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6.


빨간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해도 좋을 3층짜리 집은 그 뒤에 위치한 낮은 산을 완벽히 가리고 있었다. 예은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집을 마주보고 서 있었다. 맑고 푸른 하늘과 빨간 벽돌의 집과 그 뒤의 짙은 녹음이 어우러진 모습이 한 폭의 풍경화를 닮아 있었다. 서울 중심가에 위치한 아파트들은 지은영에게 혼자 시간 날 때 천천히 둘러보라고 부동산 연락처를 넘겨줄 예정이었다. 지금 서 있는 이 집도 사실 지은영에게 부동산 연락처만 알려주고 둘러보라고 해도 되는 것이었지만 이 집을 보고 난 뒤 이연준이 보여줄 반응이 보고 싶어 직접 안내를 하기로 한 참이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십 여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예은은 시선을 정원 쪽으로 돌렸다. 통나무 울타리 안쪽의 넓은 정원에는 파릇한 잔디가 깔려있었고 듬성듬성 심은 정원수 주변에는 빨갛고 노랗고 하얀 색색의 꽃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한 쪽 구석에는 나무로 만든 그네의자가 세워져 있었고 그 곁에는 하얀 티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었다. 정원은 아이들 셋이 뛰어놀기에 충분히 넓었다.


예은은 그네의자에 앉았다. 살짝 발을 구르니 바람이 살랑 일었다. 그 바람에 잔머리 몇 가닥이 얼굴을 간질인다. 흔들리는 그네에 몸을 맡긴 채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데, 옆자리에 어느새 리은이 까르르 웃으며 앉아있었다. 시선을 돌린 티 테이블에는 이쪽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이연준이 있었고. 순간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예은은 그것이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걸 이내 깨닫고는 메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억지로 이연준 옆에 지은영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포기했다. 그들의 아이들을 그리려고 했지만 그려지지 않았다.


뭐니, 이건. 투덜거리며 예은이 도로 그네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틀, 그네가 움찔했다. 너도 놀랐구나, 미안. 속으로 중얼거리며 예은이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혔다.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워왔다. 어느새 하얀 뭉게구름이 슬금슬금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바다로 치자면 하얀 요트라고 생각하며 구름이 흘러가는 대로 시선을 옮기는데, 근처에서 시동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딱, 예은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차에서 내리는 이연준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은회색 차체에 내리쬔 햇살이 눈부셔 예은은 시선을 이연준에게로 고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지은영이 생각났다. 예은을 발견한 이연준이 가까이 다가오는 동안에도 지은영은 내리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던 예은이 연준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신부님은 요?”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해서 혼자 왔습니다.”


맑게 미소 짓는 얼굴로 그는 버석버석하게 들리는 말을 잘도 내뱉었다. 그러더니 뭔가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떴고 다음 순간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잠시 찌푸렸다. 그리고 잠시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에서도 예은은 그만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껴버렸다.


“이 쪽으로 오세요.”


얼굴이 화끈거린다는 느낌은 그저 느낌일 뿐 실제가 아니라고 치부하며 애써 담담한 척 예은이 고개를 끄덕거려 알겠다는 표현을 하고는 현관문을 향해 앞장섰다.


“부동산에서는 사람이 안 나왔습니까?”
“네, 그냥 보고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현관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올라선 예은이 디지털 도어록의 번호커버를 열고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커버를 다시 덮는 순간 기계음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요즘 세상에 무슨 일 날 줄 알고 그런답니까?”


냉담한 연준의 말에 예은이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뭐, 보다시피 텅 비어서 가져갈 건 아무 것도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죠.”


