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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머니 많이 아프셔?”
-몸살이 심하신 것 같아. 미안해서 어쩌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뭐. 괜찮아.”
-리은이 실망 할 텐데.
“이왕 나온 거 내가 데리고 가면 되니까 괜찮아.”
-리은이 좀 바꿔봐.
“응, 잠깐만.”
예은이 리은에게 ‘연지 이모.’라고 입만 벙긋거리며 휴대폰을 건넸다. 앙증맞은 손으로 커다란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대는 리은의 정수리를 가만 쓰다듬으며 예은은 당초 롯데월드로 가려던 계획을 어린이 대공원으로 바꿨다.
“이모는 할머니가 아프시니까 이번엔 봐줄게.”
리은이의 꽤나 어른스러운 대꾸에 예은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안 돼, 엄마한테 혼나요.”
리은의 대꾸를 가만 듣고 있던 예은은 분명 연지가 대충 ‘우리 리은이 이모가 미안하니까 선물 사줄게. 뭐 갖고 싶어?’라는 식의 말을 건넨 것이라고 확신했다.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리은이 그 확신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그러면 이모 나 곰 인형. 지윤이가 막 자랑한단 말이야.”
볼멘 아이의 목소리에 예은이 뜨끔해했다. 최근 들어 리은이는 단 한 번도 무언가가 갖고 싶다고 예은을 조른 적이 없었다. 사정이 넉넉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갖고 싶은 걸 다 가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갖고 싶어 하는 걸 사주지 못할 때 예은의 무너지는 심정을, 미안한 마음을 다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리은이는 예은에게 무언가가 갖고 싶다는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그래서 예은은 그저 리은이 딱히 갖고 싶은 게 없는 모양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해왔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분명 유치원에 가면 아이들이 갖고 있는 장난감, 받은 선물, 엄마 아빠랑 놀러갔던 이야기 등 무수히 많은 자랑거리를 리은에게 늘어놓았을 텐데, 저 조그마한 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일순 리은에게 한없이 미안해졌다.
“응, 이모. 엄마 바꿔줄게요.”
예은의 생각을 뚫고 들어온 리은이 맑게 웃는 얼굴로 휴대폰을 도로 건넨다. 휴대폰 건너편에서 계속 미안하다고 말을 꺼내는 연지에게 예은은 괜찮으니 어머니한테나 신경을 쓰라고 하고 내일 보자는 인사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오늘은 연지와 스케줄을 맞춰 같이 쉬기로 한 수요일이었다. 리은이를 데리고 롯데월드에 가자고 약속을 했는데 갑자기 연지의 어머니가 몸살이 나는 바람에 연지가 약속을 취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잔뜩 기대에 부풀었을 리은이가 아마도 연지는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예은은 무릎을 굽혀 앉아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맑고 또랑또랑한 아이의 시선이 묻는다. 왜?
“지윤이가 곰 인형 생겼다고 막 자랑했어?”
“아니, 자랑은 안 했어.”
리은이 눈동자를 또르르 굴려 시선을 피한다.
“우리 리은이 그래서 속상했어?”
“내가 애야? 그런 걸로 속상하게?”
한심하게, 하는 어조로 리은이 어른인 양 말을 한다.
“일곱 살이면 애 맞거든? 리은아, 엄마가 큰 건 못 사줘도 작은 건 사줄 수 있어. 갖고 싶은 거 있으면 엄마한테 말해도 돼.”
“응, 알았어.”
대답은 시원하게 해놓고도 리은은 끝내 연지에게 했던 것처럼 콕 집어 무언가를 사달라고 하지 않는다. 그건 리은이 나름의 배려였던 것이다. 우선 알겠다는 대답으로 예은의 마음을 풀어놓고 위기를 모면하겠다는. 무언가를 사달라고 조르라는 게 리은에게 위기가 된다는 게 예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대체 누가 널 이렇게 조숙하게 만들었다니? 예은은 리은의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곰 인형 사줄까?”
“연지 이모가 사준댔어.”
“그럼 아저씨가 사줄까?”
불쑥 끼어든 익숙한 목소리. 예은과 리은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예은의 예상대로 리은의 어깨 너머로 말쑥한 슈트 차림의 그, 이연준이 서 있었다. 순간 심장이, 머리가 아찔함에 제 기능을 잃어버렸다.
“어? 아저씨, 안녕하세요.”
잠깐 본 연준을 리은이 기억하고 있나보다. 깨달은 생각에 흠칫 놀라며 예은이 일어섰다. 그래도 여전히 그를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연준의 키는 컸다.
“안녕, 꼬마아가씨.”
연준이 리은을 향해 웃으며 인사한다. 리은이 마주 웃어주었다. 그 모습을 보는 예은의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졌다. ‘리은아, 아빠야.’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할 수 없는 말이라는 걸 예은은 알고 있었다. 그제야 그가 원망스러워졌다. 서예은을 포함하면 삶의 무게가 힘겨워지니까 서예은을 지워버린 이연준. 이해는 하지만 리은을 앞에 둔 상황에서는 그러기가 힘이 들었다. 참아주었다면, 함께였다면 서리은은 ‘이리은’이 되었을 테니까. 그에게 아저씨라는 호칭대신 아빠라는 호칭을 썼을 테니까.
“안녕하세요.”
