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CHAPTER No.00 시작은 예고 없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온갖 명제에 대한 의견을 공격적으로 묻고 다녀 그들로부터 대단한 미움을 샀다고 한다. 근래로 치면 도를 알리고자 주야장천으로 애쓰는 이들과 같은 대접을 받았을 게다. 희대의 철학자와 스스로를 비교하는 것은 아무래도 주제넘어 낯이 근지럽지만 사실 나도 퍽 질문이 많은 편이다. 다만 나는 소크라테스보다는 사람을 가려 내가 신뢰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심도 있는 대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포문은 주로 나의 또 다른 자아 - (차후 아버지가 오입으로 새 생명을 만들지 않는 한) 하나뿐인 남동생 신후를 향해 열린다. 까놓고 말해 신후만큼 만만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신후는 나의 질문을 괴롭힘과 동격으로 치부한다. 녀석은 마치 일곱 살짜리 아들이 자신의 탄생비화를 집요하게 추궁해올 때 그 아버지가 지을 법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눈빛을 의역하면 대강 이렇다. “부탁이니까 제발 닥치고 꺼져.” 동생의 기분을 생각해서 물러나주고 싶기도 하지만 나는 천성이 이기적이고 이지적이라 내 호기심의 해결을 무엇보다 우선순위에 놓는다. 더구나 최근 내가 가장 몰두하고 있는 문제의 주어는 신후로서 녀석의 답변이 아니면 질문의 의미가 없다.


요전에 녀석이 한창 앨빈 토플러의 <권력이동>을 읽을 때, 너는 아침에 등교할 때 어느 발이 먼저 나가느냐 물었다가 그 사람 잡는 두께의 책 모서리로 이마를 찍혔던 경험은 확실한 반면교사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지위가 부끄럽지 않도록, 어느 정도의 학습능력을 갖춘 나는 신후가 읽고 있는 책의 두께와 표지를 유심히 살핀 뒤 행동을 개시하곤 했다. 오늘 신후가 옆구리에 낀 책은 <슬픈 까페의 노래>. 표지가 낯익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우의 책상 위에도 종종 놓여있던 책이다. 하드커버라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새끼손가락 굵기의 무난한 두께는 내게 힘을 실어주었다. 나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기척을 죽이고 신후의 등 뒤로 다가가 품위 있게 헛기침을 했다. 녀석이 차갑게 외면하는 바람에 마른기침을 두세 번 반복하다 크게 사레들린 건 굳이 말하지 않겠다. 독서하거나 공부할 때만 쓰는 날렵한 생김새의 무테안경을 연신 밀어 올리며 신후가 작게 으르렁댔다. 내가 벌인 소란이 거슬린단 의미였다. 땅에 떨어진 형의 체면과 위신은 이따가 주워서 연고를 발라주기로 하고, 나는 재빨리 운을 뗐다.


“신후 넌 너랑 나랑 같은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나한테 그 사람 양보하고 물러설 수 있겠냐?”


침묵은 좋은 징조다. 대답하기 싫은 질문엔 당장 벼락같은 노성이 달려든다. 스탠드의 빛이 신후의 옆얼굴에 어른거렸다. 입술을 물고 속눈썹을 내리깐 옆얼굴이 묘하게 정우와 닮았다. 조금 꺼진 듯 어둠이 진 깊은 눈시울에서 선이 날렵한 하관까지, 이목구비를 따라 흐르는 정갈함과 강직함. 신후와 ‘닮은’ 나에게 없는 요소들이 시새움 비슷한 부러움을 불러낸다. 내가 물색없이 씁쓸해지려는 참에 고요하고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녀석이 일부러 섞은 따분함을 정제하자 진정성 짙은 대답만 남았다.


“좆까. 양보가 되면 그게 좋아하는 거냐? 그럴 거면 아예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지. 이타인지 박애인지 친환경인지 몰라도 나는 그런 거 안 해.”


나는 어렵지 않게 신후에게서 얻은 답을 해석하고 응용했다. 양보 운운하는 나, 권윤후는 누구에게나 희석된 마음밖에 줄 수 없으므로 독할 만치 향이 진한 감정을 가진 신후를 이길 수가 없다고.


