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석은 보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고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황량한 거실엔 그가 기대어 있는 커다란 나무 테이블 외엔 아무 것도 없다. 누가 보면 빈 집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썰렁하다.


연락이 올 곳이 있던가. 자신의 시간이 방해받은 것에 대한 짜증이 깊은 우물 같은 석의 눈에 스쳐지나갔다. 이미 몰입에서 빠져나온 그는 들고 있던 책을 옆으로 밀어두고, 뻑뻑한 눈을 부비적거렸다. 손목의 시계를 보니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자신을 방해할 인간은 하나밖에 없었다.


“뭐야.”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뭐하고 있었어? 또 그 책 읽고 있었냐?”


“시끄럽고 본론만 말해.”


주명의 전화에 본론 따위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스물다섯, 어린 나이에 돌연 결혼을 선언하더니, 지난 해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했던 때처럼 갑자기 돌싱이 되어 나타난 주명은 제가 심심할 때마다 전화해서 그를 괴롭히고는 했다.


“또 그 재미도 없는 연애소설 읽고 있었냐? 책 다 닳겠다. 네 아이큐 정도면 이제 외웠을 법한데. 제목도 그래요. ‘그의 고집’이 뭐냐. 그러니까 안 떴지. 연애소설 제목 정도 되려면 어느 정도 달달해도 모자를 판에. 그게 대체 연애 소설 제목으로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 소리 듣기 지겹다고 했지?”


“더구나 내용도 그래요. 달달하다 못해 토할 정도가 되도 모자를 판에 남자가 죽은 여자를 그리워하다 그렇게 죽어버리는 게 말이 되냐고.”


“너 심심한 거지?”


석은 주명의 정곡을 콕 찌른다. 이미 몇 번이나 들은 말인데도 책을 욕하는 게 기분이 나빴다. 무표정했던 그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냉혈인간이라는 말을 밥 먹듯이 듣는 외과의인 그였지만 이 부분에서는 태연할 수 없었다.


“맞아. 겨울밤은 길고 길지. 내가 황진이처럼 이 밤을 똑 잘라 놓을 수만 있었다면야, 언젠가 만날 님을 위해 남겨두겠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잠은 안 오고 티비에서는 재밌는 것도 안하고, 인터넷 게임은 질릴 대로 했어.”


“그거야 네 사정이지. 난 너와 달리 내일도 출근을 해야 하는 불쌍한 외과의라서 이만 끊어야겠다.”


“잠깐, 잠깐. 그러고 보니 이제 막 너에게 전화한 용건이 생각났어.”


전화기를 내려놓으려던 그의 손이 수화기 너머로 급히 들려오는 주명의 말에 멈칫거렸다.


“내 정신 좀 봐. 그것 때문에 전화했는데 이제야 생각났지 뭐야. 아니면 내가 이 한밤중에 너에게 전화할 일이 뭐가 있겠어? 하하하.”


급조한 티가 나는 웃음에 석은 ‘말해.’ 라고 건조하게 말했다. 갑작스런 피로가 그를 뒤덮었다. 모처럼의 오프였는데도 병원에서 연락이 오는 바람에 몇 시간 전까지도 정신없이 환자들을 보다 온 그였다.


“그 유치한 제목 말이야. ‘그의 고집’ 말이야.”


“그래. 그 얘기 하려면 끊는다고 했지.”


그는 자신이 지은 책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제목 이야기를 할 때면 기분이 불쾌했다. 그래 그의 것이 아니니 그런 거다. 차라리 자신이 지은 제목이었다면 가볍게 무시하고 말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 책은 그가 사랑하는 여자의 책이었다. 이제는 웃으며 ‘조금 웃기긴 해. 그치만 더 어울릴만한 제목은 없단 말야.’ 하고 변명할 그녀는 어디에도 없다.


그는 작은 미소를 띠며 들고 있던 책을 부드러운 손길로 쓸어내렸다. 이제는 때를 타 원래의 핑크색을 잃은 책이 부드럽게 그의 손에 와 닿았다.


“아이구, 성격 하고는. 들어봐. 잠이 확 달아날만한 얘기라구. 아 글쎄 내가 오늘 약속이 있어서 **동에 갔지 뭐야. 우리 귀여운 동이가 만나자고 해서 말이지.”


동이는 주명의 딸이다. 이혼을 하고 아내에게 맡겼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주명의 귀한 딸이었다.


“사설 빼고.”


“은식씨를 봤어.”


“헛소리 마.”


