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너를 이해할 수 없어, 받아들일 수 없어, 한 번만 더 그런다면 이젠 내가 널 떠날 거야, 지워버릴 거야, 내가 널 버릴 거야. 이런 날 비웃겠지, 해보라고 웃겠지, 이젠 내 마음도 널 떠날 수 있단 걸 넌 왜 모르니. 너만 그대로야, 모든 게 다 변해어어. oh, oh.”


 


예석은 3달 만에 음악프로에서 첫 1위를 했던 4애니1의 녹화분을 다시 돌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걸그룹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섹시함 대신 과감한 패션스타일로 소년들보다 소녀들의 마음을 더 끌었고, 그만큼 질리지 않는 스타일이라는 평가였다. 하지만 예석은 무엇보다도 노래를 부르고 있는 애들을 보고 있으면 누구보다도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 양, 공을 보고 있으면 십여 년 전 자신이 가졌던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래서 이렇게 예쁜 것인가. 연습생시절부터 보아온 그들은 그의 여동생보다 더 가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는 아무리 자신의 소속사 사장이라고 해도 얼굴 보기가 힘들 정도로 아이들은 떴다. 그것은 당연히 만족스럽고 기쁜 일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새끼를 둥지에서 내보낸 것처럼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박사라입니다. 열여섯살입니다. 일본어, 영어 할 수 있고, 특기는 랩입니다.’


몇 번이나 보았던 동영상이지만 질리지 않았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얼굴로 환하게 웃는 사라의 모습은 언제 봐도 사랑스러웠다. 그러니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도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사라를 처음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사라가 막 15살이 되던 때였다. 필리핀에서 이미 활동을 하고 있던 사라를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예석이 직접 필리핀으로 발걸음을 했다. 필리핀에서 오래 살았던 그녀는 한국말이 익숙지 않아 더듬더듬 입을 떼었다. 무심코 뱉은 영어 한 마디에 환하게 웃으며 대답을 하는 사라의 밝은 얼굴을 봤을 때,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라를 데뷔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때는 미처 파악할 수도 없던 그의 마음을 자신이 정확히 알게 된 건, 바로 얼마 전 터진 사라의 스캔들 때문이었다.


“또 그러고 있어? 스토커 같잖아. 표정 관리 못 하니?”


“왔구나.”


“너 걔 앞에서도 그렇게 멍 때리니? 안 들키는 게 용하네. 하긴 뭐, 걘 너 듬직한 사장님, 그 이상 그 이하로도 안 보니까.”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의 마음을 후비는 건 남성 듀엣인 비비드를 막고 있는 차예린이었다. 그럼에도 가시가 없이 상쾌한 말투라는 게 더욱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그건 예린의 특기였다. 웃으며 욕하기, 아무렇지 않게 뒤통수 때리기, 남의 감정에 상관없이 제 할 말 다 하기. 그럼에도 그와 그녀가 친구인 건 참 질긴 인연 때문이었다. 그와는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창생이었고, 연예계에 데뷔하고 보니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게 차예린이었다. 좋든 싫든 자꾸 마주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미운 정 고운 정 들어 같이 사업까지 하게 된 거였다. 그래서일까. 그의 감정을 누구보다도 먼저 눈치 챈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보다도 빠르게.


“그래. 맞아. 성운이랑 젠은 영국에 잘 다녀왔어?”


“당연하지.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는 거 아니겠어. 집에 가서 쉬려다가 먼저 보고 좀 하려고 들렀어. 얘기만 하고 난 퇴근할 거야. 그래도 되지?”


붉은 입술로 도도하게 말하며 예린은 손바닥만한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여긴 금연이야.”


“그래서 뭐? 사장이 끊었으니까 나까지 끊으란 얘기야?”


그래서 어쩌라구? 하는 무심한 눈빛으로 소파에 앉으며 그녀는 담배 연기를 길게 뱉어냈다. 차가운 공기 속에 뿌연 연기가 흩어지며 사라져갔다.


“됐어.”


“어차피 이젠 사무실에 잘 오지도 않잖아. 너보다 백배는 바빠졌으니까.”


“일 얘기나 해 봐. 뮤직비디오랑 화보는 잘 찍고 온 거야?”


