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오만의도시(Tower of Haughtiness) :: Chapter 1 Neo-Chinatown >



“명확하고 깨끗한 것만 존재할 수 있는 건 아니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붉은 해가 녹색 하늘을 파랗게 물들이는 저녁,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듯한 차 한 잔과 함께하던 순간이었다. 페이는 리를 마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마천루 아래로 숨어드는 해를 응시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어째서일까.”

“어떤 생각이었어?”

“글쎄. 어떤 생각이었을까.”

페이는 작게 한숨을 쉬며 읽던 책을 덮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소복하게 피어올랐다. 꽤 오래된 고서적으로, 책을 통째로 먼지가 가득 쌓인 양동이 안에 담가 10년쯤 삭힌 것 같이 낡아 있다. 표지에는 요즘에는 쓰이지 않는, 글자 획의 모서리가 각이진 딱딱한 서체로 [ㅜ주 기ㅊ과학 이론]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몇몇 글자들은 책표지에 남아있기가 지루했던지 세월의 흐름 속으로 여행을 떠나 버려 지워져 있었다. 리는 표지의 글자들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한자와는 전혀 다른 글자였다. 오래 전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문자.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 문자의 이름은 리도 알고 있었다.

“이거... 한글이잖아? 보나마나 금서일 텐데, 어디서 또 잘도 이런 책을 구했구나.”

“응.”

교황청이 치세하는 지금 세상에서, 구시대의 반신론적 유물들은 대부분 금기시되는 것이 당연했다. 운이 없으면 이단이니, 마녀니 하는 것으로 몰려 화형에 처해지는 경우도 빈번했다. 문제는 그러한 교황청의 행사가 현실과는 전혀 다른, 공중에 붕 뜬 곳에 있다는 것이다. 이미 신성(神聖)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세상도, 교황청도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아담과 이브과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비록 과거의 지식들을 대부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거야? 그럴 리는 없겠지만, 우리 집은 성찰(聖察)이라는 명목으로 조금만 뒤져도 이단이라는 증거가...”

“한 백 개는 가볍게 나오겠지. 당장 네가 앉아있는 의자만 해도 플라스틱제잖아.”

페이의 지적에 리는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이 앉아있는 동글동글한 푸른색 의자를 내려다보았다. 반쯤 농담에 가깝기는 했지만, 교황청의 금지품목 중에는 인공 화학합성품도 포함된다. 삶에 필요한 것은 오직 자연에서 얻으라, 는 지나치게 자연 회귀주의적인 발상의 어디가 그들이 말하는 신성이나 이단과 관련이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장 그들의 서류업무에 쓰이는 볼펜조차 플라스틱제임에도 아직까지 그러한 설파는 계속되고 있었다. 

“아무리 더 이상 우주로 나갈 수 없다고는 해도 이미 태양계를 벗어난 적이 있는 인류에게 그런 고대의 양식을 지키라니. 어떤 면에서는 감탄이 나올 정도랄까.”

“고대가 아니고 중세야.”

거대한 회색빛의 도시. 온갖 것이 녹아들어 들끓는 마녀의 솥단지처럼-이 표현도 이단이다-한데 뒤섞여 버린 장소. 극도로 퇴색한 종교와 발전하다 부서져버린 과학이 마치 억지처럼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공존하고,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이런 세상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걸까?

“지나치게 감상적인 생각인가.”

“또 그런다. 혼자 생각하다가 한마디씩 툭툭 내뱉는 거.”

주전자에 찻잎을 좀 더 넣고 끓인 물을 붓던 리가 새로 끓인 차를 찻잔에 부어 페이의 앞에 두면서 투덜거렸다. 리가 집 뒤의 작은 텃밭에서 직접 키운 철관음이다. 더불어 페이가 가장 좋아하는 차이기도 했다. 페이는 한 팔을 턱에 괴고 다른 팔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찻잔의 까끌까끌한 감촉. 담백한 철관음 향.

“향이 좋구나...”

“걸레에 구정물을 말아놓은 것 같은 비에도 조금만 신경 써주면 차는 깨끗하게 커.”

“아... 음.”

