워있는 여인이 대체 누구인지 궁금함에 생각이 복잡해진 인규의 눈빛과 달리 왕의 눈매는 침착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인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궁으로 따로 들이실 것이옵니까? 아니면 조용히 정리를..."


인규가 흐린 말에 해단의 눈매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백성이다. 어찌 함부로 목숨을 거두려 하느냐. 지나가며 본 들꽃을 일일이 기억할까. 스쳐간 바람을 일일이 간직할까. 그저 갑자기 만난 눈보라처럼 지나가는 연...이니, 이미 보았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보지 않았다고 기억에서 지워 내거라."


연이라는 말에서 잠시 머뭇거린 옥음은 싸늘한 명을 내렸다. 그제야 무호사병들의 어깨로 다시금 팽팽한 긴장감이 번졌다. 인규는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됐다. 이만 길을 잡거라."


감정이 실리지 않은 옥음이었다. 앞선 병사는 고삐를 당기며 앞서 나갔다.
나무 마다 얼어붙어있던 눈은 후드득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눈발은 하얀 꽃잎이 날리는 듯 곱게 흩어졌다. 어지러운 눈발을 물끄러미 보던 해단은 슬쩍 고개를 돌려보았다. 연은 바위틈에 돋아난 들풀처럼 움직일 줄을 몰랐다. 무호사병들의 걸음이 시끄러웠을 텐데, 잘도 자는 것을 보니 꽤나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문득 지난 밤, 붉어지던 양 볼이 떠올라 해단의 눈매를 붙잡았다. 그러나 반짝거리는 눈동자와 보드라운 양 볼, 따뜻했던 입술 대신 멀리 보이는 건 연의 어깨를 덮은 허연 범의 털 뿐이었다. 어쩐지 아쉬운 마음에 해단은 희미한 긴 숨을 내쉬었다.


"전하. 혹. 하명할 일이 있으면 하시옵소서."


머문 시선을 모를 인규가 아니었다. 해단은 눈길을 거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그럼 이만 옥보를 따르겠습니다."


재촉하는 듯 들리는 음성이 알 수 없게 불쾌했다. 해단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허리를 가볍게 찼다.
지난 밤, 홀로 나무를 헤치고 산에 든 흔적은 길을 따라 이곳저곳에 남아있었다. 얼어붙은 겨울 산을 홀로 타는 것은 여인의 몸으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모른 척 내버려 두지 않은 의기가 곱다 느껴졌다.


"춥지는 않겠느냐."


날이 밝아 진, 바위틈이라도 추울지도 몰랐다. 춥다하면 돌아가 용포만 벗어줘야겠다고 생각하는 해단이었다.
지난 밤, 어둠 속에서 느꼈던 포근한 여인을 다시 품고자 함도 아니요 한 번 더 얼굴을 봐두고자 함도 아니라, 그저 추울까 근심이 되어 옷이라도 덮어주는 것이 도리고, 목숨을 살려준 보답이라 마음을 설득하는 해단이었다.
성심이 복잡하니 해단의 걸음은 쉽게 속도를 내지 못하였다.


인규는 앞만 보고 있는 해단을 대신 하듯 길게 목을 빼고 뒤를 돌아보았다.


"전하의 피갑을 덮고 있으니, 괜찮을 것입니다."


춥지 않다는 말은 괜스레 얄미웠다. 춥지 않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해단은 고삐를 잡고 멈췄다.


"무포하나만 깔아 두었는데, 밑이 차갑지 않겠느냐."


옥음은 한참 만이었다. 왕의 묘한 망설임이 반갑게 느껴진 인규의 입가로 자꾸 웃음이 번졌다.


"꽤 두툼해 보였나이다. 하오나 전하, 근심이 크시오면 길을 돌리시겠나이까."


인규의 말에 앞서던 병사들과 뒤 따르던 병사들 모두 말을 세우는 것이 느껴졌다. 잔뜩 기대하는 표정을 짓는 병사들의 시선이 해단의 입술만 쳐다보았다.


