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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Does she understand what we are talking or not? 알아듣는 걸까, 못 알아듣는 걸까?”
느릿한 어조로 중얼거리는 소리에는 궁금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말을 내뱉은 혜원은 힐끗거리는 시선으로 식탁 맞은편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채희를 쳐다봤고, 인영은 실소만 머금었다. 채희는 알아듣는 거야, 라는 대답을 속으로만 웅얼거린 채 밥 먹는 일에만 열중하는 척 했다.
“If she does she is sly ,or else she is shameless. 알아듣는다면 앙큼한 거고, 못 알아듣는다면 뻔뻔한 거야.”
“Why?”
“If she isn't shameless, how can she keep on eating even without changing her face? 앙큼하지 않으면 어떻게 다 알아들으면서 못 들은 척 얼굴 색 하나 안변하고 천연덕스럽게 밥만 처먹을 수 있니?”
“And what is the shamelessness? 그럼 뻔뻔한 건?”
내내 채희를 빤히 쳐다보며 얘기를 하는 혜원과 달리 일부러 채희의 시선을 피하며 대꾸를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얼버무리던 인영이 그제야 제대로 된 대꾸를 하며 채희를 향해 잠깐 시선을 돌렸다.
“She is really shameless because she desired seo-joon though she even doesn't understand these easy english dialogues. 이 정도 대화도 못 알아듣는 주제에 서준 오빠를 넘봤으니 제대로 뻔뻔한 거지, 뭐.”
“You know you look so cross? 니 얼굴에 심술 잔뜩 묻은 거 알지?”
“I just tell the truth.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어느 쪽이든 곱지 않았다. 속은 이미 얹혔지만 누구 말대로 앙큼하게 채희는 천연덕스럽게 꾸역꾸역 밥만 입 속에 밀어 넣고 있었다. 소화제로 속을 달랠 수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일 듯 했다.
“hey,”
이 정도의 말에는 반응을 보여도 괜찮을 듯 했다. 그래서 채희는 혜원의 부름에 밥공기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생글거리는 혜원의 웃는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On what grounds do you behave unashamedly like this, you disgusting bumpkin? 너 뭘 믿고 이렇게 뻔뻔한 건데? 너 같은 거 재수야!”
채희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말을 건네는 혜원의 얼굴이 말끄트머리에서는 처음보다 더 환하게 생글거렸다. 마주보던 채희가 모르는 척 생글거리는 미소를 씨익 되돌렸다. 그리고 다시 밥공기에 푹 고개를 처박는데,
“그만.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나? 외국인이 아닌 경우엔 집 안에서 영어 따위 쓰지 말라고.”
서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잔뜩 화가 난 얼굴의 그가 서 있었다.
“어머, 오빠 지금 오세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투로 혜원이 인사를 하는 동안 채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시선은 그의 얼굴에 못 박혀 있던 상태라 그녀의 인사에 서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더 늦기 전에 갈 사람은 보내고 이따 내려왔을 땐 니 얼굴도 안보였으면 좋겠다, 유인영.”
혜원은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해 버린 서준의 노기는 인영에게까지 향해 있었다. 주방이 금세 꽁꽁 얼어 버리겠다는 생각을 하며 채희가 자기 말만 한 뒤 인영의 대꾸는 듣지도 않고 주방을 나간 서준을 따랐고, 서준의 말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한 쪽 입가만 끌어올린 채 웃음을 짓던 인영이 잔뜩 굳은 얼굴의 혜원을 쳐다봤다.
“들었지? 너 그만 가야겠다.”
“Shit!"
“그새 잊었어? 영어 쓰지 말라잖아.”
말이 없었다. 얼굴 표정은 금방이라도 뭔가 터뜨릴 기세였는데 속으로 그 화를 일단 죽이려는 건 지 그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차례로 양복 재킷과 넥타이를 건넸고 옆에 서서 그 것을 받아 든 채희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가 성질을 낼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 말 있음 하세요, 그…….”
그러다 문득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생각에 채희가 입을 열었지만, 눈에 힘을 준 채 자신을 노려보는 그의 시선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서준은 내리 깐 시선으로 자신이 벗어서 건넨 옷들을 옷장에 깔끔하게 정리해서 넣는 채희를 가만 쳐다봤다. 그 시선이 느껴지기라도 했는지 채희의 행동이 꽤 부자연스러웠다.
“어땠어?”
