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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 채희는 현관 벨을 울리는 대신 현관 열쇠를 이용해 문을 열었다. 도둑고양이 마냥 소리 없이 드나든다고 몇 차례 면박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 중에 하나라 이제는 식구들도 눈살만 찌푸릴 뿐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 어머니 민여사도 같이 나서며 좀 늦을 테니 일찍 들어와 있으라는 명을 내렸기에 평소처럼 안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님 방으로 인사를 하러 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게다가 같이 사는 시누 인영도 자신이 집을 나서기 전 외출을 했다. 그런 연유로 오늘은 직접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설 때 다른 가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채희는 모처럼 만의 외출을 가볍게 끝낼 수 있었다.
채희는 안에 들어서자마자 주방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안성댁이 혼자 저녁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저 다녀왔어요."
차분한 어조로 건넨 인사는 갑작스러운 것이긴 했지만 안성댁은 놀란 기색은커녕 오히려 인사가 들린 주방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려 미소를 되돌리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평안하시고?"
"네, 괜찮으세요."
"올라가서 좀 쉬다가 천천히 내려와, 사모님 어쩌면 저녁까지 밖에서 해결하고 오실지 모르니까."
"그래도 혼자 하시기엔 벅차잖아요, 금방 옷만 갈아입고 내려올게요."
채희가 안성댁의 배려에 싱긋 웃으며 주방을 나섰다. 간단히 씻고 옷만 갈아입는다고 해도 아마 꽤 시간이 흐를 것이다. 채희는 2층 계단을 올라서며 서준이 일찍 들어올지 전화라도 한 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희주?”
인영의 방 앞을 지나칠 때였다.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로 속삭이는 대화 소리가 채희를 끌어당겼다. 아가씨가 벌써 들어오셨나? 채희의 발걸음이 절로 인영의 방 앞에서 멈췄다. 인기척을 할 요량으로 노크를 하려는데,
“글쎄, 5년 전에 오빠가 결혼하겠다고 집안 뒤집어 놓은 이후로는 들어본 적 없는데.”
밋밋한 인영의 목소리가 채희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인영에게 오빠는 유 서준 하나였으니 지금 나누고 있는 대화 속 주인공은 어쩌면 유 서준과 결혼을 했을지 모를 어떤 여자에 관한 것이란 추측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5년 전이라면, 자신과 서준이 결혼하기 전을 의미할 것이다. 문득 자신의 결혼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무심했던 그의 심드렁한 모습이 떠올랐다.
“얼마 전에 우연히 봤는데.”
“니가 얼굴 알어?”
“내가 니네 오빠 쫓아다녔잖아. 서준 오빠 눈에 콩깍지 씌운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슬쩍 만나 본 적 있거든. 물론 너 인척하고.”
피식, 쓴웃음이 입가에 매달렸다. 아가씨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 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인영을 만나기 전, 채희도 그녀가 자신의 시누가 될 유인영이라고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었다.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찾아온 그녀는 자신을 유인영이라고 소개를 한 뒤 사랑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이 결혼을 당장 그만두라고, 그렇게 한다면 원하는 건 뭐든 하나 정도는 들어주겠다고 채희를 구슬렸던 그녀가 실은 인영의 친구인 혜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채희가 물었었다. 대체 그 때 왜 자신에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이 결혼을 막으려고 했냐고. 그랬더니 그녀 혜원이 말하기를, 당신은 서준씨를 좋아하지도 않지만 자신은 서준씨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나. 보지 않아도 빤했다. 분명 그 희주라는 여자를 찾아가서도 인영인 척 자신을 소개한 뒤 서준과 헤어지라고 종용했을 것이다. 그러면 뭔가 보상을 해주겠노라 얘길 했겠지.
“근데 집에서 떨어뜨려 놓을 때 아무것도 안 줬니?”
“그건 왜?”
“좀 힘들어 보이던데?”
“줬는데, 도로 우편 보내 왔다고 하더라. 주소는 어찌 알았는지.”
“오빠도 알아?”
