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unk paradise
- 소설
- 완결소설
3.
“예은 씨, 진행은 잘 되고 있어?”
금요일 아침 업무 회의 시간. 팀 회의라 민재가 참석하는 경우도 드문 일인데, 사장인 윤현성까지 참석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예은이 맡고 있는 대박 웨딩 건 탓이라는 게 팀원들 모두의 생각이었고, 회의 도중 현성이 던진 뜬금없는 질문의 화살이 예은을 향하자 다들 역시 그런 거였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식장 섭외 중입니다.”
모든 팀원들의 시선이 예은에게 향하자 예은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건 여전히 그녀에게는 낯설고 부끄러운 일이다. 서예은은 타인 속에 섞여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삶이 흘러가길 바랐다. 그런데 가끔 이렇게 뜻하지 않게 화제의 중심이 되어버리고 만다.
“특별히 신경 좀 써줘. 사실 신랑이 내 친구 놈이거든.”
현성이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넸고, 예은 역시 미소로 화답했다. 예상치 못한 현성의 말에 사실 예은은 화들짝 놀라버렸다. 그러다 문득 처음 입사했을 때, 사장의 이름이 왠지 친근하게 느껴져 이상하게 반가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제야 예은이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그렇게 수긍도 하게 됐다. 이연준이 입에 달고 살았던 친구들 중 하나. 입버릇처럼 보고 싶다고 했었다. 언젠가 보여주고 싶다고 했었다. 집을 나오면서 그는 친구들까지도 몽땅 버렸었다. 그래서 그가 입가에 그리움을 한껏 묻힌 채 지난 일들을 이야기 할 때면 예은은 늘 미안했었다. 그는 그렇게 서예은 때문에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렸으니까.
집중.
불쑥 내밀어진 하얀 종이에 쓰인 단어에 예은이 연준을 지워냈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싱긋 웃고 있는 연지의 예쁜 얼굴이 예은의 시선에 잡혔다. 마주 웃어주는데 회의를 주재한 팀장의 “저녁에 회식 있는 거 잊지들 마시고, 오늘도 수고해주십시오.”라는 정중한 인사가 들려왔다. 예은과 연지는 자동으로 “네, 수고하십시오.”라는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주말이다.”
마냥 좋다는 어조로 연지가 입을 뗐다.
“그래봤자 할 일 투성이면서. 이번 주에 결혼식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주말이잖아.”
팀원들과 가볍게 목례를 주고받으며 회의실을 나온 연지와 예은의 발걸음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탕비실로 향했다.
“근데, 이따 회식 빠져도 괜찮을까?”
“리은이 땜에?”
딱 꼬집어 말하는 연지에게 예은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려울 걸? 사장님까지 참석하는 거라서.”
“이모한테 전화나 해야겠다. 갑자기 웬 회식이람.”
“으으, 난 오랜만에 먹고 죽어야겠다.”
투덜거리는 예은에 반해 연지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적당히 드셔요, 저는 중간에 튈 거랍니다.”
“그러시던가. 그나저나 다음 주에 언제 쉴 거야?”
연지의 물음에 예은이 잠시 머리를 굴렸다. 언제 쉴까? 업무의 특성상 예은의 회사는 주말에도 근무를 해야 했다. 그래서 보통 자신들의 스케줄에 맞춰 주중에 하루나 이틀정도 주말을 대체해 쉬는 것이다.
“넌 언제 쉬려고?”
예은은 아직 다음 스케줄을 잡지 않은 상황이라 명쾌한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어서 생각을 접고 연지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너 쉬는 날.”
“이런.”
탕비실에 들어오자마자 종이컵 두 개에 커피믹스를 털어 넣던 예은이 돌아온 간단한 대답에 미간을 찌푸렸다.
“왜?”
“언제 쉴 지 난 아직 못 정했거든.”
“나랑 맞춰 쉬자. 리은이 데리고 놀러가게. 봄도 됐으니까 놀러 한 번 가줘야지.”
예은이 내미는 종이컵을 연지가 “땡큐.”하고 장난스럽게 중얼거리며 받아들었다.
“그 전에 좀 이따가 별 일 없으면 나랑 예식장 하나 보러 가자.”
“예식장 지겨워!”
연지가 한 쪽 볼에 바람을 잔뜩 넣었다가 빼며 인상을 썼다.
“너 선상 웨딩 하는 데 가 본 적 있어?”
