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속은 좀 시원해졌어요?”


시동을 끄며 원재가 묻는다. 일찍 출발 한다고 했는데 서울에 들어서면서부터 퇴근하는 차량들로 도로는 이미 꽉 막혀있었다. 그래서 집 앞에 도착한 시간이 7시 30분. 날은 저물어 사방은 이미 깜깜했다. 겨울로 들어서는 길목이니 그게 당연한 거지만 채희는 어쩐지 아직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닌데도 그렇게 느껴져 버리게 하니까 그런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잘 모르겠어요.”


속이 왜 시원해져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아까 채희 씨 처음에 봤을 때 나한테 채희 씨가 그랬어요. ‘속이 답답해요, 바람이 쐬고 싶어요.’라고.”
“아니…….”
“했어요, 분명히.”


원재가 단호히 말했다. 그래서 채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버린다.


“꼭 그걸 말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말하며 빙긋 웃는 원재의 부드러운 시선에 채희는 그 의미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떡거렸다.


“아, 그나저나 실패네. 거기 제가 답답할 때 자주 갔던 곳이거든요. 속 시원해지라고 데리고 갔더니…….”
“아니에요, 오늘 고마웠어요.”


의례적으로 느껴지는 채희의 말에 원재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정말 고마웠으면, 나중에 밥 사요.”
“그럴게요, 조심히 가세요.”


그것도 인사치레 같아. 씁쓸함은 목으로 꿀꺽 삼키고 차에서 내린 채희를 따라 원재도 밖으로 나왔다. 초겨울의 싸늘한 기운이 한껍에 밀려왔다. 


“한채희.”


대문을 열던 채희가 부름에 응했다. 말간 눈이 원재의 눈과 공중에서 부딪혔다. 날은 어두운데 채희의 눈은 반짝 빛이 난다.


“혹시라도 바람이 쐬고 싶다거나 친구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무조건 응해줄게요.”


조용한 미소로 화답한 채희가 대문 안으로 곧 사라졌고, 오히려 속이 답답해진 원재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채희가 들어가 버린 문을 바라보았다. 알싸하게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 이상하게도 원재는 가슴이 시렸다.


*


2층 계단을 다 올라서고 나서야 채희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정면,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은 채 전면 유리를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는 유서준이 보인다. 채희가 움직임을 멈췄다. 시어머니인 민 여사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을 전하던 안성 댁이 유서준의 퇴근은 깜빡 잊은 모양이었다.


“일찍 들…….”
“어디 갔다 와?”


자신의 말은 잘라내고 묻는 서준의 말이 채희는 왠지 뾰족하게 느껴졌다.


“잠깐 바람 좀 쐬고…….”
“누구랑?”


여전히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유서준에게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꼭 어릴 때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손들고 벌을 받는 듯한 기분에 채희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채희는 사실대로 말을 꺼내기가 왠지 꺼려져 머뭇거리게 된다.


“아깐 그런 얘기 없었잖아.”


그가 건네는 말은 무감각했다. 마치 지나가는 길에 문득 생각나서 묻는 것 마냥.


“그냥 그렇게 됐어요.”
“그래서 이 시간까지 연락도 안 한 건가?”


스윽. 그가 몸을 돌렸다. 던진 물음은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저 본인의 추측을 소리 내어 말한 것뿐이다. 그의 낮은 목소리 톤이, 무미건조한 표정이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그의 눈길은 꽤 날카롭다. 무언가 못마땅한 듯 언짢은 기색이 역력하다. 대체 왜……. 생각하다 채희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유서준의 뒷모습을 생각해내었다. 순간 숨이 꽉 막혀왔다. 설마, 보고 있었던 거야?


“그것도 외간 남자랑?”


그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자신의 추측이 맞아떨어졌다는 걸 깨달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져 왔다. 그러다 외간 남자라는 단어에 순간 화가 치받쳤다. 마치 자신이 무슨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는 의미. 저는 결혼까지 하려던 여자를 ‘거래처 직원’이라고 소개한 주제에.


“당신 꽤 바빴잖아요?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소리를 냅다 질러버리면 속이 후련하겠지만 채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기억해내고 화를 꾹 눌렀다. 그리고 싱긋 웃어주기까지 했다. 약, 올라라.


“아무리 바빠도 그 정도 시간 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가고 싶은 곳 없는 당신이 특별히 부탁을 한다면 말이야.”


일률적인 어조로 말을 잇던 그가 부탁이라는 단어에 유난히 힘을 주었다. 채희가 바라던 대로의 약은 전혀 오르지 않은 듯 했다.


“아, 점심시간까지 할애해가며 ‘거래처 직원’과 면담을 하기에 아주 아주 바쁜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채희가 일부러 거래처 직원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가 움찔하는 게 보였지만 정말 그랬던가 싶을 정도로 탄지지간에 일어난 일이라 채희는 그저 자신의 눈만 의심하였다.


“아무튼 알겠어요, 다음부턴 유서준을 이용할게요.”


