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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예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연……준 씨?”
떨려오는 목소리로 금방이라도 그 큰 눈에서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표정의 예은이 말했다. 그러나 그는……, 정말로 그는……, 그녀가 전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시선으로 예은을 보고 있었다.
“절 아십니까?”
딱딱하고 차가운 경어.
낯선 사람과 마주했을 때의 버릇이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이에겐 웃음의 사촌 동생도 보여주지 않는 연준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지금의 그에게는 예은이 낯선 사람이라는 말이었던 것이다.
“날…… 모르겠어요? 내가…… 기억나지 않아요?”
여전히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이 심하게 떨려오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눈은 무심해 보였다. 이 전의 그였더라면 그 긴 다리로 한 달음에 자신에게로 다가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울지 말라며 그 넓은 가슴에 자신을 가두었을 것이다.
왜, 왜지?
왜, 날 못 알아보는 거지?
예은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예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과 상관없는 타인을 바라보는 눈동자였다. 예은은 그 차가운 무심함에 온 몸이 떨려왔다. 무섭도록 추웠다. 그 추위가 자신을 금방이라도 꽝꽝 얼려버릴 것 같았다.
모든 건 그대로였다. 변한 것은 없었다. 그의 짙고 숱 많은 눈썹도, 그 아래에 날카로워 보이지만 자신을 볼 때만은 한없이 부드러워지던 눈매도, 오만하게 쭉 뻗은 콧대에 선이 뚜렷한 입술도, 구리 빛으로 그을린 그의 얼굴도, 남자다움을 나타내는 얼굴선과 목선, 건장하고 다부진 그의 몸까지도…… 모든 게 그대로였다.
단지 살살 불어오는 바람에도 나부끼는 적당한 길이의 머리카락 위, 둘둘 감겨져 있는 하얀 붕대만이 그가 오늘 아침 자신과 헤어질 때와 달라진 점이었다. 그것이 그가 머리를 다친 환자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연준아! 연준아!”
어디선가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애처롭게 들려오는 소리였다. 예은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자신의 기억이 맞는다면 지난 1년 간 연락을 끊었던 그의 어머니 일 것이다.
마지막. 어쩌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왠지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예감. 언제나 틀려본 적 없던 그래서 어렸을 땐 무서워했던 그 소름끼치던 자신의 예감.
예은은 여전히 자신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연준을 보았다. 그의 모습을 머릿속에 가슴속에 깊이 새겨두기 위해 그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금방이라도 차오를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은 그를 보아야 했다. 눈물을 쏟아내는 것이야 그를 떠난 뒤에라도 언제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를 보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달려오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도 그 소리를 들은 듯 움찔거린다. 누구인지 그도 알고 있는 듯 시선이 응급실 입구를 향한다. 입 꼬리가 조금 부드러워진다. 그 모습에 문득 그는…… 그가 기억을 못하는 건 오직 자신뿐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잊고 싶은지도 모르잖아? 기억해내기 싫은 기억인지도 모르잖아?
어디선가 쏘아붙이는 말투의 목소리가 예은의 귀로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예은은 그가 막노동을 처음 하고 돌아왔던 날 온 몸에 파스 하나를 다 붙이고도 밤새 끙끙 앓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게 씨익 웃던 사람이었다. 그래, 어쩌면 그랬을지 몰라. 힘들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자신을 보면 분명 그의 어머니는 네 년 때문이라며 그가 보는 앞에서 성을 내실 것이고 영문을 모르는 그는 단지 그만 두라고 그럴 것이다. 자신은 아주 추한 모습을 그 앞에서 보일 것이다.
예은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기억하는 마지막이 그리 추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 사라져야 했다. 그의 인생 속에서 자신을 빼내고 자신의 인생 속에서 그를 놓아주어야 했다.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그에게 뭐라고 한단 말인가. 나랑 당신은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아니, 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는 사이였던 것이었다. 잠시 사치를 부린 것이었다. 매일 매일을 힘든 막노동판에서 고생을 하면서도 자신에겐 힘든 모습을 보인 적 없는 연준이었지만 예은은 그 모습이 더 안쓰러웠다. 자신만 아니었던들 지금쯤 어느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도 할 연준이었다. 그러나 오로지 보잘것없는 자신을 위해 탄탄하게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힘들게 살아오고 있는 연준이었던 것이다.
“아, 죄송해요. 사람을 잘못…… 보았습니다. 빠른 쾌유 바랍니다.”
활짝 웃는 웃음이 금방이라도 흐트러질 것 같아 숨 돌릴 새도 없이 빠르게 말을 내뱉고 예은은 그에게서 뒤돌아섰다, 2년을 사랑해 온 사람에게서. 눈을 감은 채 밀려오는 옅은 향기만 맡고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찾아낼 수 있는 예은은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말을 하고는 지난 1년 간 살을 맞대고 살아온 그에게 마치 남인 양 빠른 쾌유를 바란다는 말을 하고 뒤돌아 선 것이었다.
그렇게 그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 속으로 한 발자국 내 디딘 것이었다. 그제야 참아왔던 눈물이 한 방울씩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병원으로 달려오기 전 들었던 말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축하합니다! 4주째 입니다.’