“선상 웨딩은 없는데.”
“그러니까 가보자. 점심도 거기서 해결하면 되고.”
점심이라는 말에 연지가 넘어왔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연지에게 ‘어차피 갈 거면서 튕기기는.’하고 예은이 핀잔을 주며 탕비실을 나란히 나오는데 사장인 윤현성과 맞닥뜨렸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연지와 가볍게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누며 자리로 돌아오는 데, 예은은 잠시 잊고 있던 이연준이 떠올랐다. 당신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거구나. 그의 곁에서 그에게 직접 소개 받은 건 아니었지만 어쨌건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친구를 직접 봤으니까 예은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나마 보여주고 싶었던 거라고.
10시 즈음, 예은은 연지와 회사를 나섰다. 야외 웨딩이야 이미 몇 차례 진행을 해봤지만 사실 예은도 선상 웨딩은 처음이었고, 아직 그런 웨딩을 진행하는 예식장은 가본적도 없었다. 처음 경험하는 거라곤 하지만 예은은 그렇다고 연지마냥 설레지만은 않았다. 그건 별 다섯 개가 붙은 호텔의 어떤 예식장을 둘러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이연준의 결혼식이니까 그런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리는 데 어느덧 목적지에 다다랐다.
“우와. 야, 야, 한 마디로 죽인다.”
한강시민공원 내에 이런 건축이 가능한 지 예은은 오늘 처음 알았다. 호들갑스럽게 감탄사를 연발하며 앞선 연지의 뒤를 따라 예은은 산보라도 나온 듯 천천히 돌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목적지와 연결된 나무로 반듯하게 짜인 다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리 위에는 마치 그곳이 버진 로드라도 되는 양 붉은 색 카펫이 깔려있었다.
“빨리 와!”
“아깐 별로 오고 싶어 하지 않더니.”
예은이 웃는 얼굴로 핀잔을 건넸더니 연지가 ‘그땐 그때고.’라며 배시시 웃어넘겼다. 예은은 이미 다리 건너 입구 앞에 서 있는 연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해치워야 할 일이었다. 생각하며 예은이 모래주머니를 매단 것처럼 무거워진 걸음을 떼는데 쪼르르 연지가 달려와 정답게 팔짱을 낀다.
“야, 야, 나도 나도 이런데서 결혼할래!”
그러더니 들뜬 목소리로 연지가 선언했다.
“일단, 남자나 만나고 그런 소리 하지 그래?”
“에이 씨, 그게 문제구나. 아, 몰라, 몰라. 그래도 여기.”
예은의 면박에 잠깐 찡그렸던 얼굴을 다시 활짝 피며 연지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시던가.”
심드렁하게 대꾸를 한 예은이 ‘에버’라고 쓰인 글귀를 눈으로 읽어 내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인포메이션에 앉아있던 단정한 차림새의 예쁜 미소를 띤 여직원이 들어서는 예은과 은지를 향해 깍듯하게 허리를 굽혀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하고 인사를 해왔다.
“어제 연락드리고 왔습니다. 하나웨딩 서예은이라고 합니다.”
“아, 지배인님 2층에서 기다리십니다.”
예은이 예의바른 미소를 지은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연지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올라선 순간 예은은 통유리를 통해 시야에 들어찬 전망에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야, 나 한강이 이렇게 예뻐 보이기는 첨이다.”
아무래도 연지도 자신과 마찬가지의 느낌을 받았나보다고 예은은 연지의 넋이 나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사실 일렁거리는 한강만 놓고 보자면 평소 보던 것과 별다를 것 없지만 내부의 깔끔한 인테리어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한강은 충분히 멋졌다.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림 같다. 꼭 실제처럼 그려놓은 예쁜 풍경화 속에 내가 들어선 것 같아.”
이어지는 연지의 말에 예은이 연지의 팔을 살짝 꼬집었다.
“꿈 아니라고.”
아야. 하며 왜 그러냐는 시선을 보내는 연지에게 예은이 살포시 웃으며 대꾸했다.
“서예은 씨 되십니까?”
안쪽에서 약간은 빠른 템포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이내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은이 창가를 바라보던 시선을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틀자 짙은 감색 정장을 말쑥하게 빼입은 깔끔한 인상착의의 남자가 보였다. 예은은 그의 왼쪽가슴에 달린 타원형의 금장 명찰에서 그가 이곳의 지배인이자 자신과 약속을 잡았던 박은철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네, 안녕하세요. 박은철 지배인님이시죠?”