"전하. 길을 돌리시겠나이까."


인규의 말머리는 반쯤 돌아가 있었다. 해단은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해 입술을 깨물었다. 한 번 더 봐 두는 것으로 그치지 못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욕심이 생겨 가질지도 어쩌면 아끼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말고삐를 잡은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해단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뒤를 돌아보는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친 눈보라가 지나간 겨울 하늘은 구름한 점 없이 맑고 높았다. 대목 사이로 쏟아져 내릴 듯 푸른 하늘로 검은 새 한 마리가 훠이 지나갔다. 검은 새를 날려주던 여인은 그때 울고 있었다. 원치 않는 기억이 떠오른 순간, 깊게 남은 가슴의 흉터로 찌릿한 작열감이 느껴졌다. 그랬다. 그는 왕이고 더는 아끼는 것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너무 오래 간만에 느낀 자유에, 의도 하지 않은 만남에, 궁을 벗어난 낯선 곳에서의 밤에, 분칠하지 않은 생기 있는 얼굴에 마음이 동한 것 뿐, 연도 그도 온 것이 다른 것처럼 돌아 갈 곳도 따로 있었다.


"전하."


쉽게 답을 주지 않는 옥음을 인규가 재촉했다. 해단은 검은 새의 뒤를 쫓던 시선을 거두며 인규를 돌아보았다.


"이만 가자."


"전하. 가시는 여정 때문이시라면 신이 따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대가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다. 되었으니 가자."


잔뜩 기대하는 듯 반짝이던 병사들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해단은 본디 그러했던 것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병사들은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인규는 앞서 움직이는 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아주 잠깐 본 왕의 모습이 지나치게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인규야."


산길을 빠져나와 너른 들판에 이르렀을 즈음이었다.


"예. 전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규의 목소리가 맑아졌다.


"....멀리서..."


"하명하소서."


"그냥 멀리 두고.. 깨어나 무사히 말에 오르는 것 까지 확인 하거라."


인규는 서둘러 답하며 말고삐를 휘어잡아 돌렸다.


"다만.!"


달려 나가려는 찰라 옥음은 인규를 막아섰다.


"다만, 그것까지다. 그 이상 뒤를 따르지는 말라."


 


 


 


 


 


********************************************


 


 


 


어디선가 들리는 새소리는 낯설었다. 익숙하지 않은 소리에 집중하며 연은 무거운 눈을 깜박였다. 쌓인 눈은 아침 햇살을 반사하며 포근하게 깔려있었고, 나무 틈을 오가는 바람소리는 가락처럼 부드러웠다. 마치 긴 꿈을 꾸다 깬 것처럼 모든 기억이 희미했다. 연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간신히 잡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눈보라는 사라지고 환한 눈꽃은 가지마다 얼어붙어 청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해단!


연은 벌떡 일어나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깔린 무포위에 누워있던 것은 자신 뿐, 다른 어떤 이도 보이지 않았다. 연은 다시 고개를 돌려 바위틈과 산등성이를 살펴보았다.


"이봐요!"


연은 나뭇가지를 헤치며 주변을 돌아다녔지만 고요한 산은 연의 목소리만 다시 되돌려 줄 뿐이었다. 꿈이라 생각하기엔 너무 생생한 기억이었다. 아니, 꿈일 리 없었다. 사내가 지난 밤 덮어준 허연 털이 어깨를 포근히 감싸고 있는데, 절대 꿈일 리는 없었다.


"이봐요! 거기 있어요?"