*
멀리서 급히 자신을 찾으며 달려오고 있을 어머니를 기다리는 동안 뒤돌아 사라지는 여자를 바라보던 연준은 갑자기 가슴이 쿡쿡 쑤시며 아파 옴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날카로운 바늘로 살을 찌르는 아픔이었다. 아니 자신의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는 아픔이었다.
무언가를 애타게 바라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러다가 실수였다고 말을 하면서도 원망하고 책망하는, 그럼에도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 슬픈 눈으로 이해한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던 여자가 사라져갔고 연준은 왠지 아파오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무언가 뜨거운 느낌이 얼굴을 타고 뺨을 지나 턱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눈물. 단지 모르는 여자가 실수를 인정하고 간 것뿐인데 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건지 연준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두고 온 것 같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무얼까, 난 무얼 두고 온 것일까?
왜, 왜 난 눈물을 흘린 걸까? 단 한 번도 흘려본 적 없는 눈물을.
대체 왜?
‘왜’라는 질문과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순식간에 연준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리고 그 순간 금세 깨져 버릴 듯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가슴은 가슴대로 찢어질 것만 같은 아릿함으로 연준의 눈에서 눈물을 자아냈다. 머릿속을 가득 메워버린 그 궁금증으로 연준은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기억을 되살리려 해도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아니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는 더욱더 하얗게 비워져 갔고, 여자의 활짝 웃는 모습만이 기억에 남겨졌다.
1. 선보는 날
모처럼 화사한 연노란색의 원피스를 꺼내어 입었다. 즐겨 입는 색이 아니라 어딘지 약간은 어색하고 쑥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결국엔 어정쩡하게 거울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피식거리듯 웃으며 지금의 자신의 모습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도 잠시 그에 맞추어 약간은 화사하게 보일 정도로 곱게 화장을 했다. 그리고는 거울을 보며 화사하게 웃는 연습을 수 없이 해보았다.
설렘!
그것이었다. 그것보다 더 정확하게 지금 자신의 심정을 설명할 단어는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첫 소풍 전날의 그 가슴 떨리고 설레던 그 기억보다 생애 첫 여행이자 집 밖에서의 첫 외박이었던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 때 보다 한결 더 떨리고 설레는 순간이었다.
“엄마! 엄마, 오늘 선 봐요?”
리은이 어느 새 노란색 상하로 되어있는 유치원 복을 입고 예은에게로 다가와 말했다. 리은의 눈에는 노란색 옷을 입은 엄마의 모습이 마냥 예쁘게 보이기만 했다.
“너 선이 뭔지 알어?”
예은은 허리를 숙여 자신의 곁에 다가선 아이의 눈을 마주보며 살며시 끌어안아 올렸다. 이제는 제법 무게가 나가지만 아직은 안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쩌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들어 올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간이 참 빨리 간다는 말의 뜻이 절로 이해됐다. 헤어지면 금방이라도 죽을 줄로만 알았던 그 시절은 이제 기억조차 희미해져 버렸다. 이 아이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버티기 힘들었겠지.
“응. 선생님께서 남자하고 여자하고 처음 만나는 거랬어요. 그래서요, 서로 인사하는 거래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예은의 귓가에 아이의 똑 부러지는 대답이 들려왔다. 아이의 대답에 예은은 거의 자신의 얼굴 가까이에 다가와 있는 아이를 보며 살며시 웃어 주었다. 그러자 마주 웃어 오는 아이의 얼굴에서 아직 잊히지 않은 추억 속의 아니 결코 죽는 그 순간까지 잊히지 않을 사람의 모습이 언뜻 겹쳐져 보였다. 예은은 아주 가끔씩 보이는 그 모습에 여전히 저도 모르게 온 몸에 아주 자그마한 털까지 모두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아이를 바닥에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나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쓸데없이 증명하기 위해서인 양 여전히 웃으면서 아이의 뺨에 살며시 뽀뽀까지 하는 여유로움을 보였다.
“어머, 우리 리은이 똑똑하기도 하지. 그래, 엄마 오늘 선 보러 가. 우리 리은이 보기에도 엄마 예뻐?”
예은이 빠르게 펌프질하는 심박동을 애써 무시하며 여전히 평온한 모습으로 빠르게 물었고 그 동안 리은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신의 볼을 정확히는 예은이 뽀뽀를 해 준 지점을 쓱쓱 문지르며 살포시 이마를 찌푸린 채 그 작은 입술을 열어 말했다.
“응. 엄마 예뻐. 너무 예뻐서 우리 엄마 안 같애. 근데 엄마! 화장 좀 하고 뽀뽀하지 마. 얼굴에 묻잖아.”
마치 다 큰 어른이 아이에게 꾸중을 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그 말에 슬쩍 화가 난 듯 예은이 두 손을 허리에 살짝 얹었다. 그리고는 아이를 살며시 흘겨보았다.
“정말 그럴 거야? 엄마 삐쳐버린다.”
약간은 삐친 말투로 예은이 말하자 언제나 그래왔듯 리은이 살짝 발꿈치를 들어 올리고는 예은의 허리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아냐, 리은이 잘못했어. 닦으면 되잖어.”
아이의 말에 예은은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살짝 아이의 볼에 뽀뽀를 해 주었다. 대체 누가 아이고 누가 엄마인지 구분이 안 된다는 생각에 슬며시 웃음이 베어져 나왔다.
