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unk paradise
- 소설
- 연재소설
<4>
紅纋葉輝艶陽 붉은 머리끈은 고운 볕에 반짝이고..
산지가 많은 서국과 달리 드넓은 평야는 눈앞에 끝없이 펼쳐졌다. 전장에 앞서, 잠행하여 미리 살펴본 적이 있는 곳이지만, 전장이 끝난 한가로운 부서부 대지의 모습은 낯설기만 했다. 미와산 자락 아래까지 넓게 쌓인 눈은 사방을 하얀 솜털로 보이게 했다. 가끔 눈밭을 헤매며 곡식낱알을 찾던 새가 말발굽 소리에 푸드득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것을 제외하고 온통 하얗게 점칠 된 고요한 세상이었다. 호흡하는 순간 온 몸으로 찬바람이 싸고돌아 뜨거운 머리를 잠재워주었다. 해단은 말의 허리를 힘껏 걷어차며 달려 나갔다. 거세게 부딪히는 매서운 바람도 잠시, 속도감이 붙어 올수록 그의 입에선 더운 김이 쏟아졌다. 별사 틈에 은밀히 온 것이라 인규와 무호사의 병사들 외엔 왕의 걸음을 알지 못하였다. 물론 알고 있는 자가 있다 해도 얼굴을 모르니 크게 걱정할 일도 없었다. 부서부까지 오는 동안에 살핀 백성의 삶은 꽤 만족스러웠다. 긴 전장을 끝낸 그들의 얼굴은 안정되고, 사상자도 별로 없이 쉽게 승리한 전쟁이었으니 전사한 사내 뒤에 홀로 남겨진 여인도 그리 많지 않았다. 몇 안 되는 그들도 당장은 슬픔에 젖에 있겠지만 그들에게 내린 땅과 곡식이면 곧 안정을 되찾을 터였다.
옥좌에 오른 지 꼭 십년 만에 이룬 정복이었다. 주변국들 중 가장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강경한 군사력을 뽐내던 경국까지 함락하였으니, 더는 피 냄새나는 전장을 헤매지 않아도 될듯하였다. 설사 소요세력이 힘을 합친다 한들 상징적인 구심점이 될 왕족은 뿌리까지 뽑아 제거했기에 흩어진 구름처럼 바람이 불면 절로 사그라질 것이 분명했다. 해단은 흐릿한 웃음을 지으며 광활한 대지를 둘러보았다. 부서부까지의 잠행은 이미 충분히 만족스러운 성과를 재차 확인한 셈이었다. 항상 문제는 더할 나위 없이 풍족한 백성이 아니라 이미 썩을 데로 썩어 구린내를 풍기는 관료들이니, 잠행의 목적도 백성이 아닌 그들에게 있어야 했다.
"책만 끼고 사니."
서책에서 튀어나온 원칙만을 읊어대는 딱딱한 인규를 생각하며 해단은 비틀리게 중얼거렸다. 검술 연습을 벗 삼고 서책을 정인삼아 지내는 사내이니 그의 세상은 언제나 따뜻하고 좋을 법도 했다. 그런 점이 재미있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한 해단이지만 긴 생각 끝엔 결국 턱을 끌어당기며 못이기는 척 수긍했다. 뱀 같은 혀로 지껄이는 달콤한 술수를 하루 종일 들어야 하는 군왕에게 그런 곧은 친구도 하나쯤은 필요했다. 단지 그 때문에 곁에 두는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고 스스로의 마음을 정리했다.
"너무 멀리 가시는 듯 합니다."
긴 생각은 갑작스런 목소리에 끊겨나갔다. 어느 사이에 따라온 인규는 숨이 가빴다. 해단은 슬쩍 돌아보았다.
"따라 오지 말라는 명을 듣지 못하였느냐?"
"들었습니다."
"그럼 그만 돌아가거라. 말을 달리는 즐거움을 온전히 홀로 느껴 보고 싶다. 그대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어릴 적, 그때처럼 말이다!"
해단은 세찬 기합소리를 내며 멀리 달려 나갔다. 인규의 여린 마음을 건드려 놓았으니 뒤따르는 그의 숨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으리라 짐작은 하였지만, 한참 후 돌아보니 역시 그러했다. 깊은 마음까지 다 읽히는 그의 우직함에 흐린 웃음이 입가에 지어졌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수행 없이 달리니 어깨를 감싼 피갑마저 무게를 느낄 수 없을 만큼 가벼워지는 듯 느껴졌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희끗하게 날리는 눈발에 옷가지가 젖어 들어도 홀로 달린다는 것은 좋기만 하였다. 한참 만에 숨을 고르니 멀리 보이던 미와산 자락은 이제 손에 잡힐 듯 가까워져 있었다.