옷장 문을 닫고 뒤돌아서는 데 뜬금없이 그가 물었다.
“네?”
“재수다, 뻔뻔하다는 말을 듣고도 밥맛은 좋더냐고.”
순간 채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뭐 앙큼하잖아요, 제가.”
씁쓸한 어조로 채희가 대꾸하며 씨익 웃었다.
“대체 왜 가만 듣고만 있는 거야? 다 알아들었잖아. 말까지도 유창하게 할 수 있잖아.”
“귀찮아서요.”
“뭐가? 뭐가 그렇게 귀찮아서 그런 수모를 겪는 거야? 내가 막아 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거 몰라?”
“당신네들은 몇 개 국어씩 유창하게 하잖아요. 내가 영어를 할 줄 안다면, 또 다른 말로 날 앞에 두고 떠들겠죠. 그럼 난 또 그 말을 배운답시고 낑낑거릴 거고, 그렇게 해서 그 말을 배웠다는 걸 알면 또 다른 말을 내 앞에 들이밀겠죠. 그 일이 반복되게 하느니 이편이 나아요. 적어도 날 두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있으니까.”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었다. 채희를 놀리고 따돌리기 위해 선택한 방법들 중에 하나가 영어로 떠들기 였으니 그녀가 영어를 할 줄 안다면 분명 자기네들끼리는 알고 있는 또 다른 언어로 채희를 따돌릴 것이었다. 가만 보면 한 채희, 참 영리한 여자다.
그럼에도 속은 갑갑했다. 어른들이 없는 모임에서 장난삼아 시작된 행위를 처음부터 못하게 말렸어야 했는데 그러기는커녕 아무 생각 없이 동참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상황 파악을 하고 난 뒤 외국인과의 대화가 아니라면 영어 사용은 금지를 시켰지만, 때는 이미 늦었던 것이었다. 물론 자신이 있는 곳에서는 영어로 떠들어대는 일이 없다지만, 지금처럼 자신이 없는 곳에서는 종종 벌어지곤 했던 것이었다.
그건 그녀의 눈만 쳐다봐도 알 수 있었다. 누가 왔다 갔네, 라는 말을 들은 뒤 그녀의 눈을 가만 쳐다보고 있으면 상처받은 눈이 금방이라도 뚝 눈물 한 방울 흘릴 것처럼 물기에 촉촉이 젖어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지나치는 말로 별 일 없었냐 물으면 그저 네, 종일 뭐 했느냐 물으면 아무것도, 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먼저 스스로 나서서 고자질하듯 일러바칠 일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뒤에야 서준은 채희에게 개인 교사를 붙여 영어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속이 답답해지는 바람에 작게 토해 내려던 한 숨이 큰 것으로 바뀌었다. 서준은 채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순간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꽉, 바스러지기라도 하라는 듯 그렇게 꽉 안았다. 언젠가부터 이 여자만 보면 가슴이 아팠다. 아파도 아프다 표현하지 않는 이 여자가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이후부터 여자에게 무심했던 서준은 여자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자는 웃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울지도 않았다. 어쩌다 웃어도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전부였다. 금방이라도 눈물방울이 뚝 하고 떨어질 것 같은 눈을 하고서도 덤덤했다. 마치 죽어 버린 사람처럼 그녀의 감정은 단 한 조각도 표현되어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잠자리에서조차 신음 소리하나 흘리지 않았다. 만약 자신도 말로만 들었다면 설마,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믿지 않았겠지만 사실이었다.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그녀의 감정 하나도 밖으로 꺼내지 못 하겠다는 생각에 그는 이래도 아무 말 안 할 거냐며, 이래도 화 안 낼 거냐며 그녀의 눈앞에 다른 여자들을 들이밀었지만, 그녀는 그래도 화 한 번 내지 않았다.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완벽한 그녀의 승리였고 믿기 싫은 그의 참패였다.
서준은 안고 있는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의 품에 온 몸과 마음을 내 맡긴 듯 포옥 안긴 여자가 그저 예뻤다. 코끝에 와 닿는 여자의 체향이 매혹적이었다. 자신의 목덜미를 간질이는 여자의 숨소리가 이 순간 꽤나 유혹적이었다. 지금 이 여자가 갖고 싶다, 그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다, 당장 살기 위해 이 여자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운 순간 온 몸이 열에 달떴다.