“그래. 우리 리은이 참 착하다. 리은인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리은은 예은의 입술이 닿았던 볼을 문질러 닦으며 여전히 약간은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다가 예은과 눈을 마주치자 자신이 언제 얼굴을 찌푸렸냐는 듯 배시시 웃어보였다. 그러나 예은의 마지막 질문에 다시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마치 ‘엄마 그런 유치한 질문은 그만 하세요!’ 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러나 리은은 그 조그맣고 앙증맞은 입을 벌려 그 유치한 질문에 아주 잘 어울리는 유치한 대답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엄마. 리은인 엄마만 있으면 돼. 아무것도 없어도 엄마만 있으면 돼.”
“어머, 늦겠다. 리은이 먼저 나가서 신발 신고 있어.”
예은은 리은의 똑 부러지는 대답에 왠지 호들갑스럽게 아이를 현관으로 내 몰았다. 그렇게 아이를 내 모는 예은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 흘려 내보낼 듯 잠겨 있었고 살며시 떨려왔다.
예은은 아이가 현관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는 몸을 돌려 다시 거울을 보았다. 어느새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있었다. 거울을 통해 아이가 신발을 신느라고 현관 턱에 걸터앉는 모습이 비춰졌다. 예은은 화장대 옆에 놓아둔 자신의 숄더백과 하얀색 카디건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신발을 신고 아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연노란색 칠부 원피스에 하얀색의 카디건을 걸치고 아이보리색 숄더백을 어깨에 메고 있는 예은은 따스한 4월의 화사한 느낌에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오늘은 선을 보는 날이기 때문에 오랜만에 신경 써서 차려입은 것이었다. 아주 특별한 선이었다. 예비 신랑을 만나고 예비 신부를 만나 처음 인사를 나누는 자리였기에 보통의 선과는 아주 다른 특별한 선이었다. 사실 일이니까 특별하면서도 늘상 있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정말 두 번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이 세상에 한 번 뿐인 아주 특별한 선이었다.
6년 전의 어느 날, 어느 순간까지 자신과 사랑의 말을 속삭여오고 그 사랑을 아주 비밀스럽고 은밀한 동작으로 매일 표현해주던 남자를 그가 결혼하려는 여자와 함께 만나 인사를 하는 자리였다. 그러니까 정말 눈이 시리도록 맑은 날 보는 오늘의 선은 잊히지 않을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
“처음 뵙겠습니다. 하나웨딩 서예은입니다.”
예은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한 쌍의 연인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입구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 서서 자신을 먼저 소개했다. 그러자 남자가 살짝 웃음을 머금고는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왔다.
“네, 반갑습니다. 이연준입니다. 어떻게 금방 알아보셨네요?”
부드러운 목소리에 상냥한 미소.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대로 여전히 따스하기만 한 그의 손을 맞잡아 악수를 나누며 여전히 그의 기억 속에 자신은 없었지만 예은은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자신의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미리 사진을 봐 두었습니다. 사진이랑 실물이랑 별 차이가 없으셔서 쉽게 알아볼 수 있었고요.”
예은은 담담하게 말하려 노력을 했으나 말투에 씁쓸함이 은근히 묻어 나오는 것은 저로써도 어쩔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그 씁쓸함을 눈치 채지 못하길 바랄뿐. 예은은 속으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대답이 듣기엔 꽤나 그럴듯하긴 하지만 사실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한 거짓말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서예은은 이연준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고 자신은 두 눈을 꼭 감은 상태라고 해도 찾아낼 수 있었다. 사실 서예은은 세월이 흘러 이연준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해버린다 해도 사진 따위로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그를 충분히 찾아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건 본능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이연준이기 때문에, 서예은의 본능은 그럴 수 있었다.
예은은 조용히 연준의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보았다. 차분하고 정숙한 분위기가 풍기는 흔히 말들 하는 참해 보이는 여자였고 연준의 신붓감으로는 더할 나위 없을 것만 같은 여자였다. 이번엔 마음에 꼭 들어 하셨겠지? 보나마나한 생각.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리라.
금방이라도 뚝, 눈물을 흘려버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예은은 여자에게도 환하게 웃어주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자신의 할 일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하나웨딩에서 맡아온 프로젝트 중에서 이번 결혼이 제일 큰 것이었고, 이 결혼에 사활을 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공해야했고, 그는 결혼을 해야 했다.
“두 분 참 잘 어울리시네요?”
예은이 친근한 어조로, 특유의 밝은 목소리로 신부에게 얘기했다. 그 말에 여자의 얼굴이 살며시 붉어졌다. 그 모습에 연준이 여자의 손을 살며시 잡아 주는 것이 예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모습에 마음 상해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거짓이겠지만 내색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예은은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니 오히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그들의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었다.
“이 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예은은 약간 낮아진 톤으로 말을 꺼내고는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지도 않은 채 먼저 휙 돌아서 자신이 앉아 있었던 자리로 향했다. 자꾸 기분이 쳐지려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든 만남이 되고 있었다. 그저 석 달이란 시간이 어서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조금씩 마음 한 구석에서 싹 터 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예은은 그들이 나란히 자리에 앉는 것을 보며 맞은편에 조심스레 앉았다. 연준이 무슨 말을 했는지 여자가 살며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은영 고객님, 혹시 낯가리세요?”
심술이었다. 연준의 말에 미소를 짓고 있는 은영의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싶었고 그들의 행복해 보이는 다정한 모습을 잠시나마 차갑게 식혀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성과는 바로 나타났다. 부작용이라면 그 영향력이 연준의 미소에까지 미쳤다는 거지만.