미와산 자락 끝으로 흐릿하게 태유소의 제관이 보였다. 꽤 화려한 색상으로 칠한 너와 사이로 솟은 굴뚝으로 짙은 연기가 쉴 줄 모르고 뿜어지고 있었다. 저 곳, 깊은 내실 안, 침상에 앉아서도 세상을 훤히 내다보고 살길을 찾은 태유소의 날카로운 혜안이 있을 터, 드디어 만나게 될 태유소를 생각하던 해단의 눈매가 짙어졌다. 오래 간만에 오래 두고 밟아 볼 가치가 있는 사내를 만나게 되는 것이었다.
지략과 술수에 둘 다 능한 자!
만고의 뛰어난 책사는 될 수 있어도, 충신은 될 수 없는 자!
뱀이라면 독사이고, 꽃이라면 독화이고, 계집이라면...그 계집 같겠지.
오랜 기억 속에 봉인해둔 환한 웃음과 쓰던 눈물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가슴으로 자욱한 통증이 밀려왔다.
'어리석게도 아직도 버리질 못했구나.'
찌꺼기가 남아 있음에 씁쓸해진 해단은 애써 고개를 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저무는 검붉은 하늘 노녘으로 어둑한 구름이 잔뜩 몰려와 어지러웠다. 뺨에 미근하게 닿던 눈발은 어느 사이에 거칠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진즉 날을 살펴보았어야 하는데, 오랜만에 느끼는 온전한 자유로움에 심취해 멀어진 노정이었다. 천기와 거리를 따져보니 해지기전까지 돌아가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이대로 미와산으로 말을 몰아 잠시 시간을 둬야할 지, 다시 말을 달려 돌아가야 할지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쉽게 갤 것 같지 않은 날에 익숙하지 않은 곳을 달려 산으로 가는 것은 제아무리 전장을 누볐던 우흑이라도 무리였다.
돌아가리라 마음을 잡은 해단은 말허리를 크게 차며 고삐를 당겼다. 달리는 속도를 줄이지 못한 우흑은 크게 앞발을 들며 방향을 잡았다. 순간 해단의 손이 고삐에서 미끄러졌다. 고삐 끈을 놓친 그의 몸이 중심을 잃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졌다. 얼음장처럼 차고 단단한 바닥에 몸이 부딪히는 찰라 그의 머리로 날카로운 고통이 스쳐갔다. 입술 사이로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해단은 숨을 몰아쉬며 손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비틀린 허리는 극심하게 끊어질 듯 했다. 몇 차례나 이를 악물고 간신히 손을 들어 머리를 만져보니 끈적끈적하게 흐르는 피가 느껴졌다. 곁을 서성이며 어쩔 줄 모르는 우흑을 쳐다보며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의 몸은 생각을 따라 주지 않았다. 절대로 눈을 감으면 안 된다고 다짐했지만 어느덧 눈은 무겁게 감겨왔다. 점점 흐릿해 지는 감각을 바로 잡아보려 해단은 차갑게 얼어붙은 눈을 손끝으로 모아 쥐었다. 손가락이 베어지는 듯 아린 느낌도 잠시 힘이 빠진 손끝으로 뭉쳤던 눈은 스르륵 흩어졌다.
"아."
순간 인기척이 느껴졌다. 점점 가까워진 숨결은 어느 덧 바로 앞에 있었다. 낯선 숨결을 경계하려 했지만 그는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자객일 지도 모른다고, 습격 당할 지도 모른다고, 검을 쥐고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더는 눈조차 깜박일 수 없었다.
이내 완전한 어둠이었다.
"이봐요! 이봐요!"
연은 말에서 내려 달려왔다. 낙마한 사내의 어깨를 흔들어 보았지만 사내는 혼절한 듯 쓰러져있었다. 머리카락 틈으로 혈흔이 흘러나와 하얀 눈 위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유난히 검은 사내의 머리를 헤쳐 보니 꽤 길게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도와줄 사람을 찾아보려 주변을 살폈지만 점점 거세지는 눈발은 시야조차 확보할 수 없게 만들었다. 불안한 듯 말울음을 길게 우는 단단한 군마는 사내의 신분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사내는 군인인 모양이었다.
