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꺼칠해 보이는 얼굴로 희주는 연신 물을 들이켜고 있었다. 목이 탔다. 제일 큰 이유는 돈을 구하지 못해서였다. 아이는 아프고 자신은 그런 아이의 치료비가 필요했다. S대 졸업생이란 건 학벌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 틈에서야 빛을 발했을 뿐 실상에서는 그닥 쓸모없는 간판이었다. 그것도 부담스러운. ‘김희주가 S대 나왔다며? 근데 왜 이런 데서 일해?’라는 식의 말을 들어가며 일을 해야 하니까 말이다. 빌어먹을, 이런 데라도 감지덕지니까. 경력도 없고 학교 졸업한지도 오래된, 게다가 그 이후로 공부를 하지 못해 아는 것 없고 연줄까지 없는 남편과 사별한 여자가 대한민국에서 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일이라는 건 거의 없었다.


사별한 남편이 남긴 집 한 채는 사실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은행, 캐피탈, 상호저축은행 심지어는 대부업체 등에 담보로 꽉 찬 집 따위는 그 외의 남겨진 유산이 없는 한도 내에서는 빛 좋은 개살구보다 못한 버거운 짐이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그 외의 갚아야 할 빚은 없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랄까? 그렇게 빚으로 꽉 찬 집을 처분해 버리고 방 한 칸짜리 월세로 이사를 한 희주가 그 무렵 다니기 시작한 직장에서 미래를 위해 차곡차곡 일정 금액을 모으는 건 말 그대로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과 동급의 일이었다. 한 달 번 돈으로 월세내고 아이 놀이방 비를 대고나면 생활비로도 빠듯할 정도의 돈만 남았으니까.


“일찍 오셨네요.”


들려오는 맑고 경쾌한 목소리. 자신의 생각에 빠져있던 희주가 현실로 돌아왔다. 명품임에 틀림없는 옷으로 온몸을 휘감은 채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여전히 당당하고 자신만만해 보였다.


“오랜만이죠, 우리?”


희주는 그저 고개만 간신히 끄덕거렸다. 유서준 동생 유인영이라며 찾아와 헤어질 것을 요구했던, 알고 보니 유서준을 사랑한다던 유인영의 친구 강혜원. 그녀가 자신을 보며 싱긋 웃고 있었다.


“용건이 뭐죠?”


일초라도 빨리 헤어지고 싶은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희주는 그런 의미라는 걸 숨기지 않고 말했다.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상대는 그저 불편할 뿐이니까.


“돈 필요하죠?”


그 때와는 다른 직설화법. 아무리 용건만 말하라고 종용을 했더라도 이렇게 치고 나올 줄은 몰랐던 희주는 순간 당황해버렸다. 이전에도 용건만 말하라는 요구를 했었지만 강혜원은 빙빙 돌리고 돌린 뒤에야 본론을 꺼냈었다. 뭐야, 이 여자. 희주가 아미를 찌푸렸다. 만나자는 뜬금없는 연락이 왔을 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아둔했다.


“다 알고 연락하신 거 아닌가요?”
“얼마나 필요해요?”
“원하는 게…… 뭐예요.”


절실하게 필요했다. 하지만 강혜원이 그걸 그냥 주겠다고 할 리 없다. 아이 때문에 아무리 정신이 없다 해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유서준은 아직 몰라요, 당신이 받았던 돈을 돌려줬었다는 걸. 왜 당신이 그렇게 급하게 다른 남자랑 결혼하는 것으로 자신을 떠났는지. 결혼 생활이 어땠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냥 당신이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에 화가 나 있을 뿐이죠.”
“하고 싶은 얘기가 뭐죠?”
“유서준 동정심 자극. 당신이 해줘요.”


어이없는 요구에 희주의 표정이 일순 일그러졌다. 반면 상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에 말투다.


“미안하지만 잘못 찾아온 거 같아요. 유서준 씨 나에게 미련 없거든요.”
“한 번 찾아간 걸로 그 남자가 그럼 당신을 ‘오냐.’하고 받아줄 줄 알았어요? 당신이 준 상처 때문에 아무하고나 막 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유서준이?”


‘당신 미친 거 아냐?’라는 투의 말이 희주를 조롱했다. 순식간에 희주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강혜원은 이미 자신이 유서준에게 한 번 내침을 당했다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었다.


“지금 3시예요. 6시까지 이 번호로 연락 줘요. 당신이 할 일은 아주 쉬워요.”


느릿한 혜원의 속삭임은 아주 달콤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가 자리를 떠난 뒤, 남겨진 달콤한 유혹의 여운은 희주의 정신을 산란하게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로 길었다. 빌어먹을 강혜원.


‘가당치도 않는단 생각 안 해요?’
‘본인이 뻔뻔하단 생각은?’
‘공부 잘해서 간판 잘 따면 될 거란 생각이었겠지만, 본판 불변의 법칙은 어쩔 거죠?’
‘머리 좋아 S대 간줄 알았더니 아닌가?’
‘내가 왜 이런 얘기 꺼내는 지 아직 이해 안 됐어요?’
‘전과가 9범 이랬던가? 맞아요?’


