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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休戀戀 休戀戀 그리워 말자. 그리워 말자...
홍비는 고개를 다소곳이 숙였다.
"비바람이 차가워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홍비의 붉은 입술을 내려다 본 해단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래? 기대치 않으면서 분가루 향내가 방을 채우도록 바르고, 입술엔 그리 붉은 것을 칠했단 말이냐? 그따위 연극은 너와 어울리지 않으니 그만 두고, 한바탕 놀아 보거라."
해단은 홍비가 앉아 있던 홍침사위로 비스듬히 몸을 뉘었다. 그제서 홍비의 눈빛이 환해졌다.
"폐하의 취향이 바뀌실까 근심되어 한번 해보았는데, 역시 신첩과는 어울리지 않았나봅니다. 그렇다면 신첩이 잘하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홍비는 걸치고 있던 간의의 매듭을 풀었다. 긴 손가락이 춤을 추듯 매듭을 벗기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홍비의 풍만한 가슴이 드러났다. 허리에 감은 과대 아래로는 속이 훤히 드러난 은사천이 늘어져있었다. 홍비가 걸음을 옮길 때 마다 풍만한 가슴은 이리저리 흔들렸고, 은사천 아래에 달아놓은 방울이 청명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뜨락을 적시는 빗소리와 어울려 가락처럼 귀에 감겼다. 홍비는 두 손을 머리위로 올리며 허리를 흔들어대며 웃었다. 해단은 손을 들어 홍비를 가까이 불렀다. 홍비는 더 요염하게 웃으며 허리를 낮추고 엎드렸다. 기어오는 홍비의 어깨 아래로 젖가슴이 요동쳤다. 어깨는 처마 밑을 흘러내리는 물방울처럼 느리게 올랐다 내렸고 그때마다 붉게 솟아오른 유두는 바닥에 닿을 듯 말듯 하였다. 홍비의 입에선 색정 가득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발치까지 기어온 홍비는 해단의 발에 감긴 버선을 천천히 벗기곤 발가락에 느리게 입을 맞추었다. 홍비의 입안으로 빨려들어 간 발가락 끝으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이것이 새로운 놀이더냐."
해단의 어깨의 근육이 느슨해졌다. 나른하게 풀린 음성에 홍비의 입가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마음에 드십니까? 이것 외에도 신첩이 준비한 것이 많으니 오래도록 즐기다 가시옵소서. 손내관에게 오늘은 초가 꺼져도 고하지 말라 해두시는 것이 어떠한지요?"
왕이 후궁들의 침소를 방문할 때면, 내관들은 한 뼘 남 짓 한 초를 들고 침소 밖을 지켰다. 옥체를 상하게 하지 않도록 한다는 궁중법도를 내세워 가져온 초가 다 타고 없어지면 내관은 옥체를 왕의 침소로 다시 모셔갔다. 그러나 해단이 후궁의 침소에 든 후, 초를 태우던 내관이 시각을 고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초가 다 타기도 전 해단은 열기로 가득한 후궁의 침소를 빠져 나왔고 여인과 함께 아침을 맡은 일은 더더욱 없었다. 뜨거운 정사를 치룬 후면 차갑게 돌아 나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욕심이 늘었구나."
옥음엔 찬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홍비는 머뭇거리지도 멈추지도 않고 입을 놀렸다. 발가락을 빨던 입술은 발등을 타고 해단의 무릎까지 올라왔다. 나름 거리는 혀가 해단의 아랫도리를 향해 오르면 오를수록 홍비의 얼굴은 붉어졌다.
"부서부에서 여인을 들인다는 풍문이 들었사온데, 미색은 어떠한지 알아보셨습니까? 경국의 계집은 미색이 뛰어나다고들 하질 않습니까."
용안을 가린 붉은 천 뒤로 해단의 표정을 봤다면 멈칫했을 텐데, 홍비에게는 안 보이는 것을 짐작해 미리 조심할 헤아림은 애초부터 없었다. 제멋대로 움직이던 입술은 결국 옥보를 물었다. 비파 줄을 고르는 듯 혀는 옥보를 더듬었다. 뜨겁게 솟오른 옥보와 달리 해단의 눈매는 차갑게 짙어졌다. 지나치게 즉흥적이고 단순하여 셈하지 않아 잠자리를 달구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어 가까이 즐겼던 홍비였다. 그런 홍비도 결국은 궁의 냄새를 맡고, 궁의 공기에 젖어 변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인간이란 다 그런 것이라던 인규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여 해단의 입가엔 자조적인 웃음이 번졌다.
"웃고 계십니까?"
홍비는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까지 해단의 아랫도리를 핥던 입술은 번들거렸다. 헐떡거리는 홍비의 숨소리는 침소 안에 낮게 퍼졌다.