“아니, 집에서는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지. 내가 슬쩍 옆구리 찔러 주려고 했는데 그 땐 오빠가 다 지난 일이라면서 입에 담지도 말라더라.”
“하긴 그 성질에 그 사실 알면 벌써 그 쪽으로 달려갔지. 도망까지 치려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아마 지금이라도 그 사실 알면, 이혼이라도 하자고 난리 칠지도 모르겠다. 아직 애 없잖아?”
가만 듣던 채희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뭐야, 애가 없으니 이혼해도 상관없다 이거야?
“아마 집에서 이혼은 안 된다고 할 걸?”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실은 언제고 다 밝혀진다는데, 나중에 니네 오빠가 어떻게 나올지 꽤 궁금하다.”
여기까지.
채희는 자신이 숨도 죽인 채 그녀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스스로에게 그만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아니 충분하고도 남았다. 발뒤꿈치를 들어 살금살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면서도 실은 마음은 인영의 방 앞에 두고 온 탓에 자꾸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간신히 방으로 돌아온 채희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다시 내려오겠다고 했던 자신의 말도 잊은 채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릿속에서 자꾸 인영과 혜원의 대화가 맴돌았다. 생각은 자꾸 5년 전 결혼 전후의 그때로 빠져들었다.
지금까지도 채희는 그저 그가 아무하고나 대충하는 결혼이라 관심이 없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대화를 토대로 이끌어 낸 결론은 그가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그때의 그는 아마도 회의를 느꼈던 것 같았다. 들은 이야기를 종합 해보면, 자신과 결혼을 하기 전 스스로 결혼을 하겠다고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놨던 서준의 상대자는 희주라는 이름을 가진 보잘 것 없는 배경의 여자였던 듯 했다. 아마도 식구들이 돌아가며 여자를 만나서 그와 헤어지라고 협박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잔뜩 겁을 주기도 했을 것이고, 얼마면 되겠느냐고 돈으로 회유도 했을 것이다. 남아도는 게 돈이니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다 어찌 어찌해서 여자가 돈을 받고 헤어졌을 테고, 집에서는 것 봐라, 사랑이 아니라 돈이었다고 안 그래도 화가 나 미치기 직전의 상태였을 서준의 속을 뒤집었을 것이다.
그렇게 망가진 속인데, 사랑 따위가 무슨 소용이었겠는가. 누구면 어떻고 아무나면 또 어떻겠는가, 그냥 하면 되는 게 결혼이었을 텐데. 그러지 않고서야 채 한 시간도 마주하지 않은 여자와 만난 지 채 한 달도 지나가기 전에 식을 올릴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결혼이 진행되는 내내 무관심했던 그의 행동들이 이제야 채희는 이해가 갔다. 순간 짠한 마음이 들었지만 채희는 그냥 픽 하고 웃어넘겼다. 이 남자 인생 참 안됐다, 오해이긴 할 테지만 어쨌건 사랑하는 여자는 돈에 눈이 먼 여자였고, 그런 여자 피해 결혼한 여자는 돈 때문에 팔려 온 거나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채희는 가방 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냥 저절로 외우게 된 서준의 번호를 망설임 없이 꾹꾹 눌렀다.
“저예요.”
짧게 신호음이 가는가 싶더니 그가 전화를 받았다.
“응.”
“오늘 일찍 들어 올 건 지 몰라서…….”
“글쎄, 일이 끝나는 대로 들어갈 생각이긴 한데?”
그도 잘 모르겠다는 말투였고, 갑자기 그건 왜 궁금하냐는 물음이었다.
“오늘 어머님도 늦는다고 하시고, 아버님도 안 계시니, 저녁은 당신 좋아하는 걸로 준비할까 해서요.”
안쓰러운 마음 때문인지 대꾸하는 채희의 말투가 꽤나 나긋나긋했다. 게다가 여태 생각지도 않았던 말들이 툭 튀어나와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바로 어제까지는 그가 일찍 오건 늦게 오건, 밥을 먹고 오건 굶고 오건 채희의 관심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 있어?”
