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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의도시(Tower of Haughtiness) :: Prologue >
거대한 채광창 너머로 지는 석양을 한 노인이 바라보고 있었다. 창 아래로 펼쳐진 것은 지평선까지 끝없이 펼쳐진 건물들의 연속. 우울한 회색, 검은색의 건물들로 이루어진 차가운 마천루 위를 지는 해와 저녁놀을 받아 진홍빛으로 물들어 하염없이 하늘을 떠도는 구름들. 그 아래에 펼쳐진 것은 과거의 존재했던 거대도시 메트로폴리탄을 훨씬 능가하는 끝도 없는 인간들의 성전이었다. 지구라는 행성의 표면적 20%를 차지하는 초거대도시인 테라 시티(Terra City)에서도 가장 크고 높은 건물, ‘바벨’의 꼭대기에, 노인은 서 있었다. 신을 향한 인간들의 도전, 그 욕망과 아집의 상징. 하지만 욕망이야말로 진정으로 인간의 본성이기에, 신을 깔아뭉개고, 당당히 천국을 부순 파괴자들의 오만할 수 있음을 나타내느니.
위로 올라가는 것이야말로 인간들의 욕망. 그것이 비록 다른 인간들을 짓밟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주저하는 것은 알량한 자기위선일 뿐.
노인은 투명한 얼음이 들어있는 크리스털 잔에 와인을 부었다. 투명한 크리스털과 투명한 얼음조각 사이를 투명한 액체가 채워나갔다. 지금 노인이 들고 있는 화이트 와인 한 병은, 이제 저 테라 시티의 가장 아래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몇 대를 이어가며 일한다 하더라도 살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우습게도, 우주로 진출한 후 인간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실행되었던 테라포밍이 지구에서 실행되었다. 지구를 지구화시킨다? 아니, 결코 우스운 일이 아니다. 바닥난 자원, 오염된 대기, 독성이 가능한 대지와 바다, 태양광을 차단하는 먼지, 가스구름층. 테라포밍이 완료된 지 백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지구 표면적의 30%는 생물이 살지 못하고, 나머지 지역도 대부분 대기에 유독성분을 포함하고 있다. 애초에 지구에 실시된 테라포밍의 주 계획은 행성내부의 원활한 태양광 수급이었다. 때문에 대기의 정화에 그 목적이 맞추어져 있었고, 덕분에 바다와 대지에는 아직도 오염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부유한 자들은 환경정화시스템과 인체복제 기술을 이용한 대체육신, 그리고 뇌의 수명을 유지시키는 정신유지기술의 혜택을 입어 불사에 가까운 삶을 거머쥐었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병마와 독성으로 무너져 가는 몸과 싸우면서 종내에는 싸구려 기계 몸을 달거나 중금속과 독성성분으로 뒤범벅된 시궁창 속에서 죽어갔다.
현재 지구에서 인공거주지를 제외하면 전체표면적의 7%정도만이 완전 정화되어 있었고, 그곳에서는 이제는 극도의 사치품이 되어버린 자연 상품을 생산해내었다. 곡물, 과일, 야채, 낙농제품, 해산물 등.
노인은 와인과 섞여 돌아가다 잔의 표면에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내는 얼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음은 완전정화수를 사용해 만들어낸 것으로, 가로 세로 2cm정도의 입방체 한 개가 3계급 시민들의 몇 달 임금 정도의 가치가 있다.
노인은 와인 잔을 들고서 창가에서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침대는 원목으로 틀을 짜고 누에를 제배하여 생산해 낸 비단과, 그 안에는 부드러운 새의 깃털로 속을 채워 넣은 최고급품이다. 나무의 가격은 같은 부피의 철보다 백 배는 비싸다. 일일이 누에를 키워 수공으로 생산되는 비단은 그런 나무의 천 배쯤 되는 가격이고, 얼마 남지 않은 조류의 깃털로 만든 이불속 또한 비단보다는 못하지만 역시 비슷하게 비싸다. 물론 합성재료로 만든 면이나 솜 같은 것은 새의 깃털로 속을 채운 비단이불 이상의 안락함을 보장해 줄 수 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자연 생산품으로만 만들어낸 침대는 이제는 구경조차 하기 힘들다.
침대 위에는 한 명의 아이가 앉아 있었다. 작은 몸에는 지나치게 큰 듯한 순백의 블라우스 한 장만을 걸친 아이는 초점 없이 멍한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얇은 옷 한 장 외에 아이의 몸에 있는 것이라고는 목에 찬 은백색의 목걸이가 전부였다. 아니, 목걸이라기보다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족쇄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장식품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는 금속의 고리.
“한 잔 마시겠느냐?”
아이의 시선이 노인의 얼굴에서 노인의 손으로 향했다. 초점이 없는 아이의 검은 눈망울이 크리스털 잔의 조각에 반사되어 이리저리 부서졌다. 노인이 아이를 향해 잔을 내민 채로 잠시 기다렸지만 아이는 아무런 말없이 그저 잔만을 바라보고 있었고, 결국 노인은 잔을 침대 옆에 놓인 작인 원형 테이블 위에 올렸다. 침대 위에 걸터앉은 노인은 손을 내밀어 아이의 뽀얀 볼을 쓰다듬었다. 작은 새나 귀여운 인형을 쓰다듬듯이 부드럽게.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어떤 것도 너처럼 아름답진 않아. 시각적으로 가장 아름답게 보이도록 인체비율을 맞추어도, 잡티 하나 없는 하얀 살결을 만들어도, 언제나 물기 가득한 눈도, 어떤 짓을 해도 사근사근하게 아양 떠는 성격도, 역겹기만 하지. 저 오만의 도시 밖에 보이는 그 어떤 낡고 추한 건물이라도 가짜 유기 화합물 덩어리보다는 나아.”