예은이 가볍게 웃으며 내민 손을 은철이 가볍게 쥐었다.
“저는 김연지라고 서예은 씨 동룝니다.”
“박은철입니다. 이런 미인들이 오실 줄 알았다면 좀 더 신경 써서 입고 올 걸 그랬습니다.”
연지와도 악수를 나누며 통성명을 한 박은철의 넉살에 분위기가 금세 부드러워졌다. “우선 둘러보시고 난 다음에 세부 사항에 대해 얘기하죠.”라며 은철이 연지와 예은을 안측으로 안내했다.
2층 로비를 지나 왼쪽으로 신부 대기실이 있었고 오른쪽으로 그냥 홀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식장이 있었다. 신부 대기실과 홀 사이에 놓인 작은 메모 테이블은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고, 화려한 샹들리에가 장식된 신부 대기실은 전체적으로 엔틱 풍으로 꾸며놓아 고풍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홀은, 그냥 한 마디로 끝내줬다. 힐끗 연지를 돌아보니 넋이 완전히 나가버린 표정이었다. 어머, 어머. 감탄사를 남발하며 감동을 했다. 자신의 기분을 고스란히 드러낸 연지와 달리 예은은 곁에서 이것저것 열심히 설명을 하는 박은철의 말을 들으며 홀 내부를 담담히 둘러보았다. 예은이 제일 마음에 든 건 둥근 테이블로 꽉 찬 중앙에 하얀 카펫이 깔린 버진 로드와 그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크리스털 장식대 위의 하얀 백합꽃이었다. 눈앞에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단상 위에 서 있는 이연준과 그를 향해 버진 로드를 웨딩마치에 맞춰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지은영의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식사 먼저 하시고 카탈로그 보시면서 세부사항 설명 드리겠습니다.”
박은철의 말에 예은이 그리던 그림을 지웠다.
“이런 전경 두고 먹는 밥은 무슨 맛일까?”
그리고 연지는 황홀경에 빠져버렸다.
“김연지, 나 네가 창피해지려고 해.”
은철은 토닥거리기 시작하는 연지와 예은을 3층에 위치한 바bar 에지로 안내했다. 그 곳 역시 연지와 예은이 둘러봤던 다른 층과 다름없이 전경과 인테리어가 모두 두말하면 잔소리가 될 만큼 멋진 곳이었다. 연지와 예은은 제공되는 예식 음식을 맛보는 것으로 점심을 결정했다. 식사 내내 이어지는 은철의 ‘에버’예찬론을 듣던 연지와 예은은 그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회사에 이곳을 협력업체로 추천하자는 결의를 할 정도로 그 예찬론에 열혈신자가 되어버렸다.
식사가 끝날 때 즈음 돌아온 은철의 손에는 두꺼운 파일이 몇 개 들려있었다. 차를 마시면서 은철은 예은과 연지에게 ‘에버’에서 치러질 수 있는 예식스타일에 대한 견본을 그에 어울리는 수많은 플라워 스타일링, 테이블과 내부 데코레이션, 조명연출과 함께 보여주었고, 예은은 그 중 몇 가지를 조합하여 견적을 내어보는 것으로 일을 끝냈다. 하지만 그가 자리를 비웠을 때 연지와 결의를 했던 협력업체 건으로 예은 일행은 하나 웨딩과 에버가 제휴하였을 때 이끌어낼 수 있는 여러 가지 시너지 효과에 대해 회의 아닌 회의를 하는 다시 진행했다. 그 바람에 예은은 처음 생각했던 것 보다 시간을 좀 더 지체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은과 연지가 은철의 배웅을 받으며 ‘에버’를 나설 때 한강은 주홍빛 석양을 품고 있었다. 하루 종일 한 일이라고는 웨딩홀 예약을 위해 견적을 내려고 구경을 온 것뿐인데 왠지 뭔가 큰일을 해낸 듯 마음이 뿌듯했다. 그래서 내내 예은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걸 보고 연지는 ‘좋아 죽네.’라며 놀려댔지만 기분이 나빠지지 않았다. 그건 이연준과 지은영을 떠올려도 사라지지 않아서 어쩌면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예은은 연지의 팔짱을 꼭 꼈다.
+
디엔드도 써야 하는데 ㅜ.ㅠ
그래도 계속 예은이 이야기 써주세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