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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도피는 안 좋은 버릇이에요.”
병원으로 엄청난 양의 히솝 차를 들고 문병 온 시원이 툭 내뱉었다.
“미안해.”
“미안한건 알고 계세요?”
높임말만 아니라면, 꼭 누나한테 야단맞는 동생의 모습이다. 실제 나이로는 다섯 살이나 더 많은 셰리였지만 시원의 이런 모습엔 한없이 약해졌다.
“하지만 나도 몰랐으니까.”
“아셨으면 또 해외도피 하시려고 하셨어요?”
뜨끔한 얼굴로 셰리가 이불을 끌어올려 눈만 남긴 채 숨었다. 시원이 보온병에서 차를 한 잔 따랐다.
“불면증에 도움이 된대요. 마셔 봐요.”
“가게... 괜찮아?”
“괜찮을 리가 있어요? 셰리가 다 나을 때까지는 임시 휴업 할 생각이니까 일찍 털고 일어나라고요.”
“응. 응.”
“착하네요.”
스스럼없는 태도로 셰리의 부드러운 손을 쓰다듬으며, 시원이 차를 권했다. 셰리가 뜨거운 차를 후후 불기 시작하자 그녀의 생각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정세흔.
갑자기 나타나서 남의 가게를 쑥밭으로 만들어놓은 사람.
조용한 남의 정원에 흙발로 나타나 짓밟았겠다. 내가 가만있을까봐?
“시원. 지금 얼굴 엄청 무서워.”
약간 겁먹은 목소리로 셰리가 말하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걱정 말아요. 셰리를 때리진 않을 테니까.”
“누구 때리려고?”
셰리의 눈이 커졌다. 시원은 손사래를 쳤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무도 안 때려요. 그나저나 얼른 털고 일어나야 해요.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언젠가는 부딪혀야 할 일. 그것을 둘 다 알기에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셰리는 미안한 눈으로 시원을 바라보다 그녀의 차갑고 긴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 알지?”
“네.”
“미안해. 알지?”
시원이 셰리를 내려다보았다.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얼굴. 앳되고 여린 사람. 이런 사람이라서 도망치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겠지.
“알아요.”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라는 거 아주 모르고 이 사람과 얽힌 것도 아니고, 뭐 어쩌겠어. 공주님을 위해서는 기사님이 나서야지.
“몸조리 잘 해요. 일이 해결되기만 해 봐. 페스트리 가짓수를 늘려버릴테니까.”
“헉. 제발.”
연극적으로 머리에 손을 얹는 셰리를 바라보던 시원은 전투 의지를 다졌다. 정세흔 이 나쁜 인간 같으니. 오기만 해 봐. 가만있을까 봐?
그리고 그는 왔다.
“어제는 거짓말을 하셨더군요.”
어제와 옷 색은 다르지만, 딱딱한 정장이긴 매한가지다. ‘임시 휴업’ 팻말이 붙은 가게 앞에서 어지간히도 기다렸는지 얼굴에는 약간 초조한 기운이 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뱉는 말은 한여름의 뱀과 같이 매끄럽고 서늘하다.
“거짓말이라니 무슨 말씀이시죠?”
“몇 년 만에 나타난 형의 일이니만큼, 제 쪽에서도 약간의 조사가 있었습니다. 형님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의 집 주인이시기도 하고, 형님을 고용하고 계신 고용주이기도 하시더군요. 그런데 어제는 왜 정세영이라는 사람을 모른다고 하셨죠?”
“모르는 게, 사실이니까요.”
시원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저희 가게의 고용인은 페스트리 파티셰 하나뿐이에요. 고용한지는 5년이 다 되어가고, 고용 할 때 이름을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잊어버렸죠. 저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다들 그 사람을 ‘셰리’ 라고 부르거든요.”
세흔은 기가막히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셰리?”
“네. 셰리.”
“고용주가 피고용자의 이름도 제대로 모른다니 어불성설이군요. 설마하니 그런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제가 주방을 담당하는 사람한테 원하는 것은 딱 두 가지에요. 맛있는 페스트리와 이유 없이 결근하지 않을 것. 나머지야 어찌 되든 상관없죠.”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지금 병원에서 겁에 질려 떨고 있는 게 셰리만 아니었던들, 그녀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이었다.
