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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모르겠어요? 내가…… 기억나지 않아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연준이 잠에서 깼다. 쪼개질 듯 아파오는 머리에 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녘. 물기에 흠뻑 젖은 말은 귓전을 떠나지 못한 채 주위를 맴돌고 있다. 두세 번 거칠게 마른세수를 한 연준이 자리를 박차고 나와 곧장 욕실로 직행했다.
꿈의 내용은 늘 동일했다. 등장하는 건 늘 어깨길이의 머리를 곱게 늘어뜨린 여자였고, 그녀의 희미한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상대의 그 올곧은 시선은 흐트러짐 없이 자신에게 향해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한참 바라보다가 늘 같은 말을 남기고 멀어진다.
기억을 잃은 뒤부터 시작된 이 꿈이 사실 자신의 경험담이라는 걸 연준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머리를 다쳤다가 깨어났을 때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여자가 했던 말을 그리고 그 상황을 지난 칠 년 동안 그는 지독하게 머릿속에서 무한 반복하고 있었고 깨어날 때 느끼는 지독한 두통은 그 후유증이었다.
연준은 대체 무슨 꿈인지 왜 이 꿈을 매번 꾸는지 하는 고민을 하는 일은 애초에 그만두고 그저 이 꿈을 꾼 다음날은 일이 이상하게 다 꼬여버린다는 것만 기억했다. 답을 알 수 없는 고민은 시간만 버리게 되는 괜한 짓에 골치만 아프게 할 뿐이었으니까. 그에게 이 꿈은 그저 오래된 악몽일 뿐이었다.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한 연준이 드레스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푸른색 실크 드레스셔츠에 폭이 좁은 검은 타이를 매고 짙은 색의 슈트를 입은 연준이 손목시계를 차면서 잠시 코트를 걸칠까 고민하다가 그냥 방을 나왔다. 지워, 지워. 머릿속을 맴도는 여자에 대한 기억을 털어내며 현관을 나서다가 휴대폰을 챙기지 않은 사실을 기억해내곤 다시 안으로 들어섰다. 연준이 침대 옆 서랍장 위에서 휴대폰을 찾아 챙기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차창을 열자 달리는 차안으로 차가운 아침공기가 상큼하게 코끝을 자극해왔다.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은 시간, 차도도, 인도도 한적했다. 그래서 연준은 속도를 좀 더 높였다. 더. 더. 차는 금세 경기고사거리에 다다랐다. 그리고 아직 여자는 자신을 떠나지 않고 머릿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서예은, 그녀가 떠올랐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연준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컴퓨터의 전원을 켜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일 지루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모니터에 메인화면이 뜨기까지 걸리는 그 짧은 시간. 연준은 그 시간을 이용해 탕비실에서 물 한잔을 떠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건, 서예은. 그녀였다.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쉬며 연준은 여전히 그녀를 자신에게서 몰아내려고 했다. 사실 웃기지도 않은 일이었다. 어제 처음 본 여자를 계속 기억한다는 건.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결혼식을 진행할 웨딩컨설턴트였다. 앞으로도 몇 번은 더 부딪히겠지만 사적으로 얽힐 일은 절대 없는 상대. 그러니까 이렇게 자꾸 머릿속을 부유하게 할 이유가 전연 없었다. 물론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고 있다는 사실.
악몽의 여신이라도 되겠다는 거냐.
문득 떠오른 그녀 서예은이 그가 간혹 꾸곤 하는 오래된 악몽 속의 여주인공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연준은 실소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서예은을 털어낸 연준이 회사 전산에 접속하여 혹시라도 어제 자신이 퇴근 한 뒤에 직원들이 보내온 메일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새로운 메일이 4건 있다는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현재 진행 중인 입찰 건이나 공사에 관한 상황보고 메일이었다.
연준은 메일을 읽고 몇 개는 첨부된 파일을 열어 자료를 프린트했다. 그리고 다시 메일을 확인하며 책상 한 옆에 밀어둔 두툼한 다이어리를 끌어다 주요 사항 몇 가지를 정리해 기록하였다. 그리고는 또 포스트잇을 가져다 오늘 진행해야 할 일, 꼭 확인해야 할 사항과 함께 다이어리를 뒤적이며 연락을 해야 할 곳과 선약을 체크해 적은 뒤 모니터 한쪽에 단정히 붙였다. 글씨는 마치 줄을 그어놓고 쓴 것 마냥 가지런했다. 아침일과를 모니터에 포스트잇을 붙여놓는 걸로 시작하는 까닭은 그에게 따로 소소한 스케줄을 챙겨주는 직원이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일을 정리해놓는 게 편하기도 했고 말이다.
연준이 잔에 손을 뻗으려는 데 재킷 안쪽에서 가벼운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진동은 연준이 휴대폰을 손에 쥔 순간 멈추었다. 액정 화면에 부재중 전화 메시지가 표시되었다. 누구인지 확인하려는 순간 연준은 입술을 실룩이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여간 그 놈의 성질은.
-좋은 아침.
부재중 전화의 주인공 윤현성의 목소리는 건네는 인사만큼이나 상쾌하게 연준의 귓가를 자극해왔다.
“좋은 아침은 개뿔.”
-왜, 그 묘령의 여인과 꿈속에서 조우라도 했냐?
연준의 불퉁한 대꾸에 현성이 싱글거렸다. 연준이 언젠가 지나치는 말로 녀석들이 모두 모여 있을 때, 잠깐 꿈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놈의 비상한 기억력 덕에 유일하게 그걸 기억하는 놈이 윤현성이었다.