“그래, 그래. 실언했다. 은식씨가 아니라 은식씨를 꼭 닮은 사람을 봤어. 내가 은식씨가 확실히 죽은 모습을 보지만 않았어도 ‘은식씨.’하면서 달려갈 뻔 했다니까. 아니지. 실제로 달려갔지.”


“세상에 비슷한 사람은 많아.”


“그럼, 그렇지. 비록 그 사람이 도플갱어처럼 은식씨를 닮았다고 해도 그럴 수 있는 일이지. 암, 그 정도 우연이야 흔한 거야. 그치만 그게 다가 아니래두.”


“한주명. 네 심심풀이 땅콩으로 은식일 끌어들이지 마.”


“그런 게 아니래두. 진짜야. 들어 봐. 그 은식씨 닮은 여자를 본 게 까페였단 말이지. 동희를 기다리는데 은식씨 닮은 그 여자가 지나가는 거야. 잠깐 고민하다가 잽싸게 따라갔지. 골목 으슥한 곳에 있어서 이런 데 뭐가 있을까 싶더라구. 그런데 깜짝 놀랐지 뭐야. 있더군, 있었어, 까페가.......까페 이름이 ‘그의 고집’이더군.”


주명이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쏟아 부었다. 그리곤 정적. 이쪽의 반응을 기다리는 듯 수화기 저쪽에서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녀의 소설에서도 그런 괴팍한 이름을 가진 까페가 나왔다. 괴팍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네이밍 센스였다. 그걸 알기에 주명도 갑자기 말을 멈춘 거였다.


“그렇군.”


한 템포 느리게 그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래.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속으로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이렇게 심장이 쿵쿵 뛸만한 일이 절대 아니었다. 5천부가 팔려나간 책이니 그 중 한 명이 팬이 됐다고 해서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까페 이름에 갖다 붙였다 해도 이상할 건 전혀 없는 일이다.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잖아.”


그는 자신을 설득하려 입 밖으로 몇 번이고 곱씹어 말했다. 그런 그의 반응을 예상했던 듯 주명의 대답이 바로 튀어나왔다.


“그래. 있을 수 있는 일이야. 하지만 그런 말 있지, 허 석. 우연이 세 번 겹치면 필연이라고. 아직 말하지 않은 한 가지가 더 있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올해는 유난히 눈이 푸졌다. 눈 속으로 주명이 말한 까페가 흐릿하게 보였다. 진짜일까. 주명의 말이 사실일까. 그래 농담이 아니겠지. 목숨이 아홉 개인 고양이가 아닌 이상 그에게 은식의 이야기로 장난을 칠 친구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쉬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이야기를 들은 게 겨울의 초엽이었다면 어느 새 이제는 추위가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오빠. 뭘 그렇게 망설여. 오빤 너무 생각이 많다니까. 그렇게 여러 생각이 들 땐 일단 지르고 보는 거야.’


충동적이고 장난스러웠던 은식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눈앞에 그녀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은식은 고아였다. 더구나 10살 때까지의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10살 어느 고아원 앞에 버려진 채 쓰러진 그녀를 본 고아원 원장이 그녀를 깨웠을 때가 그녀의 태초의 기억이 되고 말았다. 그녀의 주머니에 ‘열 살. 오은식.’ 이란 쪽지가 써져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열 살의 고아 오은식이 되었다. 그렇게 정확하지 않은 정보로 인해 그녀는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평생을 쫓아다닐 꼬리표가 결정되었다.


그가 그런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패스트푸드점이었다. 그녀는 열아홉 살의 아르바이트생이었고 그는 쌓이는 공부에 지칠 대로 지친 의대생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문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녀가 내뱉은 말은 다른 알바생과 전혀 다를 것 없는 멘트였다. 하지만 고른 이가 환하게 드러나는 웃음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그녀 인생 전반에 드리고 있는 삶의 굴곡과는 상관없이 더할 나위 없이 환한 미소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그 순간 반하고 말았다. 그게 그와 그녀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없다. 어디에도 없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는 다시금 밀려드는 절망에 이를 악물었다. 밀려드는 절망 속에 시간을 잘도 흘러갔다. ‘오빤 살아야 해. 살 수 있는 끝의 끝까지 살아줘.’ 그녀의 유언이 아니었다면 절망의 깊은 계곡에서 허우적대던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주명이 헛소리를 지껄인 게 아니라면 그는 이제 은식의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 저 까페 안에 은식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사람이 있다. 25년이라는 시간, 아니 그녀가 기억하는 15년의 세월 동안 그녀는 세상에 홀로라는 사실에 대해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언제나 명랑하고 활기찬 그녀였지만 팔짱을 낀 모녀를 보거나 다정한 가족들을 볼 때면 어쩔 수 없이 쓸쓸한 얼굴이 되고는 했다. 그런데, 그녀가 고아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그녀의 쌍둥이 동생이 그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이제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사람을 말이다.


