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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다짐하고 선을 그었지만, 서예은을 다시 보는 순간 그런 건 소용이 없었다. 집을 보러 왔다는 예은의 말에 이사 오려는 거냐는 멍청한 질문을 하질 않나, 덥다던 예은에게 ‘아직 그렇게 안 덥죠?’라는 바보 같은 소리까지. 그건 모두 ‘서예은효과’였다. 서예은 앞에만 서면 머릿속이 텅 비어버려서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그래서 예은에게 밥 사달라고 조르고, 얻어먹은 뒤에는 밥 한 끼 빚졌으니 다음에 갚겠다고 억지를 썼다. 그리고 지금은 어차피 봐야 할 집이면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보라며 부득불 우겨서 예은을 데리고 오기까지 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이건 자신으로써도 어쩔 수 없는 일에 속한다. 말하자면 천재지변과도 같다고나 할까. 연준은 쓴웃음을 머금은 채 커피메이커에 물을 채웠다. 서예은의 팔목을 잡았던 오른손에 물이 묻을까 조심해가며. 그런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어이없어 잠시 황당해하기도 했다.
예쁜 잔에 커피를 담아 쟁반에 받쳐 든 연준이 거실로 향했다. 소파에는 예은의 가방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서예은이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에 연준을 잠시 아찔하게 했다. 조심히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연준은 집안 어딘가를 기웃거리고 있을 예은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이연준이 서예은을 발견한 곳은 서재였다. 책장에 기대선 채 연준이 건축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했던 책을 천천히 손가락으로 꼭꼭 짚어가며 읽어 내리는 예은의 눈길이 꽤 아련해 선뜻 예은을 부르지 못했다. 문틀에 기대어 예은을 바라보는 데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예은이 고개를 들었다. 연준의 시선과 예은의 시선이 허공에서 정확히 마주쳤다. 피하듯 시선을 먼저 돌린 건 예은이었다. 책을 덮고 빼낸 자리에 그대로 책을 꽂는 예은을 향해 연준이 걸음을 옮겼다. 잠시였지만 연준은 똑똑히 봤다. 금방이라도 울 듯 습기 가득한 슬픔. 왜? 대체 왜? 무엇 때문에 당신은 그런 눈길로 날 보는 거야?
“허락 없이 봐서 미안해요.”
예은이 활짝 웃는다. 연준의 얼굴이 잠깐 이지러졌다.
“울지……말아요.”
허리를 굽혀 예은의 시선을 사로잡은 채 연준이 말하였다. 예은의 눈이 동그래졌다.
“화가 나요. 울 것 같은 얼굴로 활짝 웃고 있는 당신 보면.”
말을 마친 연준이 예은을 품에 안았다. 쏘옥 들어오는 예은을 꼭 안자 허허롭던 가슴이 꽉 차올랐다. 늘 뭔가를 잃어버린 듯 안절부절 했던 마음이 평온해졌다.
“고객님.”
예은이 꼼지락거렸다. 빠져나오려 애를 쓰는 듯 했다. 하지만 연준은 놓아주기 싫었다. 조금 더, 아주 조금만 더 이대로 있고 싶었다.
“이연준.”
“네?”
“내 이름 이연준이에요.”
“알아요.”
“그럼 불러 봐요. 이연준.”
“그럴 수 없습니다, 고객님.”
예은은 여전히 그의 품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연준은 좀 더 힘을 주어 그녀를 안았다.
“부를 때까지.”
“고객님!”
“내 품이 좋은 거구나?”
연준이 예은을 놀렸다.
“이연준.”
어쩔 수 없다는 듯 잇새로 내뱉듯 예은이 연준의 이름을 불렀다.
“NG. 좀 부드럽게.”
“이연준.”
말 잘 듣는 아이 같았다, 서예은은. 생각에 연준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은 놓아주기 싫었다.
“NG. 예의 없게 이름만 달랑 부르면 안 되죠.”
“이연준 고객님.”
“NG. 고객님 빼고.”
“이연준……씨.”
예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NG. 너무 딱딱하고, 마지못해 부른 것 같아요. 좀 친근하게.”
“연준 씨.”
울먹임이 분명했다. 연준은 예은을 품에서 조금 떼어냈다. 순간 또르르, 예은의 눈에서 맑은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연준이 엄지손가락으로 예은의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그리고 살짝 내리깐 그녀의 눈 위에 입술을 꾹 누른 건, 저도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다. 연준은 예은을 다시 꼭 안았다. 예은의 정수리가 턱밑에 닿았다.
“울지 말아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연준은 미안하다는 말은 도로 삼킨 채 예은의 정수리에 입술을 꾹 눌렀다. 작게 떨리는 예은의 몸이, 촉촉이 젖어드는 자신의 셔츠가 아직 서예은이 울고 있음을 알려왔다. 꽉 차올랐던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졌다.
“죄송해요, 갑자기 울어서. 당황하셨죠?”
화장실에 다녀온 예은이 거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연준은 그사이 커피를 새로 내려왔다. 민망한 듯 예은은 멀찌감치 서서 멀뚱히 연준을 쳐다보고 있었다.
“집은 다 둘러본 거예요?”
괜찮다는 말을 중얼거리자마자 연준이 화제를 돌렸다. 왜 울었어요? 물어보면 왠지 예은이 당황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네. 집 좋은데요.”
“근데 천장은 무너질 것 같아요?”