“그건 왜 물으시죠?”
“아, 자주 봐야 해서…….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딱딱한 어조의 연준에게 ‘실수’였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예은이 계획적으로 당황한 투로 말을 건넸다. 그러자 연준의 얼굴에서 미안해하는 기색이 엿보인다. 자신이 너무 심했던 걸까 고심한 결과일 것이다. 그는 그렇게 잘 속아 넘어 갔었으니까. 예은은 괜찮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은영의 차분한 대꾸를 듣던 예은은 문득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졌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못난 서예은. 그래서 결국 스스로를 꾸짖게 된다.
“사무실에서 뵙는 게 맞는데, 요새 분위기가 좀 어수선해서요. 괜찮으시죠?”
묻는데 메뉴판을 든 카페 직원이 테이블에 다가왔다.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직원에게 건네받은 메뉴판을 예은이 연준에게로 넘겼다.
“뭐로 하시겠어요?”
가볍게 묻는다.
그리고 속으로 가볍게 자답. 유자차.
“저는 유자차로 하죠. 넌 오렌지주스로 할래?”
‘저는 유자차로 하죠. 넌 데운 우유지?’하며 싱글거리던 그의 모습이 순간 겹쳐지지만 예은은 빙그레 웃는다. 그대로구나. 생각하며 연준에게서 건네받은 메뉴판을 도로 직원에게 건넸다.
“유자차 하나, 오렌지주스 하나, 그리고 우유 다시 따끈하게 데워서 한 잔 주세요.”
가볍게 목례를 한 직원이 카운터로 돌아갔다. 우연히 발견한 장소였다. 마트 등에서 파는 유자차를 내오는 보통의 가게들과 달리 직접 유자청을 담가 판다는 곳. 마트에 파는 유자차보다 직접 담근 유자차를 고집하던 그가 생각나면 가끔 찾았던 이곳에 그와 함께 오게 될 줄 몰랐다. 늘 유자차를 마시면 그가 마음에 걸렸는데, 괜히 그런 기분이 들었었는데 왠지 마음의 짐 하나가 이렇게 덜어진 것 같아 예은은 연신 싱글거렸다. 꿈같아.
“특이 취향이시네요, 데운 우유라니.”
기억해주지 않는 것도 괜찮을 만큼.
“그런 말 많이 들었습니다.”
연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서빙을 위해 카페 직원이 다시 돌아왔다. 연준 앞에 향이 좋은 유자차를 놓고 은영의 앞에 주스를 놓고 자신의 우유를 받았다. 두근. 두근. 그가 유자차를 한 모금 마시는 동안 그렇게 내내 예은의 심장은 요동을 쳤고, 다시 한 모금 마시는 동안 얼굴이 살짝 상기됐다. 파는 유자차의 맛은 귀신같이 아는 연준이 연이어 유자차를 마신다는 건 마음에 든다는 의미였으니까. 싱긋 웃으며 예은은 준비한 자료를 연준과 은영의 앞에 내밀었다.
“어머님께서는 무조건 최고로 해달라고 하셨는데, 그래도 당사자 의견이 중요하잖아요. 지금 드린 건 진행 순서고요. 장소 예약 등은 상담하면서 결정하겠습니다.”
“순서가 중요합니까?”
나직한 목소리로 연준이 물어왔다. 탐탁치 않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뒤바뀌어도 크게 상관없는 게 대부분입니다. 그래도 어떤 준비가 필요한 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한 거니까 훑어보시라고 드린 겁니다.”
예은이 설명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까칠한 성격을 드러내는 성격이 고스란히 보였다. 변하지 않았구나. 왠지 기쁘다. 여전한 그의 모습을 하나하나 발견할 때마다 가슴이 뻐근하면서도 기뻤다.
그렇게 약 30분. 예은은 연준과 은영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고 가끔은 질문을 받아가며 가볍게 상담을 이어갔다. 활짝 웃다가 갑자기 눈물이 뚝 흐를 것 같아 당황하다가 가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조심히 연준을 마음에 담았다. 마음에 봄바람이 살랑거렸다.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제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근데 서예은 씨.”
조용한 부름에
“혹시 예전에 우리 만난 적 있나요? 낯이 꽤 익은데.”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죄 지은 것도 아닌데 괜히 제 발이 저린다. 졸지에 당한 급습에 예은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흔들리는 시선을 내리깔고
“아뇨, 없어요.”
입술에 침도 바를 새 없이 거짓을 입에 담았다. 숨길 수 없었던 건 떨리는 목소리. 예은은 마음을 굳게 먹고 연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좀 흔하게 생긴 얼굴이라서 다들 낯설지 않다고 합니다. 아마 그래서 그런 걸 겁니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듯 그의 시선이 날카로웠지만 예은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흔하게 생긴 얼굴이라는 건 진실이었으니까. 예은은 다시 미소를 짓는다. 지금 필요한 건, 영업용 미소였다.