"시야. 이거 참 곤란하게 되었어."
연은 애마의 갈퀴를 쓰다듬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맑은 날도 한시진이나 걸리는 거리를 되돌아가 도움을 청한다면 사내는 추위에 동사할 테고, 이대로 사내를 말에 올려 돌아가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말 등에서 몸이 흔들릴 때마다 상처가 벌어져 출혈이 심해질 것이 분명했다. 연은 사내를 응시하다 결국 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잃은 사내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사내는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잠든 듯 누워있었다. 연은 소매 끝으로 이마에 흐른 혈흔을 닦아주며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짙은 머리카락 아래로 눈발이 내려앉은 긴 속눈썹과 오똑한 콧날, 고집스럽게 앙다문 입술을 보고 있자니 알 수 없게 가슴이 쿵쿵거리며 얼굴이 뜨거워졌다.
"시야. 이렇게 생긴 사람은 처음 봤어. 정말이지..."
듣는 사람도 없지만 괜히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뒷말을 감춘 연은 입고 있던 두툼한 무포를 벗어 사내의 몸을 덮어주며 긴 머리를 땋아 묶은 붉은 무명 끈을 풀었다. 젖은 머리카락은 눈보라를 따라 이리저리 흩날리며 춤을 추었다. 뺨에 사정없이 달라붙는 머리를 어쩔 수 없이 내버려두고, 연은 사내의 머리를 무릎에 올려놓고 피가 흐르는 부분을 머리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어둑한 눈발 아래가 아니라면 더 오래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더 있다가는 사내 뿐 아니라 연 스스로도 위험했다. 얇은 소의 틈으로 찬바람은 사정없이 파고들어 붉은 빛을 잃고 파랗게 변해가는 입술마저도 제멋대로 떨려왔다. 연은 체온을 잃지 않기 위해 양팔을 비비며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어둑하던 하늘은 점점 더 뿌옇게 변해가고 있었다. 결심을 굳힌 연은 이를 악물며 사내의 무거운 어깨를 들었다. 축 늘어져 아래로 떨어지기만 하는 몸을 일이키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다행이 군마는 주인이 다쳤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얌전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가까스로 사내의 상체를 안장 위로 걸쳐 올린 연의 이마로 땀방울이 맺혔다. 시야에 올라 군마의 고삐까지 끌어 잡고 연은 말을 달렸다. 산중턱 바위 틈 이라면 잠시 시간을 벌 수 있을 터였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세차게 불어오는 눈보라를 헤치고 가는 길은 더디었다. 얼마 가지도 못했는데 벌써 사방은 까맣게 어둑해지려 했다. 점점 굳어지는 손끝을 불어가며 연은 말허리를 더 세게 찼다.
산길로 접어들자 수백 년이 넘게 자란 대목들이 길을 어지럽혔다. 자주 왔던 익숙한 길이지만 두필의 말을 끌고 눈보라로 흩어진 나뭇가지 틈으로 방향을 잡아 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인적 없는 산길은 연의 숨소리와 거친 말의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춤추는 겨울나무 틈으로 큰 바위를 찾아낸 연은 기침을 하며 말에서 내렸다. 추위에 얼어붙은 손끝엔 감각마저 없었다. 손을 비벼 불며 큰 바위 위에 사내를 덮었던 무포를 벗겨 깔고 사내의 허리를 잡아 끌었다.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진 사내는 죽은 나무처럼 무겁고 딱딱했다. 젖은 발을 추스르며 연은 바위틈으로 사내를 끌어 당겼다. 온힘을 다해 간신히 두 발 쯤 옮기고 나자 비스듬히 누운 바위는 병풍처럼 눈보라를 막아주었다. 마지막 햇빛이 대목사이로 사라져 가는 것을 느끼며 연은 사내 곁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갑자기 녹은 손끝으로 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연은 긴 숨을 내쉬며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일단 눈보라를 피하고 나니 미뤄뒀던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씨에 말을 타고 나가 돌아오지 않았으니 지금쯤 난리가 났을 터였다. 세화뿐 아니라 몸이 단 태유소는 거친 날씨에도 사람을 풀어 찾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그렇게 할 것이 분명했다. 서국으로 가야하는 날이 삼일도 채 남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태유소의 당황한 얼굴을 생각하니, 어머니에겐 미안하지만 묘하게 통쾌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지나치게 어리석은 마음이라 애써 부인하면서도 입가론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젖은 옷가지 때문에 오한이 심해지는 몸을 비벼보며 연은 어둠으로 가득한 하늘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일단 얼마간의 추위는 피할 수 있겠지만, 이대로 있다간 사내도, 자신도 위험할 것 같았다. 의원을 불러 머리를 살펴봐야하고, 자꾸만 떨어지는 체온도 유지하기 위해선 뭔가 다른 방도를 찾아야했다. 복잡한 생각은 오래 머물지 못했다.
