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그 시작>



從古人生未千年 예로부터 사는 것은 천 년도 못되는 것을...



유난히 짙은 구름이 자욱한 밤, 백 여 년이 넘게 자란 대목이 감싸고 있는 대제관 지붕위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지나갔다. 경국의 최고 권력자였던 태유소의 대제관은 합왕의 즉위와 함께 한없이 허물어져갔다. 들짐승조차 범접하기 힘들던 높은 담은 세월의 흐름에 무너져 흔적이 없어졌고, 담 아래를 오가며 보초를 서던 사병들은 자취를 감추어 적막했다. 그런 대제관으로 들어간 그림자이니, 그자가 들고 남을 아는 이는 없었다.


그림자는 망설임이 없이 태유소가 머물고 있는 깊은 내실로 숨어들었다. 발걸음은 바람처럼 빠르고 깃털처럼 가벼웠다. 방안을 희미하게 밝힌 촛대 하나가 사그라질 무렵 그림자는 내실의 나무문을 소리 없이 열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태유소는 고개를 들고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결이 깊고 편안한 것을 보니 그림자의 걸음은 이미 알고 있었던 듯 했다.


"한시진이나 늦었구나."


태유소는 촛대에 긴 담뱃대를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청마하에 경비가 삼엄하여.."


그림자는 뒷말을 삼키며 옷고름을 풀러 품속에서 작게 접힌 서찰을 꺼내어 올렸다. 태유소는 담뱃대위로 서찰을 휘 펴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서찰에 희끗희끗한 글자가 뿌옇게 솟아올랐다. 담뱃대가 서찰 아래를 지나갈 때마다 글자는 솟았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서찰의 글귀를 모두 읽어 내리고 나서 태유소는 담뱃대를 눌러 끄며 서찰을 태웠다. 매캐한 냄새를 내며 서찰은 타들어 흔적 없이 사라졌다.


"직접 뵈었느냐."


태유소의 음성에선 조급함이 묻어났다.


"멀리서 뵙기는 하였으나 붉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셔서 용안은 살필 수 없었습니다."


"그럴 테지. 애써 얼굴을 가린 이유가 있을 텐데, 쉬이 드러내 보일 리가 없지. 허면 날은 정해주셨느냐."


"이번 달이 꽉 차오르면 청마하를 통해 들어오시겠노라 하셨습니다."


"어디 보자.."


태유소는 주름진 손가락을 꼽아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


"사나흘.. 길면 닷새라. 이제 우리도 슬슬 준비해야겠구나. 그쯤이면 청마하도 얼어붙어 서국의 군사들이 청마성을 공격하기가 한결 쉬울 테지."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 이름을 알렸던 경국을 버리고 적국의 침략을 도우면서도 태유소의 얼굴엔 고민의 빛이 없었다. 물론 듣고 있던 검은 그림자도 같았다.


"월두산에 있는 조윤에게 일러 기일에 맞춰 병사들을 움직이라 전하 거라. 청마성에서 시일이 지체되면 합의 목을 얻는 것이 힘들어질 터, 왕의 목을 베어 거는 것은 반드시 해내야 한다. 한때는 머리를 조아려 모신 왕의 머리를 성에 걸어 둬야 백성들도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받아들일 테니 말이다. 정치도 야망도 없이 궁녀들이나 품고 꽃놀이나 즐기는 왕일지라도 미욱한 백성들은 그 이름 하나에 벌벌 떨며 받들지 않더냐." "


태유소는 쓰게 중얼거렸다.