그 언젠가 자신을 찾아와 속을 긁어댔었다. 자신이 떠나면 냉큼 유서준을 차지할 것처럼 굴기까지 했다. 그런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그 때의 자신은 수치심을 느꼈던 것도 같다. 감추려했던 그러고 싶었던 부친의 행적이 고스란히 타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순간 마치 자신이 발가벗겨진 것 같은 느낌이어서. 그래도 모르는 척 유서준을 잡으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게 되어버렸었다. 그 전과 9범이 그새 10범으로 바뀌는 바람에.


그 사실을 몰랐던 유서준의 도망가서 살자는 말은 효력이 떨어졌다. 그는 결국엔 자신의 부모님들이 그녀를 받아주게 될 것이라는 착각을 포함해서 그 말을 꺼냈으니까. ‘그렇게 오래 도망 다니지 않아도 돼.’라는 말은 그런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했었고 말이다.


희주는 남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여전히 갈증이 심했다. ‘당신이 할 일은 아주 쉬워요.’ 혜원의 유혹에 저항할 힘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급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그녀, 강혜원이 유서준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지 알 수 없으니까. 그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결국엔 돈이 문제였다.


 


“별 일 없었냐?”


혜원이 자리에 앉으며 툭 내뱉은 말에 상대가 보던 책을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누가 봐도 나무랄 데 없는 생김새, 멀쩡한 허우대, 잘 돌아가는 두뇌에 ‘빽’좋은 집안까지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잘난 명원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인물 훤한, 죽어도 기생집 울타리 밑에서 죽는다는 그 한량. 것도 자랑이라고 놀려도 히죽 웃고 마는 인간이었다.


“뭔 일이 있길 바라는 거지?”


“보자마자 시비 걸기는.”


혜원이 자기 몫으로 사온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며 원재를 노려봤다.


“아님 말고.”
“맞아, 있길 바라는 거. 그러니까 불어 봐.”


상관없다는 투로 가볍게 응수하려던 원재가 대충 앉아있던 자세를 바르게 하는데 표정이 꽤나 진지하고 심각해진다.


“너 그 때 그 말. 그럼 진짜였던 거야?”
“그래서 넌 방배동에서 한채희 만난 거 아냐?”


꽤나 웃긴다는 어조로 혜원이 조롱했다. 원재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
“마음 좀 흔들어 놨어? 좀 넘어올 거 같디?”
“너, 정말 진짜 솔직히 원하는 게 뭐야?”
“말했잖아, 유서준.”


혜원이 앙큼하게 머금은 웃음을 터뜨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진심이었어?”
“시간 남아 도냐, 널 데리고 농담이나 따먹게?”
“그래, 좋아. 다 좋다고. 너 어떻게 할 작정인데?”
“약간의 장난질. 넌 더 깊게 알려고 하지 마. 계획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거든. 그러니까 넌! 네 역할만 잘하면 돼.”
“내 역할?”
“응, 한채희 유혹하는 네 역할.”


빙긋 웃으며 말을 끝낸 순간 혜원의 가방에서 벨소리가 들려왔다. 힐끗 자신의 손목시계를 쳐다보던 혜원이 조금 전의 그 앙큼한 미소를 다시 한 번 입에 담았다. 그리고 느릿한 동작으로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든다. 못마땅한 표정의 원재는 혜원의 행동을 주시했다. ‘네.’라는 대답만 두세 번. ‘잘 생각한 거예요. 계좌번호 보내주세요 바로 처리해 드릴게요.’라는 말로 통화를 끝낸 혜원의 통화는 짧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표정에 만족스러움이 가득했다.


“느낌이 좋은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도 예의 만족스러움은 가득했다. 원재가 한쪽 눈썹만 재주 좋게 치켜뜬다.


“뭔데?”
“건 알거 없고. 6시네, 밥이나 먹자.”


딱 자르며 자리에서 일어선 혜원의 말에 원재도 별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든 제 멋 대로지. 독불장군 강혜원, 네가 사라.”




*
쟁겨놓은 건 끝;;났;;ㅜ.ㅠ

*
사실, 쓰면서 아슬아슬합니다.
핀트, 살짝 엇나가도 망가질 것 같은 글이라서;;


댓글 '8'

Junk

2009.01.06 14:56:27

헉, 그래도 많이 쟁여놓으셨네요. 혜원도 참 관심가는 캐릭터...

ssuny

2009.01.06 15:04:44

혜원이;;;동정심이 들 정도로 정신 줄 놓은 악녀 네요
서준과 채희 등장 안하니 섭섭합네당;;;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jade61

2009.01.06 15:40:31

쟁겨놓은것 끝났었도 빨리 오실거죠. 재미있게 보고있습니다.

노리코

2009.01.06 18:24:27

근데요.
여주인공이 누군지는 알겠는데 남주인공이 누군지 모르겠다는...
제가 이해력이 부족한거겠죠.. OTL

마리

2009.01.06 21:32:40

저두 노리코님 의견에 한표 ~ 남주가 파악이 안된다는..혹 여기도.. 의외의 반전이.. 알고 보니 혜원이
여주라는 ^^;;

독립815

2009.01.07 09:52:43

원재가 백마탄 왕자님인줄 알았더니 아닌가요? 어째 혜원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느낌이...

핑키

2009.06.29 23:41:25

도대체 주인공이 뉘신지~

하늘지기

2009.07.05 16:39:20

강혜원 나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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