"아.!"
깊은 고통의 신음 소리였다. 연은 재빨리 돌아보았다. 사내는 뒷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키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냥 계시는 것이 좋을듯합니다."
연은 손을 들어 사내의 이마를 짚었다. 불덩이를 태우는 듯 뜨거웠다. 꽤 오랜 시간 말위에서 흔들리며 피를 흘렸을 텐데, 차갑게 식지 않은 것을 보니 생각만큼 크게 다치진 않았던 듯하였다.
"온기가 있는 남은 것을 보니 상처가 그리 깊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지금은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눈발이 흐려질 때가지 좀 누워 계시지요."
미간을 찌푸리던 사내는 눈을 깜박이며 연을 올려다보았다. 사내의 짙은 눈동자는 연을 경계하는 듯 번뜩이고 있었다. 그리곤 떨리는 손을 애써 움직여 이마를 짚고 살피던 연의 손을 떼어 내었다. 사내의 손끝은 살의가 느껴질 만큼 지나치게 차고, 딱딱했다. 연은 놀란 눈으로 자신의 손과 사내의 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손끝조차 움직이기 힘든 상황에서 굳이 거칠게 연의 손을 치우는 것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몸서리쳐질 만큼 싫다는 표정으로 연을 쏘아보는 시선에선 솜털만큼의 고마움도 없었다.
"누구냐."
마치 타박을 하는 듯 불편한 음성이었다. 아니, 타박의 정도가 아니었다. 말로 누군가를 찌를 수 있다면 심장 깊은 곳을 곧장 누를 수 있을 만큼 쓴 말이었다.
"쓰러져 혼절한 당신을 살렸는데, 적의로 대하시면서 제 이름은 알아서 무엇하시겠습니까."
연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사내는 대답대신 한참동안 연을 쏘아보더니 어깨를 들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상당한 통증을 참지 못해 이를 악물며 신음하는 모양이 딱해보였지만 연은 도와주지 않았다.
"시각이 얼마나 지났지?"
"모릅니다."
"여기가 어디지?"
연은 사내를 쳐다만 보았다.
"여기가 어디냐 묻질 않느냐."
다그친 음성은 바위틈을 울렸다.
"미와산"
"꽤 힘든 길이었을 텐데.?"
구겨진 얼굴은 날카로웠다.
"그러지 않아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후회?"
"죽든 말든 그냥 내버려둘걸. 괜히 데려왔다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푼들 무슨 소용이라고."
싸늘한 연의 대답에도 사내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주변을 한번 살펴보며 안심한다는 듯 어깨에 두른 허연 털로 된 피갑을 벗어 털었다. 주변으로 젖은 물방울이 사정없이 튀었다. 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피갑이 사라진 넓은 어깨에는 화려한 용무늬가 수놓아진 황금색 띠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연은 처음으로 보는 문양을 물끄러미 보다 사내를 쳐다보았다. 연의 시선을 느낀 사내의 손끝은 허리춤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멍하니 사내가 무엇을 하는 지 지켜보던 연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질렸다.
"절 베려 하십니까?"
황당하고 기가차서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비명 같은 말투에 사내는 그제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습관적인 손은 마음을 앞서 나간 모양이었다. 바람이 불듯 날래게 쥘 때와 달리 어색하게 내려놓는 손끝은 민망했다.
"죽이려던 것은 아니다."
"처음 보는 모양이라 한번 본 것 뿐. 훔칠 마음도. 탐나는 마음도 없으니 안심하시지요. 그럴 만큼 대단하게 보이는 옷도 아니고."
연은 비릿하게 말을 꼬며 턱 끝으로 사내의 옷을 가리켰다.
"그래? 그럴 만큼 대단한 옷이 아니라. 그렇지. 아무것도 모르니 말 한번 용감하게 하는구나. 아니, 몰라서 목숨 하나 건졌다고 해야 하나?"