"너에게도 귀가 있었다는 것을 잠시 잊었다."
홍비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해단은 손을 뻗어 틀어 올린 홍비의 검은 머리채를 살짝 잡아 내렸다. 해단의 손짓에 홍비의 얼굴은 달아오른 아랫도리에 밀착되었다. 홍비는 다시 붉은 입술을 바지런히 놀렸다. 뜨겁게 혀가 감길수록 해단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부드러운 머리채가 점점 빠르게 움직이자 짙은 분내와 향내가 독하게 뒤섞여 해단의 코끝에 감겼다. 홍비의 입술, 감기는 혀, 빨아 당기는 쾌락에 몸을 맡기려 애를 써봤지만 그의 가슴으로 진한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머리는 끝을 향해 달리는 몸과 달리 차갑게 식어만 갔다. 문득, 다가올 절정의 허탈함이 짜증스러웠다.
해단은 홍비의 머리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홍비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거의 다 하였습니다."
궁극을 보려는 찰라 그만두는 성심을 알지 못해 홍비의 목소리엔 당혹스러움이 담겼다.
"향초 물을 가져오너라."
침소 밖을 향한 옥음에 홍비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전하. 무엇이..부족하였습니까?"
홍비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 침소 문이 열렸다. 고개를 숙인 궁녀가 들고 온 청동대야엔 김이 나는 더운 향초물이 담겨있었다. 홍비는 향초 물을 가져온 궁녀를 쏘아보았다. 홍비의 시선을 눈치 챈 궁녀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궁녀는 먼발치에 향초 물을 내려놓고 가만히 엎드렸다.
"전하. 잠시 시간을 더 주시면 신첩이 흥을 돋우겠습니다."
끈질긴 홍비였다.
"네가 올해 몇 이냐?"
갑작스럽게 받은 물음에 어린 궁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어린 궁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어깨를 떨었다. 긴 침묵에 홍비의 입술이 비틀렸다.
"전하께서 묻지 않으셨느냐! 네 년이 경을 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홍비의 매서운 질책에 어린 궁녀는 황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열 둘 이옵니다."
"입궁한지 얼마나 되었느냐."
"두 해가 지났습니다."
울음에 가까운 답이었다.
"두 해 동안 이곳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느냐."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궁녀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홍비의 눈치를 살피었다. 홍비는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전하. 아직 어리고 미욱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계집입니다. 그만 물리시고 아직 긴 밤을 편히 쉬시는 것이 어떠하십니까?"
홍비는 달콤하게 속삭이며 손을 뻗었다. 허연 홍비의 손은 허벅지를 지저분거렸다. 해단은 홍비의 손을 거칠게 떼어냈다.
"그 물을 이리 가져오너라."
엎드린 궁녀는 기듯 다가왔다. 기교도 없이 뻣뻣하게 다가온 굳은 어깨를 보며 해단은 피식 웃었다.
"너는 계속 그리 자라거라."
더운 향초 물에 담근 천을 들어 아랫도리를 손수 훔친 해단은 허리끈을 고쳐 맸다.
"전하. 진정 이리 가시려 하십니까?"
원망마저 섞인 음성이었다.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고, 듣지 말라 하였는데, 네 담은 어느 덧 궁의 소리를 모아두고 있었구나. 저 어린 궁녀처럼 아무 것도 모른 때로 돌아 갈 수는 없을 테니, 살려면 보이는 것도 안 보이는 척, 들리는 것도 안 들리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차갑게 뱉은 말 뒤로 해단의 굳은 어깨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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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냐.!"
인규는 곁에 둔 검을 집어 들며 밖을 향해 외쳤다.
겨울비가 처마 밑에 찾아온 손의 어깨로 떨어져 낯선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늦은 밤 빗속을 헤치고 찾아온 손님은 대답대신 인규의 내실 문을 거칠게 열었다. 비에 젖은 나무는 습기에 불어 파열음을 냈다.
"하! 딱도 하다. 찬 겨울밤을 함께 보낼 계집하나 없는 꼴하고는...사내 구실이나 제대로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혀를 차며 들어선 사내를 보고 인규는 서둘러 일어섰다. 그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전하. 이 밤에 무슨 일 이십니까."
황망하여 큰 절한 인규가 비켜서자 해단은 어깨에서 물기를 털어내며 상석에 올랐다.
"못 올 데라도 온 것이더냐? 과인의 나라에 과인이 가지 못할 곳이 어디 있겠느냐. 하물며 관직을 박탈당한 자를 친히 찾아왔으니 그 은혜의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나 있을까. 황망하여 눈물이라도 흘려야 마땅한 것을 그리 뻣뻣하게만 서있으니 여러모로 참 답답한 사내로다."
