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발갛게 물들인 볼을 하고 수줍게 사랑하는 사람이 준 거라던 서예은은 진행 중이냐는 자신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거렸었다. 거기까지는 참고 견딜 수 있었다. 어차피 조만간 자신은 결혼을 할 예정이니까 그 순간 느낀 감정 따위야 모르는 척 눈 감아 버릴 심산이었다. 하지만 피팅룸에서 지은영이 브이넥의 스커트 부분에 세로로 길고 섬세하게 주름이 잡힌 레이스 드레스를 입고 나왔을 때,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마음에 드느냐 물었을 때 지은영에게서 서예은을 발견한 순간 연준은 더는 참을 수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탓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려주고 힐끗 시계를 본 연준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가봐야 한다는 말로 양해를 구하고 결국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물론 급한 일은 없었다. 그저 핑계였을 뿐이다. 연준은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결재해야 할 서류를 펼쳐놓았지만 일이 손에 잡힐 리 만무했다.


차민재라던, 그 놈일까?
생각은 온통 그 쪽으로 쏠려있었다. 연준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문득 현성의 회사 직원들과 조인으로 회식을 하던 날 서예은을 보호해주던 차민재가 떠올랐다. 그러자 그 놈이라면 괜찮은 조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무에게도 넘겨주기 싫다는 소유욕이 강하게 일었다. 지은영을 두고 그러면 안 되지 않느냐는 생각 따위 엿이나 먹으라지. 적어도 생각은 자유니까. 아니 아직 식장에 들어선 건 아니니까 결혼 따위 물러버리고, 책임은 개나 주라지.


사무실에 돌아온 지 30분 만에 연준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어차피 자리를 비울 생각으로 급한 일들은 다 처리를 한 상태였다. 꼭 해야 하는 결혼은 아니었다.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이 마지막 기회일 수 있었다. 생각은 연준을 본가가 있는 연희동으로 향하게 했다.


“어쩐 일이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들려오는 해랑의 목소리는 꽤 날카로웠다. 예식에 입을 옷을 고르러 간다는 걸 빤히 알고 있는 아이니까 드레스 숍에 있어야 할 연준이 혼자서 느닷없이 본가로 쳐들어왔으니 의아하긴 할 터였다.


“어머니는?”


연준은 해랑의 물음은 못 들은 척 지워버렸다.


“서재에.”


해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준은 서재로 걸음을 돌려버렸다. 그리고 성큼 성큼 큰 걸음 몇 걸음만으로 서재 앞에 도달했다. 크게 한 번 숨을 내쉰 연준은 불끈 쥔 주먹으로 두 번 노크를 한 뒤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빨간 테 안경 너머로 문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던 모친 박성주 여사가 연준의 시야에 잡혔다.


“지금쯤 은영이랑 숍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니?”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바라 본 박 여사가 부드럽게 물어온 말은 질책이었다. 연준은 못 들은 척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리던 박 여사도 결국 연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은영이는?”
“드릴 말씀 있어서 왔습니다.”


쉽지 않은 이야기라 그런지 연준의 입에서 나오는 말투도 평소와 다르게 딱딱했다. 그 차이를 읽어낸 박 여사의 안색이 금세 어두워졌다.


“뜸들이지 말고.”


본론만 이야기 하라는 말이었다. 박 여사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내며 연준이 마음을 굳혔다.


“이 결혼……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느닷없는 선언에 기함을 해야 할 박 여사는 그저 눈썹만 찌푸릴 뿐이었다.


“결혼 직전이 되면 남자건 여자건 변덕이 생기기 마련이지. 네 말은 안 들은 걸로 하마.”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선 박 여사가 한 말은 그 것이었다. 그의 모친은 시선까지 돌려버렸다. 철저한 외면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연준이 소파에 좀 더 몸을 깊게 파묻었다. 사실 늘 그래왔던 분이니까 특별할 것도 없었고 외려 예상했던 반응이기도 했다. 철저하게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들으시는 분, 당신의 선택은 끝까지 관철시키시는 분, 그분이 바로 그의 모친이었다. 누굴 탓 할 수도 없었다. 거스름 없이 그녀가 하자는 대로 대부분 따랐던 자신도 아버지를 도와 박 여사를 그렇게 만드는 데 분명 일조했을 테니까.


“어머니.”


연준은 고집스럽게 모친을 바라보았다. 그의 부름에 서재를 나서려던 그의 모친이 걸음을 멈췄지만, 잠시였을 뿐이었다.


“진행하시면 망신만 당하실 겁니다.”


서재 문손잡이를 돌리던 박 여사의 손길이 연준의 말에 멈췄다. 크게 한 숨을 내쉰 박 여사가 다시 몸을 돌렸다. 이연준이 투정부리듯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님을 그의 모친이 정확히 인지한 것이다.


“이 결혼…… 해야 해.”
“할 수 없게 됐습니다.”


박 여사의 어조도 이연준의 어조도 단호했다.


“이유는?”
“지은영이 보이지 않습니다.”
“너희…… 어차피 사랑해서 하는 결혼 아니잖아.”


그러니까 상관없다는 박 여사의 말에 연준의 미간이 잠시 찌푸려졌다. 박 여사는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나가기라도 할 듯 여전히 문 앞에 선 채였다.


“그게 잘못된 선택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너무 늦었어.”
“아뇨,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이 결혼 없던 일로 해주십시오.”
“곧 네 아버지 총선이야. 은영이네 심기 불편하게 하면 네 아버지 힘들어져.”
“내년 총선 후 이혼해라?”