여자의 달콤한 입술을 간신히 찾아 더듬거리기 시작한 서준은 문득 다 잡은 물고기에는 더 이상 떡밥을 주지 않는다는 말을 생각해 냈다. 맞다, 원래 다 잡은 물고기에는 떡밥을 주지 않는 것이고, 한채희에게는 단 한 번도 떡밥을 줘 본 적 없었다. 그녀는 처음 본 그 날부터 떡밥 따위 주지 않아도 되는 자신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의 감정 따위 더 이상 상관없었다. 아무렴 어떤가, 쨌건 그녀는 처음부터 다 잡은 자신의 것인데.
“너 대체 언제 들어온 거야?”
다짜고짜 따지기 좋아하는 건 인영이나 혜원이나 똑같았다.
“넌 나 들어온 거 어떻게 알았냐?”
“지금 인영이네서 오는 길이다.”
“번호라도 바꿀 걸.”
빤하지 않겠냐는 혜원의 대꾸에 원재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었는지 혜원이 자신을 슬쩍 흘겼지만 원재는 그러거나 말거나 앉아 있는 소파에 몸을 푹 파묻었다.
중얼거린 말은 진담이었다. 잠에 빠져들 만하면 전화가 오고, 잠에 빠져들 만하면 나오라고 성화들이었다. 어제 파티에 얼굴만 들이밀지 않았어도 시차 적응을 할 때까지는 죽은 듯 조용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그 것 때문에 들어온 주제에 덜컥 불참을 할 수 없어 참석을 했더니만 종일 전화에 시달리고 그 중 지금까지 벌써 세 번이나 불림을 받았다. 핸드폰 번호라도 바꿔 버렸으면 좀 덜 했을 거라는 생각을 너무 늦게 한 탓이었다. 그렇다고 파티에 참석한 걸 후회하느냐, 하면 건 또 아니었다. 거기서 한 채희, 그녀를 만났으니까. 원재는 그 생각에 문득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예 들어온 거야?”
“당분간은 확실히 나갈 일이 없긴 한데.”
“흐음.”
혜원이 토해 낸 건 한숨이었지만, 그 속에는 의미심장함이 섞여 있었다. 지금 이 자리도 그랬다. 평소라면 왔냐는 인사만 짧게 전화로 나누고 상봉은 나중에 천천히 하자고 미뤘을 텐데, 부득불 만나야 한다며 우격다짐으로 이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뭐 할 말 있지?”
그래서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잠깐, 천천히 하자. 일단 뭐 마실래? 내가 불렀으니 내가 서비스해야지.”
“그래도 남자가…….”
“됐거든? 너 아직 잠 덜 깬 상탠데 들고 오다 떨어뜨려 다 깨면 어쩌라구, 아깝게.”
“뭐, 정 그렇다면 난 커피 아무거나 주라, 달기만 하면 돼.”
“그래.”
시원스레 대꾸한 혜원이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들고 카운터로 다가갔다. 원재는 아까와 달리 카페인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또 아니었다. 아직 정신이 멍한 상태라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 주지 않았다. 시차 적응을 하려면 이제부터는 들어가서 아침까지 죽은 듯 자야 하는 게 옳은 건데, 잠을 깨야 한다며 커피를 찾은 걸 보니 아직 적응하려면 멀었다. 머저리. 감기는 눈을 부릅뜨며 원재가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혜원이 벌써 머그컵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왜 이렇게 빨라?”
“사람이 없어서. 시간이 늦었잖아.”
컵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혜원이 맞은편에 앉으며 쟁반을 빈 의자 위에 올렸다.
“자, 이제 용건.”
먹어야 돼, 말아야 돼? 원재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컵에서 커피 향이 원재의 코끝을 유혹이라도 하듯 은근히 퍼져 나왔다.
“급한 일 있어? 왜 이리 재촉이야?”
“나 아직 들어온 지……,”
원재가 시계를 힐끔거리느라 잠깐 말을 멈췄다.
“36시간도 채 되지 않았거든?”
그리고는 그만 따뜻한 커피 향의 유혹에 넘어갔다. 잠깐이라도 잠을 깨야지.
“너 한 채희 봤다며?”
콜록.
커피가 목에서 걸렸다. 뜨거운 커피에 입안이 덴 건 둘째 치고 입안에 커피를 문 채 시원하게 잔기침을 할 수 없는 통에 괴로워서 죽기 직전임에도 원재는 치켜 뜬 눈으로 혜원을 쳐다봤다.