해단은 뒷말을 비틀리게 하며 상대를 살폈다. 잔뜩 젖어 엉망이 된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양 볼은 하얗게 얼어붙어있었다. 가지런히 소담한 눈썹과 붉은 입술은 이리저리 찢긴 옷가지와 달리 지나치게 보기 좋았다. 열셋? 넷? 상대의 나이를 가늠하며 훑어보던 찰라 해단의 눈에 둥근 어깨가 보였다. 얇은 소의만 걸친 어깨는 강가의 물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눈에 젖어 달라붙은 옷가지 아래로 드러난 것은 그 뿐이 아니었다. 거의 풀린 고름 밑으로 맨 허연 천은 봉긋하게 솟아있었다. 생각만큼 어린 아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감히 어딜 빤히 보는 겁니까!"
더는 기가 찰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연은 사내의 뺨이라도 칠 듯 일어나 사내를 쏘아보았다. 여인의 뜨겁게 타는 눈동자를 보던 해단의 입술이 슬쩍 움직였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은 네가 처음이다. 괜한 생각 말고 추울 텐데, 이리 오너라. 나 역시도 너를 훔칠 마음도, 너를 탐내하는 마음도 없으니 안심하고. 그럴 만큼 대단한 몸도 아닌 듯 보이니."
사내는 연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분명 웃고 있었다.
살려줬더니 적개심 가득한 눈으로 쏘아보다, 죽이려 검도 들었다가, 알 수 없는 말만 지껄이더니, 이젠 희롱하며 웃기까지.! 아무래도 미친 사내임이 틀림없었다. 연은 한 발 물러서며 주변을 살폈다. 멀지 않은 곳에 서성이고 있는 두 필의 말이 보였다.
"다시 돌아갈 생각이라면 혼자 가거라. 눈은 밤새 내릴 듯한데...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지 싶다."
미친 사내는 연의 생각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연의 양 볼은 빨개졌다.
"그러지 않아도 혼자 갈 생각입니다.! 어디 한번 혼자서 잘 계셔 보시지요."
매몰차게 쏘아붙인 연은 그대로 돌아서다 사내에게 성큼 다가갔다. 사내는 묘하게 웃으며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사내의 손이 허리춤의 검집에서 멀어져 있는 것을 확인한 연은 사내 밑에 깔린 무포를 세게 당겼다. 사내도, 무포도 꿈적하지 않았다. 연은 다시 한 번 세차게 무포를 당겼다.
"그 힘으로 되겠느냐?"
비웃는 음성이었다.
"비켜주십시오. 제 옷이니 다시 가져갈 것입니다."
무포를 쥔 손끝은 바들바들 떨렸다.
"그래도 용타. 그 힘으로 나를 흑우 위로 올려 여기까지 끌고 왔으니.. 상으로 이걸 주마."
사내는 뭐라 대꾸도 하기 전, 갑자기 허연 털로 된 피갑을 연의 어깨에 휘둘러 당겼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연은 사내의 몸 위로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도대체!!"
서둘러 일어나려는 연의 허리로 강한 힘이 느껴졌다. 연은 멍하니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냥 곁에 있으라 했다. 체온을 유지해야 긴 밤을 살아낼 수 있을 테니."
마치 오랜 알고 지낸 친구에게 말을 하듯 편하게 중얼거리며 사내는 힘쓰는 연의 어깨를 감아 품으로 당겼다. 연의 얼굴은 그대로 사내의 넓은 가슴에 파묻혔다. 화를 내야 하는 지, 힘을 써 도망가야 하는 지, 그 둘이 아니라면 사내의 허리에서 검을 뽑아야 하는 지, 연은 마구 뒤엉키는 머리를 정리하려 애를 썼지만 호흡은 이상하게 가빠지기만 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어이없는 말이 허락 없이 튀어나왔다.
"네가 구한 사람이 아니냐."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당당한 어투였다. 연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들썩했다.
사내는 낮게 웃으며 연의 어깨를 잡던 힘을 조금 풀어주었다. 단단한 사내의 가슴으로 전해지던 온기가 사라지는 것이 어쩐지 묘하게 허전했다. 너무 춥기 때문이라고, 사내의 온기가 필요할 뿐이라고, 스스로의 마음을 결정지어주며 연은 느리게 몸을 틀었다. 사내와 나란하게 앉았지만 연의 머리는 사내의 어깨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거의 사내의 팔 아래 파묻힌 꼴이지만 얼었던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은 싫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괜히 숨을 크게 들이쉬니 두른 피갑에서는 푸른 들판의 향내가 퍼져왔다. 얼굴이 알 수 없게 달아올라 연은 고개를 숙이고 보드라운 피갑을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하얀 털은 엉킴 하나 없이 매끈했다. 따뜻함과 포근함에 발끝부터 노곤함이 싸하고 밀려왔다.