연준의 물음에 무슨 말인지 몰라 예은이 눈을 치떴다.
“천장 무너질까봐 불안해서 거기 그러고 서 있는 거 아니에요? 무너지면 바로 현관으로 달려 나가려고.”
그리고 그 모습만으로도 예은의 어리둥절함을 읽어낸 연준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다지 친절하지만도 않았다. 이쪽으로 오라는 설명은 그 속에 숨겼으니까. 예은은 연준의 말에 아,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말을 제대로 찾아냈다.
“그냥 여기서 신혼살림 차리시지 그랬어요?”
연준은 가까이 다가온 그녀에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을 건넸다. 질문을 던지며 잔을 받아든 예은이 연준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게 또 괜히 연준의 신경을 건드린다.
“여기 싫대요. 꿈자리 뒤숭숭해질까봐.”
그래서 나오는 말이 불퉁해졌다.
“집 좋은데, 왜요?”
“집터가 삼풍백화점 자리잖아요.”
“아.”
예은이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서 꿈자리 뒤숭숭하세요?”
“가끔, 꾸긴 해요. 선혈이 낭자하고,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건물 무너지고 뭐 그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한 연준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예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 살짝 몸서리를 친다.
“무섭지 않으세요?”
“꾸다보니까 적응돼서 이제 괜찮아요.”
연준의 대답에 예은이 뜨악해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연준이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에요, 농담.”
손사래를 치며 웃음기 가득한 말을 내뱉는 연준을 향해 예은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그래도 가끔 꿈자리가 뒤숭숭하긴 해요.”
“진작 말씀해 주시지 그랬어요.”
“뭘요?”
“지은영 고객님이 이 집은 싫다고 했다고.”
“아아. 어차피 볼 거였잖아요.”
“고객님이 싫다고 했으면 안 봤죠. 아직도 봐야 할 집이 몇 군데는 더 있는데.”
예은의 투덜거림에 연준이 그냥 웃고 만다. 문득 연준은 예은에게 당신이랑 좀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랬다고 말을 하면 예은이 어떤 표정을 지을 지 궁금해졌다.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힐까, 아님 장난치지 말라고 화를 낼까. 생각할수록 궁금증은 더해졌지만 연준은 말하지 않았다. 혼자 궁리해보는 재미도 꽤 쏠쏠할 듯해서.
“미처 거기까지 생각을 못했네. 미안해요.”
대신 연준은 예의바르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단정하게 짓는 미소로 예은이 사과를 받아들였다.
“이만 가 볼게요.”
찻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예은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방을 쥐었다. 그런 예은을 따라 연준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데 머릿속은 좀 더 그녀를 붙잡아둘 핑계가 없을까 고민하느라 바빠졌다.
“좀 있으면 저녁인데 저녁까지 먹고 가요.”
하지만 아무리 쥐어짜도 고작 이런 가난한 핑계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니에요, 늦어서 가봐야 해요.”
예은의 거절은 그래서 당연한 것이었다. 잰걸음으로 어느새 현관까지 나선 예은의 뒤를 마지못해 따라가던 연준이 씨익, 웃었다.
“그럼 회사까지 바래다줄게요. 어차피 나도 가는 길이니까.”
마침내 예은이 거절할 수 없는 핑계거리가 하나 생각난 탓이었다.
“그럼 청담역에서 내려주세요, 거기서 버스타면 되니까.”
그리고 당연하게도 예은은 반승낙을 했다. 뭐 태우고 난 뒤에는 운전수 마음이다. 생각에 다시 기분이 좋아진 연준이 낮게 휘파람을 불며 현관문을 열려는 데, 익숙한 기계음이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그리고 눈 앞, 이해랑이 눈에 들어왔다.
“너 웬 일이야?”
“엄마 심부름. 그러는 오빤 이 시간에 집에 웬 일이야?”
해랑이 손에 든 보자기를 들어 보이며 되물어왔다.
“잠깐 들렸어. 다시 나가야 해.”
“그래? 그럼 가 봐. 난 이거만 정리해놓고 갈게.”
해랑이 연준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신의 뒤에 있던 예은을 발견했는지 ‘어머.’라는 지극히 여성스러운 감탄사를 내뱉었다. 슬쩍 쳐다본 해랑이 놀란 표정으로 예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무래도 자신이 집에 여자를 들여 놀란 모양이었다.
“어떻게 되긴. 인사해, 내 결혼 준비 도와주고 계시는 분이야. 현성이 알지? 현성이네 회사 직원, 서예은 씨. 예은 씨, 이쪽은 이해랑이라고 내 동생이에요.”
연준의 소개에 해랑이 의아한 시선으로 연준과 예은을 번갈아 쳐다봤다. 금세 얼굴을 붉힌 예은은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먼저 해랑을 향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하나 웨딩에 서예은이라고 합니다.”
“네, 이해랑이에요.”
해랑이 떨떠름한 인사를 건네며 예은의 손을 잡았다.
“정리해놓고 가. 난 간다.”
연준이 먼저 서둘러 나가는 바람에 그는 보지 못했다. ‘오랜만이에요.’라고 다시 인사를 건네는 해랑을. 그리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먼저 가 볼게요.’라며 자리를 피하는 예은을.
그런데 동생은 알고 있네요. 저는 아예 비밀 연애를 한 줄 알았거든요. 가장 친한 친구들도 모두 모르길래.
하누리님. 급물살을 타네요. 전혀 안늘어지니까 너무 고민마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