리의 말에 갑자기 눈앞의 차가 걸레를 말아놓은 구정물이 될 리는 없지만, 페이는 작게 신음했다. 눈앞에 차가 있는데... 리가 부리는 심술이다. 페이의 낭패한 모습에 리는 1세트 겟, 이라고 중얼거리며 씩 웃었다.

“이만 마실래.”

“어라, 기분 상한거야?”

“아니. 단지 차를 마실 때는 정신도 정갈하지 못하면 예의가 아니니까.”

“엉터리 다도론.”

확실히 평소에는 차는 제 좋을 대로 마시면 그만이라고 말해놓고는 이럴 때만 고상한 말로 쏙 빠져나가기는 어려운 법이다. 결국 페이는 두 손을 과장되게 번쩍 들었다.

“살려주세요.”

“킥, 괜찮아. 괜찮아.”

리의 긴 갈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웃음과 함께 이리저리 흔들리다 가라앉았다. 이제 해는 거의 져서 창 밖으로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페이도, 리도 침묵했다. 대화 중간에 생기는 침묵. 대화를 하지 않고도 불편하지 않다면, 그것은 상대가 자신에게 아주 편안한 사람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리는 조용히 눈을 감고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채로 자신만의 생각에 빠진 채였고, 페이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그런 리를 바라보았다. 미추의 판단은 극히 주관적인 것이지만, 페이는 리가 무척 단아하다고 생각했다. 아름답다, 라는 너무나 흔해빠진 표현보다 그쪽이 훨씬 더 리에게 어울린다. 아름다움이란 반드시 외형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대게 분위기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오감으로 느껴지는 상대에 대한 모든 정보의 총합으로 내려지는 결론이다.

단정한 걸음걸이, 상냥한 말투,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 일상으로 접하고 있음에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차림과 행동. 작은 동작에도 드러나는 것들로, 쉽게 말할 수는 있지만 일상을 그렇게 행동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대게 그러한 자기절제는 오랜 시간의 훈육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마련이지만, 그러한 환경에서 생활하지 않아도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게나마 있기 마련이다. 리는 그런 드문 사람 중 하나였고, 그것은 리가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요소 중 하나였다. 

페이는 슬슬 짙어지는 어둠에 창문을 닫았다. 페이와 리가 사는 금릉로(錦綾路)는 네오 차이나타운의 다른 구역에 비해 비교적 덜 험악한 편이지만, 밤에 바깥에 있거나 집단속을 허술하게 한다면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것은 다른 구역과 매한가지였다. 입으로만 교리를 설파하는 교황청은 결코 그들의 신자를 지켜주지 않는다. 그들이 무거운 엉덩이를 드는 것은 성금을 긁어모으거나 이단을 상대로 성벌을 발동할 때뿐이다. 주는 것 없이 가져가기만 하는 것은 고래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지배계층이 공통적으로 가져왔던 행태였다. 

해가 완전히 진 하늘은 진녹색으로 빛났다. 붉게 물든 달과 별은 하늘 전체에 걸쳐 빛나는 녹광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물을 타지 않은 농도 짙은 유채물감을 그대로 섞어버린 듯이 갑갑한 느낌의 하늘이다. 페이와 리는 아무 말 없이 녹색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전에는 밤하늘이 검었다고 해. 별들은 은색으로 반짝이고, 달도 하얀 백광을 조용히 지상에 뿌린다고. 그러면 마치 검은 비단에 점점이 흩어진 보석이 빛을 발하는 것처럼, 아주 아름다운 광경이었겠지?”

“검은 밤하늘... 상상이 가지 않는걸.”

“나도 실감이 나진 않아. 그도 그럴게, 한 번도 보지 못한걸. 하지만...”

페이는 뒷말을 삼켰다. 느낌을 온전하게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럼에도 말로 내뱉어버리면 오히려 마음속에 담아둔 것을 부수는 경우도 있다. 리도 그것을 아는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페이.”

“응?”

“우리가 살아서, 옛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검은 밤하늘을 볼 수 있을까? 페이가 말한 것처럼, 은빛 보석이 점점이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하늘을.”