 


-


 


아무래도 저런 흉포한 짐승을 집안에 푼 도우미 아주머니의 처사를 납득할 수 없었다. 무려 십 년 전부터 이집 장자의 공식약혼녀 역할을 자처해온 망할 계집애, 거르고 걸러 점잖게 말해도 ‘빌어먹을 신나영’은 신후에게 있어 그저 알량한 약혼녀 계급장을 면죄부로 믿고 까부는 불청객일 따름이다. 속으로 자신을 깔아뭉개는 신후를 까맣게 모르고서 나영은 서재를 배회하는 정신 사나운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책에 눈을 고정한척 가장하고 나영의 작태를 낱낱이 관찰하던 신후는 나영이 찍은 발자취의 흐름이 거대한 팔(八)자를 그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유감스럽게도 학술적인 가치가 전혀 없는 무의미한 발견이었으므로 신후는 이내 나영에게 흥미를 잃었다. 신후가 자기세계로 회귀하기 무섭게 나영은 그의 관심을 유도하는 새로운 기술을 걸었다. 나영의 고함이 신후를 노리고 떨어졌다.


“권신후!”
“남의 이름을 세상에서 가장 심한 욕설의 대명사로 쓰지 마.”


느긋하게 말하며 신후가 눈을 들었다. 활자로 빼곡한 하드커버의 책은 개점휴업. 깊은 한숨이 책을 든 손을 간질였다. 웃기라도 하는 듯 비뚜름히 올라간 한쪽 입매와는 반대로 나영을 보는 신후의 시선엔 역정이 묻어났다. 신후가 저지른 고의적인 무례가 나영의 노기를 돋우리라 짐작은 했으나, 분노의 색이 예상보다 한참 짙었다. 이쯤해서 신후는 제 인품의 모자람을 겸허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신후는 나영이 뿜는 불을 정면으로 맞아 그녀에게 휘발성 통쾌함을 선물할 정도로 배포가 큰 남자는 못되었다. 나영의 사촌동생이자 신후의 첫 맞선 상대는 신후에게서 다른 남자에게 없는 특별함을 느꼈다며 수줍은 고백을 전해왔지만, 실상 그 후한 평가는 백신 없는 질병 - 소위 콩깍지라 일컫는 항원이 불러일으킨 몹쓸 착각이다. 신후 역시 왼뺨을 후려 맞을 시 다른 뺨을 내주기는커녕 손모가지를 함부로 놀린 상대의 양 뺨에 채도 높은 홍조를 칠해줄 보통 남자에 불과했다. 차라리 세뇌에 근접한 가정교육 덕에, 신후에게 손찌검을 돌려받아야할 상대가 여성일 경우엔 물리력의 행사라는 강수를 두지 못할 테지만.


그런 의미에서, 신나영의 난이 여기까지라면 좋겠는데.


분명, 나영이 생래적으로 획득한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장막에는 신후의 폭력성을 무위로 돌리는 힘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계가 뚜렷한 보호막인 관계로, 신후의 짜증까지 소화시키진 못했다. 그리고 나영은 그녀의 성질을 받아주기보다 그녀와의 교분을 포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신후를 눈치 챌 수 없을 만치 흥분해 있었다. 이어진 나영의 행동은 현재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성이 차지한 입지가 몹시 협소해졌음을 여실히 증명했다. 나영은 지식의 보고이자 마음의 양식을 신후에게 휘둘렀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책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해 논리로 신후를 굴복시키고 신후의 사과를 얻어냈다는 의미가 아니다. 머리보다 먼저 상황을 판단한 몸이 팔을 이마위로 들어 나영의 공격을 막았다. 나영의 흉기로 전락한 책은 신후의 팔에 묵직한 아픔을 새겼다. 얼굴 가까이로 다가온 책에서 특유의 먼지 냄새가 났다. 책속의 지식은 불멸이나 내용의 그릇 역할을 하는 종이는 세월에 몸을 맡기고 차분히 묵어가다 종래엔 소멸한다. 신후는 삭은 종이책의 부피와 중량과 향취를 체감했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반사 신경의 활약에 힘입어 신후의 머리는 무사했다. 아릿한 통증이 퍽 오래 팔을 주무르는 게 제대로 방어하지 않았더라면 며칠을 두통으로 고생하고도 남았다. 오른팔이 괜히 오른팔이 아니군. 신후는 시답지 않은 말장난을 생각하곤 피식 실소했다. 기습을 당하고도 동요하거나 반성하는 기색이 없는 신후를 보며 나영이 퍽 위협적으로 잇소리를 흘렸다.