청마하를 두고 백 여 년 간 피를 보던 전쟁을 끝낸 선왕은 불혹도 채우지 못하고 덕화전에 주검으로 안치되었다. 그 것은 아홉의 나이로 조정에 불려가 영특함을 뽐내며 경국 최고의 자리에 오른 태유소의 손으로 더 이상 이룰 것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아니 그보단 태유소의 손에 더 이상 들어올 권력이 없다는 뜻이라 함이 옳았다.
그를 불러 높이 세웠던 선왕과 달리 장자 우단은 태유소를 중히 쓸 줄도, 내치지도 못하는 유약한 자였다. 좋은 현을 알아볼 줄 모르는 악부에게 명주대쟁은 사치이듯 지략가를 이용할 줄 모르는 왕에게 태유소는 그저 늙은 신하일 뿐이었다. 국익을 위한 뛰어난 지략이 왕궁의 높은 담을 넘지 못하고 돌아올 때마다 태유소는 깊이 절망하였고, 삶은 곤궁해졌다. 대문이 닳도록 들고 나던 온갖 진귀한 진상품이 자취를 감추고 나니 달디 단 권력의 부스러기에 대한 갈망은 더 커져갔다. 결국 그는 어리석은 왕의 충신이 되어 잊히기보다는 새 역사의 주역이 되어 그의 이름을 날리고 배를 불리는 것을 택하였다.


"그 외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으면 나가 보거라."


"아.! 잊고 있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분께서 뜻을 모르는 물음을 하셔서 대답을 하긴 하였지만, 나으리께 다시 여쭈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뭐라 하셨느냐"


"대감마님께 여식이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여식?"


태유소의 눈이 가늘게 길어졌다.


"예. 하여 한 분계시다 하였더니 더는 묻지 않고 그만 나가보라 하셨습니다."


"그뿐이더냐?"


"예"


태유소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왕의 물음에 대한 뜻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제 열 다섯이 된 태유리를 보내야 하는가.!


어려운 셈이었다. 태유소는 가만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붉은 탈로 얼굴을 가린다는 왕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지만 그의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붉은 불꽃처럼 일렁이다 사라지는 희미한 형상들 뿐 이었다. 잃었던 권력을 가지는 대가로 리를 보내는 것이 사실 그리 아까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볼모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어 서국의 왕을 상대하기에는 리의 그릇은 지나치게 작았다. 분명 울며불며 아비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으며 느린 세월을 견디지 못할 것이었다. 그뿐이면 다행이나 어리석은 입을 놀리며 왕의 총애를 입기는커녕 뒷방 골칫덩이로 전락해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는 태유소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고도 남을 것이었다. 부인인 세료의 성품을 빼다 박았으니 뻔 한 일이었다. 가진 것을 하나 둘씩 잃어갈 때마다 푸념만 늘어가던 부인의 짜증 섞인 쇳소리가 새삼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태유소의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무도 믿지 못하여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살기 띤 칼은 언제 춤을 출지 짐작 할 수 없다는 왕에게 보내기엔 득보다 실이 많은 선택이 될 터였다.


이제와 헛 지은 자식농사를 탓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마음은 어지럽기만 했다.


"이만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긴 생각을 끊은 음성에 태유소는 고개를 들며 손을 내저었다. 손짓에 그림자는 소리 없이 나가버렸지만 태유소의 깊은 고민은 심중을 더욱 파고들었다.











<1>



愛憎古無常 사랑도 미움도 항상 그러하지는 않으니...



청마하에서 동쪽으로 이백 리, 미와산자락에 자리 잡은 너른 들판으로 하얀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추수를 마친 들판 이곳, 저곳을 날아다니며 떨어진 이삭을 쪼아 먹던 새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파드득 거리며 날아갔다. 지평선 너머로 수많은 깃발과 높이 든 창검이 점점 거세지는 눈발사이로 다가왔다. 그 깃발의 맨 앞에는 태유소가 서있었다. 그는 사라진 경국 위에 세운 서국의 부서부 수장이었다. 왕의 이름을 쓰지 않은 것은 서국의 속국이 되었음을 인정하였다는 것이고, 태유소는 서국을 등에 업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는 말이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병사들은 꽤나 화려한 치장으로 승전을 자축하였고, 그 뒤로는 전쟁의 전리품이 된 전쟁 포로들이 뒤따랐다. 이따금 성민들이 나와 긴 행렬을 구경하기도 하였지만, 그들의 어두운 얼굴에서 환영의 빛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삭풍에 옷깃을 여며보려 애를 쓰는 전쟁포로들 틈으로 눈발은 휘몰아 쳤다. 끌려온 포로들 중에서는 부상자들도 꽤 있었지만 적절한 치료를 받기는커녕 늦어지는 행렬을 탓하는 관리들에 의해 매질을 당하기 일쑤였다. 긴 행렬의 끝이 걸음을 멈춘 것은 미와산으로 해가 넘어갈 무렵이었다. 며칠 동안 배고픔과 추위와 싸웠던 포로들은 흙바닥에 주저앉아 한숨을 토해냈다. 승전을 자축하며 성곽 너머에서 넘치는 누릿한 고기냄새는 허기진 뱃속을 더욱 요동치게 했고, 이따금씩 들려오는 함성과 비명 그리고 조롱은 처분을 기다리는 이들의 속을 태웠다.