*
가게 안은 밝지 않았다. 어둑한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왠지 은밀한 어떤 일을 진행할 때, 사람들 눈을 피해 누군가를 만나야 할 때 와야 할 곳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그런 느낌 때문에 이곳을 찾는지도 몰랐다. 벽에 진열된 각종 술들을 보는 것도 꽤 괜찮았고. 연준은 가게 안을 휙 둘러보았다. 술이 진열된 벽면을 따라 대리석으로 테이블이 길게 놓여 있었고 테이블 안쪽의 유니폼을 단정하게 입은 직원 몇이 바깥쪽의 일정 간격으로 놓인 스툴 의자에 드문드문 앉은 손님 몇을 상대로 바쁘게 몸을 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는 찾는 사람이 없는 듯 연준의 시선이 가게 중앙의 오픈 테이블로 향했다.
“오셨어요? 안쪽 룸으로 오시라던데요.”
지배인이 웃는 낯으로 그를 맞이했다. 연준은 그런 그에게 마주 웃어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쪽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탁, 탁. 옮길 때마다 구두에 와 닿는 바닥이 울린다. 마치 여자를 처음 봤을 때 가슴이 울린 것처럼. 미간이 좁혀진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생각은 끊이질 않았다, 골치가 아플 정도로. 하지만 ‘흔하게 생긴’거라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피식 웃음으로 생각을 툭 털어내며 원재는 룸 안으로 들어섰다.
“새신랑 얼굴이 왜 이따위냐?”
구준휘가 보자마자 씨부렁거린다.
“새신랑 얼굴은 어때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냐? 있음 좀 갖고 와라, 구경 좀 하게. 너는 어째 보자마자 그따위냐?”
그래서 연준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갈 수 없었다.
“심통 나서 그러지. 하나 둘 다 가버리니까 이제 나랑 놀아줄 사람이 줄어들잖아.”
“심통도 받아줄 사람한테 부려야지.”
나무라며 연준이 자리를 잡고 털썩 앉는다. 이미 저 혼자 시작을 했는지 테이블에는 가벼운 안주와 지난번에 왔을 때 킵했던 술병이 잔과 함께 늘어져있었다.
“저는 받아주면 큰일 난대?”
“눈치 없는 놈. 누가 큰일 난대? 상태 봐가며 부리라는 거지.”
“지랄. 한 잔 받기나 해, 이놈아. 날아가는 청춘한테 작별인사 해야지.”
“아직 석 달 남았거든?”
친절하지 않은 말투로 친절하게 설명하면서도 연준은 준휘가 내미는 술을 거절하지 않았다. 쪼르륵. 잔에 차오르는 소리가 맑고 경쾌하다. 문득 여자의 경쾌했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미친 거야,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을 툭 털어내듯 술잔을 툭 털어냈다.
“결혼식은 어디서 할 거냐?”
곱지 않은 목소리가 생각을 파고들었다.
“알아봐야지.”
“좋냐?”
“넌 좋아서 하냐? 때 되니까 하는 거지. 어머니도 좋아하시고.”
“현성이는 좋아 죽겠다더라.”
‘미친놈이라니까.’라는 의미가 강한 말에 연준이 피식 웃었다.
“정현이도 좋아 죽겠대.”
‘그 놈도 미친놈이야.’ 준휘의 투덜거림이었다.
“너도 해 보던지. 그럼 알거 아냐, 좋은지 싫은지.”
끔찍한 소리 말라는 듯 준휘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오만가지 인상을 다 써댔다.
“태진이까지 결혼해서 좋다고 그럼 그 때 생각해 봐야지.”
준휘가 진지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스스로 아주 기특한 생각을 해냈다는 어조에 연준이 못 말리겠다는 듯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나이는 서른둘인데 말하는 폼은 여전히 고등학교 시절 그대로였다.
“애들은?”
“좋아 죽겠다는 놈들은 못 나온대.”
준휘가 툴툴댔다. 그래서 심통이 난 모양이었다. 이미 결혼을 한 녀석들이 안 놀아준다니까. 이연준도 곧 결혼을 하게 되면 안 놀아주게 될지도 모르니까. 노는 거에 목숨 건 것도 아닌 놈이. 게다가 저는 툭하면 뭔 일이다, 뭔 일이다 하면서 모임에 빠지는 주제에 말이다. 웃기지도 않는 놈.
윤현성, 김정현, 구준휘, 진태진 그리고 자신까지 다섯.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 되면서 어쩌다 엮였다. 그 이후로 다섯이서 모두 같은 반이 된 적은 없지만 그 시절 내내 그리고 같은 캠퍼스를 누비던 대학시절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그들은 함께였다. 그가 2년간 종적을 감추었던 그 기간을 제외하고. 생각에 문득 여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저도 모르게 자신을 미소 짓게 했던. 서예은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보조개가 예쁘게 팬 얼굴로 환하게 웃던, 데운 우유를 주문하던 이상한 여자. 울 것 같은 얼굴로 잘도 웃고 있던 그녀가 데운 우유를 주문하는 게 왜 당연하게 느껴졌을까?
“……야, 이연준!”
“어. 왜?”
정신을 차리자 못마땅한 얼굴로 노려보는 준휘와 시선이 마주쳤다.
“바른대로 대. 무슨 생각 했어?”
“별거 아냐.”
“오호, 별 거 아닌데 생각하면서 씨익 웃기까지 해? 이연준이? 여자는 아닐 테고, 뭘까?”
집요한 구석이 있는 놈이었다. 게다가 저는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인데 가끔 날카롭게 파고드는 데가 있다.
“…….”
“여자구나!”
게다가 가끔은 없던 눈치까지 생긴다. 것도 꼭 쓸데없는 데만.