“웃어? 사람 하나 시궁창에 처박아 놓고 웃음이 나오니?”
“현실은 원래 시궁창이라잖아. 꼬우면 꿈동산 왕자님을 만나야지.”
“나쁜 새끼!”


정신없는 귀국에서부터 엊그제의 피곤한 맞선까지, 신후의 요 며칠은 <불가항력>이라는 네 자로 깔끔히 정리되었다. 조모의 부고는 일시적으로 신후의 자유의지를 박탈해갔다. 신후는 송환명령과 다름 아닌 연락을 받자마자 부리나케 귀국을 했다. 효손과는 백리 밖보다 먼 신후라도 패륜아는 아니었던 터다. 기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어릴 적 삼년 남짓을 조모 손에서 자랐으므로, 노환이 깊어 자는 듯 세상을 떠난 조모의 마지막을 지키는 일은 분명 신후 몫이었다. 말이야 호상이라지만 핏줄의 죽음은 몹시 안타깝고 서글펐다. 만석살림 부잣집 고명딸로, 고지식한 지방 유지의 처로 일생을 우아하게만 사셨기에 여느 노부인들의 그것과 달리 검버섯 하나 없는 손이 가늘고 고왔다. 비누 냄새가 희미하게 밴 손이 머리를 쓰다듬거나 손을 만져주면 어쩐지 의젓하게 굴어야한다는 의무감이 생겨났더랬지. 배꼽 위로 가지런히 놓인 핏기 없는 손에 신후는 눈길을 오래 두었다. 열이면 아홉 명의 지관이 명당이라 감탄한다는 - 남은 한명은 돌팔이란다 - 선산 자락에 구덩이가 파이고, 조모를 뉘인 마지막 침대가 땅 밑으로 가라앉았다. 원체 태연무심한 손자라 눈시울을 눅눅하게 적시진 않았으나 괜한 심란함과 허무함이 뱃속에 연기처럼 퍼져 오래전 끊은 담배가 동했다.


순조롭게 발인까지 마치고서 친지들끼리 모여 식사를 하는 중에 달갑지 않은 화제가 급부상했다. 친척 어르신들은 채무자를 만난 채권자 모양으로 이날을 벼르고 별러왔다는 듯 신후에게 압력을 가했다. 남자는 결혼을 해야 성인이 된다는 케케묵은 조언이 잇따랐다. 취조나 진배없는 ‘멀쩡한 허우대로 여태 장가도 못간 권신후를 어떻게 하면 좋은가.’ 좌담회의 중심엔 나름 독설가라 자부하는 신후조차 업어 치고 메치는 달변가, 셋째고모가 있었다. 윤후새끼라도 있었다면 그나마 공격이 두 군데로 분산되었을 텐데. 신후로선 애석하기 그지없게도 부표를 역할모델로 잡은 윤후는 하필 이 시점에 실크로드를 헤집는 중이었고 따라서 그는 조모의 별세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아버지의 바로 밑 고모는 성격이 괄괄하기로 친척들 사이에 유명했다. 소싯적엔 권위주의의 시대를 뛰어넘어 남성들을 턱짓하나로 부리는 묘기를 행하셨단다. 그녀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채찍을 휘두르는 대상을 자녀와 조카로 바꾸었는데 어머니를 일찍 여읜 윤후 신후 형제는 수년 째 관리대상명단의 최상위를 독식했다. 그녀는 결혼에 있어 실로 강경한 노선을 고수하며 <자식 된 도리> 로서 <아버지를 살리는 셈> 선을 보라 신후를 채근했다. 한때는 태산처럼 거대했던 아버지의 체구가 수년전과 달리 왜소해진 건 사실이나 제 아무리 대단한 의사라도 시간을 거꾸로 돌려 아버지에게 ‘젊음’이란 영약을 제공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뿐더러 고모가 만나보라 강권한 여성의 직업은 의사도 아니었다. 이왕 학점을 날려먹은 김에 학기를 깨끗이 포기하고 조모의 49제까지 치르고서 독일로 돌아가리라는 결심이 뿌리째 뽑힐 지경에 이르렀다. ‘요새는 유아교육 전공에 현재 신부수업중인 여자가 사람도 살립니까?’ 한 마디로 대변되는 신후의 강력한 반발에 수완 좋은 고모는 공략 대상을 바꿨다.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지는 아버지의 몰골은 백 마디 사탕발림보다 효과적이었다. 고모 말마따나 오로지 노쇠한 아버지의 구명이라는 명목 하에 신후는 결국, 나영의 친인척이며 권력 좋아하는 고모가 고른 사람답게 무슨 장관 댁 영양이기도 하다는 여성과의 만남을 승낙했다.