"아가씨. 그만 들어가세요. 얼굴 차가워진 것 좀 봐요. 이러다 앓아누우실라."


유선은 손을 비벼 연의 양 볼은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멀건 죽을 휘젓던 연의 볼은 붉게 얼어붙어있었다.


"마땅히 할 일도 없는걸."


달빛도 으스러진 어두운 밤, 유선을 올려다 본 까만 눈동자는 반짝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러나 단출한 옷차림은 추위를 막아주기엔 역부족이었다. 웃고 있는 눈과 달리 오래전부터 감각이 없어진 발가락은 연의 작은 어깨를 더욱 움츠리게 만들었다.


"또 고집을 피우시지."


멀건 국을 나무 그릇에 담아내던 막이 어멈의 핀잔에도 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전장의 승리가 가져온 화려한 잔치에 필요한 방대한 양의 음식과 물품을 준비하기 위해 여종들의 일은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나무장작을 연신 집어넣어도 수천에 달하는 군사들의 한 끼 식사를 만드는 일은 버겁기만 했다. 미와산 초입에 있던 나무들을 베어오는 사내들의 걸음은 점점 더 빨라져갔다.


“이제 그만 하고 들어가세요. 음식물 묻은 옷을 너무 오래 놔두시면 옷이 상해요. 제발 들어가시라니까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유선은 연의 어깨를 떠밀었다. 유선에게 등 떠밀려 일거리가 없어진 연은 죽을 끓이던 불가에서 한발 물러나와 기지개를 폈다. 차가운 땅바닥에서 올라온 냉기와 끓고 있는 죽에서 나온 연기가 뒤섞인 연의 옷가지는 군데군데 젖은 얼룩으로 더러워져있었다.


“그럼 가서 옷만 좀 갈아입고 올게.”


연은 소매를 가볍게 툭툭 털어냈다. 몸짓을 따라 유난스럽게 검은 머리는 어깨위에서 아무렇게나 굽이쳤다. 아가씨라는 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나이 또래의 양가 여인들처럼 머리를 길러 곱게 땋아 화려한 장신구를 얹지도, 보드라운 비단위에 색실로 수를 놓은 치마를 입지도 않았다. 보통의 농가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이나 즐겨 입을 법한 무명천으로 된 통 넓은 바지와 긴 저고리는 연의 몸을 더욱 작고 딱딱하게 보이도록 했다. 그 때문에 얼핏 보면 영락없는 사내아이처럼 보였다. 물론 누군가가 큰 옷 아래에 감춰진 둥근 어깨와 웃을 때 반달로 휘어지는 까만 눈가를 유심히 본다면 사내아이가 아님을 알 수 있겠지만 세심히 살필만한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연은 뒷마당으로 통하는 나무문을 슬며시 열었다. 평소에는 뒷담을 돌아 처소로 들어가곤 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앞뜰 전체에서 벌어지는 흥겨운 잔치로 인해 뒷마당을 오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연의 발걸음은 절로 빨라졌다. 온 몸을 휘감은 피곤을 떨치기 위해 연은 북소리에 맞춰 조용히 가락을 흥얼거렸다. 더운 입김은 밤공기를 적셨다.