“으이그, 그게 그렇게 놀랄 말이야? 그렇게 재촉하더니만.”
혀를 내차며 몸을 일으킨 혜원이 원재의 등을 두들겼다.
“됐어,”
혜원의 주먹을 피하며 원재가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여전히 괴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것 보다 그 이름 들먹인 이유가 뭐야?”
씨익. 도로 자리에 앉는 혜원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지만, 분명한 건 그 미소가 그다지 호의적인 느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뭔가를 숨긴 듯 한 의미심장한, 뭐 그런 느낌이랄까?
원재는 오싹 소름이 돋았지만 내심 모르는 척 내색하지 않았다.
“관심 있다며?”
“것도 인영이 그러디?”
혜원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할 생각 없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
진짜? 속에서 누군가 비웃었다. 뭐 아직까지는 그렇다는 말이지.
“내 걱정 생각 말고 뭐 하지 그래?”
콜록.
또 한 번 커피가 목에 걸렸지만, 다행이 이번엔 입안에 커피가 남아 있지 않았다.
“갑자기 니가 겁나는 이유가 뭘까?”
“겁낼 필요 없네.”
“그래?”
원재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진짜 그럴까?
“관심 있으면 가져 봐. 너 그거 특기잖아.”
이건 욕이었다.
“너 지금 나 욕하는 거냐?”
“아니거든? 나 지금 꽤 진지하거든?”
“너 뭐야?”
역시 겁이 안 날수가 없었다. 아무리 혜원의 얼굴을 뚫어질 듯 쳐다봐도 속을 알 수 없으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천연덕스럽게 지껄이는지 가늠해 볼 수도 없었다. 젠장, 잠이 다 달아나 버렸다.
“뭐가 뭐야?”
“너 뭐 때문에 날 부추기는 거냐고.”
“너는 한 채희, 나는 유 서준.”
싱긋 웃는 혜원의 눈이 반짝거리며 빛을 발했다.
“됐거든? 난 유부녀한테 집적이는 취미 없거든?”
“이혼녀 만들면 되지. 어차피 애도 없겠다, 남편은 밖으로만 나돌겠다, 집안이든 본인이든 좋아서 한 결혼은 더더군다나 아니니 예쁘다 해 줄 사람 없어 정 붙일 곳도 없겠다,”
혜원이 말을 잇는 중간에 곁눈질로 힐끔 원재를 살폈다.
“가정 파탄, 뭐 그런 죄책감 안 느껴도 된다는 말이지. 뭐, 어쩌면 오히려 좋은 일 하는 건지도 몰라, 불쌍한 인생 구제해 주는 그런 거.”
자신을 설득시키려 애쓰는 듯 부드러운 말투로 혜원이 다독거렸다. 실상은 참 무서운 말인데도 듣고 있으면 자신이 정말 좋은 일을 하는 거라고 믿게끔 세뇌시키기엔 충분했다. 물론 혜원이 한 말들 중 몇 가지는 확인을 해봐야 하겠지만, 연회장에서 자신의 눈으로 본 바에 의하면 대부분 아마도 진실……. 픽, 실웃음이 흘러나왔다. 벌써 마음이 저 모르게 동했던가 보다.
“암튼, 어쨌건, 난 빼라. 이래도 저래도 마음 불편한 건 매 한가지라 건드리기 싫다.”
일부러 더 시큰둥하게 거절한 건 그런 자신의 속을 요만큼도 내비치기 싫은 탓이었다.
"매월 첫 번째 화요일에는 S호텔에서 점심때 어머니를 만나.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건 지켜, 집에 상을 당하지 않는 한은 말야. 그리고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은 1시부터 3시까지 방배동에서 요리를 배운다더라. 그 외의 일정은 간혹 전시회 관람정도? 때에 따라 가끔씩 연회에 참석하고.”
“뭐 하냐, 지금?”
“강요는 안 해, 어차피 결정은 니 몫이니까. 행동반경이 의외로 단순한데다, 너 서식지랑 엇비슷하게 맞아떨어져서 맘만 먹으면 부닥칠 기회는 많을 거야.”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마뜩찮은 표정을 짓고 있는 원재의 심경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혜원이 주절거리며 쉼 없이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자기 말만 늘어놓았다. 더 이상 들을 얘기도 없겠거니와 설혹 있다 해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크게 한 숨을 내몰아 쉰 뒤 원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일어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혜원을 향해 살짝 눈만 내리깐 채 피식 한 쪽 입술만 위로 끌어올렸다.