그도 좀 이상했나 보다.
“일은 무슨. 혹시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어요?”
“난 늦을지 모르니까 신경 쓰지 말고, 당신 편할 대로 해.”
“아, 그…….”
그래도 뭐 생각나는 거 없냐고 물을 참이었다. 분명 전화가 뚝 끊기지 않았어도 채희가 닦달을 해 가며 원하는 걸 말하라고 들들 볶았을 테지만 용건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틈도 주지 않고 서준이 전화를 뚝 끊어 버렸기 때문에 채희는 하려던 말을 끝맺지 못했다. 뭐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누가 전화를 걸었건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 버리는 데 익숙한 사람이니 말이다. 채희는 핸드폰 폴더를 덮고 옷장에서 가볍게 입고 있을 수 있는 옷을 꺼냈다.
이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건, 어떤 느낌이었을까?
이 남자는 대체 어떤 사랑을 줬을까?
채희는 두 가지 물음을 꺼내 든 채 또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피식 웃으며 생각을 멈췄다. 답은 찾을 수도 없는 물음이기도 했지만, 또 찾는다 해도 쓸데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근데, 왜 혜원이 아닌 자신과 결혼을 했을까? 혜원은 서준이라면 좋아 죽는시늉이라도 할 테고, 집안끼리 잘 알고 지내는 데다, 혜원과 서준이라면 서로 잘 어울리기까지 했을 텐데 말이다.
또 다른 생각으로 빠져들던 채희가 크게 한 숨을 토해 내며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그만 하자는 생각에 도리질을 치는데 삐빅하고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정말 어쩌다 한 번 오는 문자 메시지가 온 모양이었다. 물론 그 어쩌다 한 번 오는 문자는 잘 못 보내진 문자이기도 했다. 그 탓에 문자는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긴 했지만 채희는 도착하는 문자는 바로 확인을 하곤 했다. 자신에게는 쓸데없는 것이지만 보낸 사람 입장에서는 중요한 것일 수 있기 때문에 내용을 보고 중요하다 싶은 생각이 들면, 문자 잘 못 보냈다는 답을 보내 주기 때문이었다.
<잘 들어갔죠? 저도 잘 들어갔습니다. 통화 곤란 하실까 봐 이번에만 문자 보냅니다.>
역시나 잘 못 온 메시지였다. 채희는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잘못 보냈다는 메시지를 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됐던 탓이었다. 그러다 그다지 중요한 내용인 것 같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삭제 버튼을 눌러 메시지를 지워 버렸다. 다음에는 전화하라지 뭐. 시큰둥한 생각을 하며 채희가 꺼내서 들고 있던 옷을 갈아입으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핸드폰이 다시 한 번 삐빅하고 짧게 울렸다. 또 잘 못 온 메시지라고 생각한 채희는 급할 건 없으니까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는 생각에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후에야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 저 명원재 입니다. 잘 못 받은 메시지 아니라구요. 그럼.>
메시지를 확인 한 순간, 택시 문까지 열어 주는 것으로 모자라 행선지까지 말하고는 요금까지 미리 내주고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건네던 남자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아마 모르긴 해도 차번호까지도 체크를 했을 것이다. 어떻게 번호를 알았냐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과 동시에 그가 자신의 핸드폰을 찾겠다며 잠깐 핸드폰을 빌려 갔던 것이 생각났다.
씨익, 저도 모르게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결국 핸드폰을 빌려 간 건 핑계였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채희는 아까는 감사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내려다 말았다. 그리고 받은 메시지도 망설임 없이 삭제했다.
쓸데없는 인연은 필요 없다.
*
제목은..간단히 말하자면
결혼이 끝은 아니니까. '그리고'가 있잖아. 라는 생각에서.