"어딜 지나가는 게냐."


예상치 못한 음성이었다. 긴 숨을 내쉬는 연의 등 뒤가 이유 없이 따끔거렸다. 연은 그대로 걸음을 멈춰서 느리게 돌아섰다. 언제나처럼 태유소의 목소리에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태유소의 얼굴에 오른 취기만이 공허한 마당가득 퍼져왔다. 애써 웃어 보이려 했지만 입가는 가늘게 떨리기만 했다.


"대감마님,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너 따위에게 받을 축하가 아니다.”


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뒷마당으로 다니지 말라 하였는데, 언제나 멋대로 구는 구나.”


태유소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유소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연의 어깨를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았다. 굽실거리며 죄송하다고 말할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뻣뻣하게 서 있는 태도는 언제나처럼 건방졌다. 꼿꼿한 작은 어깨위로 오래 전 같은 자세로 서있던 여인의 모습이 겹쳐졌다. 선왕의 승하 후 기울어가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던 그가 유난히 취했던 밤이었다.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동안 태유소에게 가진 것을 나눠 줘야하는 자식은 하나로 충분했다. 더 많은 자식이 생기고, 더 많은 처첩이 생긴다면 그의 몫은 적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태유소는 이득이 되지 않는 관계를 만들기 보다는 몸을 파는 기녀를 취하곤 했었다. 그런 원칙을 지켜왔던 그이니 오래전 그 날, 밤의 기억은 유쾌할 리 없었다. 취했기 때문이라 온전히 술을 탓하는 이유도 그에 있었다.


길고 긴 여름 밤 술을 가져온 계집종은 갓 피어난 꽃처럼 탐스러웠고 그는 후끈 달아오른 아랫도리를 풀어야만 했다. 눈물로 저항하던 이름 모를 계집종은 몇 번을 올라타도 태유소의 갈증을 채워주지 못했다. 물을 갈구하는 목마른 자처럼 그렇게 붙잡고 매달려 뜨거운 체액을 쏟아냈던 밤은 시간이 지나자 한 낮 꿈처럼 쉽게 잊혀졌다. 계절이 바뀌고 찬바람이 불다 사그라지던 봄 날, 태유소도 그의 부인도 원치 않던 아이는 부른 배를 감추고 있던 계집종의 몸에서 태어났다. 함부로 아랫것들을 취한 적 없는 태유소에게 연의 존재는 하룻밤의 실수를 되새김질케 하는 더러운 흔적 같은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짜증이 밀려왔다.


“내 체면은 상관없다는 게로군. 다른 이들이 이리 나다니는 것을 보면 다들 뭐라 생각하겠느냐! 아니 최소한 그런 거렁뱅이 같은 꼴로 뒷마당을 오가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지. 사연이야 어찌되었건 넌 내 핏줄..!!”


말을 이어가던 태유소의 머리가 순간적으로 하얗게 번졌다.


핏줄!


태유소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연을 훑어보았다. 추위에 얼어붙은 발그레한 볼과 앙다문 입술, 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린 옷가지를 통해 보이는 허연 어깨는 지난날의 계집종과 많이 닮아있었다. 술김이라고는 하지만 사내를 홀릴 만큼 활짝 피었지 아니했던가. 태유소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올해 몇이지?”


갑자기 변한 말투는 지나치게 다정했다. 연은 고개를 들어 태유소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때마다 달빛은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검은 눈동자는 뜻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어둡기만 했다.


“열여섯입니다.”


연의 답은 만족스러웠다.


“그렇지. 열여섯. 그때 그 계집도 딱 그맘때였지. 그래 넌, 지 애미를 닮았구나. 꼭 닮았어.”


데려다 좀 꾸미면 꽤나 볼만 해질 것 같았다.


“세화..입니다.”


생각에 잠겨있던 태유소는 눈을 크게 떴다.


“뭐가?”


“이름은 아셔야 하지 않습니까.”


크고 까만 연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이름?”


세화라는 이름을 더듬어 보았지만 낯설기만 한 태유소였다.