간소화한 웨딩드레스처럼 생겨 부담스럽도록 흰 원피스가 동그란 무릎 위에서 너울댔다. 가만히 숙이는 허리가 지나치게 가늘어서 환자복으로 다시 보이기도 했다. 신후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머뭇거리던 여자가 먼저 입을 뗐다.


‘전에 한번 나영언니랑 계신 걸 우연히 뵙고서……제가 사실, 언니를 많이 졸랐어요.’


알고 보니 상식 변두리의 취향을 가진 여성이었다. 나영과 함께 있을 때 신후의 태도란 몹시 거만하고 냉소적이며 심술궂기 짝이 없거늘. 대체 신후의 어떤 특색이 그녀의 ‘끓는점’ 한복판에 직구를 꽂았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혹여 저 얌전빼는 얼굴로 피학적인 언사에 흥분을 느낀다면 정말이지 일반인 위장이 대단한 수준이군. 이어진 여자의 자기소개를 모조리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딴청을 피우던 신후는 퍼뜩 고모의 추진력 도화선에 불을 쏜 역적이 나영임을 깨우쳤다. 젠장. 화를 삭이느라 거푸 음료를 들이킬 때였다. 여자의 얄팍한 입술 틈으로 분화직전의 머릿속을 순식간에 빙원으로 바꾸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캉. 유리컵과 모난 얼음이 사납게 부딪치는 파열음. 또는 신후의 눈가에 살얼음이 피는 소리였다.


‘언니가 신후 씨 형님과 결혼을 약속했다 해서 많이 부럽고 그랬네요. 에……되바라졌다, 여자가 부끄러운 줄 모른다 생각하셔도 좋아요. 저는 신후 씨 곁에 있고 싶어요. 그렇게 천천히 정을 붙이고 마음을 쌓다가 그리고 나서 신후 씨와……가정을…….’


여자가 저주를 끝맺기 전에 신후가 끼어들었다. 비틀린 웃음이 묻어나는 중저음이 미성의 꼬리를 잡아챘다.


‘이봐, 돌았습니까?’


세상 모든 진정 되바라진 여성들과 페미니스트를 대신해 신후가 대지 밑 용암처럼 묵묵하게 격노했다. 물론 신후의 경우엔 분노의 초점을 여자가 뒷집똥개이름처럼 아무렇게나 들먹이는 ‘가정’에 맞추었다. 신후는 그답잖게 상대를 배려해, 여자가 바라마지 않는 대로 그녀와 나영을 동일선상에 두기로 작심했다. 이어 픽, 가볍게 터트린 조소에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불행하게도 처연한 눈망울과 떨리는 속눈썹 따위에 혼이 빠져 방아쇠를 놓을 신후는 절대 아니었다. 멋대로 신후를 나쁜 남자로 상정한 뒤, 그 나쁜 남자의 사랑을 받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고자하는 걸까. 골격이 도드라진 마른 손가락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테이블을 짚었다. 우스웠다. 희생과 인내를 감당하겠다는 듯, 신후가 결코 강요하지 않는 기다림에 출사표를 던지려는 의지가 신후에겐 모욕과 같이 느껴졌다. 총기를 장전한 신후는 고모에게 뺨 맞을 각오를 단단히 했다.


‘지금은 결혼생각도 없지만 결혼을 한다고 해도 그쪽은……아! 이름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관심 없는 상대한테는 이름 외는 성의도 아까워하는 막돼먹은 종자라서.’


그렇게 제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흐느끼느라 뭉개진 발음으로 말하는 여자의 눈물이 고급스러운 식기가 도열한 식탁 위를 굴렀다. 때와 장소를 못 가리고 우는 여잔 더 질색. 그 눈물을 보는 것이 괴롭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 앉아있을 의미를 못 느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끝. 그래서 끝. 귀가해 바로 사실상황을 고하고 목 위 물건을 자진납세하자, 수분동안 뻐근한 뒷목을 어루만진 고모는 본인의 무병장수를 위해 신후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진작 과단을 내렸더라면 신후와 부친과 쓸데없이 눈물 많은 어떤 여성의 뒷목도 무사 무탈했을 것을. 뒷맛이 떨떠름하니 개운치 못하긴 해도 썩 나쁘진 않은 종장이었다.