매끄럽게 대답하며 예은이 안으로 들어섰다. 닫혀있는 미닫이문은 현관과 거실을 분리시켜 놓고 있었다. 예은이 미닫이문을 열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연준을 쳐다봤다. 의아한 시선으로 예은을 마주보던 그는 금세 먼저 들어가라는 예은의 뜻을 읽어내고는 착실하게 이행했다. 오크무늬결의 원목마루로 된 거실 바닥에 연준의 신발이 닿았다. 텅 빈 공간이라 그의 발소리가 꽤 크게 울렸다. 예은은 연준이 거실의 통유리를 통해 창밖을 쳐다보는 모습을 보고 주방으로 들어섰다. 화이트 색상의 싱크대와 수납장은 ㄱ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개수대로 다가간 예은은 수도 레버를 올렸다. 차가운 물이 금세 콸콸 쏟아지며 개수대에 물방울을 튕겨냈다. 슬그머니 한 손을 들이밀었다. 금세 물에 젖으며 손이 차가워졌다. 예은은 나머지 한 손도 들이밀었다. 손이 시리다는 느낌이 들 때쯤 레버를 내렸다. 물은 언제 그랬냐는 듯 뚝 멈췄다.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물에 젖은 손을 닦아냈다. 그래도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예은은 손수건을 도로 가방에 아무렇게나 넣은 뒤 차가운 두 손을 뺨에 대고 꾸욱 눌렀다. 화끈거림이 점차 가라앉았다. 심장의 두근거림도 진정되는 것 같다.


이제 됐다 싶어 손을 내리는데 가방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예은은 가방을 뒤적거려 휴대폰을 찾아 손에 쥐었다. 액정에 ‘지은영’이라는 세 글자가 선명히 찍혔다.


“네, 고객님.”


예은이 밝은 목소리를 냈다.


-오늘 약속 취소해야겠어요. 그이가 갑자기 약속 생겼다고 하는 바람에 못 갈 거 같거든요.


‘용건만 간단히’라는 문구를 성실히 수행한 지은영의 거만한 말을 듣던 예은의 미간이 좁아졌다.


“네?”
-다음에 다시 날짜 잡자고요.
“아, 알겠습니다.”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지은영의 말에 ‘고객님의 그이는 여기계신데요.’라는 말을 예은이 그만 꿀꺽 삼켜버렸고, 전화는 끊는다는 말도 없이 뚝, 끊겨버렸다. 다시 메인화면으로 돌아온 휴대폰의 통화버튼을 예은이 눌렀다. 지은영과의 통화가…… 맞다.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하며 지은영과의 통화시간을 확인했다. 방금 통화한 것도…… 맞다. 그렇다는 말은 이연준이 지은영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건데…….


생각에 살짝 얼굴을 찌푸렸던 예은은 순간 멈칫했다. 잠실역에서 우연히 만나 어린이공원에 같이 갔던 일, 서초동에서 마주쳤을 때 밥 사달라고 했던 일, 그래놓고 밥 한 끼 빚졌다며 다음에는 자신이 사겠다고 했던 일, 업무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지은영이 싫다고 했던 집을 보여줬던 일, 가겠다는 자신을 청담역에서 세워주겠다 하고는 회사 앞까지 바래다줬던 일이 한꺼번에 해일처럼 밀려왔다. 멍청한 서예은. 이연준은 그렇게 자신을 표현한 것이었다. ‘너에게 끌리고 있어.’라고. 그게 아니라면 이연준이 그렇게 시간을 할애할 리 없다. 자기 것 외에는 무심한 이연준이었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예은은 헛헛한 웃음을 지으며 다급히 연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중 출퇴근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그녀지만 주말 출퇴근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자가용을 끌고 다니니까 분명 오늘도 차를 끌고 출근을 했을 터였다. 몇 번의 신호음 끝, 연지가 전화를 받았다. ‘내 컴퓨터 켜서 바탕화면에 갈매기 폴더 열면 주소라는 텍스트파일 있거든. 거기 적힌 주소로 아무 말 말고 당장 와.’ 제 할 말만 후두두 쏟아낸 예은이 연지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이연준이 지은영에게 거짓말을 하고 온 이유는……. 생각하던 예은은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하지 말자,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다시 거실에 들어서던 예은이 우뚝 멈춰 섰다. 처음 발을 내디딘 그 자세 그대로 연준이 못 박힌 듯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은 통유리 너머 정원을 향하고 있었다. 예은은 통유리 너머 정원에 뭔가 있을까싶어 슬쩍 그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푸른 잔디밭 위 하얀 티 테이블과 나무로 만든 그네의자만이 들어올 뿐 특별한 건 없었다.


“안 둘러보세요?”


예은의 말에 그가 고개만 돌렸다. 허공에서 부딪힌 시선을 먼저 피한 건, 의외로 그였다.


“봐야죠.”