“제 어머니 이름입니다. 세화.”


싸늘해진 음성은 단호했다. 태유소의 입가가 비릿하게 뒤틀렸다. 마치 그를 타박하는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는 송곳처럼 날카로웠고 그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듯 바라보는 눈동자는 뜨겁게 타올랐다. 제법 근성도 있었다. 태유소는 한 발 다가섰다.


“내가 굳이 그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있느냐."


잠깐의 시간이지만 연의 가슴으로 서늘한 바람이 스쳐갔다. 연은 턱을 당겨 입술을 깨물었다. 그만 멈추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며 연을 말렸지만 어느 사이에 입 밖으로 마음이 흘러넘쳤다.


“어찌되었건 대감마님의 핏줄이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핏줄인 저를 이 세상에 나오게 한 제 어머니이시니.."


"안본 사이에 꽤나 피곤해졌구나. 조만간 다시 부를 테니 오늘은 그만 물러가라."


연의 말을 자른 태유소는 뒤돌아 멀어졌다. 뒷마당엔 다시 매서운 겨울바람으로 가득 찼다.







*******************






바람을 가르는 활은 과녁의 중앙에 정확하게 꽂혔다. 벌써 서른사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과녁 곁에 서서 명중임을 외치는 내관의 외침은 허공을 가르며 쉴 줄 모르고 들려왔다. 한눈에 보아도 단단한 넓은 왕의 등을 가로지른 활통에 남은 활은 이제 한 대 뿐이었다.


"전하. 모든 것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합의 목을 걸었느냐."


해단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남아 있는 활을 대에 걸었다. 당겨진 활대만큼 팽팽한 근육이 무포위로 솟아올랐다. 이내 바람을 가른 활은 명중을 알리는 외침이 되어 돌아왔다. 이 백 보는 족히 넘을 과녁판을 넋 나간 듯 지켜보던 재헌은 내관들의 헛기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것이 아직 베지 못하였습니다. 합을 잡아들였던 날..."


재헌이 흐린 말끝을 옥음이 잘랐다.


"베어 경국의 왕궁 성벽에 걸라 명하였는데, 어찌 아직 이라 하느냐."


"신의 헤아림으로는 합을 따랐던 자들이 그것을 보고 분기로 뭉쳐 전하께 반기를 들까 염려되는 바가 있사옵니다. 허니 전하께서 합을 살려 두시어 자비를 보여주고 반기를 들려던 자들까지 포용하시는 방책을 생각해보았습니다."


해단은 느리게 뒤를 돌아보았다. 열 보쯤 뒤에선 재헌공의 허리는 지나치게 꺾여 있었다.
해단의 입가로 가는 웃음이 흐르는 탓에 용안을 덮은 붉은 천이 살짝 흔들렸다. 해단은 대답대신 내관이 들고 있던 활 몇 십대를 비어있는 활통에 새로 꽂았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재헌을 향한 걸음에 따르던 내관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붉은 가죽신 위로 수놓아진 황금 문양을 본 재헌의 어깨는 더욱 아래로 향해 이제 머리끝에 올린 관모가 땅에 닿을 듯하였다.


"그래? 그 말은 짐의 하명 대신 그대의 생각이 더 중하다는 뜻인가?"


재헌의 등줄기를 타고 땀방울이 맺혔다.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전하 그런 뜻이 아니옵니다. 감히 신에게 전하의 명보다 중한 생각이 있겠습니까. 신은 오로지 전하의 명을 받들어 행할 뿐입니다. 단지 한 번 더 전하의 뜻을 확인하고 행하여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음성은 계집의 것처럼 가늘었다.


"언제부터 율금부장의 위치가 과인의 뜻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는지 모르겠군."


순간 활터 주변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해졌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오라. 그러니까 신은 전하의 뜻을 확인하겠다는 아니, 어찌 감히 확인을 생각하겠습니까. 전하의 큰 뜻은 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여 신이 전하의 뜻을 받들고 따르지만 주변의 생각을 모아 전하께 올려보는 것도 신의 도리라 생각하여. 물론 신의 생각은 신의 생각은 전하에 비할 바가 못 되어.."