“미치지 않고서야.”
미치지 않고서야.
정말 그러지 않고서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듯 들은 혜원의 말이 이렇게 또렷하게 기억날 리 없다. 매월 첫 번째 화요일에는 S호텔에서 어머니와의 점심, 월수는 방배동에서 요리 교습. 빌어먹을,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게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시간에 하릴없이 방배동 어귀를 서성거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뿐, 저 쪽에서 채희의 모습이 언뜻 보이기 시작하자 멈춘 듯 고요했던 심장이 천천히, 그러다 빨리 채희의 모습이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빨리 요동치기 시작했고, 그는 이곳에 와야 했던 일이 당연하게만 여겨졌다. 정말 미치지 않았으니까, 제정신이니까.
원재는 손에 들고 괜스레 만지작거리던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그리고 어느새 외워 버린 번호 하나를 눌렀다. 연결 음이 들리기 시작한 순간 원재는 채희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채희의 핸드폰 벨소리가 곧 주변에 울려 퍼졌고, 채희가 잠시 걸음을 멈춰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이어 액정에 뜬 낯선 번호에 얼굴을 살짝 찌푸리는 모양이 원재의 눈에 포착됐다.
“네, 여보세요!”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원재는 이 순간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명원잽니다.”
“어머!”
지극히 놀란 말투의 감탄사. 이마저도 원재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네, 안녕하세요. 근데, 어쩐 일로?”
“다음번엔 전화하겠다고 했잖습니까.”
“아!”
피식하고 미소 짓는 모습이 원재의 눈에 들어왔다.
“오늘 입은 원피스 무척 잘 어울려요. 엄청 이뻐 보이는 거 아세요?”
채희가 옮기던 발걸음을 뚝 멈췄다. 그리고 좌우, 앞뒤 고개를 갸웃거리며 둘러보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을 찾는 모양새였다.
“어디세요?”
되묻는 물음은 그 추측에 확신을 주었다.
“식사했어요?”
눈앞이라는 대답 대신 원재가 딴소리를 했다.
“나오기 전에 먹고 나왔어요.”
“그럼 차 한 잔 어때요? 날도 좀 쌀쌀한데, 따뜻하게.”
“어디신데요?”
“어디면, 차 한 잔 할래요?”
“차에 목숨 거신 거예요?”
“차 말고 한 채희.”
“네?”
“한 채희, 당신한테 목숨 걸었어요.”
당황한 듯 채희의 얼굴빛이 붉어졌다.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 저 결혼한 거 아시잖아요.”
문제는 그거였다, 한 채희는 결혼한 유부녀라는 거. 그래도 차 한 잔은 마실 수 있는 거 아닌가?
“차 마시는 거랑 결혼한 거랑 별 상관은 없죠?”
“저 말고 차에 목숨 거신 거라면 별 상관은 없을 거예요.”
코앞, 그녀가 있었지만 다른 쪽을 살피느라 정신이 팔린 그녀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원재는 핸드폰을 종료시켜 통화를 끝냈다.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다면 그렇다고 해 두죠. 그럼, 차 한 잔 동의 한 거예요.”
씨익, 먹이를 발견한 고양이의 앙큼한 미소처럼 만족스러운 모양의 미소를 입가에 띤 원재가 느닷없이 채희의 손을 잡아끌었고, 다음 순간 불시에 손이 잡힌 채희의 놀란 얼굴이 시선에 잡혔다.
“어머, 어떻게 된 거예요?”
“근처에 일 있어서 나왔는데, 저쪽에서 채희씨가 눈에 보였어요.”
“흐음.”
뭔가 의심쩍은 듯 채희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뭐 그 뿐이었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방도가 없으니 믿을 수밖에. 게다가 채희의 의아함을 눈치 챈 원재가 해맑게 보일 미소를 그럴 듯 하게 지어 보였다.
“그래요?”
“그럼요, 그렇죠.”
대꾸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원재의 눈에 깔끔해 보이는 커피숍이 들어왔다. 장소를 물색한 원재는 속으로 혼자 저기다, 라고 마음을 먹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채희의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고 맞잡은 그 손끝으로 자신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 오는, 어쩔 수 없는 그녀의 발걸음이 느껴졌다.
