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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좀 늦었나요?”
들려온 소리에 예은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시선을 돌렸다.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는 표정의 지은영이 예은의 눈에 들어온다.
“아뇨, 앉으세요.”
예은은 예의바르게 미소를 지었고 지은영은 조금은 거만한 표정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예은 씨!”
그리고 딱딱하게 은영이 예은을 불렀다.
“낯 가리냐고 물었었죠? 낯 따위는 전혀 가리지 않지만, 다시는 내게 그런 건방진 질문 따위 던지지 말아요. 당신은 고용인답게 그냥 시키는 일만 착하게 해주면 돼요.”
차분한 목소리로 조용조용 가벼운 대꾸에도 볼을 붉히던 참하고 사랑스럽던 어제의 지은영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도 다른 그 반응에 당황한 것도 잠시 예은은 회사에서 언젠가 실시했던 ‘고객을 대하는 매너’의 매뉴얼대로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네, 시정하겠습니다.”
예은의 착실한 대답에 은영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 사이 테이블에 다가온 직원이 커피와 데운 우유를 주문 받아서 돌아갔고 예은은 괜히 축축해진 손바닥을 옷에 스윽 문질렀다. 은영이 붉은 입술에 담배를 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는 동작이 꽤 능숙했다.
“오늘 보자고 한 용건은요?”
훅, 은영이 뱉어내는 연기는 예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시간이 빠듯해서 예식장을 어디로 할 건지 먼저 상의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코를 찌르는 담배 향에 얼굴이 찡그려지는 걸 간신히 참으며 예은이 차분히 말을 건넸다.
“난 화려한 곳을 원해요.”
‘잠시만 요.’라고 말을 꺼낸 예은이 가방에서 준비해온 파일을 꺼내는 동안 테이블 위에 커피와 데운 우유가 세팅되었다.
“제가 몇 군데 뽑아왔는데 한 번 보세요. 설명은 보시면서 해드릴게요.”
예은은 파일을 펼쳤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서류를 넘기며 각 예식장의 장점과 단점을 차분히 은영에게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듣는 동안 은영은 가끔 흥미를 보이고 또 가끔은 미간을 찌푸렸으며 혹 마음에 아주 들지 않으면 예은이 설명을 하는 도중에 ‘거긴 빼요.’라며 의사표시를 확실히 해왔다.
그래서 예은이 설명을 끝냈을 때는 생각해 왔던 십여 군데 중에서 여섯 군데로 압축되었으나 그 중에서 또 한 군데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어서 머리는 여전히 복잡했다.
“아, 선상 웨딩도 한 번 알아볼래요?”
“네.”
은영의 말에 한 군데가 더 추가되었지만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다. 그래서 여기 저기 흩어져 테이블을 어지럽히고 있는 파일을 가지런히 정리하며 예은이 가볍게 대꾸했다.
“그럼 가 봐도 되죠?”
“네, 예상 하객이 어느 정도나 되는 지는 나중에 연락드릴 테니 그 때까지 알려주시면 돼요.”
“그럼, 수고해요.”
은영이 떠났다. 그럼 수고해요. 은영이 남긴 말을 따라서 중얼거리던 예은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진이 다 빠진 느낌. 탓에 예은이 손에 쥐고 있던 파일 철을 테이블 위에 가볍게 던졌다. 그리고 패브릭 소파에 늘어지게 몸을 파묻고 등받이에 고개를 기대어 눈을 감았다. 어제의 지은영이 오늘의 지은영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겨우 30분 정도였을 뿐인 만남이 예은을 녹초로 몰아갔다. 그나저나 이연준은 지은영의 저런 모습을 알고 있을까? 혹시 모른다면 이대로 묵인해도 나는 괜찮을까? 생각이 예은의 마음을 잔뜩 흐트러뜨렸다.