건조한 음성으로 말한 그가 주 침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계적인 동작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연준은 무감각한 시선으로 넓은 침실을 휙 둘러보고는 안쪽에 위치한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붙박이장들은 열어보지도 않고 욕실로 들어가더니 금세 나왔다. 그렇게 2층에 위치한 방 두 개를 보고 3층으로 올라가는 연준의 뒤를 못마땅한 표정의 예은이 따랐다.


3층은 탁 트인 공간이었다. 그리고 두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정면에 위치한 통유리 너머로 정원이 보이고 그 너머 햇빛에 반짝거리는 저수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후면의 통유리 너머에는 나지막한 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풍경을 뿌듯하게 바라보는 예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좋아하는 그의 모습이 보고 싶어 예은이 시선을 돌렸다. 정면의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어느 지점을 아득하게 바라보는 연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좋아하는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찌푸린 얼굴로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생각을 예은이 툭 입 밖으로 토해냈다.


“……글쎄요.”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꺼낸 말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좋다는 것도 싫다는 것도 아닌 말. 대답하기 애매한 질문을 던졌을 때 하기 딱 좋은 말. 하지만 애쓴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에는 충분한 말.


“다 보셨으면 그만 가시죠?”


섭섭한 마음에 예은의 말끝에 날이 섰다.


“회사로 가실 겁니까?”


계단을 내려서며 연준이 지나치듯 물어왔다.


“……아니오.”


대답을 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었다가 2층을 지나치며 예은이 거짓말을 하였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을 뿐.


“그럼 어디 갈 거예요?”


또 한 번 지나치듯 물어오는 질문이지만 거기엔 집요함이 있었다.


“별로 말씀드리고 싶지 않은데요.”


예은이 삐딱한 대답을 던지며 1층으로 내려왔다.


“가는 데까지 데려다 줄게요.”


미닫이문을 열어 예은이 먼저 나갈 수 있도록 한 옆으로 비켜서며 연준이 말했다. 예은의 뒤를 따라 나오며 조용히 미닫이문을 닫는 연준을 보며 예은은 그의 말을 곱씹어봤다. 간절함이 묻어나오는 말투라고 결론을 내리며 예은이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그를 쳐다보며 문을 활짝 열고 한 옆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말하였다.


“싫은데요.”
“뭐, 그러던지.”


예은의 말 속에 섞인 장난기는 읽어내지 못한 모양인 지 연준이 쉽게 포기했다. 거절은 분명 자신이 했는데 왠지 거절을 당한 것 같은 기분에 얼굴에 인상을 그으며 예은이 그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거침없이 자신이 주차한 차를 향해 걷는 연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연준을 부르려던 예은이 입을 다물었다. 차체에 비스듬히 기대서있던 차민재가 몸을 바로세우는 모습이 연준의 모습을 대신해 시야를 채웠다. 차민재가 왜? 의아해하는 데,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이연준이 사라졌다. 그제야 예은은 주방에서 연지에게 전화를 걸었던 걸 기억해냈다. 문득 여우 굴을 피하려다 호랑이 굴에 뛰어든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
앙큼한 연준 씨?-_-a


댓글 '8'

판당고

2009.03.10 00:12:58

아... 아쉬워요. 한번 빵 터졌음 했는데. 담에 꼭 충돌을!!!

판당고

2009.03.10 00:17:23

아 그리고 너무 오랜만이라 왠지 죄송해요 ;;;
오랜만에 댓글달면서 염치없지만 And가 너무 보고파요.

사회야

2009.03.10 00:33:51

연준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차민재 포에버!! 골키퍼있다고 골 안들어가는 것 아니니 열심히!!

mehee

2009.03.10 05:48:08

기억을 잃은 못된 그임에도 불구하고 예은의 짝은 다시 연준이였으면 하네요.

은새

2009.03.10 10:06:20

연준이 왜 골났는지..다시 읽어봐야겠네요..^^

2009.03.10 16:07:41

차민재 포에버!! 를 외쳤었는데 분명 예전엔 ..... ㅠ.ㅠ
지금 막 보고 어? 차민재가 누구였드라? 이랬던거 있죠 ...촴, 나도 .... ☞☜

ßong

2009.03.10 21:22:14

연준이 봤군요. 쳇, 기억도 못 하는 주제에 삐치기는.....아주 얄미운 짓만 하는 연준씨...ㅉㅉㅉ

하늘지기

2009.07.15 16:27:10

뽀에버 차민재..
완소남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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