겉보기만큼이나 깔끔하게 인테리어가 되어 있는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채희와 마주보고 있자니 온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은 짜릿한 느낌이 온 몸을 전율케 했다. 정말 죽어도 좋을 정도였다. 이래도 괜찮은 건지에 관한 고찰은 나중으로 미뤄 둘 정도로.
“뭐 좋은 일 있으세요?”
“그래 보여요?”
“계속 싱글벙글 웃고 있잖아요.”
“그냥 웃음이 나네요. 그냥 좋아요.”
빤히 쳐다보며 그냥 좋다는 말을 꺼낸 남자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채희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그저 자기 기분이 좋다는 의미일 뿐이라며 앞서 나가려고 하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며 채희가 앞에 놓인 물 컵을 들어 올린 순간 상큼한 레몬 향이 코끝을 스쳤다.
“왜 물에서 레몬 향이 나지?”
“아마 레몬 즙 넣었을 거예요. 요새 그렇게 하는 곳 많다던데.”
물론 서준은 볼 수밖에 없었다. 자리를 비운 사이 비서실 대기용 소파에 앉아 있다가 자신이 비서실 안으로 들어서자 용수철 튀듯 화들짝 놀란 채 일어나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희주를 못 봤다면 그야말로 눈 뜬 장님이나 다름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서준은 모르는 척 했다. 이미 그녀는 5년 전 자신에게는 죽은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면, 그건 또 분명 거짓이다. 벌써 세 시간 째 결재를 해야 할 서류는 펼쳐 놓고 한 장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더더군다나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자 얼굴이 절로 잔뜩 찌푸려졌다.
“아직도 있어?”
비서실로 인터폰을 연결한 서준이 다짜고짜 물었다.
“네, 아직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인터폰을 도로 끄고 자리에서 일어선 서준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대체 몇 시간이나 저러고 기다리는 건 지 모르겠지만, 또 이제와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이렇게 막무가내인지 모르겠지만, 계속 저렇게 둘 수도 없다는 생각이 짙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인적 드문 사장실이라고 하지만 오며가며 보는 눈들이 그래도 꽤 있는데다 그 중에는 가벼운 입의 소유자도 몇 있었다.
“들어오라고 해.”
비서실로 다시 인터폰을 한 서준이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곧 문이 열리고 희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약간은 비틀리는 걸음걸이가 왠지 위태로워 보였지만 소파까지 희주는 꿋꿋하게 걸음을 옮겼다. 5년. 지나간 시간은 분명 그랬지만 아무래도 김희주에게는 비껴간 모양이었다. 어깨에 간신히 닿았던 머리칼이 허리까지 온다는 사실을 뺀다면 말이다. 서준은 적당히 냉담하고 적당히 무심한 눈빛으로 희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희주는 여전히 예뻤다지만.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서준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곧 맞은편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이제 와서 무슨 일이십니까?”
안녕이라는 인사말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이런 만남은 불쾌했고 쓸데없는 것이니까 빨리 끝냈으면 했다. 그래서 서준은 조심조심 소파에 자리 잡는 희주를 보며 본론만 물었다.
“돈이……나 돈이 필요해요.”
서준의 날카로운 시선이 무릎 위에서 얌전히 맞잡은 그녀의 손에 닿았다. 희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걸 숨기려고 애쓰는 듯 보였지만 그건 숨겨지지 않았다. 목소리가 떨릴 때 손도 같이 떨리던 버릇이 그대로라면 말이다. 그러니까 본인도 이런 얘기가 쉽지만은 않다는 거였다.
“꽤 챙기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서준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다.
“아이가…… 아파.”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희주가 말했다. 그 대꾸에 미간이 찌푸려지는 건 잠시였다. 화가 솟구치는 것도 잠시였다. 이미 지나간 과거니까. 어디서 무얼하며 어떻게 살았는지는 상관없었다. 아이가 있을 법도 했다. 지나간 시간이 자그마치, 무려 5년이니까.
“아이 아빠는?”
“…….”
아빠란 작자는 어쩌고 자신에게 왔냐는 의미란 걸 김희주도 정확히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대답이 없는 거겠지. 피식, 서준이 차갑게 웃었다. 하지만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있던 희주는 서준이 웃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하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서준이 가볍게 중얼거리다가
“김희주 씨?”
부드럽게 상대를 호명했다. 그 부드러운 호명에 희주가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시선에 기대감이 살짝 어린 게 눈에 보였다.