따랑. 출입을 알리는 명랑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그는 듣지 못했다. 까페는 평범했다. 아기자기한 장식들이 가득한 여성스러운 분위기였다. 그래서 어두운 색의 양복을 입고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는 물위에 뜬 기름처럼 그곳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마치 너무 단 음식을 가득 입에 넣은 사람처럼 마뜩찮은 표정으로 가장 가까운 테이블로 자리를 잡았다. 그 앞에 메뉴판이 놓여진다.


Heathcliff's obstinacy 히드클리프의 고집


순간 그의 손이 멈칫, 했다. 분명 입구의 오래된 나무 간판에는 his obstinacy라고 적혀 있었다. 그가, 소설 속의 그가 ‘폭풍의 언덕’의 히드클리프를 모티브 했다는 건, 사실은 그가 히드클리프였다는 건 그와 그녀 밖에 아무도 몰랐다. 그 때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주문하시겠어요?”


은식의 음성이었다. 그녀다. 은식의 쌍둥이 동생일터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확인했다. 순간 울컥이는 마음에 그는 고개를 숙였다.


한 해가 갈 때마다, 그래서 그녀가 떠난 봄이 지날 때마다 그는 생각했다. 한 해가 갈 때마다 그와 함께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지금 눈앞의 그녀는 그가 생각한 그 모습 그대로였다. 13년 전의 그녀가 물에 헹군 오이처럼 생생했던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차분한 국화꽃처럼 성숙한 모습이다.


“흠흠. 커피 주십시오.”


그는 그녀의 동생이 맞냐고 금방이라도 묻고 싶은 마음을 접고 일단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는 금방 도착했다.


“저기.”


충동적인 그의 말에 그녀가 몸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불쑥 말을 내뱉고서 후회했다. 말을 걸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그녀를 보고 커피를 마시고 나갈 생각이었다.


“무슨 불편한 거라도 있으세요?”


그녀가 웃음과 함께 말을 건넸을 때 그녀의 볼에 깊은 볼우물이 나타났다.


“까페 이름이 특이한데,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겁니까?”


“글쎄요.”


여자는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말끝을 흐렸다.


“그의 고집이란 책이 있었죠. 13년 전에. 혹시 아십니까?”


여자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잠깐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는 곧 커피 한 잔과 너무나 익숙한 책을 들고 나타났다. 그렇게 여자의 말은 시작되었다. 책은 자신의 쌍둥이 언니가 지은 책으로 언니는 자신들이 8살 되던 해에 헤어졌다고 했다. 엄마, 아빠, 언니, 그리고 자신이 놀이공원에 갔다가 잃어버렸다고 했다. 십여년의 세월 동안 가족들은 언니를 잊지 못하고 찾아 헤매다 겨우 그녀를 찾은 게 12년 전이라고 했다.


“이게 언니가 남긴 유일한 책이에요. 언니가 책을 냈다는 걸 알게 된 후엔 이미 절판 되었고, 이 책은 헌 책방을 전전하다 찾은 책이에요.”


슬픔이 별처럼 빛나는 그녀의 눈을 보다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빛바랜 분홍색 책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아무런 경계 없이 그 책을 건넸다.


“왜 죽었습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그는 질문을 건넸다. 그 질문에 그녀의 눈에서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살이었어요. 재생불량성 빈혈이었대요. 몇 년만 빨리 만났다면, 조금만 일찍 언니를 찾았다면 언니는 살 수 있었을 거예요.”


덜커덕. 그는 들고 있던 분홍색 책이 테이블위로 위태롭게 떨어졌다. 그리고는 이내 테이블을 벗어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책과 함께 한 장의 종이가 팔랑이며 떨어졌다.


‘말도 안 돼.’


 


남자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언제나처럼 익숙한 병원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사망선고를 받은 암환자의 보호자처럼 차가운 플라스틱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다. 하얀 가운만 아니었다면 누군가 와서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을지도 몰랐다.


그는 의사다. 사람을 살리는 의사이다. 하지만 살리지 못했다, 그의 생에 가장 중요한 사람은 살리지 못했다. 몇 날 며칠 그는 그 생각에 괴로웠다. 후우. 그는 긴 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허석. 왜 그리 넋을 잃고 있는 거야.”