멍하니 굳어져있던 재헌공이 서둘러 몸사래를 치며 입을 놀렸다. 그 자신도 무슨 뜻인지 모를 만큼 허둥지둥 둘러대는 말은 지겹게 길었다. 해단은 좌중을 살폈다. 두려움에 질려 흔들리는 어깨가 붉은 천 사이로 또렷이 드러났다.


"되었다."


해단은 싸늘하게 중얼거리며 과녁을 향해 걸어갔다.


"전하. 신의 아둔함을 용서 하여주십시오."


"그만하라."


"신에게 다시 기회를 주신다면 전하를 위해 다시.."


재헌공은 멀어지는 해단의 발걸음을 따라 가며 중얼거렸다. 재헌공은 멈출 때를 알지 못했다. 내관들 사이에서 낮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뒤이어 벌어질 일들을 짐작하고도 남은 그들이었다. 해단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고개를 들라."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게 건조하고 낮았다. 재헌은 무엇에 이끌리는 듯 무의식 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내 그의 입에서 외마디 신음 같은 숨결이 터져 나왔다. 붉은 천을 걷어낸 자리에 나타난 것은 젊은 왕의 용안이었다. 추악한 흉터가 있다는 풍문과 달리 왕의 얼굴은 흠잡을 곳 하나 없이 단단하며 매끄러웠다. 땀으로 젖은 듯 보이는 검은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짙은 눈매는 크고 날카로웠다.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과 보기 좋게 솟은 콧날을 보고 있자니 왕의 얼굴을 가린 이유가 납득되지 않는 재헌이었다.


"아. 전...전하."


재헌의 외마디 탄식을 듣던 해단의 입가가 슬쩍 비틀렸다.


"처음 보는 것이 아닐 텐데?"


옥음은 소름끼치도록 부드러웠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두려움에 재헌의 몸이 낮게 떨렸다.


"무슨 말씀이 시온지.."


재헌은 당황하며 황급히 답하였다.


"율금부장의 기억을 도와드려라."


의아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있던 재헌공은 고개를 돌려보았다. 바로 옆엔 어느 사이에 왔을 지모를 복면을 쓴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단번에 다가온 것을 보니, 말로만 듣던 왕의 비밀 호위부대 무호사의 병사인 듯 했다. 알 수 없는 살기에 재헌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복면을 쓴 사내는 느릿한 손길로 검은 복면을 벗었다. 사내는 느리게 중얼거렸다.


"탐욕만큼 기억력은 뛰어나질 않는 것 같습니다. 율금부장나리."


재헌은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천천히 눈을 들어 사내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낮이 익은 얼굴은 분명 기억 어딘가에 있었다. 그것도 오래지 않은 가까운 기억이었다. 빠르게 생각을 더듬어 보던 재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너는..."


합왕을 생포했던 날, 그를 몰래 찾아와 합왕의 목숨을 살려주면 대가를 치르겠노라 비굴하게 매달리던 사내였다. 사내가 가져온 금은 셈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이었고, 재헌의 망설임은 쉽게 끝이 났었다.


"전하. 이것은 모함이옵니다. 이자가 신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신에게 찾아와 계획적으로 꾸민 일이옵니다. 전하! 신을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신은 결코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금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모두 전하께 가져와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신의 충정을 믿어주십시오. 전하!"


비명 같은 외침은 활터 주변을 울렸다.


"그래? 헌데, 그날 밤의 율금부장의 충정은 지금과 조금 달랐던 던 가보군. 그땐 그 금덩이를 모조리 깊게 묻으라 했었지 아마."


왕은 비웃고 있었다.
살짝 치켜 올라간 입매를 보던 재헌의 복잡한 기억이 그제서 또렷해졌다. 금을 가져온 사내와 그 뒤를 따르던 사내종! 분명 그였다. 한꺼번에 많은 양의 금괴를 가지고 다니면 분명 의심을 받을 테니, 어두운 밤 혼란을 틈타 저택 뒷산에 묻으라 지시할 때 사내종이 힐끗 보였던 웃음과 꼭 같았다. 재헌은 무너지듯 땅으로 주저앉았다.