“상당한 분이군요.”
빈정거림이 묻어나는 차가운 말에 시원은 슬쩍 미간을 찡그렸다.
“그 셰리라는 분이 저희 형님이 확실한 것 같으니 묻고 싶은데, 지금 형님은 어디 계십니까?”
“알아서 어쩌시려고 그러시죠?”
“아까 주방 담당자에게 원하는 것은 무단결근 하지 않는 것과 맛있는 페스트리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 하실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 됩니다만.”
“결근의 이유가 당신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죠. 저도 놀라고 있는 중이에요. 외출도 잘 하지 않고 지금껏 결근 한 번 한 적 없는 우리 주방의 아이돌이 어째서 결근을 했는지 말이죠. 어제 당신이 가게에 나타난 후부터 결근이 시작됐으니 제가 묻는 건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요?”
한 마디도 안 지는군.
세흔이 인상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게다가 어찌 보면 이 여자의 말이 구구절절 옳다는 것도 문제였다. 지금껏 아무 문제없던 형이 그의 출현과 함께 갑작스럽게 결근을 하기 시작했다면 고용주로서 이유를 알아보려고 하는 건 당연하다.
“형님과는 벌써 10년 넘게 만나지 못했습니다. 지인께 형님을 봤다는 말을 들어서 찾아온 것이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서 형님에 대한 궁금증이 상당해지고 있는 참입니다.”
“그러세요?”
말에 담긴 빈정거림이 눈에 띌 정도다. 세흔은 금방이라도 한 마디 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직원들 사생활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셰리는 지금까지 가족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내가 그 사람 동생입니다. 라고 하면 네. 동생이시군요. 그 분은 어디 있어요. 라고 알려줄 거 같아서 지금 그렇게 말씀하고 계세요? 게다가 셰리는 당신이 온 바로 다음부터 결근을 시작했어요. 아무리 봐도 수상한 풍경 아닌가요?”
“호적 등본이라도 떼어다 보여드려야 할 것 같은 분위기군요.”
세흔도 맞받아 빈정거렸다. 그러자 그녀가 바로 손을 내밀었다.
“어디 보여주시죠.”
강적이군.
세흔이 속으로 혀를 찼다. 만만치 않았다. 물으면 되묻고 설명하면 받아친다. 도대체 어디서 답변을 얻어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형의 행방을 알고 있는 것은 이 여자 정도 뿐이니...
“보여드릴까요?”
팽팽하게 이어지던 가게 앞의 신경전을 끝낸 것은 눈에 졸음이 가득 담긴 채 오피스텔 입구 앞으로 나온 나른한 얼굴의 한 남자였다.
“시원씨. 나 커피...”
“오늘 문 안 열어요.”
졸음이 잠긴 눈을 깜빡여대는 얼굴이 나른하면서도 색스러웠다. 남자가 기지개를 펴며 물었다.
“시원씨 바람피워?”
“아뇨. 불.청.객. 이에요. 셰리 데리러 왔다나봐요.”
싱글싱글 웃으며 시원이 말했다.
“아악. 이 남자 손에 셰리가 끌려가면, 나 아침은 물 건너가는 거야?”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그러니 커피는 나중. 해충 박멸은 지금.”
“아, 그래.”
해충 박멸? 해충 박멸이라 그거지?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저 사람은 단순하게 말하지 않으면 계속 캐묻거든요.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어쨌든 간에 전 사실 확인이 제대로 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말씀드릴 수 없어요.”
생글생글 웃는 모습으로 그렇게 말하니 얄미웠다. 세흔은 뭐라 말 못하고 속으로 이만 갈았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 단순한 고용주 이상의 감정이 묻어 있는 것 같은데요.”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이 카페의 매상 40% 정도는 셰리의 페스트리가 올려주고 있어요. 게다가 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결근한 적도 없는 모범 직원이었어요. 아무 문제없이 4년 넘게 가게에 나오던 가게의 매상 줄이 어느 날 갑자기 일하다 말고 없어진데다가 이유가 지금 내 눈 앞에서 형 내놓으라고 난리를 치는 생전 보도 듣도 못한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당신이라면 어떻겠어요?”
화가 나고 기분이 상하지...