연은 소리 내며 해단을 찾았다. 머리도 다쳤을 뿐 아니라, 이곳 지리도 잘 모르는 사내였다. 홀로 산을 다닐 상태가 아니기에 걱정이 커졌다. 연은 무포를 대충 걸치고 다시 숲을 훑으며 달려 나갔다. 이대로 사라진 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한 번 더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마음은 산을 뛰어 내려가면서 꼭 봐야 한다는 마음으로 바뀌어갔다.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슴에 사무치면서 연의 발걸음은 더욱 가빠졌다. 눈을 밟고, 꽁꽁 언 계곡 물을 건너고, 물기 먹은 흙으로 어지러운 돌 틈을 지나는 동안 젖고 얼룩이 된 치맛자락과 비단 신으로 찬 기운은 점점 퍼져왔다. 그러나 연의 급한 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
한참 만에 깊은 골짜기를 지나 넓은 산길에 접어들었을 때, 연의 눈에 잘 매어진 말 한 필이 보였다. 굵은 나무 허리에 단단히 묶인 말은 분명 시야였다. 지난 밤, 사내의 말과 함께 그냥 풀어 두었던 시야를 이곳에 매어두고 간 사람이 누구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부풀었던 연의 마음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연은 그대로 멈춰서 허리를 숙이며 거친 숨을 가다듬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곳을 지나쳐 산을 내려갔을 사내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를 보았니?"


연은 시야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마치 말을 알아들은 듯 얼굴을 부비는 시야를 끌어안으며 연은 괜스레 말 갈퀴만 쓰다듬었다. 마음 깊은 곳에 구멍이라도 난 듯 쓰린 겨울바람이 휭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는 못 볼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사내의 품이 너무 따뜻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흐르는 눈물을 말없이 위로받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왜 이렇게 가슴이 서늘한지 적당한 이유를 찾아보려 애쓰면 애쓸수록 아쉬움이 커져갔다. 연은 한참 만에 고개를 들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누구랑 인사를 한단 말이냐!"


급작스러운 목소리에 연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싸늘하게 쏘아 보는 태유소의 눈빛에 연의 등 뒤로 소름이 타고 올랐다.


"대감마님."


연은 저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느 사이에 다가온 한 무리의 병사들과 노복들은 연을 둘러싸고 섰다. 그들의 손에 들린 번뜩이는 횃불과 흠뻑 젖어 더러워진 옷가지가 밤새워 연을 찾았다는 것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밤새 무엇을 하였느냐!! 대체 그 꼴은..!!"


연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태유소가 멈칫했다.


"사내가 있었더냐!"


태유소는 연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발칙한 것! 나를 업수이 여겨도 분수가 있지!! 이렇게 남몰래 정을 통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 사내와 도망이라도 가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냐!"


연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밤, 낙마한 사내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대로 둘 수 없어 도와준 것 뿐. 대감마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태우소는 차갑게 다가와 연의 어깨에 두른 피갑을 낚아챘다. 앞 끈은 툭 떨어지며 땅으로 떨어졌다.


"우연히 낙마한 사내?? 그 자가 이런 걸 주었단 말이지??"


차갑게 웃는 태유소였다.


"예. 그렇습니다."


"이게 무엇인 줄 아느냐? 무엇으로 만든 것인 줄 아느냐?!"


"범의 털로 만들었다고.."


연의 대답에 피갑을 쥐고 있던 태유소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범으로 만든 피갑, 그것도 백호로 만든 피갑은 값을 따질 수 없을 만큼 비싼 물건이었다. 게다가 피갑의 뒷바느질은 한눈에 보아도 예사로운 솜씨가 아니었다. 절대 우연히 만난 여인에게 줄 물건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사내는 어디 있지? 낙마한 그 자 말이다! 네가 우연히 만났다던 그 사내가 어찌 보이질 않느냐!"


"아침에 일어나보니 사라졌습니다."


연의 눈가가 알 수 없게 뜨거워졌다.


"낙마 한 사내를 도왔는데, 그 자가 이런 귀한 물건을 너에게 주고 아침엔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 지껄이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지난밤엔 그의 상태가 위중하여 그대로 둘 수 없었기에 도왔으나, 아침에 깨어보니"


연의 뒷말은 이어지질 못했다. 연의 뺨으로 날아든 태유소의 손바닥은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계속되었다.


"감히!! 궁으로 갈 계집이!! 사내와 밤을 보내!!?? 일을 아주 망치려 작정을 한 게지! 내 등에 칼을 꽂으려 한 게지!! 작정을 하지 않고선 이렇게 발칙한 짓을 할 수가 없지!!"