말을 마친 채희가 몸을 돌렸다. 한 걸음 내딛는데 어느새 다가온 그가 자신의 팔목을 사납게 낚아채 다시 마주서게 된다. 찌를 듯 강렬한 그의 눈동자에서 채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한채희.”


또박또박 그가 채희의 이름을 입안에서 굴렸다.


“두 번은 말 안 해. 그러니까 똑똑히 들어. 어떤 이유건 상관없어. 다시는 내가 아닌 다른 놈과 말 같은 건 섞지도 마. 아니 눈길도 주지 마.”


생각지도 못한 그의 소유욕 가득한 말에 순간 채희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직 잡혀있는 손목이 갑자기 불에 덴 듯 뜨거웠다. 그건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어떤 눈으로 그를 봐야 할 지 채희를 어쩔 줄 모르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눌렀던 화가 다시 한 번 서서히 채희의 감정을 잠식해 갔다.


“가슴에 손을 얹고 그럴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지 생각해 본 다음에 말을 하는 게 어때요?”


채희가 그의 팔을 뿌리치는 데 워낙에 억세게 쥐고 있던 터라 뿌리쳐지지 않았다.
말을 하고 자신의 팔을 뿌리치는 채희를 보는 서준의 눈길이 사나워졌다. 그가 채희를 잡은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잡아당겼다.


“놔 줘요.”


채희가 서준의 품에 안겨 벽에 밀쳐졌다. 서준은 곧장 입술을 떨어뜨렸다. 뜨겁고 거칠다. 그래서 맞대고 있는 입술이 채희는 아팠다. 짓이기듯 거세기만 한 서준의 입술을 피해 채희가 얼굴을 이리저리 피했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채희가 피할수록 그는 더 다급하게 찾아왔다. 아무리 그를 밀어내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쳐도 채희는 자신을 꼭 안은 그에게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싫…….”


간신히 그의 입술을 피해 채희가 꺼낸 말을 결국 그가 집어 삼켰다. 입술을 가르고 안쪽의 부드러운 속살에까지 단번에 침입한 그의 행동은 여전히 억세기만 했다. 그의 타액과 자신의 타액이 억지로 얽혀들었다. 싫어. 채희가 다시 발버둥을 친다.


“자격은 상관없어. 내게 속해 있는 건 너니까.”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맞댄 채 유서준이 차갑게 중얼거렸다. 무심하게 내리깔고 있는 눈을 채희는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리고 채희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서준은 서재로 사라졌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채희가 서준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봤다. 그가 자신에게 내보인 소유욕 가득한 말들이 그녀가 그에게 묻고 싶은 말들과 뒤섞여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묻고 싶어, 묻고 싶어. 왜 그녀의 정체를 숨겼는지, 그녀의 아이와 당신이 무슨 상관인지. 하지만 그가, 그의 대답이, 자신의 미래가 저어되어 채희는 물을 수 없었다.


자야겠어.
피곤이 몰려왔다. 오늘 하루가 참 길다고 생각하며 채희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일이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끊어져버릴 것 같은 신경이 그래서 위태로웠다.


*


끼이익. 조심히 인영의 방문이 열렸다. 혜원이 고개만 삐죽 내밀어 주변을 살피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히죽 웃으며 방을 나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살금살금 창가로 다가가 밖을 살폈다. 활짝 웃음이 그녀의 얼굴에 피었다. 그래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네, 명원재. 


+
약, 올라라. 까지 써놓고 또..얘기가 왜 이렇게 흐르지? 했다는;;;

+
저 어제는 내일 오겠다는 말 안했어요오 ㅜ.ㅠ

+
내일 또 어딜 잠깐 다녀와야 해서요..ㅋㅋ
빠르면 화요일, 늦어도 수요일엔 다시 뵐 수 있을 듯..^^


즐거운 주말 되세요 >.</

+
그래도 뭐, 나름 성실연재 중이랍니다아-


댓글 '7'

독립815

2009.01.15 17:33:37

혜원이 이 못된 * 같으니

위니

2009.01.15 17:55:00

악연이 적당히 쪼금만 까불게 해주세요.ㅎㅎ;;

그나저나 그럼 내일은 기다리면 안되고...내일도 모레도 아니고..다음주나 오시는건가요?
기다리것어요..얼른 오시와요

손님

2009.01.15 21:19:53

오늘은 긴장하며 봤어요...채희 맘 복잡하겠어요 ㅠ
아 놔 혜원이...-,.-
슬프지만 화/수까지 기다릴게요~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Junk

2009.01.16 00:39:59

후... 혜원이 참;;;

ssuny

2009.01.16 15:29:37

혜원이 더 관심 받는 듯 하네용
채희 화이팅!

핑키

2009.06.29 23:55:37

갈 길이 너무 멀어요

하늘지기

2009.07.05 17:24:22

혜원이 조걸 어찌 해야..
서준이 넌 내 것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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