이 여자, 상당한 연기파던지 아니면 지금 자신에게 따따부따 퍼부어대는 것이 진짜라는 이야기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가만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녀 입장도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렇다면 확실하게 이야기가 되면...”
“글쎄요.”
여자가 모호하게 말했다.
“셰리는 제 밥줄이니까 말이죠. 혹시라도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셰리와 이야기를 통해서...”
“지금 뭐라고 하셨죠?”
“혹시라도 셰리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이라고 했는데요.”
“지금 형과 대화도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까?”
“네.”
병실 내에선 통화가 안 되니까 거짓말은 아니지. 게다가 시원은 겁먹고 병원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셰리를 만나러 갈 마음은 없었다. 내일이면 또 어떻게 마음 변할 지 알 수 없었지만.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그녀의 생각대로 움직여주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사라졌다고 한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내 입장에선 나름대로 갑자기긴 하지. 설마 일 잘 하던 주방 담당이 거품 물고 쓰러져서 영업 잠정 중단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그리고 사라진 것도 맞긴 했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고 있다는 게 문제지만.
세흔은 속으로 제기랄을 외쳤다. 이런 식으로 또 뚱하니 사라져 버렸다면 어디서 찾을 수 있을 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겨우 실마리를 잡았나 싶었는데. 겨우.
“혹시 돌아오면...”
“셰리와 의논 후에 생각해 볼게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무슨 사정 때문에 셰리가 집을 나오고 당신이 셰리를 찾아왔는지 전 모르지만, 그게 가게 일에 지장을 준다면 전 최대한 셰리의 의사를 존중할 생각이거든요.”
여자는 달콤하게 말하고 있지만, 가시가 톡톡 튀었다. 세흔은 한 걸음 물러섰다.
“알겠습니다.”
졌다...
세흔이 차에 타며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그를 밀어붙이는 사람은 지금껏 없었다. 그래서 어쩐지 그녀에게 약간의 호기심이 생겼다.
형의 고용주인 이상, 그녀를 계속 주시할 예정이다. 지금은 연락도 없이 사라져 있다고는 하지만, 직장도 팽개치고 집도 팽개치고 사라졌으니 조만간 뭔가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차를 매끄럽게 움직여 골목을 나가면서, 그는 미소를 지었다.
“시원씨. 커피.”
오피스텔 입구에서 아직도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셰리가 없어서 아직 개시도 못했는데. 잘도 커피라는 소리가 나오는군요.”
시원이 웃으며 말했다. 그가 후드 티 주머니에 손을 넣어 부비적거리며 투덜거렸다.
“커피가 없으면 잠에서 못 일어나거든. 그리고 시원씨 커피는 최고. 근데 셰리는 많이 아픈 거야?”
“벌레가 꼬여서 그렇죠.”
가게 뒷문으로 들어가 에스프레소 머신 스위치를 올리며, 시원이 대꾸했다. 저 나른하고 색스러운 남자는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모르지만, 또 이렇게 말하면 상황을 대번에 이해하기도 한다. 그가 아직 개시도 안 한 가게로 들어왔다.
“셰리도 힘들겠네.”
“괜찮아요. 해충 박멸해 버리면 되니까.”
시원이 간단하게 이야기 했다. 솔직히 계속 늘어 붙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지만, 셰리는 해충 박멸이 되지 않으면 퇴원 생각도 안 할 거고, 그렇게 되면 나단은 안절부절 못 할 것이며 무엇보다도 셰리가 퇴원을 하지 않으면 가게는 계속 영업 중단이 된다.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 마당에 그런 것은 사절이다.
“근데 커피 마시러 여기까지 들어와요? 뭔가 다른 부탁 있는 거예요?”
“음 아직 4층 왼쪽 날개 방 비어있어?”
“네.”
“방 구하는 사람을 알고 있어서. 여기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서 함 보러 오라고 했는데. 어떻게 생각해?”
“돈이 된다면야 언제든 환영이죠.”
시원이 그에게 갓 만든 따뜻한 에스프레소를 내밀며 말했다. 그가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외상 장부에 줄 하나를 더 긋고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원은 그래도 돈이 들어올 구석이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형을 찾는다면서 2차 난리를 치고 갔던 그 남자의 얼굴도.
당분간은 힘들겠지만, 뭐 어쩌겠나?
이때까지만 해도 시원은 세흔을 ‘적당히’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