때문에, 치맛자락에 후폭풍을 두르고 난입한 나영만 아니었더라면 신후는 언제나처럼 평온하고 무던해서 이따금 권태마저 느껴지는 오후를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 맞아. 신후는 현재 재앙의 근원인 신나영과 대치중이었다. 나영의 날선 눈빛이 긴 상념의 대미를 장식했다. 신후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여태 안 갔냐? 이만큼 놀아줬음 됐지 뭘 더 바라고.”


신후가 손을 내저으며 축객의 의사를 밝혔다. 나영은 어른을 조르는 떼쟁이 아이 취급에 분개하기보다, 오히려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영리한 대응을 했다. 기어를 새로 넣은 그녀가 생떼의 강도를 높였다.


“사람 좋아하는 게 무슨 죄니? 좋게 말해서 끝냈어도 해민이 성격에 너한테 매달리지 않았을 거야.”


느낌표로 마쳐야 마땅할 것처럼 창대하게 터져 나온 훈시는 끝으로 갈수록 점차 미지근해져 결국 평서문으로 종결됐다. 나영이 스스로에게 조금만 더 솔직했더라면 의문문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나영의 칭얼거림을 진압하기에 앞서 신후는 약간 고민했다. 신후가 쥔 무기의 화력은 더 없이 막강했으나 도의적인 결함을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싸움에 있어서 눈에 흙을 뿌리는 것과 다름없이 저열한 면이 없지 않았다. 신후의 망설임은 나영이 허리춤에 양손을 얹은 채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은 순간 모조리 공기 중으로 증발했다. 나영의 선생님놀이에 휘말리는 일만큼은 유년기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곧 죽어도 사양이었다. 나영이 못다 이룬 교사의 꿈에 젖어들기 전에 어서 그녀를 장외로 끌어내리고 그의 공간을 수복해야 마땅하다. 신후는 나영의 오래된 상처에 가차 없는 칼끝을 겨눴다.


“신나영의 경우를 타산지석 삼았다. 권윤후가 좋게 거절했다고 해서 신나영이 권윤후를 포기한 건 아니잖아.”


신후의 다소 냉정하나 솔직한 지적은 참렬한 결과를 낳았다. 잠깐 입을 다무나싶더니, 이내 토라진 어린애 모양으로 발을 쿵쿵 구르며 책장에 다가간 나영이 무작위로 책을 끄집어냈다. 품에 한가득 책을 안은 나영은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신후의 곁으로 돌아왔다. 집어 든 책 다 줄 테니 그거 먹고 떨어져라, 말할 새도 없이 나영이 움직였다. 모르긴 몰라도 나영에겐 책의 새로운 용도를 계발하는 잠재적인 소질이 있는 모양이다. 나영이 신후의 머리위에 작가 불문, 국적 불문의 책을 함빡 끼얹었다. 독서가라면 한 번쯤 꿈꾸는 형태의 죽음. 철모르고 유치했던 한때엔 신후 또한 방대한 분량의 서적에 깔려 압사하길 소망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십 수 년이란 시간은 코를 찔찔 흘리며 막대사탕에 침을 바르는데 열중한 꼬마를, 담배를 꼬나문 채 간헐적으로 경범죄를 저지르는 - 크억 퉤, 따위의 효과음은 선택 사항이다 - 성인 남자로 망가뜨릴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고로 스물일곱의 권신후는 나영의 살인미수를 태연히 즐길 수 없었다.


신후가 나영의 양 손목을 억세게 붙잡아맸다. 걸핏하면 신후의 일상을 들쑤시는 세 살 버릇을 이제라도 바르게 고쳐주겠노라 내심 으름장을 놓았다. 감정을 말소한 신후의 시선과 감정에 함몰된 나영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제길. 신후가 먼저 눈을 돌렸다. 나영의 성질이 어느새 불에서 물로 변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신후는 이물질을 털어내듯 거칠게 나영을 결박한 손을 풀었다. 어쩐 일인지, 싸움만 했다하면 결과적 개새끼는 신후 자신이다. 몇 번이고 겪어본 바, 전세가 기울 적엔 기꺼이 줄행랑을 놓는 법을 배웠다. 앉은 자리에서 여유롭게 몸집을 일으킨 신후가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나 작작 건드리라고. 예비 형수님.”
“……너 내가 형수 되면 다 복수할 거야.”