바람을 가르며 날라드는 매질에 오래 버티지 못한 연은 밀려 흙바닥으로 쓰러졌다. 태유소는 씩씩거리며 쓰러진 연을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빨개진 양 볼엔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있었다. 울며불며 빌지는 못할망정 그를 쳐다보는 연의 눈매는 건조하기만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버티고 선 얼굴을 쏘아보던 태유소의 입가로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아직도 잘못한 것이 없다??"


"그렇습니다."


"이대로 사라질 셈이었더냐!??"


"아닙니다."


가까스로 버티고 선 듯 휘청거리는 연은 또박또박 대답했다.


"이건..사내의 정표가 아니다?"


태유소는 연의 눈앞에 피갑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


태유소는 느리게 중얼거리며 곁에 선 노복의 손에 들린 횃불을 거칠게 빼앗았다. 그리곤 연이 뭐라 할 세도 없이 피갑을 태우기 시작했다. 뿌연 연기를 내며 타들어가는 피갑을 멍하니 보던 연은 태유소에게 매달렸다.


"이리 주십시오! 그러지 마십시오!!"


연의 애원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결국 연은 횃불로 달려들어 타던 피갑을 손으로 집었다. 손끝을 태우는 열기를 헤치고 가까스로 손에 쥔 것은 손바닥보다도 작은 가죽 조각뿐이었다. 불에 한껏 그슬려 하얀 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타들어간 검은 가죽위로 연의 눈물이 떨어졌다. 불 속에 헤집던 연의 손등에 생긴 빨간 흉터를 쏘아보던 태유소가 근처에 쌓인 눈을 집어 들고 다가갔다. 넋을 잃은 듯 멍하니 있는 연의 손목을 낚아채 손등에 눈을 비비자 연이 입에서 비병이 터져 나왔다. 태유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흉이 오래 가겠느냐?!"


둘러싸고 있던 노복하나가 빠르게 다가와 태유소를 대신해 연의 손등을 움켜쥐었다. 노복은 이리저리 살피며 멍울진 붉은 상처를 눌러보았다.


"상처가 깊진 않습니다. 흐릿하게 흉은 남겠지만 아주 심히 표 나진 않을 듯합니다."


노복의 답에 태유소의 숨이 거칠어 졌다.


"감히 상처를 내? 왕의 여인이 되어야 할 계집이 감히!!! 당장 숲을 뒤져 그 사내를 찾아 내거라. 당장!!"


순간 연의 얼굴로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함이 떠올랐다.


"그럴 사이가 아닙니다. 진정 우연히 만났던 사내입니다. 아무 일도 없었으니 그 분을 그냥 가게 두십시오."


연의 말이 길어질수록 태유소의 얼굴로 잔인한 미소가 번졌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 같기도 하고, 이 모든 일이 즐겁기만 하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매달린 연은 태유소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연은 그저 애원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 번 본 사내이지만, 하룻밤, 잠깐 스쳐갔던 사내이지만 자신으로 인해 괜히 화를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태유소는 화를 내는 대신 그의 발치에 매달린 연의 어깨를 잡아 젖혔다.


"사내와 밤을 보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그 말이로구나?"


소름끼칠 만큼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그렇습니다."


연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정을 통한 사내가 아니라, 우연히! 아주 우연히! 낙마한 자를 만나 도와준 것뿐이다? 그리고 그자가 고마움에 피갑을 주고 갔다?"


"그렇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 확인해 보면 알겠지."


태유소는 주변을 둘러보다 노복들 중 하나를 골라 불렀다. 머리가 하얗게 샌 여종은 머뭇거림 없이 다가왔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는 듯 여종은 소매 춤을 가볍게 걷어 올렸다. 앙상한 노파의 손은 썩은 고목처럼 검붉었다.


"저 계집을 단단히 잡거라."