따박따박 맞는 얘기만 하는 예린이 미워 그는 그녀의 말을 끊고 차갑게 대꾸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너구리소굴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담배연기로 가득했던 게 여기였고, 천식기운이 있는 사라를 위해 담배를 끊은 것도 맞았다. 그리고 이제 바빠진 아이들이 사무실에 들른다 해도 사장실에는 들를까말까한 것도 맞았다. 모두 맞는 말인데도 예석은 기분이 상했다.


“뭐 잘 찍고 왔다면 잘 찍고 왔는데, 요새 성운이랑 젠이 사이가 서먹서먹해서 걱정이야.”


“성운이랑 젠이? 무슨 문제라도 있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연습생시절부터 십년. 이제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인게 성운과 젠이었다.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서로 욕심내지 않고 양보하며, 위로하고 독려해서 지금까지 온 둘이었다. 배가 고프다고 하면 제 살이라도 잘라 먹이려고 할 정도로 친하고 형제같은 그들이었다. 항간에서는 둘이 사귀는 거 아니냐고 우스개를 할 정도로 가까운 게 그들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사장, 태평하네. 뭐긴 뭐겠어. 연애지, 연애. 짜증나는 것들. 수많은 여자들 놔두고 왜 한 여자 때문에 그러느냐고. 정말 이해할 수 없다니까.”


가는 남자 안 막고 오는 남자도 안 막는 ‘쿨’한 여자 차예린은 앞으로 흘러내리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차갑게 냉소했다. 인마, 그건 네가 사랑을 제대로 된 연애를 안 해 봐서야. 혀까지 맴맴 도는 말을 그는 꿀꺽 삼켰다. 해봤자 소용없는 얘기였고, 되돌아올 예린의 비아냥은 머리만 아플 뿐일테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활동 시작해야할텐데, 큰일이네.”


서먹서먹하다니, 찍어왔다는 뮤직비디오부터도 걱정이었다. 아니군. 뮤직비디오를 생각하던 그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오히려 뮤직비디오는 잘 찍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뮤직비디오의 내용도 삼각관계 내용이었던 게 퍼뜩 생각난 터였다.


“사랑 때문에 질질 짜는 것들 최악이야. 왜 지들 감정 못 추슬러서 남들까지 신경 쓰게 하냔 말이야. 안 그래, 사장?”


빨간 입술이 불만을 토로한다. 아무래도 보고를 하려고 왔다는 말은 핑계이고 자신이 받은 스트레스를 그에게 풀려고 하는 느낌이 다분했다. 그는 예린에 제가 해야 할 얘기를 양껏 해야 돌아갈 거라는 걸 직감했다.


“유신씨, 여기 얼음커피 두 잔만요.”


“네, 알겠습니다.”


그는 커피를 부탁한 후 본격적으로 예린의 말을 들어주려 자신의 의자에서 일어나 소파로 향했다. 어쩌면 지금 그는 예린의 수다가 반가운 걸지도 몰랐다. 사라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래서 그녀가 그리울수록 그는 쓸쓸하니까. 마음이 허전하고 외로우니까.


아니다. 누구와 있어도 그 그리움을 희석할 순 없다. 없앨 수는 없다.


“사장님!”


커피를 들고와야 할 유신이 빈 손으로 들어오더니, 침착한 성격답지 않게 흐트러진 음성으로 그를 소리쳐 부른다. 그는 뇌에서 해석하지 못한 음성을 해석하려 애를 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아니 말도 안 된다.


“사라가, 사라가 다쳤대요.”


사라가, 사라가 다치다니. 어떻게 그런.







글을 쓰는 건 참 재미난 작업이지만, 결과물이 재밌을 수만은 없다는 게 슬픈 일 같아요.
그럼에도 하루하루 일기라도 쓰는 기분처럼 써내려가곤 합니다.
언젠가는 마음에 드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고;
너무 더워서 헛소리 좀 하고 갑니다, 흑흑.


댓글 '1'

하늘지기

2009.08.14 09:55:39

크리스가 부딪친 사람이 누굴까 하고 궁금해 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인물 등장이군요.
남주 포스가 나긴 하는데..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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