연준은 놀이터 근처 길가에 차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돌려 놀이터를 바라보며 절레절레 내저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을 의아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잠실대교 위를 달리고 있었다. 유턴을 할까 생각도 했지만 연준은 결국 놀이터까지 내달렸다. 거기엔 막힘없이 달릴 수 있도록 신호등이 계속 파란불을 켜주었던 탓도 있었다.
혼자 미끄럼틀을 타고 그네를 타는 여자 아이가 연준의 눈에 들어왔다. 깜찍하게 생긴 아이는 노는 중간에도 연신 놀이터 밖으로 시선을 돌리곤 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아마 그게 퇴근하는 아빠나 엄마일 것이다. 연준은 차 밖으로 나와 놀이터로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네에 털썩 주저앉았다. 삐걱 소리를 내는 쇠로 이어진 줄을 잡는데 그 차가운 느낌이 조금 전의 삐걱 소리와 함께 연준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뜻 모를 감정에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있는 연준의 코앞에 어린 여자 아이의 얼굴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놀란 것도 잠시 연준은 인상을 풀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아이를 응시했다.
“아빠 기다려?”
“아뇨, 엄마 기다려요.”
아이가 또박또박 대꾸해온다. 눈이 반짝 빛나는 게 총기 가득했다. 세상의 모든 좋은 수식어를 다 끌어다 붙여도 손색없다 생각될 만큼 외견상 아이는 훌륭했다. 우성 인자만 잔뜩 물려받은 모양이었다. 생각하는 연준을 아이가 유심히 살펴본다. 맞다, 아이는 연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고개까지 갸웃거려가며 열심이다.
“아빠 닮았어요.”
그러더니 뜬금없이 툭 한마디 내뱉는다. 아이의 말에 연준이 씨익 미소 지었다.
“내가 아빠 닮았어?”
고개만 끄덕거린 아이는 제 볼을 살짝 꼬집는다. 연준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아이는 영특하게도 그 시선을 읽어낸다.
“꿈인지 확인해보려고요. 아저씨 정말 많이 닮았어요.”
“신기해서 그렇게 보는 거야?”
아이가 또다시 고개만 끄덕거렸고 연준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귀엽네, 이 아이. 문득 연준은 현성의 곧 태어날 공주님도 이 아이의 딱 절반만큼 만이라도 예쁘고 귀여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예쁜 꼬마 아가씨는 이름이 뭘까?”
“예쁜 꼬마 아가씨의 이름은 서리은입니다.”
“아저씨는 이연준입니다.”
연준이 장난스럽게 아이를 따라 또박또박 자신을 소개했다.
“이연준. 아저씨.”
연준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발음하며 리은이 방긋 웃었다.
“몇 살?”
“일곱 살.”
“그럼 유치원 다니겠네?”
“네, 샛별 유치원 은하수반입니다.”
대답하는 리은의 목소리는 밝고 활기찼다. 대답을 듣는 연준의 기분이 그래서 유쾌해졌다. 곧 결혼을 하게 돼서일까, 전에는 별 감흥 없이 바라보게 됐던 아이의 모습들이 연준의 눈에 새롭게 비춰졌다. 더불어 이런 아이라면 열이라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이없게 돌아가는 상황에 고개를 내젓는데, 뒤를 힐끔 거리던 아이의 눈매가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엄마다!”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소리를 낸 리은이 그 와중에도 연준에게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깍듯하게 허리까지 숙여 인사를 하고는 ‘엄마아!’소리치며 연준이 인사를 건넬 새도 없이 달려갔다. 절로 시선이 아이가 뛰어간 방향을 향하는데 그 끝, 아이에게 다가서는 여자가 연준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이의 재잘재잘 대는 이야기를 가만 듣던 아이의 엄마가 놀이터를 향해 시선을 던지다가 연준을 발견하고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준의 날카로운 시선이 허공에서 붙잡은 그 시선을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그 자리에 굳어버린 망부석처럼 예은은 그 자리에 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다 먼저 움직임을 보인 건 연준이었다. 느릿한 걸음으로 연준은 예은의 곁을 유유히 지나쳤다. 그러는 동안 예은의 가벼운 목례는 못 본 척 무시해놓고, 아이에게는 ‘꼬마 아가씨,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봐’라고 잘도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연준은 예은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미친 짓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련 없이 예은이 살고 있는 동네를 빠르게 벗어났다. 아이는 분명 ‘엄마’라며 예은을 향해 뛰어갔다. 그 말은 곧 예은이 기혼한 상태이고 아이를 하나 둔 대한민국의 아줌마라는 뜻이었다. 고작 스물 대여섯 정도라고 생각했던 예은의 나이가 그것보다 사실은 더 많았나보다. 그리고 꽤나 일찍 결혼이란 걸 했나보다.
