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처음엔 몰랐다. 어디로 향하는지, 나의 마음이. 그저 작은 동정심, 그리고 약간의 귀찮음. 그것 외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갈래갈래 제멋대로 불던 바람이 마침
내 여기에 다다라 그만 멈추고 말았다.


바로, 이 여자, 크리스티나 크로나비 사라난드.


 


내선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남자의 곧게 뻗은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인상을 펴지도 않은 채 그대로 전화를 집어들었다.


“뭐야.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연결하지 말랬지.”


“사, 사모님이 오셨습니다.”


“뭐?”


“사모님이 오셨다구요.”


사모님? 띠잉. 그는 순간 알아들을 수 없는 제 3의 언어를 들은 것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모님? 누구의. 아. 크리스. 크리스티나 크로나비 사라난드. 무식하게 긴 이름이 머릿속에서 튀어나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습과 함께 검은 얼굴, 검고 큰 눈이 자연스레 연상되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검은 눈은 쉬이 잊히지 않았다.


“들어오라고 해.”


달칵. 문이 열리는 모습이 들려왔다. 예석은 보고 있던 보고서에서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그저 여자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예산규모, 투자율, 투자규모 등의 단어들이 그의 망막을 스쳐 지나간다. 그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아니 들었다가 이내 고개를 돌린다.


문 앞에는 그, 크리스티나가 그 때와 다르지 않은 검고 맑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런가? 과연 저 크리스티나가 2년 전 겁에 질린 푸른 눈을 했던 그 크리스티나란 말인가. 그는 의아스럽다. 그렇군, 벌써 2년이야.


“윤실장님이 오늘, 당신이 제일 한가한 날이라고 했습니다.”


가타부타 들려온 크리스티나의 말투는 이제는 한국사람이라도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된되고 깔끔한 억양이었다. 한국에 온 지 이제 3년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그는 그녀의 그 억양이 새삼스러웠다. 하긴 떨어져 지낸 시간이 더 오래였다. 굵고 검은 머리는 목 뒤로 묶고, 깔끔하게 다듬은 눈썹, 피부톤에 맞게 한 화사한 화장, 제 몸에 딱 맞아 떨어지는 옷은 그녀를 영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2년 전 비 맞은 송아지처럼 떠는, 낡은 옷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후, 다행인가. 그는 핏,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드물게 한가한 날이야.”


“다행입니다. 방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차이를 뭐라고 해야할까. 단지 외국인이어서가 아니라, 무언가 전혀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듯한 결락감. 그런 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본 크리스티나에게선.


“앉지.”


한참만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크리스티나가 낯선 곳에 선 것처럼 문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그저 이쪽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나서였다. 그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그녀는 주춤주춤 걸어와 검은 소파에 앉았다. 그도 그녀와 마주보는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와 이야기를 한다면 이렇게 눈을 마주하고 해야할 거라고 생각했다. 서먹서먹한 어색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가 그를 향해 낙엽빛 봉투를 이 쪽으로 밀었다.


“뭐지?”


“이혼서류입니다.”


“이혼?”


“그렇습니다.


“귀엽게 노는군.”


픽. 다시 한 번 예석의 입술이 하늘로 솟았다. 이게 뭐지? 아니 당연하다고 해야 하나. 여태 이 결혼을 유지하고 있는 게 이상한 일인 건가. 그는 갑작스레 들이밀어진 이혼서류를 보고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 때, 숙였던 고개를 든 크리스티나가 그 검은 눈을 들어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당신 좋아할 줄 알았습니다. 당신, 이제 결혼 합니다. 우리, 이제 이혼합니다.”








흐흐, 단편입니다. 장편 연재는 무리라는 걸 깨달았달까요.
정파 이벤트를 하던 단편을 쓰다가, 연결된 느낌의 다른 글들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정파 이벤트가 첫번째 생각한 거였다면, 이건 세번째쯤 떠올린 거죠. 첫번째는 누군가의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그분의 넋두리를 보고 쓴 거였고, 두번째는 가수 ****을 보고 생각했고, 이건 인터넷 기사를 보고서 떠오른 내용이라죠;;;;
그리고 필리핀 이름은 잘 몰라서; 제가 제 맘대로 지었으니, 이상해도 그냥 패스해주세요!
각설하고, 4편 정도로 짧게 써보겠습니다. ㅎㅎ


댓글 '3'

떠돌이별

2009.07.31 23:42:02

크리스티나는 검은얼굴에 검은눈이라고 하셨는데 2년전엔 푸른눈이었데요 =ㅂ=
무슨 사연이 있는 커플인지 기대됩니다 +_+

위니

2009.08.01 01:23:42

여주인공이 필리핀녀인가요?
필리핀에 제가 한 5년정도 살아서...이름은 미국식이나 스페인식이많아요...에바로즈..제가 기억하는 이름중에 가장이뻣던..ㅋㅋ
남자는 페드로 가 많앗구요..ㅋㅋ
기대됩니다.

하늘지기

2009.08.03 12:50:26

한국인 남주와 외국인 여주..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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