“그렇다고 제게 그런 부탁을 할 만큼 저희가 각별한 사이도 아닌 것 같은데요?”
기대는 금물이야, 김희주. 서준의 시선이 희주에게 경고를 보냈다.
“알아, 아는데, 당신 아니면 어디 부탁 할 데가 없어서…….”
또르륵. 희주의 맑은 눈에서 금세 눈물이 터져 나왔다. 서준이 잠깐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이 알던 김희주라면 이렇게 쉽게 눈물을 흘릴 리 없었다. 하긴 자신이 알던 김희주라면 처음 사무실에 들어설 때도 당당했을 것이다. 원래 그런 여자였으니까.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 도와드린다면 무얼 해주실 수 있습니까?”
“원하는 건 뭐든, 그게 뭐든 다 할게.”
자신이 던진 질문에 비틀린 웃음을 짓던 서준이 희주의 다급한 대꾸에 낄낄댔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서서 자신의 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런, 제가 원하는 건 그만 제 인생에서 꺼져 주시길 바라는 것뿐입니다.”
희주를 향해 빠르게 말을 뱉어낸 서준이 자신의 책상 앞에 멈춰 섰다.
“손님 가신답니다.”
그리고 인터폰을 통해 비서를 불러냈다.
“유서준, 당신 밖에 없어. 화난 건 알지만 나 좀 살려줘. 응? 나 좀. 응?”
다급한 목소리로 울먹이며 애걸복걸하는 희주의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 뒤에 있는 건 김희주였다. 그러니까 들려오는 목소리 역시그녀의 것이 맞았다. 하지만 믿기 어려웠다. 자신이 알던 김희주는 누구에게도 애걸복걸할 타입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서준은 더 믿기 어려운 사실과 맞닥뜨렸다. 그 김희주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 좀 살려줘. 우리 정인이 좀 살려줘. 우리, 우리 정인이 좀.”
어느새 다가와 자신의 바짓단을 붙잡고 그녀가 다시 애걸을 해왔다. 눈물이 흥건한 희주의 얼굴이 서준은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김희주가 애원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었다.
“너, 네가 어떻게 그 이름…….”
버럭 소리를 지른 서준의 얼굴은 화가 잔뜩 나 있었다.
“그만 나가 주십시오.”
하지만 그건 잠시일 뿐 서준은 곧 화를 억눌렀다. 그리고 자신의 바짓단을 붙잡고 애원하고 있는 희주를 뿌리치며 냉정하게 그녀를 향해 정중한 요구를 했다. 때맞춰 사무실 문이 열렸다. 서준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희주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고 가볍게 목례를 하며 안으로 들어온 비서가 안 나가려고 버티는 희주를 부축해 밖으로 질질 이끌었다. 그 와중에도 김희주는 정인이라는 이름을 중얼거리며 살려달라는 애원을 멈추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도 몇 초간 끈질기게 들려오던 애원의 소리가 멈추었을 때 서준은 눈앞에 보이는 연필꽂이를 집어 문을 향해 던졌다. 곧 탕 소리와 함께 툭 떨어진 연필꽂이에서 여러 종류의 문구류가 바닥에 흩어졌다.
유서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김희주가 울던 모습이, 떨던 모습이, 무릎을 꿇어가며 자신에게 애원하던 모습이, 비서에게 질질 끌려 밖으로 쫓겨 가던 모습까지 보이지 않았다. 보일 수 없었다. 김희주의 입에서 정인이라는 이름이 흘러나온 뒤로는 그럴 수 없었다.
정인. 정인. 정인.
김희주, 네가 그 이름을 감히.
자신의 자리에 몸을 파묻는 순간에도 치미는 화 때문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 이름을 갖다 쓸 수 있을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이름을. 이가 갈렸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화가 뻗쳤다. 몇 번을 책상을 주먹으로 세차게 내리쳤어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빌어먹을, 김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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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일게, 하나 던져놓고.
잠시 잠수^^;;;
어딜 좀 댕겨와야 해서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쟁여놓은 글은 거의 바닥났으니까;;
적어도 일주일에 한 편은 올릴 수 있도록...
불끈, 힘내볼게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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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미움 받는 주진모...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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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힛.
도움주신 토란냐께 감사를...>.<
그런데 작가님 마음에는 누가 있나요. 그럼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다음 글 기다릴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