“근데 결혼할 여자?”
연준은 고개를 내저었다.
“나랑 스무고개 하자는 거냐? 아님 내 속 답답해서 터져 죽는 꼴 보자는 거냐? 것도 아님 말하기 싫은 거냐? 이놈의 자식아, 말을 해야 알아듣지 그렇게 입 꼭 다물고 있으면…….”
“그냥 지나치는 여자야, 인마. 곧 결혼할 놈한테 여자는 무슨.”
“오호라, 지나치는 바람이라고?”
놀리는 준휘의 눈빛이 반짝였다.
“얘기가 어떻게 그 방향으로 튀냐?”
“바람은 바람이지. 늦바람 무섭다더라.”
“뜬금없이 웬 바람타령?”
따따부따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 준휘의 입을 막는데, 골치 아프게도 이번엔 진태진이 등장했다. 이상한 여자 때문에 괜히 골치만 아파지게 생겼다. 연준은 잔뜩 인상을 쓰고 말았다.
*
노란색이 유행인가? 차 창밖 풍경에 의미 없는 시선을 두던 연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는 삼성역 현대백화점 앞 사거리에서 오크우드가 있는 방향으로 좌회전 신호를 받기 위해 잠시 멈춘 상태였다. 연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술에 취해 비틀 거리는 사내의 손에 손목을 잡힌 채 실랑이를 하는 듯 보이는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연준은 눈을 떼지 못했다.
“잠깐 저 쪽으로 차 좀 대 주세요.”
연준의 다급한 말에 운전석에 앉아있는 대리운전 기사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곧 인도 가까이에 차를 멈춰 세웠다. 연준은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며 급히 차에서 내려 방금 지나친 거리를 되짚어갔다.
“미안, 많이 기다렸지?”
숨찬 목소리로 연준이 말했다. 예은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아뇨, 막 나오던 참이었어요.”
예은의 조용한 목소리에 연준의 조급했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하지만 연준의 시선은 예은의 손목을 여전히 붙들고 자신을 아니꼬운 시선으로 쳐다보는 남자에게 향해있었다. 그 시선에 문득 자신이 처했던 상황이 생각나 그제야 예은이 붙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팔을 비틀었다.
“그 손 놓으시죠?”
차가운 목소리가 서늘한 공기를 타고 퍼졌다. 그의 어조에서 풍겨 나오는 위압감 탓일까? 지나가는 예은의 길을 막고 섰던 술에 잔뜩 취한 행인이 예은의 손을 놓더니‘에이, 재수가 없으려니까.'라는 식의 말을 중얼거리며 슬금슬금 물러섰다.
“고맙습니다.”
행패를 부리던 남자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라진 뒤에야 연준을 보며 예은이 예의바른 인사를 건넸다. 연준의 입 꼬리가 비틀어져 있었다.
“가죠.”
무엇이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걸까? 그가 말하지 않아 예은은 알지 못했다. 그저 그 비틀린 입 꼬리를 보며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생겼구나,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건 예은이 알고 있는 그의 오랜 버릇이었다.
“저…….”
연준이 왜 그러냐는 시선으로 쳐다본다.
“근처에서 저는 버스타면 됩니다.”
“그러니까 너는 그만 꺼지라는 말씀이시군요.”
밋밋한 연준의 말에 예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당황한 시선으로 예은이 연준을 응시했다.
“아뇨, 그런 말 아닙니다. 더는 폐 끼치기 싫어서. 그게 죄송하니까.”
“그런 거 아니면 가죠.”
연준이 뒤돌아 앞장섰고 예은이 뒤를 따랐다. 한줄기 바람이 스쳐지나간다. 예은은 바람결에 흩날려오는 익숙한 그의 체취에 그만 마음이 설레 버렸다. 꿈이라면 절대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좋아서 너무 좋아서 예은은 그만 히죽 웃어버렸다. 히죽. 히죽. 웃으며 바닥에 그려진 그의 그림자를 밟으며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를 따라 걷는다. 연준이 왼발을 내디디면 자신도 왼발을. 연준이 오른발을 내디디면 자신도 오른발을. 그러다 그가 멈추면 자신도 걸음을 멈춘다. 그렇게 멈춘 뒤, 한참을 그가 움직이지 않아서 예은은 슬며시 시선을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마치 시간이 과거로 회귀한 것만 같던 순간이 깨져버렸다. 그의 시선에 담긴 자신은 그저 낯선 타인일 뿐이다.
“타시죠.”
연준은 어느새 차문까지 연 채 예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 아, 네.”
예은의 곁에 앉아 차문을 닫으며 연준이 물어왔다.
“집이 어느 방향입니까?”
“잠실대교 북단으로 가야합니다.”
곁에 앉은 연준 때문에 예은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 떨려왔다.
“그 쪽으로 가시죠.”
대리 운전기사를 향해 한마디 툭 내던진 뒤 시트에 몸을 파묻듯 앉은 연준이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제야 예은은 그에게서 옅은 스카치위스키 향이 난다는 걸 깨달았다.
“저기…… 고맙습니다.”
