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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기 아키 언니가 있네."
동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펜릴은 그 곳에서 아키텐의 모습을 발견했다. 항상 관복을 갖춰 입던 그녀였지만 동생의 결혼식을 의식해서인지 연녹색의 하이 웨이스트 타입의 야회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햇살이 그녀의 엷은 금발에 비치고, 차분하고 고전적인 옆모습은 마치 여신의 환영 같았다. 펜릴은 눈을 비볐다.
"오빠?"
"캐리. 저 사람 누구지?"
"누구라니?"
캐롤린 레이나 크레이븐. 크레이안의 제 1 황녀이자 펜릴을 25년동안 봐온 여동생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사람에 대해서는 최고의 기억력을 자랑하는 오빠가 약 15년간을 봐온 사촌 언니에게 누구냐고 묻다니.
"저기 저 연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 말이야. 그 치마가 종처럼 생긴 하이 웨이스트 드레스 말이지."
"그러니까 그 사람을 왜 누구냐고 묻냐고?"
"아. 그게."
"아키 언니잖아. 오빠 사촌. 오빠의 아카데미아 동창생. 현 유스타니아 가의 가주이자 39대 유스타니아 공작. 재무성 1급 서기관. 아키텐 프로미넌스 유스타니아."
저게. 아키라고?
펜릴은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금발. 차분하고 절제된 미소. 우아하게 파티장을 누비는 장신의 여자는 그가 알던 아키가 아니었다. 사람이라기 보다는 여신에 가까운 사촌이자 친구를 보자 갑작스럽게 펜릴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오빠?"
캐롤린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펜릴을 불렀지만 그는 동생을 돌아보지도 않고 천천히 아키에게 향했다.
"아키?"
"네 전하."
딱딱하고 절제된 목소리를 듣자 정신이 들었다. 이 사람은 아키였다. 캐롤린이 잘못 본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키가 아니었다. 그가 15년을 봐온 아카데미아 동창에게, 그리고 비슷한 위치에 있어서 항상 동료애가 느껴졌던 사촌에게 이렇게 가슴이 뛸 리가 없었다.
"전에 물은 일이 있었지? 나중에 정말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보이면 어떻게 할 거냐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물은 것은 낭만적인 성격의 앨리스였다. 펜릴이 쿡 웃더니 고개를 돌렸다.
"묻지 않았던가? 섭섭한데."
"섭섭까지야."
아키는 심호흡을 하며 어렵게 한 발짝을 떼었다. 예식용으로 입은 이 드레스는 발목까지 덮는 스타일에 치마가 타이트하게 붙을 뿐만 아니라 치마 끝자락이 종처럼 퍼지게 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걷기 무척이나 불편한 드레스였다. 거기에 평소 공무용 스커트 차림이 아니면 거의 치마를 입지 않는 아키에게야 이를 말이겠는가.
"불편해?"
"아닙니다."
하긴 불편하다 해도 겉으로 표현을 할 아키가 아니다. 펜릴은 아키를 흘끗 바라보았다. 항상 목 끝부분까지 단정하게 유지하던 단발을 오늘은 깔끔하게 빗질해 묶어서 양쪽으로 땋아 고리 모양으로 만들었다. 때문에 평소라면 드러나지 않을 작고 귀여운 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지 몰라도, 그 작은 귀에 큰 장식을 한다면 귀의 귀엽고 앙증맞은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못할거라는 기특한 생각을 한 것이 틀림 없었다. 그녀의 작고 귀여운 귀에는 눈물방울 모양의 수정이 긴 줄 하나를 두고 매달려 있었다. 귀엽고 작은 귀 아래로 작은 수정이 달랑거리는 것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 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나?"
"글쎄요."
잠시 반말을 주고 받던 학창시절의 편한 사이로 되돌아가나 했더니, 금세 존댓말로 변해버렸다. 순간의 편안함이 사라지는것을 아쉬워하던 펜릴은 아키의 앞으로 돌아왔다.
"황태자 저하?"
"그 때 내가 뭐라고 했었냐면, 이렇게 이야기 했지. 난 당신이 정말 좋아. 그러니까 계속 내 옆에 함께 있어 줬으면 좋겠어."
"그..."
"아키."
크레이안의 황태자이자 현 황제의 장남, 그리고 지난 5년간 계속 혼인 압력을 교묘하게 피해왔던 이 젊은 남자는 그 날 사촌이자 크레이안 3대 개국 공신 가문 중 하나인 유스타니아 가의 수장인 젊은 공작에게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난 네가 정말 좋아. 그러니까 계속 내 옆에 함께 있어 줬으면 좋겠어."