한껏 비틀린 옥음이었다.
엎드렸던 인규의 얼굴에 그제서야 흐릿한 웃음이 배어나왔다.
붉은 천으로 용안을 가리지 않은 것에 놀랐던 마음은 언제나 꼬여있는 왕의 심통에 진정되었다. 수년을 따로 찾지 않으셔도 섭섭다 생각하지 않았고, 용안을 가린 채 그를 불러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며칠 전 어전을 들른 후 무거운 마음은 걱정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날카로운 왕의 칼이 궁에서 춤추고, 정치에서 춤추고, 전장에서 춤춰도 성심의 깊은 곳은 변하지 않았다고 믿던 확신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역시 마음은 그대로다. 말씀은 지독해도 깊은 성심은 오래전 그대로다. 그리 생각하기에 그리 웃고 있겠지? 성군과 폭군 사이의 애매했던 생각의 경계를 제 멋대로 성군으로 끌어다 놓고 있겠지?"
속내를 읽힌 인규는 당황했다.
"성군이 무엇이냐?"
짐작할 수 없는 왕의 마음이었다.
"성군은...백성을 평안케 하는 왕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성군이냐?"
해단은 수염은 느리게 쓸었다.
"그리 믿고 있습니다."
"그런 성군이니 과인의 뜻이 무조건 옳다고 봐야 하는 것이 아니냐. 어째서 내 정치를 근심하느냐."
"신이 근심하는 것은 전하의 정치가 아니라 전하의 차가운 마음이옵니다. 전하께서 쳐 내신 목숨은 전하를 향한 두려움이 되어 돌아오고 있습니다."
"하! 그렇다면 내가 쳐낸 인물들 중 중히 쓸 만 한 자가 있었느냐?"
"중히 쓸 만 한 자는 없었습니다. 다만, 기회를 주시어 고쳐 쓰시면 해를 끼치진 않았을 자 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대는 그 넓은 마음으로 기회를 줬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 그렇게 아량을 베풀어 믿어주는 것도 성군의 덕목이라고... 그대의 잣대로 보면 결국 과인은 성군이 아닌 폭군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따져 묻는 왕이었다.
인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하는 서국의 백성에게는 성군이시나, 전하 스스로에게는 폭군이십니다. 긴 전쟁을 승리로 이끄시어 백성의 배는 더 부르고, 따뜻하고 편안해 졌으나, 전하의 주변은 점점 더 싸늘한 냉기로 가득차고 있습니다."
"누가 그러더냐. 더 싸늘한 냉기로 가득차고 있다고. 과인의 궁엔 언제든 몸을 데워줄 여인에, 언제든 목숨을 내놓을 내관들에, 능히 부족함이 없다. 비마저 내려 차가운 겨울 밤 서책이나 끼고 앉아 있는 그대보단 내가 낫질 않느냐."
해단은 비웃었다.
"그렇지 않사옵니다. 겨울 밤 홀로 서책이나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파직당한 관료를 찾아오시어 뜻 모를 성심을 쏟으시는 전하보단 소인이 나은 듯 합니다."
"끝내 건방지구나."
해단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이미 파직당해 더 잃을 것은 목숨뿐이라 담대해졌습니다."
서둘러 물리는 답을 하는 인규를 쏘아보던 해단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황급히 따라 선 인규를 스쳐지나 나무문을 거칠게 열었다.
"가끔은 그대의 건방이 반갑다가도, 걱정스럽다. 그대가 알던 어린 왕....그때 그대로가 아니니, 체념을 배우거라. 계속 그리 하다가는 남은 목숨마저도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지나가며 하는 농도 아니고, 바람에 흘릴 말도 아니다. 때로는 그대가 성심을 알아채는 것이 두렵고 부끄럽다. 두렵고 부끄러운 것을 품고 가는 것이 군왕의 길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더는 그대로 인해 두려워지기 싫고, 그대로 인해 부끄러워지기 싫어지면 언제든 내칠 것이다. 그대와의 좋은 기억들로 그대를 오래도록 품고가기엔 세월이 많이 흘렀다."
겨울 빗속에 흩어진 옥음은 건조했다. 인규는 단단하게 굳어진 옥체를 향해 깊은 절을 올렸다.
"빗길 옥체 보존하시옵소서."
해단은 차가운 밤공기를 크게 들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딱딱한 어깨를 숙인 인규의 깊은 절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태유소의 여식을 들일 것이다. 부서부에 갈 것이니 준비하거라. 예로부터 경국의 여인들이 곱다고들 했으니 간 김에 그대도 평생 배필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지. 품어보니 긴 겨울 밤, 그깟 서책보다는 계집이 확실히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