생각에 자꾸만 연준은 인상을 잔뜩 쓰고 말았다. 은근히 화도 치밀었고, 왠지 모를 배신감을 느꼈다. 사실 그녀가 자신이 미혼이라고 거짓말을 한 적도 없고 아이가 있다는 걸 숨긴 적도 없었다. 순전히 혼자서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 뿐. 그러니까 온전히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왠지 속은 것 같은 이 기분, 심히 엿 같았다. 그리고 한편으로 자신의 이런 기분을 가볍게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웃기는 짬뽕이라는 말이었다. 아아, 어쨌건 이젠 신경 끊자고. 연준은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했다. 유부녀는 취미 없으니까.
예은은 그가 떠난 자리를 향한 시선을 어쩌지 못했다. 돌려야지, 생각은 들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그러다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간신히 눈을 돌렸다. 리은이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한 채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예은은 아이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리은과 눈높이를 맞춰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래서 리은이 저 아저씨랑 무슨 얘기했어?”
“으음, 아저씨한테 우리 아빠랑 닮았다는 얘기.”
철렁, 예은은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과 머리가 핑글 도는 아찔함을 동시에 느꼈다.
“또.”
“또? 예쁜 꼬마 아가씨 이름은 서리은이고, 일곱 살이고, 샛별 유치원 은하수반에 다닌다는 얘기.”
“정말 그 얘기가 다야?”
예은이 재차 물었다. 리은이 고개를 까닥거리며 싱긋 웃었다. 그 모습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예은이 길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근데 우리 아빠는 이름이 뭐야?”
“응?”
리은의 질문은 뜬금없는 것이라 예은이 잠깐 미간을 좁혔다가 가볍게 입을 열었다.
“이연준.”
이 정도는 괜찮겠지, 라는 생각에 예은이 사실을 말했다.
“어? 아까 그 아저씨도 이연준 이랬는데. 아빠랑 생긴 것도 비슷하고 이름도 똑같다!”
하지만 리은의 신기하다는 감정이 풍부하게 담긴 대답에 예은은 기함을 하고 말았다.
“리은아, 세상에는 닮은 사람도 많고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도 많아.”
“으음, 그럼 아까 그 아저씨는 아빠 아니라는 말이야?”
예은은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리은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알겠다고 표현을 해온다. 그 모습에 그만 예은이 리은을 와락 끌어안았다. 리은의 따듯한 체온이 예은의 시린 가슴을 감싸주었다.
“우리 리은이 아빠 보고 싶어?”
“아니, 리은이는 엄마만 있으면 돼.”
리은이의 대답은 언제나 착하다. 그리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너무 조숙했다. 미안해, 리은아. 예은이 리은을 더 꼭 끌어안으며 속으로 리은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다 있는 아빠의 품이 리은이도 그리울 것이다. 좋은 아빠가 되어줄 사람이 아무래도 필요했다. 더는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이연준의 결혼이 끝나면 진지하게 정말 생각해봐야 하겠다. 덧없던 기다림은 끝났다. ‘내 무덤에는 그리움만 소금처럼 하얗게 남게 하소서.’문득 떠오르는 구절. 생각에 심장 한 끝의 그리고 명치끝의 아릿함을 예은은 애써 외면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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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연속극 아니예요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