근데, 이상하다고 혼났;;;
*
설정이 지금 쓰면서 조금 바뀌고 있;;;
혼란스러우셔도 그냥 앞 부분은 대충 저런 설정이라고 생각해 주세요ㅜ.ㅠ
*
느끼 대사에 한 번 쭈욱 보니, 정말 느끼 대사..ㅋㅋ
그럼 저도 남주를 주진모로 생각하고+_+/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을 나서기 전, 어머니 민여사도 같이 나서며 좀 늦을 테니 일찍 들어와 있으라는 명을 내렸기에 평소처럼 안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님 방으로 인사를 하러 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게다가 같이 사는 시누 인영도 자신이 집을 나서기 전 외출을 했다. 그런 연유로 오늘은 직접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설 때 다른 가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채희는 모처럼 만의 외출을 가볍게 끝낼 수 있었다.
채희는 안에 들어서자마자 주방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안성댁이 혼자 저녁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저 다녀왔어요."
차분한 어조로 건넨 인사는 갑작스러운 것이긴 했지만 안성댁은 놀란 기색은커녕 오히려 인사가 들린 주방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려 미소를 되돌리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평안하시고?"
"네, 괜찮으세요."
"올라가서 좀 쉬다가 천천히 내려와, 사모님 어쩌면 저녁까지 밖에서 해결하고 오실지 모르니까."
"그래도 혼자 하시기엔 벅차잖아요, 금방 옷만 갈아입고 내려올게요."
채희가 안성댁의 배려에 싱긋 웃으며 주방을 나섰다. 간단히 씻고 옷만 갈아입는다고 해도 아마 꽤 시간이 흐를 것이다. 채희는 2층 계단을 올라서며 서준이 일찍 들어올지 전화라도 한 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희주?”
인영의 방 앞을 지나칠 때였다.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로 속삭이는 대화 소리가 채희를 끌어당겼다. 아가씨가 벌써 들어오셨나? 채희의 발걸음이 절로 인영의 방 앞에서 멈췄다. 인기척을 할 요량으로 노크를 하려는데,
“글쎄, 5년 전에 오빠가 결혼하겠다고 집안 뒤집어 놓은 이후로는 들어본 적 없는데.”
밋밋한 인영의 목소리가 채희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인영에게 오빠는 유 서준 하나였으니 지금 나누고 있는 대화 속 주인공은 어쩌면 유 서준과 결혼을 했을지 모를 어떤 여자에 관한 것이란 추측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5년 전이라면, 자신과 서준이 결혼하기 전을 의미할 것이다. 문득 자신의 결혼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무심했던 그의 심드렁한 모습이 떠올랐다.
“얼마 전에 우연히 봤는데.”
“니가 얼굴 알어?”
“내가 니네 오빠 쫓아다녔잖아. 서준 오빠 눈에 콩깍지 씌운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슬쩍 만나 본 적 있거든. 물론 너 인척하고.”
피식, 쓴웃음이 입가에 매달렸다. 아가씨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 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인영을 만나기 전, 채희도 그녀가 자신의 시누가 될 유인영이라고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었다.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찾아온 그녀는 자신을 유인영이라고 소개를 한 뒤 사랑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이 결혼을 당장 그만두라고, 그렇게 한다면 원하는 건 뭐든 하나 정도는 들어주겠다고 채희를 구슬렸던 그녀가 실은 인영의 친구인 혜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채희가 물었었다. 대체 그 때 왜 자신에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이 결혼을 막으려고 했냐고. 그랬더니 그녀 혜원이 말하기를, 당신은 서준씨를 좋아하지도 않지만 자신은 서준씨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나. 보지 않아도 빤했다. 분명 그 희주라는 여자를 찾아가서도 인영인 척 자신을 소개한 뒤 서준과 헤어지라고 종용했을 것이다. 그러면 뭔가 보상을 해주겠노라 얘길 했겠지.
“근데 집에서 떨어뜨려 놓을 때 아무것도 안 줬니?”
“그건 왜?”
“좀 힘들어 보이던데?”
“줬는데, 도로 우편 보내 왔다고 하더라. 주소는 어찌 알았는지.”
“오빠도 알아?”
“아니, 집에서는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지. 내가 슬쩍 옆구리 찔러 주려고 했는데 그 땐 오빠가 다 지난 일이라면서 입에 담지도 말라더라.”
