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하루 이틀 일이 아니잖아. 그리고 넌 아키가 보통 여자라고 생각해?”




 “아니.”




 그게 문제인 것이다. 아키텐 유스타니아는 보통 여자가 아니다. 한심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마히르를 향해 펜릴은 객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알면서 그 짓을 하셨습니까 황태자 저하?”




 “정확히 말하면 ‘아니까’ 그 짓을 한 거지. 그렇지만 이런 기분까지는 예측하지 못했다고 할까.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이런 기분을.”




 마히르는 술잔을 입에 가져가는 척 하면서 펜릴의 표정을 살폈다. 뭐라도 씹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펜릴의 모습에서 그는 일말의 안도감을 느꼈다.




 “똥 밟은 기분인 거지. 사촌 정도의 조건으로 퇴짜 맞기가 쉽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우리 누나라서가 아니라 아키는 사촌만큼이나 조건이 좋아. 그러니까 기분 나쁘더라도 계속하고 싶거든 계속 하고, 여기서 빈정 상했으면 적당히 그만 두고. 뭐 그만 두면 또 한 동안 시달리긴 하겠군. 지난번에 청혼말로 귀찮게 굴었던 게 재무성 차관이었나...?”




 “시끄러워. 안네 프랑카만 생각하면 머리가 돌아버리겠다고. 아는 거라곤 그저 올해 드레스 색 유행하고 새로 바꾸는 머리스타일에 대한 것뿐인 여자를 어떻게 황태자비로 들인다고.”




 “귀찮게는 안 할테니 그것도 나쁘지 않아. 오히려 집안을 믿고 정치적 색을 띄는 여자들 보다는 백배 낫지. 강아지처럼 먹이를 주고 강아지처럼 쓰다듬어주면 알아서 재롱부리고 알아서 구석에 처박혀 있을 테니까.”




 “그럴 지도 모르지.”




 펜릴이 술을 단숨에 목구멍 너머로 넘기며 말했다. 황태자비. 장래 황후의 자리라는 것은 힘든 자리이다. 황제의 동반자가 되어 줌과 동시에 각종 연회나 외국 사신들과의 자리에서 황제의 옆을 든든하게 지키며 나라의 안주인 노릇을 해야 한다. 그리고 또 그것과는 별개로 나서지 않고 적절한 수준에서 자리를 지키며 황제의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한다.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한다기보다, 척을 지면 안 된다는 말이 더 옳겠지만.




 훌륭한 황후의 가장 좋은 예가 되었던 것이 펜릴의 어머니인 레이나였다. 집안만으로도 나라를 통째로 집어 삼킬 수 있다는 유스타니아가의 직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단 한 번도 파벌을 만들거나 정치적 요소가 섞인 발언을 입에 담지 않았다. 조용하고 차분했으며 황실 내부를 잡음 없이 다스리고 집안사람에게 이득이 되는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현직 총리가 친언니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만남은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을 정도로 적었고 공식 석상에서도 필요이상 자리를 함께하지 않는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반면 아직도 관리 대상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 펜릴의 계모인 아이라 크란웰. 현 크레이안의 황후였다. 죽은 레이나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황제였던 만큼 그녀의 죽음을 오랜 시간 애도하고 있던 황제가 고른 것은 황제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보수파의 일원인 크란웰가의 차녀였다. 사랑보다는 권력과 정략에 가까운 결혼이어서 였을까? 아이라는 처음부터 정치색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급기야 그녀의 친정에선 반란까지 획책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 반란이 성공적으로 진압된 이후, 현재 그녀와 그녀의 어린 아들은 황실의 온갖 감시의 눈을 받으면서 쓸쓸하게 지내고 있었다.




 황후의 극과 극을 직접 보고 체험한 펜릴이기에 황태자비를 고르는데 신중할 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와 압박감으로 인해 아키를 보루 삼아 시간을 벌고 있는 것도 분명해 보였고. 그런데 이렇게 직접 보니 정말...




 웃겼다.




 무슨 취급 받는지 알면서 일을 벌여놓고는 자존심 상한다고 어린애처럼 투덜거리는 꼴이라니. 게다가 그가 청혼을 한 상대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황실을 집어 삼킬 수도 있다는 유스타니아가의 수장이고 차갑기가 한겨울 냉풍보다 더한 아키텐 유스타니아란 말이다. 그런 여자한테 기대할 걸 해야지.




 하지만 이 상황에서 재미있다. 라고 이야기 했다가는 황실 권위를 무시했다는 죄로 즉결 사형될 지도 모르니, 속으로만 웃음을 애써 참고 있는 마히르였다.


 


 아이고. 왜 이렇게 웃기지?




 “너 그 실실거리는 표정은 뭐야?”




 도끼눈이 된 사촌이자 황태자를 보는 마히르는 애써 웃음을 가라앉히고 말을 돌렸다.




 “신혼의 전형적인 모습이지 뭐긴 뭐겠어. 아침에 에린의 나이트가운 입은 모습을 보는 건 말이지...”




 “꺼져.”




 날카로운 사촌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히르는 내심 즐거워했다. 모든 일에 여유 있어 보이는 사촌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듣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펜릴이나 아키를 오래 지켜 봐 온 그의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두 사람의 밀고 당기는 모습은 꽤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될 터였다. 지금 그가 본 바에 의하면 펜릴이 좀 밀리는 것 같지만.




 “아내의 속옷차림은 혼자 있을 때 생각하고 하멜른 영지의 소식이나 좀 알려줘.”




 “아직 외부 세력이 끼어든 것 같지는 않아. 하지만 언제든 여지는 있지. 크란웰가가 완전히 무너지진 않았으니까.”




 이런 점이 펜릴다웠다.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도 금새 군주의 모습을 보이곤 한다. 싫은 일이라고 피해 가진 않았다. 잠시 미뤄둘 뿐.


 “기는?”


 


 “잘 뛰어놀고 있어. 건강도 좋은 편이고. 다만 아이라님이 아직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신 모양이야.”




 “새어머니는 워낙 심약하신 뿐이었으니까. 크란웰 후작이 새어머님께 마지막까지 거사를 비밀로 했던 것도 이해가 가. 그런 엄청난 소식을 알게 되셨다면 숨기다가 결국 기절하셨을 분이니까.”




 “조만간 폐하가 주치의를 보내실 거 같아. 어쨌든 그 쪽은 평온해. 그 쪽과 관련 없이 새 소식이 하나 있는데 들어보고 싶어?”




 이쯤해서 떡밥을 던지는 게 좋겠지. 아까 보였던 날카롭게 날 선 모습이 워낙 재미있어서 마히르는 약간의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마히르입니다... 그리고 실제 성격도 여기에 조금 가까울 지 모르겠군요; (이런 거 보며 즐기는 면이...)

  다음편은 1월에 올라갑니다...;;; (응?;)

 


댓글 '2'

mirage

2007.12.04 09:39:44

이게 얼마만에 읽어보는 그의 청혼 입니까~
작가님 여기서 끊어주시면 어쩌십니까~=.=
다음편은 1월이라...어여 써주세요~

crescent

2007.12.05 00:19:31

뒤에 분량이 정말 개미 다리에 솜털만큼 더 있긴 하지만... -┏ 정말 개미 다리에 솜털만큼이라 적당히 끊었구요; 원래 이거 쓸 때의 계획이 한 달에 한 편;;; 그러니까 1월까지 기다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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