“그래서 불만이야? 어젠 코빼기도 안 비친 주제에.”
-내가 보고 싶었던 거야? 그럼 우리 집에 들르지 그랬냐? 안 그래도 어제 모임 있었다고 하니까 마누라가 너 보고 싶다고 하더라. 하여간에 서글서글 싹싹한 놈도 아닌데 여자가 들러붙는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이건 미스터리야.’의아해하는 현성의 말에 이번엔 연준이 싱글거렸다.
“아마 토끼 같은 네 딸도 너보단 날 좋아하게 될 걸?”
-악담을 해라, 자식아. 에이, 괜히 전화해서 기분 잡쳤네.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한 용건이 뭐야?”
투덜대는 현성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연준이 묻자 현성이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잇는다.
-너 근데 지은영 정말 괜찮은 거야?
“뭐 딱히 나쁠 건 없으니까.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하고 해도 힘든 게 결혼 생활인데 겨우 딱히 나쁠 게 없어서 하는 거면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
“이미 결정 난 사항이야, 새삼 왜 그래? 내가 중간에 파토내서 네 사업 말아먹을까봐?”
-미친, 겨우 너 하나 장가 못 보낸다고 무너질 회사로 보이냐? 너 잡으면 정재계 굵직한 인사들한테 절로 홍보가 되는 거니까 그저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인 거다, 착각하지 마. 내가 걱정되는 건, 너야.
“지 기분 잡쳤다고 내 기분까지 잡칠 작정으로 아침부터 전화질이었냐?”
-그런 거 아닌 거 너도 알잖아. 내가 정말 인생 선배로서 충고하는 거야, 심사숙고하라고.
연준은 알고 있었다, 윤현성이 왜 그러는 지. 이미 5년 전 집에서 정해줬던 여자와 딱히 나쁠 것 없는 결혼 생활을 결국엔 불행하게 끝내버린 윤현성의 기막힌 인생사. 물론 지금이야 사랑하는 제수씨와 아기자기 살고 있고 곧 예쁜 공주님도 알현할 예정이긴 하지만 말이다.
“알아, 나도. 나름대로 이미 심사숙고한 사항이야.”
-아아, 왠지 지뢰 밟은 느낌이야. 어제 우리 직원 만난 건 어땠어?
“그냥 뭐.”
현성이 지은영을 언급했을 때, 연준은 어떤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저 우리 직원이라는 단어에는 자연스레 서예은의 얼굴이 떠올랐다. 혼자 있는 사무실인데도 꼭 누군가가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만 같아 연준은 당혹스럽기만 했다.
-우리 회사에서 제일 잘 나가는 분이시다. 특별히 해주는 거니까 너무 까다롭게 굴지 마.
“누가 들으면 내 성격 까칠 대마왕 쯤 되는 줄 알겠네.”
-이따 점심이나 같이 할까?
낄낄대며 현성이 물어왔다.
“선약 있음.”
연준이 힐끗 노란색 포스트잇을 보며 심드렁히 대꾸했다.
-얼굴 한 번 보기 드럽게 힘드네.
“좀 비싸, 내가.”
-지랄. 그래서 혼자 밥해먹는 게 취미이자 특기냐. 주중에 한 번 밥이나 먹자.
실없는 연준의 농을 잔뜩 비아냥거린 현성이 끊는다는 말도 없이 전화를 뚝 끊었다. 뜨거워진 휴대폰을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는데, 왠지 회오리가 한바탕 몰아치고 지나간 느낌이 들었다.
11시 30분.
연준은 포스코 사거리를 목전에 두고 횡단보도의 빨간 신호등에 막혀 차를 멈춰 세웠다. 하릴없이 길을 건너는 사람들을 훑는데, 그 속에 단정한 차림새의 서예은이 섞여 있었다. 가볍게 미소 띤 얼굴로 그녀는 곁에 선 여자의 수다를 경청하고 있었다. 연준은 신호등이 다시 파란불로 바뀔 때까지 서예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2시경.
사무실로 돌아가려던 연준이 포스코 사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아 진입하다 서예은을 보았던 그 횡단보도에서 또 신호에 걸렸다. 그 우연한 일별을 곱씹으며 정면을 바라보던 그의 눈이 반짝거리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번엔 혼자인 그녀가 눈앞을 스쳐지나간다. 어딘지 가벼워 보이는 발걸음과 대조적으로 표정은 무거웠다. 낯이 익다는 그에게 ‘흔하게 생긴 얼굴’이라던 그녀였지만, 아무래도 오며가며 지나치듯 이렇게 그녀와 몇 번 마주쳤던 모양이었다. 까닭에 초면인데도 낯설지 않았고 말이다. 빠앙, 뒤차가 경적을 울릴 때 까지도 서예은의 뒷모습에 넋을 놓아버린 연준은 사이드미러에 비치는 그녀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 갈 동안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
어머, 여기도 차민재 뽀에버 하실 생각들 이세요?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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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은이 사진에 쓰인 글 귀는,
<당신을 위한 기도 - 안도현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죄 짓는 일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나로 하여 그이가 눈물 짓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못 견딜 두려움으로
스스로 가슴을 쥐어뜯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내가 쓰러져 죽는 날에도
그이를 진정 사랑했었노라 말하지 않게 하소서
내 무덤에는 그리움만
소금처럼 하얗게 남게 하소서>
이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