태유소의 명에 둘러싸고 있던 노복 몇이 거칠게 연의 어깨를 잡았다. 앞으로의 일을 짐작하지 못한 연은 멍하니 노파와 태유소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샅샅이 살펴 보거라. 네 년의 목숨 뿐 아니라, 내 목숨도 달린 일이니!! 터럭의 거짓이라도 있으면 너를 죽일 것이다.!"


태유소의 살기에 노파는 굽실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무슨..."


뜻을 알지 못한 연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 다가온 여종은 연의 치맛자락을 단번에 걷었다.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지만 어깨를 잡은 거친 손들은 연을 찍어 누르며 놓아주질 않았다. 드러난 무릎을 모아보려 애써보았지만 노복들의 힘은 더 강해지기만 했다. 연의 두 다리는 고스란히 겨울바람 아래 드러났다. 모멸감과 수치심으로 연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제발 믿어 주십시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눈가로 눈물이 맺혀 떨어졌다.


"제발..이러지 마십시오."


흐느끼며 빌어보았지만 연을 바라보는 태유소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어느 사이에 허옇게 드러난 무릎사이를 훑던 노파의 손은 허벅지를 타고 올라왔다. 연은 최대한 몸을 비틀며 저항했지만 장정 몇의 힘을 당할 수는 없었다. 노복들 중 몇은 고개를 돌리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좋은 구경이라도 하는 냥 힐끔거렸다. 몸 어느 하나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잡힌 연의 속치마와 속곳이 힘없이 풀려 땅으로 떨어졌다. 나무등껍질처럼 거친 노파의 손끝은 밑바대마저 젖히고 들어왔다. 고개를 저으며 소리를 질렀지만 태유소도, 노파도 멈출 리 없었다. 지나치게 뻑뻑한 연의 다리 사이를 헤집은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고통은 온 몸을 휘감았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아니 차라리 죽어버렸으면...앙다문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흐느낌은 고요한 겨울 숲을 처연하게 울렸다.


"처녀가 맞습니다."


노파는 연의 치마를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확실한 것이냐?"


"예. 더 깊이 넣어 확인 하는 방법도 있으나, 그리 되면 초혈이 나오게 되니.."


"정말 확실 한 것이냐?"


"예. 사내의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 그럼 이쯤 하고 내려가자."


태유소는 노파의 말에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에 올랐다. 그제서 노복들은 연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연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혼절 하였습니다."


연의 어깨를 흔들던 노복의 말에 태유소는 쓰러진 연을 훑어보았다. 혼절한 연의 입술 사이로 흐르는 진한 혈흔이 눈에 보였다. 태유소의 시선이 머문 곳을 확인한 노복이 서둘러 답하였다.


"이를 악물었던 모양입니다."


"독한 계집.! 데려가 잘 보살펴라. 시일이 촉박하니 서둘러야 할 것이다. 정히 말을 안 듣거든 다시 내게 데려 오너라. 제 어미를 생각하여 다른 일을 벌이진 못할 터. 가자!"


앞서 출발한 태유소의 뒤로 노복들이 빠르게 따라 달렸다. 그들 중 하나에 안겨 말에 오른 연의 어깨가 가을 낙엽처럼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댓글 '5'

^^

2009.11.18 01:33:39

인규가 다 봤겠죠??? 앞으로 어떻게 될지ㅠㅠㅠ 연이 너무 불쌍해요ㅠㅠ

마가렛

2009.11.18 05:17:20

앞편들은 다른 곳에서 봤는데 5편은 여기서 보게됐네요^^;;
어찌 노복들이 다 보는앞에서 애비란 자가 저러는지..기가 막히군요.
정말 앞으로의 전개가 너무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자주 오셔서 기쁩니다..힘내시옵소서!!!

위니

2009.11.18 06:13:45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네요...ㅡㅜ..
담편도 기다리고 있겟습니다..얼른 오셔여..기대됩니다..^^

진하

2009.11.19 16:11:07

정말 나쁜 소!!!
저도 담편 기다릴께요.^^

2010.01.14 02:14:21

저러고도 아버지라니요. 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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