리의 질문에 페이는 잠시 침묵했다. 하늘은 녹색이다. 이것은 페이와 리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그랬던 사실이고,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전에 하늘을 검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또 관심도 없었다. 페이는 가만히 리의 손을 잡고 침대로 이끌었다. 리는 잠자코 페이가 이끄는 대로 침대로 들어갔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아주 옛날에, 적어도 우리가 태어나기 전보다 훨씬 이전에, 인간들이 지구의 모든 환경을 조절하고 우주로의 운행을 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데.”

“하늘을 정복해서, 그래서 신이 노해서 모든 과학문명이 사라지고, 그리고 음... 교황청은 그렇게 말하지만, 우스운 이야기잖아. 신이 있다고 해도 인간 같은 건, 인간들이 사는 세상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을걸. 초라하고, 볼품없고, 서로 싸워대기만 하고. 땅을 더럽히고, 물을 오염시키고, 숲을 베어버리고, 산을 무너뜨려. 과학문명이란 게 사라지기 이전과 지금, 인간들은 무엇이 변한 것일까.”

“하지만 인간들이 모두 초라하지는 않아.”

리, 네가 있는 이상은. 페이는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앗, 그러고 보니 페이. 대답 안했어. 아까 내 질문.”

잠시 말을 멈추었던 리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페이를 추궁했다. 페이는 한 손으로 리의 손을 마주잡은 채로 천천히 이야기했다. 

“인간들이 아직 과학문명을 잃기 전, 커다란 전쟁이 있었데. 어째서 일어난 건지는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그 전쟁은 지금처럼 창칼을 들고 서로를 죽이는 수준이 아니라, 별마저 부숴버릴 정도로 큰 전쟁이었다고 해. 그리고 그 전쟁이 끝났을 때, 더 이상 사람들은 검은 밤하늘을 볼 수 없었데. 깨끗한 공기는 사라지고, 땅과 물과 대기는 오염된 채로 남겨졌고, 그들이 자랑하고 전쟁에 이용했던 과학문명은 대부분 파괴되어 버렸어. 날개 없이 탑을 쌓고 쌓아 하늘에 도달했던 옛 사람들이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신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든 탑을 스스로 무너뜨려 다시 땅에 떨어졌을 때, 역시 그들이 본 것은 어땠을까? 나도 알 수 없어. 하지만 하나는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아.”

페이는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은, 다시 한번 예전의 하늘을 보고 싶었을 거야. 분명히.”

바벨. 인간들이 신에 도전하기 위해 지은 오만의 탑. 하지만 페이는 그것을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해석하는 교황청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이 대신약, 또는 개신약 성서라고 주장하는, 구약과 신약에 이은 새로운 성서에는 두 번째 바벨탑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하지만 성서의 내용과는 달리 페이는 신이 인간들에게 신벌로서 대재앙을 내린 것이 아니라 인간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이룩한 문명을 기반으로 한 전쟁에서 스스로 그 기반을 부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개신약은 그것을 극히 종교적인 관점에서 기록한 것이고. 사람은 아무것도 없어도 타인을 죽일 수 있고, 시간이 걸릴지언정 숲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우주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기술력을 손에 쥔 채로 전쟁을 벌였다면, 이 세상을 뒤바꿀 정도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았으리라. 

또다시 이야기를 하다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페이는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리는 페이의 한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 쥔 채로 잠들어 있었다.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다 지쳐버린 것일까. 페이는 조금의 미안함을, 그리고 조금의 안도감을 느꼈다.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연 검은 밤하늘을 볼 수 있을까? 페이가 옛날의 밤하늘이 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오래된 고서적을 통해서였고, 그것을 리에게 이야기해 준 것 역시 자신이었다. 하지만 한번 변해버린 하늘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올까에 대한 대답은 페이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라고.

“그래도 세상에 사람들이 계속해서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 때를 살아가는 아이들은 이렇게 말하겠지. 아주 옛날에, 별들마저 부서지는 큰 전쟁 때문에 밤하늘이 짙은 녹색으로 물든 적이 있었다고.”
  
이윽고 페이의 혼잣말도 잦아들었다. 어둠이 깔린 집 안에는 두 아이의 조용한 숨소리만이 들려왔고, 그것은 녹색 하늘에 다시 해가 뜰 때 까지를 기약하는 기다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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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군 복무중이라 자주 올리기는 힘들지만 꾸준히 연재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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