“하긴 그 성질에 그 사실 알면 벌써 그 쪽으로 달려갔지. 도망까지 치려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아마 지금이라도 그 사실 알면, 이혼이라도 하자고 난리 칠지도 모르겠다. 아직 애 없잖아?”
가만 듣던 채희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뭐야, 애가 없으니 이혼해도 상관없다 이거야?
“아마 집에서 이혼은 안 된다고 할 걸?”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실은 언제고 다 밝혀진다는데, 나중에 니네 오빠가 어떻게 나올지 꽤 궁금하다.”
여기까지.
채희는 자신이 숨도 죽인 채 그녀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스스로에게 그만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아니 충분하고도 남았다. 발뒤꿈치를 들어 살금살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면서도 실은 마음은 인영의 방 앞에 두고 온 탓에 자꾸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간신히 방으로 돌아온 채희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다시 내려오겠다고 했던 자신의 말도 잊은 채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릿속에서 자꾸 인영과 혜원의 대화가 맴돌았다. 생각은 자꾸 5년 전 결혼 전후의 그때로 빠져들었다.
지금까지도 채희는 그저 그가 아무하고나 대충하는 결혼이라 관심이 없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대화를 토대로 이끌어 낸 결론은 그가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그때의 그는 아마도 회의를 느꼈던 것 같았다. 들은 이야기를 종합 해보면, 자신과 결혼을 하기 전 스스로 결혼을 하겠다고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놨던 서준의 상대자는 희주라는 이름을 가진 보잘 것 없는 배경의 여자였던 듯 했다. 아마도 식구들이 돌아가며 여자를 만나서 그와 헤어지라고 협박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잔뜩 겁을 주기도 했을 것이고, 얼마면 되겠느냐고 돈으로 회유도 했을 것이다. 남아도는 게 돈이니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다 어찌 어찌해서 여자가 돈을 받고 헤어졌을 테고, 집에서는 것 봐라, 사랑이 아니라 돈이었다고 안 그래도 화가 나 미치기 직전의 상태였을 서준의 속을 뒤집었을 것이다.
그렇게 망가진 속인데, 사랑 따위가 무슨 소용이었겠는가. 누구면 어떻고 아무나면 또 어떻겠는가, 그냥 하면 되는 게 결혼이었을 텐데. 그러지 않고서야 채 한 시간도 마주하지 않은 여자와 만난 지 채 한 달도 지나가기 전에 식을 올릴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결혼이 진행되는 내내 무관심했던 그의 행동들이 이제야 채희는 이해가 갔다. 순간 짠한 마음이 들었지만 채희는 그냥 픽 하고 웃어넘겼다. 이 남자 인생 참 안됐다, 오해이긴 할 테지만 어쨌건 사랑하는 여자는 돈에 눈이 먼 여자였고, 그런 여자 피해 결혼한 여자는 돈 때문에 팔려 온 거나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채희는 가방 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냥 저절로 외우게 된 서준의 번호를 망설임 없이 꾹꾹 눌렀다.
“저예요.”
짧게 신호음이 가는가 싶더니 그가 전화를 받았다.
“응.”
“오늘 일찍 들어 올 건 지 몰라서…….”
“글쎄, 일이 끝나는 대로 들어갈 생각이긴 한데?”
그도 잘 모르겠다는 말투였고, 갑자기 그건 왜 궁금하냐는 물음이었다.
“오늘 어머님도 늦는다고 하시고, 아버님도 안 계시니, 저녁은 당신 좋아하는 걸로 준비할까 해서요.”
안쓰러운 마음 때문인지 대꾸하는 채희의 말투가 꽤나 나긋나긋했다. 게다가 여태 생각지도 않았던 말들이 툭 튀어나와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바로 어제까지는 그가 일찍 오건 늦게 오건, 밥을 먹고 오건 굶고 오건 채희의 관심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 있어?”
그도 좀 이상했나 보다.
“일은 무슨. 혹시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어요?”
“난 늦을지 모르니까 신경 쓰지 말고, 당신 편할 대로 해.”