연준은 대답이 없었고 예은은 곁눈질로 연준을 힐끔거렸다. 잠든 건가? 생각은 길어지는 침묵에 단정이 되었다. 예은은 그제야 편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 꽤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다. 하지만 여전했다. 예은이 기억하고 있는 그와 크게 변한 것 없는 모습이었다. 반듯한 이마를 지나 오만하게 쭉 뻗은 코를 따라가다 보면 적당한 길이로 예쁘게 파인 인중 아래 선이 또렷한 입술이 나타난다. 입술은 위에가 아래보다 약간 얇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얇지도 두껍지도 않았다. 그대로야. 생각에 슬그머니 예은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그러다 마치 정리라도 해놓은 듯 가지런히 난 속눈썹도 그대로일지 궁금해졌다. 예은은 시선을 그의 눈으로 돌렸다. 그리고 어느새 눈을 뜬 연준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놀란 예은이 슬쩍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려버렸다.
“서예은 씨.”
하지만 나지막한 그의 부름에 자동반사반응처럼 도로 원상복귀 된다.
“마음에 들었어요?”
“네?”
당황한 예은이 되물었다.
“내 얼굴…… 마음에 들었는지 물었어요.”
그러자 그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인다.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발음을 한 탓일까, 아니면 잠깐 말을 멈췄던 그 순간 느꼈던 애간장을 꽉 죄어오던 긴장감 때문일까. 그의 말투가 꽤나 나른하게 느껴진다.
“아, 그게…….”
입술을 꼭 깨문 채 할 말을 찾는 예은을 바라보는 연준의 눈길이 부드러웠다. 예은은 그의 시선을 피할 목적으로 창밖을 내다보다 차가 잠실대교로 진입하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다리 건너서 직진하다가 파리 바게뜨가 보이는 사거리에서 세워주시면 됩니다.”
살았다는 듯 숨도 쉬지 않은 채 빠르게 행선지를 말하는 예은을 보며 연준이 실소를 흘렸다.
“내가 잡아먹을 것 같이 굴었습니까?”
“네?”
“집까지 가요.”
“거깁니다, 집.”
“파리 바게트가 집이예요?”
싱글거리는 말투로 연준이 물었다. 예은이 입술을 꼭 깨문다.
“그러다 피나니까 입술은 그만 깨물고 어딘지 말해요. 안 잡아먹을 테니까.”
사거리가 코앞이었고, 차는 세울 생각이 없어보였다. 저도 모르게 깨물고 있던 입술도 얌전히 다물며 칼자루를 쥔 건 상대라는 걸 예은은 인정했다.
“사거리에서 좌회전해서 직진하다보면 맞은편에 학교가 나오는데 그 학교 있는 골목으로 직진해서 들어가다 보이는 놀이터에서 세워주시면 됩니다.”
“놀이터가 집이예요?”
“아뇨, 놀이터 옆 두 번째 집입니다.”
“참 잘했어요.”
놀리는 어조의 말에 예은이 결국 눈을 흘기고 말았다. 하하 유쾌하게 들리는 그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차안에 울려 퍼지는 동안 차는 부드럽게 예은이 연준에게 설명한 목적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평소에는 길게만 느껴지던 길이 유난히 짧게 느껴졌다.
*
‘보조개가 예뻐요.’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그 말을 남긴 채 그가 떠났을 때,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굳어버린 예은의 눈에서 결국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져버렸다. 지워야지, 지워야지 하면서도 그를 지워낼 수 없었다. 그게 예은이 그를 곱씹게 되어버린 이유였다. 그래서 예은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그를 만났던 날, 굳이 집 앞까지 따라왔던 그가 돌아가기 직전 그녀에게 남겼던 말. ‘보조개가 예뻐요.’
예은은 얼른 눈물을 훔쳐냈다. 그리고 가방에서 열쇠를 찾아 대문을 열고 2층으로 곧장 올라갔다. 늦을 것 같다고 집주인인 영숙에게 미리 연락을 넣긴 했지만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늦어버렸다. 사실 영숙에겐 늘 미안하고 고마웠다. 예은이 처음 아이를 가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곁에서 지켜봐주고 도움이 필요하면 손을 내밀어주었던 사람이 영숙이었던 것이다.
“이모.”
예은은 조심스레 현관문을 두드리며 영숙을 불렀다. 그녀는‘아줌마’라는 호칭이 싫다며 ‘이모’라고 불러달라고 했었다.
“어, 이제 와?”
현관문이 열렸다. 자다 깬 듯한 얼굴의 영숙이 웃는 낯으로 예은을 맞는다. 예은도 영숙을 보며 마주 웃지만 사실 그녀의 곤한 잠을 깨운 것 같아 미안했다.
“늦어 죄송해요, 저 땜에…….”
“그런 소린 하지도 말어. 나도 혼자라 적적한데 잘 됐지 뭐.”
영숙이 안으로 들어서며 괜찮다는 말로 예은이 자신에 대해 마음에 지고 있는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내 주려했다. 예은은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리은이는요?”
“아까 신나게 놀더니 지금은 곯아 떨어졌어. 그냥 여기서 재우는 건 어때?”
아마도 그건 ‘리은 엄마도 피곤할 텐데 무겁게 데리고 내려가지 말고.’란 의미일 것이다. 예은은 그런 영숙의 배려가 새삼 고마웠다.
“괜찮아요. 이모도 좀 쉬셔야 하고요.”
생글 웃는 얼굴로 예은이 말하며 영숙을 따라 들어선 안방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리은을 발견했다. 앙증맞은 입술을 약간 벌린 채 잠이 든 걸 보니 영숙의 말대로 낮에 어지간히 논 모양이었다.