연준이 슬쩍 박 여사를 떠봤다. 잔뜩 굳은 얼굴로 불편하다는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한참을 못마땅하게 연준을 쳐다보던 박 여사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건 그 때가서 네 맘대로 해.”
“그럼 그 다음 총선 때, 아버지께 불이익 없습니까?”
“그 때 되면 다른 방법이 생기겠지.”
“그러면 이번에도 뭔가 다른 방법이 생기실 겁니다.”


피식 웃으며 연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가 나 누르락붉으락해진 얼굴로 박 여사가 문 앞에 버티고 서서 나가려는 연준을 막았다.


“너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우아했던 박 여사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잘못된 건 바로 잡아야 하니까…….”
“내가 널 모르니? 진짜 이유를 대, 너 이렇게 막무가내로 뒤엎는 애 아니잖아. 지금 네가 하겠다는 일이 쉬운 일인 줄 아니? 그저 단순하게 잘못된 선택이라는 걸로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여자…… 있습니다.”
“뭐라고?”
“여자가 있다고…….”
“미친 놈. 결혼식 코앞에 두고 다른 여자 때문에 엎겠다고? 절대 안 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저는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화를 내는 박 여사를 뒤로하고 연준이 서재를 나섰다. 문 밖에서 내내 몰래 들었는지 눈이 동그래진 해랑이 졸졸 쫓아왔지만 연준은 그저 ‘간다.’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대문을 나서자마자 연준은 목을 죄고 있던 타이를 잡아끌었다. 통보는 하고 왔지만 그저 자신만의 일방적인 견해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여자가 있다는 말을 한 게 너무 성급했던 건 아닌지 잠시 마음을 이지럽혔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상황은 점점 복잡해져갔고, 풀릴 실마리는 눈에 띄지 않았다. 뙤약볕은 너무 따갑다. 서예은, 당신이 문제인 거…… 알아?



“너 지난번에 연준이한테 갔을 때 무슨 이상한 낌새 없었어?”


서재를 나오자마자 다급하게 아스피린을 찾은 박 여사는 물과 함께 아스피린을 두 알이나 집어 삼킨 뒤에야 마음이 진정됐는지 처음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해랑에게 물었다.


“특별한 건 없던데, 왜? 오빠한테 무슨 일 있어?”


서예은을 봤던 건 슬쩍 묻어두고 해랑이 되물었다.


“이 결혼…… 안 하겠대. 여자가 생긴 거 같은데.”
“에이, 설마. 일만 죽어라 하는 데 어느 틈에 여자가 생기겠어.”


해랑은 박 여사를 안심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오빠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말에 자연스레 떠오른 서예은. 설마, 설마 하는 마음이 일었지만 결국 결론은 그녀였다. 이연준도 웃겼다, 결국엔 서예은이면서.


“아니, 네 오빠가 제 입으로 분명 그렇게 말했어. 여자 있다고.”
“그럼 내가 슬쩍 떠볼까? 어떤 여잔지?”
“네가 뭘 알아본다고 그래. 내가 할 거야.”


박 여사가 서예은의 존재를 알게 될까 두려워진 해랑이 조마조마한 마음을 숨긴 채 내건 제안은 무참히 무시당했다. 물론 서예은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희박했다. 집안사람들도 제 집에 드나드는 걸 싫어하는 이연준이 아무 생각 없이 서예은을 집안까지 들어오게 할 리는 없으니까. 긴급 상황이지만, 이 사실을 누구에게 알려야 할 지 해랑은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망할 오빠가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
원래 계획은 4월 완결이었는데 ㅜ.ㅠ
이제 겨우 반썼;;
5월에는 완결했으면 좋겠어요오;;

+
급수정하러 왔는데 그새 읽고 가셨 ㅜ.ㅠ

+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댓글 '12'

mahabi

2009.04.11 12:09:06

기억이 돌아왔으면 차라리 좋았을껄...

12

2009.04.11 12:58:25

어머님이 참...ㄷㄷ 만만치 않으실듯.
점점 손에 땀이 차는데요, 긴장돼요. 담편 어찌될지

위니

2009.04.11 13:46:31

기억이 얼른 돌아와야..어머니을 이겨낼텐데.....
너무 오랜만에 뵌거같아요. ㅎㅎ;

건필하세요 응원합니다.화이팅

ßong

2009.04.11 14:34:23

기다렸어요!!! 어여 오세요!! 화이팅입니다!!!!
역시 원준이놈... 지르는군요..... 기억이나 돌아오라지...흥

버져비터

2009.04.11 15:39:18

5월 완결! +ㅁ+ 누리님 힘내서 달리시는 겁니까!
근데 어머니 무서우세요. 뭐 무서우실 거라 짐작 못한 건 아니지만 예은이 불쌍해지면 저는 그걸 어떻게 봐야 하나요, 흑흑.
민재한테 질투하는 연준이 얄미워요ㅠ 네 업보느니라- 하고 약올리고 싶어졌어요.

니나노

2009.04.11 18:35:05

힘내세요 힘 힘!! ㅎㅎ
너무 재밌어요.ㅎㅎ

떠돌이별

2009.04.11 20:20:37

두근두근하며 읽고있습니다 ^^ 힘내셔요!!

mehee

2009.04.11 23:16:36

연준이 이번에는 예은이를 놓치지 않겠지요.

은새

2009.04.13 10:44:07

또 한번 어머니랑 부딪히는거..아무튼 우리나라는 어미들이 문제입니다..전 제아들 장가가는거 정말 눈감고 있을겁니다..무서버요~~

ssuny

2009.04.13 19:40:40

은새님말에 절대 공감!!!!!!!입니당

기쁨

2009.04.18 11:28:15

리은이랑 연준이랑 예은이 보고 싶다..................흑

하늘지기

2009.07.15 17:10:30

5월에 완결하셔야 할 누리님은 어디 계세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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