“아, 그…….”
그래도 뭐 생각나는 거 없냐고 물을 참이었다. 분명 전화가 뚝 끊기지 않았어도 채희가 닦달을 해 가며 원하는 걸 말하라고 들들 볶았을 테지만 용건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틈도 주지 않고 서준이 전화를 뚝 끊어 버렸기 때문에 채희는 하려던 말을 끝맺지 못했다. 뭐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누가 전화를 걸었건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 버리는 데 익숙한 사람이니 말이다. 채희는 핸드폰 폴더를 덮고 옷장에서 가볍게 입고 있을 수 있는 옷을 꺼냈다.
이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건, 어떤 느낌이었을까?
이 남자는 대체 어떤 사랑을 줬을까?
채희는 두 가지 물음을 꺼내 든 채 또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피식 웃으며 생각을 멈췄다. 답은 찾을 수도 없는 물음이기도 했지만, 또 찾는다 해도 쓸데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근데, 왜 혜원이 아닌 자신과 결혼을 했을까? 혜원은 서준이라면 좋아 죽는시늉이라도 할 테고, 집안끼리 잘 알고 지내는 데다, 혜원과 서준이라면 서로 잘 어울리기까지 했을 텐데 말이다.
또 다른 생각으로 빠져들던 채희가 크게 한 숨을 토해 내며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그만 하자는 생각에 도리질을 치는데 삐빅하고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정말 어쩌다 한 번 오는 문자 메시지가 온 모양이었다. 물론 그 어쩌다 한 번 오는 문자는 잘 못 보내진 문자이기도 했다. 그 탓에 문자는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긴 했지만 채희는 도착하는 문자는 바로 확인을 하곤 했다. 자신에게는 쓸데없는 것이지만 보낸 사람 입장에서는 중요한 것일 수 있기 때문에 내용을 보고 중요하다 싶은 생각이 들면, 문자 잘 못 보냈다는 답을 보내 주기 때문이었다.
<잘 들어갔죠? 저도 잘 들어갔습니다. 통화 곤란 하실까 봐 이번에만 문자 보냅니다.>
역시나 잘 못 온 메시지였다. 채희는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잘못 보냈다는 메시지를 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됐던 탓이었다. 그러다 그다지 중요한 내용인 것 같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삭제 버튼을 눌러 메시지를 지워 버렸다. 다음에는 전화하라지 뭐. 시큰둥한 생각을 하며 채희가 꺼내서 들고 있던 옷을 갈아입으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핸드폰이 다시 한 번 삐빅하고 짧게 울렸다. 또 잘 못 온 메시지라고 생각한 채희는 급할 건 없으니까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는 생각에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후에야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 저 명원재 입니다. 잘 못 받은 메시지 아니라구요. 그럼.>
메시지를 확인 한 순간, 택시 문까지 열어 주는 것으로 모자라 행선지까지 말하고는 요금까지 미리 내주고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건네던 남자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아마 모르긴 해도 차번호까지도 체크를 했을 것이다. 어떻게 번호를 알았냐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과 동시에 그가 자신의 핸드폰을 찾겠다며 잠깐 핸드폰을 빌려 갔던 것이 생각났다.
씨익, 저도 모르게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결국 핸드폰을 빌려 간 건 핑계였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채희는 아까는 감사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내려다 말았다. 그리고 받은 메시지도 망설임 없이 삭제했다.
쓸데없는 인연은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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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간단히 말하자면
결혼이 끝은 아니니까. '그리고'가 있잖아. 라는 생각에서.
근데, 이상하다고 혼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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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이 지금 쓰면서 조금 바뀌고 있;;;
혼란스러우셔도 그냥 앞 부분은 대충 저런 설정이라고 생각해 주세요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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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끼 대사에 한 번 쭈욱 보니, 정말 느끼 대사..ㅋㅋ
그럼 저도 남주를 주진모로 생각하고+_+/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결혼전 내용도 얼른 보고 싶네요
매일 한편씩 보는 재미가 있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