“유기... 화합물?”
아이가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노인에게 물었다. 아직 남여를 구분하기 힘든, 듣기 좋은 미성에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아이의 입술을 매만졌다.
“그래. 먹고 사는 데는 지나치게 많은 힘을 가진 자들이, 순수한 육체를 가진 인간을 찾아보기 힘들어지자 그런 마네킹을 만들어서 추악한 욕구를 풀어버리려 하지. 어떤 변태 같은 짓을 해도, 언제나 웃으면서 곁에 있어주니까. 살아있는 인간이란 최소한의 자긍심조차도 시궁창에 처박아버린 쓰레기 같은 놈들.”
노인의 무섭게 눈을 번득이며 말하자 아이는 두려운 듯 움찔거리며 뒤로 몸을 빼려 했다. 하지만 노인은 다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아이의 양 팔을 잡고 자신을 향해 끌어당겼다. 아이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힘없이 끌려와 노인의 품 안에 안겼다. 노인은 아직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듯 큰 눈을 깜빡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침대 옆에 놓아두었던 잔을 들었다. 아직 녹지 않은 얼음덩어리와 와인이 진한 주향을 풍기고 있었다. 노인은 잔을 아이의 두 손에 쥐어주었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노인을 바라보았고,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잔을 든 손을 입에 대는 시늉을 했다. 잠시 머뭇거린 아이는 천천히,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채 한 모금 마시기도 전에 인상을 찌푸렸다.
“...써.”
아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잔을 노인에게 떠밀었다. 참으로 어린아이다운 태도. 노인이 술잔을 건네주면 그것에 독이 들었을지라도 비굴하게 굽실거리며 받아드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랐다. 아니,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순수함.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희소성. 이 세상이라는, 시커먼 오물덩어리 속에서 금방 더러워지는 새하얀 백지. 그렇기에, 어떠한 반짝이는 보석보다도 가치 있는 것. 또한 아이의 몸은 완전한 자연체 그대로였다. 한번도 재생술을 받거나 인조물로 대체되지 않았다는 뜻이며, 아이가 태어난 곳도 대부분의 자연 상품이 생산되는, 현 지구에서 가장 깨끗한 곳이었다.
이 세상에서 몇 없는 보물. 그렇기에 아이는 테라 시티를 정중앙에 오만하게 서 있는 탑, 바벨의 주인인 노인의 ‘소유’가 되었다. 몸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철저히 외부와 격리되었으며, 부드러운 아이의 육체가 노화되지 않도록, 긴 시간이 흘러도 정신이 파괴되지 않도록 모든 흐름이 강제로 정지되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노인에게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목에 족쇄가 채워졌다. 자유로움이 무엇인지 자각조차 하지 못한 나이부터 자유를 잃어버린 아이는 그 대신 그 어떠한 인간도 듣지 못한 노인의 부드러운 음성을 들었고, 어떤 실수를 해도 너그러이 용서받았다. 아이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은 순수하게 자연에서 생산된 식품들이었고, 지내는 곳 또한 지구에서 가장 깨끗하게 정화된 장소. 그 안에서 아이는 철저하게 노인만을 위해 존재하는 생명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노인이 아이의 몸을 탐한다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마치 고요하게 한 자리에 머무는 정물처럼, 그러면서도 그 안에 작고 따뜻한 생명이 숨쉬는 지고한 미를 가진 관조물. 아이는 노인에게 그러한 의미였다.
‘너는, 그래. 가장 순수한 존재. 지구 그 자체. 그러니 테라라고 하자.’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말했고 그 후로 그것이 아이의 이름이 되었다. 대지, 곧 지구 그 자체. 그러한 커다란 의미가 담긴 이름으로.
자신이 준 것이 거부당했으나 노인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잔을 치웠다. 그다지 도수가 높지 않은 한 모금의 와인이었지만 어린 아이의 몸에는 강하게 작용했는지 큰 눈망울로 노인을 바라보던 아이는 곧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볼을 작은 손으로 감싸 쥐며 노인의 품 안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깊게 잠이 든 아이를 침대 위에 편하게 눕힌 노인은 고개를 돌려 지평선 아래로 사라져버린 해를 응시했다. 비록 타오르듯 붉을 빛을 뿌리는 저녁 해는 사라졌지만 아직 진홍빛 여운이 남아 하늘과 구름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지상의 거의 모든 것이 인공물로 뒤덮인 지구에서, 극명하게 나뉜 빈부에 상관없이 누구나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자연.
“하지만 허망할 뿐.”
노인은 나른한 목소리로 비웃었다. 인간에게 정복당한 지구와, 비참하게 몰락한 신과,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을. 그리고 그런 인간들의 정점에 서 있는 자기 자신까지도. 그런 노인의 비웃음에서 비켜간 유일한 존재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평화롭게 노인의 곁에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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