"뒷산엔 그대의 아비 묘가 있던데, 오늘 그대는 아비를 만나겠군."


쓰러진 사람처럼 움직일 줄 모르는 재헌을 슬쩍 본 해단의 얼굴로 얼음보다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신 인규 이옵니다."


대화전 밖에서 들리는 음성은 크고 우렁찼다.
해단의 어깨에서 홍색 견직으로 촘촘하게 짠 띠를 벗겨내던 내관의 손길이 허공에 멈췄다. 해단은 내관을 물리며 소매까지 내려온 허연 피갑을 손수 풀었다. 부드럽게 감긴 범의 털은 소리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난 해 인규와 함께 잡았던 백호의 털을 다듬어 만든 피갑이었다. 똑같은 것을 만들어 나누어 가졌지만 그의 어깨에 털이 감긴 적은 없었다. 인규의 고지식함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가끔 해단은 그 우직함에 웃음이 났다. 선혈이 번지듯 검붉은 어좌에 앉은 해단은 그를 들였다. 열린 몇 겹의 문을 지나치는 빠른 걸음에서 그의 불편한 마음이 읽히는 듯 했다. 이유를 알기에 해단은 피곤한 숨을 내쉬며 미간을 매만졌다.


"활터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낮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인규는 바로 중심을 찔렀다. 군더더기 인사 따위는 생략하여 해단을 더욱 비틀리게 만들었다.


"올 해도 범 사냥을 가야겠지?"


왕은 슬쩍 비껴 앉으며 모른척했다.


"잠행을 다녀오셨습니까?"


"채내관이 분명하군. 당장 들여 확인해야겠어."


"전하. 누구에게 들었든 들릴 소식이었습니다. 내관을 탓할 일이 아니옵니다. 전하의 안위를 걱정하는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인규는 서둘러 답했다. 행여라도 내관에게 괜한 화가 미칠까 걱정하는 마음은 옥좌까지 전해졌다. 잠시나마 숨 돌릴 틈이 생간 해단의 얼굴이 흐릿하게 편안해졌다.


"더 추워지면 범도 더 깊이 들어갈 터, 늦어도 내달엔 다녀오는 것이 좋겠군."


"잠행의 뜻은 백성의 삶을 돌아보는데 있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썩은 관료를 솎아내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시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또한 처음부터 굳이 시험해보지 않으셔도 될 일이었습니다. 그 자는 율금부사에 오를만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혹여... 옥체를 위태롭게 하면서 까지 잠행을 하신 것은 그에게 기회를 주신 것이옵니까?"


인규는 사냥얘기에 쉽게 걸려들지 않았다. 그제야 해단은 옥좌에서 일어나 인규를 곧바로 내려 보았다.


"그대와 다니는 범 사냥이 어째서 재미난지 아느냐? 자네는 범을 모는 재주가 있지. 단번에 사냥감의 숨을 끊어 놓는 사냥은 재미가 없어. 슬슬 주변을 몰아가며 범의 눈에 번지는 공포를 마주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사냥의 기쁨이 아니겠느냐. 함정인 줄 모르고 걸려든 먹잇감은 뒤늦게 당황하며 발을 빼려하지만, 하면 할수록 빠져들어 궁극엔 추악한 모습을 내보이지. 매번 다른 것을 사냥하곤 하지만, 어찌하여 내 눈에 보이는 모습은 매번 비슷한지...마지막 기회를 내버리고 죽으러 가겠다 나선 모습이 마냥 우습더구나."


열린 창밖을 내다보는 왕의 눈매가 짙어졌다.