설움이 기도에 걸린 듯 탁한 음성이었다. 어련하시겠어. 형수건 복수건 단수건 내키는 대로 하는 대신 눈에만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죽거리며 신후는 서재를 빠져나왔다. 창을 열어두어서인지 거실에 봄 특유의 산뜻하고 달콤한 냄새가 흥건했다. 신후는 창가로 가 밖을 내다보았다. 밤은 밤답게 어둠이 자욱한 독일과 달리 대한민국, 덧붙여 대도시의 밤은 온 천지가 빛으로 형형하여 상대적으로 어둠의 색이 엷었다. 몇 년 외국물 먹었다고 되지도 않는 감상은. 짧게 자조한 신후는, 탐욕스런 밤에 먹혀 한 켠이 희미하게 이지러진 분홍빛 달을 응시했다. 수줍은 동시에 관능적인 신의 거울이 향락에 물든 지상에 은연한 빛을 드리웠다. 달에 홀린 신후를 질타하듯 도도한 미인이 풍기는 냉기와 같은 바람이 신후의 머리칼을 가볍게 흔들었다. 관자놀이를 긋고 지나는 야릇한 미풍에 와신상담의 의지가 스러졌다. 어차피 집안의 전략적 요충지를 빼앗긴 마당이니 나영이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길 기다릴 겸, 하루쯤 유유자적 고국의 정취를 만끽해도 괜찮겠지. 워낙 조숙했던 탓에 열일곱 먹어서도 일탈을 감행하며 설렘을 느낀 적이 없었건만 문득 돋아난 기대감의 싹은 거실을 딛는 신후의 걸음을 봄볕처럼 가볍게 했다. 신을 신고 현관문을 밀다가 공연히 머쓱한 기분에 잠긴 신후가 의미 없는 한 마디를 스산한 거실에 툭 흘렸다.


“웃기는군, 나도.”


 









전에 쓰던 글 개작입니다.
사실 요새 반드시 해야하는 일들이 쏟아지는 바람에 뭐라도 쓰고 싶은 맘이 너무 강해져서(...)
-뭔가 시험기간에 죽도록 방이 치우고 싶은 것과 같은 이치랄까요(...)
아무튼 자꾸 사고를 치게 되네요.(으헉)
긴긴 연재 텀을 가진 점을 부디 양해해 주셔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또 쓰겠죠. 아 내가 싫다(...)


댓글 '7'

Junk

2009.10.31 19:29:50

아니 연재 텀 긴 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는데, 장편 쓰실 생각은 없으신감요? 버져비터님 단편 너무 좋지만... 원래 단편이나 중편 마니아인 저인데 버져비터님 건 끝없이 읽고 싶구먼요. 단편이 깔끔하다 싶으면서 주인공들 계속 만나고 싶은 욕망이...ㅜ_ㅜ

위니

2009.11.01 02:43:15

어머..이게 왠 횡재..!! ㅋ

황연경

2009.11.01 10:43:58

스트레스를 받으시면 글 쓰시는 건가요? 에고...스트레스를 받으시면 건강에는 안좋지만 글은 쓰실거고.. 어찌바래야할지 모쪼록 건필하세요..

plum

2009.11.01 14:05:09

풋풋한 고등학생이 아닌 주인공들을 보는건 정말 오랜만이어요!!!
적군이 어떻게 포획되는지 뒷편 써주시고 장편 시작하면 더 좋을텐데요~ ^^;

다향

2009.11.02 17:15:13

이번엔 꼭 완결까지!!!!!!!!!!!!!!! 아아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요ㅠㅠ 일요길ㅠㅠ

ssuny

2009.11.03 01:03:46

스트레스 해소는 가능하시면 꼭 하셔야 되요 나이 먹을수록 절실히 느낍니다
혹시 작품을 집필 하시는 것이 해소의 한 방법 이시면 저희 애독자들이야 넘 감사할 뿐이고요 ;;;

하늘지기

2009.11.04 16:08:08

나쁜 남자의 전형인가?
까칠한 수세미 남자인가?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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