은식의 음성이었다. 밝은 음성에 환한 미소를 드리고 있는 그녀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은식아.”


“선생님. 저예요. 정간호사.”


“아아. 미안해요.”


그는 이제 어디에도 없는 그녀를 자꾸만 찾는 자신이 바보 같아 고개를 흔들며 자신을 부르는 정간호사를 뒤로 하고 뒤돌아섰다.


그후로도 그는 자꾸만 나타는 은식의 환영을 보았다. 병원을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횡단보도라거나, 무언가 사러 들른 마트의 에스컬레이터에서, 아파트에서 먼저 올라가버린 엘리베이터 문틈 사이에서. 그는 그때마다 지치지도 않고 환영을 쫓았다. 진짜 은식이 다시 살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환영들이 너무 선명했다. 그런 선명함에도 그가 정신 없이 다가갈 때마다 환영들은 다른 모습이 되어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다. 거리엔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행인들로 가득하다. 몇 층인지 셀 수도 없이 높은 아파트의 한 창문이 날씨에 맞지 않게 열려 있다. 투명한 유리창에는 거실에서 혼자 떠들고 있는 12시 뉴스 화면이 흔들리고 있다.


“마지막 추위가 기승입니다. 오늘은 올 해 가장 추운 하루가 될 예정입니다. 모두 두꺼운 코트와 목도리, 장갑 꼭 챙기길 바랍니다.”


기상 캐스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 황량한 거실에 걸린 커튼 자락이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펄럭이는 커튼자락 아래, 한 남자가 누워있다. 천천히 남자의 체온이 낮아지고 있다. 남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미 얼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아니다. 갑자기 남자의 눈이 떠진다.


‘오빠.’


어디선가 은식, 아니 진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창문 너머 그녀가 웃는 모습이 비치고 있다. 차갑게 굳은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차갑게, 아주 차갑게 남자의 미소가 식어갔다.


그 옆으로 한 장의 종이가 바람에 밀려 창밖으로 휘날렸다.


 


사랑하는 오빠. 석이 오빠. 이제는 석이버섯이라는 유치한 장난을 해도 인상 쓰지 않을 정도로 나이를 먹었겠지? 설마 지금도 인상 쓰는 건 아니지? 알고 있어. 그렇게 바라고 있어. 나는 오빠가 나라는 인생의 작은 걸림돌에 다치지 않고 무사히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당연하지. 그런 일에 오빠가 흔들렸을 리 없어.


수많은 결핍 속에서도 난 내 인생이 좋았어. 진부하고 또 진부한 말이지만 오빠를 만났으니까. 오빠를 사랑하고 사랑하니까. 오빠를 만나서 나도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란 걸 알게 됐으니까. 오빠와 함께 평생을 꿈꿀 수 있었으니까.


언젠가 물었지. 신이 있다면 무얼 빌고 싶냐고. 그 때 내가 바란 건 단 하나야. 오빠와 함께 생의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것. 단 하나였지. 그 때 그 얘길 오빠에게 말하지 않았던 건 그 소원은 신에게 바라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건 내 힘으로 온전히 이루어내고 싶은 단 하나였으니까.


그런데 정말 신은 심술쟁이야. 내 유일한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어.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 도 기억해낼 수 없던 10년이란 시간처럼, 난 오빠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함께 할 수 없어. 난 이제 죽어. 그게 심술쟁이 신이 안배한 내 인생의 마지막 함정이었어.


난 내가 적어도 60년은 아니 적어도 50년은 살 거라고 생각했어. 내 삶이 스물다섯, 아니 이제 6개월이 남았으니 스물여섯에서 끝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어. 당연하잖아. 평균연령이 70을 육박하고 있는 세상이니까. 나도 그 정도는 살 거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잖아. 그러니까, 난 그러지 않을 거야. 신이 준비한 마지막 삶은 내가 거절할 거야. 안타까운 건 어떤 선택도 오빠에게 줄 상처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게 슬플 뿐이야.


미안해. 죽을 때까지, 아니 그 후에도 영원히 미안할 거야. 미안하고 또 미안해.


오빠는 제발 살아줘. 오빠에게 주어진 마지막의 마지막 한 순간까지 살아주길 바라.






예전에 썼던 짧은 글인데, 모처럼만에 파일을 찾게되어 올려봅니다.


댓글 '1'

Junk

2009.05.27 21:17:48

헉... 이거 지금서 봤는데... ㅜ_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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