어느새 리은의 손을 잡고 있는 연준이 인사를 해온다. 그 꼭 잡은 손을 눈으로 확인하고, 확인하고, 확인하며 예은이 입을 열었다.
“네, 안녕하세요.”
바짝 말라버린 입 안이 깔끄러웠고 나오는 말이 그래서 거칠게 느껴졌다. 예은은 입술을 혀로 축였지만 이미 건조해진 터라 별 소용없어 여전히 입술은 메마른 상태를 유지했다.
“리은아, 아저씨 차타고 곰 인형 사러갈까?”
연준의 말은 다정했다.
“아니에요, 바쁘실 텐데 가보세요.”
예은이 리은을 대신해 완곡하게 거절을 했다.
“바쁜 일 끝났어요. 지금부터 나 한가해요. 예은 씬 오늘 출근 안 해요?”
“오늘 휴무예요. 근데…….”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고 그래서 그래요. 나 좀 끼워줘요.”
연준의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짓는 예은과 달리 리은의 눈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마냥 좋은 모양이었다. 남자 어른과는 가까이 지내본 적이 별로 없어서 낯이 설 텐데도 그런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빠 닮은 아저씨라더니 그래서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하던 예은은 아니라고 거절을 하려던 마음을 고쳐먹었다. 한 번 정도라면 아이에게 친아빠와 놀 수 있게 해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아무도 모를 테니까, 그게 자신의 욕심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평일에 것도 평사원이 아닌 회사를 이끄는 사람이 한가하다는 건 믿기 어려운 말이다.
“정말이세요?”
하지만 의심스럽다는 예은의 말에 연준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저씨가 예쁜 곰 인형 사주실거예요?”
깜찍한 리은의 물음에도 연준은 여전히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오늘 하루 신세 좀 질게요.”
예은이 의뭉스러운 속내는 감춘 채 연준에게 말하였고, 연준은 싱긋 웃으며 끼워줘서 고맙다 하였다. 그리곤 리은을 번쩍 안아들었다. 까르르 웃으며 리은은 친근하게 연준의 목을 한 팔로 감쌌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꿈조차 꿔본 적 없는 리은과 연준의 모습에 왠지 예은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살다보면 별별일 다 겪는다더니, 정말 살다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리은이 어떤 곰 인형 갖고 싶어?’묻는 연준과 ‘하얀색 곰 인형.’답하는 리은의 정다운 모습을 보며 예은이 입가에 설핏 웃음을 머금었다.
근처 백화점 주차장에 연준의 차를 주차하고 잠실역 내에 위치한 팬시점을 찾는 내내 연준은 가볍지도 않은 리은을 내내 안아주었다. ‘무거울 텐데 그만 내려주세요.’ 라는 예은의 말에도 그는 괜찮다 할 뿐이었다. 예은은 한 발 정도 뒤로 물러서서 따르는 내내 그 모습을 아련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타인의 시선에 아마 영락없이 ‘부녀지간’으로 보이겠지, 하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을 저릿하게 했다. 그건 그들이 까르르 웃으며 좀 더 예쁘고 마음에 드는 곰 인형을 고르는 내내 예은의 양심을 콕콕 찔러왔다.
팬시점에서 하얀색과 갈색의 털이 보드라운 곰 인형을 두고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 쉽게 결정 내리지 못하는 리은에게 연준은 흔쾌히 그 두 개의 곰 인형을 모두 안겨주었다. 그리고 팬시점을 나오며‘어디로 갈 생각이었어요?’묻는 연준에게 예은이 어린이 대공원에 갈 생각이었다는 대답을 얌전히 해주었다. 롯데월드를 앞에 두고 그 생각이 나요?’라며 놀리듯 한마디 건넨 그는 예은의 처음 생각을 존중해주었다.
“엄마, 비 와.”
차가 잠실대교에 막 진입할 무렵, 곰 인형을 양팔에 꼭 안은 채 리은이 말했다. 눈부시게 맑은 날이었다. 그러니까 태양은 여전히 하늘 위에서 그 존재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비?
“여우가 시집가나 봐.”
“호랑이가 장가가는 거예요.”
예은의 말에 연준이 반박을 해왔다, 그 옛날 어느 날처럼. 문득 예은은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때,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를 피해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가서 뜨거운 커피를 손에 쥔 채 예은은 ‘여우가 시집가는 날.’이라고 우겼고 연준은 ‘호랑이가 장가가는 날.’이라고 응수를 했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던 그 날, 그 끝도 없던 입씨름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여우가 시집가는 거예요.”
그 기억을 되새기며 예은이 우겼다.
“호랑이가 장가가는 거예요.”
그 옛날 어느 날처럼 그도 지지 않고 응수를 해온다. 그 기억에 예은의 입술이 활처럼 휘며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여우는 시집가고 호랑이는 장가가면 둘이 결혼한다는 소리잖아.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싸우고 그래.”
예은이 다시 한 번 우기려는 찰나, 가만 듣고 있던 리은이 따끔하게 한 소리 한다. 리은의 야단에 순간 멍해진 예은과 연준은 다음 순간 박장대소했다. 화창하게 맑은 날, 비는 금방 그쳤다.
*
주말 지나서,
아마도, 비축분 없으니까,
수요일쯤, 올 것 같아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
연준이놈은 괜스레 돌을 던지고...ㅠㅠㅠ리은이 애가 너무 조숙해도 안 되는데, 속상하네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