"범이다."
만지작거리던 연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예?"
"범이라고 했다."
"범..? 어디!!?? 어디에??"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며 놀라 두리번거리는 연의 어깨를 잡아당긴 해단은 큰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로 네 목 뒤에 있질 않느냐."
연은 서둘러 뒤를 보았지만 바위틈으로 보이는 건 까만 어둠뿐이었다.
"무슨 농을 그렇게 하십니까!"
해단의 웃음기 어린 얼굴을 쏘아보는 눈매는 제법 날카로웠다. 여인의 얼굴이란 그저 화첩의 꽃처럼 생기 없는 가식 웃음이나 짓고, 비 맞은 풀처럼 쓰러진 척 슬퍼하는 눈물만 보이는 줄 알았는데, 곁에 있는 여인에게선 살아있는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해단은 여인의 목에 둘러준 피갑을 가리켰다.
"지난겨울, 내가 사냥한 범이다."
여인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지난 가을 화원 뜰에 핀 산수유 열매처럼 탐스럽게 반짝이는 얼굴이었다. 해단은 가만히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또..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십니까."
짐짓 뒷걸음 질 하듯 물러서는 여인의 양 볼은 더욱 발그레 해졌다.
"무슨 짓 이라. 걱정 말아라. 보기 좋다하여 꺾어 가져가면 변하겠지. 그건 나도 별로 보고 싶지 않으니...예서 그렇게 환하게 웃으며 살아가는 것이 맞고...옳다."
사내의 눈동자로 씁쓸함이 퍼졌다. 연은 눈을 깜박이며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머리를 크게 다치셨습니까? 아님, 본디 그리 이상하십니까?"
"머리를 크게 다치긴 하였지."
"이곳엔 처음 오신 분 같으시니, 내일 날이 맑으면 의원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치료를 받으시면 곧 괜찮아 지실 겁니다."
연은 산을 휘감아 도는 모진 바람소리를 이기려는 듯 애써 밝게 소리쳤다. 날이 밝으면 눈보라가 거세도 길은 잡을 수 있을 터, 깊은 어둠만 물러가면 된다고 되뇌었다.
"고맙다."
가슴을 누르고 있던 연의 손끝에 잔뜩 힘이 실렸다. 이유 없이 싸하게 저리던 가슴은 점점 쿵쾅거리고 있었다.
"정말 참으로 알 수 없는 분이십니다."
가까스로 뱉은 한참만의 답이었다.
"그러하냐."
"뭐가 뭔지. 당신이 이곳에 사는 저와 같은 사람인지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순간 눈보라에 실려 뚝 떨어진 분처럼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것이 아니면 제가 긴 꿈을 꾸는 것처럼..."
"단..해단이라 한다."
십년 만에 꺼낸 이름은 스스로에게도 낯설었다. 얼굴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한데, 이름까지 알려주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일이라는 경고가 마음을 울렸지만 이미 이유 없는 믿음은 여인을 향해있었다.
그냥 이 여인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이름을 알려주어도, 얼굴을 보여주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굳이 두고 기억할 것도 없다마는, 아니다 그냥 스쳐 흘려보내어라."
연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굳이 이름을 가르쳐준 사내가 뒤이어 흔적을 지우는 것이 의아했기 때문이었다. 해단, 뜻은 모르지만 사내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서국에서 오셨습니까?"
먼 어둠을 응시하던 사내의 어깨가 급작스럽게 굳어졌다.
"나를 아느냐?"
단단하게 얼어붙은 강물처럼 속을 보여주지 않는 냉기가 느껴졌다. 연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 문양도, 성함도, 이곳 사람들이 즐겨하는 것이 아닌 지라. 이곳, 경국에서는 이름은 꼭 세 자로 맞춰 짓습니다. 세 귀가 맞아야 복이 온다고들 생각해서. 물론 이젠 서국에 속하게 되었으니 앞으론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요."
"네 이름은..."