“힘들지 않으셨어요? 저렇게 곯아떨어진 걸 보면 낮에 꽤 시끄러웠을 것 같은데.”
“뭐 애들 다 그렇지. 괜찮아, 나 아직 한창 때야.”
영숙이 자신을 무시하지 말라는 투로 장난스럽게 건넨 말에 예은이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예은이 리은을 안아 올리려는 데
“이리 잠깐 앉아 봐.”
영숙이 예은의 옷을 잡아끌며 말했다. 왜 그러냐는 시선을 보내며 예은이 영숙이 잡아끄는 대로 끌려가 앉았다.
“저기……, 있잖아.”
영숙이 머뭇거리는 품새가 심상치 않았다. 웬만한 일에는 눈도 꿈쩍 않는 영숙이란 걸 알기에 뭔가 입을 떼기가 곤란한 이야기인가 보다며 예은이 머릿속으로 월세 계약 기간을 따져보았다.
“월세 올려 드려요?”
벌써 몇 년째 영숙은 예은의 사정을 봐주고 있었다. 그래서 예은은 주변 시세보다 훨씬 낮은 월세를 내고 있었지만 그게 마냥 편하지만도 않았다. 툭하면 아이까지도 영숙에 맡기고 있는 상황에서는 말이다.
“그런 소리 마. 내가 그럴 거 같았으면 애도 안 봐줘.”
섭섭해. 한마디로 말하자면 영숙의 말은 그거였다.
“곤란해 하셔서 그랬어요, 편하게 말씀하시라고. 기분 상하셨으면 죄송해요.”
“다른 게 아니라…… 선 자리 들어왔어.”
“아!”
“겨우 ‘아!’ 야?”
자신을 따라하는 영숙을 보며 예은이 배시시 웃었다.
“이번엔 생각 좀 해 봐. 혼자 애 키우는 것도 벅차잖아. 총각은 아니래도 집안 번듯하고 직장 탄탄해. 뭐라더라 무슨 대그룹 연구소 직원이라던데. 암튼 여자가 바람피워서 이혼했다는 데 애는 없고 나이는 서른다섯에 키도 훤칠하고 인물도 안 빠져. 오며 가며 리은엄마 몇 번 본 모양이야. 남자가 아주 애가 달았…….”
영숙의 입에서 봇물 터지듯 이야기가 술술 터져 나왔다. 가만 가만 듣고 있던 예은이 영숙을 지그시 응시했다.
“이모. 저 아직은 생각 없어요. 시간이 좀 더 필요하기도 하고.”
“아직도 기다리는 거야? 이제 그만 기다려. 올 사람이었으면 벌써 왔어. 벌써 몇 년째야, 응? 그쪽은 이제 새장가 갔을지도 모르는데.”
영숙은 사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기다리는 거 아니에요. 아직 다른 사람을 받아 들일만큼 마음에 여유가 생기지 않아서 그래요.”
그리고 이모, 그 사람 석 달 후면 새장가가요. 예은이 속으로 덧붙여 말하며 살풋 웃었다. 그런 예은을 안쓰러운 눈길로 쳐다보던 영숙이 예은의 머리를 쓰다듬어 내렸다.
“어휴, 모진 사람. 나쁜 사람. 이 예쁜 것을 두고 발길이 떨어졌을까? 응? 그렇게 아끼고 아끼더니 어떻게 그렇게 한 순간에 돌아설 수 있냔 말이야.”
결국 영숙이 예은의 손을 붙들고 한탄을 하다 눈물까지 찔끔 거린다.
“아니에요, 그 사람도 쉽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었던 것뿐이에요, 그 사람도.”
그러더니 희미하게 웃으며 아직도 연준을 두둔하는 예은을 보며 영숙이 통곡하듯 울음을 터뜨렸고 예은이 영숙을 다독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영숙이라도 그들이 어떻게, 왜, 무엇 때문에 헤어졌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건 예은이 입을 꾹 다물고 말을 해주지 않아서였다. 예은은 그 때, 영숙에게 그저 일이 생겨서 잠시 헤어져 있기로 했다고만 말했다. 기억을 지워버릴 정도로 삶이 힘들었던 사람, 지금은 삶이 편안해 보이는 사람. 그거면 됐다, 영숙을 다독거리며 예은은 생각했다.
당신, 지금은 편안한 거지?
*
이건 뭐니? 이러실 분들 보입니다만,
백번 고민하다 올리는 '작아용' 글입니다.
디엔드는 어쩌고? 하시겠지만,
사실, 디엔드와 이 놈 끄적이면서,
글 하나 수정중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잡히는 대로 쓰고 있;;
이번 편만 이렇게 길~~~~~~~거고요.
다음 주에 디엔드가 올라올 지, 이 놈이 올라올 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디엔드 지금 안 풀려서 머리 뜯는 중이거든요;;
올해 목표가 디엔드와 이 지극히 할리퀸스러운 제목의 잊혀진 계절
완결이니까, 중간에 글이 뜸하더라도 이해 부탁드리고요.
어쨌건, 시작은 했으니 끝은 봐야겠지요;;
잡담이 너무 길었;;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혹시, 기다리실지 몰라 덧붙이건데, 글은 아마도 화요일 이후에나 올라오지 싶습니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