옥음을 듣고 있던 인규의 가슴이 서늘하게 아려왔다. 온전히 우습다고 비웃고자 가신 마음은 아닐 텐데, 성심 한가운데는 분명 혹여 믿어볼 만 한 사내일 지도 모른다며 믿어보자 하던 마음도 있으셨을 터였다. 그 마음이 백에 하나였더라도 아니, 천에 하나였더라도 그 하나가 백이 될 수도 있고, 천이 될 수도 있는 일이건만 매번 그 하나는 희미해지기만 했다.


믿지 못하여 의심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인지, 의심이 확신이 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인지, 확신하여 불신만 가득한 차가운 성심이 안타가운 것인지 인규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가린 얼굴 뒤로 사라져가는 웃음이 그리워 고개를 떨구었다.


"어찌하여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느냐? 그대는 재미있지 않은 것이냐."


"앞으로는 신이 하겠습니다."


한참 만에 인규는 말을 올렸다.


해단은 창에서 시선을 거두어 인규를 내려다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벗 삼아 함께한 시절이 스무 해가 넘었다. 재헌을 맘껏 비웃은 마음이 이상하게 불편한 것을 모를 리 없는 사내의 무뚝뚝한 위로가 불쾌했다. 자기가 맡겠다고 나서는 모양은 해단을 더 쓸쓸하게 만들었다.


"그대는 다른가?"


옥음은 비틀렸다.


"무슨 말씀이 시온지 모르겠습니다."


"그대는 다른 이들과 다르냐 물었다. 그대도 언제든 내 등에 칼을 꼽을지 모르는 일이 아니더냐."


인규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몸 안으로 느리게 퍼졌다.


"신도 다를 것은 없사옵니다. 신도 전하께서 믿지 못하시는 그들과 똑같이 유혹에 흔들리고 권력을 탐하고 안위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고, 그것이 백성입니다."


인규는 솔직했다.


"주제 넘는구나. 그럴 수밖에 없으니 받아들이라?"


해단은 엎드린 사내의 어깨를 쏘아보았다.


"신은 오래전의 전하가 그립습니다. 이제는 그만 떨치실 때가..."


끝까지 가볼 셈인 듯 했다. 해단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만하라."


"전하."


"밖에 후설관은 있느냐.! 후설관!!"


서둘러 뛰어 들어 온 후설관이 채 입시하기도 전 옥음은 몰아쳤다.


"오늘 부로 인규를 내정국사에서 파하고 무호사부의 직위를 박탈한다."


바지런히 손을 놀려 글을 써내려가던 후설관의 붓이 허연 종이 위에 멈춰 섰다. 허연 종이위로 검은 먹이 번졌다.


"끝났으니 나가보라."


멍하게 종이만 바라보는 후설관은 정신을 차리곤 서둘러 예를 올리며 대화전을 빠져나갔다. 엎드려 있던 인규는 조용히 일어섰다. 용안을 가린 붉은 천은 아무 것도 짐작 할 수 없게 모든 것을 가리고 있었다.


"신 인규 물러나겠습니다."


큰 절을 올린 인규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무거워진 발걸음이 몇 겹의 문을 지나칠 때가지도 대화전의 주인은 침묵을 지켰다. 대화전 앞 돌계단을 밟으며 인규는 뒤를 돌아보았다. 먼 곳의 옥체는 굳어져 창밖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의 오래 된 기억 속에 남아있는 왕의 모습이 유난히 그리운 날이었다.






댓글 '6'

진하

2009.11.11 10:16:34

연과 해단이 주인공인가요?
빨리 만났으면 좋겠네요.^^

위니

2009.11.11 17:11:10

오오...이게 왠 횡재랍니까....느무느무 기대됩니다...저도 담편을 기다리고 있겟습니다..!

도허니

2009.12.10 14:14:46

드디어 읽었어요!! 지현님 감사해요~~

와우~

2009.12.13 11:14:34

대박을 낚은듯 마음이 한가득 뿌듯하옵니다. ㅋㅋ

2010.01.14 01:39:08

이제 시작합니다.

큐리

2010.01.20 14:04:22

헛소동이후 오랜만에 뵈는 신작을 이제사 읽어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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