묻고 싶은 마음과 묻지 말라는 마음이 뒷말을 집어 삼켰다.
"연입니다."
해단은 피식 웃었다.
"너도 서국에서 온 것이냐. 세 귀를 맞추지 않고, 이름이 한 자 뿐이니."
연은 무릎을 더 끌어당기며 얼굴을 파묻듯 저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연의 작은 등위로 흩어 퍼졌다. 칠 흙처럼 검은 머리는 허리까지 굽이쳐 흘렀다. 해단의 숨결 으로 흐릿한 꽃내가 섞여 들어왔다. 궁의 여인들의 향내와 다른 들판에 핀 들꽃 같이 그렇게 은은했다.
"아비에게 받은 앞의 두 자는.. 두 자는."
뒷말은 한참 동안 이어질 줄 몰랐다. 연의 어깨를 내려다보던 해단은 손끝으로 날리는 머리카락 몇 올을 정리해주었다. 상처도 있는 들꽃인 모양이었다.
"되었다. 말하기 싫은 것을 굳이 할 필요가 있겠느냐. 연이라. 너와 꼭 맞는 이름이다."
따뜻했다. 이상하게 사내의 음성은 따뜻했다.
"서국은 어떠합니까?"
눈 밑이 아려오는 것을 억누르려 연은 서둘렀다.
"좋은 곳이다. 강한 힘이 있고, 풍성한 곡식이 있고, 계절마다 색을 바꾸는 산과 굽이쳐 흐르는 맑은 물도 있지. 가보고 싶으냐?"
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혹여 가고 싶다면 데려가주마. 너를 데려가 주마."
준비하지 않은 말은 가슴을 앞서 튀어나왔다. 꺼낸 말로 인한 혼란스러움을 정리한 것은 해단이 아닌 연이었다.
"이대로는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가고 싶어도 지금은 갈 수가 없습니다."
가고 싶지 않아도 가야하는 곳.
이제 가면 오래도록 머물러야 할 곳.
머리로 그려보려 했지만 낯설어 흐릿하기만 한 곳.
연의 눈가로 결국 뜨거운 눈물이 타고 넘쳤다. 감추려 둘러 닦는 손을 사내가 감싸 쥐었다. 사내의 음성만큼이나 따뜻한 손길이었다.
"보이려 우는 울음을 참 싫다...하였는데, 몰래 감추며 우는 울음도 참 싫구나."
해단은 따뜻하지만 단단한 손을 펴 연의 양 볼을 감싸 쥐었다. 단이라는 사내가 한 말의 뜻을 생각하려 애써 보려 했지만, 사내의 까만 눈에 사로잡힌 시선은 자꾸 흔들릴 뿐이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날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연은 눈을 감아 버렸다.
"제가 마음이 이상하게 동하여. 아무래도 저도 머리가 어떻게..."
뒷말은 따뜻한 입술이 빼앗았다.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은 연의 말을, 머리를. 가슴을 온전히 품듯 뜨겁기만 했다. 가까워진 숨결은 지나치게 포근하고 편안했다. 어느 사이에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느껴지는 보드라운 사내의 온기에 연의 몸에선 힘이 빠졌다. 강하게 탐하지도, 정복하려 서두르지도 않는 입맞춤이었다.
한참 만에 입술을 뗀 해단은 거칠어진 숨결을 가다듬으며 가까스로 중얼거렸다.
"여기 까지만 이다. 더 나아가면 너를 꺾고 싶어 질 터, 눈보라 몰아치던 밤, 꿈결처럼 편안 했던 마음이라 기억하며 위안하고 싶다."
궁으로 데려가 품기엔 너무 탐스럽고, 반짝거렸다. 좋은 기억이 상처가 되는 것을 더는 원하지 않는다고, 곁에 두기엔 너무 많은 것을 보여줬다고, 그렇기 때문에 더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이유를 수없이 생각해내며 해단은 연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이마에 느리게 입을 맞추었다.
느리고 다정한 손길에 연의 어깨가 스르륵 풀려갔다. 지친 듯 얼어붙어 있던 연의 몸이 봄을 맞은 새싹처럼 부드럽게 품속으로 녹아드는 것을 느끼며 해단도 눈을 감았다. 욕정이 아닌 편한 마음으로 여인의 살갗을 만지며 잠자리에 드는 것도 꽤 괜찮은 기분이었다. 해단은 입가로 번지는 흐릿한 웃음을 느끼며 깊은 어둠으로 동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