그 날은 아키텐의 동생 마히르의 결혼이 있던 날이었고, 그 드문 경사에 크레이안의 유력 집안 사람들은 다 모여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모든 이의 관심과 축복을 받아야 마땅할 신랑신부는 그 순간 찬밥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남자의 연녹색 눈동자가 여자를 응시하며 반짝였다. 내밀어진 손은 잡히지도 거두어지지도 않은 채 계속 허공에 떠 있었다. 이런 극적 상황에서 여자가 한 말은 이랬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내일 오전으로 예정된 원로원 회의에서 빠지시진 못하실 거에요. 그리고 오늘 피로연의 주인공은 신랑신부이니 이 과한 관심의 시선을 그 분들께 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내밀어진 그 손을 무시한 채, 파티장 구석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덩치 큰 남자에게 다가갔다.
"당숙. 아직 저와 춤을 추시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 덩치 큰 남자는 현 총리의 남편이자 한 때 크레이안을 주름잡던 격투가인 게일 롱바텀이었다. 눈치 없고 매너 없기로 소문난 남자였지만 그 날은 어찌 된 일인지 주변을 한 번 쓱 둘러보고는
"어, 그런가?"
라고 한 마디 하고는 방금 관심의 중심이 된 조카의 손을 잡고 악단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와 동시의 장내의 관심은 연주와 신혼부부에게 다시 집중되었다.
모든 일이 이것으로 끝났다면 적어도 아키텐에게는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배달된 베고니아 꽃과 함께 날아든 카드에는 이렇게 써 있었던 것이다.
'난 네가 정말 좋아. 그러니까 계속 내 옆에 함께 있어 줬으면 좋겠어.
- 펜릴 -'
뭐하자는 이야기일까.
아키가 카드를 깔끔하게 접어 폐휴지통에 넣으며 생각했다. 일단 그녀는 황태자인 펜릴을 상관이나 가까운 사촌, 친구 이상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녀는 이미 작위와 집안의 수장 자리를 상속받은, 명실상부한 유스타니아 가문의 39대 공작이자 가주였고, 일단 그렇게 집안의 수장인 이상은 집안을 이을 후계자를 낳아서 다음세대를 도모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 때문에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은 그녀의 가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가문을 버리고 그 후계를 그녀의 가문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 점은 황태자인 펜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 오히려 황실을 이을 후계자로서 그의 반려가 될 태자비감은 그녀의 남편감보다 맡아야 할 짐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무언가를 책임진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누구보다도 아키텐의 입장을 잘 알고 있을 펜릴이 그런 식으로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차라리 그녀가 집안을 이을 걱정이 없는 귀족 처녀, 아니 교육받은 일반 아가씨라고 해도 황태자의 청혼을 잠시나마 고려해 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가문을 물려받았고 책임지고 이어야 할 의무까지 물려받은 상태였다.
"꽃이 되돌아왔어."
"그럼 뭘 바랬어?"
되돌아온 베고니아 꽃바구니를 능숙하게 해체, 수반에 다시 꽂아놓으며 캐롤린이 무심하게 말했다.
"아니... 그래도 이런 반응은 웬지 의외라고 할까..."
펜릴이 베고니아 꽃잎을 만지며 김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오빠를 반쯤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캐롤린이 말했다.
"뭐 이 확실하고 간단 명료한 의사표시가 오히려 아키 언니 답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보다 더 확실하고 간단하게 아키 언니의 의사를 표현할 수는 없을거라고 생각하는데. 아 오빠, 이파리에서 손 좀 떼. 아버님 침실에 놓을 건데 손 때 묻는단 말이야."
확실히 동생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아키는 모든 일에 있어서 체계적이고 확실하고 간단한 처리방식을 선호했고 꽃을 그대로 돌려보낸 건 아키의 의사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꽃은 돌아왔으되 카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꿈 깨셔."
캐롤린이 간단하게 말했다.
"아키 언니라면 분명히 카드를 네 번 접어서 폐휴지통에 넣고 잊어버렸을 거야. 그나저나 오빠. 왜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한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키 언니가, 그것도 작위와 책임을 물려받은 다음에 오빠 청혼을 받아들일 리가 없잖아. 하려면 5년 전에 했어야지."
이번에도 동생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누구보다도 책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아키였다. 5년 전에 했다면 어쩌면 먹혔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5년 전엔 지금같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뭐든지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오빠."
지당하신 말씀이다. 동생이 계속 일리 있는 말만 해서 그는 좀 부아가 치밀어오르려 했다. 하지만 그는 나름대로 타이밍은 기가막히게 맞췄다.
"나름 괜찮은 타이밍이긴 했네."
방금 꽂은 베고니아를 뽑아 반대쪽으로 옮기며 캐롤린이 무심하게 말했다.
"적어도 면전에서 거절당하는 불운은 면했잖아?"
펜릴도 아키도 나름 귀엽네요. 어떻게 꼬이고 풀리는지 두근두근 거립니다.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